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의로운 개[義犬] 이야기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4. 4. 29. 11:05
- 삼백열아홉 번째 이야기

2014년 4월 21일 (월)

의로운 개[義犬] 이야기
요즘은 뉴스를 보기가 두렵다. 차마 입에 담기조차 불편한,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사건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온 국민을 경악하게 만든 두 건의 아동 학대 치사 사건을 접했을 때는 참담한 심정을 누그러뜨리기 어려웠다. 어린 나이에 명색이 부모라는 사람으로부터 갖은 학대를 받다가 불쌍하게 목숨을 잃은 가녀린 생명을 생각하면 자식을 둔 부모로서 소름이 돋고 가슴이 미어진다.

의견(義犬)은 내 집에서 기르는 흰 개인데 주인의 뜻을 잘 알아차린다. 새끼를 낳았는데 그 또한 흰색이다. 보름 뒤에 내 집의 또 다른 개 누렁이도 새끼 세 마리를 낳았는데 누런색과 검은색이었다. 그런데 새끼를 낳은 뒤에 어미가 병이 나서 밥을 줘도 먹지 않고 미친 듯이 날뛰다가 며칠 만에 죽고 말았다. 젖이 끊긴 새끼들이 애처로이 울므로, 나는 새끼들이 죽고 말 것 같아 걱정했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의견이 마침 밖에서 돌아와서는 누렁이의 새끼들 곁을 빙빙 돌면서 보고, 갔다가도 다시 돌아보는 것이 불쌍하게 여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새끼 한 마리를 물고 달려가기에 따라가 보았더니 이미 제집에다 안전하게 데려다 놓은 상태였다. 이렇게 세 마리를 다 데려가서는 힘들여 젖을 먹여 제 새끼처럼 잘 키웠다. 아! 참으로 신통한 일이다.
당(唐)나라 때 마수(馬燧)의 집에 같은 날 태어난 고양이가 있었는데, 그중 한 마리가 죽자 남은 고양이가 죽은 고양이의 새끼들을 젖 먹여 키웠었다. 한유(韓愈)는 이 일을 두고 주인 마수의 덕이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 말하였다. 고양이는 가축이지만 성품이 가장 편협하여 가끔 자기 새끼를 잡아먹는 놈까지 있다. 참으로 자기 새끼인 줄을 안다면 어찌 잡아먹을 리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다른 놈의 새끼를 젖 먹여 키운 것은 자기 새끼가 아닌 줄을 몰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개도 가축이다. 그렇지만 개는 주인과 객을 분별할 줄 알고 어미와 새끼를 구별할 줄 알아 그 성품이 가장 지혜로우니, 어찌 다른 놈의 새끼를 제 새끼로 잘못 알 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털 색깔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니 말이다. 그렇다면 다른 놈의 새끼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두어 길러 주기를 이렇게 한 것이니, 어찌 개 중에서도 의로운 녀석이 아니겠는가. 지금 세상의 처들이 남편의 전실 자식을 남 보듯이 하고, 심한 경우에는 원수처럼 여겨 사납게 물어뜯기를 개돼지처럼 하니, 이들이 의견의 소문을 듣는다면 어찌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렇게 의견설을 짓는다.


義犬者, 靑坡先生之家蓄也. 色白, 善解主人意, 生子亦白. 後十五日, 同家有黃犬, 亦生子三, 皆黃黑色. 旣生而母病, 賜之食則不食, 狂走不止, 凡數日而斃. 兒犬方絶乳而哀鳴, 主人以爲必死, 計莫之救. 義犬自外適至, 環而視之, 去而復顧之, 若有哀矜之狀, 遂銜其子走出. 主人怪之, 尋而至之, 則已安其巢, 如是者凡三. 辛勤乳養, 一如所生, 以至長大. 嗚呼, 亦異矣哉! 昔馬北平家, 貓有同日生者, 其一死, 相乳養如是, 昌黎韓公以爲北平之德, 有以致然. 夫貓, 人蓄也, 而其性最褊, 往往有自食其子者, 誠知其子, 豈有相食之理乎? 則其相乳, 或有不知其非子而爲然者矣. 今犬, 亦人蓄也, 而知辨主客, 知辨母子, 爲性最慧, 豈有誤將佗子以爲己子者乎? 況毛色之不同, 大小之相異乎? 則非不知他犬之子, 而敢收恤如是, 豈非犬中之義烈者乎? 今世之爲人妻妾者, 視其夫之子, 如視路人, 甚者視爲仇讎, 狺然相噬, 不啻若犬彘, 其聞義犬之風, 寧不小愧乎? 用是作義犬說.

- 이륙(李陸, 1438~1498), 「의견설(義犬說)」, 『청파집(靑坡集)』


조선 전기 문인 이륙이 지은 ‘의로운 개’에 관한 글이다. 고양이에 대한 작자의 시각은 다소 편향적으로 보이지만, 의로운 개 이야기는 참으로 감동적이다. 나날이 험해져 가는 세상을 보면서 사람의 심성이 점점 악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착하고 순수했을 것 같은 5, 6백 년 전 조선에도 계모가 의붓자식을 미워하는 일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때문에 이륙은, 태어나자마자 어미 잃은 강아지들을 제 새끼처럼 젖을 먹여 키운 의로운 개를 보고 그런 계모들이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하기를 바라서 윗글을 짓는다고 밝혀 놓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계모가 의붓자식을 학대하는 일은 늘 이야기의 단골 소재가 되어 왔던 것 같다. 우리나라 전래 동화 콩쥐팥쥐와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의 주제도 그런 것이고, 서양에도 그와 유사한 신데렐라와 백설공주 이야기가 있으니 말이다. 또 동양 고전 『맹자(孟子)』에도 순(舜)임금의 계모가 눈먼 남편과 자신의 친아들과 공모하여 순임금을 죽이려고 수차례 기도했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에서 악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사람이 대부분 계모인 것은 어째서일까? 자녀 양육은 오직 여성 몫이며, 남성은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로부터 큰 책임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일까? 계모가 친어머니가 아닌 것처럼 계부 역시 친아버지가 아니긴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왜 계모의 악행은 그렇게 부각되는 반면 계부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는 것일까? 가정에서의 역할에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유난히 계모에게만 부정적 시각을 드러내는 것에는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적 사고에 따른 편견이 배어 있다고 본다.

자녀가 그토록 엄청난 일을 겪을 때 아버지라는 존재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명색이 아버지라는 사람이 자기 자녀의 고통 앞에서 방관자 내지는 협조자의 모습까지 보인다. 이야기 속에도 현실 속에도 이런 아버지들은 넘쳐난다. 재혼하고 나서 죽은 콩쥐와 신데렐라의 아버지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장화 홍련의 아버지는 어느 정도 분별력을 갖춘 사람이었음에도 후처의 말에 속아 두 딸을 죽게 만들었다. 순임금의 아버지도 아들을 죽이기 위해 발 벗고 나서서 온갖 방법을 강구했던 인물이다. 설사 저들 친부가 무지몽매하여 사리를 분별할 능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죄가 용서될 수는 없다.

나날이 높아지는 이혼율로 친부모의 손에서 자라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물론 친부모에게 학대받으며 자라는 아이들도 많다고는 하지만, 재혼 가정의 아이들에게는 부모의 역할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칠곡 사건의 친부는 어린 자신의 딸을 보호하기는커녕, 폭력을 방조하는 것을 넘어 자발적으로 폭행에 가담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사람에게 정상적인 사고와 상식적인 행동을 기대한다는 것부터가 애당초 무리일 테지만, 그의 행위는 도저히 아버지라고 할 수 없는, 인간 이하의 것이었다. 그 역시 이륙의 말대로 ‘의로운 개 이야기를 듣고 부끄러워해야 할 자’이겠지만, 과연 남의 말을 새겨들을 수 있는 귀가 있을지 모르겠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계모와 친부의 형량을 놓고 온 국민이 공분하고 있는 와중에 두 살짜리 아들을 친부가 살해한 충격적인 사건이 또 발생하였다. 의붓부모냐 친부모냐를 떠나서 못된 어른들의 폭력에 아이들이 죽어가는 끔찍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구체적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해 보인다. 문제가 터져 여론이 들끓을 때 허겁지겁 방안을 내놓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검토를 통해 사회 안전 시스템을 구축한 뒤 효율적으로 운영해야 하며, 실효성 있는 법적 근거도 마련하여야 한다. 광폭한 어른들의 폭력과 학대에 더 이상 아이들이 희생되는 일이 없도록 지금부터라도 모두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조순희 글쓴이 : 조순희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주요역서
    - 『홍재전서』, 『국조보감』,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번역에 참여
    - 『국역 기언 5』, 민족문화추진회, 2007
    - 『국역 명재유고12』, 한국고전번역원, 2008
    - 『국역 허백당집3ㆍ4』, 한국고전번역원, 2011~2012
    - 『국역 회재집』, 한국고전번역원, 2013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