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땅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여인이 시집간 지 몇 년 만에 남편이 그만 세상을 떠나고, 그 충격으로 홀로 계시던 시아버지는 앞을 못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살림살이에 며느리 혼자 늙은 시아버지를 봉양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친정이 있어 가끔씩 식량을 대 주기는 하였으나 친정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혼자된 딸이 안쓰러워 자꾸 개가를 권하였습니다. 여인은 이를 거절하다가
마침내 아예 친정에 발을 끊었습니다.
어느 날 친정에서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여인은 시아버지 밥상을 준비해 놓고
서둘러 길을 떠나 친정에 도착했는데, 사실은 친정에서 딸을 개가시킬 계획을 짜 놓고 거짓으로 불렀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밤에 신랑 될 사람이
온다며 강요하자 딸은 마침내 거짓으로 이를 허락하고는 목욕을 해야 하겠다는 핑계로 뒷마당으로 가서 목욕을 하는 척 하면서 담장 틈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몇 리나 갔을까. 그만 커다란 호랑이가 길을 떡 가로막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여인이 호랑이에게 외칩니다.
“내가 잘못하였느냐? 부모님이
진실하지 못하여 나의 뜻을 기어이 꺾으려 하기에 사세가 급박하여 내가 도망쳐 시아버지에게 돌아가는데 내가 잘못하였단 말이냐? 잘못하였다면 나를
죽여도 좋다.”
그러자 호랑이가 앞장을 서더니 여인을 인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깜깜한
밤중임에도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딸이 도망친 것을 알고 본가에서 사람을 풀어 추격하였으나 커다란 호랑이가 문 앞에 떡
버티고 서있자 모두 달아났습니다. 이에 여인이 말하였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길을 인도하였으나
나는 너에게 보답할 것이 없구나. 있는 거라곤 개 한 마리뿐이니 이걸로 요기나 하고 조심해서 제발 마을 사람들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지지
말거라.”
다음날 새벽, 온 마을이 떠들썩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파 놓은 함정에 호랑이가
잡혔다는 것입니다. 며느리는 그 호랑이인 줄 짐작하고 나갈 차비를 하였습니다.
“저것은 짐승이고 저는 사람인데
저것이 이미 나를 살려주었거늘 제가 그를 살려주어 보답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되어 짐승만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말이야 좋다마는 살려줄
방법이 없지 않느냐?” “마을 분들에게 간절히 부탁해 보겠습니다.”
이에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함께 가서 마을 어르신들께 어젯밤의 사연을 얘기하고는,
호랑이를 살려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거라.
저 호랑이가 나오면 사람을 해칠 게 뻔한데 어찌... 게다가 살려주고자 하여도 누가 저 함정 속에 들어가 호랑이를 데리고 나온단
말이냐?” “살려주기로 허락만 하신다면 제가 그 일을 맡겠습니다. 저것이 사람을 해친다면 저 말고 누구를 해치겠습니까?”
마을 사람들이 논란 끝에 마침내 허락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며느리가 함정 속으로
내려가 호랑이에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신령스러운 동물인데 어젯밤에
내가 한 말을 들었으면 될 걸 어쩌다가 여기 들어왔느냐? 네가 나를 살려준 은혜가 있어 내가 마을 분들께 부탁드렸더니 너를 구할 수 있게
허락하셨다. 이곳을 나간 뒤엘랑은 혹시라도 사람은 해치지 말고 멀리 깊은 산속으로 달아나거라.”
며느리는 호랑이를 쓰다듬으며 함정 밖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밖으로 나온 호랑이는
쏜살같이 달려 멀리 사라졌습니다. 한편 앞을 못 보는 시아버지는 아까부터 이웃 사람이 전하는 말을 통해 며느리의 동정을 살피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습니다. “함정에 들어갔어요.”, “호랑이를 쓰다듬고 있어요.”, “호랑이를 데리고 나왔어요.”, “호랑이가 멀리 달아났어요.” 하는
소리에, “호랑이가 정말로 달아났소?” 하다가 두 눈이 갑자기 환해지면서 문득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걸 보고는 모두들 깜짝 놀라
관아에 알리니 나라에서는 이 며느리에게 후한 표창을 내렸습니다. 친정집에서도 딸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닫고는 마침내 예전처럼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