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시작이 좋았더라도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12. 23. 20:31

- 이백스물여섯 번째 이야기
2013년 12월 19일 (목)
시작이 좋았더라도
시작이 좋았더라도 끝이 나쁜 경우는 열이면 늘 여덟아홉이고
시작이 나빴더라도 끝이 좋은 경우는 열에 한둘도 되지 않는다.

始善而終惡 十常八九 始惡而終善 十鮮一二
시선이종악 십상팔구 시악이종선 십선일이

- 유인석(柳麟錫, 1842~1915)
 「잡록(雜錄)」
 『의암집(毅菴集)』

 

  
  위 말은 구한말 국내외에서 항일 의병 활동을 주도했던 의암(毅菴)이 자기 생각을 간략히 적은 토막글의 하나이다.

  이 말은 어쩌면 지나친 비관론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비관론은 잔인하게도 우리 삶의 실제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좋게 시작한 타인과의 관계도 한순간에 원수지간으로 변할 때가 있다. 그런데 반대로 원수지간이던 두 집안이 나중에 화해해 사돈지간이 되었다는 얘기는 듣기 어렵다.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일을 진행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잘 시작한 일도 중도에 수많은 걸림돌을 만나 목적한 결실을 보지 못하기 십상이다.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떠한가? 많은 문제를 안고 시작한 일은 대부분 결실을 맺기는커녕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버겁다.

  이러한 관점은 시작과 끝이 있는 우리의 삶 자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건강한 몸으로 태어났어도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는 병들어 있는 경우가 열에 여덟아홉이다. 반면에, 눈이 나쁘게 태어난 사람이 나중에 눈이 밝게 되는 경우는 열에 한둘도 되지 않는다. 이렇듯이 우리네 삶의 모든 국면은 시작에서 끝으로 향할수록 엔트로피(entropy)가 증가하기 마련이고 그 역으로의 진행은 극히 어렵다.

  그러나 우리 삶의 모습이 이런 비관론으로 뒤덮인다고 해서 삶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삶을 뒤덮는 이런 비관론은, 우리 삶에서 반짝거리는 것이 무엇인지, 열 중에서 한둘밖에 되지 않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일깨운다. 어릴 때의 우정을 늘그막까지 그대로 유지한 두 노인의 삶에 귀 기울이게 되고, 한 우물을 파듯이 평생을 한 가지 일에 몰두한 사람의 인생을 찬미하게 되며, 타고난 신체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꿋꿋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삶의 경건함을 배우게 되고, 불신과 적대로 점철된 두 나라가 소통의 문을 열고 악수를 청할 때 그 용기에 감탄하게 된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위에서 말한 늘 그러한 ‘여덟아홉’의 반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둘’에 삶의 가치가 있고 살아갈 희망이 있다.

 

글쓴이 : 오재환(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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