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말은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이자 문신인 창계(滄溪) 임영이 숙종에게 올린 차자에 나오는 말로, 임영의 독창적인 말은 아니고 출전이 있습니다. 바로 『논어(論語)』「자장(子張)」 편에 “문왕과 무왕의 도가 아직 실추되지 않아 사람들에게 남아 있으므로, 어진 자는 큰 것을 알고 있고 어질지 못한 자도 작은 것을 알고 있다. [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라고 한 것이 그 출전입니다. 창계 임영의 차자나 상소를 보면 자주 숙종의 과격한 성격과 한쪽으로 치우치는 폐단을 지적한 말이 많은데 이것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의견 충돌을 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대개는 나와 다른 의견을 누르고 싶고 무시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일차적인 욕심입니다. 나 나름대로는 생각을 많이 하고 고심을 많이 한 의견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특히나 높은 자리에 있거나 나이가 많을 경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위와 연치의 힘에 의지해 남의 의견을 누르거나 무시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할수록 일은 반드시 어긋나고 잘못되는 경우가 많은 법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크고 작음을 우열의 개념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크고 작음을 가지고 우열을 나눌 수 없는 것이 세상사의 은미한 이치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이라 하여 반드시 집안을 가지런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이 배운 큰 학자라 하여 반드시 사람 사이의 세세하고 은미한 일들을 다 통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큰 것은 큰 것 나름대로의 길과 결이 있고 작은 것은 작은 것 나름대로의 길과 결이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남보다 많이 알수록 자신의 의견에 집착하고 그것이 옳다고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태산에 오르면 천하만물이 다 자기 눈 속에 들어오는 것 같지만 저 아래 골목에 희미하게 두 사람이 붙어 있는 것이 싸우는 것인지 어깨동무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법이요, 광활한 바다 앞에 서면 그 웅장한 기운과 드넓은 기상이 모두 내 것인 듯하지만, 물결 밑의 어룡이 어디로 헤엄쳐 가는지 해초는 어디에 많고 산호는 어디에 많은지 도통 알 수 없는 법입니다. 큰 자리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아래에서 들려오는 말에 귀 기울이고 자기 생각을 철두철미하게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겸손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모르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냥 덮어놓고 남의 말을 듣기만 하는 것도 분별없는 짓이겠지만,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고, 안다고 착각하며 온갖 일을 다 망치는 짓은 정말이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같은 잘못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여파가 다른 법이니, 고양이가 장난으로 깨물면 손가락이 따끔거리고 말겠지만, 사자가 장난으로 깨물면 사람이 죽어 나가지 않던가요. 게다가 그 과보 또한 큰 법입니다. 고양이야 꿀밤 한 대로 징치될 것이나 사람을 죽인 사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하늘의 해는 모든 사람이 바라보는 것이라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으면 사람들이 금세 안다고 하였습니다. 열 눈이 바라보고 열 손이 가리키는 자리에 앉아 아집이나 부리며 뭇사람들의 입을 막고 일을 망친다면 참으로 꼴불견이 아닐까요. 뒤미처 후회해도 미칠 수 없나니 두렵고 두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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