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용케도 커나가고 있는 우리 아이들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4. 4. 29. 10:02
- 삼백스무 번째 이야기

2014년 4월 28일 (월)

용케도 커나가고 있는 우리 아이들
1997년 5월 초, 늦장가를 들어서 아들을 낳았다. 그 해 연말에 정부에서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기로 했다. 이 해를 전후로 태어난 아이들이 지금 고등학교 학생들이고, 그들 가운데 일부 아이들이 들뜬 마음으로 떠난 수학여행에서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말았다. 바로 내 아들 또래의 아이들이. 그들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로 타고 떠난 배 이름이 ‘세월호’란다. 이 사건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인생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이제 인생을 배워갈 나이에 막 들어서려는 아이들이 ‘세월’을 먼저 다 살아버렸다.

배는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신화적, 상징적 매개물이다. 이제 삶을 본격적으로 살아야 할 아이들이 배를 타고 돌아오지 못할 물을 건너가 버렸다. 무엇이 이 아이들을 이리도 성급하게 데려갔는가! 누가 이 아이들을 죽음의 바다에서, 갇힌 배 안에서 본능적 공포에 떨게 하며 결국은 차디찬 칠흑의 바닷속에서 외로운 영혼을 포말에 실어 보내게 했는가! 그리고 가시적인 비극의 주인공이 된 아이들에 묻혀서 역시 소중한 삶을 어이 없이 마감한, ‘세월’의 바다를 성급하게 건너버린, 그리고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어른들의 영혼을 어이 달랠 것인가! 하필이면, 과학문명이 그 흔적마저도 불로 지져버려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종교적 편견에 의해 미신으로 치부해 버린, 그래서 실낱같은 명맥이 끊일세라 이어져 온 씻김굿의 고향 진도 앞바다에서!

아이를 기르는 방도에는 역시 여러 가지 기술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 의사의 책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으니 이대로만 한다면 어린 아기를 돌보는 데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네와 골목의 가난한 사람들은 힘이 미치지 못하여 늘 돌보고 기르는 적절한 시기를 놓칩니다. 왕실이나 귀족 집안에서는 너무 지나치게 보호하여 도리어 병에 걸리게 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이런 안타까움을 어찌 견디겠습니까!
이에 가만히 생각건대, 약으로 병을 다스리는 일은 군사를 서서 적을 이기는 것과 같아서 비록 백전백승을 한다 하더라도 어찌 원기를 손상하지 않겠습니까! 흉한 무기를 쓰고 위험한 일이어서 성인은 부득이 쓰는 것입니다. 공격과 정벌을 일삼는 것이 어찌 아직 싹트기 전에 근심을 녹여 없애는 것만 하겠습니까! 신이 약방에 근무할 때 마침 산실청을 설치하게 되어서 삼가 옛 처방을 모아서 중요한 내용을 모았습니다. 의관을 시켜서 언문으로 번역한 뒤 조금 수정하고 잘 베껴서 올립니다. 만약 이 책을 궁정에서 널리 보인다면 거의 착하고 현명한 자손을 많이 보는 경사를 누리는 데 보탬이 될 것입니다. 월, 일. 내의원 제조 행 병조판서 김좌명이 삼가 발문을 씁니다.

養兒之方, 亦多術矣. 其法具載於醫氏之書, 苟能依此而行, 其於保嬰之道, 可以萬無一失. 而閭巷賤人, 力有不及, 恒失保養之宜. 王室貴家, 護之太過, 反有致疾之患. 可勝惜哉! 仍竊惟念, 凡以藥治病猶用兵剋賊, 雖百戰百勝, 豈不損傷元氣哉! 凶器危事, 聖人不得已而用之. 與其從事於攻伐, 曷若銷患於未萌乎! 臣待罪藥房, 適値產室之設, 謹取古方, 撮其要語. 令醫官翻以諺書, 稍加檃括, 繕寫以進. 倘以此書, 宣示宮庭, 則庶幾有補於麟趾螽斯之慶云. 月 日. 內醫院提調行兵曹判書臣金佐明, 謹跋.

- 김좌명(金佐明, 1616~1671), 「보영요법발(保嬰要法跋)」, 『귀계유고(歸溪遺稿)』


대명천지,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이른바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나라, 大韓民國에서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어이없고, 분통 터지고, 마음이 억색하여 말이 나오지 않을 그런 일이 버젓이 일어났다. 사고사건의

원인과 발단부터 경과와 아직도 진행 중인 사고 수습과정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일들뿐이다.

어떤 자연재해라도 재해 그 자체는 자연으로 일어난다고 하지만

재해가 일어난 뒤 대처하고 수습하고 복구하는 과정에서 공동체 의식,

사회적 기강, 시민의식 같은 한 사회의 성숙도가 드러난다.

그런데 재난을 진두지휘하고 일사불란하게 대처해서 기왕 일어난 사고라고

하더라도 사고 후 뒤처리라도 깔끔하게 해야 할 책임을 진 사람들이 도리어

갈팡질팡 우왕좌왕이다. 불을 지른 사람이 도리어 “불이야!” 하고 동네방네

돌며 호들갑을 떠는 격이다.

사건의 전모를 가장 공신력 있게 전달해야 할 언론은 차라리 안 보고 안 듣는

편이 낫다. 그래서 외신에서조차 大韓民國 시민들은 언론을 믿지 못하고

인터넷으로 사고에 관한 소식을 얻는다고 비아냥댄다. 우리의 어떤 언론은

그 와중에도 최고지도자의 지지율 추이에만 관심을 쏟았다. 불가에서는 삶의

진상을 부정적으로 일깨워주는 악연을 자처한 자를 악행 보살(惡行菩薩)이라고 한다는데, 大韓民國 언론은 언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려고

몸부림치는 악행 보살이다. 객관적 언론이 부재한 자리에는 음모론이

독버섯처럼 고개를 내밀고 자란다.

사회가 이렇게 굴러가는 데 딱히 내가 구체적으로 책임질 일이 없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사회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나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다. 나라가 망하면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했다. 지금 당장에 나라가 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라 꼴은 말이 아니다. 한갓 배 한 척의 사고에도 우왕좌왕

허둥대며 손을 쓰지 못하고 애꿎은 생목숨만 희생시키고, 벌써 며칠째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러고도 어찌 나라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나라 꼴이 이렇게 되어가도록 내 삶만 들여다본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회 존립의 근거를 심각하게 되묻게 하는, 총체적으로 부실한 이런 사회에서도 우리 아이들은 자라고 있다. 그리고 자라나는 과정에서 이런 모든 모습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고, 의식의 저 밑바닥에 아로새기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또 이런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여전히 국가는 비전이 없고, 정치권은 정쟁만 일삼고, 사법부는 권력자의

눈치만 보고, 언론은 권력 감시의 기능을 반납하고 용비어천가를 불러댈

것이다.

그러니 두려운 일이다. 10년 뒤, 20년 뒤, 그리고 3, 40년 뒤에도 여전히

이런 부조리하고 불의한 모습이 대물림 될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재난과 이 사고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불과 몇 년 전에 일어난 천안호 사고에서

일어났던 초동 대응의 부실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보면!

그리고 책임질 자리에 있는 사람이 책임을 회피하고 아랫사람에게 미루고,

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포상을 받은 것을 보면!

어느 사회라도 그 공동체의 미래는 아이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라도 가장 먼저 아이들의 생존이 보장되어야 하고,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진도 해역 재난사고에서도 여실히 보는

바이지만, 인재든 천재든 재난이나 재해가 일어나면 언제나 아이들이 피해에

더욱더 고스란히 노출된다. 아이들은 신체적으로도 약하고 혼자 힘으로는

생계를 꾸려갈 수 없기 때문에 재난재해나 전쟁의 상황에서 생존의 위협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다.

 

 그러므로 재난이나 재해가 일어나면 아이들이 먼저 구조받아야 한다.

식량이 부족하면 아이들을 먼저 먹여야 하고, 위험이 닥치면 아이들이 먼저

보호받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정객(논객인가?)이 말했듯이 피난민 정서가 있어서인지 재난 상황이 닥치면 어른들이 우격다짐으로

어린아이들을 밀쳐내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쳐버린다.

재난이나 재해와 같은, 어쩌면 예기치 못한, 또는 불가항력의 상황이 아니라도 아이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아이들의 성장에 위해가 되는 요소가,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다. 학교 코앞에까지 파고든 온갖 향락시설,

아이의 적성이나 소질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일류대학을 보내서 대리만족을 하려는 부모의 허황한 욕망, 자기 삶을 스스로 꾸려가고 세계를 자기 눈으로

보는 주체적 시민을 양성하지 않고 소득 불균등과 양극화한 빈부계층의

사회 구조를 체념하고 거기에 순치되도록 이끌어가는 교육,

시민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마저 개인의 역량에 맡겨 버림으로써

자기 존재 이유를 망각한 정치…

 

이 모든 것들이 아이들의 삶을 위협하고, 아이들을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내몰고 있다. 내가 왜 아버지가 일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부해야 하느냐고,

물고기처럼 자유롭고 싶다고 유서를 써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린이가

있었고, 1등만 기억하는 무한 경쟁에 내몰려 성적과 시험 스트레스에

청소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아이들의 생장에 온갖 부정적이고 비우호적인 요소, 아니 오히려 적대적 기운이 십면매복(十面埋伏)하고 노리는 가운데에서도 우리 아이들은 용케도 자라나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 보기가 미안하다. 그리고 두렵다. 내 뒷모습을 보고

내 아이가, 우리 아이가 저도 모르게 배우고 닮아가게 될까 봐 말이다.

내가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이번 사고로 목숨을 잃은 고향 친구 막내딸의

명복을 빈다.



김태완 글쓴이 : 김태완
  • (사)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 소장
  • 주요저서
    -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소나무, 2004
    - 『중국철학우화393』 소나무, 2007
    - 『율곡문답, 조선 최고 지식인의 17가지 질문』, 역사비평사, 2008
    - 『경연, 왕의 공부』, 역사비평사, 2011
    - 『맹자, 살기 좋은 세상을 향한 꿈』, 아이세움,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