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고전 글쓰기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12. 26. 22:01

- 예순아홉 번째 이야기
2013년 12월 25일 (수)
고전 글쓰기, 원칙은 지키되 규칙에 매달리지 말라


  “아니 어떻게 그리 고전에 해박해?”

   요즘 동료 기자들한테서 자주 듣는 물음이다. 20여 년을 한솥밥 먹으며 기자 생활을 해왔는데, 어느 날 내가 ‘조선 500년 익스트림’이라는 시사소설을 우리 신문 인터넷 매체에 연재해 인기를 좀 얻었더니 동료들이 놀란 모양이다. 그저 뉴스 보도문이나 쓰는 기자였는데, 오늘의 이슈를 조선 500년으로 끌고 들어가 과거 속에서 오늘을 비추어 내 의아했을 것이다.
   ‘조선 500년 익스트림’은 문학 장르로 치자면 시사소설이다. 사회적 또는 정치적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로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통속문학의 범주에 속한다. 우리 문학 판에선 이 장르가 여물지 않았다.
   이 소설은 지난 6월에 시작해 40편의 꼭지에 이를 만큼 쌓였다. 올 한 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각종 현안이 조선 역사 안에선 어떻게 용해되어 있는지를 소설적 기법을 통해 풀어냈다.
   소설 꼭지는 주로 정치 이슈가 단골이 될 수밖에 없다. 여야 간의 치열한 대립은 조선 붕당 간의 대립으로, 우리 사회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는 반상 간의 갈등으로 투사된 뒤 색띠를 띠게 된다. 독자는 그 색띠의 매력, 즉 이야기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꼭 정치적 이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11월 초 필리핀을 강타한 태풍 하이옌으로 수천 명의 사망자와 수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는데 그러한 국제 뉴스도 사해(四海) 소식이 되어 조선에 전해진다. 그 도입부만이라도 읽어보는 것이 도움될 것 같아 짤막하게 싣는다.

   “먹어. 먹어.”
  나주목 나장 조팔득이 기이하게 생긴 사람에게 주먹밥을 챙겨 주며 말했다. 그러나 그니는 눈만 껌뻑껌뻑할 뿐 선뜻 손을 내밀어 받지 못했다. 행여 받았다가 경을 칠까 두려워서였다. 그니는 제주에서 진도 벽파진으로 압송되던 배 안에서 선원들이 주는 밥 한 덩이를 받아먹다 놀림을 당했다.
   “꼭 생긴 것이 원숭이 같지 아녀. 저 눈썹 좀 보드라고. 숯검댕이처럼 새카매. 저것이 여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 것이야. 흐미. 미쳐 불것네.”
   그러면서 그 선원은 그니의 옷을 헤치고 살을 만졌다. 그러더니 사타구니 안으로 손을 쑥 넣어 불알을 잡는 것이었다.
   “포! 포!(싫다!)”
   “포? 뭐라는 겨…어구매. 찌깐 허네. 니 이것으로 거시기 해봤냐? 싸가지 없는 새끼. 근디 생각보다 엄청 부드럽네 잉. 어이, 니네 나라 계집년들도 이리 부드럽냐? 같이 표류하재 어째 사내새끼들만 표류하고 질알이여. 환장 허것다.”
   그 사내는 여송국(呂宋國ㆍ필리핀) 태풍 피해 표류인 비래누에버와 그 일행 5명이었다. 그들은 순조 1년(1801) 가을 제주 해안에 쪽배를 타고 목숨 부지한 채 닿았다. 해진 삼베옷(‘바롱’ㆍ필리핀 전통의상) 같은 홑옷 하나 걸친 것이 전부였다.
   제주 목사 한정운은 이들을 거두고 묘당(‘의정부’ㆍ국무총리실 격)에 고한 뒤 품지를 기다렸다.
   ‘본주에 이국인 5명이 표류해 왔으나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오랑캐 말이옵니다. 유구국(오키나와) 통사 경필진이란 자로 하여금 이들이 어느 나라 오랑캐인지 알아내도록 지시했으나 그 역시 말이 통하지 않아 실패했나이다.’
   의정부에서는 이에 비변사(국가정보원 격)를 투입했다. 비변사 당상(국가정보원장) 남일배는 제주 목사의 그러한 장계를 받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도입부는 ‘조선, 사해 정세에 까막눈…비변사, 필리핀 표류인 신원 파악조차 못해’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발표되는 순간 2천~2만 명의 독자가 클릭한다. 온라인상에서 역사 소설이 이러한 클릭 수를 얻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그 요인은 고전ㆍ역사라는 ‘가치’를 시사와 곁들여 ‘재미’있게 풀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재밌다는 것은 쉽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소설 속 괄호는 순전히 재미를 높이기 위해서 활용한다.
   한데 제아무리 온라인 독자라 하여도 남의 글을 읽을 때는 그 글을 읽으면 뭔가 한 가지 ‘배운다’는 욕구가 깔렸기 마련이다. 때문에 글을 쓰는 이의 자세에 따라 독자의 반응은 현격히 달라지기 마련이다.

  ‘조선 500년 익스트림’을 쓰면서 나는 고전연구자들의 과실을 손쉽게 따먹곤 한다. 한편으로 미안한 일이다.
   이를테면 한국고전번역원이 자체 홈페이지에 띄워 놓은 연구자 결과물인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을 중역하듯 되씹어 소설적 문장으로 표현해 낸다. 연구자들이야 자구 하나에도 충실해야 하는 학자들이라 원문 탈출이 힘들겠지만 나 같은 저널리스트는 재해석이 가능해 ‘손쉽게 따먹는’ 결례를 범하곤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 연구자들이 아니면 방송 및 미디어의 역사문화콘텐츠가 그렇게 풍성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본다. 나를 ‘지식 건달’로 이해해 달라.
   저널리스트는 독자에 대한 이해가 그 어느 필자군보다 잘 되어 있는 이들이다. 주제 찾는 능력과 독자 눈높이에 맞춘 문장력 구사가 장점일 것이다. ‘조선 500년 익스트림’이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두 가지 점을 간과하지 않아서라고 본다.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에게 글쓰기 강의를 할 때면 내가 밑줄 치고 강조하는 점이 있다.
   “당신들은 지금까지 글의 소비자로만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 작문, 논술 등을 써야 하는 글의 공급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글의 공급자는 을(乙)이다. 을이 을답게 해라. 그러기 위해선 ‘독자에 대한 서비스’ 개념으로 무장해라. 네가 쓴 글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독자가 읽어주지 않으면 죽은 글이다. 독자가 읽어주는 순간 생명이 생긴다.”

  ‘독자에 대한 서비스’  
  글쓰기 강의를 할 때 이 정신을 유독 강조한다.
  이를 가르치기 위해 학생들에게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라는 표현에 대해 묻는다.
   “입말로 평상시 이 표현을 어떻게 말하니?”
   “남자 친구와 헤어졌어요.”
   “그래, 그러면 속어로는 어떻게 말하니. 친한 친구들끼리 말할 때?”
   “남자 친구와 깨졌다.”
   “오 그래, 그러면 문장으로는?”
   “남자친구와 이별했다.”
   “음. 바로 그거야. ‘깨졌다’ ‘헤어졌다’ ‘이별하다’. 너희가 쓰는 문장의 수준이야. 독자 입장에서 세 유형은 전혀 읽고 싶은 욕구가 안 생겨. 그렇다면 남자 친구와 헤어지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지? 이를 문장으로 만들 경우 ‘이별은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일거야. 한데 이별 말고 별리(別離)라는 단어를 아니?”
   대부분 모른다고 답한다. 그러나 대학까지 16년간 공부한 아이들이라 눈치로 ‘이별’과 같은 뜻임을 알아챈다.
   그러면서 두 문장을 제시한다.
   ① 이별은 너무나 아프다.
   ② 별리, 너무나 아프다.
   “어느 문장이 마음에 드냐?”
  학생들은 예외 없이 2번을 택한다. 왜냐고 물으면 아픈 마음을 잘 전달하는 시어(詩語) 같다고 한다. “바로 그거다. 너희가 독자로서 그 문장이 마음에 들면, 글의 공급자로서도 그렇게 써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정약용 알지? 너희가 잘 아는 강진 다산초당으로 유배당했던 분. 그 다산이 유배 갈 때 형 정약전과 같이 떠나는 데 전남 나주 율정이란 역말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 날 형은 흑산도로, 자신은 강진으로 떠나게 되어 있었어. 그때 늙은 형을 떠나보내는 것이 너무나 마음 아픈 다산이 ‘율정별리’라는 시를 쓴다. 율정이라는 마을에서의 이별이란 시인 셈이지.”
   강의는 계속된다. 조선 말 실학자가 당쟁에 희생되고, 조선은 갈수록 쇄국으로 치닫고, 반면 일본은 메이지유신에 성공해 국력을 키우고 그 과정에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게 되는 일이 생김을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독도는 오늘의 이슈이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이별’과 우리 사회의 ‘독도 문제’는 닿아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고전의 힘이다. 너희의 독자는 재밌고 가치 있는 글을 읽기 원한다. 그런데 너희가 맨날 ‘이별은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는 대중노래가사 같은 글만 쓴다면 독자는 외면할 것이다. 반대로 너희만 아는 전문적 용어로 된 문장으로만 글쓰기를 한다면 이 또한 외면할 것이다. 어떤 독자건 가치 있고 재밌는 글을 원한다. 그 가치를 찾는 데는 고전만 한 것이 없다. 재미는 너희 삶 속에 있다. 너희 삶을 고전을 통해 보여 달라는 거지.”
   “어떤 고전을 읽는 게 좋나요?”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한국역사 관련 저서 중 쉽고 재밌는 거 골라 편하게 읽어. 그러면 자연히 고전에 이를 정도로 깊어져.”

  현대 독자인 네티즌은 ‘긴 호흡’을 참지 못한다. 따라서 제아무리 좋은 글을 써서 내놓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긴 호흡’을 요구한다면 곧바로 독자에게 외면당한다.
   이것이 전통적 글쓰기에 익숙한 이들, 즉 나 같은 글쟁이가 직면한 현실이다. 고전 분야를 연구하는 분들은 이러한 고민이 더 깊으리라 본다.
‘고전’이란 삶의 교양을 담은 우물물이 있는데 두레박이 없어 목을 축이지 못하는 현실. 그 두레박 역할을 하려면 원칙은 지키되 규칙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두레박 동아줄이 새끼든 나일론이든 무슨 관계랴.

 
  글쓴이 : 전정희  
  • 국민일보 문화부장, 종교부장 등 역임. 지금은 대중문화팀 선임기자
  • 저서로 '민족주의자의 죽음' '일본의 힘 교육에서 나온다' '아름다운 전원교회' 'TV에 반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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