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꽃 피는 좋은 시절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4. 4. 29. 11:07
- 여든네 번째 이야기

2014년 4월 17일 (목)

꽃 피는 좋은 시절

청명과 한식 그리고 삼짇날까지
좋은 명절 연이으니 객흥이 진진하다
이 늙은이 풍류가 본래 가볍지 않건만
여러 공의 기세는 몹시 감당키 어렵구나
풍광 좋은 강산에는 지은 시들 쌓여 가고
술자리 벌여 놓으면 다투어 이기려 하네
더딘 걸음 괜스레 뒤처진 게 가소로운데
날랜 행렬 강남을 건너갔다 취중에 듣네

淸明寒食又三三
佳節相仍客興酣
老子風流元不淺
諸公鋒穎儘難堪
江山好處詩爲壘
罇酒開時戰必戡
可咲蹇跚空殿後
醉聞飛旆渡江南

- 신광한(申光漢, 1484~1555)
「상사일에 뒤미쳐 봉산1)에 당도하여 원접사가 황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희어를 적어 보내며 여러 종사관에게도 아울러 보이다[上巳日 追到鳳山 聞遠接使在黃州 錄奉戲語 兼示諸從事]」
『기재별집(企齋別集)』 권6



1539년(중종34) 명(明)나라에서는 태자를 책봉하고 황자(皇子)들을 봉왕(封王)한 일을 알리는 진하사(進賀使)로, 한림원 시독(翰林院侍讀) 화찰(華察)과 공과 급사중(工科給事中) 설정총(薛廷寵)을 각각 정사(正使)와 부사(副使)에 임명하여 조선에 보낸다. 이 시는 기재(企齋) 신광한이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도사 선위사(都司宣慰使)가 되어 올라가던 길에 지은 것이다. 이때 조선에서는 사대(事大)의 예를 다하기 위해 원접사 소세양(蘇世讓)을 위시하여 영위사(迎慰使) 성세창(成世昌), 별영위사(別迎慰使) 송순(宋純), 종사관 최연(崔演)ㆍ엄흔(嚴昕)ㆍ임형수(林亨秀) 등을 중국 사신의 접대에 동원하였다. 당시 신광한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지내며 문장이 뛰어나다는 평판이 있어 선위사에 선발되었다.

때는 춘삼월이라 따스한 바람이 불고 꽃이 피는 계절이 돌아왔다. 이 해는 청명(淸明), 한식(寒食), 삼짇날이 연이어 들어 시인을 더 들뜨게 한다. 청명은 24절기(節氣) 가운데 하나로 춘분(春分) 뒤 15일쯤 되는 날인데 답청(踏靑)ㆍ식수(植樹)ㆍ성묘(省墓)ㆍ삽류(揷柳) 등의 풍속이 있다. 한식은 동지(冬至) 뒤 105일째 되는 날로 금화(禁火)2)하는 풍속이 있는 날이다. 그런데 청명 역시 동지에서 여섯 절기, 즉 105일쯤 지나는 날이기에 청명과 한식은 서로 겹치기도 하고 하루의 차이가 나기도 한다.

삼짇날은 본래 3월의 첫째 사일(巳日) 즉 상사일(上巳日)을 가리켰다. 그런데 진나라의 왕희지(王羲之)가 영화(永和) 9년(353) 3월 3일, 마침 상사일(上巳日)이 되는 날에 사안(謝安), 손작(孫綽) 등 당대의 명사 40여 인과 함께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 모여 계사(禊事)를 행하고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면서 성대한 풍류놀이를 한 뒤로는 굳이 첫째 사일이 아니라 3월 3일을 상사일로 삼아 곡수유상(曲水流觴)의 모임을 갖는 풍속이 생겨나게 되었다.

명칭이야 어떻든 한 해 중에 얼마 안 되는 빛나는 계절이 아니던가. 산천에는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 앵두꽃, 복사꽃 등등 보는 이들을 유혹하는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따스한 햇살이며 부드러운 바람이 얼굴과 목을 간지럽힌다. 이런 때 어찌 시를 짓지 않겠으며 술을 마시지 않을쏜가. 다만 나는 이미 백발 성성한 노인이라 젊은 종사관들의 기백을 대함에 몸도 마음도 예전만 같지 못함이 한스러울 뿐이다. 이 시로 늦게 뒤따라가게 된 변명이 될 수 있을는지. 먼저 강을 건너 황주에 당도한 원접사 일행에게 장난과 겸사(謙辭)를 섞은 말투로 늦게 합류하게 된 사정을 말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읽는 이로 하여금 미소 짓게 한다.

올해는 삼짇날이 조금 일렀는데 기후변화의 영향 때문인지 꽃들도 조금 일찍 개화하였다. 이제 봄꽃들은 져가고 여름을 알리는 꽃들이 뽐낼 채비를 하고 있다. 사정이 여의치 못해 미처 상춘(賞春)하지 못한 이들이 아름다운 계절의 끝자락을 늦게나마 만끽하기를 바라본다.

1) 봉산(鳳山) : 황해도에 있는 현(縣)으로 북쪽으로 올라가 황주강(黃州江)을 건너면 바로 황주(黃州)에 이르게 된다. 신광한은 이때 무슨 일로 인해 원접사 일행보다 늦게 출발한 듯하다.
2) 금화(禁火) : 본래 주(周)나라 때부터 있던 풍속인데 후대에는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개자추(介子推)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민간에 퍼져 오늘날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진문공(晉文公) 중이(重耳)가 망명 생활하며 굶주렸을 때 개자추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주어 중이의 허기를 면하게 해주는 등의 공로가 있었는데, 중이가 즉위한 뒤로 버림을 받자 그는 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뒤늦게 개자추를 생각해낸 진문공이 그의 공로에 보답하고자 그를 산에서 나오게 하려고 불을 질렀는데 그는 산에서 나오지 않고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후대에 민간에서는 그를 기려 이날이 되면 금화(禁火)를 하고 찬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글쓴이 : 변구일(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