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리더의 작은 호의는 은혜가 아니다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9. 10. 15:09

2013년 9월 9일 (월)
리더의 작은 호의는 은혜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리더의 덕목으로 제일 먼저 ‘소통’을 이야기한다. 또 의외로 많은 사람이 리더가 자신들을 자주 접하면서 자잘한 도움을 주는 것이 ‘소통’의 주요 방식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리더는 작은 감동을 주는 일에 매진해서는 안 된다. 작은 감동은 리더보다는 그들에게 더 가까운 부하들의 몫이다. 리더는 한두 사람이 아닌, 전체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것이다.

  옛날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출유(出遊)할 때, 노인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의식(衣食)을 내려주었는데, 그 노인이 말하기를, “원컨대, 온 나라의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내려주소서.”라고 하니, 환공이 말하기를, “과인의 창고 정도로 어찌 온 나라의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두루 혜택을 베풀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어진 마음은 있지만, 정치를 하는 법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자산(子産)이 정(鄭)나라의 재상의 신분이면서 그 수레와 가마를 가지고 진수(溱水)와 유수(洧水)에서 백성들을 건네주었으니, 이는 작은 은혜를 행하였지만, 정치를 하는 법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이 반드시 사람마다 물건을 내려주고, 사람마다 건네주느라 날이 부족할 정도인데도, 백성들에게 미치는 은혜는 도리어 두루 고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고구려의 왕이 굶주린 백성들을 보고 그 의식(衣食)을 지급하고, 나아가 온 나라의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염려하여 마침내 진대법(賑貸法)을 시행하였으니, 그는 이른바 ‘백성을 구휼하는 정치’에 대해 아는 자일 것이다.

昔齊桓公出遊。見老而飢寒者。賜之衣食。老人曰。願賜一國之飢寒者。公曰。寡人之廩庾。安足以周一國之飢寒。是則有仁心而未知爲政也。子產相鄭國。以其乘輿。濟人於溱洧。是則行小惠而不知爲政也。故人君必欲人人而賜之。人人而濟之。日亦不足。而惠之及於民者。反不周矣。今高句麗王。遣見窮民。給其衣食。因念一國之飢寒者。遂立賑貸之法。其知所謂恤民之政者乎。


- 최보(崔溥, 1454~1504), 「고구려입진대법(高句麗立賑貸法)」,『금남집(錦南集)』권1 「동국통감론(東國通鑑論)」

  
  조선 초기의 문신인 최보가 고구려(高句麗) 제9대 임금 고국천왕(故國川王)이 진대법(賑貸法)을 시행한 것에 대해 평한 글이다.

  진대법은 보릿고개 때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추수한 뒤에 돌려받는,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제도였다. 양식이 없어 굶어 죽거나 몸을 팔아 남의 종으로 전락하는 일을 막는 효과가 컸다. 그래서 그는 고국천왕이 정치의 요체를 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반면에 그는 헐벗고 굶주린 노인에게 옷과 음식을 내려준 제(齊)나라 환공(桓公)이나, 겨울철에 자신의 수레를 동원해 백성들을 건네준 정자산(鄭子産)의 행위에 대해서는 진정한 정치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런 일을 담당하는 유사(有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한 것은 차후에 논할 일이다. 결정적인 문제는 그들 정도의 신분이라면, 한두 명이 혜택을 볼 수 있는 그런 방식보다는, 온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더나 정치가가 눈앞의 곤궁함을 보고 자잘하게 은혜를 베풀기 시작하면, 그로 인해 생기는 폐단이 만만치 않다. 한정된 재원 속에서 당장 한쪽에 이익을 주면, 다른 쪽에서는 그만큼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어머니가 우산 장수 아들이 불쌍하다고 비 오기를 기도하면, 짚신 장수 아들은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양(梁)나라 혜왕(惠王)이 희생(犧牲)으로 쓰일 소가 벌벌 떨며 끌려가는 것을 보고는 불쌍한 마음에 양으로 대체하라고 하였다. 얼핏 보면 참으로 어진 마음이다. 스스로도 무고한 한 생명을 살렸다고 뿌듯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신 죽어간 양은 무슨 죄인가? 정말 동물들이 불쌍하다면 희생을 바치는 제도를 없애야 했다. 『맹자(孟子)』에 나오는 고사이다.

  이런 현상은 인기와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현대 정치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갑을관계, 비정규직 문제 등,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이슈만 터지면, 너나없이 우르르 몰려들어 조급하게 대책을 남발한다. 특히 약자를 배려한다는 정의감에 사로잡혀, 국가 전체적인 차원의 접근보다는 무조건 약자 쪽에게만 유리한 정책을 수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그런 졸속적인 일회성 대책은 장기적으로 볼 때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리더, 정치가라면 자신이 살리려고 하는 사람이나 조직 때문에, 대신 죽어가는 다른 사람이나 조직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권경열 글쓴이 : 권경열
  •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 주요역서
      - 국역 갈암집공역, 민족문화추진회. 1999
      - 국역 오음유고, 민족문화추진회, 2007
      - 국역 국조상례보편공역,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 국역 매천집 3, 한국고전번역원, 2010
      - 국역 가례향의, 국립중앙도서관, 2011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