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인터넷참고자료

[스크랩] 소설 창작 방법론7 /이승우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7. 3. 1. 10:43

7. 육화의 방식 - 이야기와 인물. (2003-09-01)


소설이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말은, 물론 맞는 말이지만, 소설에서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를 역설적으로 증거한다. 소설은 이야기만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야기이다. 이야기 없이는 소설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어떤 빛나는 감각이나 어떤 심오한 사유도 이야기를 통하지 않고는 소설이 되지 않는다. 이야기를 갖지 않은 어떤 심오함, 어떤 고상함도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아니, 심오함이나 고상함이 소설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것들이 이야기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 무슨 수로 소설과 상관한단 말인가.


이야기는 소설의 육체다. 형체가 없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볼 수가 없다. 추상은 구체를 통해서만 인식되고 관념은 형상을 통해서만 식별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이른바 형상화, 형체가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을 눈에 보이도록 형체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관념을 눈에 보이도록...관념이 먼저 있고 이야기가 있다.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가 인카네이션(incar-nation), 즉 육화이다. 영(靈)인,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고 만져질 수 있도록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왔다는 사상이다.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온 하나님, 즉 예수를 통해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는 생각이다. 이 교리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인카네이션의 작업이다. 육화. 관념에 육체 입히기. 여기서 육체는 이야기이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관념이 어떻게 소설이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라.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은 관념이다. 이것은 영과 같아서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다. 머리 속에 웅크리고 있는 이 명제는, 온갖 장애와 어려움을 극복하고,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해 실체를 획득한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보여 주어야 한다. 말이 아니라 그림이고, 주장이 아니라 이야기여야 한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작가가 하는 주장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보여 주는 이야기를 보는 것이다.


육체를 이루는 것은 살과 피와 신경과 뼈들이다. 이야기라는 육체를 만드는 것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물이다. 시간과 공간(상황) 위에서 인물들이 움직인다. 이 움직임이 이야기를 산출한다. 아니, 이 움직임이 곧 이야기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시간이 흐른다는 뜻이다. 공간은 인물에게 처소를 제공하고, 시간은 인물에게 움직임을 제공한다. 시간이 만물을 움직이게 한다.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모든 것은 정지한다. 당연히 이야기도 멈춘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시간이라는 동력을 필요로 한다.


마땅한 공간과 시간의 배치는 이야기의 활력을 위해 중요하다. 이야기는 공간과 시간에 의해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바닷가를 무대로 했을 때와 도시의 지하철 안을 무대로 했을 때 이야기의 방향이 같을 수 없다. 조선 시대를 택했을 때와 현대를 택했을 때, 새벽과 한낮, 겨울과 여름, 눈오는 날과 비가 오는 날도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은 이야기의 방향을 상당 부분 결정해 버린다.


이제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자. 소설은 인물이다, 라고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야기는 시간이나 공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물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소설 창작을 위해 밑그림을 그릴 때, 가장 많이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인물 설정이다. 시간이 가도 지워지지 않는 독창적인 소설 속의 인물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령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또는 『데미안』의 데미안, 『적과 흑』의 쥘리앵……. 인물이 이야기를 주도한다. 인물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소설 세계를 펼친다. 인물은, 많은 경우에, 작가의 대리인이다.


인물이 곧 작가 자신은 아니지만, 작가는 어떤 식으로든, 인물 속에 들어가거나 인물 뒤에 숨거나, 혹은 인물을 방치하거나 경멸하거나 함으로써, 인물을 통해 자신의 의도와 욕망을 드러낸다. 그 드러내기의 방식이 교묘해서 잘 눈치채지 못 할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인물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유념할 것은 전형적인 인물과 개성적인 인물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다. 우선 특정한 집단이나 신분의 유형화된 성격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교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나 학교에서 초등학생을 가르치면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나 몸을 파는 여자들에게는 각각의 특징적인 성향이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그들의 몸에 밴 습관이나 태도,
가치관 같은 것을 고려해야 하고, 이 경우 소설은 현실의 인물을 반영하는 쪽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군인이라고 해서 다 똑같다고 할 수 없고, 이 세상의 모든 초등학교 교사가 모두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몸을 파는 모든 여자가 동일한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개인은 집단의 일원이지만, 그러나 또 독립된 우주이다. 인물의 개체적 특성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인물, 요컨대 성격의 창조라는 과제에 도전하게 만든다.


또한 소설 속에 그려지는 인물은 한 작품 안에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물론 이 말은 인물이 평면적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시간은 인물을 움직이게 만들고, 인물의 태도와 세계관을 변화시키고, 따라서 인물은 시간과 함께 이동한다. 하지만 전라도 사투리를 쓰던 사람이 납득할 만한 근거 없이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든가, 돼지고기를 싫어하던 사람이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는다고 나온다든가, 소박하고 단순한 성격으로 설정된 사람이 온갖 장신구를 다 갖추고 나타난다면 독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설정된 조건을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운명이다.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9남매의 막내인 열두 살짜리 초등학교 여자아이를 묘사할 때 당신은 그 아이가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의 말을 하게 해야 하고, 그 아이의 조건과 환경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게 해야 한다.

인물을 드러내기 위한 방식으로, 전통적으로 많이 사용된 것은 생김새나 신체의 특징을 묘사하는 것이다. 눈이 어떻다든지, 코가 어떻게 생겼다든지, 입술이 어떤 모양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신체의 특징적인 부분을 묘사함으로써 그 인물의 성격을 드러낼 수 있다. 이 방법은 좀 지루하고 고루하긴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용하다. 말버릇이나 특징적인 몸짓, 또는 습관을 이용하여 성격을 드러내는 방법도 좋다. 다른 인물의 입을 통해 소개하는 방법도 괜찮다. 사건에 반응하는 그만의 개성적인 태도를 보여 줌으로써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보여 줄 수 있다면 더 좋다.


권하고 싶은 한 가지 방법은 주변에서 모델이 될 만한 인물을 선택하여 소설 속에 이용하는 것이다. 가상의 인물을 막연하게 설정하고 써나가다 보면, 그 인물의 성격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명쾌한 서술이 어려워지고, 일관성 유지가 힘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가 잘 아는 실제 인물을 염두에 두고 쓰면, 그 인물이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그 사람을 떠올리면 되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피할 수 있다. 데뷔작을 쓸 때, 나는 내 은사 가운데 한 분을 거의 그대로 베껴서 한 인물을 만들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교적 선명하고 일관성있는 인물 만들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출처 : 시를 사랑하는 서정마당
글쓴이 : 같은세대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