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묵대사의 4번째 이야기
심신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스님의 초탈한 경계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일이 있다. 진묵스님이 누님 집에 가 있다가 출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득도한 스님은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풍류를 즐길 줄 알았으며, 스님은 특히 술을 좋아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술이라하면 마시지 않았고 곡차(穀茶)라 해야만 마셨다. 스님은 익산군 춘포면 쌍정리에 있는 누님 집에 가끔 들렀다. 누님은 동생을 위해 곡차를 늘 준비해 두고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이 누님 댁에 들렸더니 누님은 집에 없었다. 밭일 나간 누님을 찾아가 안부를 묻고 돌아서려는데 누님이 집에 곡차를 준비해 두었으니 마시고 가란다. 스님은 그 좋아하는 곡차를 두고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누님이 일러준대로 부엌으로 들어가 술이 담겨 있는 것 같은 조그만 독 뚜껑을 열고 독채로 들이마셨다. 스님은 기분이 좋아서 봉서사에 돌아와 정(定)에 들어 있었다. 들일을 마치고 석양이 되어 집에 돌아 온 누님은 부엌으로 들어가 동생이 곡차를 마시고 갔는지를 먼저 살폈다. 술독이 놓여 있는 곳을 살핀 누님은 깜짝 놀랐다. 술독은 그냥 있는데 그 곁에 있는 간수독의 뚜껑이 뒤집혀 있었다. 심장이 멈춰서는 것 같은 충격으로 두 독의 뚜껑을 벗겨봤다. 간수독은 비어 있고, 술독의 술은 그대로 있었다.
누님은 용수철처럼 뛰어나와 그대로 봉서사를 향해 달렸다. 이미 석양인데 삼십 리 길을 단숨에 뛰었다. 간수 한 독을 마시고 살아남을 사람이 누군가. 아마 황소가 마셨더라도 살지 못할 일이다. 누님은 자기의 잘못으로 동생이 간수를 마시게 됐다고 가슴을 치면서 정신없이 봉서사까지 뛰어간 것이다. 해가 서산 마루에 동그란 얼굴을 반만 걸쳐 놓고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내려오는 산길을 거꾸로 올라 봉서사에 당도한 누님은, 절이 조용한 것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진묵스님이 있었으면 절 안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묵스님은 조실 방문을 열어 놓고 기분이 좋아 빙그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너무나 의외의 일에 누님은 또 한번 놀랐다. "곡차가 알고 마시면 곡차가 되는 것이지 누님은 걱정도 많으십니다. 어둡기 전에 어서 돌아가십시요." 살아 있는 동생이 한없이 고맙고 존경스러웠지만, 해가 져가는 시간에 삽십 리가 넘는 산길을 되돌아 가라니 야속하고 섭섭했다. 그러나, 동생의 신비스런 힘을 믿는 누님이었으므로, 그 길로 돌아서 집으로 왔다. 누님이 집에 다 올 때까지 서산에 꼭 그만큼 걸려 있던 해가 누님이 집에 들어서자 산너머로 들어가 버리고, 갑자기 캄캄한 어둠이 꽉 차는 것이었다. 진묵스님이 해를 묶어 왔다고 속인들은 이 일을 더욱 재미있어 하지만, 스님은 염산성분의 맹독을 마시고도 그것을 인체에 유익한 곡차로 소화하는 자재한 정신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스님의 효심은 단연코 타의 추종을 허락치 않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서거하신 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밝히지 못하고 있지만, 그 곳이 불거촌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 듯 하다. 왜그러냐 하면 진묵스님은 어머니의 만년을 늘 가까이서 모셨고, 진묵스님이 주석하신 곳이 봉서사, 원등암, 일출암 등 전주 일원이고 월명암과 대둔산 태고사 (太古寺)까지 연장하여 어머니의 만년을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간다. 아무튼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진묵스님과 두자매가 모두 세상을 떠나더라도 길이 길이 만인의 향화 참배를 받게 되도록(無子孫千年香火之地: 자손 없이도 천년동안 향화를 올릴 명당지)를 찾아 불거촌에 어머니의 묘를 모셨다. 봉서사나 일출암에서 불거촌까지는 백리가 넘는 먼길이다. 스님은 어머니의 유해를 모신 상여를 스님이 태어난 고향땅 불거촌까지 메고 가서 거기에 가서 안장한 것이다.
이런 진묵대사도 말년에는 고향을 찾아 부안 변산에서 입산수도를 계속하다가 1592년(宣宗 25년) 아주 퇴락(頹落)되었던 월명암(月明庵)을 손수 중수하고 거기에서 그의 여생을 마쳤다고 기록이 전하고있다. 그리고 대사의 생향이기도 한 화포리에서 그곳 사람들에 의해 진묵대사를 영원히 추모하기 위해 주행 조앙사(舟行 祖仰寺)라는 조그마한 절간을 세워 오늘에까지 보존되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원불포(현, 화포부락)에는 진묵대사의 어머니 묘가 아직도 동그랗고 크나 큰 무덤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이 묘가 또한 '천년향화(千年香火)'의 명당으로서 진묵이 잡은 것이며 춘하추동 근 4백 년동안의 풍마우세(風磨雨洗) 가운데도 그 윤곽을 뚜렷이 하는 것은 역시 진묵 같은 대각의 대사가 직접 '무자손 천년향화(無子孫 千年香火)'의 명당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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