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공부하는 모임에서 안동, 봉화, 영주로 도는 답사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은 어느 계절이라도 제맛을 지니고 있지만 겨울 답사 여행은 겨울 여행만의 묘미가 있다. 여름에는 풀과 나무의 생명력이 일시에 폭발하여 초록 일색이, 가을에는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듯 현란한 단풍이 꼭꼭 덮어두고 있던 산하의 속살이 겨울이면 다 드러나는 것이다. 일찍 지는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눈을 이고 선 높은 봉우리를 할퀴고 넘어온 차디찬 바람이 껴입은 옷 속을 파고들면 자동차를 믿고 온 사방을 헤집고 다니던 인간의 만용이 자연의 힘 앞에서 저절로 무너진다.
안동의 풍산 하회마을 부용대에서 하회마을, 병산서원, 봉정사, 이천동석불, 도산서원, 퇴계종택과 농암종택, 봉화의 청량사, 석천정사와 닭실마을, 북지리 마애석불, 축서사, 영주의 부석사, 소수서원, 금성단을 도는 여정이다. 산지조종(山之祖宗) 백두산에서 내리달려온 백두대간 산줄기가 서남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낙동정맥이 남으로 힘을 뻗치는 사이에 펼쳐진 안동, 봉화, 영주의 이 지역은 우리나라 전통 유교, 불교문화의 정조가 가장 고스란히,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산골짝마다 절이 있고, 물굽이마다 정자가 있으며, 산세와 수세가 걸맞은 곳에는 서원이 있고, 산이 다한 곳에 펼쳐진 마을에는 고색이 창연한 낡은 기와집이 올망졸망 늘어선 집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있다.
몇 년 전부터 한 해에도 두세 차례씩은 이 답사 여행을 조직하여 길라잡이를 하고 있지만, 여행을 할 때마다 어디에서건 ‘퇴계 선생’의 그늘이 혹은 짙게, 혹은 옅게 꼭 느껴진다. 경상북도 북부의 이 지역은 누구나 태어나면 어릴 때부터 퇴계 선생의 일화를 듣고 자라고, 집안이나 가문도 퇴계 선생 또는 진성이씨 가문과 얼마나 연고가 있는가에 따라 그 품격이 결정되는 곳이다. 그리하여 개인이나 가문을 막론하고 많건 적건 간에 반드시 퇴계 선생의 영향력과 관련을 맺게 되어 있었다.
나도 어릴 때 어른들이 퇴계 선생을, 가문의 내력과 아주 약간 인연이 있다고, 간판으로 내세우는 것이 싫어서 짐짓 ‘율곡 선생’의 글을 더 많이 읽고 공부를 하였지만, 여전히 의식의 밑바닥에는 내 유년의 삶을 지배한 퇴계 선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리하여 답사 팀을 데리고 도산서원을 둘러보고 기념관을 들어가 보면 그때마다 이황의 체취를 점점 더 진하게 느낀다. 천 원 지폐의 이황 초상이 무엇을 근거로 그려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황의 영정은 원래부터 있지 않았으므로, 조금 마른 듯하고 온화한 상은 선생이 여러 곳에 남긴 성품의 한 단면들을 모아 꾸민 내 상상 속의 상과 닮았다. 도산서원의 장중하고 숭고하면서도 고졸한 건물과 꼭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심어진 나무들, 우물, 예던 길과 거닐던 언덕, 서원을 안고 돌아가는 강물에서마저 선생의 기운을 느낀다. 선생은 수백 년 전에 돌아가셨어도 그 기운은 다 흩어지지 않아 오늘도 여전히 감화를 준다.
문인(門人), 사우(師友), 형제와 피붙이 자식과 조카들과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 가운데서 자기 삶과 학문의 길에서 성찰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것들을 골라 스스로 편집한 「자성록」에 붙인 이 서문은 짧지만, 평생 자기를 성찰해온 이황의 면모가 행간에 담겨 있다. 이름나는 것을 싫어하고 경계하여 아호에서조차 물러난다는 글자를 붙인 조촐한 결기. 그러나 남명 조식이 지적했듯 그러는 것이 도리어 이름을 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이런 불순한 지적을 맞닥뜨리더라도 선생은 지폐의 초상으로 슬쩍 웃고 말았으리라.
사람은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존재이다. 자기를 돌아봄으로써 더 나은 자기를 만들어갈 수 있다. 삶의 지혜는 단순히 오래 살았다고 해서 저절로 얻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겪은 일들을 성찰하여 의식(意識)으로 켜켜이 쌓음으로써 지혜로워진다. 그러므로 공자는 한평생 반성을 하면서 산 거백옥을 칭송하였다. 소양의 기운이 밖으로만 뻗쳐나가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장성하면 차츰 자기를 성찰하면서 삶을 숙성시키게 된다. 치열한 내면의 성찰을 통해 숙성된 지혜라야 노년의 원숙한 삶의 지혜가 된다.
지혜로운 사람은 바랄 것과 바라서는 안 되는 것을 구별할 줄 안다. 어릴 때는 나이 먹는 것이 뿌듯하고 벅찼다. 그리하여 팥죽을 두 그릇씩 먹으면 나이를 두 살씩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욕망을 부풀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살아온 삶의 무게가 점점 무겁고 힘겹게 느껴질 때면 세월을 보내는 것이 더욱 두려워진다. 살아갈수록 지혜로워져서 삶을 달관하고, 몸의 기운이 줄어드는 만큼 욕망도 줄이고 가볍게 해서 홀연히 삶을 마감해야 할 텐데 어찌 된 노릇인지 점점 욕망의 무게를 늘려간다. 그리하여 나 같은 범인이 산다는 것은 욕망을 덜어가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쌓아가는 것이다. 어느 날 무게를 더하는 욕망의 짐을 더는 견디지 못하여 한 발짝도 떼지 못할 때 무릎이 꺾여서 삶의 길을 마감하는 것이다. 욕망이 허망한 것임을 알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더욱 욕망을 키우고 집착한다. 없는 욕망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자기를 성찰한다는 것은 자기가 길러낸 욕망의 허망함을 알아가는 일일 것이다.
지난 한 해는 정말로 절망스러운 한 해였다. 소수의 욕망이 인민대중의 희망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상식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정의가 불의에게 자리를 빼앗겨버렸다. 폭력이 합법적 권력의 힘을 빌려 주권자를 억압하였다. 상식적인 사람의 입과 귀를 틀어막아 건전한 비판을 봉쇄하였다. 공권력은 기득권을 지닌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주기 위해 없는 사람이 조금 가지고 있는 것조차 빼앗으려 들었다. 그리하여 판도라가 열어본 상자에서 희망이 마지막으로 나왔다는 헬라스의 신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온갖 절망을 겪어야만 희망의 힘을 느낄 수 있다. 희망이란 절망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삶이 절망스러울수록 더욱 희망을 다지고 다지며 사는 것이다. 우리 같은 민초에게는 오로지 희망만 허락되어 있으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