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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이 두렵지 아니한가!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10. 15. 12:09

- 이백아흔두 번째 이야기
2013년 10월 14일 (월)
역사의 기록이 두렵지 아니한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사람은, 애써 외면하고는 있지만, 자기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두 가지 자명한 사실이 종교와 사상, 문학과 예술, 신화와 역사 같은 온갖 정신문화를 만들어낸 셈이다. 어떤 철학자는 이런 정신문화에 속하는 것들은 인간이 자기 존재를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상징적 형식이라고 하였다. ‘잘’ 죽은 사람의 죽음은 거룩하며, 그의 숭고한 ‘죽음’은 우리의 영혼을 고양시킨다. 우리는 죽음을 대면할 때만 ‘살아’ 있다.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기 때문이다.

  대사 구문의 아들 검군은 사량궁의 사인이다. 건복 44년 정해년(627)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온갖 곡식을 얼려 죽였다. 이듬해 봄과 여름에 큰 기근이 들어 백성은 자식을 팔아서 먹을거리를 구할 지경이었다. 이때 궁중의 여러 사인이 공모하여 창예창 창고의 곡식을 훔쳐서 나누었다. 검군만은 받지 않았다. 여러 사인이 말했다. “여러 사람이 다 받았는데 그대는 혼자 물리치니 어째서 그러는가? 적어서 그런 것이라면 더 드리겠소.” 검군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근랑의 낭도에 이름을 올렸고 화랑[風月]의 뜰에서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의롭지 않은 것이라면 비록 천금의 이익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무렵 이찬 대일의 아들이 화랑이 되어 근랑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검군이 나가서 근랑의 집으로 갔다. 사인들이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말이 샐 것이다.’ 하고 비밀히 모의하고서 마침내 그를 불렀다. 검군이 죽이려는 음모를 알고 근랑에게 하직 인사를 하였다. “오늘 이후로 다시는 서로 보지 못하겠습니다.” 근랑이 까닭을 물었다. 검군은 말하지 않았다. 거듭 묻자 그제야 까닭을 대략 말하였다. 근랑이 “어째서 유사에게 말하지 않는가?” 하고 말했다. 검군이 “내가 죽는 것이 두려워서 여러 사람을 죄에 얽어 넣는 짓은 인정에 차마 못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도망가지 않는가?” “저 사람들은 그르고 나는 정직한데 도리어 내가 도망간다면 장부가 아닙니다.” 드디어 사인들에게 갔다. 사인들이 술을 마련하여 사죄하면서 몰래 약을 음식에 넣어두었다. 검군은 알면서도 억지로 먹고 마침내 죽었다. 군자가 말하였다. “검군은 죽을 자리가 아닌 데서 죽었다. 태산(목숨)을 새털보다 가볍게 여긴 사람이라 하겠다.”

劍君, 仇文大舍之子, 爲沙梁宮舍人. 建福四十四年丁亥秋八月, 隕霜殺諸穀. 明年春夏大飢, 民賣子而食. 於時宮中諸舍人同謀, 盜唱翳倉穀分之. 劍君獨不受. 諸舍人曰, 衆人皆受, 君獨却之, 何也? 若嫌少, 請更加之. 劍君笑曰, 僕編名於近郞之徒, 修行於風月之庭. 苟非其義, 雖千金之利不動心焉. 時大日伊湌之子爲花郞, 號近郞, 故云爾. 劍君出至近郞之門. 舍人等密議, 不殺此人, 必有漏言. 遂召之. 劍君知其謀殺, 辭近郞曰, 今日之後, 不復相見. 郞問之, 劍君不言. 再三問之, 乃略言其由. 郞曰, 胡不言於有司? 劍君曰, 畏己死, 使衆人入罪, 情所不忍也. 然則盍逃乎? 曰, 彼曲我直而反自逃, 非丈夫也. 遂王. 諸舍人置酒辭之, 密以藥置食. 劍君知而强食, 乃死. 君子曰, 劍君死其非所. 可謂輕泰山於鴻毛者也.
 
- 김부식(金富軾, 1075~1151), 「검군전(劍君傳)」, 『삼국사기』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고 한다. 죽음의 연습이란 이 땅 사바세계에서 일구어가는 삶보다 죽음 뒤의 세계가 더 완벽하고 아름다운 본래의 세계이므로 그 세계로 가기 위한 영혼의 훈련이라는 말이다.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일인데 가장 지혜로운 일은 삶의 의미를 찾고 궁극적으로는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영혼이 지고(至高)의 정복(淨福)을 누리는 일이다. 고대 헬라스의 철학의 조상들은 철학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죽음을 배려하는 일은 삶을 배려하는 일이다. 죽음은 늘 가까이 있다. 죽음은 삶의 이면으로 있는 것이다. 죽음과 삶은 동전의 앞뒷면이므로 죽음을 성찰하는 것은 곧 이면의 삶을 성찰하는 일이고, 삶을 살아가는 것은 곧 죽음을 향해 가는 일이다. 잘 사는 것은 잘 죽기 위한 일이다.

  그런데 검군의 이야기는 참 당혹스럽다. 굶어서 죽지 못해 도둑질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자기의 정직한 명예와 지조를 지키겠다는 것도 훌륭한 일이다. 그렇다고 꼭 죽을 걸 알면서도 굳이 죽음의 길로 가야 했을까? 근랑의 말처럼 도망이라도 가서 살 수도 있는데 삶을 포기하는 일은 삶을 모독하는 일이다. 삶의 가치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살아가야 하는 것은 그 자체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절대명령이다.

  그러나 여기에 더하여 꼭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사람답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현대인은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나’라는 것도 육체의 ‘나’를 말한다. 그리하여 ‘나’의 육체를 영위해가기 위한 물질적 요소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되었다. 내 삶은 내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얼마나 쓰느냐에 따라 결정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삶을 살아가는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내 삶을 어떻게 사람답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잊어버리고 어떻게 누리고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모든 의식이 집중되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삶의 이력은 ‘고스란히’는 아니더라도 ‘거의 대부분’ 기억되고 기록된다. 나 스스로는 잊어버렸을지라도 내가 스쳐 지나간 누군가는 나의 한 순간을 기억하고 있으며, 내가 뱉은 말과 한 행동은 어느 사람의 날카로운 눈엔가는 틀림없이 포착되어 한 줄로 기록된다. 그러니 삶을 늘 돌아볼 일이다.

  한편으로 검군의 처신은 공직자의 삶의 크기를 보여준다. 그는 공직의 궁극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 물음에 충실하게 대답하였다. 공직은 인민의 편안한 삶을 위해 복무하는 일이다. 검군은 기근이 들어 굶어 죽을 지경에 처하여 자식마저도 먹을거리와 바꾸는 형편에 처한 사인들의 절도행위를 충분히 납득하였다. 그래서 자기의 직책에만 충실하여 유사에게 일러바치거나 이들의 행위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많은 사인과 그들에게 딸린 식구의 삶을 잠시나마 이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에게 동조하지도 않았고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도피하지도 않았다. “나는 당당하니 내가 피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죽음을 택할 수도 있다.” 바로 이 점에서 검군의 삶의 크기가 엄청난 크기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고려 인종 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동아시아 역사서술 형식의 시원(始原)이 된 사마천의 『사기』와 같이 기전체(紀傳體) 양식으로 우리나라 고대 세 나라의 역사를 서술한 역사서이다. 그 자체 여러 가지 한계와 미흡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삼국시대의 역사를 알려주는 가장 기본적인 텍스트이다.

  기전체란 알다시피 권력의 정통성을 획득한 당대 제왕들의 역사를 편년에 따라 기술한 연대기 형태의 본기(本紀)와 당대를 살아간 개인 또는 집단의 전기를 짤막하게 기록한 열전(列傳)을 뼈대로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이다. 한 나라의 공식적 역사기록인 제왕의 본기는 시간 축으로 전개되며 당대의 역사를 살아간 개인의 열전은 공간 축을 따라 펼쳐진다. 시간은 날줄이며 공간은 씨줄이다. 그리하여 역사는 시간이라는 날줄에 끊임없이 공간을 확장해간 수많은 개인의 행위를 씨줄로 먹여서 짜낸 다채로운 무늬이다.

  시간은 하늘의 운행으로 표현되며 공간은 땅 위에 펼쳐져 있다. 물론 하늘의 공간, 물의 공간도 있지만, 동아시아 인민이 삶은 어디까지나 땅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간은 땅의 공간이다. 시간은 최고심급의 판관이며 땅 위를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삶을 의탁하는 하느님이다. 그래서 해가 가고 달이 가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끊임없이 돌고 도는 시간의 운행 가운데에서 사람과 풀과 나무와 새와 짐승이 살아가고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하면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하늘은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들과 숨이 없는 흙과 돌과 물과 불을 만들어놓고 사람에게 맡겨놓았다. 왕은 하늘과 땅 사이에 살아가는 모든 존재자의 영장인 사람, 그 사람의 유일한 대표로서 하늘, 님 앞에 나아간다. 그래서 왕을 하늘의 아들, 천자라고 불렀다. 하늘은 시간을 통해 자기 힘을 나타내고 하늘의 아들인 천자, 왕은 전체 인민의 삶의 시간을 주관한다. 연호는 왕의 통치가 곧 하늘의 시간을 사람의 세계에 구현하는 일임을 상징하는 장치이다. 그래서 한 나라 전체의 역사인 제왕의 이력을 기록한 본기는 편년체로 구성된다.

  인민은 짧게는 하루 밤낮을, 좀 더 길게는 1년 열두 달을, 아주 길게는 한평생을 시간이 흘러가는 데 따라 동서남북 사방으로 삶의 공간을 펼쳐간다. 사람이 가꾼 꽃밭은 인위로 다듬어서 한두 종이 우점하기도 하지만 대자연의 정원은 예쁜 꽃, 탐스러운 꽃, 볼품없는 꽃, 큰 꽃, 작은 꽃 온갖 꽃이 저마다 제 생긴 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인간세(人間世)에서는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간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남쪽에서 산 사람, 북쪽에서 산 사람, 잘 산 사람, 못 산 사람,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의 갖가지 삶이 전체적으로 어우러져서 대교향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열전은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대로, 악한 사람은 악한 사람대로 제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한번 착한 사람으로 이름이 오르거나 나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면 그 이름과 낙인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자, 역사의 기록이 두렵지 아니한가! 아니, 사관의 붓을 빼앗아서 함부로 휘둘러 역사의 기록마저도 분칠하고 덧칠하여 새로 써내려는 자들이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김태완 글쓴이 : 김태완
  • (사)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 소장
  • 주요저서
    -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소나무, 2004
    - 『중국철학우화393』 소나무, 2007
    - 『율곡문답, 조선 최고 지식인의 17가지 질문』, 역사비평사, 2008
    - 『경연, 왕의 공부』, 역사비평사, 2011
    - 『맹자, 살기 좋은 세상을 향한 꿈』, 아이세움, 201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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