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력 병자년(1576, 선조9) 여름 4월에 이은암(吏隱菴)이 완성되었다. 모두 3칸인데, 창벽(窓壁)은 모두 원 바탕을 보존했고 지붕은 이엉을 이었다. 한두 학생들과 때때로 그 속에서 노닐었는데, 병자년부터 지금까지 어언 3년이 되었다. 객중에 내가 암자의 이름을 붙인 뜻에 대해 따지는 이가 있어서 말했다. “그대가 관원인 것은 맞지만, 은거는 아직 하지 않았지 않은가.” 내가 대답했다. “이른바 ‘은(隱)’이라는 것은 반드시 새벽 문지기나 삼태기를 멘 자*처럼 멀리 속세를 떠나 돌아오지 않는 무리와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관리 중에 은거하는 이가 있더라도 문제 될 것이 없다. 내가 벼슬했던 선배들을 보건대, 또한 더러 ‘은’으로 자호(自號)한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깊이 근심하던 나머지 사물에 감회가 이는 바람에 자신의 뜻을 담아 이름을 붙였던 것에 불과할 따름이었지, 진짜 은거한 것은 아니었으니, 이를테면 전대의 포은(圃隱), 목은(牧隱) 같은 분들이 그들이다. 나는 비록 이곳에서 관리 노릇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지만, 내가 이 암자를 지었을 때 ‘은’의 지취에 부합되는 면이 많았다. 암자는 관사와의 거리가 몇 리 되지 않지만, 형세는 속세와 아주 많이 다르다. 위로는 천 척(千尺)이나 되는 깎아지른 벼랑이 있는데, 길이 없이 불쑥 솟아 있어 구름을 뚫고 날아가지 않는 한 발을 디딜 수가 없다. 아래는 바로 10리나 되는 긴 강이어서 얼핏 보기에도 검푸르니, 깊은 곳은 옷을 벗고 건널 수 없고, 얕은 곳도 옷을 걷고 건널 수가 없을 정도이다. 거기에 구불구불한 소나무와 괴이한 바위, 기이한 화초 등, 말쑥한 경내가 씻은 듯하여 하나도 먼지가 덮인 것이 없었다. 나는 공무를 마친 여가에 대지팡이를 짚은 채 구름을 뚫고 배를 타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늘 평상복을 입고 샛길로 가면서 고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고요히 앉아 향을 피우고 온 방 안을 고요히 한 다음, 혹은 도서에 마음을 쏟기도 하고, 혹은 음풍농월하면서 강산(江山)의 주인이 되기도 하고 어조(魚鳥)의 짝이 되기도 한다. 백성들은 태수의 소재를 알지 못하고, 태수는 자신이 관리인 것을 알지 못한다. 이를 보면 내가 이은(吏隱)이라고 한 것이 어찌 다만 뜻을 담아 이름을 붙인 것일 뿐이겠는가?” 객이 “예, 예.” 하면서 물러갔다.
* 신문(晨門)과 하궤(荷蕢) : 신문(晨門)은 새벽에 성문을 여는 일을 맡은 관원이고, 하궤(荷蕢)는 삼태기를 메고 다니는 사람을 가리킨다. 모두 옛날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의 은사(隱士)들로서,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보인다.
萬曆丙子夏四月。吏隱菴成。凡三間。窓壁皆存素質。而覆以茅。余携一二學徒。時時遊息其中。自丙子至于今三年矣。客有難余名菴之義者曰。子吏則吏矣。隱則未也。曰所謂隱。非必如晨門荷蕢長往不返之流。吏之中自不妨有隱矣。余觀前輩做宦者。亦或有以隱自號。然不過幽憂煩惱之餘。觸感興懷。寓意託名而已。非眞隱也。如前世圃隱牧隱。是也。余雖不免作吏於此。然余構是菴也。其有會於隱之趣深矣。菴距官舍不滿數里。而勢甚夐絶。上有危崖千尺。斗斷無路。自非凌雲飛步。着脚不得。下乃長江十里。一望蒼然。深不可厲。淺不可揭。樛松怪石。奇花異草。淸境灑然。一物無塵。余於公退之暇。竹杖穿雲。䦨舟泝流。皆便服徑造。不使邑人知。靜坐焚香。一室岑寂。或玩心圖書。或吟弄風月。江山之主。魚鳥之侶。民不知太守之所在。太守不知其身之爲吏。是則余之吏隱。豈特寓意託名而已哉。客唯而退。
- 홍가신(洪可臣, 1541~1615), 「이은암기(吏隱菴記)」, 『만전선생문집(晩全先生文集)』 권2, 기(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