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文字는 한民族의 글이자 言語이다 7-1 / 결론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강의방에서 발췌
2017.10.06
한국인은 中國人과 根本的으로 말과 글 그리고 사람의 종자가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현재 中國에는 56개 민족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중 中國人은 漢族이라고 다른 部族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다.
필자가 아는 朝鮮族 처녀가 漢族과 결혼하여 山東省 위해(威海)에서 방송국 경제 담담 직원으로 勤務하고 있을 때이다.
그때 마침 詩人李昌源君과 함께 北京 西安을 답사하고 山東省 어느 호텔에 들렀을 때이다.
둘이서 食事하기 위해 밖으로 나와 엘르베이터를 탔을 때이다. 李昌源君과 함께 엘르베이터 안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아가씨가 한국인이냐고 물어왔다. 그렇다고 하니까 한국인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다기에
호텔 커피숍에 들러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때 筆者는 한民族의 上古史에 대한 歷史를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아가씨는 自己의 이름이 金仁麗라고 하면서,
漢族 총각과 결혼한 후 정신적으로 무척 괴로웠다고 실토하였다. 이유로는 少數民族이라하여 은연중 무시당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金仁麗氏는 한民族의 上古史를 들은 후부터 한民族의 偉大性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게 되었다고 했다.
그후로 한국에 나올 때마다 찾아주었고 筆者가 大陸에 답사하러 갔을 때 便宜를 보아주기도 했다.
현재 한국은 病的 상황에 놓여있다. 왜냐하면 날조되고 歪曲된 歷史로 인하여
한국인들은 완전히 몽유상태(夢遊狀態)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歷史는 미래의 거울이다. 歷史의 뿌리가 잘라지면 국가는 미아(迷兒) 상태가 되어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日帝 때 조작 날조된 植民史觀으로 한民族의 歷史는 동강나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광복이후 朴正熙 정권 때
안호상(安浩相) 문교부장관 시절 한글을 전용하는 법이 채택되었다.
歷史의 기록은 漢文字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歷史를 抹殺하려는 親日派들에 동조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日帝 植民地政治가 시작된 후 광복은 되었지만 93年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의 역사는 아직 바로 되지 않고 있다.
이 얼마나 통탄(痛嘆)할 일인가?
한民族의 후손으로서 國家와 民族 그리고 祖國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상태에 있음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필자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 55년간 한民族의 歷史와 哲學思想을 찾는데 헌신해 왔다.
그 결과 많은 上古史의 古書를 접하면서 中國의 祖上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싶었다.
또한 中國의 歷史라고 하는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요(堯), 순(舜), 하(夏), 은(殷), 주(周), 진(秦), 한(漢),
그리고 송(宋), 당(唐)나라에 이르기까지 古代史書를 찾아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그 중에 中國의 歷史라고 하는 秦나라와 漢나라, 그리고 唐나라의 실체를 밝히면 한民族의 歷史가 빛을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中國歷史의 오류(誤謬)를 발견(發見)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秦, 漢, 唐 나라의 血統과 歷史의 脈을 찾게 되었을 때 놀라움을 금할 길 없었다.
그 후로 筆者는 中國의 祖上을 찾게 되고 中國人의 祖上이 사이(四夷)라는 사실을 正史를 통해 알게 되었을 때
환희(歡喜)에 찬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四夷는 도대체 어떤 민족인지를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東夷는 九夷라고 後漢書에 기록되어 있다. 九夷 중 四夷라 했으므로, 먼저 여기서 九夷에 대하여 적어본다.
①견이( 夷) ②우이(于夷) ③방이(方夷) ④황이(黃夷) ⑤백이(白夷) ⑥적이(赤夷) ⑦현이(玄夷) ⑧풍이(風夷) ⑨양이(陽夷)이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①현도(玄 ) ②낙랑(樂浪) ③고려(高麗) ④만식(滿飾) ⑤부유(鳧臾) ⑥소가(素家) ⑦동도(東屠)
⑧왜인(倭人) ⑨천비(天鄙) 등이다.
그리고 아홉의 한국이 三國遺事 馬韓편에 실려있다. ①일본(日本) ②중화(中華) ③오월(吳越) ④둔라(屯羅) ⑤응유(鷹遊)
⑥말갈(靺鞨) ⑦단국(丹國) ⑧여진(女眞) ⑨예맥(濊貊)으로 되어있다.
이상과 같이 九夷와 九韓國에 기록되어 있지만, 여기서 四夷에 해당하는 민족은 어떤 것인지를 찾아야했다.
唐나라 때 두우(杜佑)가 지은 통전(通典) 第一 東夷 上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①조선(朝鮮) ②예(濊,穢) ③마한(馬韓) ④진한(辰韓) ⑤변진(弁辰) ⑥백제(百濟) ⑦신라(新羅) ⑧왜(倭) ⑨부여(夫餘) ⑩하이(蝦夷)
第二, 東夷 下의 記錄을 살펴보기로 한다.
①고구려(高句麗) ②동옥저(東沃沮) ③ 婁(靺鞨) ④부상(扶桑) ⑤여국(女國) ⑥문신(文身) ⑦대한(大漢)
⑧유구(流求) ⑨민월( 越) 등으로 되어있다.
통전(通典)의 記錄으로는 四夷를 알 길이 없는고로 송(宋.A.D.420∼479年)나라 때 정초(鄭樵)가 지은 통지(通志)의 記錄을
살펴보기로 한다. 通志 194권 四夷傳에는 四夷1, 2, 3, 4, 5, 6, 7까지 記錄되어 있다. 特히 四夷傳 1편에 보면
①조선(朝鮮) ②예(濊) ③마한(馬韓) ④진한(辰韓) ⑤변한(弁韓) ⑥변진(弁辰) ⑦百濟(耽牟羅國附) ⑧신라(新羅)
⑨왜(倭) ⑩부여(夫餘) ⑪고구려(高句麗) ⑫東沃沮(北沃沮附) ⑬읍루( 婁) ⑭勿吉(又曰靺鞨) ⑮扶桑(女國附) 文身(大漢附)
유구(流求) 민오( 奧)로 되어있다.
여기서 四夷에 대한 정확한 나라를 찾아야겠기에 本文을 조사해 보았다. 크게 나누어 四夷는朝鮮·濊·馬韓·辰韓이었다.
四夷에 해당하는 나라는 百濟·新羅·高句麗·倭였다.
그렇다면 中國의 祖上은 四夷라 했으므로 첫 번째가 朝鮮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濊)와 마한(馬韓), 진한(辰韓)은 조선(朝鮮)의 후예(後裔)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이 백제(百濟),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왜(倭)이다. 다시 말해 중국인(中國人)의 祖上은 四夷에서 유래되었다 했
으므로 기록을 찾아보기로 한다.
北宋 때 史學者인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193卷에 있는 당기(唐紀) 9卷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中國 如 根本 四夷라고 적고 있다. 이 말은 中國의 根本은 四夷와 같다고 했다. 또 195卷唐紀 11卷에 보면
中國根幹也四夷枝葉也라고 했다. 즉 中國의根本的인 뿌리는 四夷의 가지와 잎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말해 中國이라고 하는 것은 東夷九族中 四夷가 뿌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四夷가 뿌리라면
中國의 祖上들은 四夷라는 것을 뜻한다. 즉 中國人들의 祖上은 四夷이므로 中國祖上들은 四夷들의 가지와 잎에 해당함을 말한다. 그렇다면 四夷가 中國의 祖上인 셈이다.
여기서 四夷에 대하여 검토해 보기로 한다. 後漢書에 기록되어 있는 東夷들은 漢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이므로 中國人들이
주장하는 漢族이 아니므로 해당되지 않는다. 그리고 三國遺事에 기록된 四夷는 漢나라 후에 생긴 것이라 볼 수 있다.
漢나라 건국 이전에 있었던 朝鮮 때 四夷를 기록한 통지(通志)에 따르면, 百濟·新羅·高句麗·倭임이 分明했다.
그렇게 본다면 中國의 祖上은 漢나라 때 있었던 四夷가 바로 百濟·新羅·高句麗·倭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四夷의 뿌리는 朝鮮임을 기록한 通志와 通典에서는 놀라운 사실들을 적고 있다. 四夷인 百濟·新羅·高句麗·倭에서 파생되어 나간 나라들은 무려 195개국이었다. 여기서 195개국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中國의 祖上은 四夷인 百濟ㆍ新羅ㆍ高句麗ㆍ倭에서 파생되었음은 否認할 수 없는 事實이다.
그럼 高句麗ㆍ百濟의 백성은 어디서 어떻게 생긴 것인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자치통감(資治通鑑) 200卷 속에 있는 唐紀 17卷에는 高麗百濟河北之民이라고 記錄하고 있다.
이 말은 高句麗ㆍ百濟의 백성들은 하북성(河北省) 사람들임을 나타난 文章이다.
三國志는 宋나라 文帝 유의융(劉義隆)인 원가(元嘉.A.D.424 甲子年) 때 진수(陳壽)가 저서(著書)하고
배송(裵松)이 주(注)를 단 것이다. 三國志 韓傳에는 三韓인 馬韓ㆍ辰韓, 그리고 弁韓 등이 記錄되어 있다.
三國志 韓傳을 보면 50餘國中에 백제국(伯濟國)과 고리국(古離國)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特)히 古離國은 옛 고리국(櫜離國)으로서 한주(韓州)에 있다고,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第一卷夫餘편에 적고 있다.
여기서 고리국(櫜離國)은 한주(韓州)에 있는 것으로 記錄하고 있다.
韓州인韓을中國古今地名大辭典 1305쪽을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河北省固安縣東南으로 되어있었다.
高句麗와百濟가 생긴 것은 고리국에서 갈라져 나온 扶餘이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記錄된 것을 보면
漢之三韓이라 했으므로 河北省과山西省, 陝西省一部地域이 모두 三韓地라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高麗百濟河北之民이라는 것은 高句麗와百濟는 지금의 河北省 백성(百姓)임은
부인(否認)할 수 없는 事實이다.
또한 양서(梁書) 高句麗傳을引用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南北朝편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梁書高句麗其先出自東明東明本櫜離王之子王欲殺之東明走至夫餘而王焉
이 말은 高句麗의先祖는 고리국에서 나타난 東明이다. 東明은 본시 고리왕의 아들로서 王은東明을 죽이려 하므로
東明은 달아나 夫餘의王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치통감(資治通鑑) 183卷 수서(隋書) 7卷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高驪器械資儲皆積於涿郡
즉 고구려의 모든 병기와 기계, 그리고 자재는 탁군(涿郡)에 쌓아두었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탁군(涿郡)이 어디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 821쪽에 따르면 涿郡은 경조(京兆)인 탁현(涿縣)에서 다스렸다고 되어있으므로 京兆를 찾아보았다.
地名辭典 424쪽 京兆편에 보면 섬서성(陝西省) 長安의 동쪽 화현(華縣)의 땅이라고 되어있다.
京兆는京師이며, 唐나라 때 이름을 고쳐 京兆라고 했고, 明나라 때 이름을 다시 고쳐 지금의 西安府인西安이 되었다고
記錄하고 있다. 그렇다면 高句麗의 모든 兵器와 기계, 그리고 자재 등을 쌓아둔 곳이 지금의 西安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 高句麗의建國都邑地는 지금의 西安이 탁군(涿郡)임을 알 수 있다.
고로 高句麗와百濟의 백성들은 지금의 北京地方인河北省河間縣에서 고리국(櫜離國)으로 建國된 이래 扶餘로 갈라져
東明은 현 中國大陸의西安에서國家로發展되어 왔음을 볼 수 있다. 지금도 西安에 있는 진시왕릉(秦始王陵)이 있는
뒷산은 여산(驪山), 즉 高句麗의山이라고 되어있다.
特히舊唐書高句麗편에 보면 ‘其國都於平壤城卽 漢樂浪郡之 故地’라고 적고 있다.
다시말해 高句麗의都邑地는平壤城이며, 漢나라 때 낙랑군(樂浪郡)의 옛 고토(故土)라고 되어있다.
후한서(後漢書) 동옥저(東沃沮)편에는 ‘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 今 平壤城 西平壤卽 王儉城也’라고 했다.
高句麗는 개마현(蓋馬縣)이며 현도군(玄菟郡)에 속해있었고, 그 산은 현재 平壤城 서쪽이며,
平壤城은 왕검성(王儉城)이라고 했다. 王儉城은三國遺事에서 요단군왕검(堯壇君王儉)이 살았던 城임을記錄하고 있다.
이 外에도史記ㆍ漢書ㆍ책부원구(冊府元龜)ㆍ三國志ㆍ晉書ㆍ宋書ㆍ남제서(南齊書)ㆍ주서(周書)ㆍ위서(魏書)ㆍ
양서(梁書)ㆍ북사(北史)ㆍ남사(南史)ㆍ수서(隋書)ㆍ신당서(新唐書)ㆍ통전(通典)ㆍ통지(通志)ㆍ태평어람(太平御覽)․
한원(翰苑)ㆍ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ㆍ수경주소(水經注疏)ㆍ해동역사(海東繹史) 等 많은 正史에記錄되어 있다.
三國史記에 보면 高句麗一世東明王이 40세에 죽었을 때 장지가 용산(龍山)이며, 호(號)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적고 있다.
東明王의 무덤이 용산(龍山)이라면, 서울에 있는 龍山이 아니라 지금의 大陸山東省 서쪽과 河南省東쪽에 있는
개봉현(開封縣)과의 접경지대에 있는 東明과東明集이 있는 지역 등이 龍山인 것이다.
그렇다면 東明聖王의 무덤은 현재 中國大陸에 있는 山東省 서쪽과 河南省 동쪽 경계선 부근에 있는
東明이란地名이 있는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유리왕(琉璃王) 31년에 보면, 漢나라 때 왕망(王莽)은 구려(句麗) 군사를 동원해 호(胡), 즉 큰 나라인 흉노(匈奴)를 물리친 후 요서(遼西)에 있던 대윤(大尹)과 전담(田譚)을 추격해 죽였다. 또한 王莽은 엄우(嚴尤)를 추격하여 죽인 후 목을 베어 長安 즉
西安으로 가져와 포고령을 天下에 알리고 이름을 고쳐 高句麗라고 했다는 것을 후한서(後漢書) 구려전(句驪傳)에 記錄하고 있다.
三國史記第四高句麗本紀 10代山上王 2年의記錄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築丸都城十三年移都於丸都’라고 되어있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 51쪽에 보면, 환도(丸都)는 高句麗故都라고 적고 있다. 通典에서는城이 있는 곳에 환도산(丸都山)이 있고, 아래에는 비류수(沸流水)가 東으로 흐른다고 했다.
唐書地理志에 의하면, 마자수(馬訾水)라 했으며, 즉 압록강(鴨綠江)이라 했다. 그리고 현도군(玄菟郡) 서쪽 개마현(蓋馬縣)
서북으로 들어가 흐르는 염난수(鹽難水)라 했으며, 通典에서는一名 압록수(鴨淥水)라고 적고 있다.
다시말해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도 같은 記錄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漢나라 이후 이름을 바꾸어
익주강(益州江)이라 했다. 益州는 지금의 四川省 동북 방향이다.
그후 高麗 때는 黃河의支流 옆으로 흐르는 샛강을 말한다. 즉 河南省洛陽의 북쪽에서 河南省 급현(汲縣)을 거쳐
산동성(山東省) 북쪽인 발해(渤海)로 흘러가는 푸른 강물이 압록강(鴨綠江)이다. 鴨綠江은 淸나라 때 와서
한반도 북쪽인 현 鴨綠江으로 이름이 옮겨졌음을 여러 正史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마천(司馬遷) 史記五帝本紀와夏나라本紀에는百濟의 강역(彊域)을 보면, 현 中國大陸南部에서東南亞에 있는
15個 큰 섬들이라고 괄지지(括地志)를 引用하여記錄하고 있다.
三國史記高麗本紀第五 11代東川王 21年 봄 2월에 丸都城에 난리가 일어나 다시 都邑을 할 수 없어 平壤城을 쌓고
사람과 백성들을 옮겼다고 되어있다. 이때 平壤城은 본시 신선이었던 요왕검(堯王儉)의 집이며, 혹은 王이 살던 곳이라 하여
王儉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16代 고국원왕(故國原王) 4年 8月에는 새로 平壤城을 증축하여 13年 가을 7月에平壤城으로 옮겨 살다가 동황성(東黃城)으로
이거(移居)하였다고 했다. 東黃城이 있는 곳은 지금의 西京 즉 西安의 동쪽이라고 적고 있다.
고국원왕(故國原王) 41年 겨울 10月에는百濟王과 군사 3만 명이 平壤城을 공격했다고 했다. 19代廣開土王 17年 봄 3月
북쪽 燕나라에宗族 문제로 파견되어 갔던 이발(李拔)의 보고에 의하면, 본시 고구려의 먼 조상인 雲祖는黃帝의 손자인
고양씨(高陽氏.B.C.2491年)의 묘예(苗裔:묘족의 후손)라고 했다는 것이다.
4年 가을 8月에는百濟王과 패수(浿水)에서 전쟁을 했다고 했다. 이때 浿水는 지금의 西安에서洛陽으로 흐르는
큰 바다와 같은 강이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 727쪽에 보면 漢나라, 위(魏)나라 때 浿水라고 했으며, 史記朝鮮傳의 기록에 따르면 진번(眞番) 즉 지금의 山西省太原에 속하고, 漢나라가 흥할 당시 朝鮮으로서一名大同江이라고 하고, 혹은 임진강(臨津江) 또는
예성강(禮成江)으로서 옛날 백제(百濟)의 북쪽 경계에 있는 것이 패수(浿水)라고 적고 있다.
한편 浿水를 미추홀(彌鄒忽)이라하여 조선(朝鮮)의 인천(仁川)이라고도 한다고 記錄하고 있다.
高句麗 20代 장수왕(長壽王) 15年에는都邑을 다시 平壤城 즉 西京으로 옮겼다고 했다. 24代陽原王 8年에는長安城을 쌓았고,
25代平原王 28年에는都邑地를長安城에 옮겼다고 적고 있다.
以上과 같은 記錄을 뒷받침할 수 있는 文章이 26代 영양왕(嬰陽王) 18年에 나타나 있다.
高句麗本箕子所封之地. 漢晋皆爲郡縣. 今乃不臣. 別爲異域. 先帝欲征之久矣
고구려는 본시 기자가 봉해있던 땅이다. 漢나라, 晋나라 모두 郡과縣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 신하는 아니며
다른 지역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고구려 강역이어서 앞서 제왕들은 욕심을 갖고 오래도록 쳐서 찾으려했을 것이라고
되어있다. 이 문장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있는 隋書의記錄과 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다.
앞에서 言及한바와 같이 高句麗와 百濟는 中國大陸河北省의 백성들로서 支配해 왔음을 證明하고 있다.
따라서 中國人의祖上은 四夷였던高句麗ㆍ百濟ㆍ新羅ㆍ倭의部族에서分離되어 195個國으로 갈라지면서 大陸에는
56個少數民族이形成되었음을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漢族은 高句麗의 뿌리에 해당한다. 앞으로 漢나라의 建國秘密에 대하여 執筆할 期會가 있을지 알 수 없다.
筆者는漢高祖인漢나라 혜제(惠帝)와 무제(武帝)의 人物과 등극에 대하여 가칭 한民族大學에서 강의한바 있다.
漢나라와唐나라의建國人物과 비화(秘話)에 대한 歷史的인記錄을正史를 통해 밝힌다면 世界史學者들은 놀라움을
禁치 못할 것이다. 간단하나마 本文을通해中國의祖上이四夷라는事實을 밝혀보고 싶었다.
여러 곳에서 講義를通해 말한바 있지만 文章으로記錄하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四夷의祖上은前述한바와 같이 東夷의九夷이며, 크게 보면 九夷의 뿌리가 朝鮮임을 알 수 있다. 本文에서一部 밝힌바와 같이 모든 正史들의記錄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結 論
한글만 배운 사람들은 한글로 된 책을 읽는데 편리하고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文章을 종합 즉 집합했을 때만이 뜻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 단점이다.
왜냐하면 “말이 많다”라고 짧은 글을 보았을 때 사람의 말이 많은지 아니면 말(馬)이 많은지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다.
漢文字로 적을 때는 두 글자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多馬하면 말이 많다는 뜻이다.
즉 짐승인 말이 많다는 것을 금방 쉽게 알 수 있다.
漢字는 글 한 자에서 확실히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말 마(馬)자인 馬란 글자 한 자에 구분이 가능하게 되어있기에 익히기만 하면 글자 하나에서 쉽게 알 수 있는 게 漢文字를 아는 장점이라 할 것이다.
또한 말 마(馬)자는 상형문자로 되어있어 漢字를 보기만해도 알 수 있다. 고로 습독하면 속독이 가능해지며 따라서
漢字에는思想이 깊이 있게 들어있어 知識만 익히는 게 아니라 智慧가 열릴 수 있는 글자이기도 하다.
다시말해 文理가 열리고, 더욱 열심히 한다면 高度의 智慧인 道가 열릴 수 있는 게 커다란 장점이라 할 것이다.
前述한바와 같이 道란 머리 수(首)인 목숨 수 자와 책받침 변이다. 책에 목숨을 건다면 道가 열릴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
漢字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말이 많다”라고 한다면 짐승인 말이 많은 것인지 사람의 말이 많은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말하는 말이 많다면 漢文字로 많을 다(多)자를 써서 多言하면 쉽게 알 수 있다.
漢文字의原典을 해설해 보면 漢文字 1쪽에 原稿는 30枚以上되는 경우가 많다. 한글은 글자 수가 많은 것이 흠이라 할 수 있다.
원전 해설을 하는 과정에서 쉽게 표현하려 한 것이기에 글자 수가 많아지고 말도 많아지는 것이다.
특히 한글은 맞춤법이 계속 이랬다 저랬다 바뀌는 바람에 종잡을 수 없는 때가 많아 혼란한 때가 많다.
광복 이후 한글 맞춤법이 여러 번 바뀌어 5,6십대 후반기 사람들은 한글이 어렵다고 말한다.
오히려 漢字가 골고루 섞여 있으면 理解가 빠르고 읽기도 편하다고 말한다.
筆者는 한글로만 쓴 책은 아예 보지도 읽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眞理로 엮은 책이 없고 한글만으로 된 책은
深奧한學問의脈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읽기가 매우 곤란한 것은 횡설수설한 문장들이 많고
眞理로 엮은 理論이 없는 것이다. 釋老인 老子 道德經이나 西昇經은 眞理中 眞理의 글이자 丹經이다.
이와같이 漢文字로 엮은 道德經이나 西昇經의文章은 情神과 思想을 알알이 영글게 하는 대목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眞理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다.
筆者가本文에서 밝힌바와 같이 漢文字는 한民族의 글이자 言語이기에
[출처] 277. 漢文字는 한民族의 글이자 言語이다 7-1 / 결론 |작성자 집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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