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명천지,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이른바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나라, 大韓民國에서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어이없고, 분통 터지고, 마음이 억색하여 말이 나오지 않을 그런 일이
버젓이 일어났다. 사고사건의 원인과 발단부터 경과와 아직도 진행 중인 사고 수습과정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일들뿐이다.
어떤 자연재해라도 재해 그 자체는 자연으로 일어난다고 하지만 재해가 일어난 뒤 대처하고 수습하고 복구하는 과정에서
공동체 의식, 사회적 기강, 시민의식 같은 한 사회의 성숙도가 드러난다. 그런데 재난을 진두지휘하고 일사불란하게 대처해서 기왕 일어난 사고라고
하더라도 사고 후 뒤처리라도 깔끔하게 해야 할 책임을 진 사람들이 도리어 갈팡질팡 우왕좌왕이다. 불을 지른 사람이 도리어 “불이야!” 하고
동네방네 돌며 호들갑을 떠는 격이다.
사건의 전모를 가장 공신력 있게 전달해야 할 언론은 차라리 안 보고 안 듣는 편이 낫다.
그래서 외신에서조차 大韓民國 시민들은 언론을 믿지 못하고 인터넷으로 사고에 관한 소식을 얻는다고 비아냥댄다. 우리의 어떤 언론은 그 와중에도
최고지도자의 지지율 추이에만 관심을 쏟았다. 불가에서는 삶의 진상을 부정적으로 일깨워주는 악연을 자처한 자를 악행 보살(惡行菩薩)이라고
한다는데, 大韓民國 언론은 언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려고 몸부림치는 악행 보살이다. 객관적 언론이 부재한 자리에는 음모론이 독버섯처럼
고개를 내밀고 자란다.
사회가 이렇게 굴러가는 데 딱히 내가 구체적으로 책임질 일이 없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사회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나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다. 나라가 망하면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했다. 지금 당장에 나라가 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라 꼴은
말이 아니다. 한갓 배 한 척의 사고에도 우왕좌왕 허둥대며 손을 쓰지 못하고 애꿎은 생목숨만 희생시키고, 벌써 며칠째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러고도 어찌 나라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나라 꼴이 이렇게 되어가도록 내 삶만 들여다본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회 존립의 근거를 심각하게 되묻게 하는, 총체적으로 부실한 이런 사회에서도 우리 아이들은 자라고 있다. 그리고
자라나는 과정에서 이런 모든 모습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고, 의식의 저 밑바닥에 아로새기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또 이런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여전히 국가는 비전이 없고, 정치권은 정쟁만 일삼고, 사법부는 권력자의 눈치만 보고,
언론은 권력 감시의 기능을 반납하고 용비어천가를 불러댈 것이다. 그러니 두려운 일이다. 10년 뒤, 20년 뒤, 그리고 3, 40년 뒤에도
여전히 이런 부조리하고 불의한 모습이 대물림 될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재난과 이 사고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불과 몇 년 전에
일어난 천안호 사고에서 일어났던 초동 대응의 부실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보면! 그리고 책임질 자리에 있는 사람이 책임을 회피하고 아랫사람에게
미루고, 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포상을 받은 것을 보면!
어느 사회라도 그 공동체의 미래는 아이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라도 가장 먼저 아이들의 생존이 보장되어야 하고,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진도 해역 재난사고에서도 여실히
보는 바이지만, 인재든 천재든 재난이나 재해가 일어나면 언제나 아이들이 피해에 더욱더 고스란히 노출된다. 아이들은 신체적으로도 약하고 혼자
힘으로는 생계를 꾸려갈 수 없기 때문에 재난재해나 전쟁의 상황에서 생존의 위협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다. 그러므로 재난이나 재해가 일어나면
아이들이 먼저 구조받아야 한다. 식량이 부족하면 아이들을 먼저 먹여야 하고, 위험이 닥치면 아이들이 먼저 보호받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정객(논객인가?)이 말했듯이 피난민 정서가 있어서인지 재난 상황이 닥치면 어른들이 우격다짐으로 어린아이들을 밀쳐내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쳐버린다.
재난이나 재해와 같은, 어쩌면 예기치 못한, 또는 불가항력의 상황이 아니라도 아이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아이들의 성장에 위해가 되는 요소가,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다. 학교 코앞에까지 파고든 온갖 향락시설, 아이의 적성이나 소질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일류대학을 보내서 대리만족을 하려는 부모의 허황한 욕망, 자기 삶을 스스로 꾸려가고 세계를 자기 눈으로 보는 주체적 시민을 양성하지 않고
소득 불균등과 양극화한 빈부계층의 사회 구조를 체념하고 거기에 순치되도록 이끌어가는 교육, 시민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마저 개인의 역량에
맡겨 버림으로써 자기 존재 이유를 망각한 정치… 이 모든 것들이 아이들의 삶을 위협하고, 아이들을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내몰고 있다. 내가 왜
아버지가 일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부해야 하느냐고, 물고기처럼 자유롭고 싶다고 유서를 써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린이가 있었고,
1등만 기억하는 무한 경쟁에 내몰려 성적과 시험 스트레스에 청소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아이들의 생장에
온갖 부정적이고 비우호적인 요소, 아니 오히려 적대적 기운이 십면매복(十面埋伏)하고 노리는 가운데에서도 우리 아이들은 용케도 자라나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 보기가 미안하다. 그리고 두렵다. 내 뒷모습을 보고 내 아이가, 우리 아이가 저도 모르게 배우고 닮아가게 될까 봐 말이다. 내가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이번 사고로 목숨을 잃은 고향 친구 막내딸의 명복을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