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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에 재물을 논함은 오랑캐의 도이다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9. 27. 15:22

- 이백여든아홉 번째 이야기
2013년 9월 23일 (월)
혼인에 재물을 논함은 오랑캐의 도이다
  옛말에 ‘성인(聖人)이라야 예를 만든다.’고 하였다. 공자(孔子)와 같은 성인이거나, 아니면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만이 예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분들이 어찌 일반 사람들의 생활을 불편하게 하려고 예를 만들었겠는가.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처지에 맞추어 적절히 절제할 수 있게 하려고 예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후대에 이 예를 쓰는 자들이 예의 본질은 내팽개치고 겉껍데기만을 중시하다 보니, 허례허식(虛禮虛飾)으로 흐르게 되었다.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란 청춘 남녀가 하나로 맺어져서 한 가정을 꾸리게 되는 혼인의 예식은, 참으로 거룩한 의식이다. 혼례를 치름으로써 이루어지게 되는 한 가정은 인간 윤리가 시작되는 곳이고, 우리 사회를 존속할 수 있게 하는 최소의 공동체이다. 그런 만큼 혼인의 예식은 모든 사람의 화합과 축복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요즈음 언론 매체를 통해서 보거나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혼례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갈등으로 인해 당사자는 물론 양쪽 집안이 서로 불화하게 되고, 심한 경우에는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까지도 있다고 한다. 거룩해야 할 혼인이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으로 인해 끝내 불행한 결혼생활로 이어진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혼례(婚禮)와 상례(喪禮)는 사람의 도리 중에서도 큰 것으로, 예(禮)에는 일정한 제한이 있고 법(法)에는 금지하는 바가 있다. 가난한 자야 사실 논할 것이 없지만, 부유한 자는 항상 남만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여, 예를 범하고 법을 넘어서서 참람하고 사치스러운 풍조가 이루어졌다.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혼인이란 두 성(姓)을 결합시키고 만 가지 복(福)의 근원을 맺는 일이니, 예(禮)에 정한 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재물의 많고 적음을 따지는 것은 참으로 오랑캐의 도이다.
  고구려의 풍속에는 혼인 예물이 너무 많을 경우에 ‘매비(賣婢)’라고 하였다. 이때는 오랑캐의 풍속이 미처 바뀌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이를 수치로 여겼던 것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예교(禮敎)가 밝고 아름다운 시대임에랴.
  부모의 상(喪)은 실로 자신의 힘을 다해야 할 바이다. 성인도 말하기를, “예로써 장사지내고 예로써 제사지낸다.”라고 하였으니, 군자가 일을 행함에 있어 예를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는가.
  지금 세속에서 딸을 시집보낼 때 혼인 예물이 풍성하지 못하면 매우 수치스럽게 여기며, 혹 이로 인해 두 집안이 불화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버이의 장례를 예에 따라 지내면 박장(薄葬)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마구 일어나 떠들어 대기도 한다.
  이 때문에 풍습이 겉치레를 숭상하여 보기 좋게 하는 데만 치중하다 보니, 실질적인 일은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이것은 장사치들이나 하는 행위이지, 사군자(士君子)가 본받을 일은 아니다.

昏喪人道之大節也。禮有定制。法有所禁。貧者固無論已。富者恒以不及人爲愧。犯禮越法。僭侈成風。可勝歎哉。昏合二姓之好。結萬福之源。如禮而已。論財豐薄。實夷虜之道也。高句麗之俗。若資裝過豊。則謂之賣婢。此時夷風未變。猶以爲耻。况今禮敎休明之時乎。親喪固所自盡。聖人亦曰。葬之以禮。祭之以禮。君子行事。舍禮何以哉。今俗嫁女。裝奩不豊。則深爲羞耻。或至兩家不和。葬親如禮。則或謂薄葬。衆起而咻之。是以習尙浮文。專尙觀美。而至於實事蔑如也。此市井賈兒之爲耳。非士君子所法也。
 
- 안정복(安鼎福, 1712~1791) 「광주부 경안면 2리 동약(廣州府慶安面二里洞約)」 『순암집(順菴集)』

                 ▶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평생도(平生圖)  중의 혼인식,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리 그림 백가지』에서 인용

  이 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순암(順菴) 안정복이 광주(廣州) 경안면(慶安面) 덕곡리(德谷里) 텃골에 살면서 같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향약(鄕約)을 만들어 시행할 적에 만든 향약규례 가운데, 혼례에 관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안정복은 본관이 광주, 자가 백순(百順), 호가 순암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삼아 공부하면서 과거를 외면한 채 여러 학문을 섭렵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에 뛰어나, 『하학지남(下學指南)』과 『잡동산이(雜同散異)』, 『동사강목(東史綱目)』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안정복은 이 글에서, 혼인을 하면서 재물을 따지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짓이며, 그러한 짓은 시정잡배나 하는 짓이지 법도가 있는 사대부의 집안에서 할 일은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혼인의 풍습이 남들의 눈을 의식하여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함으로써 실질적인 일은 모두 없어지고, 허례허식만 남았다고 개탄하였다.

  혼인을 하면서 서로 간에 예물을 주고받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 예를 표하기 위하여 주고받는 것이다. 이런 예물에 대해서 많고 적음을 따지는 것은 그야말로 오랑캐들이나 하는 짓이다. 더구나 이 때문에 분쟁이 생겨 끝내는 혼인을 파하기까지 하는 것은, 오랑캐들도 하지 않는 짓이다.

  혼인의 예식은 일부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이 일생에 단 한 번 치르게 된다. 그런 만큼 사람들은 누구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남들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혼례식을 치르고 싶어 한다. 이것은 인지상정으로, 비난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생에서 단 한 번뿐이라는 핑계로, 집안 사정에 맞지 않는 사치스러운 예물과 혼수를 마련하거나, 호화스러운 식장에서 연예인이나 부유층이 치르는 것처럼 화려하게 치를 경우, 주위 사람들에게 빈축을 살 뿐만이 아니라, 인생의 첫출발부터 불행의 구덩이로 발걸음을 내디디며, 자신의 부모에게 큰 고통을 안겨 줄 수도 있다.


내 분수에 만족하며 삶을 살지만,       謀生本知足
일 만나선 가난함이 늘 부끄럽네.       遇事每羞貧
예로부터 혼례 중히 여기었던 건,       婚禮由來重
인륜 본디 예서 시작 되어서라네.       人倫自此新
사치함은 내가 본디 좋아 안하니,       奢非吾所尙
검소함을 내 마땅히 따라야 하리.       儉豈我當遵
내 뜻대로 할까 남들 따라서할까?       違衆與從俗
신경 온통 쓰자 머리 지끈거리네.       徒然勞我神

  이 시는 고려 말기의 삼은(三隱)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학자이며 문장가였던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지은 것으로, 자식의 혼사를 앞두고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쓴 「유감(有感)」이란 제목의 시이다.

  목은과 같이 뛰어난 인물조차도 자식의 혼사를 앞두고는 자기 뜻에 따라 검소하게 치를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화려하게 치를 것인가를 두고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고민하였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네 같은 일반 사람들이겠는가. 누구를 막론하고 화려하게 치르고 싶을 것이다.

  이제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다. 이번 가을에도 수많은 신랑 신부들이 백년가약을 맺으면서 행복한 미래를 꿈꿀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축복 속에서 치러져야 할 가장 신성한 의식인 혼례식이 하찮은 허영심이나 한순간의 과시욕으로 인하여, 사돈 간의 불화와 고부간의 갈등을 빚어서야 되겠으며,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과 부모의 노후대책이 흔들리게 해서야 되겠는가? 그런 혼인을 통하여 이루어진 가정이 화목하고 윤택한 가정이 되겠는가?

  불가(佛家)의 말에 ‘한 마음을 돌리면 거기가 피안(彼岸)’이라고 하였다. 혼례를 준비하면서 천박한 허영심과 과시욕의 한 마음을 한 번 돌리기만 하면, 얽히고설킨 여러 가지 일들이 실타래가 풀어지듯 술술 풀릴 것이다. 그리하여 양쪽 집안이 화합하고 모든 사람이 축복하는 가운데에서 혼인의 예식을 치르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이다. 혼례를 앞둔 분들이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서 준비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란다.


  

  
정선용 글쓴이 : 정선용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주요저역서
    - 『외로운 밤 찬 서재서 당신 그리오』, 일빛, 2011
    -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해동역사』, 『잠곡유고』, 『학봉집』, 『청음집』, 『우복집』, 『삼탄집』,『동명집』 등 17종 70여 책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