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촌선생 건강교실/약리학강의

[동양의학 혁명 총론]1.머리말 (2편)|운기학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10. 19. 21:06

 

1. 머리말

2. 강좌개설 대의명분론 

사암침법 40일 강좌를 개설하는 데에는 4가지 명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7情으로부터의 자유를 얻는 '內革'이 첫째요, 자기 마음을 관조하는 '一心'의 중요성이 그 둘이며, 우리의 근본인 한방의 원전으로 돌아가 연구하자는 '歸源'이 그 셋입니다. 끝으로 이러한 모든 힘과 능력으로 천하를 화평하게 해야 한다는 '饒益蒼生'이 넷입니다.   

(1) 內革 

  '內革'이란 쉽게 이야기 하면 '마음을 혁명하자'라는 뜻입니다. 우리 한방에서는 질병의 원인을 '外感內傷'이라고 합니다. '外感'이라는 것은 風寒暑濕燥火라든가 심지어 음식을 먹고 체한 것도 엄밀하게 따져 보면 外感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옆에서 잔소리를 한다거나, 역거운 말을 들어 기분이 나빠서 체했을 경우, 즉 신경에 관계되거나 마음에 관계되는 것을 '內傷'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강의하고자 하는 기초적 관건은 바로 內傷에 있습니다. 이 內傷의 문제를 여하히 다루느냐가 바로 '內革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점을 명심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이외의 어떠한 외부적인 현상이나 형식 또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을 시비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변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며,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사암도인의 서문에 보면 "審七情之浮沈이라 醫者는 意也야니... (七情의 뜨고 가라앉음을 아주 세밀히 관찰해야하나니 가히 意라고 하는 것은 곧 뜻을 얻어야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남의 喜 怒 哀 樂 愛 惡 慾을 잘 관찰할 수 있어야 올바른 진료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여러분들은 외부에서 어떤 이론이 주어지면 그에 따르는 수동적인 공부를 해 왔지만,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공부는 스스로의 悟性에 의해 능동적인 자세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는 공부인 것입니다

  그래서 '內革'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정, 즉 七情을 觀하는 것, 또는 七情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요즈음 크리슈나무르티 선생이 '지식으로부터의 해방', '의식으로부터의 해방', '과거로부터의 자유'등과 같은 해방, 자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이것 또한 '七情으로부터의 자유', 혹은 '七情을 觀한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선생은 항상 의시법, 법시법을 권하고 또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와지지 않으면 內革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 혁명은 안에서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혁명을 밖에서부터 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핑계를 바깥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일의 원인은 여러분들 스스로에게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서 미묘하게 움직이는 猜忌, 嫉妬, 慾望, 憤怒, 卑劣感, 驕慢感 등 내면의 어떤 陰痒상태, 즉 긍정적 상태와 부정적 상태의 분별이라고 하는 모든 질병의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와지지 않으면 안되며 또한 그것을 혁명화할 싯점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舍岩針法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것은 舍岩針法의 요체가 되는 五運六氣 체계를 관찰하기 전에 먼저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관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날 미팅에서 어떤 여학생이 마음에 들었는데, 옆의 친구가 그 여학생과 친한 것을 보고 마음속에 불쾌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욕망에 눈이 어두워 그저 시기, 질투만 일으킵니다. 이렇게 마음이 동하는 시초의 동기를 관찰하지 못하게 되면, 불쾌한 마음의 원인을 알 수 없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이런 사람은 마음속으로 자기와 친구를 비교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七情의 장난이며, 바로 內傷의 원인이 됩니다. 內傷이란 한마디로 감정으로부터 오는 병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은 감정으로 인한 병을 치료하는 데에 전념해야 할 때입니다. 요즘에는 전염성 질환이나 못 먹어서 오는 질환 따위는 많이 해결이 되었으나 갈수록 이상한 병들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AIDS같은 음양의 부조화에서 오는 병이 생겼는가 하면, 2차 대전의 희생자 600만명에 상당하는 인구가 1년 동안에 암으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이 암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하여 서양의 많은 의학자들이 연구를 하여 그 학설이 분분(콜타르, 불고기 탄 것, 된장...)하더니 결국 요즈음에는 이 질병의 원인이 스트레스라는 새로운 학설이 등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바로 이 스트레스는 곧 七情에서 오는 것입니다

  外感病을 치료하는데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體針法이나 기타 처방으로 치료를 할 수 있지만, 內傷病에는 바로 이 舍岩針法을 활용해야 그 사고의 범위가 넓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환자가 뚱뚱한지 말랐는지 살펴보는 것과 이외에도 그 사람의 평소 습관적인 성격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저도 사실 옛사람의 가르침을 겨우 3% 정도밖에는 얻지 못했으나, 그것으로 여러분들에게 힌트를 드리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부터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의학적인 근거가 없지 않겠느냐고 묻는다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醫學入門의 서문을 보면,  

 

學易而後에 可以言醫니 非學乎畵也며 學乎爻也라. 試觀之컨대 心이 果有畵乎아 果有交乎아 元理元氣渾合無間而已矣니 生天生地生人生物이 皆由此造化하야 以爲之主也니라 頣生者는 知此하면 則自然懲忿窒慾愁而水火交泰하고 濟人者는 知此하면 則自然辦物居方而沈頓復이라 圈之於首하야 以便不識字者의 開卷肅然에 至簡至易而玩之有趣耳라 敢曰 且於義皇心上에 看力하야 以竊軒岐之微意哉아 是扁說하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周易을 배운 뒤에라야 가히 醫學을 말할 수 있으니, 卦書를 배우고 爻象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주역을 다 배우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어디 주역이 그리 쉽습니까? 공자도 주역을 통달하기 위해서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공부하였는데 말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외국인이 주역을 샤마니즘이 아니냐고 하기에 한참 동안을 야단쳐 돌려보낸 적이 있습니다만 주역은 샤마니즘이 아니고 우리 마음의 어떤 심리적인 움직임, 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과 외부를 관찰하는 것, 즉 유심적인 관찰과 유물적 관찰과의 전체적인 어떤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일 중요한 것이므로 앞으로 계속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를 좀더 알고자 한다면 경희한의대 학생회에서 발간한 醫仁誌에 "東洋醫學革命小考"라는 것이 있는데(부록 수록) 그것을 참조하여 보시길 바랍니다. 이 사암침술법의 이론에는 사명당의 스승인 서산대사로부터 사명대사, 사명대사로부터 사암으로 내려오는 禪法의 정통성이 있습니다. 서산대사가 "禪家龜鑑"(불교에서 禪法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해서 써 놓은 책)의 맨 첫머리에 동그라미 하나를 턱하니 그려놓고 "!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어찌 전하랴"고 했거든요. 아무리 염화미소의 正法을 얻은 가섭일지라도 석가가 몰랐던 것을 가섭이 어찌 전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서산대사의 말씀입니다. 동그라미하나 그려놓고 그 가운데 획이 있느냐? 효가 있느냐? 하신 것입니다. 획이니 효니 하는 것은 주역의 양(길다란 한개의 선), (가운데가 빈 선)을 말합니다. 이미 타계하신 어떤 주역학자께서는 '길다란 선'은 남자의 근을 상징한 것이고, '가운데가 빈 선'은 여자의 옥문을 상징한 것이라 노골적으로 표현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는 양의 상징, 하나는 음의 상징입니다. 그러면 동그라미안에 무엇이 있는가? 이것은 여러분들의 본심 안에 무엇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본심에는 元理와 元氣가 渾合하여 간격이 없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음양 이전에는 太極이 있습니다

  그러면 '태극은 무엇이냐?', '음양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태극 이전에는 무엇인가?'등등의 질문을 합니다.(禪家에서는 이런 것을 公案이라 한다). 太極이란 바로 '天을 生하고', '地를 生하고', '人을 生하고', '物을 生하는 것'입니다. 生을 頣養하는 자가 이것을 알게 되면 곧 자연히 忿을 징계하고 慾心을 막을 수 있게 됩니다. 특히 '忿을 징계하고 慾心을 막아서'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內革하자는 것을 간단히 말하면, 바로 '忿을 징계하고 욕심을 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맞는 일을 극단으로 끌고 가면 욕망이 생기게 되며,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극단으로 가게 되면 분노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여러분의 기존의 관점에 다소 혼란을 주게 될지도 모르는 음양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밝고 명랑한 기분을 陽, 우울하고 슬픈 기분을 陰이라 알고 있으며 따라서 하늘은 陽이고 땅은 陰이라고 알고 있지만, 음양이론의 암기에만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떤 관점이나 기준이 없는 음양관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앞으로 시도하는 방법은, 건네줄 수도, 나눠줄 수도 없는 '깨달음'이라는 것으로 과연 이것이 무엇인가를 여러분과 같이 연구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기존의 관점에 많은 혼란을 유발시킬 이 혼돈요법으로 인해 여러분의 음양관에 혼란이 오더라도 그냥 수용해 주기를 바랍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욕심'을 陰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陰이란 외부에 있는 것을 안으로 취하고 싶어하고, 또 순환적인 차원에서 보면 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좋은 대상을 보면 욕심이 일어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할 때 입 안에 침이 고이듯이 물은 陰이고 불은 陽인 것입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눈에 불꽃이 튀고 얼굴이 상기됩니다.  

  그래서. 저는 분노를 陽으로, 욕심을 陰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성충동이 일어날 때 열이 오르고 기분이 상기되는데, 이 욕심은 양이지 않느냐고 하는데 이것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어떤 것을 음양이라 했을 때 여러분들은 그것을 그대로 이해하지 마시고, 자기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陰인지 또는 陽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쨌든 분노를 징계하고 욕심을 막는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양면성 분리도가 크면 클수록 질병이 심화되는 것입니다

  水는 升하고 火는 降해야만(水升火降) 서로 사귀어서 태평해지듯이 우리는 태평해야 합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곧 자연히 사물을 판별하는 방법이 정하여져서 침체된 질병이 곧 회복됩니다. 人蔘, 白朮, 白茯笭, 甘草로 된 四君子湯도 아니고, 五行針의 시술도 아니지만 침체된 질병이 금방 나아버린다면 이 무슨 꿈같은 얘기냐고 하시겠지만 그것이 바로 이 선천도로 상징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원이라는 것은 그 원 안에 무슨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이 원을 그려 넣을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도 아마 답답했을 것입니다. 이런식의 어떤 본체에 대한 깨달음이 있으면 사람을 정확히 판단할 수가 있게 됩니다. 여러분과 나중에 식물관찰법을 공부하겠지만 옛날 신농씨(중국 전설속의 제왕 '맹자'에서 처음 나오며 농업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뒤에 '역경'에는 농업의 신, 의사 및 악사의 신으로도 되어있다. 구리의 제조법과 술 담는 법을 가르치는 등 상업의 신으로도 되어있다. 중국의 삼황오제중 삼황의 한사람이다.)같은 분은 식물과 대화를 했다고 합니다. 즉 사물을 보는 방법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책머리에 둥글게 그려서 글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편리하게 하고... 책을 열면 숙연하여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쉬워서 玩索하면 취미가 있게 한 것이다. 감히 또한 羲皇의 心地上에 着力하여서 軒岐의 微意를 찾아냈다고 하겠는가? 이것으로 설명하노라

 

  참으로 內革의 길을 위한 좋은 말입니다. 卦象을 긋고 周易을 만든 伏羲氏와 같은 황제들을 우리가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과분한 일입니다. 內經에 나오는 黃帝와 岐伯의 뜻을 조금이라도 제가 아는 체 한다 해도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 자신도 무엇을 알아서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떻게 하면 우리 한방을 부흥시킬 것인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방향 설정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아주 미세한 부분에서부터 저는 짚어나갈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글자나 문자나 어떤 이론을 배경으로 공부하던 것을 이제는 直觀法으로 들어가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심리적인 진행상황을 조용히 주시하는 觀心法 즉 直觀法이란 결국 분노를 억제하고 분노를 극복 할 수 있는 탁월한 방법이란 말입니다. 直觀法을 공부하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맑아지게 되며, 모든 사물의 판별이 쉬워집니다

  內革의 의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七情으로부터 자유로와지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七情의 근본인 분노와 욕심을 징계하고 억제해서 참으로 태평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중에 병이 있거나 번뇌가 많은 사람, 욕심이 많은 사람, 분한 마음이 많은 사람은 모두 內革의 본심부터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眞我를 찾아야 합니다. 本心과 眞我를 찾고자 하는 운동을 여기서 제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게서 명상적인 直觀法을 공부하고 수련하면서 임상에 임해보니 병이 잘 낫더라고 여러 학생들로부터 편지가 날아옵니다. 글자 몇을 몰라도 이렇게 참나를 찾는 사람은 한층 위대한 醫人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一心 

   '一心'은 목적의식을 가진 일심이 아니고, 바로 內革을 통해서 이루어진 결과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먼저 개혁해서 七情으로부터 자유로와진 다음 一心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一心이란, 깨달음의 상태, 마음을 관조할 수 있는 상태, 자기 내부의 생각이 일어남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상태 등을 말합니다.

   一心으로 가기 위해 제가 이 강의를 통해 줄곧 강조하는 것이 '觀心一法이 總攝諸行'입니다. 이 말은 달마대사가 깨달은 후에 제일 먼저 大喝一聲한 것으로 '마음을 觀하는 한가지 法이 모든 修行을 다 攝受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괴로운 상태를 그대로 두고 차분히 그것을 들여다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소위 불평만 합니다. 그러한 사량하거나 계량하고자 하는 마음, 계교 등으로 자꾸 어떻게 어떻게 되고자 하는 심리적인 노력은 내던져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마음을 觀해야지'생각을 하면서도 쉽사리 觀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 마음을 觀해야지, 그런데 마음을 어떻게 觀하지?' 하는 질문을 합니다

  이것은 질문이 나오는 자체가 벌써 사량임을 생각지 못하고 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질문만이 사량이 아니라 그에 대한 대답 또한 사량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思量分別 意識까지도 몽땅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은 

  "이것만은 따먹지 마라. 너희가 이것을 먹으면 지혜로와질진 모르나 정녕코 죽게 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자 사물의 선악을 판별하는 지혜는 생겼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불행해져 버렸습니다. "구약성서 창세기"가 바로 주역 이야기와 일맥상통합니다. 바로 陰陽 이전의 소식인 것입니다

  에덴동산이 상징하는 善惡果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바로 지금의 여러분입니다. 걸핏하면 저것은 우리편, 이것은 너희편, 누구는 좋은 사람 혹은 나쁜 사람,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는 식의 선택과 판단을 하게 됩니다. 선택과 판단의 마음은 이미 동그라미를 떠난 마음입니다

  한 여자는 아주 부자인데 못 생겼고, 다른 한 여자는 아름답지만 너무 가난하다고 할 때 우리 마음은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석가는 이런 경우를 일컬어 한 손에는 뜨거운 것, 다른 손에는 차가운 것을 잡고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일컬어 갈등이라고 합니다. 특히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 때 이 갈등은 더욱 심화됩니다. 요즈음의 젊은이들 대부분이 이와 같은 이중성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무척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이 일심에 관한 아름답고도 애처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어 여러분들에게 소개할까합니다

  李白, 杜甫와 함께 중국 당나라 시대의 3대 시인으로 불리는 王維는 독실한 불교신자로도 유명하여 그를 詩佛이라고도 칭합니다. 나는 언제나 시간이 나면 唐詩나 禪詩를 즐겨 읽는데, 그 중에서도 왕유의 詩를 좋아합니다. 물론 그의 시 곳곳엔 속세인으로서 불도를 향해가는 진실된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詩文뿐 아니라, 그림도 잘 그리고, 비파도 잘 타는 다재다능한 미청년으로서, 왕후와 귀족들이 다투어 그를 연회석상에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후 중에는 寧王의 세력이 가장 왕성해서, 첩을 몇 십 명이나 둔 호색가였습니다. 그는 미인만 보면 남의 유부녀도 강탈해서 첩으로 삼는 폭군이었습니다

  그는 호떡장수의 아내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권력과 금력으로 빼앗아다가 자기에 대한 그 여자의 애정의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서 잔인한 시험을 했습니다. 1년 만에 전남편인 호떡장수를 불러서 여러사람들이 보는 공개 석상에서 대면시켰던 것입니다

  이때 그 여자는 천한 직업의 전남편을 보자, 눈물이 주르르 흘러서 볼을 적시었어요. 영왕의 악취미도 애첩의 그런 표정에 질투를 느꼈으나, 그것도 하나의 애정 유희처럼 苦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좌중에 있던 문인들에게 이 정경을 시로 읊어 보라고 청했습니다. 이 잔인한 장면을 미화시켜 보려는 권력의 악취미였지요

  이 자리에 있던 왕유가 맨 먼저 한 수 읊었습니다. 어느 자리에고 솔직담백했던 왕유는 그들 불행한 부부의 사정을 동정한대로, 영왕의 기분도 염두에 두지 않고 읊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총애를 받더라도

옛날 남편의 은혜는 잊지말라

꽃을 보아도 눈물만 흘리면서 

초왕과는 말도 하지 않는다

 

慕以今詩 

能忘舊日恩 

看花滿眼 

不共楚王言 

 

  옛날의 고사를 비유하여 읊은 이 시의 뜻이 너무도 진실했고 작품이 묘했으므로 영왕의 마음은 물론 모여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까지 감동시켰습니다. 영왕은 그 자리에서 그들 부부에게 위자료를 주고 함께 돌려보냈습니다. 이때 왕유의 나이가 20세에 불과했는데, 여자의 심정을 이처럼 잘 이해한 것입니다. 장차 이 나라 한의학계를 짊어지고 나갈 여러분들께서는 이정도의 詩心은 되지 않아도 그 십분의 일만이라도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식견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식견은 생활을 하는데나 학문을 하는데도 필수적이 되겠지요. 여러분 모두 一心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계속적으로 주장하는 요체가 바로 一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어쨌든 中央土의 발달이 안된 사람, 脾臟의 발달이 잘 안된 사람은 매사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분노와 욕심만을 징계하라고 했지만 여기서는 선도 악도 아닌 中央土에 해당하는 思量의 갈등을 추가합니다

  그러나 필경에는 中央土라는 것까지도 벗어 던져야 합니다. 木火土金水 五行 모두에 심리적인 의미가 배속되어 있습니다. 一心이란 그 어떤 심리적인 면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양극성이 아님은 물론, 어떤 중간적인 의미조차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이것마저도 관해야 하므로 일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一心에는 선악도 없고 중간적인 의미의 사량분별도 없는 것입니다. 즉 無善惡, 無比較의 상태를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원하는 일이 생기면 여러분들은 그것을 성취하려고 심리적으로 노력을 하게 됩니다. 이 노력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항상 불행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하나 一心을 흐리게 하는 것으로 '分離性'을 들 수 있습니다. 미래에 되고자 하는 나와 아직 되지 못한 현재의 나 사이의 분리상태, 그리고 마음과 육체를 갈라놓는 양극적인 사고방식은 분리성을 잘 나타내 줍니다. 이것은 의학마저도 황폐시켰습니다. 바로 이 분리성에서 시간이 창조됩니다. 심리적인 시간이 없어져야 우리는 一心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至於至善"이라고 했습니다. 큰 학문의 道는 밝고 밝은 德을 밝히는 것이며, 그것을 지극한 善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밝고 밝은 덕이란 一心의 세계를 일컫는 것이며 至於至善이란 지극한 선에 이르는 것인 바 至於至善한 사람은 선악의 분리가 없습니다. 一心이란 시간이 없는 것이며, 현재의 나와, 되고자 하는 미래의 나와의 노력을 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강의를 들으면서 명의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시간이란 현재의 내가 미래에 되고자 하는 나와의 어떤 중간적 과정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굉장히 이해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저 크리슈나무르티의 책을 몇 번 읽어가지고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 이것 참 이해하기 힘든데 우선 적어 놓고 나중에 집에 가서 생각해 봐야지"한다면, 이것이 바로 사량분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性情을 觀해야 비로소 一心으로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3) 歸源 

  하느님을 부정하는 어떤 사람이 목사에게 "하느님이 눈에 보입니까? 그 존재를 설명해 보시오"하자, 목사가 말하기를 "당신은 부인을 사랑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물론 사랑하지요" "그렇다면 그 사랑하는 마음을 어디 좀 내 놔 보시오" 그 때 그 사람은 크게 느끼고 종교에 귀의했다고 합니다

  의학과 종교의 기본요건은 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原典을 위주로 가르치던 노교수님들은 전부 쫓겨나고, 말만 교묘하게 연결 잘하는 세력있는 교수들이 우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학문이란 原典을 위주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작게는 한의학에서부터 크게는 인류 전체가 다시 古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原典보다는 한방해설서를 읽기를 더 좋아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몇 자 보지않고서 골치 아프다고 던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原典의 道가 그 정도에서 쉽게 드러난다면 왜, 周易을 가지고 입산을 하겠습니까? 하다 못해 姓名哲學 운운하는 점장이들도 10년 입산수도를 한다는데, 우리는 왜 "內經"한장 붙들고 10년 입산수도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옛날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참으로 아름다왔습니다. "內經"에 나오는 黃帝와 岐伯의 대화를 보십시오

 

"이것을 가르쳐야 될 사람에게 가르치지 않는 것도 죄이며, 또 가르치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도 죄다. 금궤에 넣어 깊이 잘 보관하라." 

 

  이러한 岐伯의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는 黃帝의 모습에서 진리가 서로 상통하는 어떤 法悅을 느낄 수 있으며 이러한 법열은 진리에서만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어디에 써 놓았습니까? 그것은 原典, 즉 經인 것입니다. 아무리 傷寒論이 훌륭하지만 論 이상의 명칭은 붙일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燥한 기운에 傷했다 한다면 傷燥論이라 이름 붙일 수 있겠지만, 감히 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經은 바로 거룩한 성인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원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바로 전체로 돌아가자는 말인 것입니다. 성직자가 "나는 깨끗하고 속인인 너희들은 더러워"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一心으로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도인이라면 마음 속에 분리가 없고 시간성도 없는 전체성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성스러움이란 전체성이지 비천한 것과 비교했을 때 자기의 높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성인의 경전을 연구하자는 뜻이며, 바로 전체성을 깨닫자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것이 귀원인 것입니다. 선택을 하지 말고 전체를 사랑하십시오, 부분이 아닌 전체성이란, 마음을 보았으면 육체를 보는 것이고 육체를 보면 또한 마음도 보게됨을 말합니다

  周易八卦를 보면 "乾兌 裏 辰 巽 坎 艮 坤"이 있는데, 이것은 唯心的, 無形的, 氣形的이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하늘, , 불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는 강좌는 전적으로 유심적인 한방론에 속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물론적인 것은 너무나도 많이 파헤쳐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둘을 합해야 전체가 되지 유물 혹은 유심의 어느 하나를 아무리 깊이 공부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전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太極, 陰陽, 四象, 八卦 중 어느 하나만 논한 것은 그저 논일 따름입니다. 주역의 논리가 그러하듯 옛 성현의 경전에는 전체성이 들어 있습니다. "黃帝內經"을 보면 厥陰風만 언급한 것이 아니라 太陽寒水까지 六氣를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또 六氣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六氣의 물질적인 차원과 유심적인 차원도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다. 맛도 五味가 다 들어 있고, 색도 五色이 다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로 전체성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혹자는 "색이 수십 종인데 어찌 五色이 전체가 됩니까?" 하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그 수십종의 색은 기본색에서 나온 것임을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에는 항상 상대성이 있습니다. '전체성과 상대성'이 두 가지의 의미는 진리를 論한 經典에는 어디에고 담겨져 있습니다. 주역의 64괘 중 32괘는 길한 괘, 32괘는 흉한 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 , , '이 無常하다는 이야깁니다

  전체성과 상대성 외에 無常性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無常性의 진리입니다. 주역의 易字가 '쉬울 이'자로도 쓰이지만 사실은 '변할 역'자이지요. 五行이라는 것도 변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은 변해간다는 것이지요. 그리이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조금 전 강의 시작 때와 지금은 또 달라져 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고정관념과 기억만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석가는 깨닫고 나서 "이 세상 다할 때까지 변하지 않는 어떤 法印이 있는데 그것은 곧 諸行無常이다"라고 갈파했습니다. 모든 것은 無常하여 恒常된 것이 없다는 탁월한 진리만이 恒常된 진리라 했습니다. 全體性과 相對性 그리고 無常性에 대한 탁월한 인식을 이 40일 동안 가지고 살도록 하십시오

  사람의 병도 변하고 성격도 변하고 사회도 변하고 우주도 변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열심히 관찰해야 할 것은 여러분의 심리상태가 변하는 것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일입니다. 예민하고 날카롭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無常性과 相對性에 대한 인식을 "黃帝內經"을 통해서 공부하게 되면 五運六氣는 참으로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역팔괘라는 것은, 64괘로써 우주만물의 모든 변화상을 알기 쉽게 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道로 들어가게 하는 방편인 것입니다. 五運六氣法만 하더라도 甲子, 乙丑, 丙寅, 丁卯...가 있는데, 甲子라는 두 글자 안에 포함하고 있는 의미만 해도 엄청난 것입니다. 예를 들어, 五運六氣를 공부한 사람들은 乙丑年 여름쯤 되면 濕하고 熱이 많아서 濕熱 쪽의 병이 많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예측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 현재 일을 미루어 봐서 미래 일을 예측하는 예지능력이 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자산인 것입니다

  경전이 갖는 의미 중에는 全體性, 相對性, 無常性 다음으로 無我性이 있습니다. 즐거움 중에서도 최고의 즐거움은 무아의 즐거움입니다. 인간의 性的인 면을 따져보아도 무아를 제일로 여기지요. 그런데 이것은 육체적인 무아가 아니라, 내가 없는, 즉 나의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상대적이고 또한 항상된 나()가 없는 무상의 나를 나라고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도표를 잘 보십시오. 이 안에 全體性, 相對性, 無常性, 無我性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열두가지 동물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냐? 그것은 '인간은 어디에 속하는가'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옛날사람들이 쥐에서 돼지까지 공연히 배열시켜 놓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甲子, 乙丑... 왼쪽으로 돌아가니까 無常性이 있고 子와 午는 少陰君火로서 相對的이고, 또한 卯와 酉가 相對的입니다. 干支, 東西南北, 五行...... 이 모두는 相對的인 無常性으로 이야기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라고 일정하게 지칭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상기의 4가지 특징을 모두 함유하고 있는 경전으로 돌아가주시기 바랍니다

  佛經, 聖經, 黃帝內經, 外經, 醫學入門...을 공부하십시오. 그렇게도 잘 써놓은 "醫學入門"도 제목을 入門이라고한 이 겸손을 보십시오. 요즈음엔 경전에 대한 論을 쓰는 사람도 없고 대만에서 베껴온 것을 가지고 무슨 총서니 어쩌고 하더니 급기야는 경전 자체를 부정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원전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내가 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원을 하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드린 말씀을 요약하겠습니다

 

  첫째, 나를 개혁하자는 것입니다. 개혁하여 무엇을 찾느냐? 바로 참다운 나를 찾기 위해서 七情(喜 怒 哀 樂 愛 惡 慾)과 忿怒, 慾心 등으로부터 자유로와지자는 것입니다

 

  둘째는 一心입니다. 一心을 어떻게 터득하느냐? 그 방법은 觀心法입니다. 자기 마음을 觀하는 이 觀心法은 항상 자기가 어떤 생각이나 어떤 행동을 하든지, 하지 말라는(남성적) 것이 아니고 깨어 있으라는(여성적) 말입니다. 물고기가 노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듯이 자기에게 일어나는 생각을 망연히 관찰하십시오, 인식의 세계는 물론 무의식적인 세계까지도 들여다봐야 될른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것은 엄청난 각성을 필요로 하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一心의 특징은 선악의 비교가 없으므로 선택성이 없으며 無時間性입니다. 禪家에서 "至道는 無難하니 唯嫌揀擇이라(至極한 道는 어렵지 아니하니 오직 揀擇하는 것을 嫌惡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선택하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나중에 주역을 강의 할 때 나오는 '五巽風'을 보면, ''자에 책받침만 가하면 선택할 ''이 됩니다. 따라서 ''이란 손()에서 나온 것이며, 五巽風은 바람이라는 뜻이 아니고 유심적인 상황에서 나온 의미입니다. 그런데 어떤 무엇을 뽑느냐 하는 것은 차차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저의 선실 입구에 걸려 있는 사진을 보십시오. 제일 왼쪽이 제 사부이신 혜암노선사, 그 옆이 제 사부의 사부이신 만공스님, 그 다음이 제 사부의 사부의 사부이신 구한말 그 유명했던 경허선사십니다. 아주 기인에다 걸출한 분이셨습니다. 제가 바로 그 분의 증손자뻘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것을 'Ego의 同一視現狀'이라고 합니다. 위대하신 분들과 동일시함으로써 나를 높이는 행위이죠.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일견 좋은 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자꾸만 가중되는 일상의 타락으로부터 그분들은 언제나 저를 지켜주는 방패막이 구실을 하기도 하니까요

  어쨌든 그 경허선사가 하루는 자기 스승이 "자비를 베풀라, 착해져라, 계율을 지켜라, 고기를 먹지 말라, 어떻게든 아름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대중 앞에서 이야기를 마치자, 경허스님이 갑자기 일어나 올라가더니 자기 스승한테 "스님께서, 착해져라 아름다와져라 하시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중과 스님들은 깜짝 놀랬어요. 경허스님은 또 "창녀는 창녀대로, 도둑놈은 도둑놈대로, 조약돌은 조약돌대로 다 쓸 데가 있다고 여깁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 엄마나 누나를 보십시오. 술집여자나 창녀를 보면 "더러운 년, 저런 애들하고 아예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욕을 하는 그 입을 정숙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더러운 생각을 일으킨 자기 자신이 더러운 것입니다

 

  "부녀가 구하는 것은 남성이며 마음 돌리는 곳은 장식품, 화장품이며, 의지하는 곳은 자식이며, 집착하는 것은 남편을 독점하는 것이며, 궁극의 목표는 지배권이다

 

  아함경에 담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여자는 이토록 아집과 집착으로 싸여 다루기가 몹시 힘들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요즈음에 이것은 비단 여자들에게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지요. 대부분의 남성들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지요. 선악을 비교하고 더불어 무엇은 '옳다 그르다' 자기 중심적인 방법으로 선택을 수시로 하고 있습니다

  無時間性! 우리는 뭐가 되고 싶어서 안달을 합니다. 이곳에 舍岩針法을 배우러 온 것도 뭐가 되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근원만 지적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본래 완전한 존재인데 더 무엇이 되기를 원합니까? "엄마! 나 이 다음에 커서 임금이 될래"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이게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무엇이 되고 싶어서 안절부절 못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歸源입니다. 相對性, 無常性, 無我性, 全體性 등이 포함된 經典이 우리 한방 동양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입니다. 아니 그저 그 자체가 이야기의 부분이기 때문에 사상이라고 얘기할 것도 없습니다. 만약 이 모든 것을 깨달아서 至人이 되고 眞人이 되고 또 聖人이 되면 굳이 諸味十八湯을 안 먹어도 됩니다. 침 맞을 필요가 없읍니다. 제일 낮은 차원의 방법인 약과 침을 왜 씁니까. 그런데 마음을 한 번 자꾸 비교하는 쪽으로 신경을 써 보십시오. 그러면 금방 병이 옵니다. 과거의 기억에 자꾸 집착하면 마침내는 중풍이 오게 됩니다. 중풍은 바람 맞아서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제가 종로 5가에 있을 때 중풍 걸린 한 부인의 예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한 부인이 미장원에서 머리를 하고 있는데, 입술과 손톱이 새빨간 젊은 여자들이 들어와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 그 김사장 말이야 팁을 20만원씩이나 주고 가더라 얘, 양기도 없게 생긴 사람이 돈으로 날 유혹하려고 하잖니

별 이상한 소리를 다 하면서 떠드는 소리를 듣고, 그 부인은 속으로 

  "김사장이라는 참 골빈 사람도 있구나..." 

하며 계속 들어보니

  "아 그 김사장, 대머리에 똥배 나온 사람 말이지?" 

  "그래 ○○물산 김사장 말이야

  그 순간 이야기를 듣고 있던 부인의 입이 그만 확 돌아가 버렸어요. 김사장이 바로 남편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바람 맞았다고 합니다. 아시겠어요? 그 말을 딱 듣는 순간 왜 고혈압이 되었겠습니까. 그 상황을 이겨내지 못한 거지요. 그런데 양방에는 치료의 한계가 있습니다. 온갖 방법으로 중풍 치료를 해도 "글쎄요. 안되겠는데요" 이것이 바로 양방입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하고 환자 가족이 물으면 "글쎄요. 한의원에나 가 보세요" 그러거든요. 아니! 한의원은 자기네들이 포기한 환자를 보는 곳 입니까? 장의사 옆집이 한의원입니까? 이렇게 이 모든 병의 원인은 모두 마음에서 비롯된 장난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을 들여다볼 생각은 않고 병의 겉면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바로 양방의 맹점인 것입니다. 오늘날 그 많은 질병 중 원인을 모르는 Unknown이란 병명이 얼마나 많습니까? 양방이 가진 이 허물, 간디도 양방을 '악마의 의술'이라 했습니다. 고기를 썰고 실로 꿰매고 하는 것은 여자들도 잘 합니다. 그건 일종의 기능사일 뿐입니다

  우리는 至人이 되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至人이라고 하는 것은 無時間性, 無善惡性, 無比較性, 無分離性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공부를 하고 난 뒤에 약을 다룹니다. 四物湯은 비쩍 말라서 血이 부족한 데에 쓰고, 뚱뚱한데 기운이 없으면 四君子湯을 쓰고, 맥주 먹고 체했을 때 티밥이나 웨하스 먹으면 금방 속이 가라 앉습니다. 五運六氣를 공부하면 이런 것들이 사실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러한 모든 것을 배우고 익혀 중생을 이롭게 하는 饒益蒼生의 길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익힌 다음에는 蒼生을 이롭게 해야지요. "饒益蒼生"의 거창한 명제를 가지고 제가 이 강의를 하는 것입니다. 內革을 해서 蒼生들을 이롭게 하자는 것이 바로 이 舍岩針法 강의의 명분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암침법을 배워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고 이익되게 해야지요

  설령 미래의 부귀를 위해서 한의대에 입학했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마음을 크게 가지십시오. 저희들 공부할 때는 줄만 서면 입학을 했을 뿐 아니라 정말 공부 안했습니다. 지금은 그것을 철천지 恨으로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다릅니다. 성적도 우수하고, 날카로운 지성을 갖고 현실에 대한 많은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학자로서 현재의 의학풍토에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기타의 의문들은 그것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맡기십시오

  크리슈나무르티가 모든 도의 출발은 먼저 의심하는 데에서부터라고 하였듯이 의심할 수 있는 지성을 갖고 학문에 접근해야 합니다. 안으로 나를 개혁해서 七情으로부터 자유스럽고 一心으로 돌아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나의 마음을 읽을 줄 알며 原典으로 귀의하여 饒益蒼生하여야 합니다

 

  ! 이제 이 네 가지 명분을 가슴에 새기고 공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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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남촌선생

 

매주 일요일15:00정기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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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성 위장병 고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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