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탕평채(蕩平菜)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11. 26. 11:55

- 이백아흔여덟 번째 이야기
2013년 11월 25일 (월)
탕평옷도 있고 탕평띠도 있습니다  
                             - 임성주가 송문흠에게 보낸 편지
  탕평채(蕩平菜)라는 음식이 있다. 각색(各色)의 묵을 섞어서 버무린 것인데, 속설에 의하면 영조의 탕평을 기리기 위하여 만들어진 음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탕평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탕평옷도 있고, 탕평띠도 있고, 탕평갓도 있고, 심지어는 탕평부채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둘이 같은 의미는 아니었던 모양인가보다. 아랫글은 임성주가 송문흠에게 보내는 편지에 수록된 것으로 영조의 탕평을 비판하는 상소에 넣을 조목으로 작성된 글이다.

  근래 탕평 두 글자는 바로 저잣거리의 노랫가락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 모는 아이나 말 끄는 군졸이라도, 말이 조금이라도 애매하여 이쪽도 옳다 하고 저쪽도 옳다 하거나, 둘 다 그르다고 하면 곧장 탕평이라고 지목하여 한바탕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옷에도 탕평이 있고, 띠에도 탕평이 있으며, 부채에도 있으니 지극히 우매한 백성의 소견이 참으로 정곡을 꿰뚫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저절로 하나의 바른 공론(公論)이 생긴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차마 어떻게 이 삼백 년 종묘사직을 웃음거리로 만드신단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단연코 탕평 두 글자를 가지고 국시를 삼으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논의하지 못하도록 하셨지만, 신이 보기에는 다만 뻔뻔한 한 두 사람만이 옳다고 여길 뿐이며, 온 나라의 어진 선비와 관리들은 아무도 옳다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단지 어진 선비와 관리뿐이 아닙니다. 저 미천한 소몰이 아이와 말 끄는 군졸까지도 역시 아무도 옳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저 한 두 사람의 식견이 한 나라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날 수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近來蕩平二字。便成街謠。雖牛童馬卒。稍見言語糢糊。兩可雙非者。便指爲蕩平。以爲戱劇。以至衣有蕩平帶有蕩平扇有蕩平。卽見至愚而神處。自有不易之公論。殿下何忍以三百年宗社。爲戱劇耶。殿下以此二字。斷爲國是。使人莫得而議。然以臣觀之。獨一二無恥之輩。以爲是耳。一國之賢士大夫無以爲是也。不但賢士大夫無以爲是。下至牛童馬卒。亦無一人以爲是也。豈彼一二人見識 獨能高出於一國人而然也。
 
- 임성주(任聖周, 1711~1788), 「송문흠에게 보낸 편지[與宋兄士行]」, 『녹문집(鹿門集)』권3

  
  이 글은 영조의 탕평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기 위하여 서로 간에 논의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작성 시기는 대략 영조 12년(1736년)경으로 보인다. 이 글을 지은 임성주는 김원행, 송명흠, 송문흠 등과 교류한 학자로서 이들 모두는 송시열의 계보를 잇는 이재(李縡)의 제자였다. 이들은 비록 주요 관직에 있지는 않았지만, 동일 그룹 내의 관료를 통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이 편지 역시 그런 과정 중에 나온 것으로 상소를 올린 사람은 이정보(李鼎輔)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정보가 지평(持平)으로 있으면서 올린 시무십이조(時務十二條)의 상소 가운데 이 글의 일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한눈에 알 수 있듯이 탕평띠니 탕평관이니 하는 것은 탕평을 조롱하는 말 이상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것은 탕평이며, 그래서 조금만 애매모호하면 모조리 가져다 탕평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다. 조금 격하게 말한다면 비빔밥이요 잡탕이라는 뜻일 게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탕평을 반대하고 있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애들까지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왕이 국시(國是)로 내놓은 것을 신료들이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저잣거리 애들까지 조롱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욱이 극도로 격화된 당쟁의 시대에 모두 그것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없애자고 내놓은 탕평을, 저토록 온 백성이 조롱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주희는 『논어집주(論語集註)』 「위정편(爲政篇)」 첫머리에서 “정(政)이란 바룬다(正)는 말이다. 즉 바르지 않는 것을 바로 잡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전통시대 정치행위란 시(是)와 비(非), 정(正)과 사(邪), 충(忠)과 역(逆)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 그 자체인 것이다. 정치 자체가 시비를 가르는 행위이다 보니 양립할 수 없는 분파의 형성은 필연적이다. 더욱이 시비는 절충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며 오직 판단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으니, 결국 구조적으로 판단자를 스스로 요구할 수밖에 없다. 조선 중기 이후 격화된 당쟁을 겪으면서 모든 이가 시비(是非)나 충역(忠逆)의 한편에 설 수밖에 없었던 역사를 가진 우리가 타협과 절충을 옳게 여기지 않고 끝없이 시비에 골몰하는 모습이 일견 이해도 된다.


  

  
서정문 글쓴이 : 서정문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주요저역서
      - 조선시대 당쟁사를 공부했고, 논문으로는 「고전번역의 역사적 맥락에서 본 비문 문제」 2009, 「고전번역사업의 새로운 목표설정을 위한 시론」 2010 등이 있으며, 번역으로는 『명재유고』공역, 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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