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윤치호, 그는 누구인가?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 1865∼1945), 수많은 한국의 근대 인물 중에서 그처럼 화려하고 다채로운 경력을 지닌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는 1880년대와 1890년대 초반에 일본, 중국, 미국에서 유학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이었고,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회장을 지낸 개화ㆍ자강운동의 핵심인물이었다. 아울러 한국 최초의 미국남감리회 신자이자 YMCA 운동의 지도자로서 일제강점기에는 기독교계의 최고 원로였다. 그런가 하면 3ㆍ1 운동 발발 초기에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독립운동 무용론(無用論)’을 피력해 물의를 빚었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기독교계의 친일을 주도하고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과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등의 고위 간부를 지내며 친일파의 ‘대부’ 역할을 담당했다. 요약하면 그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느냐, 부정적인 역할을 했느냐 하는 가치판단의 여부와 상관없이 한국 근대사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거물이었다.
2. 윤치호, 영문(英文) 일기를 쓰다
그런 윤치호에게 거물다운 점이 또 하나 있다. 더러 중단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장장 60년 동안 일기를 쓴 것이다. 그것도 대부분을 영문(英文)으로 말이다. 그는 일기에 자신의 일상생활과 공인으로서의 활동상황은 물론 국내외 정세에 대한 견해와 전망 등을 꼼꼼히 기록해 놓았다. 또 직접 겪은 많은 사건의 미묘한 정황, 정국의 추이와 민심의 동향, 각종 루머, 많은 지인(知人)들의 인성(人性)ㆍ사상ㆍ행적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정보를 상세히 적어 놓았다. 그래서 그의 일기는 그가 신문, 잡지 등에 발표한 이성적이고 정제된 글들에 비해 그의 속내를 더욱더 진솔하게 엿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 유명 인사들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에서 적잖이 나타나는 것처럼, 과거에 대한 기억에 오류가 있거나 집필 당시의 관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의 행적을 과장하거나 은폐했을 가능성도 적다. 게다가 그의 속내뿐만 아니라 그가 살고 있던 시대의 모습을 다각도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윤치호는 학벌과 명망과 재력을 두루 갖춘 ‘귀족’이었고 말년에 친일행각을 벌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청교도적인 인간형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 사치스럽고, 노동을 경시하는 사람에게는 상당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아내, 자녀, 동생, 친구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는 근면, 정직, 성실, 신용, 절약 등 근대 시민윤리를 실천에 옮기려고 무던히 애썼다. 그가 몸이 아플 때도, 여행을 다닐 때도 꼬박꼬박 일기를 쓴 것은 하루하루의 생활을 기록 정리하고 반성하려는 의미에서였다. 그가 장장 60년 동안 일기를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이 점에 있었다. 일기야말로 그의 분신이자 그의 삶 자체였다. 따라서 윤치호의 일기는 개인 저작물이라고는 하지만, 사료비판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그 어느 공적 문헌에 못지않은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
3. 윤치호, 일기에 일제강점기 역사를 담다
윤치호가 ‘한일합방’ 이후 1916년부터 1943년까지 쓴 일기는 더욱더 귀중하고 유용한 사료라 할 수 있다. 우선 이 일기에는 지식과 명망과 재력을 두루 갖춘 한 원로의 ‘식민지 살이’와 속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국내외 정세 인식, 일제의 조선 통치정책에 대한 견해, 제반 독립운동에 대한 판단, 조선의 역사ㆍ문화와 조선인들의 민족성에 대한 인식 등이 진솔하게, 때로는 매우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중일전쟁 발발 이전까지 친일파도 아니면서 ‘독립운동 무용론’을 고수한 ‘회색인’으로서의 ‘독특한’ 내면세계, 아니 어쩌면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한 경향을 대표하는 것일 수도 있는 ‘보편적인’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 그가 일제강점기 말에 친일파의 ‘대부’가 된 이유, 즉 그에게 부과된 외압과 그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분출된 자발적 친일논리를 확인할 수 있다. 윤치호의 일기에는 또 일제강점기 역사에 관한 수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그는 지식, 명망, 재력을 겸비한 국내 최고의 원로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일제와 민족주의 진영의 ‘희비’가 엇갈릴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항상 일제와 민족주의 진영 양편에서 ‘영입’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총독부 당국과 친일세력, 다른 한편으로는 학계, 언론계, 종교계 등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과 동시에 지속적으로 접촉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일기에는 사회주의 운동세력을 제외한 일제강점기 국내 모든 세력의 동향이 ‘입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윤치호의 일기에는 또 공적 문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풍부한 뒷이야기들과 각종 루머들이 담겨 있다. 일반적으로 친미파로 분류되는 미국 유학 출신의 지식인층이나 기독교계 인사들에게는 백인종, 구체적으로는 앵글로색슨인들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이 상당해서 이것이 친일의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 일제강점기에 민족주의 운동세력과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평안도지방과 서울ㆍ경기지방 사이에 지역감정(지역갈등)이 극심하게 나타났다는 점 등은 시사해 주는 바가 적지 않다. 고종황제 독살설, 유길준의 을미사변 관련설, 박용만과 옥관빈 밀정설, 1930년대 중반 최남선의 ‘변절’설, 1930년대 중반 여운형의 기호계 결사 추진설, 1930년대 후반 서울지역 기독교계 지도자 신흥우의 파시스트 결사 추진설과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 조작설 등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상당히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4. 공적 기록과 사적 기록의 내용이 서로 다를 때
일제강점기의 가장 중요한 공적 자료라 할 수 있는 총독부 자료와 윤치호의 일기 내용에 서로 다른 점이 몇 군데 나타나는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윤치호는 자치운동 추진단체인 신우회(信友會)와 친일적 농촌운동단체인 중앙진흥회(中央振興會)의 핵심인물이었다. 그러나 윤치호의 일기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는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자치운동도 줄곧 반대했고, 중앙진흥회의 취지와 운동논리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런데도 이 경우 아무래도 공적 기록을 따르게 마련인데, 그 공적 기록의 내용이 100퍼센트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므로 개인 기록의 내용을 무조건 무시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우리가 총독부 당국의 자료를 절대시해서 일제강점기 운동사나 사상사를 다룬다면, 그것은 예를 들어 공안당국의 자료만 보고 1980년대의 학생운동사를 다루는 것과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5. 하루빨리 완역되기를
요약하면 윤치호의 일기에는 그의 일거수일투족과 속내는 물론 그의 시대가 상세히 담겨 있다. 따라서 황현의 『매천야록』이나 김구의 『백범일지』에 견주어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학계에서는 윤치호의 일기를 오랫동안 ‘방치’해왔다. 우선 그의 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또 알고 있다 하더라도 방대한 분량과 영어 독해의 부담 때문에 검토해 볼 엄두를 못 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런가 하면 한 개인의 일기를 사료로 볼 수 있느냐는 고정관념이나 윤치호는 친일파라는 선입견 때문에 사료로서의 가치를 폄하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다소 우스운 질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안창호, 김구, 신채호, 여운형 등의 일기가 현존한다면 지금까지 그렇게 방치되어 왔을까? 친일파라 해서 그의 일기가 보잘것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아니 친일파이기 때문에 그의 일기는 어느 독립운동가의 일기 못지않은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다. 하루빨리 윤치호의 일기가 완역(完譯)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