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물의’라는 괴물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세상 사람들의 평판에 민감하다. 외부의 시선에 민감한 까닭에, 자신으로 인해 사회적 ‘물의’가 발생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물의’란 여러 사람의 평판을 뜻하는 말로, ‘물론(物論)’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이 ‘물의’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뚜렷한 실체도 없고 나타남과 사라짐의 지점을 포착하기 힘든, 마치 유령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조의 선비들은 이 정체 모를 ‘물의’를 다루는 데 상당한 공력을 들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 괴물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천하의 재사로 꼽혔던 다산(茶山)도 이 세상의 ‘물의’ 앞에서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가 형인 약현(若鉉)에 대해 쓴 묘지명에는, “신유년의 화에 우리 형제 3인이 모두 기괴한 화(禍)에 걸려서 하나는 죽고 둘은 귀양 갔다. 그런데 공은 조용하게 ‘물의’ 가운데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우리 문호를 보전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물의’의 한가운데에 들어가면 자칫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웠던 것이 당시의 엄혹한 현실이었다.
이러니 당시의 지식인들은 당연히 이 종잡을 수 없는 중론(衆論)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에 부심하였다. 백호(白湖) 윤휴(尹鑴)는 ‘물의’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삼자(三刺)의 계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첫째는 여러 신하에게 묻는 것이고, 둘째는 여러 관리에게 묻는 것이고, 셋째는 백성들에게 물어서 몽롱한 상태의 ‘물의’를 좀 더 명료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세간에 떠도는 중론이 과연 백성들의 여론을 얼마나 적실하게 반영하고 있는지를 밝히고자 하는 노력으로, 오늘날 정치권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 즉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물의’가 발생하면, 더 크고 강력한 또 다른 ‘물의’를 터트려 앞선 ‘물의’를 덮어 버리는 태도와는 구별된다.
2. 조선조 정치와 ‘물의(物議)’
조선왕조실록을 펴 보면 조선조 정치인들이 야기했던 수많은 ‘물의’들이 눈길을 끈다. 정치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속성은 지금이나 예나 다름이 없는 것 같다. 또한 “매 앞에 장사 없다.”라는 말처럼, 조선 시대에도 ‘물의’ 앞에 무너지지 않는 관료들은 없었다. 태종 대의 실록 기록에는 겁 없이 군자(軍資)에 속해 있던 양전(良田)으로 친한 사람의 척박한 전지와 바꾸고, 또 남의 양전을 흠씬 빼앗아 친한 사람에게 주었다가 사회적으로 큰 ‘물의’가 발생하고, 이내 하옥되어 영어의 몸이 된 관료의 행적이 소상하게 담겨 있다.
성군인 세종의 치세 기간 중에도 세간의 ‘물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겁 없는 고위관료들이 없어지지 않았다. 세종 11년(1429)의 기록에는 해주 목사로 제수된 인물이 매양 수령이 될 때마다 ‘물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제 뜻대로 관물을 낭비하고, 오직 술 마시는 것만을 일삼으며, 권귀(權貴)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등 못 하는 일이 없는 자라고 혹평하는 내용이 나온다. 세간의 평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윗사람들의 비위나 맞추는 전형적인 탐관오리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사간원 좌사간이었던 유계문(柳季聞)은 아예 국가에서 중요한 인선을 할 때에는 반드시 ‘물의’에 맞는 자를 택하여 임명할 것을 계청(啓請)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제는 정치에 ‘물의’를 적절히 이용하려는 자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하였다. 정적을 억누르고 배척하는 데에 세간의 평판인 ‘물의’만큼 좋은 무기도 없었다. 말하자면 조선판 포퓰리즘의 출현이다. 누구누구는 세평이 흉흉하니 당상관으로서는 적임이 아니고, 어떤 인물은 ‘물의’가 없는 인물이니 중용해도 무방하리라는 진언이 잇달아 나타났다. 특히 사림파들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중종, 명종 대에 이르면 훈구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에서는 이 ‘물의’의 해석을 놓고 치열한 논전이 전개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측의 주장이 공의(公義)에 근거한 해석인지 쉽게 분간할 수 없는 난타전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사헌부에서는 “필선(弼善) 아무개는 평소 ‘물의’가 있었기 때문에 지난번 필선으로 있을 때 논박 받아 체직된 경력이 있습니다.”라고 ‘물의’를 무기로 삼아 상대편을 한사코 세자시강원에서 몰아내고자 획책한다. 또 다른 진영에서는, “우후(虞候)ㆍ첨사(僉使)ㆍ대호군(大護軍)을 모두 실직(實職)으로 논하여 함께 당상으로 올려주었는데, ‘물의’가 지금까지 그르다고 합니다.”라고 하여 ‘물의’를 무관직에 대한 견제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한다. 일견 뚜렷한 실체가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한 이 ‘물의’라는 유령은 동굴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수시로 정치의 공간에 출현하여 그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물의’라는 괴물은 과연 민의를 대변하고 있었는가, 아닌가? 모를 일이다.
3. ‘물의(物議)’, 과연 공론인가?
조선 후기에 들어, 정치의 공간에 유령처럼 출몰하는 ‘물의’에 대해 날카로운 창끝을 겨눈 학자가 등장하였다. 바로 『우서』의 저자인 유수원(柳壽垣)이다. 그는 아예 「논물의(論物議)」라는 글을 작심하고 썼다. 그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의 요점을 논할 때는 반드시 ‘물의’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훼예 통색(毁譽通塞)이 이로부터 비롯되고, 바른 품행과 거취가 여기에 매여 있어, 세도(世道)를 유지하는 것에 큰 힘이 된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유수원은, 여론에는 일정한 공의가 들어가 있으므로 잘 살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일단 ‘물의’에도 상당히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정치의 영역에서 이 ‘물의’가 가져오는 부정적 영향에 더욱 주목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른바 ‘물의’라는 것은 여러 중인(衆人)들의 말인데, 중인들의 여론은 사실 공정(公正)한 경우도 있고 또 잘못된 것인 경우도 있으나, 이는 굳이 따지면 사사로운 의견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를 다스리는 데 어떻게 이 사사로운 견해에 따라야 할 이치가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물의’의 생성은 결코 자연발생적이고 무의지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하면서, ‘물의’의 배후에는 그것을 만들어 내는 이른바 주론자(主論者)들이 있다고 보았다. 이 주론자들은 대부분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문벌들이거나 당시의 벌열 가문들이며, 이런 힘 있는 자들이 자의로 여론을 조작해 낸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언관의 막중한 책임을 맡은 삼사(三司)마저도 자기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등한히 버려두고, 스스로 시비를 분별하려는 노력도 포기한 채, 분주하게 주론자의 말만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무리로 보았다. 이에 따라서 소위 명류(名流)라고 하는 자들이 기껏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앉아 오직 ‘시론(時論)이 어떠하다’ 거나, ‘물의가 어떠하다’ 하는 것에 변죽만 울리는 일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언론이나 지식인이나 할 것 없이 주론자들이 만들어 낸 ‘물의’를 좇아 이리 휘청 저리 휘청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견이 없고 자기 의사가 없이 ‘물의’를 좇아 움직이다 보니, “시비 가운데 또 새로 나온 시비가 끝이 없고 기관(機關) 가운데 또 새로 나온 기관이 무수하여 사단(事端)은 한이 없고 시끄럽게 구는 것은 끝이 없어서 조정의 체면이 말이 아닌 지경”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당론(黨論)이 생기기 이미 오래전의 폐습이라는 것이 유수원의 진단이었다. 그는 온 세상이 비난하는 것이라고 하여 다 참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며, 온 세상이 칭찬한다고 하여 모두가 다 참으로 칭찬할 만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물의’에 덜렁거리며 따라가다가는 우중 정치(愚衆政治)의 덫에 걸릴 위험이 있음을 경고하였다.
4. ‘물의(物議)’가 공의(公議)가 되려면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정체모를 ‘물의’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미성년 상태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평범한 사람들은 대체로 항상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곁눈질하고, 사실상 모두 빌린 의견들만을 갖고 다닌다고 꼬집는다. 사람들은 ‘물의’를 손에 넣을 기회가 생기면 탐욕스럽게도 이것을 자기 것이라 사칭하며, 뽐내는 것에 열중한다는 것이다. 또한 가장무도회에서 복장을 대여하는 사람들이 가짜 보석들만을 내주듯 직업적인 의견 대여자, 즉 언론들은 대개 가짜 상품들만을 내주고 있는 것이 쓸 데 없는 ‘물의’를 만드는 주범이라고도 꼬집는다.(랄프 비너) 지독한 엘리트주의자인 그의 허세가 묻어나는 독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태를 보면, 이 따끔한 비아냥거림 속에는 마냥 웃어넘길 수 없는 진실이 있다. 요컨대 본인이 스스로를 신뢰하고, 주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부질없는 ‘물의’가 사그라진다는 것이다.
유수원은 ‘물의’에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사사로운 원한을 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공적인 입장을 빌린 물의이다. 둘째는, 자신의 당파(黨派)를 위해 상대를 배척하려는 물의이다. 셋째는,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 사의(私意)만이 횡행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겨 가끔 공정하지 못함을 항의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공심(公心)과 공언(公言)의 물의라는 것이다. 이 세 번째 물의가 바로 참다운 물의, 즉 ‘공의’가 될 것인데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렇게 공심과 공언에서 나온 ‘물의’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 오로지 사사로운 원한이나 당파를 위한 ‘물의’만이 나날이 성해져 가기 때문이라는 것이 유수원의 지적이다. 그는 ‘물의’가 참된 공의가 되려면 우선 정치문화와 정치시스템의 개혁부터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정치에서 물론(物論)을 중시하는 이유는 관제(官制)가 허술하고 관리의 임명에 법도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으로 신복(信服)하지 않고, 신복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서 이른바 ‘물의’라는 것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만약 유수원이 오늘 우리들이 만들어내는 이 온갖 치졸한 ‘물의’를 목도한다면 과연 어떤 처방을 제시해줄까? 과연 처방을 내릴 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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