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어(古語)에 이르기를, “땅에 금을 그어놓고 감옥이라고 해도,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감옥 속에서는 하루가 한 해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손에는 쇠고랑을 채우고 발에는 차꼬를 채우는 등 감금(勘禁)이 매우 견고하기 때문에 몸이 가려워도 긁을 수 없고 얼굴이 더러워도 씻을 수 없으며, 음식도 제때에 먹지 못하고 배고픔과 목마름이 번갈아 공격하여 모든 행위가 모두 자유스럽지 못하므로, 극도로 괴로운 것이 마치 뜨거운 물이나 불길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한 달을 보내는 것이 한 해와 같은 것입니다. 만약 제날짜에 판결을 내리지 않고 시일을 끈다면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또 인심이 어지러워 쟁송(爭訟)이 날로 많아지니, 한 사람의 옥사에 연루되는 자는 수십 명입니다. 양쪽에서 만들어내는 말이 교묘하기 짝이 없어 흰 것을 검은 것으로 만들고 빈 것을 찬 것으로 만들어 송사를 맡은 자로 하여금 현혹되어 어떻게 단서를 잡아내야 할지 모르게 만듭니다. 만약 총명하고 과감한 자가 아니라면, 장차 말을 듣고 모습을 살펴서 숨긴 것을 적발해 내어, 그들로 하여금 실정을 다 고하고 죄를 자복하여 억울함을 펼 수 있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개 작게는 채찍질과 몽둥이질에서부터 참수하는 형벌의 경우까지, 끊어진 것은 다시 이을 수 없고,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한 번 잘못 판단한 것이 있으면, 후회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죽은 자는 그만이고, 고아와 과부는 원통함을 머금고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칠 따름입니다. 이제 수십 일 동안 이어진 가뭄 때문에 하교를 내려 직언을 구하셨는데,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 보아도 위로는 잘못된 정사가 없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이 없어서 가뭄을 부를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타는 듯한 재해가 이처럼 심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잘못이 없는데 무단히 일어난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보잘것없는 신이 잘못 형조의 장관을 맡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보좌하는 참모가 있어서 서로 논의를 하더라도 가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신의 결정이 필요합니다. 신이 노쇠하고 병이 들어 혼망한 것은 위에서 아뢴 바와 같거니와, 판결해야 할 즈음에 경중이 전도되어 억울함을 끼친 경우가 많습니다. 옛날에 한 여인의 죽음으로 인해 3년 동안 가뭄이 들었을 정도이니, 하물며 한 사람에 그치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신을 파직하시고 다시 밝고 미더운 사람을 택하여 형벌을 자세히 살피는 직임을 주소서. 그리하여 위로 하늘의 꾸짖음에 답하여 재해를 복으로 바꾸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古語曰。畫地爲獄。期不入。又曰。囹圄之中。度日如年。以其杻手械足。勘禁甚固。身癢不得搔。面垢不得洗。飮食不時。飢渴交攻。凡百攸爲。皆不自由。困苦之極。如在湯火。所以度月如年也。苟不剋日剖決。延引時月。則豈不冤哉。且人心淆訛。爭訟日繁。一人之獄。連逮數十。兩造之辭。巧詐百端。轉白爲黑。變虛爲實。使聽訟者。眩瞀迷惑。而莫知端倪。苟非聰明剛果者。將不能聽辭稽貌。發摘隱伏。而使之輸情服辜。冤枉得申矣。夫自鞭扑之微。以至殊死之刑。斷者不復續。死者不復生。一有所誤。噬臍莫及。死者已矣。孤兒寡婦。含冤抱痛。仰天搥胸。繼之以血。傷和召災。職此之由。今者。以連旬旱暵。下敎求言。臣反覆思之。上無闕政。下無民瘼。靡有召旱之端。而焚惔之災。至於此極。斯豈無釁而罔作歟。正由微臣謬長刑官。雖有參佐。相與論議。至於可否。必待臣決。臣之衰疾昏妄。如上所陳。聽斷之際。輕重失所。以貽冤屈者。多矣。昔一女之死。三年枯旱。況不止一人乎。伏惟聖上亟罷臣職。更擇明允者。以授詳刑之任。仰答天譴。變災爲福。幸甚。
- 이승소(李承召, 1422~1484), 「사형조판서장(辭刑曹判書狀)」, 『삼탄선생집(三灘先生集)』 권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