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순암(順菴) 안정복이 광주(廣州) 경안면(慶安面) 덕곡리(德谷里) 텃골에 살면서 같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향약(鄕約)을 만들어 시행할 적에 만든 향약규례 가운데, 혼례에 관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안정복은 본관이 광주, 자가 백순(百順), 호가 순암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삼아 공부하면서 과거를 외면한 채 여러 학문을 섭렵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에 뛰어나, 『하학지남(下學指南)』과 『잡동산이(雜同散異)』, 『동사강목(東史綱目)』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안정복은 이 글에서, 혼인을 하면서 재물을 따지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짓이며, 그러한 짓은 시정잡배나 하는 짓이지 법도가 있는 사대부의 집안에서 할 일은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혼인의 풍습이 남들의 눈을 의식하여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함으로써 실질적인 일은 모두 없어지고, 허례허식만 남았다고 개탄하였다.
혼인을 하면서 서로 간에 예물을 주고받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 예를 표하기 위하여 주고받는 것이다. 이런 예물에 대해서 많고 적음을 따지는 것은 그야말로 오랑캐들이나 하는 짓이다. 더구나 이 때문에 분쟁이 생겨 끝내는 혼인을 파하기까지 하는 것은, 오랑캐들도 하지 않는 짓이다.
혼인의 예식은 일부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이 일생에 단 한 번 치르게 된다. 그런 만큼 사람들은 누구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남들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혼례식을 치르고 싶어 한다. 이것은 인지상정으로, 비난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생에서 단 한 번뿐이라는 핑계로, 집안 사정에 맞지 않는 사치스러운 예물과 혼수를 마련하거나, 호화스러운 식장에서 연예인이나 부유층이 치르는 것처럼 화려하게 치를 경우, 주위 사람들에게 빈축을 살 뿐만이 아니라, 인생의 첫출발부터 불행의 구덩이로 발걸음을 내디디며, 자신의 부모에게 큰 고통을 안겨 줄 수도 있다.
내 분수에 만족하며 삶을 살지만, 謀生本知足 일 만나선 가난함이 늘 부끄럽네. 遇事每羞貧 예로부터 혼례 중히 여기었던 건, 婚禮由來重 인륜 본디 예서 시작 되어서라네. 人倫自此新 사치함은 내가 본디 좋아 안하니, 奢非吾所尙 검소함을 내 마땅히 따라야 하리. 儉豈我當遵 내 뜻대로 할까 남들 따라서할까? 違衆與從俗 신경 온통 쓰자 머리 지끈거리네. 徒然勞我神
이 시는 고려 말기의 삼은(三隱)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학자이며 문장가였던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지은 것으로, 자식의 혼사를 앞두고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쓴 「유감(有感)」이란 제목의 시이다.
목은과 같이 뛰어난 인물조차도 자식의 혼사를 앞두고는 자기 뜻에 따라 검소하게 치를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화려하게 치를 것인가를 두고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고민하였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네 같은 일반 사람들이겠는가. 누구를 막론하고 화려하게 치르고 싶을 것이다.
이제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다. 이번 가을에도 수많은 신랑 신부들이 백년가약을 맺으면서 행복한 미래를 꿈꿀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축복 속에서 치러져야 할 가장 신성한 의식인 혼례식이 하찮은 허영심이나 한순간의 과시욕으로 인하여, 사돈 간의 불화와 고부간의 갈등을 빚어서야 되겠으며,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과 부모의 노후대책이 흔들리게 해서야 되겠는가? 그런 혼인을 통하여 이루어진 가정이 화목하고 윤택한 가정이 되겠는가?
불가(佛家)의 말에 ‘한 마음을 돌리면 거기가 피안(彼岸)’이라고 하였다. 혼례를 준비하면서 천박한 허영심과 과시욕의 한 마음을 한 번 돌리기만 하면, 얽히고설킨 여러 가지 일들이 실타래가 풀어지듯 술술 풀릴 것이다. 그리하여 양쪽 집안이 화합하고 모든 사람이 축복하는 가운데에서 혼인의 예식을 치르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이다. 혼례를 앞둔 분들이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서 준비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