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2003년 7월 1일)
쓰다가 만 소설,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소설, 수습이 안 된 채 끝나는 소설, 앞과 뒤가 사뭇 달라서 혼란스러운 소설들은 대개 밑그림 작업을 거치지 않고 집필된 소설들이다. 설계도 없이 지어진 건축물이 불안한 것처럼 이 작품들도 불안하다.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밑그림은 치밀하고 세밀할수록 좋다. 코가 엉성한 그물에는 작은 고기가 걸리지 않는다. 축소는 하되 생략해서는 안 된다. 가령 당신이 어떤 인물에 대해 밑그림을 그린다고 하자. 고려할 항목들이 얼마나 될까. 이름, 직업, 나이, 결혼 유무, 결혼했다면 자녀가 있는가 없는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독신주의자인가, 아닌가, 대학을 다녔는가, 안 다녔는가, 다녔다면 전공은 무엇인가, 운전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키와 몸무게, 시력, 고향, 부모들의 성향, 성격, 버릇, 외모상의 특징……. 할 수 있는 한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을 다 생각해 두는 것이 좋다. 소설쓰기는 본질적으로 고상한 일이 아니라 자질구레한 일이다.
완성된 소설에 나올 내용을 미리 다 만들어야 하고, 완성된 소설 속에 나오지 않을 내용도
밑그림에는 들어 있어야 한다. 정작 작품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정밀한 구조물로서의 소설을 완성시키고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데 긴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한 인물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면서 몸무게와 키와 시력과 취미와 태어난 곳과 사는 동네와 자동차 운전 능력 여부 따위와 같은 자질구레한 내용들을 설정해 놓았다면, 소설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직접 그런 내용이 서술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인물의 어떤 행동이나 그 행동을 하는 순간의 심리 상태를 그릴 때 큰 도움을 받게 된다. 예컨대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의 움직임이 그렇지 않은 사람의 움직임과 같을 수 없는 것이다.
밑그림은 치밀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이어야 한다. 추상적인 밑그림은 작품을 추상적으로 만들거나 아예 작품을 완성하지 못 하게 한다. 소설가 전상국은 자신이 작성했던 밑그림 중에서 끝내 작품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소개하고 있다. (『당신도 소설을 쓸 수 있다』)그리고 그 이유를 추상적, 관념적 발상과 막연한 아우트라인 때문이라고 스스로 진단했다. 예컨대 ‘명분을 위해 사는 삶, 요령주의, 권모술수, 한국적인 것의 파괴’ 같은 식으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소설의 밑그림은 언제 누가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했다, 는 문장을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생각으로는, 질문하는 것이다. 질문의 꼬리에 질문을 갖다 붙이는 끊임없는 질문의 연쇄를 통해 스스로 길을 터가는 방법. 하나의 질문은 하나의 대답을 만든다.
그리고 그 대답은 다시 다른 질문을 배출한다. 질문과 답의 되풀이가 일정한 회로를 만들면서 부분에서 전체로 확대되고, 마침내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한다. 질문이 없으면 대답도 없다. 질문이 없으면 소설도 없다.
교도소에 갇힌 수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고 하자. 어떤 죄수인가? 하는 질문이 곧바로 나온다. 여러 가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세상이다. 교도소라고 다를 리 없다. 그 사람은 그곳에 왜 들어갔을까? 하고 물어야 한다. 살인을 했는가? 도둑질? 사기?……. 무슨 죄를 지었는지에 대해 답하는 순간 소설의 방향이 만들어진다. 그 범행이 우발적이었는가, 계획적이었는가, 하는 질문에 의해 다시 또 방향이 틀어진다. 그 사람이 살인범이라고 가정하자. 그는 누구를 죽였을까? 친척이거나 친구, 동업자이거나 애인, 혹은 아무 상관없는 행인이 희생자로 선택될 수 있다. 그 선택에 의해 소설은 한 번 더 방향을 튼다. 그리고 희생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다른 사연이 만들어질 것이다. 예컨대 살인의 동기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질문은 이어진다. 어디서 죽였는가? 아파트일 수도 있고, 길거리일 수도 있고, 산 속일 수도 있다. 어떤 아파트-길-산인지가 나와야 하고, 왜 거기 갔는지가 설명되어야 한다. 살인이 일어난 시간은? 새벽일 수도 있고, 밤일 수도 있고, 한낮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날씨가 흐렸을 수도 있고 비가 왔을 수도 있고 바람이 몹시 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죽였는가, 하는 질문도 많은 가능한 길들을 펼쳐 놓는다. 흉기를 썼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흉기를 미리 준비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흉기는 칼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칼이라면 어떤 칼인지가 질문될 것이고, 누구의 칼인지가 질문될 것이고, 어떻게 구한 칼인지가 질문될 것이다. 상대가 반항을 했는지의 여부도 물어야 할 것이고, 목격자가 있었는지도 물어야 할 것이고, 그 목격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꼬마인지도 물어야 할 것이고, 그 목격자가 진술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도 물어야 할 것이고, 진술을 했다면 누구에게 유리하게 했는지도 물어야 할 것이다…….
질문들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한 질문에 대답하고 나면 다른 질문이 기다렸다는 듯 곧장 튀어나온다. 튀어나오는 질문들을 소홀하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질문을 멈추는 순간 대답이 멈추고, 소설도 멈춘다. 귀찮더라도 대답해 주어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처음에는 윤곽도 잘 보이지 않던 그림들이 윤곽을 형성해가고, 선이 분명해지고, 선명한 부분이 점차 확대되어가고, 제 몸에 맞는 색깔이 칠해지고, 그리하여 하나의 큰 그림, 소설이 완성된다.
보르헤스의 소설 중에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비유하자면, 소설의 밑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을 만들며 미로의 정원을 완성하는 것이다. 소설은 미로의 정원과 같다. 肩寬?없으면 정원이 아니다. 밑그림은 정원에 미로를 만드는 작업이다
'참고자료 > 인터넷참고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소설 창작 방법론3 / 이승우 (0) | 2007.03.01 |
---|---|
[스크랩] 소설 창작 방법론4 / 이승우 (0) | 2007.03.01 |
[스크랩] 소설 창작 방법론6 / 이승우 (0) | 2007.03.01 |
[스크랩] 소설 창작 방법론7 /이승우 (0) | 2007.03.01 |
[스크랩] 소설 창작 방법론8 / 이승우 (0) | 2007.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