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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소설 창작 방법론6 / 이승우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7. 3. 1. 10:44

6. 낯익은 일상을, 낯설게 - 현실이 어떻게 소설이 되는가. (2003-08-01)

 


흔히들 소설을 현실의 반영이라고 한다. 옳은 말이다. 어떤 작가도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할 수 없고, 어떤 소설도 그 시대와 사회의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다른 것들이 그런 것처럼 소설 역시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다.


소설을 씀으로써 작가는 그가 살고 있는 사회와 역사를 자연스럽게 그 안에 담는다. 물론 과거의 역사를 소재로 씌어진 소설도 있고, 미래의 특정한 시간을 배경으로 하여 씌어진 소설도 있다. 그런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소설 속에 그려진 과거와 미래 역시, 엄밀히 말하면 현재의 시간과 공간(작가의 현재의 세계관)이 투사된 것에 다름 아니다. 소설이 현실의 반영이라는 말 속에는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소설 속에 현실을 담는다. 현실을 그리기 위해 소설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 소설쓰기를 통해 현실을 그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 현실은 어떻게 소설이 되는 것일까.


우선 인정해야 할 진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하나도 빼 놓지 않고, 옮겨 적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사실을 찾고 옮겨 적는 작업은 역사가들이 한다. 우리는 역사가들의 저술을 통해 지나간 시간의 ‘현실’들과 만난다. 우리가 의자왕에 대해 알고, 프랑스 혁명에 대해 알고, 6. 25 전쟁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역사가들의 사실 그리기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의자왕,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 우리가 알고 있는 6. 25 전쟁은 실제 있었던 사실들의 전부일까? 그럴 리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또한 안다. 사실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루에 겪은 모든 일을 그대로 쓴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특정한 공간에 있는 사물들을 그대로 베끼는 것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소설을 통해 현실 전부를 있는 그대로, 일어난 사건 그대로 모조리, 충실하게 그려내겠다는 욕심이 불가능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가 소설을 통해 현실을 그린다고 할 때 그 현실은 어떤 현실일까. 필요한 것은 경험의 충실한 베끼기가 아니라 그것의 적절한 가공이다. 가공하지 않은 재료는, 그 재료가 아무리 그럴 듯하다고 하더라도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아름다운 경치 앞에서 우리는 때때로 ‘예술이다!’라고 외친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자연이지 예술은 아니다.


우리가 소설을 통해 반영하는 현실은, 우리가 ‘보는’ 현실이다.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다 보는 것이 아니다. 본다는 것은 의식이 동반된 정신 활동이다. 귀 있는 자가 듣는 것처럼, 눈 있는 자가 본다. 누구도 자기가 보지 않은 것에 대해 쓸 수 없다. 무엇이 보이느냐(무엇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무엇에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그것만이 글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상파들을 기억할 일이다. 그들은 자연, 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일의 불가능함을 포착한 이들이었다. 인상파 화가들을 탄생시킨 것은 사진기와 휴대용 물감이었다고 한다. 휴대용 물감이 생기면서 비로소 그림 도구들을 가지고 야외로 나갈 수 있었던 그들의 눈에 비친 자연은 종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눈을 들어 바라보면 어느새 풍경의 색깔이 바뀌어져 있는 경험을 했을 것이고, 그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카메라가 순간의 빛을 포착하는 것처럼 한 순간의 인상을 붙잡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했을 것이다. 요컨대 사물에 고정된 불변의 모양과 색깔이 없다는 것. 있는 대로가 아니라 보는 대로 존재한다는 것.


현실을 ‘있는 대로’ 베끼지 말고 ‘보는 대로’ 가공해야 한다. 현실 경험을 가공하지 않고 충실히 옮겨 적으려는 작가의 욕구가 장황하고 진부하고 지루한 소설을 만든다. 생각해 보라. 그 작가는 왜 모조리 다 쓰려고 하는 것일까. 자기만 따로 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본 것이 없기 때문에 있는 대로 쓰려고 하고, 그렇게 쓸 수밖에 없다. 차별화된 시선에 의해 ‘있는’ 현실의 어떤 것은 배제되고 어떤 것은 선택된다.
가을에 대해 쓸 때, 가을의 모든 재료들을 다 동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선에 따라, 주제에 따라, 필요한 것만 취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가령 가을을 감사와 접목시키는 경우와 고독, 또는 독서에 연결시킬 때 취사 선택될 수 있는 재료들이 같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다 쓰려고 하지 말고 필요한 것만 써야 한다. 어차피 다 쓸 수도 없는 일이다. 현실을 ‘있는 대로’ 베끼지 말고 ‘보는 대로’ 가공하라고 하는 것은 그런 뜻이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무의미하기도 하다.
소설의 재료인 이 납작한 문자 매체를 가지고는 사물이나 사건 현장을 눈 앞에서 보는 것만큼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독자들의 관심 역시 그런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문학의 문장은, 실용문과 달라서 정보의 직접적이고 빠른 전달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문학은 간접적이고 우회하는 방법을 택한다. 할 수 있는 한 소통을 지연시키는 것, 그것이 문학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말하는 것이 문학의 언어이다. 호수는, 내 마음의 상태를 은유한다. 호수라는 우회로를 통해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이 지연 효과가 사용 설명서나 신문 기사와 똑같은 문자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 문장들을 문학으로 만든다. 은유가 없으면 문학이 없다.


창세기의 신은 흙으로 사람의 형체를 만들어 놓고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그 흙은 사람이 되었다. 흙은 재료이다. 일상과 현실도 재료이다. 흙이 사람의 형체를 가지고 있는 순간에도 아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일상과 현실 역시 비록 소설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아직 소설이 아니다. 흙이 사람이 되기 위해 신의 숨결이 필요했던 것처럼, 일상이나 현실이 소설이 되기 위해서도 은유, 또는 환상이 필요하다. 일상이나 현실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야 한다. 말하자면 은유나 환상. 그런 것들에 의해 너무나 익숙하고 낯익어서 구질구질하기까지 한 우리들의 일상은 돌연 낯설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낯익은 일상을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당신은 소설이라는 걸 썼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시를 사랑하는 서정마당
글쓴이 : 같은세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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