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천상(天上)의 절벽(絶壁)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4. 4. 30. 17:59
- 일흔세 번째 이야기

2014년 4월 30일 (수)

천상(天上)의 절벽(絶壁)
- 백두산 절정에서 내려오는 인간 신광하(申光河)


길은 원래 주인이 없고 오직 그 위를 가는 사람이 주인이라 말하는 시대가 열렸다. 18세기 지리학자 신경준(申景濬)이 이런 명언을 남긴 후인 1784년 8월, 진택(震澤) 신광하(申光河, 1729~1796)라는 충청도 한산 출신의 곤궁한 선비가 백두산의 절정인 대각봉(大角峯) 위에 섰다.

당시 백두산 대각봉은 조선의 국경이 허락하는 지상의 꼭대기이자 천상으로 솟은 신비의 극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마지막 발끝에서 한 치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길의 끝을 보았으며 하산 도중에는 뜻하지 않게 대지의 처참한 밑바닥과 조우했다. 그리고 황홀한 절정과 세상의 바닥이 극적으로 교차한 며칠간이 인간의 길에 대한 뭉클한 은유를 탄생시켰다.

1. 궁사(窮士)가 기사(奇士)가 되던 날

신광하는 곤궁한 선비 시인이었다. 고령 신씨 명가의 후손이었으나 충청도 서천 바닷가에서 방풍(防風)을 캐어 팔고 끼니 해결을 위해 도토리를 주운 사람이었다. 30년 동안 과거 시험에 낙방하고 곤궁하게 바닷가를 떠돌던 시대의 잉여 인간이었다. 적어도 백두산을 다녀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조선 관료체제의 한계선에서 맴돌던 그는 길 떠남을 낙으로 삼았다. 청광(淸狂)이 발동하면 진유(眞遊)를 찾아 국토의 이곳저곳을 누볐다. 그 스스로 “수염 허연 사십 오십에도, 미친 듯 노래하며 산하를 찾았다.[四十五十鬚髥皓, 狂歌走入山澤中.]”라고 하였다. 남해의 아득한 바다, 동해를 바라보는 금강산 정상, 산하 수려한 충청도 사군(四郡)*으로 발길이 퍼져나갔다.
때는 1784년 여름이 다가올 즈음, 조카가 함경도 경성(鏡城)의 판관으로 나간 기회를 타서 그는 ‘가족들과 상의하지도 않고 적진을 향하는 군사처럼 맹렬하게’ 길을 떠났다. 근 10년의 숙원을 기어코 풀자는 결행이었다. 타고 가던 말이 죽고 비가 내린 상황에서 경성 현지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음력 8월. 백두산에는 벌써 눈이 쌓여 그가 정말로 산에 오르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백두산 밑 무산(茂山)에 이르러 사슴 가죽을 받쳐 입고 10일 먹을 양식을 마련했다. 10여 인의 등반대를 결성하고 백두산 신령에게 정갈한 제사를 지낸 뒤에 그는 마침내 국토의 최고점에 도착했다. 하늘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무량한 감회를 불렀음은 물론이다.

나는 신령을 놀라게 할 만한 빼어남이 없었으나 未有驚神異
마침내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 되었구나. 終能絶衆同
너 백두산은 우리나라 대지의 비조(鼻祖)이며 爾應東國祖
나는 이미 백두산의 백두옹이 되었도다. 吾已白頭翁

백두대간의 시발점이자 동국의 모든 산이 머리를 우러르는 백두산(白頭山)을 쉰다섯 머리칼 하얀 백두옹(白頭翁)이 올랐다는 소회이다. 백두와 백두의 만남이 극적으로 이루어진 회심의 순간이었다.

* 사군(四郡)은 단양(丹陽)ㆍ제천(堤川)ㆍ영춘(永春)ㆍ청풍(淸風) 등 네 군(郡)을 말한다.

2. 천상과 통하는 마지막 길목에 서서

서울로 돌아오자 그는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사람들은 환호하며 동방의 기사(奇士)로 대접했다. 1712년의 백두산정계비 사건 이후로 대택(大澤, 곧 天池)과 대각봉을 다녀온 사람이 몇 사람 더 있었지만, 백두산이 품은 신비의 아우라(Aura)는 사람조차 여전히 신비롭게 만들었다. 국왕 정조도 그의 백두산 시를 읊조릴 정도였고 7년 후에는 그에게 내리 다섯 번 장원의 영예를 안겼다.
백두산 등정으로 세상에서 그에게 선물한 것이 결코 야박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진정한 선물은 신광하의 내면에 던져준 희열과 개안이었을 것이다. 「대각봉에 올라서서(登大角峰)」라는 시 속에서 그는 유장한 감개에 젖은 자신의 감회를 표출하였다.

가을바람이 만 리에서 불어와,
나를 하늘로 불어 올리도다.
세상 누가 알랴! 이 대각봉이,
이 진택 늙은이를 얻었다는 것을.
홀로 하늘의 별들 그 위에 서서,
저 인간 세상을 굽어보노라니
너무 높아서 보이는 것도 없고,
만고의 시간마저 아득하구나.
(중략)
보잘것없는 이 사람 누구인가?
천하의 동쪽 끝에서 오만하게 한 번 웃노라.
나를 태울 봉황은 영영 오지 않으니,
군자가 가는 길도 여기서 끝이 났도다.
공자께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으나,
다시는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했었구나.
높은 산에 오른 사람 어찌 나 하나랴만,
서글픈 인생이 마치 하루살이 같구나.
인생이란 금석처럼 영원한 것도 아니니,
쑥대처럼 나부낀다 해도 무얼 한탄하리.
아아! 천 년 세월 지난 후에,
이곳에 오는 자는 누구와 함께할까?

秋風萬里來
吹我入太空
誰知大角峰
得此震澤翁
獨立星象表
俯身人代中
至高無所見
萬古空濛濛
(중략)
眇小此何人
笑傲萬國東
鳳凰竟不來
君子道則窮
魯叟小天下
不復夢周公
豈無登眺人
蕭索如蠛蠓
人生匪金石
奈何歎飛蓬
嗟嗟千載下
來者誰復同

마침내 정처 없이 떠돌던 한 인간이 국경의 끝자락 그리고 국토의 최고봉에 이르렀다. 끝없는 시야는 만고라는 무한한 시공간으로 그의 정신을 질주시키고 있다. 하지만 국토 산하가 허락하는 마지막 한 점 끝에 발을 딛고 보니 이 지점은 만국 천하의 동쪽 귀퉁이에 불과하며, 봉황을 타고 하늘로 비상하지 않는 한 다시 저 아래 인간의 세계로 하강해야 할 운명이다. 인간의 유한성과 ‘쑥대처럼 나부껴야 하는’ 삶을 되새김질하는 그 순간이 하필이면 세상 사람들이 선망하는 가장 높은 곳, 천상으로 향하는 그 길목이었다.

3. 소광(昭曠)의 꿈과 인간이 가야하는 운명의 길

절정, 그 극점에서 절망을 절감한다는 것은 지극히 역설적이다. 물외오유(物外敖遊)의 장쾌한 느낌으로 충만한들 누가 나무라겠는가? 그러나 그곳이 바로 더 이상 한 치도 나아갈 수 없는 마지막이라면 이곳은 지상의 꼭짓점이 아니라 까마득한 절벽으로 바뀐다.
술잔을 들어 우주적 자아를 자축하고 국경 너머 여진의 땅까지 굽어본 뒤에 그는 산 아래 무산(茂山) 땅으로 하산한다. ‘쑥대처럼 나부끼는 하루살이 같은 운명’으로 돌아오는 도중이었는데 그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여행으로 빨려들었다. 「무산의 노래[茂山歌]」 8수에 새겨진 대지의 현실은 비참했다. 이른 서리에 곡물이 시들어 대살년(大殺年)이 도래했고 사람들은 밭고랑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주민들은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는 이 끔찍한 현실에 붙들린 채 평생 자기 일신 하나도 구제하지 못하는 포의의 신세를 절감했다. 대각봉 꼭대기에서 느꼈던 절정과 절망의 교차가 이내 냉정한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경성에 돌아와 소문을 듣자니 고향 서천 또한 극심한 기아를 맞이하고 있었다. 다시 붓을 든 그는 고향 인근의 명사 이광(李磺, 동문수학, 이수광의 5대손)에게 도움을 청하며 「자온 이광에게 보내는 편지[與李子薀磺書]」를 쓴다. 서신의 전반부에는 백두산 정상에서 느꼈던 감회를 적었다. 부귀빈천, 생로병사, 영웅호걸, 문인들의 자부심과 의기투합이 모두 그저 망령된 짓처럼 느껴지더라고 했다.
그러다 ‘영영 다른 곳으로 떠나갈 수 없다면 곧 옛 터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운명일 뿐[不能長往, 卽反乎故處, 是人耳]’이라는 한 구절에 이르러 글은 급속도로 방향을 바꾼다. 개가죽을 입고 배고픔을 호소하며 구걸하는 사람이 도로에 가득하니 마음이 아프고 보기에 애처로워 음식이 목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적었다. 세상 바깥에 스스로를 내맡겼던 엊그제의 일이 도리어 망령된 짓처럼 느껴진다고 토로한 뒤 그는 말한다.
“그렇다 해도, 항상 사물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을 소광(昭曠)**한 도(道)에 놓아두고,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들은 사물이 흘러가는 대로 부쳐두고 내버려 둘 뿐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딘들 백두산 정상이 아니겠습니까?[雖然, 常以無物之心, 置諸昭曠之道, 其所以亂吾心者, 一付之於物, 任之而已. 然則无往而非白頭絶頂也?]”

** 소광(昭曠)은 『장자(莊子)』의 「천지편(天地篇)」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넓게 트이고 환하게 밝은 세상이나 상태를 뜻했다. 후에 주자(朱子)는 이 어휘를 가져다가 학자가 공부할 때는 응당 ‘소광의 근원[昭曠之原]까지 꿰뚫어 보는 눈을 지녀야 한다.’고 풀이함으로써 학자들 사이에 자주 인용되는 전거를 제공했다.

4. 하산이라는 또 다른 여행

대각봉에서 무산으로 내려오는 신광하의 여정은 그저 하산하는 길이 아니었다. 산하의 절정에서 세상의 바닥으로 급강하하는 과정이었다. 생각건대, 그 자신도 이 며칠의 역전이 얼마만큼 빛나는 장면인지 깨닫지 못했을 것 같다. 만약 그가 절정의 황홀감에 도취하기만 했다면 그 절정은 몽롱한 환각제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절정에서의 절벽과 바닥에서의 절벽을 단 며칠 만에 체험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이는 백두산을 다녀온 수많은 걸음 중에 오로지 그 한 사람만이 새긴 인상적인 광경이다.

지상의 절정으로 향하는 길과 인간의 대지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는 길 가운데 어떤 코스로 가는 것이 진정한 여행일까?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인간 신광하가 남긴 은유이자 잊지 못할 화두이다.

글쓴이 : 김동준
  •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 주요저역서
    - 공역, 『역주 소현심양일기』2, 민속원, 2008
    - 공저, 『민족문학사강좌』, 민족문학사학회, 창작과비평사, 2009
    - 공저,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태학사, 2011
    - 공저,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태학사, 2013
    - 공저, 『내가 좋아하는 한시』, 태학사, 2013 외 다수

'놀라운 공부 > 옛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0) 2014.05.09
사람닭  (0) 2014.05.07
공밥을 먹지 마라  (0) 2014.04.29
꽃 피는 좋은 시절  (0) 2014.04.29
의로운 개[義犬] 이야기  (0) 2014.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