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조의 탕평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기 위하여 서로 간에 논의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작성 시기는 대략 영조 12년(1736년)경으로 보인다. 이 글을 지은 임성주는 김원행, 송명흠, 송문흠 등과 교류한 학자로서 이들 모두는 송시열의 계보를 잇는 이재(李縡)의 제자였다. 이들은 비록 주요 관직에 있지는 않았지만, 동일 그룹 내의 관료를 통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이 편지 역시 그런 과정 중에 나온 것으로 상소를 올린 사람은 이정보(李鼎輔)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정보가 지평(持平)으로 있으면서 올린 시무십이조(時務十二條)의 상소 가운데 이 글의 일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한눈에 알 수 있듯이 탕평띠니 탕평관이니 하는 것은 탕평을 조롱하는 말 이상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것은 탕평이며, 그래서 조금만 애매모호하면 모조리 가져다 탕평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다. 조금 격하게 말한다면 비빔밥이요 잡탕이라는 뜻일 게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탕평을 반대하고 있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애들까지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왕이 국시(國是)로 내놓은 것을 신료들이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저잣거리 애들까지 조롱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욱이 극도로 격화된 당쟁의 시대에 모두 그것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없애자고 내놓은 탕평을, 저토록 온 백성이 조롱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주희는 『논어집주(論語集註)』 「위정편(爲政篇)」 첫머리에서 “정(政)이란 바룬다(正)는 말이다. 즉 바르지 않는 것을 바로 잡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전통시대 정치행위란 시(是)와 비(非), 정(正)과 사(邪), 충(忠)과 역(逆)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 그 자체인 것이다. 정치 자체가 시비를 가르는 행위이다 보니 양립할 수 없는 분파의 형성은 필연적이다. 더욱이 시비는 절충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며 오직 판단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으니, 결국 구조적으로 판단자를 스스로 요구할 수밖에 없다. 조선 중기 이후 격화된 당쟁을 겪으면서 모든 이가 시비(是非)나 충역(忠逆)의 한편에 설 수밖에 없었던 역사를 가진 우리가 타협과 절충을 옳게 여기지 않고 끝없이 시비에 골몰하는 모습이 일견 이해도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