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소설을 다 써 놓고 소설을 써야 한다.--밑그림을 그려라. (2003년 6월 1일.)
「파인딩 포레스터」라는 영화에는 두 명의 소설 천재가 등장한다. 세상을 등진 채 고층 아파트에 틀어박혀 살아가는 괴짜 소설가 윌리엄 포레스터와 그를 만나 잠재되어 있던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는 16세의 흑인 고등학생 자말 월라스가 그들이다. 포레스터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타자기를 두드리라고 권한다. 생각하지 말고 의식하지 말고 내면의 충동에 따르라고, 춤추듯이 손가락을 움직이라고 충고한다. 자말은 포레스터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리고 천재를 증명한다.
이 영화는, 은연중에 소설 천재에 대한 환상을 유포하고, 천재가 아닌(예컨대 내면의 충동에 따라 춤추듯이 자판을 두드린다는 걸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 한) 많은 성실한 문학 청년들을 절망하게 한다. 영화에 나오는 그와 같은 방법은 아마도 소설 천재들의 글쓰기 방법인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는 소설에 신동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 했다. 다섯 살 때 작곡을 했다는 음악가도 있고 열 살도 되기 전에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었다는 수학자도 있다. 그러나 열 몇 살에 걸작을 쓴 소설가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 했다. 소설은 신동이 없는, 있을 수 없는 장르이다. 소설은 풍부한 체험과 깊은 사유와 신선한 상상력이 조화롭게 섞여 이루는 하나의 몸이다. 타고난 재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기술의 습득만도 아니다. 삶이, 삶에의 두껍고 깊은 참여가 소설을 만든다.
우연에 기대고 영감에 의존하는 소설쓰기에 대한 환상은, 당신이 천재가 아니라면, 갖지 않는 것이 좋다. 가끔씩은 그야말로 우연히 그럴듯한 영감이 떠올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거기다가 대개 영감은 단편적인 이미지일 경우가 많다. 그런데 소설이란 지속적이고 입체적인 사건들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영감과 우연, 또는 자신의 천재성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어떤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말한다.
내 소설이 어디로 갈지 나도 모른다. 일단 이미지가 떠오르면 첫 줄을 쓴다. 그리고 영감에 맡긴다. 참 멋있게 들리는 말이다. 나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 보면, 이 말은 마치 설교 준비를 하지 않고 (왜냐하면 할 필요가 없으니까, 왜냐하면 그가 섬기는 신이 할 말을 그의 입에 넣어 줄 테니까) 설교대에 오른다는 신비주의적 종교인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이걸 쓰면 소설이 되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떠올랐을 때 우리가 할 일은 그걸 붙잡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막연한 생각을, 어떤 형체가 만들어질 때까지 만지작거리는 일이다. 소설가는 신비주의자여서는 안 된다. 궁리하고 추리해야 한다. 소설은 막연한 생각이나 실체가 없는 이미지가 아니라 정교한 조형물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정교한 조형물을 쌓는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막무가내로 대들겠는가.
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설계도가 필요하다. 설계도는 축소되어 있지만 생략되어 있지는 않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도 역시 설계도가 필요하다. 소설의 설계도도 역시 축소되어 있을지 몰라도 생략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그 역시 천재겠지만, 그렇게 하면 영감을 방해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감은 치밀한 설계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밑그림을 잘 그려 놓았을 때 영감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경험을 한다. 설교 준비를 치밀하게 열심히 한 사람의 입에 하나님이 더 좋은 말을 넣어 준다고 나는 믿는다.
쓰다가 중단한 작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설계도나 밑그림 없이, 자신의 재능이나 우연한 축복만을 기대하고 무작정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이다. 발상은 떠올라서 출발은 하고 보았지만, 어떤 길을 통해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 한 상태이니 도중에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미리 알고 출발한 사람은 길을 잃어버릴 수가 없다. 나에게는 쓰다가 도중에 중단한 소설은 한 편도 없다. 다만 아직 쓰지 않은 소설들이 있을 뿐이다. 설계도를 만드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 설계도를 만드는 데 들이는 시간이 소설을 쓰는 데 들이는 시간보다 더 많아야 한다. 말하자면, 소설을 다 써 놓고 소설을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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