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병사
그 정령의 모습은 다른 정령들과 어딘지 모르게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가까이에 있는 열 명 정도의 정령들과 약간 떨어져 서 있었고 또 그들과 어울리려고 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존재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멍청하게 서 있었다. 단지 이러한 태도만으로는 죽은지 아직 얼마 되지 않고 또 정령계에 익숙치 못한 정령으로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므로 별로 이상하다고 볼 것까지도 없을 것이다. 사실 그는 며칠 전에 죽어서 정령계로 들어온 정령이었던 것이다. 그가 매우 색다른 정령 이었다는 인상을 주게 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는 방금 말한 것처럼 다른 정령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고, 다른 정령들과 어울리려고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 표정은 자기 자신이 현재 어디에 와 있는지, 또 자기 자신이 도대체 무엇이 되어 있는지, 심지어는 자기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도 모르고 어리둥절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태도로 보아 누구나 짐작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의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연달아 자기의 목 언저리를 문질러 보고는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새로운 정령에 대한 환영의 표시로 가까이에 있던 10명가량의 정령 중에서 한 정령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어째서 다른 영들과 어울리지 않는가? 그리고 당신은 무엇을 그렇게도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가?” 하지만 그는 이 말도 들리지 않는지 멍청히 서 있을 뿐, 조금도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선배격인 영은 또다시 같은 말을 되풀이 하여 물어 보았다. “당신은 어째서 다른 영들과 어울리지 않는가? 그리고 또 당신은.......... .” 그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누가 자기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은 알아차렸는지 다음과 같은 말을 혼자서 중얼 거렸다.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건가?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인가? 내가 정말 아직 살아 있단 말인가?” 그는 연방 같은 말을 독백하듯 중얼거리다가 이윽고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승에 있을 때에 아시아에 있는 어떤 나라의 어떤 군인이었다. 그리고 그 나라의 군인 중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활의 명수였으므로 적장의 목숨을 빼앗을 임무를 띠고 다른 몇 사람의 궁수들과 함께 적군의 성 밑으로 몰래 잠입했다. 그들은 적장의 저택 밖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집 뒤에 있는 산 속에 숨었으며, 마치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어서 안심하고 잠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심이 그들의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갑자기 배후로부터 들이닥친 많은 적군에 의해서 몰살을 당했던 것이다. 그는 목이 잘리어 죽은 기억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이야기를 마치자 다시 먼저와 같은 독백을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내가 살해된 기억은 분명한데, 그런데도 나는 죽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살아 있는 기분이야. 그 증거로 나는 이처럼 당신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소? 나는 정말 죽은 것인가? 아니면 꿈이란 말이요?” 그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안절부절 자기의 목을 다시 만져 보곤 했다.
하지만 이 정령이 참으로 기묘하고 이상한 정령이라는 점에서, 그 곳에 있던 10여 명의 정령들 사이에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는 것은 그의 이러한 태도나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은 그들 10여 명의 정령들은 그 후 군인이었던 그 정령을 아무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령계나 영계는 이미 이야기 한 것처럼 무한하게 넓으므로 우연하게 만나게 되는 일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정령계이건 영계인건 영들은 타인에 대하여 만나고 싶다는 마음만 먹으면 상대방 영이 즉시 눈앞에 나타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 10여 명의 정령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에게 이상한 인상을 주었던 그 병사의 정령을 만나고 싶었는데도 아무도 그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영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이상한 일에 관한 진상은 나는 수년이 지난 후 우연한 기회에 이승에서 알게 되었다. 그 진상이란 아시아 여러 나라 사이를 왕래하고 있는 상선의 한 선원에 의해서 알려진 것이다. 당시 세상에 퍼진 이상한 이야기로 아시아의 어떤 나라의 어린아이에 관한 소문이 파다했다.
이 어린 아이는 겨우 세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직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멀고 먼 외국의 거리를 자세하게 설명할 뿐 아니라, 자기는 그 외국의 거리에서 3년 전까지 살고 있던 사람이었으며, 이제 다시 태어난 아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군인이었으며, 그 나라에서 첫째가는 활의 명수였다는 것과 적국의 성 밑으로 숨어들어가 적장의 생명을 노리고 있을 때, 뜻밖의 습격을 받아 적군에게 목이 잘리어 죽었다는 것, 그리고 전생에서의 이름까지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아이는 자기의 목에 있는 상처는 전생에서 목이 잘리어 죽었기 때문에 난 상처라고 하면서 목덜미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 어린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목에 상처의 흔적이 있었고, 그의 부모는 그것을 이상히 여기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이야기라 세상 사람들이 반신반의한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이러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그 나라의 상인에 의해서, 이 어린아이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자 사람들의 놀라움은 절정에 달했다. 더구나 이 어린아이는 그를 찾아온 상인과, 배운 일도 없는 전생에 살았던 나라의 말로 자유자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나도 이 이야기를 듣고는 그 이상한 정령에 관한 일도 있고 해서 이상야릇한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그는 정령계에 단 며칠 동안만 머물렀을 뿐 인간계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정령을 다른 10여 명의 정령들이 만나고자 했어도 이후 다시 만날 수 없었던 이유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지금의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다시 태어난 것이 사실이라 치더라도, 어떻게 그 어린아이가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전생에 관한 일을 기억하고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정령이 되었을 때 오래도록 남은 기억은 현세에 관한 한 영적인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달한, 그러면서도 개략적인 것만이 기억에 남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지만, 혹 어떠한 사정에 의해서 이러한 일도 있는 모양이다.
<역자 주> 미국 심령조사협회의 환생(還生)에 관한 최근의 보고서에는 약 200건의 예를 엄밀한 증거 조사에 의해서 검토하고, 그 결론으로 “전생의 죽음의 폭사(爆死)와 같은 돌발적인 죽음일 경우에는 아마도 전생에 대한 기억이 남는 모양이다.”라고 “환생의 법칙”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이 이야기에 비추어 보면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되살아난 처녀
죽은 지 몇 시간이 지난 후, 힐다는 침대 위에 눕혀 있는 자신의 시체(屍體)안에서 자기가 조용히 눈을 뜨고 있음을 알았다. 이것은 물론 이승에 있었을 때의 힐다라는 이름의 그 처녀가 느낀 것이 아니다. 그 육체 안에 있던 힐다의 영이 눈을 뜨고 영으로서의 생애를 시작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윽고 그녀의 영은 자기 주위에 자기 주위에 지금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세계가 새로 열리고, 다음에는 두 인도의 영이 그녀의 시체 머리맡에 와서 조용히 앉아있음을 알았다.
그녀의 영은 시체 안에서 서서히 일어나 인도령(引渡靈)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앉았다. 사자(死者)의 영과 인도하는 영 사이에 상념의 교류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인도령 중의 하나는 힐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제 정령이 되었으니 인간이 아니오. 당신은 지금부터 나의 물음에 대답하시오.” 힐다의 영은 처음 보는 이 영의 말을 듣고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 했다.
-----나는 얼마 전에 죽었는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웬일인가?-----
하지만 인도령의 말에는 힐다의 영에게 반문이 허락되지 않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힐다의 영은 의문을 느끼면서도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인도령은 말했다. “당신은 인간 육체 안에 몇 년이나 있었소?”
“약 20여 년 됩니다.” 힐다의 영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육체는 어째서 죽었으며, 그 원인은 무엇이오?” 인도령은 계속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힐다의 영으로서는 몹시 난처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그녀의 죽음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힐다의 영은 그 답을 찾으려고 고심했다. “나는 지금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어쩌면 지금 당장엔 그것을 알지 못할 것 같습니다.”
두 인도령은 이 대답을 듣자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 두 영의 얼굴에는 이상한 대답도 다 듣겠구나 하는 놀라운 표정이 역력히 떠오르는 것을 힐다의 영은 눈치 채지 못했다. 힐다의 영은 인도령의 질문에 맞는 대답을 찾으려고 그녀의 뒤에 있는 인간 힐다의 시체를 돌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이 된 힐다에게 이승에서의 존재였던 인간 힐다의 시체가 보일 까닭이 없었다......... .
영으로 된 힐다는 자기가 얼마동안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애썼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것은 힐다의 영이 갑작스런 공포와 함께 제 정신이 들 때까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영체의 힐다는 너무나도 두려운 나머지 하마터면 큰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녀(힐다의 영)는 공포에 질려 괴로워하면서 겨우 중얼거리듯이 이렇게 말했다.
“내 몸 안에 인간 힐다의 육체가 들어오는 것 같아요. 내 눈은 내 몸 속에 힐다의 육체가 보인답니다. 저 육체....... .” 힐다의 영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목이 메어 말문이 막혔다.
두 영은 힐다의 영이 하는 말을 듣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힐다의 영 이상으로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에게도 힐다의 영 안에 인간 힐다의 육체가 들어온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두 인도령은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힐다의 영에게 황급히 명령 했다.
“당신은 인간이었을 때의 육체로 돌아가서 육체의 지배를 계속할 것이오. 당신을 정령계로 데리고 간다는 것은 우리들로서도 바람직스럽지 않소.” 힐다의 영에게는 이 소리가 하늘에서 수천 개의 천둥이 한꺼번에 울리는 것과 같은 큰 소리로 들렸다.
인간의 육체가 죽으면 그 안에서 정령이 눈뜨고 이 정령은 영계로부터 온 인도령과의 상념의 교환을 한 다음에 정령계로 인도된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러나 이 상념의 교류를 하는 동안에 매우 드문 일이지만 인도하는 영이 사자의 영을 정령계로 데리고 갈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육체에 머물러 육체를 지배하도록 명령하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인도하는 영이 무엇인가의 이유로 말미암아 아직 사람의 영을 정령계로 안내하는 것은 시기가 이르다고 판단했을 경우이다. 이러한 때에는 힐다의 영의 경우처럼 대개는 영의 몸으로 사자의 육체가 스며드는 현상이 일어나며, 사자의 영은 그 들어오는 육체를 영으로서의 눈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다는 현상은 가끔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지금 소개한 것과 같은 경우에 일어나는 것이다. 힐다가 인간으로서 되살아나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또 가족들을 기쁘게 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증발의 수수께끼와 그 진상
우리는 가끔 증발이라는 불가사의한 일에 직면하여 당황해 하는 일이 있다. 즉 감쪽같이 사라져 행방을 감추는 현상을 우리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때까지 평범한 일상생활을 해왔고 사람들과도 아무 탈 없이 사귀어 오던 사람이 마치 기체처럼 증발해서 사라져 버려 영구토록 행방을 감추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그 사람의 그 때까지의 행적, 성격, 환경 등 어는 것이나 어느 모로 보더라도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증발이라는 말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이 현상에 다음 두 가지의 경우가 있다. 가령 산이나 들에서 길을 잃어 인가를 찾지 못한 채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 버리는 경우처럼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하면, 이와는 달리 영계와의 관련성 때문에 발생하여 그야말로 증발이라는 표현도 알맞은 사건도 상당히 많다. 나는 이 두 가지의 전형적인 경우를 들어 설명하기로 한다.
전자의 경우는 살아 있는 채로 정령에게 이끌리어 인간으로서 자신을 의식 못하는 사이에 으슥한 장소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는다는, 표면적으로 해석한다면 지금 내가 예를 든 길을 잃은 경우와 꼭 같은 결과를 빚어내는 현상이다. 이런 경우, 겉으로는 마치 길을 잃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길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숨진 것처럼 해석을 하지만 사실은 전혀 사정이 다른 것이다.
이런 경우는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죽음의 상태”에서 정령과 어울려 이승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때에 그의 눈은 이승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길도 물론 보지 못한다. 그는 정령과 이야기라도 나누면서 자신의 정령으로서의 눈으로 정령계의 경치를 머리에 그리면서 길을 거닐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승의 땅을 육체로 걸어가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이승이 아닌 다른 세계를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의 그는 바로 이 때 “죽어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다만 발로만 이승의 땅을 밟아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상태에 빠져 있을 때의 인간은 지금 걷고 있는 곳이 이승의 어디이든지간에 전혀 아랑곳없이 몽유병 환자처럼 걷고 있는 것이다. 그의 육체의 감각은 죽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멀어도 또 며칠을 걷더라도 피로하다는 따위의 “육체적 감각”은 전혀 느끼질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 그의 육체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발견되지 않는 산이나 들 또는 바다로 들어가 그 길로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증발 현상의 첫 번째이다.
나는 실제로 정령에게 인도되어 가는 이러한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그의 육체 속에는 그 자신의 정령의 모습이 내 눈에도 보였다. 그는 다른 정령과 함께 이승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이윽고 높은 절벽에 도달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의 육체는 아랑곳없다는 듯이 발길을 돌릴 생각도 없이 곧장 걷고 있었다. 그의 눈(정령으로서의 그의 눈을 말한다)은 절벽이 아니라 마치 평지라도 보듯이 그 공간에 전혀 이승의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절벽 끝에서 한 걸음 발을 디뎠을 때, 육체를 가진 인간 자체는 당연히 절벽 아래로 떨어져 숨졌다. 그러나 정령으로서 그는 곧장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공중의 길을 전진한 것이다.
다음에 두 번째 현상으로서 같은 하나의 육체 속에 두 영이 드나드는 경우가 있다. 이것 역시 “죽음의 상태”에서 일어난다는 점은 같으나, 죽음의 상태에서 영으로 눈뜬 그의 영적인 감응을 알고 찾아온 다른 영이 그냥 눌러 앉아서 육체의 주인공이었던 먼저의 영을 쫓아내는 경우이다. 이러한 때에 영이 교체되는 방법에는 몇 가지의 경우가 있어 일정치 않다. 그러나 어째든 교체된 영은 이 육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먼저의 인간은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 버리므로 먼저의 주인공이 영위했던 생활로는 이미 돌아갈 수가 없다. 이로 말미암아 앞서 말한 인간 시절에 살고 있던 고장도 그에게는 기억할 수가 없게 되며 또 그 기억을 간직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이다.
이 나중에 들어와서 눌러 앉은 영과 육체와의 일치가 순조로우면 그 인간은 같은 육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별개의 인격체로서 이후의 생애를 전과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보내게 된다. 이것이 증발의 두 번째 경우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증발에는 단순히 길을 잃고 행방불명이 된 경우와, 방금 설명한 두 종류의 경우처럼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하나하나가 과연 어느 경우에 해당하는가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역자 주> 증발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육체를 둘 이상의 영이 공유(共有)한 예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셀리. 비이참 이라는 처녀의 이야기가 있다. 흥미를 끄는 이야기 이므로 소개하기로 한다. 단 전 세계 연구가들 사이에도 “영의 교체”를 사실로서 인정을 하고 있기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실을 인정 했을 뿐, 본 항에서 기록한 것처럼 영계의 입장에 서서 “죽음의 상태에서 영의 교체”라고까지 설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러한 영역에서는 아마 스웨덴보르그를 빼 놓고는 감히 상상 조차 못했을 것이다.
1898년에 미국에 사는 크리스티느. 비이참 이라고 하는 아주 내성적이고 얌전한 처녀에게, 난데없이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인격은 크리스티느에 관한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새로운 인격은 크리스티느와 똑같은 육체를 공유하고 있으나, 자기와 크리스티느와 전연 다른 인격이며, 자신의 이름은 셀리이고 크리스티느는 애당초 다른 사람이라고 막무가내 우겨댔다. 그러나 크리스티느라는 인격은 셀리에 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두 인격”의 성질은 분명히 셀리가 주장한 데로 완전히 “별개의 인간”이었다.
셀리가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동안에는 이 육체는 셀리의 성격대로 행동하였고, 셀리 대신 크리스티느가 눈을 뜨면 크리스티느는 셀리가 행동을 취했던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은 크리스티느의 주치의로 있는 프린스 박사가 “한 사람이면서도 두 사람인 처녀”에 관하여 몇 가지의 실례를 들어 학계에 소개함으로써 미국의 심리. 심령학회에 큰 파문을 던졌고, 동시에 이 처녀의 사건은 전 세계의 화제를 독차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한 사람이면서 두 사람인 처녀”는 얼마 안가서 “한 사람이면서 세 사람의 처녀”가 되어 세상을 더욱 놀라게 했다. 그것은 크리스티느와 셀리 말고도 이름을 대지 않는 또 하나의 전혀 다른 성격의 처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 처녀까지 합치면 한 육체를 세 사람이 공유한 셈이 된다. 세 번째 소녀를 T라고 가정하고 이 “세 소녀”의 행적이 어떠했던가를 예를 들어 소개한다.
크리스티느는 취직을 하려고 뉴우요오크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러나 도중에 크리스티느는 셀리로 변해 버렸다. 셀리는 뉴우오요크로 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도중에서 기차를 내려 그 고장의 식당에 취직했다. 셀리는 이 식당에서 한 동안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셀리가 아닌 T로 변했다. T는 식당을 그만두고 봉급을 받아 쥐자 보스턴으로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시 셀리로 돌변하여 보스턴에서 아파아트에 세들었다. 이 아파아트에 살고 있는 동안에 본래의 크리스티느가 눈을 떴다. 크리스티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보스턴에서, 게다가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방에 와 있을 알고 깜짝 놀랐다.
도무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면 환상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전부 사실이었다. 이 이야기의 해석을 둘러싸고 심리학자. 심령연구가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 졌으나, 셀리나 T는 크리스티느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영적인 존재라는 설도 주장된바 있다.
죽음의 통지(通知)는 정령계에서 전달된다
정령계에는 얼핏 살펴보아도 곧 알 수 있는, 보통 정령과는 모습을 달리한 정령이 가끔 나타나곤 한다. 이러한 정령은 거개가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불안스러운 듯이 정령계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그들은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또는 다른 정령들이 어떻게들 하고 있는 것인지, 정령계의 동정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양 방심한 사람처럼 비실비실 떠돌아다닌다.
이러한 정령은 다른 정령이 말을 걸기만 하면 훌쩍 사라져 버린다. 인간계로 말하자면 가끔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유령과 같은 것인데,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계의 유령처럼 특정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정령계의 어는 정령에게도 다 잘 보이는 것이다. 이 정령은 실은 정령이 아니라 굳이 명칭을 붙인다면 가짜 정령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정령계에 이와 같은 정령이 동시에 둘 이상이 나타나는 경우, 그리고 그들 사이에 얼굴 모습 등이 닮았을 경우는 틀림없이 어버이와 아들 아니면 형제 사이인 것이다. 이런 경우 그 한쪽은 현재 임종이 가까운 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숨진 직후의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이 죽은 자로부터 죽음의 통지를 받은 자이다.
목숨이 경각에 다다른 자는 정령과 인간의 경계선을 오락가락 하면서 차츰 죽음에 이른다. 따라서 정령이 된 순간에 그는 불쑥 정령계에 얼굴을 내민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알려 주어야 할 상대방 인간의 영에게 영의 감응을 통하여 순간적인 죽음의 경험을 갖게 함으로써 정령계로 불러내는 동시에, 거기서 죽음의 통지를 알리는 것이다.
죽음의 통지란 세상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그 통지를 받는 쪽도 일순간이긴 하지만 죽음을 경험하는 학설은 이미 첫머리에서도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이상과 같이 두 사람이 함께 정령계로 순간이나마 들어감으로 해서 그 자리에서 통지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두 정령 가운데 한쪽은 통지를 한 뒤, 멀지 않아 이번에는 진짜 정령이 되어 정령계를 찾아온다. 그러나 다른 한쪽은 정령계로부터 모습을 감추어 다시는 찾아오는 일이 없다. 즉 후자는 인간으로 돌아간 것이다.
당신도 미래를 예지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대목에서 쓴 바와 같이 1772년 3월 29일에 이 세상을 하직하고 영계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사람은 나의 경우처럼 자신이 죽는 날(나로서는 단지 이 세상에 육체를 버려 놓고 영의 세계로 옮겨가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을 수 년 전부터 미리 알고 있는 것을 매우 이상하게 여길 것이고, 그 중에는 나 자신이 말하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누구나 자기 일생의 운명을 미리 알 수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먼저 자신의 생애를 20세 때에 예언 했던 어떤 사나이의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그는 프랑스의 한 농부였다. 그는 20세가 되던 해에 이미 다음과 같이 자신의 운명을 예고한 바 있다.
----- 그에게는 2년 후인 7월 20일, 어떤 친구가 서쪽으로부터 나타남으로 해서 52세가 되는 해 6월까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꼬마 친구가 이에 이어서 셋이 나타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은 그가 35세가 되는 해에 그를 슬프게 해줄 것이다. 또 그는 29세의 가을에 물 밑에 그의 집이 가라앉을 것을 보게 될 것이며, 32세의 봄에는 남십자성이 유난히 빛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예언대로 22세가 되는 해 7월에 마을 서쪽에 있는 같은 농가 집 딸을 아내로 맞았고 아내는 그가 52세 때까지 함께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어린아이(꼬마친구)는 셋이 태어났는데, 그 중에 한 아이는 그가 5세 되던 해에 병으로 죽어 그를 슬프게 했다.
그가 살던 마을은 그가 29세가 되던 해에 큰 홍수를 만났는데, 예언과는 달리 물속에는 잠기지 않았으나 농작물은 물밑에 잠겨 전멸을 면치 못했다. 또한 그는 이 홍수가 난 지 3년 후인 32세 때에 유산 상속인이 없는 친척의 토지를 물려받았는데, 이 토지는 남쪽을 향한 경사진 언덕에 있었다.
나는 그도 역시 나처럼 어는 정도의 “죽음의 기술”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 믿는다. “죽음의 기술”에 의해서 그도 가끔 영계에 들어갈 수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앞에서 설명하기를, 영끼리 교환하는 상념의 교류 중에는 인간계에 있을 때의 그 일생이나 영계에서 장차 보내게 될 일생이 빠짐없이 주마등처럼 그림으로 나타나 상대방이 볼 수가 있다고 했다. 이 그림은 영이라 할지라도 스스로는 볼 수가 없으나, 상대하고 있는 영이 본 내용을 말로써 전해 듣는다든가 혹은 그 영의 눈에 비치는 표상을 통해 전달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간단히 알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어느 정도의 죽음의 기술을 터득하고 영계에 들어가 다른 영과 자유롭게 상념의 교류를 할 수만 있다면, 영이 아닌 인간이라도 자기의 인간으로서의 일생을 미리 알아낸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나는 이 농부도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미래를 알았고 또한 그것을 예언으로써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것이라 생각한다.
당신도 영과 대화할 수 있다.
“마음이 순수, 단순한 태고의 사람은, 그 마음이 영계를 향해 열려 있다. 그러므로 태고의 사람은 영들과 직접 이야기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 나는 영계에서 태고의 시대부터 살고 있던 영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 영으로부터 이런 말은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 영은, 마음이 순진하여 영계를 향해 마음의 창문이 활짝 열려 있던 태고 때 사람들 중에는 육체를 지닌 인간의 몸으로도 영과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었다고 말했다.
그 영이 나를 영계의 쓸쓸한 해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 해안에는 몇 백 만년 아니 보다 훨씬 이전부터 똑같은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고 또 다시 밀려오는 광경이 되풀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이 끝없이 펼쳐진 해안과 물결의 광경이 실로 영계의 태고적 광경이라 생각되었다.
그는 해안에 다다르자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인간에게 태고적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할 것이니, 그대에게 표상을 통해 태고 사람이 영과 이야기하는 광경을 보여 주리다.” 그는 영계에서만 허용된 표상이라는 방법을 써서 나의 눈앞에 태고적 사람과 영이 대화하는 모습을 재현시켜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부터 여기에 기술하는 태고적 사람과 영과의 대화 광경은, 실제로 본 것이 아니라 표상에 의해서 본 것임을 말해둔다.
표상을 통해 나의 눈앞에는 세 사람의 태고인 이 나타났다. 그 몸에 걸친 옷과 순박하고 솔직한 얼굴모습 등을 훑어보고, 곧 이것이 태고의 “마음이 순수, 단순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자 그 곳에 또 하나의 영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고, 한 사람의 태고인 앞에 소리도 없이 섰다. 태고인 에게는 아직 그 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무엇인가를 느꼈음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영에게는 물론 태고인의 육체가 보일리 없다. 하지만 그 태고인과 마주 서 있다. 그러자 태고인의 육체에 있던 영이 희미한 그림자처럼 육체 안에서 돋보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영계에서 온 영의 머리 위에는 하나의 표상이 나타났다. 그 표상은 맑고 푸른 밤의 연못과 그 물 위에 드리운 달, 그리고 무엇인가 문자를 연상케 하는 열쇠 무늬와 선(線) 따위가 잇달아 나타났다. 이 표상은 그 영이 육체에 깃들고 있는 태고 영의 상념(사람 마음속 깊이 간직된 생각)을 자기의 상념 속에 받아들여 이해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영은 육체를 지닌 인간의 영적인 부분과의 교류에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아직 인간과의 직접적인 대화는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영과 인간과의 자연적인 상념(인간으로서의 일반적인 생각)이, 이 단계에서는 아직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윽고 영계에서 온 영의 상념이 육체 안에 있는 영의 상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공중에 엷은 안개가 흘러가는 듯한 느낌으로써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차츰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영의 상념 속으로도 흘러 들어갔다. 이 단계에 이르면 영과 인간과의 직접적인 대화는 어렵지 않게 진행된다. 영과 인간과의 직접적인 화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 태고인은 자기 육체의 내부로부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목소리는 태고인 이 평상시에 쓰고 있는 언어인 것이다. 태고인은 이렇게 말했다.
“영계에 들어가면 내가 아는 사람들에 관한 것을 알아봐 주오. 그리고 그대가 아는 것이 있다면 지금 가르쳐 주오.” 영은 이에 대한 대답을 틀림없이 했겠지만 외부에 있는 나로서는 이해할 길이 없었다. “요셉에 관해서는 잘 알았소. 그러면 유다는 어떻게 지내고 있소?”
태고인의 소리만이 우리에게 들려왔다. 그 사람은 깊은 명상 속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계속 했다. 영은 이 태고인에게 내면의 음성으로 대답하고 있지만, 외부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사람들이 본다면 명상에 잠긴 사람이 조용히 자기 자신에게 자문자답하는 것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려 자세히 보면, 그가 질문하고 영이 대답하고 있으리라 생각되는 시간이면, 그의 혀가 조금씩 떨려 마치 소리 없는 말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영과 사람과의 직접적인 대화는 방금 말한 것과 같은 형식으로 진행되는 것인데, 이것이 가능한 사람은 나를 데려온 영의 말을 빌린다면 “마음이 순수한 사람”에 한한다고 한다. 그 까닭은 이러한 사람의 마음의 창문은 영이나 영계에 대해서 열려 있으므로 영의 상념을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로 인하여 영계에서는 태고 시대를 황금시대라 하고, 시대가 점점 내려감에 따라 백은 시대, 청동 시대라 부르며, 현대를 철기 시대라 부른다. 이것은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인간이 과학이나 세상의 명예나 이해타산 따위의 외면적인 사항에만 마음을 쓰게 되어 영에 대해 소홀히 한 결과이며, 동시에 영적 창문이 차츰 막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조금 전에 언급한 영의 말을 빌리면 “현대에는 마음이 순수함으로 해서 영과 대화 할만한 사람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면 좀더 영과의 대화에 관한 설명을 부연해 보기로 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보면, 영은 그 상대방 인간의 말을 쓰면서 태고인과 대화한 것처럼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해이다. 왜냐하면 영은 인간의 언어를 한 마디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의 대화는 영의 상념이 태고인의 영적 상념 속에 스며들어 다시 그 사람의 내면적인 마음속을 거쳐서 인간의 자연적 상념 안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태고인 에게는 마치 자신과 똑같은 말로써 영이 이야기를 걸고 있는 것처럼 들린 것이다.
이상의 이야기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가장 중요한 결론이라고 믿는다.
마음이 순수, 단순한 태고적 사람들에게 영과의 직접적인 회합이 가능했다는 것은, 곧 인간의 본래의 모습은 영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인간은 점차로 갈 길을 잃고 본래의 바른 길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현대인들에게, 그것도 극히 한정된 사람뿐이지만 직접적인 영과의 교류가 가능했던 사례는 실상 알고 보면 진짜 영이 아닌 정령과의 대화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령과의 대화는 때로는 대화하는 사람의 육체를 멸망시키고 목숨을 빼앗아 가는 매우 위험한 것인데, 여기에 대한 것은 다음에서 자세히 말하기로 한다.
만약 우리 역시 태고 인처럼 유순하고 천진한 마음을 지닐 수 있다면 우리도 영과의 대화가 얼마든지 가능할 것임은 틀림없다.
정령과 인간과의 대화는 인간에게 매우 위험하다. 그 까닭은 정령은 아직 영으로서의 심사를 거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중에는 흉폭한 정령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또 정령에는 아직도 인간세계 시절의 기억이 꽤 남아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것이 대화하는 상대방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가끔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나 자신의 경험담과 목격담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나는 그 때 나의 영을 육체로부터 이탈시켰는데, 그 이탈의 정도가 얕았기 때문에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나의 영은 방금 이탈한 육체를 상공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나의 육체는 죽음의 상태에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나의 영은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고 깜빡 정신을 잃었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리고 나의 육체를 굽어보자 죽어 있는 나의 육체 곁에 하나의 정령이 앉아 얼굴을 응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육체에 깃들어 있는 나의 영과 상념의 교류를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상념의 교류로 나의 영 속에 자신을 스며들게 하는 데 성공만 한다면 그는 나의 영을 내쫓고 나의 육체를 자기의 것으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나의 영이 본 그 정령의 얼굴 모습은 안면의 반쪽이 거무튀튀할 뿐만 아니라 한쪽 볼은 떨어져 나가서 추악한 용모가 된 흉령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흉령이란 항상 이러한 끔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때 나의 영은 육체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그도 상념의 교류를 할 길이 없어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만일 그 때 나의 영이 육체를 이탈한 상태에 있지 않아 그와 상념의 교류를 하게 되었더라면...........하고 생각하면 지금도 전율을 금치 못한다.
그러면 정령과 인간과의 직접적인 대화나 교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설명에 앞서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하기로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영의 문제 그리고 영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얼마 동안을 그렇게 하고 있었는지 분명치 않지만, 갑자기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마치 물체라도 되는 듯이 형태를 갖추고 내 육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눈에 역력히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은 일찍이 겪어 보지 못했던 바이고 또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미쳐버린 것이 아닌가하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빨리 명상에서 깨어나려고 애를 썼으나 이상하게도 무엇 때문인지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다음 순간에는 더욱 기묘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몸 안에서 나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나의 공포는 절정에 달했다............ .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는 침대 위에 조용히 뉘어져 있었다. 나는 기절하기 직전에 내 몸에서 일어난 불가사의한 일을 곧 생각해 보았으나,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날 무서운 일이었다.
이 사람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면서도 정령과 대화를 할 뻔한 사람이다. 정령과 인간과의 직접적인 대화가 시작되는 전조(前兆)는 이와 같이 자신의 안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연상처럼 보이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정령의 상념이 그 사람의 영적 상념(인간의 마음속의 깊은 생각) 속에 흘러들어 다시 자연적 상념(인간으로서의 일반적인 생각) 속에 차츰 침투하기 시작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정령의 상념이 인간의 영적 상념 속으로 스며들어 다시 자연적 상념으로 들어가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영과 태고인과의 직접적인 대화의 경우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 영이 아니라 정령인 까닭은 현대인들(그것도 매우 예외적인 사람들이지만)의 영적인 개안(開眼)의 정도가 태고의 황금시대 사람들에 미치지 못하고 정령계와 통할 정도밖에는 마음의 문이 열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앞에서 설명했으므로 이해하리라 믿는다.
정령과 인간과의 직접적인 대화는 영과의 직접적인 대화와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와 전혀 다른 형식으로 행하여지는 경우가 있다. 영과의 대화가 공통적인 점은, 정령이 인간의 영적 상념으로부터 자연적 상념으로 넘어 간다는 점이며, 인간에 관한 일과 인간의 언어를 알고 있고, 인간의 언어로 대화한다는 것이다.
또 영과의 경우와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정령과의 대화에는 경우에 따라서 사람을 죽게 할 위험성이 내포된다는 점과 정령이 인간을 지배할 위험성이 많다는 점 등이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 설명하기로 한다.
(1). 유령일 경우에 따르는 위험
정령은 자기 이외에도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자기가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육체에 상념을 통해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는 그 인간을 자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정령과 인간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정령은 자기 이외에도 대화의 상대인 인간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 정령이 선한 정령이라면 그런대로 위험이 따르지 않겠지만, 흉령일 경우에는 인간 혹은 자기 이외의 남에 대한 그의 악의는 이 세상 인간들이 품고 있는 악의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흉악한 것이다.
이 점은 정령계를 설명할 때에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 흉령의 악의는 그가 인간계에 있을 때는 사람들의 눈이 있어 평판이나 이해타산 때문에 억제되었지만, 정령이 되고 나서부터는 거리낌 없이 적나하게 노골화하기 때문인 것이다. 흉령이 인간과 대화한 결과 인간의 존재를 알게 되면, 그는 인간에게 갖가지 악의에 찬 마수를 뻗쳐 드디어는 그 육체를 멸망으로 이끄는 예가 적지 않다.
(2). 인간의 착각으로 일어나는 위험
인간은 흉령과 대화를 하면서도 모든 영은 한결 같이 성스러운 령이려니 생각하기 쉽다. 실상 흉령은 자기 이외에는 인간이 있을 리 없고, 세계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인간 쪽은 자기와 대화하고 있는 영이 영인 이상에는 성스러운 영이려니 착각하기 쉬운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 인간은 육체 속의 영의 소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복종하여 열광적인 광태를 부리게 된다. 그러나 실상은 착각이며,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성령(聖靈)은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큰 실수를 저질러 때로는 살인과 강도 등 별별 나쁜 짓을 예사로 거듭한 나머지, 마침내는 자신의 몸을 멸망으로 몰아넣어 버린다.
그러면 정령과의 대화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해서 그 실례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500년 전 옛날에 전쟁 때문에 많은 사람이 사망한 유적지인 네덜란드의 시골 어느 마을의 스피레라고 하는 농부가 어느날 밭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정령의 방문을 받았다. 즉 갑자기 이상야릇한 정신상태로 빠져들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스피레는 정신없이 이렇게 외쳤다. “너는 뭐냐? 내 뱃속에서 소리를 내고 있는 너는 누구냐 말이다. 악마냐 아니면 악령이냐? 내 뱃속에 함부로 들어오다니! 썩 꺼져 버려!”
이에 대한 정령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곧 너의 주인이다. 너는 나의 종에 불과하며, 지금까지 나는 너에게 육체를 빌려주었을 뿐이다. 그러니 너는 이제부터 나의 말을 명심하고 명령에 복종하라.”
스피레는 이 해괴한 대답에 너무 놀란 나머지 대꾸도 못하고 말았다.
이 때 스피레의 행동을 보고 있던 같은 마을의 농부들은 스피레가 숨이 끊어질 듯한 단말마(斷末魔)의 고함을 지르므로 깜짝 놀라 지켜보았으나, 다음 순간에는 괭이를 손에 든 채 얼빠진 사람처럼 멍청히 하늘을 우러러보며 방심 상태로 밭 한 가운데 말뚝같이 서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돌아온 그는 정신 회복은 되었으나 이제까지의 스피레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고, 또 가끔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말을 중얼거렸다.
온 마을이 스피레의 방화로 말미암아 집이 전부 타버리고 많은 사상자를 내었을 뿐 아니라, 스피레 자신도 타죽는 끔직한 일이 발생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이 사건은 스피레의 발광 때문이라고 낙착되었나. 나는 이것을 정령과의 대화에서 생긴 위험의 한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정령과의 대화에 있어서 정령 쪽이 인간의 상념을 이해하고,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먼저도 말한바와 같이 영과의 대화와 같은 것이므로 별로 위험할 것이 없다. 이에 반하여 정령 쪽이 인간의 언어는 이해는 하지만 인간의 상념까지는 알아차리지를 못하고, 정령 자신의 상념만을 고집하여 대화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에는 곧 기묘한 혼란이 야기된다. 대화를 통해 들은 정령의 상념을 인간은 마치 자신의 진짜 상념처럼 생각해 버린다. 이렇게 됨으로써 인간은 그 때까지의 자기를 버리고 대화의 상대인 정령의 생각대로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되어버린다. 이 인간은 정령의 생각을 자기 생각으로 살아가는 정령의 기계가 된 것이다.
스피레의 경우가 바로 이것이라 믿는다. 그에게 정령의 상념을 심어 준 정령은, 아마도 과거에 그 마을에서 학대를 받은 사람이거나 혹은 500년 전에 있었던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의 정령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정령의 기억 또는 상념을 스피레는 자기의 것이라 생각하고, 그 정령으로 둔갑하여 복수를 한 것이라 생각된다.
또 열 살도 채 못 되는 아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고장의 사정을 상세하게 알고 있다거나, 자기는 옛날에 어디에 살고 있던 아무개라고 주장하는 일이 흔히 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 그 아이는 그 고장에 데리고 가면 그것이 설사 다른 나라일지라도 전혀 배운 일이 없는 그 나라말로 그 고장 사람들과 태연히 이야기를 나누는 수수께끼 같은 일이 있다. 이러한 예는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오인하기 쉽지만, 실은 정령과의 대화로 말미암아 그 정령의 기억이 인간 속에 어엿하게 자리를 잡았을 경우도 매우 많은 것이다.
이승도 영계의 일부이다
나는 앞에서 영계의 넓이는 광대무변하여 전 우주보다도 넓다고 말한바 있다. 또 영계에서의 결혼은 남녀의 영이 영으로서의 일체(一體)가 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나는 이제 영계와 이 세상의 공간적 상관성에 관하여 설명할 단계가 되었다. 그러면 영계와 이 세상간의 공간적인 관계는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일까?
설명의 편법으로 우선 우리들 인간이 흔히 보는 유령 이야기를 몇 가지 소개한다.
독일의 어느 도시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농부 드루는 어느 날 밤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드루는 입 속으로 가져가려던 포오크를 자기도 모르게 멈추고 내려놓았다. 그 자신도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고 훗날 고백한 바 있는데 포오크를 식탁에 놓고는 곧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입구 문짝에 등을 진 채 오스트리아에 있는 친구가 서 있었다. 그는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친구가 수상쩍기는 했으나 곧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고 다정하게 말을 걸려고 하자 그 친구는 훌쩍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는 당시 상황을, “그 친구가 사라진 모습은 마치 문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증거로 곧 문을 살펴보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문은 꼭 닫혀져 있었다. 유령은 문틈으로 드나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내 고향인 스톡홀름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어떤 교회의 목사가 한밤중에 독서를 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방안 공기가 보통 때와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자 거기에 안면이 있는 교회 신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평소 때와는 달랐으나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자 이상스럽게도 그 신도는 모습을 감추었다.
그 목사는, “유령은 별안간 키가 줄어지면서 마룻바닥으로 꺼져 버렸다.” 라고 그 후 설명했다.
내가 근래 수십 년 동안 수시로 방문하여 머무르던 런던 교외에 자리한 유령의 집에 대해서는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유령의 목격담을 퍼트린 바 있다. 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른 유령의 출현과 사라질 때의 모습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수집했었다. 수집한 자료에 의하면 첫째 이야기처럼 문틈으로 출입했다는 사람,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수 없고 그저 무심코 보니까 유령이 있었으며 어느새 사라졌다고 하는 사람, 벽 속을 마치 공간처럼 생각하고 걸어가는 듯한 느낌으로 사라졌다고 하는 사람 등 가지각색이었다.
이상 세 가지의 이야기에 관한 설명은 뒤로 돌리기로 하고 먼저 영계라는 세계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그 공간과 이승의 공간(세상)과의 상관관계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설명하기로 한다.
나는 이미 영계가 전 우주보다도 넓은 광대무변한 것이라는 점, 그리고 영계와 이승의 관계는 한 닢의 동전 안팎과 같이 밀착해 있어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나는 이승과 영계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기로 하겠다.
이 세상이란 영계와 광대무변한 공간 속에 두둥실 떠 있는 하나의 고무공이며, 이러한 자연계의 주위는 온통 영계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자연계와 영계의 관계는 고무공의 껍질로 해서 뚜렷이 경계가 지어져 있는 별도의 세계라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으며 그 진상을 여기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무공 내부에도 빈틈없이 영계가 스며들어있다. 고무공 내부도 실상 영계이다. 고무공 내부 이외는 모두가 영계이지만, 고무공 내부만은 예외적으로 자연계와 영계의 두 세계가 동일한 공간 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사람들은 좀처럼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예컨대 책상이 하나 놓여 있으면 그 놓여진 자리에 다른 책상을 놓으려고 해 보았자 더 놓을 수 없다는 것이 자연계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 두 물체를 동시에 놓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계에서나 있는 생각에 불과하다. 이것은 자연계가 물질계, 즉 물질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계에서도 놓여 있는 책상을 치워 버린 다음에 또 하나의 책상을 그 자리에 놓을 수는 있다. 이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며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역시 책상 하나를 치운 뒤에 다른 하나의 책상을 놓는 것이니까, 그 두 책상은 놓여지는 것이라고 밖에는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각기 다른 시간에 같은 장소, 즉 공간에 두 책상을 놓았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사람들도 각기 다른 시간에 같은 공간에 두 물체가 자리 잡는다고 한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왜냐하면 공간과 시간은 각기 다른 성질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부지불식간에 마음에 박혀 버린 일반적인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걸음 깊이 들어가 보기로 하자. 같은 공간이라고 하지만 성질이 전혀 다른 두 공간 사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흡사 시간과 공간이 그 성질을 전혀 달리하고 있듯이 말이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신경 조직은 몸 안에 분명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엄연히 공간을 차지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또 하나의 것(다른 신경 조직이라도 좋다.)을 집어 넣자면 먼저 들어 있는 것을 옮겨 놓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신경 조직을 타고 우리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 신경의 명령이나 신호는 같은 공간 속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명령이나 신호는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반론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그것은 엄연히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공간의 성질이 다를 따름이다.”
영계의 공간과 이승의 공간과의 상관관계로 이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영계에서 결혼한 영이 두 몸이 완전히 하나로 되어, 하나의 영으로 취급되는 것도 영계의 공간과 자연계의 공간과의 성질의 차이 때문이다. 또한 영계가 이승과 한 닢의 동전처럼 앞뒤의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계가 존재하는 영역에서는 이승과 꼭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수수께끼도 역시 영계의 공간이 갖는 성질 때문이다. 이 일이 우리에게 여간해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우리가 영계의 문제를 생각할 때에도 이승과 자연계적. 물질계적 습관에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앞서 말한 유령의 출현과 사라지는 모습에 관한 비밀을 알아보기로 하자.
첫 번째 농부의 이야기에서는 출입문 문틈으로 유령이 출입한다고 했다. 또 런던의 유령의 집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또 두 번째 목사의 이야기에서는 마룻바닥으로 사라졌다고 했고, 런던의 유령의 집 이야기에서도 벽속에서 나타나 벽속으로 사라졌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어떻게 나타났다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통 알 수가 없다고 한 사람들도 꾀 많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어느 것이나 다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은 벽 속을 통과해서 나타나 벽 속을 통해서 사라지거나 목사의 경우처럼 마룻바닥을 통해서도 사라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간의 성질이 다른 이상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은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즉 벽 속이건 마룻바닥이건 거기에는 모두 영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출입문 문틈을 통해서 출입한다는 농부의 말도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다. 그것 역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더 설명한다면, 이것은 농부가 출입문이 잠겨져 있었으니까 틈을 통하지 않고서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이승의 상식에 사로잡혀 그 상식에 입각해서 해석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그럴 이유는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영에게는 물질계의 문짝 따위는 말할 나위도 없이 눈에 보일리가 없기 때문에, 구태여 문틈을 골라 빠져나갈 까닭이 없으며, 출입문을 곧장 통과하면 되는 것이다.
끝으로 덧붙여 말해 둘 것이 있다. 첫 번째 농부가 말을 걸려고 하자 유령은 왜 사라졌을까? 또 두 번째 이야기에서처럼 목사가 손짓을 하는 순간 영은 왜 사라졌을까? 이 사실에 관해서는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농부나 목사는 말을 걸어 보려고 생각했거나 손짓하는 순간에 이승의 사람으로 다시 살아나 영의 세계로부터 이 인간계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영을 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을 말한다면 영은 어차피 그곳을 벗어나 어디론가에 갔을 것은 틀림없지만, 농부나 목사 그리고 유령의 집 방문객들이 말하는 것처럼 문이나 마룻바닥이나 벽으로 사라졌다는 것은 실상 그들의 착각이다. 그 때 영은 단순히 그들의 시계에서 사라진 것에 지나지 않으며, 영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유령은 왜 사건 현장에 나타나는가.
세상에는 흔히 유령의 집이라는 것이 있다. 유령을 완강히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환상이라든가, 그 집의 구조나 뜰에 있는 나무의 배치, 그리고 낮에도 유령이 나오는 집은 그 집의 태양광선의 조화, 밤이면 달이나 별 등의 빛과의 관계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유령처럼 느끼게 한다는 식의 그럴듯한 이유를 붙인다.
이것은 아예 근거가 없는 것이므로 새삼스럽게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나는 어째서 유령이 나오는지 그리고 유령의 집이라고 불리는 저택에는 정말 유령이 자주 나타나는 것인지에 대하여 한층 더 근거 있는 설명을 하고자 한다.
나는 전례에 따라 하나의 실례를 들어 말하기로 한다. 이 유령의 집은 특히 유명한 것이어서 영국에서는 모두들 베란다의 유령이라 불리고 있다.
이 집은 에딘버러(영국의 중부 도시)의 변두리에 있는 2층 건물이다. 집은 큰 편이었고 넓은 정원에는 오래된 고목들이 꽉 들어차 한낮에도 고요적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유령의 출현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20년경이고 유령을 처음으로 본 사람은 그 집에서 수십 년을 일해 온 하인이었다.
그는 어느 날 저녁, 저택의 문단속을 하며 한 바퀴 돌아보고 있었는데 2층 베란다에 연한 방까지 왔을 때, 베란다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으므로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그림자는 10년 전에 죽은 이집의 딸 엘렌 이었기 때문이다. 그 유령은 몸을 떨고 있는 하인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는 물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태도로 베란다 끝까지 5-6미터 가량 걸어가서는 훌쩍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는 후부터 이 집에는 엘렌의 유령이 때때로 나타났고, 게다가 영락없이 베란다에 나타났으므로 베란다의 유령 저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이 집은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가 되었는데, 1740년경에 엘렌의 가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또 유령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헌트가 이 집을 사들여 새로 개조하여 살게 되었다.
개축한 이집은 본래의 집보다 규모가 작아서 정원 깊이 자리 잡은 조그마한 건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엘렌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소문도 들어보지 못했던 헌트 가족도 얼마 안가서 엘렌의 유령을 보게 되었다. 더구나 엘렌의 유령은 집을 개조하기 전의 2층 베란다가 있던 자리에 나타나서 옛날 하인이 본 것처럼 마치 옛날의 베란다 위를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걸어가듯이 공중을 밟아 가더니 훌쩍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위의 물체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한 모습도 전과 다름이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 둘 것은 이 엘렌은 엄격한 성격의 시골 유지였던 부친이 허락할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하여 베란다에서 자살 했었다.
이러한 유령의 이야기는 영의 입장, 영계의 입장에서 설명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며, 또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나는 이미 앞에서도 기술한 바와 같이 영은 그 상념에 의해서 어디든지 자유롭게 몸을 이동할 수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영은 공간이나 거리라는 관념을 가지지 않는다고 설명한 바가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이야기 가운데 “똑같은 장소”에만 엘렌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해 보기로 한다. 엘렌이 사람의 눈에 즉시 엘렌 이라고 인정받았다는 것(영이 된 엘렌의 얼굴 모습에 큰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 엘렌이 유령이 되어 가끔 나타난 것으로 보아 엘렌의 영은 아직 영계에는 가지 못하고, 이승과 영계의 중간인 정령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령계에 있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영들과 마찬가지로 엘렌의 영적인 마음의 상태는 아직 인간계에 있을 때의 기억이 상당히 남아 있었던 게 사실이다.
내가 자주 언급한 바와 같이 영들의 기억 속에 남는 것은 아직 그 영이 육체적 인간으로 있을 때의 기억이라 하더라도 그 마음 깊숙이 간직된 영의 평면에 기억된 것뿐이며, 표면적인 지식 따위는 모조리 소멸하여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이 그 육체적 감각 눈. 귀. 코 등에 의해서 알게 된 것에 불과하므로 그 인간의 육체상의 기억으로 그치고 영으로까지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특이한 예외적인 경우에는 인간시절의 기억이라 할지라도 영의 평면에 이르지 못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르는 수가 있어, 이 기억은 죽은 뒤 한참동안 남게 된다. 이런 특이한 예는 엘렌의 경우처럼 자살했다든가 혹은 살인으로 인해 죽었다든가 한 영의 경우는 그 최후의 장면이나 장소가 기억으로 남아 있게 되어 비록 물질계의 기억이지만 영의 평면에까지 도달하는 수가 있다.
따라서 정령으로서의 엘렌의 상념에는 아직 인간 시절의 물질적인 기억이 상당히 남아 있어, 엘렌의 정령적인 상념 속에서 되살아나는 일이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할 때에 엘렌은 상념에 따라 영계를 자기도 모르게 이동해서 그 상념의 장소---이 경우에는 베란다(이승도 영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엘렌의 영이 사후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영계로 가지 않고 정령계에 마냥 머물러 있다는 것도, 실은 그녀의 영(정령)으로서의 상념 속에 물질계 속박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 다소나마 남아 있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유독 엘렌만은 아니지만 유령이 모두 주위의 상황에 무관심한 태도를 짓는 이유는 이미 말한 것처럼 아직 물질계의 속박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유령이란 어디까지나 영이며, 영에게는 물질계의 일은 눈에 띄지 않는 법이며, 영들로서는 물질계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나의 교령술(交靈術)
여기서 사람들의 관심사인 교령술의 비법과 나 자신이 사람들의 요청으로 실시한 교령술중에서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먼저 교령술이란 무엇인가 그 비밀의 눈을 열어 보기로 한다.
교령술이란 말할 나위도 없이 사자(死者)의 영과 교신함으로써 사자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받아 듣고 이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술법을 말하며, 이것을 행하는 영매(靈媒)라고 일컫는 사람들(극히 적은 수이지만)은 다 같이 내가 말하는 “죽음의 기술”을 지닌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교령술이라고 하지만 이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하나는 영이 영매로 신(神)지펴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 또 하나는 영매의 영이 사자의 영과 교류하여 알게 된 사항을 영매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교령술을 실시하는 영매는 죽음의 상태에서 자신의 영을 육체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교신의 상대방 영을 지가의 육체로 불러들인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자의 영은 영매의 육체를 빌리는 형식으로 그의 입을 통하여 이야기하거나, 손을 빌어 글을 쓰거나(<역자 주> 자동필기 현상이라고 부른다.)하여 사람들과 통신을 하게 된다. 이 경우에 영매는 그 얼굴 모양이나 목소리나 말투까지도 사자의 영의 생전의 모습과 같은 특징을 띠게 된다.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신 지핀(빙의: 憑依)”것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며,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공포감을 갖게 하기도 한다. 이 방법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생한 교령 현상을 눈앞에 펼쳐 보여 영이나 영계를 직접 목격하는 실감을 주기 때문에 매우 강렬한 인상을 던져 주지만, 반대로 영매로서는 매우 위험천만인 방법이기도 하다.
영매에겐 신 지핀 영이 교령 술이 끝남 뒤에도 그 육체에서 물러갈 생각을 않을 때는 여기에 비로소 영매의 영과의 사이에는 맹렬한 투쟁이 벌어진다. 영매의 영을 대신하여 교령술 대상이 되었던 영이 그 육체에 눌러 앉기라도 한다면 영매는 인간으로서는 죽어버리고 그 육체는 다른 인격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것이다. 또 그렇게까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두 영 사이에 벌어지는 사투로 말미암아 영매는 그로부터 정신 착란증을 일으키거나 얼빠진 바보처럼 폐인이 되는 일도 많다.
내가 보여 준 교령술은 이 방법이 아니라 제2의 방법이었다. 이 방법도 역시 죽음의 상태로 자신을 빠져들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점에선 같으나, 다른 점은 이 방법에서는 자신의 육체를 이탈한 영으로 하여금 상대방 영과 교신하여 그 결과를 영매 자신의 영과 육체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상대방의 영에게 영매가 육체를 빌려주는 것이 아니니까 위험할 것은 없다.
그러면 내 자신이 실시한 교령술로서 비교적 세상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을 소개하고, 그것을 실제에 있어 어떻게 실시했는가를 기술하기로 한다.
그 하나는 나의 모국인 스웨덴의 여왕의 요청을 받아 여왕을 비롯하여 쟁쟁한 신하들이 성황을 이룬 가운데 실시되었다. 여왕께서는 그때까지 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계셨지만, 여왕 어전에서 교령술을 직접 실현하기 전까지는 사실 교령술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계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여왕께서는 반쯤은 교령 술을 시험해 보겠다는 생각과 반은 이 교령술의 대상이 된 고인의 알려지지 않는 덕을 신하들 앞에 영매인 나의 입을 빌려 발표해 보려는 의도에서 교령 술을 행하도록 명령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의도야 어쩌든 간에 여왕은 교령술을 행하기에 앞서 나에게 약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어떤 장군에 관한 일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장군의 있었는지조차도 몰랐으므로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왕께서는 그렇다면 아주 잘 됐다고 말씀하시며 장군의 이름만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지시하셨다.
“나는 그 사람이 죽은 후 그가 나에게 남긴 유서를 받았소. 하지만 오늘날까지 공개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유서를 받았다는 사실조차 이야기를 하지 않았소. 왜냐하면 관계자들이 생존해 있었고 그도 또한 유서에서 공표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요. 그러나 이제 그 관계자들이 한 사람도 남이 있지 않으니 공표해도 괜찮으리라 믿소. 그러므로 그대는 죽은 사람의 영을 만나서 그 유서의 내용을 들어 본 뒤 여기서 여러 대신들에게 발표하도록 하오”
나는 나 자신의 육체에 “죽음의 기술”을 베풀어 육체를 죽음의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윽고 영이 눈을 떴다. 나의 영은 이름밖에 모르는 장군을 허허 막막한 영계에서 찾아내기 위한 첫 수단을 강구코자 여왕의 육체 안에 있는 영을 불러 보았다. 물론 여왕은 이것을 알 까닭이 없었다. 만일 여왕이 교령 술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있었다거나 보통사람보다 훨씬 민감한 사람이었다면 이 순간(그것은 극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희미하나마 어떤 감촉을 느꼈을 것이다.
여왕의 영으로부터는 아무런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얻지 못했다. 다만 알아낸 것은 장군이 덕이 높은 사람이며, 용감한 군인이었다는 생전의 얼굴 모습이 희미하게 머리에 떠올랐을 뿐이었다.
나의 영은 이 얼마 안 되는 그리고 막연한 단서를 간직한 채 영계로 들어갔다. 그러나 있을까 말까한 사소한 지식만으로 광대무변한 영계에서 장군의 영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나의 어슴푸레한 의식은 나의 영이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이리 저리 궁리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이윽고 나의 영은 영계의 어느 방향을 향해 이동하고 있음을 알아 차렸다. 그리하여 나의 영은 영계의 어떤 단체 안에서 나의 영 쪽으로 누구를 기다리는 듯한 얼굴로 목을 내밀고 있는 하나의 영을 발견했다.
나의 영은 그에게 물어 보았다. “당신은 이승에 있을 때 스웨덴이라는 나라의 장군이 아니었소?”
그의 표정에는 다소나마 반응이 있었다. “인간의 시절의 일은 자세히 기억 못하오. 다만 붉은 빛이 많은 곳(싸움터란 뜻)에 자주 드나든 기억이 약간 남아 있소.” 그 후 그는 조금씩 기억을 되살려 나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나는 무의식적인 죽음의 상태로부터 평상시로 돌아와 여왕에게 말했다. 유서의 내용은 이 장군이 출전한 어느 전쟁터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것이었다. 여왕은 나의 대답이 세밀한 곳까지 정확히 밝혀내는 것을 듣자 몹시 놀라며 압도당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참 이상한 사람도 다 보겠다는 듯이 묵묵히 나의 얼굴을 주시하고 계셨다. 잠시 후 여왕은 감탄조로 한 마디 말씀 하셨다. “이 일은 나와 죽은 장군 이외에는 아무도 몰랐던 사실이었는데.......... .”
또 하나의 예는, 의뢰해 온 사람이 네덜란드의 외교관 미망인이었으므로 나의 이름이 네덜란드에까지 알려지게 된 사건이었다. 특히 교령술에서 취급할만한 큰 사건은 아니었기 때문에 간단히 그 줄거리만 적기로 한다.
그것은 1761년의 일이다. 그녀는 당시 스웨덴의 수도에 주재하고 있던 네덜란드 대사의 미망인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뒤 귀금속 세공인으로부터 대사가 생전에 만들게 했던 값진 황금 그릇의 대금 지불을 요구받았다. 그녀는 남편이 그 돈을 지불했으리라 믿고 있었지만 영수증을 찾을 수 없어 난처하게 되었다.
영계의 남편과 교신하여 지불 여부와 지불했다면 영수증을 어디에 간직해 두었는지 알려 달라는 것이 의뢰의 요지였다.
나는 영계에 잇는 그녀의 남편과 교신한 결과 그 대금은 7개월 전에 치러졌으며, 영수증은 옷장서랍에 간직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나는 곧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옷장은 이미 샅샅이 뒤졌으나 영수증은 찾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옷장에는 서랍 뒤켠에 비밀 장치가 붙어있어 그 곳에는 특히 중요한 편지 등이 들어 있으며, 바로 그 안에 영수증도 들어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옷장을 다시 찾아본 결과 비밀 장치를 발견했으며, 7개월 전의 영수증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고텐버어그에서 본 스톡홀름의 화재
나는 그 날 영국으로부터 고텐버어그(스웨덴 서부에 있는 도시)로 왔다. 왜냐하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으나 그 날 밤은 친구 집에서 쉬고 이튿날 그의 친구와 함께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여 있었다.
친구와 점심 식사를 들고 있을 때, 나는 의식적으로 가끔 행하는 “죽음의 상태“로 빠져들 때와 비슷한 느낌이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듯해서 놀랐다. 나의 모습이 친구에게도 이상스럽게 보였던 모양인지 친구는 의아스런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찌된 일이지? 갑자기 기분이 언짢은가?” 나는 내 자신이 무어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흐리다. 아마 대답을 할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나중에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내가 “........ 음.........불이 났군........ . 불이 보인다....... .” 라고 중얼거리고 다시 이어서 “스톡홀름에, 스톡홀름에........ .”라고 말한 뒤 정신을 잃었으며,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나는 흐려진 의식 속에서 한 엷은 막을 통해서 그 건너편에 무엇인가 빨간 것이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마치 마법에 걸려 빗자루라도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다음 순간에 나는 파도에 일렁이는 바다 위를 작은 배에 타고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나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주변에 무엇이 있는가를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으로 악몽 속을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의식은 점점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갈 뿐이어서 마음은 공포에 사로 잡혔다.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하려고 했으나 나의 목소리는 이미 몇 만 년 전에 말라서 아무리 소리를 지르려 해도 소용없다고 누군가가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으스스한 의식 속에서 마침내 절망 속에 빠져 들어가는 내 몸을 어찌할 수 없다고 단념했다.
그러나 절망 속에 몸을 던지자마자 어찌된 영문이지 오히려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나의 고향인 스톡홀름의 거리가 눈앞에 보였다. 거리는 붉은 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화재가 난 것이었다. 불은 거리의 서쪽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때마침 불어온 강풍을 타고 불길은 차츰 시의 동쪽으로 번져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갈팡질팡 허둥대는 광경도 보였다.
나는 내가 사는 집도 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로서는 다만 그것을 구경만 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을 나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면서 보고 있는 동안에도 불은 점점 번져갔다. 거리에는 갈팡질팡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그 표정도 한층 심각해짐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이 화재 사건을 얼마 동안이나 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불은 다행히도 나의 집에서 셋째 번 집까지 와서 멎었다.
내가 정신을 차려보니 친구 집 침대 위에 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몸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으므로 깜짝 놀랐다. 눈을 뜨자 친구와 그의 가족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의식을 되찾아 조금 전에 본 화재 광경을 친구에게 들려주었다. 보통 때라면 친구는 이상한 꿈을 꾸었으려니 하고 웃어 넘겼을 터이지만, 이 때의 친구의 얼굴에는 무언가 무서운 것을 대하는 듯한 표정이 서리어 있었으므로, 그 표정을 쳐다본 내가 오히려 놀래어 등골이 오싹 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나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불은 우리 집에서 세 채 떨어진 곳에서 꺼졌으니까”라고 말하고 억지로 웃음을 띠어 친구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한 이유를 그 친구가 알 턱이 없었다.
고텐버어그 시장이 스톡홀름으로 사람을 보내서 화재에 관한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서였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그 큰 화재 사건은 내가 바로 친구와 점심을 나누던 그 시각에, 내가 화재를 느꼈을 그 시각에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본 것처럼 시의 서쪽에서 발화하여 내가 본 그대로 번져서 동쪽으로 퍼져갔다. 또한 내 집에서 세 집 건너에까지 불길이 번졌으나 다행히 불길이 가라앉아 피해를 면했다. 화재가 진화된 시간도 내가 본 시간과 일치했다.
나는 그럼 어떻게 해서 그처럼 자연스럽게 “죽음의 상태”가 일어났으며, 또한 어떻게 스톡홀름의 화재가 그토록 상세히 보였는지 당시로서는 알 수가 없었고 지금도 분명히 알았다고는 할 수 없는 형편이다. 단지 현재의 내가 알고 있는 영계의 지식으로 판단한다면, 나의 영은 고텐버어그에 두고 온 육체를 벗어나 스톡홀름까지 가서 그곳에서 불구경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영에게는 그렇게 멀리 육체와 떨어진 상태로서는 자연계에 일어난 일을 영의 눈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영은 그때 스톡홀름의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인간의 육체 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의 눈을 빌어 불을 보았다고 생각되지만, 그 진상은 지금 나로서는 더는 알 길이 없다.
<역자 주> 이 이야기는 당시의 온 유럽에 파다하게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이며, 독일의 철학자 칸트(스웨덴보르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가 스웨덴보르그의 불가사의한 능력의 실례로서 들고 있다. 또한 칸트는 스웨덴보르그에 관해서 책을 낸바 있다(머리말 참조).
영계와 이승은 한 세계 속의 두 부분
영에 관한 일이나 영계에 관한 것을, 나는 나 자신이 보고 온 영의 세계와 사후(死後)의 세계를 통해 거의 이 수기에 수록했다. 나는 이 수기를 끝맺는 단계에서 영계와 이승, 즉 자연계와 관계 그리고 영과 인간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 가에 대해서 적어 보기로 한다.
나 자신으로 본다면 이 수기 전부가 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유서가 되겠지만, 그 중에서 각별히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제부터 내가 적어나갈 영 또는 영계와, 인간 또는 이승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이제 저술한 것은 모두가 인류 역사상 아직까지 아무도 밝히지 못했던 것임을 밝혀둔다.
영계와 이승과의 관계
영계와 이승, 즉 자연계와 사이에는 상응(相應)의 원리라는 것이 있어, 영계에는 이승에 있는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갖추어져 있다. 차이가 있다면 물질적인 형태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라고 이승에는 없는 것도 영계에는 존재하고 있다. 영계와 이승의 공간 그리고 위치에 관한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 나는 여기서 영계와 이승의 관계에 대해서 더욱 본질적으로 파고 들어가기로 한다.
영계와 이승은 별개의 세계이지만, 한 동전닢 표리(表裏)와도 같이 뗄레야 뗄 수가 없이 밀착해 있다는 것을 밝힌바 있다. 그러나 그 말을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된다.
영계와 이승과는 실은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이다. 그리고 영계와 이승은 이 두 개를 포함한 크나큰 하나의 세계의 두 다른 부분이다....... .
영계와 이승은 따로따로 떨어진 두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큰 세계 속에 있는 다른 부분이다.---이리하여 다른 부분에 불과한 양자 사이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전혀 별도의 세계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끝내 하나의 세계의 두 부분에 지나지 않는 증거가 있다. 그것은 영계와 이승 사이에는 우리가 깨닫지 못할 따름이지, 실은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 관계를 몇 번이고 이야기한 동전의 표리의 비유를 들어 풀어 본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영계와 이승은 한 닢의 동전의 앞뒤처럼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가 한 닢의 동전의 앞뒤인 것이다........... .
좀더 알기 쉽게 설명하기로 한다.
영계의 태양에서 흘러나오는 영류(靈流)가 영계의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이 영류에는 영계의 상. 중. 하의 세계에 직접 태양으로부터 흘러 들어가는 것, 즉 간접영류의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나는 이 영류에 관하여 설명을 할 때, 영류는 영계내의 하 세계에까지 밖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처럼 편의상 말해 두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영류가 하 세계에서 다시 인간 세계에 까지 뻗치는 것이라고 수정하겠다.
인간의 생명이 우주 공간에 홀로 떨어져서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인간의 생명은 그 근원에 있어서 생명의 원천과 관계를 지니면서 생명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생명의 원천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다름 아닌 영계의 태양인 것이다.” 자연계의 태양은 열이나 빛을 자연계에 부여함으로써 자연계의 생명을 길러주고 생명의 활동을 도와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생명의 원천 그 자체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계의 태양은 영계의 태양의 이승에 있어서의 대응물(對應物), 이를테면 이승에 있어서의 대리인, 대용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태양의 원천은 영계의 태양인 것이다.
여기에 사람들은 큰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해서 영계의 태양으로부터 영류를 받고 있는 것일까? 첫째 영계의 존재가 아닌 인간이 어떻게 영계의 태양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영류를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인간의 생명의 근원은 본래가 영(靈)이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 안에 살고 있는 영이 영류를 자기 안에 흡수함으로써 인간은 생명을 이어 갈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이러한 대답만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의문이 일어나겠지만 설명을 끝까지 읽으면 자연히 알게 되는 문제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문제를 잠시 덮어두고 더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다.
인간의 육체 안에 영이 깃들고 있는 비밀은, 전에 영계의 공간과 이승의 공간을 설명할 때 이야기한 것처럼 두 개의 각기 성질이 다른 공간적인 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관점을 좀더 달리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예컨대 우리가 누군가에게 축복의 말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자. 하지만 우리는 단지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그 의사소통이 완결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이 완성되려면 적어도 우리는 그것을 말이나 편지로 통해 표현할 수밖에 없다.
영계와 이승과의 관계도 실은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물질계가 아닌 영계가 그 의도나 의사를 물질계에 전달하려면, 영에게 인간이라는 물질적 형태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계는 영계의 종극점(終極點)이며, 영계의 생명의 근원인 영류도 그 종극적 수단인 인간의 육체 속에 영을 깃들게 함으로써 이 영으로 하여금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최종 목표를 달 설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계의 태양에서 발한 영류는 그 종극점인 인간의 육체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흐름을 멈추는 셈이다.
이상의 설명으로 영계와 이 세상이 실은 하나의 세계의 다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 이것은 영쪽, 즉 영계쪽에서 보면 아주 간단한 일이지만 이 두 가지 각기 다른 부분을 구별하는 것이 바로 하나의 경계선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의 육체적 죽음이 바로 경계선을 이루는 것이다. 이 경계가 영과 영계를 인식 못하는 인간에게는 가장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 까닭은 인간에게는 사실상 영계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왜 인간이 영계를 모르도록 애당초 만들어 졌는가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기로 한다.
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언급해 두어야 할 것은, 영계와 이승을 구분 짓는 육체의 죽음이라는 경계선 상에는 이승은 물론 영계에서도 참으로 여러 가지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인간이 영계의 존재를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는 것도 이 경계선 상에서 일어난 사건---죽음의 통지, 영의 통지, 유령 등---에 의해서이다.
어떤 물체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을 때, 그 두 개의 부분은 서로 상대방에 대항하는 관계에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반대로 상대방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한다. 영계와 이승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여서 서로 보완해 주는 “협력 관계”에 놓여 있다.
영계에서의 결혼을 설명할 때에 영계의 결혼은 자손의 번식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남녀 두 영이 영적인 결합으로 서로 영적인 행복과 영적인 이성 내지는 지혜의 증진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 이와 반대로 이승에서의 결혼은 자손 번식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결혼이라는 한 가지 사실만 보아도 이만큼 영계와는 다른데, 이것은 영계와 이승이 서로 협력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즉 인간계는 영계에서 볼 때에 영계에서는 불가능한 “장래의 영”의 번식을 도모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영계는 육체에 깃들어 있는 영에 의해서 영계의 태양의 영류를 인간에게 간접적으로 유입하여 인간의 생명의 지속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영과의 관계
인간계가 영계의 종극점(終極點)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영의 종극점인 것이다. 또 인간의 생명의 지속과 영의 번식이라는 양면에서 인간과 영의 협력 관계에 놓인 존재라는 것도 방금 살펴본 바와 같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서 지금까지 설명해 온 것을 간추려 이 수기의 결론으로 삼으려 한다.
인간은 물질계에 속하는 육체와 영계에 속하는 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육체, 즉 물질계에 속하는 것은 육체 자체를 비롯하여 눈이나 귀. 코 등 육체적인 감각 따위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들의 활동을 가장 깊숙한 곳에서 지배하고 생명 그 자체를 육체에 부여해 주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계의 태양이 내 품는 영류를 받아들이고 있는 인간의 영인 것이다. 영의 활동이 인간에게 자극되는 일은 여간해서 없지만, 사람들에 입에 오르내리는 “불가사의한 영감”이라든가 “영적 지각”이라는 것들은 영의 활동과 비슷한 것이다.
육체 안의 인간과 영은 어느 쪽이 본질인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이 수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육체적인 인간에게 생명 그 자체를 부여하고, 그것을 지배하고 있는 영이야말로 주인공 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약간 각도를 달리해서 예를 들어 알기 쉽게 설명하기로 한다. 앞서도 말한 영계와 이승의 경계선 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예를 들어 본다.
당신이 만약 유령을 보았다고 하자. 또 친한 사람의 죽음의 소식을 기이한 꿈이나 한낱 환각을 통해 알았다고 하자. 이 순간 당신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면 바로 생과 사의 경계선 상에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유령이 “이 세상에 나타났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또 죽음의 소식을 당신의 눈이나 귀라는 “육체적인 감각을 통해” 감지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착각이다. 당신은 유령을 본 순간이나, 죽음의 소식을 받는 순간에는 “육체적으로는 이미 죽어서”순간적으로 영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영의 눈을 통해서 유령을 보았거나, 죽음의 통지를 받았던 것이다. 당신은 짧은 시간이나마 영의 세계로 들어간 셈이다.
그러면 이 경계선을 반대로 영쪽에서 본다면 어떻겠는가? 영계에서 물질계, 즉 인간계로 들어올 때 영도 인간처럼 그 경계선상에서 “영적으로 죽는” 것일까? 만약 영적으로 죽는다면 영은 물질계의 존재 그 자체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영에게는 경계선도 없고 또한 물질계에 속하는 인간의 육체 안에 머물고 있다 하더라도 “그곳 역시 영계”인 것이다. 경계선은 단지 인간이 육체의 죽음이라는 측면 또는 마찬가지의 이야기가 되지만 육체의 삶이라는 세계에서 볼 때에 존재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며, 영이나 영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와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또 존재하는 것 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간계에도 영이 그 본질적인 존재이며, 육체는 극히 예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영계와 이승을 하나로 묶는 크나큰 하나의 세계 속에서는 이승은 하나의 예외이며, 영계와 한 변종(變種)에 불과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째서 인간은 영을 알 수 없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 수기를 통해 수시로, 인간은 물질계 속에 있어 그 생각하는 것부터 물질계적 이어서 영의 일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 말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두 가지의 입장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새는 틀림없이 자기의 둥지로 찾아온다. 꽃은 계절만 되면 영락없이 꽃을 피우고 또한 열매를 맺는다. 또 지혜라고는 있을 것 같지 않는 벌도 사람이 감히 따를 수 없는 정교한 집을 지어 규율이 있는 집단적 생활을 한다. 이러한 일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여기에는 자연계의 지혜가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누구나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영계나 영의 일을 잘 모른다는 것도 실은 육체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연계의 지혜에 의해 작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영의 존재를, 그 영원성을 진실로 확신을 가지고 믿을 수 있게끔 모든 인간이 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육체적. 자연적 생명을 다 함이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영계로 들어 갈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자연계는 그 불가사의한 지혜에 의해서 인간에게 자연적 수명을 다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과 영계의 존재를 그리고 그 영원성을 인간이 죽기 전까지는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영의 일을 모르는 이유로는 또 한 가지가 있다. 또한 이 이유는 동시에 영이 인간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는 것과 표리의 관계에 있다. 인간은 영과 육체의 두요소로 성립되어 있지만 만일에 인간이 항상 자기 육체 속에 깃든 영의 존재를 의식하고, 그 영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자유를 무엇보다도 갈구하고 있는 인간은 반드시 자기를 지배하려고 하는 영과 대항하여 이 두 요소 가운데는 투쟁이 벌어질 것은 뻔 하다.
또한 인간 속에 깃든 영은 이런 일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연계의 존재인 인간의 육체는 보이질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 영은 인간 그 자체가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영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기의 전체는 모두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영은 인간 속에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인간의 육체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 생각이나 느낌을 무의식중에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영계와 자연계의 두 세계를 하나로 합친 큰 세계의 지혜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의 무리들 중에는 흉령이라는 것이 있어, 이 영은 자기와 관계가 있는 자의 생명과 사고를 파괴로 몰아넣으려고 항상 노린다. 만약 이 영이 인간의 육체 속으로 들어가는 경우, 그 육체가 자기 것이 아니고 인간의 것이라는 것을 알기만 하면 당장 그 육체에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흉령이라 할지라도 인간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 그것을 자신으로 알고 귀중히 여겨 이 육체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작용을 한다.
나의 죽음을 예고한다.
끝으로 나는 죤. 웨슬리라는 어떤 교회의 목사에게 발송한 어떤 편지의 건을 말하기로 한다. 일삼아 이런 사사로운 편지를 공개하는 까닭은 이 안에 나의 최후의 교령술에 대한 결과를 적어 보냈기 때문이다. 그 결과란 엄격히 말해서 나의 사망 후가 아니면 그 정당성이 증명되지 않는 일이지만, 나는 내가 죽는 뒤 그것이 밝혀질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나는 웨슬리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물론 죤. 웨슬리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남이었지만, 나는 영을 통한 지각으로서 그에게 편지를 보내야만 될 사항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영계에서 나를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소. 그리고 나는 1772년(이듬해) 3월 29일에 이 세상을 하직하고 참다운 영계의 영이 됩니다. 이 사실은 벌써부터 결정된 것이므로 아울러 알려 드립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나는 유명한 영매로 이름난 당신의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주신 편지를 친구에게 공개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영계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한 사실을 지금껏 만나 보지도 못한 당신이 어떻게 해서 알았는지 우리 일동은 다 같이 이상히 여기며 매우 놀랐습니다.”
나는 그의 영으로부터 교신에 의해서 그의 희망을 영적 감각으로 알게 되었으나, 이러한 일은 생자(生者)의 영과 교신한 것이어서 나로서는 드문 예인 것이다. 하여간 내가 생자의 영과 교령술에 의하여 교신한 것은 웨슬리로부터의 답장으로 그 정확성이 증명된 셈이다.
내가 이 세상에 남길 것이란, 이승에서의 용무를 끝마친 나의 육체 말고는 이 수기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을 저술한 나로서는 이제 이승에 미련을 남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내가 웨슬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나의 임종일의 예언도 멀지 않아 내가 죽은 뒤에야 그 진실이 증명 될 것이다.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