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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으로 본 역사증거-5-백제는 동아시아 제국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7. 4. 7. 15:42

백제는
동아시아 제1의 대제국이었다


출처: blog.chosun.com/stormmer


5. 백제는
동아시아 제1의 대제국이었다


1) 우리의 자부심 고구려로 알고 있던 나라는 백제였다

우리나라 유적 발굴은 三國이 어디에 위치했다는 날조 역사책에 근거한다. 高句麗 유적을 찾는 데는 新羅 遺蹟과 비교하고, 百濟 遺蹟과 비슷하면 高句麗 遺蹟으로 보는 식이다.

平壤城 유적이라는 大同江과 普通江이 만나는 濕地帶에서 통나무가 대량으로 발견 되었다. 수분을 일정하게 유지해서 부분 침하를 방지하기 위한 공법이라고 한다. 百濟 泗沘城 이라는 곳에서도 통나무와 나뭇가지들이 발굴됐다.

▲보통문 : 평양성 중성의 서문으로 보통강 기슭 천리마거리 어구에 있다. 6 세기 중엽에 세워졌고, 그후 고려 이씨조선에 걸쳐 여러 차례 고쳐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해방 후 본래 자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55 m정도 옮겨 지은 것이다.

중국 대륙에 이어 韓半島까지 三國이 나누지는 않았다. 半島史 대로 韓半島에서 건국한 소국 이라면, 渤海灣에서 중가리아 분지까지 단기간에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高句麗의 일식관측지는 黑龍江 상류다. 高句麗는 大興安嶺山脈 이북을 가졌던 것이다. 大興安嶺山脈 이남은 발해만을 가진 百濟 영토였다.

高句麗가 大興安嶺山脈 이북에서 남으로 침공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大興安嶺山脈 이북은 인구저밀 지역이고, 百濟 땅 大興安嶺山脈 이남은 인구밀집 지역이기 때문에 전력에 있어서 高句麗가 밀렸다. 高句麗가 滿州와 韓半島 북부까지 차지했다고 하면, 韓半島 남부에 간신히 교두보를 마련한 百濟와 新羅를 구축하지 못 했을 리 없다. 이 경우 渤海灣에 있던 百濟는 韓半島를 차지하기 위해 해로침공을 감행해야 한다. 滿州는 百濟 영토였던 것이다. 百濟 泗沘城(?)과 건축 공법이 똑같은 平壤城(漢城?)은 百濟의 성이었다.

4 세기 전후로 大興安嶺山脈 이북을 상실했을 때 高句麗는 동북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日本 날조역사책에 등장하는 高句麗人(?)은 고작 담징(曇徵 579∼631), 이리지(伊利之) 정도다. 高句麗人들은 열도로 건너가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日本語의 기원은 高句麗語인가.

동북아 남부에 있던 나라는 高句麗가 아니라, 百濟다. 百濟가 列島에 식민지를 세운 4 세기말은 高句麗가 동북아를 상실한 후다. 설령 高句麗人 몇 몇이 列島로 건너갔다고 가정해도, (지배층) 다수가 쓰는 언어가 공용어가 되기 마련이다. 日本은 百濟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있었다.

백제라는 나라는 일본에다 혁명적으로 문화를 전해준 스승의 나라다. 불상은 물론이고, 그 밖의 미술, 공예, 학문, 기예에 있어서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지금도 전국 각지에 백제라는 지명이나 명칭이 남아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불상을 생각한다, 오카베 이츠코 : 罔部伊都子)

列島에 百濟 식민지, 新羅 식민지가 있었던 사실을 인정하는 학자는 많아도, 高句麗 식민지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日本語는 百濟語에서 변형 되었던 것이다.

平壤城이라 알려진 韓半島의 유적은 百濟의 왕성이다. 平壤城(?)의 연못을 두고 역사스페셜 4 권에서는 ”高句麗 사람들이 산성 건설에 지형조건을 얼마나 잘 이용하고 물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한다. 성을 쌓는데 지형조건을 무시하고 물을 중시하지 않는 나라도 있는가. 攻城戰에서는 성 안의 물이 떨어지면, 제아무리 난공불락의 요새라 해도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長壽王은 평소 안학궁(安鶴宮)에 있다가 전쟁이 벌어지면, 궁을 떠나 대성산성(大聖山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長壽弘濟好太烈帝가 거주하던 宮은 中國 대륙의 長安에 있었고, 山城도 그 주변에 있었다. 高句麗, 新羅와의 전쟁 속에서 산 百濟다. 百濟 역시 宮・山城 二元體係를 갖추었던 것이다.

韓半島 역시 溫祚 당대부터 百濟 영토였다. 高句麗 영토를 양분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百濟 홀로 동북아에 깊숙이 들어앉을 수도 없는 일. 溫祚는 현 黃河 하류에서 渤海灣, 滿州, 韓半島, 黑龍江 중, 하류에 이르는 高句麗 땅을 챙겼다.

百濟 유적과 비슷한 것의 실체는 百濟 遺跡 이었던 것이다. 新羅가 韓半島를 침공하면서 남부는 곧 전쟁터로 변해버린 탓에 대규모 건축물을 축조할 수 없게 되었다.

百濟는 東아시아의 天子國 朝鮮을 계승한 高句麗에서 분리된 나라라 그들의 기풍도 자연 부드러울 수밖에 없다. 琉璃明帝 때만 해도 百濟는 침략자의 위치, 高句麗는 방어자의 위치에 있었고, 4 세기 말 이전까지는 百濟의 전력이 高句麗를 능가했기 때문에 百濟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었다.

우리가 高句麗軍으로 알고 있던 것의 실체는 百濟軍이다. 百濟 백만 대군의 실체이다. 4, 5세기 부터 三國은 격렬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近肖古帝(百濟 皇帝의 帝號가 近肖古 라던지, 蓋鹵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가 昭烈帝(故國原帝)를 살해하고, 長壽弘濟好太烈帝가 蓋鹵帝를 살해했다. 廣開土境好太皇이 동아시아를 정복하고, 韓半島에서는 新羅가 잠식해 들어왔다.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강자만이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것이 벽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韓半島와 滿州 일대에 걸쳐 이루어진 高句麗 미술은 퉁구스 직계의 북방 기마 유목 민족의 기풍에 한(漢)·위(魏)·진(晉)의 중국 문화를 흡수하였으며, 묘식(墓飾) 예술이나 불교 미술 등은 百濟·新羅·日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韓半島와 滿州에 高句麗 미술은 없다. 우리가 高句麗 미술로 알고 있는 것은 百濟 미술이다. 375년 이전까지 新羅는 韓半島에 없었다. 日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百濟 미술이다. 한(漢)·위(魏)·진(晉)의 중국 문화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티벳고원 북부의 中奴에게 무슨 고도 문화가 존재할 것인가. 퇴폐적인 性文化만 빼면, 中土는 獨自文化 조차 없다.

▲ 13 군 태수들이 유주자사에게 인사 드리는 모습 : 연군태수(燕郡太守).범양태수(范陽太守).어양태수(漁陽太守).상곡태수(上谷太守).광령태수(廣寧太守).대군내사(代郡內史).북평태수(北平太守).요서태수(遼西太守).창려태수(昌黎太守).요동태수(遼東太守).현도태수(玄兎太守).낙랑 태수(樂浪太守). 그리고 또 한 명의 태수이다.글자가 지워져 알 수 없게 된 마지막 태수는 帶方太守라는 것을 알 수 있다.13 군이 幽州에 속하며 거느리는 縣은 75 개이고,광계(廣薊)는 幽州刺史의 治所이다.

퉁구스(Tungus)系? 소위 퉁구스계는 韓半島와 동북아에 분포한다. 漢族으로 둔갑한 滿州族과 滿州族으로 둔갑한 黑水靺鞨만 빼면, 모두 韓民族인 셈이다. 제 민족을 두고 날조사에 따라 靺鞨族, 女眞族, 거란족(契丹族)하고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韓族이 퉁구스계의 집합으로 분류되고 華夏와 거란이 漢族으로 변신한 것에서 보듯 오늘날 중국 대륙의 인종 분류는 믿을 것이 못된다.

遊牧民族이 정말 고도의 문화를 남길 수 있는가. 유목민족은 천막 하나 치고, 그곳에서 기거 하다가, 가축들이 주변의 풀을 다 먹고 나면 그대로 천막 걷어서 다른 장소로 이주하는 민족이다. 그런 민족에게 어떤 美術이 있고, 藝術이 있단 말인가.

蒙古高原도 우리나라 영토이다. 그래서 大震國이 蒙古高原 이북에서 일식관측을 할 수 있었다. 黑龍江 상류 이남, 大興安嶺山脈 이북은 高句麗 영토였다가, 3, 4 세기에 百濟에게 빼앗겼다.

고작 221,336 ㎢의 韓半島에도, 아니 9만 9373 ㎢의 남한에도 지방차가 존재한다. 東아시아가 우리나라 땅이었던 그 옛날에도 지방차가 존재했다. “그 풍속은 모두다 실제에 임하여 이치를 찾고 일을 계획하여 그것이 옳음을 구함이 같았다(皆其俗就實究理策事而求其是則同也 太白逸史 三神五帝本紀)." 우리가 高句麗 미술이라 알고 있던 것은 百濟 미술 중에서도 韓半島와 그 이북 지방의 미술이다.

韓半島에 유주자사(幽州刺史)가 있을 자리는 없다. 幽州는 嘉陵江 너머도 아니고, 岷江(朝鮮時代의 松花江) 너머에 있었다. 幽州刺史 진(鎭)에게 13 개 郡의 太守가 하례를 올리는 벽화가 있는 德興里 고분은 幽州가 韓半島에 있었다는 증거도, 漢四郡이 있었다는 증거도 아니다.

6세기 초까지 遼西는 百濟가 지배했다. 梁書에는 “진(晉)나라(265~316) 때 百濟는 遼西에 있었다(晉時百濟有於遼西)”고 했으며 宋書 97권 百濟傳의 머릿부분에는,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淸나라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州源流考) 에서는 百濟의 도읍이 遼西에 있었다(國都在遼西)고 기록했다. 太白逸史에는 文咨好太烈帝 12 년(明治 12 년 : 504 년)에 “百濟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보내 공격하여 遼西와 晉平郡 등을 취하고 百濟郡을 폐하였다(百濟不貢遣兵攻取遼西晉平等郡百濟郡廢)”고 했다.

안악 3호분(安岳三號墳 357년), 德興里 고분의 피매장자는 遼西를 다스리던 百濟의 관리로서 퇴임 후 韓半島에서 여생을 보냈던 것이다. 동수(冬壽)와 鎭이 노후를 보낼 때만 해도 韓半島는 新羅도 진출하기 전이라, 휴양지 같은 안락한 땅이었다. 물론 이사를 할 때는 중국 대륙에서 자신이 사용하던 물건들을 다 실어 날랐다. 安岳 3 號墳에 매장된 冬壽는 遼西 太守가, 德興里 고분에 매장된 鎭은 幽州刺史가 최고관직 이었던 것이다.

德興里 고분의 28 수(宿) 동서 위치가 바뀌고, 진파리(眞坡里) 4 號墳이 天口 바깥에서 안쪽을 보고 그린 것은 고분의 피매장자나 고분 벽화 제작자의 취향일 뿐이다. 자신의 것만을 갖고자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소망 아닌가.

冬壽는 鮮卑族 출신의 망명객이 아니다. 冬壽는 처음부터 우리나라 사람이다. 高句麗인이 아니라 百濟人이다.

北中國은 처음부터 高句麗의 영토였다. 4 세기 초 鮮卑族 모용씨(慕容氏)가 넘보던 땅은 티벳고원 북부였다. 티벳고원 북부를 놓고 中奴가 鮮卑族 慕容氏와 치열하게 패권을 다툰 것이다. 소위 5胡16國 시대(304~439)에 연(燕:慕容氏)·진(秦:乞伏氏)·양(凉:禿髮氏)을 세우고 북위(北魏:拓跋氏)에 이르러 中土 서부를 통일, 西趙(?)의 기초를 연 것도 鮮卑族이고, 隋, 唐도 鮮卑族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싸움은 高句麗와 하면서 나라는 매번 中土에다 세울 수는 없다.

蒙古高原에서 中土에 나라를 세우자면 그 사이에 있는 高句麗 영토부터 통과해야 한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매번 高句麗를 통과할 수 있을 만치 高句麗의 방위가 엉망이었을까. 우리가 高句麗 군대로 알고 있던 것은 百濟 군대였다. 그러나 그런 百濟軍을 격퇴하고 이윽고 東아시아 패자의 위치에 올라선 나라가 高句麗다.

선비족의 등장

鮮卑族은 타림분지(塔里木盆地) 한 구석에 있다가, 高句麗에 쫓겨 3 세기 중엽 中土 서부로 침입했다. 中奴가 中國 大陸 전체를 차지했다고

◀ 온조제 6 년 B.C.13 년 7월 그믐 ... 8월말 실행된 일식위치 : 실행이 되었습니다만, 백제 초기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백제 영역에서는 관측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 좀 더 북쪽이라면 관측이 용이할 것입니다만 … 어쩌면 백제는 좀 더 북쪽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해 뜰 때니까, 어쩌면 제천 행사를 하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네요.

역사 날조하자 종이 위에서 시라무렌(西拉木倫) 유역으로 옮겨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鮮卑族 慕容氏 형제 사이의 왕위계승전(실상은 酋長繼承戰)으로 일단의 鮮卑族 무리가 도망친 곳은 中土 동부다.

     ▲ 장춘시(長春市) 유수현(楡樹縣) 노하심(老河深)고분 허리띠 장식 앞, 뒷면

鮮卑族이 鮮卑山에서 유래한 종족명 이라면서 鮮卑를 어떻게 읽는가 하면, 천하고 작은 생선 이라고 한다. 鮮卑族은 생선 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유목민이다. 노하심(老河深) 고분(이 땅의 사학자들은 東夫餘 古墳이라고 우기는데, 東夫餘는 滿州가 아니라, 淮水 유역에 있었다. 朝鮮의 고분이다)에서 출토된 농기구를 두고 유목민 鮮卑族이 농경생활을 했다고 하더니, 유목민 鮮卑族이 해상생활까지 했다고 우기는가. 대체 언제부터 생선이 산에서 났단 말인가.

원래는 鮮裨族이었다. 조선비왕(朝鮮裨王)에서 따온 것으로 檀君이 자신의 형제들을 보내 피지배 종족들을 거느리게 한 데서 비롯된 종족명이다(실증 한단고기). 檀君世紀에도, 己未 40년(B.C. 1622), 15 世 檀帝(代音)의 동생 代心을 南鮮卑의 大人(支配者)으로 삼았다(己未四十年封皇弟代心爲南鮮卑大人)고 했다. 구한(九桓)이 해체된 이후 鮮卑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鮮卑族은 匈奴의 피지배종족 이전에 朝鮮의 被支配種族이다. 鮮卑族은 원래 가진 것이라곤 달랑 천막 하나밖에 없는 유목민이다. 4 세기에는 5胡의 하나였던 鮮卑族이 6 세기에는 隋를 세우는 中土의 어엿한 統一王朝로 변신한다.

唐에 이르면, 천하고 작은 생선 鮮卑族은 중국 최대 판도를 날조하는 中奴 自尊心의 代名詞로 우뚝 선다. 唐이 통일한 것은 티벳고원 북부다. 唐 이전 까지는 티벳고원 북부를 통일한 중국의 王朝가 없었기 때문에 唐에 이르러 중국 최대 판도를 가지게 된 것이다1).

朝鮮의 계승국 高句麗가 그런 천하고 작은 생선의 무리를 받아들여 太守로 임명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鮮卑族을 천하고 작은 생선이라 불렀던 나라는 鮮卑를 中土로 내쫓은 高句麗다. 中奴는 천하고 작은 생선 鮮卑族 唐이 中奴 역사상 최대판도를 차지했다고 중국의 자부심으로 삼기에 바쁘다. 그런 중국이 唐의 존속 당시에는 천하고 작은 생선이라 부르며 비하했을 리가 없다. 鮮卑族이나 華夏族이나 피차 똑같은 수준이었다.

壬申 원년(B.C. 169) 정월 樂浪王 최숭(崔崇)이 곡식 300 섬을 海城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崔崇은 樂浪 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馬韓의 서울 王儉城에 이르니, 이때가 檀君 解慕漱 丙午年(B.C. 195)의 겨울이었다(壬申元年正月樂浪王崔崇納穀三百石于海城先是崔崇自樂浪山載積珍寶而渡海至馬韓都王儉城是檀君解慕漱丙午冬也 北夫餘紀).”

이미 莫朝鮮(馬韓)이 멸망한 뒤이다. 燕나라의 盧綰이 遼東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浿水로써 경계선을 삼은 己亥 38(B.C. 202)년(己亥三十八年燕盧綰復修遼東古塞東限浿水 北夫與紀) 이전에 莫朝鮮은 멸망했다.

盧綰이 도망가고, 衛滿이 番朝鮮으로 망명 했으니까, 北夫餘는 莫朝鮮의 옛 땅을 탈환했다. 이미 莫朝鮮은 사라졌으니까, 樂浪王 崔崇이 莫朝鮮의 땅을 얻고 싶어 바다를 건너 馬韓의 王儉城으로 온 것이다. 바다는 黃山江(揚子江)이다. 원래 樂浪은 黃山江 이남에서 北으로 莫朝鮮과 접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解慕漱는 莫朝鮮 땅을 崔崇에게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辛酉 원년(B.C .120), 北夫餘 4 世 檀君 高于婁가 西鴨綠(岷江)을 수비토록 발탁한 인물(高辰)을 승진시켜 高句麗侯로 삼았기 때문이다.

樂浪王 최리(崔理)가 好童王子를 만났을 때에 “북쪽나라 신왕의 아들이 아닌가(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三國史記)” 한 것은 樂浪이 岷江 이서 일부2)와 揚子江 상류 이남을 차지하고 高句麗가 岷江 이동 및 揚子江 이북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大武神烈帝 때 樂浪을 멸망시키고, 高句麗는 岷江 이서까지 차지했다. 樂浪이 멸망하자, 高句麗는 漢나라와 직접 국경을 맞닿게 되었다. 하지만 後漢은 高句麗의 속국이니까, 高句麗 武烈帝 3년(AD 55)에 遼西 지역에 10 城을 쌓아 漢나라 군사에 대비할 필요는 없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武烈帝는 百濟의 침략에 대비해서 10 城을 쌓은 것이다.

樂浪을 멸망시킨 것은 大武神烈帝 이고, 遼西에 10 城을 쌓은 것은 高句麗 武烈帝다. 시차가 벌어지는 것은 百濟가 黃山江 이남에서 樂浪 땅부터 잠식하고 西鴨綠江(嘉陵江) 쪽으로 공략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高句麗 武烈帝가 10 城을 쌓을 때는 百濟가 西安平을 공략하고 있었다. 高句麗는 끝내 西安平 조차 상실했다.

그래서 美川帝가 311 년에 西安平을, 313 년에는 樂浪을, 314 년에는 帶方을 공략 했다고 날조한 것이다. 梁書에도 晉나라(265 ~ 316) 때 百濟가 遼西에 있었다(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晉世句驪□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 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梁書 百濟傳)고 했다. 宋書에도 “백제가 요서를 다스릴 때 고구려가 요동을 다스렸다(百濟國本與高麗 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麗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宋書)”고 했다. 樂浪 등을 멸망시킨 것은 高句麗지만, 高句麗는 樂浪 땅은 물론이고 嘉陵江 이서 전체를 百濟에게 빼앗긴 것이다. 이미 멸망한 樂浪, 帶方을 공격했다는 것은 遼西의 百濟를 공격 했다는 말이다.

날조 漢四郡이 있는 番韓을 辰韓에 포갰기 때문에 百濟 땅 遼西를 공략한 美川帝는 날조역사 속에서 高句麗 땅으로 옮겨온 漢四郡을 공략해야 했던 것이다.

319 년 진(晋)나라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가 도망와서 이를 핑계로 모용외(募容嵬)가 高句麗를 침범 했다고? 百濟 땅 遼西는 文咨好太烈帝 12 년(504)에 이르러서야 高句麗 영토가 되었다. 平州刺史 崔毖는 百濟人이다.

晉나라(265~ 316) 때 百濟가 遼西에 있었다고 했지만, 504 년 까지는 百濟의 영토가 東아시아 끝에서 끝까지였다. 395 년 高句麗와 浿水에서 싸워 패했을 때, 浿水 유역의 일부를 상실 했으나 여전히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504 년 까지 遼西 지역을 지배할 수 있었다. 鮮卑族 募容嵬는 高句麗를 침범하지 않았다. 鮮卑 자체가 高句麗에 쫓겨 中土로 들어간 보잘 것 없는 유목민이다. 그런 주제에 어떻게 高句麗 영토를 넘본단 말인가. 그 전에 막강 百濟軍이 수비하고 있는 遼西 지역부터 침입해야 한다.

◀ 다카마쓰 고분벽화(부인도) : 안악 장식 고분군에서 대표되는 군상벽화와 유사한 모습이다

高句麗 벽화는 百濟 벽화이고, 따라서 세계의 중심이라는 天下觀은 百濟의 天下觀이다. 百濟 역시 高句麗에서 분리된 나라라 朝鮮의 世界觀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는 高句麗 古墳으로 알려진 다까마스총(高松塚)의 벽화를 보는 순간, 百濟의 古墳群을 떠올렸다고 했다.

아스카(飛鳥)의 다까마쓰총(高松塚)에서 극채색 그림의 남여군상이며 용호 사신상이 발견 되었다. 기사를 보고 순간적으로 생각난 것은 3 년 전 방문했던, 백제의 왕도였던 웅진과 부여의 고분군이다. 특히 공주의 송산리 고분 에서는 극채색의 훌륭한 사신도가 뇌리에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신문의 사진으로는 남녀 군상도의 경우, 안악 장식 고분군에서 대표되는 고구려의 군상벽화가 연상된다. (요미우리 신문,1972.3.30.)

다까마스총(高松塚)은 高句麗 고분이 아니라 百濟 고분 이었으니까 당연하다.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가 마지막 예로 든 안악고분(安岳古墳)조차 百濟의 고분이다.

7세기 후반의 것으로 알려진 나라(奈良)縣 아스카(明日香)村 기토라(キトラ) 고분 천장 별그림의 관측자 위도가 북위 38.4°로 기원전 65 년경의 하늘이다. 이 당시는 백제도 건국하기 전인데, 벌써 천문대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北夫餘 시대에도 韓半島에 천문대가 있었던 것이다.

韓半島의 白頭山은 神市氏가 개천할 당시의 太白山이다. 神人王儉도 神市와 太白山을 辰韓(眞韓)의 영토로 삼기 위해 神誌氏에게 大興安嶺山脈 이북만을 주었다. 乙丑 35 년 처음으로 監星을 두었다(乙丑三十五年始置監星 檀君世紀). 천문대를 설치했다는 말은 고정된 위치에서 천문관측 했다는 의미다. 韓半島는 기원전 1916 년 혹은 그 직후부터 천문대가 설치되어 줄곧 그 지점에서 천문관측한 까닭에 百濟 諸王(侯王 혹은 裨王)의 王城을 건설한 곳(북위 39°)과 위도차가 생긴 것이다. 新羅가 韓半島를 침공하기 전에는 百濟 諸王의 王城이 韓半島 남부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문대 위치와는 더욱 거리가 벌어진다. 천문관측 지점은 李氏朝鮮 초까지 고정되어 있었다.

기토라 고분 天文圖는 韓半島 독자의 천문도이다. 무용총(舞踊塚)의 26수도 韓半島와 이북의 독자 별자리다. 물론 기토라 고분은 高句麗 고분이 아니라, 百濟 고분이다. 기원전 18 년 이후 高句麗는 韓半島에 없었다. 高句麗는 4 세기 이후 동북아를 상실했다. 韓半島와 滿州에서 고분 벽화를 남긴 것은 百濟였다. 더구나 高句麗人은 列島로 이주하지 않았다.

삼국의 天文·曆法

天文과 曆法에 관한 연구는 인간생활과 직결되어 있어서 오랜 옛날부터 이루어져 왔다. 천문에 관한 기록은 여러 무덤의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고구려 벽화고분 95 기 가운데 22 기의 천장에 별들을 선으로 이은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舞踊塚 벽화에는 벽면에 故人의 영생을 상징하는 四神圖와 日月, 천장에 여름 밤 남쪽 하늘에서 관측되는 南斗六星을 비롯한 26수(宿)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高句麗의 천문관서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일자(日者)”라는 천문관련 업무를 담당한 관직명과 高句麗에서 신라로 천문도(天文圖)를 전파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은 高句麗가 고도로 발달된 천문학적 지식을 소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문도 석각본은 원래 평양성에 있었는데, 전란으로 대동강물에 빠져 버렸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인본도 매우 희귀해 졌는데, 成桂가 즉위한 후 그 천문도 印本을 바치는 사람이 있어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 천문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한반도 천문도의 성립 시기는 4 세기 후반에서 6 세기 초 사이로 추정 하는데, 여기 그려진 1,464 개의 별이 중국(?)에서 3 세기 초에 만들어진 삼가성도(三家星圖)의 283 자리 1,464 개의 별의 수와 일치한다. 世宗 때의 천문학자 李純之는 그의 『諸家曆象集』에서 중국에서 陳卓이 310 년에 三家星圖에 의해서 처음으로 천문도를 만들었다고 쓰고 있다. 그래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바탕이 된 百濟의 천문도는 4 세기 후반까지에는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첨문대라면 경주 첨성대(?)만 연상하지만 고구려와 백제에도 첨문대는 있었다. 고구려(?) 첨문대는 “世宗實錄地理志” 의 기록에 나타나는데, “平壤城 안에 9 개 사당과 9 개 못(池)이 있는데 9 개 祠堂은 바로 9 가지 별이 날아 들어간 곳이며 이 못 옆에 瞻星臺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두칠성, 남두육성, 동쌈성, 서쌈성 등 사방위 별자리는 중국에선 보기 힘든 고구려만의 독창적인 천문체계다.(역사스페셜 1권)

기토라 고분에 韓半島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는 것은 高句麗 벽화가 아니라 百濟 벽화라는 증거다. 기토라 고분 벽화의 四神圖는 百濟人의 작품이다. 日本書紀에도 高句麗가 아니라, 百濟가 日本(당시는 倭였다)에 天文技術을 전했다고 기록돼 있다. 비록 倭가 배우지는 못했지만.

고지끼(古事記), 니혼쇼키(日本書紀)는 百濟 역사서와 新羅 역사서를 보고 썼다. 百濟, 新羅 역사서 어디에 高句麗人 담징(曇徵)이 와서 종이, 맷돌, 먹, 채색법을 가르쳐주고, 금당벽화(金堂壁畵)를 그렸다고 써 있단 말인가. 百濟, 新羅 역사서 어디에 百濟人 미마지(味摩之)가 高句麗樂(日本은 吳나라 音樂이라고 우긴다)을 전수해 주었다고 적혀 있단 말인가. 百濟, 新羅 역사서 어디에 高句麗人 이리지(伊利之)가 新羅의 牛頭山에서 스사노오노미코도(須佐之男命 : すさのおのみこと)의 신위를 모시고 日本으로 와서 정착했다고 적혀 있단 말인가. 曇徵과 伊利之는 모두 百濟人 이었다. 味摩之는 百濟 음악을 日本에 전수해준 것이다.

李成桂는 東鴨綠江을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으로 날조 했으므로 韓半島 북부와 滿州는 高句麗 영토인 셈이었다. 18 세기 이후 역사왜곡한 日本은 百濟文物 일부를 高句麗의 문물 전수로 돌렸던 것이다.

어째서 日本이 李氏朝鮮을 병탄했을 당시 우리나라 古墳을 다이너마이트로 파괴하고 모조리 盜掘 했겠는가. 日本의 植民地史에 대한 증거인멸 차원 에서였다. 倭奴政府는 우리나라 文化材를 훔치는데 學者들을 동원하고, 이렇게 훔쳐간 文化材 목록을 15 권의 책으로 기록할 정도로 조직적이고 철저하게 日本의 식민지사를 지우려 했다. 고분을 다 도굴해 三國이 韓半島를 나눠가진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없애야 했다. 그래야 이 땅의 사람들이 앞으로도 축소된 三國史를 사실이라 믿을 것이 아닌가. 그래야 日本이 우리나라의 植民地였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다. 그래야 日本이 미개 中國倭를 조상으로 둔 나라라는 사실을 감출 수 있다. 고작 植民地史를 지우려고 그처럼 혈안이 되고, 광분했다. 그러니 그 植民地史가 얼마나 초라한 것이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李成桂와 朱元璋은 동북아 남부에 있는 百濟를 高句麗로 둔갑시키기로 합의했다. 百濟의 역사 일부를 高句麗 역사로 기술하는 것이다. 百濟는 高句麗에서 갈라진 나라이므로 高句麗와 비슷하다고 하면 됐다. 그리고 高句麗, 百濟 역사 대부분은 中奴가 가졌다. 일례로 동맹(東盟)은 百濟의 祭天行事다. 高句麗의 제천행사는 한맹(寒盟이 아니라 漢盟이다)이라 불렀다. 중국은 百濟의 東盟을 高句麗의 제천행사(朝鮮의 蘇塗)로 둔갑시켜 高句麗(朝鮮) 역사에 남긴 다음 ‘귀신을 섬겼다’고 하고, 吳,齊는 가져가서 중국의 풍습으로 날조한 다음 ‘신을 섬겼다’고 했다.

그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百濟人의 인상이 너무나 강렬해서, 누구나 百濟가 高句麗라고 철썩 같이 믿었다. 날조역사에서는 高句麗의 영토가 韓半島 북부와 그 이북으로 아주 작다는 사실도 간과한 채, 단지 강인함에 매혹된 것이다. 동북아도 유지하지 못하고 韓半島로 축소되자, 李氏朝鮮은 우리나라 역사를 더욱 축소하면서 그 책임을 전부 우리나라에 전가했다. 倭寇가 설치고 壬辰倭亂이 발발하자, 高麗 시대에는 더했다고 날조했다. 歷史와 疆域이 축소되자, 강인한 百濟人들이 이상적인 인물상으로 다가와 高句麗라고 맹신하게 된 것이다.

天象列次分野之圖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에는 北極星, 北斗七星 등이 표시되어 있다. 天象列次分野之圖의 중앙부는 李氏朝鮮이 그린 것이다. 어째서 李成桂는 高句麗의 천문도를 그대로 모사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李氏朝鮮의 天文圖를 만들지 않고, 중앙부만 李氏朝鮮 초의 하늘로 바꾸었는가. 역사날조 차원에서였다. 百濟의 별자리를 高句麗 천문도와 합성함으로써 百濟를 高句麗로 둔갑시키기 위해서였다.

天象列次分野之圖 주변부의 관측자 위도는 별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곳(북위 40°)이 아니다. 北緯 40°에 있던 천문대는 泗沘(北京)다. 百濟에서 제작한 天文圖(泗沘)에 百濟 별자리(韓半島)를 합성할 필요는 없다. 高句麗가 중가리아분지와 大興安嶺山脈 이북 에서도 천문관측 했으니까, 북위 40° 오르도스에서 천문관측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天象列次分野之圖 石刻本이 平壤城에 있었고, 大同江(浿水; 漢水)에 빠졌다고 했다. 현 西安에서 관측한 하늘을 그린 것이다.

天象列次分野之圖 주변부의 관측자 위도 북위 34.3°는 바로 高句麗의 卒本이자, 平壤이다. 朱蒙聖帝가 기원전 26 년 訥見(洛陽)으로 遷都할 때까지 卒本(長安)이 高句麗 수도였다. 427 년 長壽弘濟好太烈帝가 또 다시 平壤(長安)으로 천도했다.

▲ 천상열차분야지도

天象列次分野之圖는 原本이 아니다. 도면 안의 별을 모두 포함하기 위해 주변부를 약간 크게 그린 것이 아니라, 李氏朝鮮이 베끼면서 외곽선 근처의 별들을 지웠거나 高句麗가 원래부터 별을 생략했던 것이다.

天象列次分野之圖 주변부가 34.3°에서 관측한 1 세기의 하늘이라는 점에서 長安을 수도로 하지 않을 때도 長安에서 천문관측해 왔음을 알 수 있다. 長安은 고정적인 천문관측 장소였던 것이다.

열차분야지도(列次分野之圖)에서 적도원의 반지름은 222.4 mm이다. 주극원의 반지름이 94 mm이니, 이는 관측자의 위도가 (94/222.4)×90°= 38°임을 뜻한다. 이 위도는 국내성이나 평양과 같은 고구려의 수도들 보다 훨씬 낮은 곳이고, 고려의 수도 개성의 위도 38°나 한양(서울) 경복궁의 위도 37.6°와 매우 가깝다.(천상열차분여지도의 별그림 분석)

http://astro.snu.ac.kr/%7Ecbp/General/Refer/Hangul/chun.hwp 참조)

韓半島에는 百濟 건국 이전부터 천문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기토라 고분 벽화의 천문도 에서도 알 수 있다. 기토라 고분 천장 별그림의 관측자 위도가 북위 38.4°로 기원전 65 년경의 하늘이다. 天象列次分野之圖는 원본이 아니라, 李氏朝鮮이 베낀 것이므로 적도원의 반지름이나 주극원의 반지름에 다소의 오차가 발생한 것이다. 李成桂는 38.4°에서 관측한 14 세기의 별자리를 天象列次分野之圖 중앙부에 그렸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토라 고분 천장 별그림이나 天象列次分野之圖 중앙부의 별자리는 같은 위치에서 관측한 하늘이다. 우리나라는 기원전 1916 년부터 李氏朝鮮 초까지 3300 년 동안, 다수의 정해진 장소에서 천문관측했던 것이다.

우리가 高句麗의 강역이라 알고 있던 韓半島와 滿州는 百濟 영토지, 高句麗 영토가 아니다. 기원전 65 년의 하늘을 그린 기토라 고분의 별자리가 韓半島(滿州 포함) 별자리라는 사실에서 北斗七星, 南斗六星, 동쌈성, 서쌈성 등 사방위 별자리는 韓半島만의 독창적인 천문체계다(韓半島에 별자리가 등장한 시기는 최소한 5000 년 전이다. 모든 문화가 그러하지만, 별자리도 韓半島에서 시작하여 중국대륙으로 전파 되었던 것이다).

http://www.life114.info/history/samkuk/%BB%EF%B1%B9%20%BA%B0%C0%DA%B8%AE%BF%CD%20%B0%ED%B4%EB%B9%AE%B8%ED.htm 참조)


韓半島는 줄곧 독자적인 별자리를 고수해 왔으므로 高句麗 天文圖만 구하면 高句麗가 韓半島에 있었다고 간단하게 날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날조를 위해 궁궐 등을 지을 능력은 없었던 李成桂는 天象列次分野之圖 하나를 그려서 天象列次分野之圖와 百濟를 멋지게 바꿔치기한 것이다.

李氏朝鮮 초에도 高句麗, 百濟의 중심지가 있는 중국 대륙과 韓半島의 별자리 체계가 틀리고, 天文用語도 28수, 26수로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만큼 우리나라 역사서는 풍부했다. 유목국가 唐이 高句麗, 百濟 역사서를 분서하고, 거란(契丹)이 大震國 역사서를 분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화·문명의 전파

新羅에는 왜 온돌이 없고, 百濟에는 온돌이 있는가. 겨울 추위가 극심한 滿州가 百濟 영토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新羅 영토 중국 대륙 남동부는 아열대성 기후(亞熱帶性氣候)이다.

소리를 내는 화살 명적(鳴鏑)이 新羅, 伽倻는 물론이고 匈奴의 유물 에서도 발견 된다고? 鳴鏑은 百濟만 만들었다. 날조 역사 속에서 新羅도, 伽倻도 韓半島에 몰아넣고, 匈奴도 오르도스(Ordos)로 옮겨오자, 이들 나라가 다 鳴鏑을 만든 셈이 되었다. 鳴鏑이 오르도스에서 발견되는 것은 高句麗와의 전투시 百濟軍 집결지점의 하나가 漢水(黃河) 중류였기 때문이다. 新羅가 어떻게 鳴鏑을 사용할 것인가. 鳴鏑의 용도가 전투시 신호용 이므로 百濟와의 전투에서 쌍방이 똑같은 소리가 난다. 新羅와 伽倻가 싸울 때도 마찬가지다.

▲ 중국사서와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지명들의 대륙의 현존지명들

사라사(Sarasa) 염법(染法)이 인도에서 기원해 2 천년 전에 동남아를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 되었고, 북쪽으로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高句麗로 들어 왔다고? 高句麗는 중국 대륙에 있었다. 百濟도, 新羅도, 朝鮮도, 배달도 다 중국 대륙에 있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배달 개천만 기원전 3898 년이다. 그런 우리나라가 맨 먼저 옷을 해 입고, 염색을 했겠는가, 인도가 했겠는가. 印度는 朝鮮의 諸侯國 중 하나다. “대저 구한의 족속은 나뉘어 5종이 되고 피부의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었다(蓋九桓之族分爲五種以皮膚色 三神五帝本紀)." 그래서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이 수로왕(首露王)에게 시집왔던 것이다. 사라사 染法은 중국이 제 것이라 날조하지 못한 우리나라 역사의 하나다. 사라사 染法은 朝鮮에서 印度로 건너갔던 것이다.

어째서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 중 제 것이라 날조하지 못한 것이 나왔나. 우선 시간이 촉박해서였다. 문명대국 明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明 초기에 전 역사를 다 바꿔야 했다. 文明大國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역대 왕조의 찬란한 문화를 전제로 하니까. 5300 년의 역사를 뒤바꾸는 작업이다. 시간이 부족하니까, 우선 高麗 末의 상황부터 해서 正史書를 먼저 바꿨다. 복식 등은 후순위로 밀려난 것이다. 그래서 殷, 周가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殷, 周는 번듯한 옷을 입고, 우리나라가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 三國志)”을 뻔했다. 시간이 부족해서 “馬韓 사람들은 잠상(蠶桑)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馬韓在西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綿布)는 後漢書, 三國志의 기록도 고치지 못했던 것이다.

中土에는 나라가 엄청나게 많다. 文明大國에서 未開國으로 다시 文明大國으로 이행하는 것은 이상하니까, 年代를 대부분 後代로 밀어내야 했다. 우리나라에서 印度 등으로 전파된 연도 아래로 밀어 쓰다 보니까, 印度 등이 개발해서 거꾸로 도입한 꼴이 되었던 것이다. 연대를 밀다 보니까, 殷나라, 夏나라에 배당할 역사가 부족하고, 배당할 역사가 없는 堯, 舜은 理想聖代로 묘사된 것이다.

중국은 神農이 농사의 시조라고 우기지만, 中土의 토착민은 堯가 中土를 다스릴 4300 년 전에도 농사조차 지을 줄 몰랐던 미개인이다. 그래서 后稷이 우리나라에서 곡식과 과일의 종자를 가져다가, 土着民들에게 농사를 가르쳐야 했다. 그런 땅에 음식문화가 있었을 리 만무하다. 4700 년 전 慈烏支 한웅이 저 땅을 정복한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거 이주했을 당시에는 짐승이나 잡아먹고 살았다. 그래서 밥 먹는 우리나라 사람보고 모래를 먹었다고 한 것이다. 中奴의 음식문화 조차 우리 것에 기원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티벳고원이 차고 건조한 기후라서 기름진 음식으로 변했던 것이다.

티벳고원 북부에서 음식문화가 발전해 봤자, 얼마나 발전할 수 있는가. 中奴의 음식문화가 다양해진 것은 朱元璋이 華夏를 이끌고 티벳고원 북부에서 나왔을 때 부터다. 우리나라 음식에 華夏와 濊貊의 음식까지 뒤섞었으니까 다양해질 수밖에. 그래놓고는 중국의 음식문화는 오래 되었다, 秦始王의 입맛을 맞추느라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고 날조한 것이다.

밭 가운데 작은 원두막(廬)이 있고 외(瓜)가 열려 있다. 이것으로 정성껏 ‘저(菹)'를 담가 조상께 받치면, 수를 누리고 하늘의 복(祜)을 받는다(中田有廬疆埸有瓜是剝是菹獻之皇祖曾孫壽考受天之祜)”는 詩經의 저(菹)는 김치다. 中土의 음식이 아니고, 우리나라 역사를 베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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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토록이나 매료된 高句麗人의 실체는 百濟人이다. 百濟人은 당당하고 아름다웠고 자부심도 강했다. 그런데 헤이안(平安) 시대까지의 列島 倭에게서는 어째서 강인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가. 그것은 百濟軍이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戰士였기 때문이다. 원래 百濟人들은 느긋한 천성을 가진 사람들 이었다. 배달과 朝鮮이 그러했듯이.

고분 벽화에서 알려진 百濟人과 미개의 밑바닥을 기는 倭寇로 알려진 日本人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가. 百濟人을 倭奴 그리고 2차 대전 당시의 잔혹한 日本人들과 연결시킬 수 있는가. 日本이 미개와 잔혹의 밑바닥으로 추락한 것은 中國倭가 列島로 이주하고 나서 부터이다.

2) 양자강 이남에는 백제가 있었다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백제에 귀순해 왔다(後沸流薨其臣民以其地歸附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百濟는 高句麗에서 분리되면서 溫祚와 沸流가 제 몫으로 챙긴 나라를 합친 나라다. 그래서 처음부터 大帝國이었다.

高朱蒙이 長子 琉璃를 太子로 삼겠다고 하자, 소서노(召西弩 : 北夫餘의 둘째공주)는 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眞番의 사이에 이르렀다고 했다고?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 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 이러니 遠近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고? 召西弩가 땅을 산다고 해서 高句麗 영토가 아닌가. 내가 땅을 사면 대한민국 영토가 아닌가.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은 땅을 사람들이 버려두었다고?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은 땅이 외진 곳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辰韓에는 이미 新羅가 건국했다. 新羅 땅 일부를 빼앗아 百濟를 건국 하지는 않았다. 辰番 역시 교묘한 날조로 辰韓과 番韓 사이가 아닌, 馬韓이라는 뜻이다.

소서노(召西弩)를 어하라(於瑕羅)라고 책봉했다. 13 년 壬寅에 주몽제(朱蒙帝)가 돌아가셨다.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 하였는데 사방 경계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려(馬黎) 등은 온조(溫祚)에게 말하기를 '신이 듣기는 마한(馬韓)이 쇠하여 패망하게 될 것이니,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라고 했다. 온조(溫祚)가 '좋다'고 승낙하니 곧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 처음 마한(馬韓)의 미추골(彌鄒忽)에 이르러 사방 들을 가보아도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비어 있었다(召西弩爲於瑕羅及至十三年壬寅而薨太子沸流立四境不附於是馬黎等謂溫祚曰臣聞馬韓衰敗立至乃可往立都之時也溫祚曰掿乃編舟渡海而始抵馬韓彌鄒忽行至四野空無居人久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高鄒牟의 뒤를 이은 것은 琉璃였다. “13년 壬寅에 朱蒙帝가 돌아가셨다. 太子 沸流가 즉위하였다.” 사이에는 글이 빠져 있다. 필사하면서 일부가 탈락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로 탈락된 부분을 복원해보자.

13년 壬寅에 朱蒙帝가 돌아가셨다. 長子 琉璃가 즉위하자, 沸流와 溫祚가 모친 소서노(召西弩)와 함께 눌현(訥見)을 떠나왔다. 바다를 건너 고구려 남부에 나라를 세웠다. 태자 沸流가 즉위하였다.

沸流가 나라를 세울 때, 1차로 바다를 건넜고, 그후 溫祚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2차로 바다를 건넜던 것이다. 溫祚는 漢水 아래에다 河南 慰禮城을 건설했다. 따라서 여기서의 바다는 黃山江(揚子江)이다.

高句麗 영토 안에서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광활한 요충지는 남쪽(黃山江 중류 이남)과 서쪽(漢水 하류)뿐이다. 처음에는 南下했다. 黃山江 중류 이남에 나라를 세우고 沸流가 皇位에 올랐지만, 溫祚의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溫祚는 다시 黃山江을 가로질러 북상하여 3차 馬韓으로 갔던 것이다.

朱蒙聖帝 때 訥見으로 천도 했으므로 漢水(현 黃河) 하류가 더 가깝다. 어째서 沸流는 黃山江 중류 이남까지 간 걸까. 黃山江 이남 땅은 高句麗와의 국경지대가 상대적으로 좁아 高句麗를 침공하고 방어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북쪽은 대수(帶水)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半千里)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北至帶水西濱大海半千里之土境皆其有也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분명히 韓半島를 염두에 두고 축소한 것이다. 百濟 영토는 黃河 하류다. 동쪽이 큰 바다에 임했다. 三國史記에도 帶水를 건넜다고 했다. 百濟는 남쪽의 帶水에 이르렀던 것이다.

“모두 그의 것(皆其有)”은 거대한 땅을 두고 쓰는 말이다. 원래는 1 만 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모두 그의 것”라 한 것이다. 半千里로 축소할 때는 “고작 半千里의 땅이 그의 것”이라 했어야 했는데, 숫자만 고쳐서 이상한 문장이 되었다.

朱蒙聖帝는 광범위한 정복활동을 펼쳐 제후국을 정복해 高句麗 영토를 확장했다. 東夫餘와 後漢을 예속(朝鮮上古史)하고 沃沮 등을 高句麗 땅으로 편입 시켰다. 그래서 高句麗에서 분리된 沸流가 黃山江 중류 이남에, 溫祚가 漢水 하류에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만일 百濟가 高句麗 영토가 아닌, 다른 나라를 정복해 세운 나라라면, 溫祚는 新羅와 東夫餘부터 정복했을 것이다. 건국 초기라 新羅와 東夫餘는 소국이었다.

“10명의 臣下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十濟라고 하였다.”고? 세상 어느 나라가 臣下 數로 나라 이름을 정하는가. 百濟라는 이름이 백 사람이 건너 왔다는 뜻이라고? 아무리 溫祚와 沸流가 高句麗 시조의 아들이지만, 琉璃를 따르겠다고 할지도 모르는데, 군대도 없이 영토를 분할할 수는 없다. 百濟라는 말은 이미 朝鮮 초에도 있었다. 朝鮮 초, 요중(遼中)에 열두 개의 성을 쌓았는데, 그 중 하나가 百濟다(庚子築遼中十二城險瀆令支湯池桶道渠鄘汗城蓋平帶方百濟長嶺碣山黎城是也 番韓世家 上). 百濟는 배달시대 부터 우리나라 역사에 등장하는 말이 분명하다. 百은 백 번; 많다, 濟는 이루다; 이루어지다라는 뜻이다. 百濟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라는 뜻으로 지은 國號다.

“馬黎 등이 溫祚에게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는 馬韓이 쇠하여 패망하게 될 것이니, 가서 도읍을 세워야 될 때입니다’고 溫祚가 승낙하여 곧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 처음 馬韓의 미추골(彌鄒忽)에 이르렀다(馬黎等謂溫祚曰臣聞馬韓衰敗立至乃可往立都之時也溫祚曰掿乃編舟渡海而始抵馬韓彌鄒忽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해놓고 그 다음에 뭐라 했냐 하면,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살펴 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行至四野空無居人久)”는 것이다. 나라가 쇠퇴하면 백성들이 다 도망치는가. 그 無人地帶는 바로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浿帶之地肥物).”고 한 浿帶이다. 高句麗, 百濟, 新羅가 두고두고 싸웠던 우리나라 최대의 격전장이다.

◀ 다루왕 46 년 A.D.73 년 5 월그믐 … 7월말 실행 : 해질녘의 일식 입니다.

여기에서 馬韓은 나라가 아니라, 지역이다. 高句麗

◀ 백제 구수왕 9년 A.D.222년 11월그믐 일식 : A.D.223년 1월 실행 저녁(전형적인 발해만 일식이다)

영토였다. 미추골(彌鄒忽)은 黃山江과 浿水(漢水) 사이에 있었다. 高句麗의 중심지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사람들로 북적되고 있었다. 高句麗를 삼등분하기로 작정한 溫祚는 더 멀리 나아가 黑龍江 중, 하류까지 다 차지한 것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미추홀(미추골)을 반도의 仁川 내지는 아산만의 仁州로 비정하고 있다. 가슴 아픈 일이다. 언제까지 식민사관의 하늘 밑에서 만족 하려고 하는가?3)

같은 장소를 두고 앞서는, 召西弩가 “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辰番의 사이에 이르렀다(聞浿帶之地肥物衆南奔至辰番之間 高句麗國本紀).”고 했다. 浿帶, 馬韓, 辰番. 돌려가면서 마치 같은 장소가 아닌 것처럼 날조했던 것이다.

浿帶가 高句麗 영토라는 사실은 遼史地理志에서도 알 수 있다.

해주(海州)에 남해군 절도사를 두었는데, 이곳은 본래 옥저국(沃沮國)의 땅이었다. 고구려는 사비성(沙卑城)을 두었는데, 일찍이 당나라 장수 이세래(李世徠 : 李世勣의 오기인듯)가 공략한 곳이다. 발해는 남경(南京) 남해부(南海府)라 불렀다.(海州南海軍節度 本沃沮國地 高麗爲沙卑城 唐李世徠嘗攻焉 渤海號南京南海府 遼史地理志)

沙卑城은 新羅軍이 공략했다. 어쨌거나 沃沮가 沙卑城이 있는 浿水 유역에 있었던 것이다. 太白逸史 馬韓世家에서 薩水가 辰韓의 남해안이라고 한 것은 沃沮가 있었기 때문이다. 薩水 이남, 浿水 이서, 黃山江 이북이 沃沮 땅이었던 것이다.

高鄒牟가 帝位에 오른 후 맨 처음 한 일은 沃沮侯에게 나라를 바치지 않으면, 무력으로 병합 하겠다고 통고하는 것이 분명하다. 先代 沃沮侯 弗離支는 高鄒牟의 부친이다. 高弗離支는 鄒牟의 母親을 버렸는데, 高鄒牟가 北夫餘 檀帝로 즉위할 당시 沃沮侯는 高弗離支의 嫡子였다. 무엇보다 沃沮는 高句麗 황성에서 지척 이었으므로 高鄒牟는 沃沮를 존속시킬 생각이 없었다.

“朱蒙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서 大統을 이으니 이를 高句麗의 시조라 한다. 32 년 甲午(B.C. 27) 10 월 북옥저를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夫餘王無嗣朱蒙遂以王婿入承大統是謂高句麗始祖也三十二年甲午十月伐北沃沮滅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沃沮는 西沃沮, 東沃沮로 있다가, 하나가 되었다고 전술했다.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는 고진(高辰)의 손자이다(沃沮侯弗離支高辰之孫也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이 말은 高弗離支 당시에 沃沮가 하나 였음을 알려준다. 北夫餘의 제후 高弗離支가 沃沮를 분할해 자식 들에게 나눠줄 수도 없다. 沃沮侯가 나라를 보전케 해달라고 애원해서 高鄒牟가 沃沮를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했을까. 날조사에 의하면, 高鄒牟는 기원전 37 년에 즉위하고, 즉위 11 년 만에 北沃沮도 멸망 시켰다. 몇 년 있다가 멸망시킬 것을 구태여 다른 곳으로 옮기게 했겠는가. 北沃沮는 後漢을 정복한 것을 배당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나라다.

“大震國의 南京인 南海府는 본래 南沃沮의 옛 땅이다. 지금의 海城縣이 그것이다(大震國南京南海府本南沃沮古國今海城縣是也 太白逸史 大震國本紀)"에서 보듯, 薩水 이남, 浿水 이서에는 沃沮가 있었다. 海城縣이 沃沮 땅이라는 것도 거짓이다. 海城은 朝鮮의 辰韓 땅이기 때문이다.

현 武漢에는 이미 新羅가 건국해 있었으므로 溫祚는 新羅 서쪽 국경 밖에서 黃山江에 이어 浿水를 건넜다. 미추골(味鄒忽)은 사시(沙市)나 의창(宜昌)쯤 될까. 다시 帶水(淮水) 상류를 건너 漢水 유역에 이르렀던 것이다.

“河南의 땅은 북쪽이 漢水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열려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河南之地北帶漢水東據高岳南開沃澤西阻大海 高句麗國本紀)”는 韓半島를 염두에 두고 조작한 중국 역사책을 보고 베낀 것이다.

百濟가 건국한 黃河 유역은 동쪽이 큰 바다로 막혀 있고, 서쪽이 크고 높은 산(太行山脈)으로 막혀 있다. 漢水(현 黃河) 유역은 배달 개천 당시부터 天坪으로 사람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溫祚帝. 溫祚는 이름이지, 帝號가 아니다. 건국 당시부터 大國인 百濟 皇帝의 帝號조차 삭제해 버리고! 우리나라는 배달시대 부터 帝號를 사용했다. 다루제(多婁帝)에 이르면, 더욱 황당하다. 처음으로 논에서 쌀농사를 짓다(六年 春正月 立元子己婁爲太子 大赦 二月 下令國南州郡 始作稻田 三國史記 百濟本紀). 百濟의 수도가 天坪에 있었는데, 쌀농사를 안 짓고, 땅을 놀렸나. 우리나라는 배달시대 부터 쌀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농사를 지을 줄 몰랐던 中土의 미개인들이 밥을 먹고 있는 蚩尤軍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모래를 먹었다(食沙).

樂浪이 百濟의 慰禮城을 불태웠다?(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三國史記 百濟本紀) 岷江 이서와 揚子江 상류에 걸쳐 있는 樂浪이 黃河 하류까지 와서 百濟를 공격할 수 있는가. 더구나 揚子江 중류 이남에는 沸流百濟(? 原 國號는 아니다. 동시대에 百濟가 둘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 모르니까, 할 수 없이 沸流百濟라 한 것이다)가 있었다. 百濟의 慰禮城을 불태운 나라는 高句麗다.

부친 高鄒牟가 北夫餘의 帝位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北夫餘의 公主 召西弩와 혼인했기 때문이고, 자신이 高句麗 皇帝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召西弩 덕분이므로 琉璃明帝는 沸流와 溫祚가 高句麗 땅을 분할해 가는 것을 마냥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琉璃明帝의 측근들은 溫祚와 沸流가 高句麗의 옥토[西鴨綠江(嘉陵江)과 浿水(漢水) 사이를 제외하면 사막, 고원, 분지만 남겨놓고 다 가져갔다]를 다 떼어 가는데 분노해서, 百濟로 쳐들어가 慰禮城을 불태워 버린 것이다.

高句麗가 百濟의 慰禮城을 불태운 지 4 년 뒤(太白逸史에 의하면, 2 년 뒤) 는 訥見(현 洛陽)을 버리고 國內城으로 천도했다(二十二年 冬十月 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訥見이 河南 慰禮城(開封)의 지척이라 百濟가 수시로 공격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수가 매우 험하다는 國內城으로 천도한 것이다. 제사에 사용될 신성한 돼지가 달아나서 이른 땅(二十一年 春三月 郊豕逸 王命掌牲薛支逐之 至國內尉那巖得之 拘於國內人家養之 返見王曰 “臣逐豕至國內尉那巖 見其山水深險 地宜五穀 又多麇鹿魚鼈之産 王若移都 則不唯民利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也 三國史記 高句麗本紀)."이라는 소리는 遷都의 이유를 꾸며내기 위한 날조다. 國內城은 돼지가 달려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다.

國內城이 광활한 들판에 세워 졌다고? 광활한 들판 이라고 해봐야 四川盆地, 渭水盆地로 溫祚百濟 아니면, 沸流百濟에서 가깝다. 산수가 험준 하면서도 들판이 광활한 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험준하여 견고하며 산물이 풍부하면서도 교통이 편리한 곳”은 더더욱 없다. 그러니까 험준 하면서도 광활한 들판에 도읍을 정했다는 것부터 날조다. 무엇보다 百濟 땅으로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 國內城이 있을 장소는 한정될 수밖에 없다. 蓋馬大山(秦嶺山脈)이나 대파산맥(大巴山脈)에 위치했을 것이다.

琉璃明帝가 國內城으로 천도한 것은 百濟의 공격을 피하려는 목적에서였지, “檀君의 세대에 백성과 사물이 점차로 번창해 지고 교통이 더욱 요긴 해지며 또한 농사짓는 일도 따라서 점차 일어나게 되니, 그 속말(粟末) 땅을 버리고 남쪽으로 浿水의 물가로 옮겨와 후일의 융성한 운세를 도모(檀君之世 民物漸繁交通愈緊 且耕農之業 逐漸而興 則其捨粟末之地 而南遷於浿水之濱以圖後日之隆運 揆園史話 檀君紀)하려는 차원 에서가 아니었다. 농사는 배달시대 부터 지었고, 浿水에 도읍을 정한 것은 최소한 神人王儉 때부터다. 적어도 2323 년이나 연대를 밀어낸 날조기사다.

琉璃明帝에 이르러서야 鴨綠江 이북까지 차지하고, 東川帝에 이르러서는 浿水 이북까지 차지했다고 날조 했으면서 琉璃明帝 22 년(太白逸史는 19 년)에 옮긴 國內城이 어떻게 浿水에 위치할 수 있는가. 어쨌거나 날조사라도 뭔가를 기준으로 삼아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柴達木盆地의 남쪽에 있던 白山을 韓半島의 太白山으로 날조했으니까, 粟末의 땅을 버리려면, 東鴨綠江 이남으로 천도해야 한다.

乙卯 원년 (B.C. 6) 봄 정월에 왕은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국교를 청하여 왕자를 인질로 삼고자 하였다. 고구려의 열제(琉璃明帝)가 태자 도절(都切)로써 인질을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매 왕이 화를 내었다. 겨울 10 월 병력 5 만을 이끌고 가서 졸본성(卒本城)을 침략 하였으나 큰 눈이 와서 많은 동사자만 내고는 퇴각하였다. 癸酉 19 년(A.D. 13) 왕은 고구려를 침략 하였는데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자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乙卯元年春正月王遣使高句麗請交質子高句麗烈帝以太子都切爲質都切不行王恚之冬十月以兵五萬往侵卒本城大雪多凍死乃退癸酉十九年王侵攻高句麗至鶴盤嶺下遇伏兵大敗 太白逸史 迦葉原夫餘紀) (十四年 春正月 扶餘王帶素遣使來聘 請交質子 王憚扶餘强大 欲以太子都切爲質 都切恐不行 帶素恚之 冬十一月 帶素以兵五萬來侵 大雪 人多凍死 乃去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東夫餘(迦葉原夫餘)는 北夫餘의 제후국 이었다. 高句麗로 바뀌자, 高鄒牟의 침공을 받고 高句麗의 속국이 되었다(廣開土境大勳跡碑). 대소(帶素)가 高句麗를 침입할 수 없는 것이, 先王 금와(金蛙) 때의 기사를 보면, “甲戌 원년(B.C. 47) 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특산물을 바쳤다(甲戌元年王遣使高句麗獻方物 迦葉原夫餘紀)”고 했다. 東夫餘가 朝貢國이라는 얘기다. 고작 淮水 유역의 東夫餘가 東아시아 태반을 차지한 高句麗를 침공 한다는 것은 멸망 하겠다는 얘기다. 東夫餘의 역사라고 나와 있는 이 글 역시 百濟와 高句麗의 전투다.

기원전 6 년 봄 정월에, 百濟 皇帝는 國交를 請하면서 王子를 人質로 달라고 한 것이다. 琉璃明帝는 아직도 미안해서인지, 형제의 우애를 찾고자 해서인지 太子를 인질로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都切은 자신이 百濟로 가면 더욱 저자세로 일관할 수밖에 없어 거절했다.

날조사에서 北燕으로 알려진 黃龍國 역시 百濟다. 그래서 都切이 죽고 나서 太子가 된 해명(解明)이 百濟 사신에게 결례를 범하자, 高句麗 皇帝가 사과까지 했던 것이다. 解明을 초대해서 죽이려 한 것도 溫祚였고, 마음을 바꾸어 돌려보낸 것도 溫祚였다. 解明이 비범해서 살려 보낸 것이 아니고, 溫祚가 解明의 숙부라서 차마 죽이지 못했다. 치희(雉姬)가 漢나라 여자? 과연 琉璃明帝가 지지리도 미개한 속국의 여자를 아내로 삼았을까. 雉姬는 百濟人이었다.

기원전 6 년 겨울 10 월 침략 했다가, 큰 눈이 와서 많은 凍死者만 내고는 퇴각한 것도 百濟다. 이 당시 高句麗의 수도는 訥見(현 洛陽)으로, 琉璃明帝가 國內城으로 遷都하기 전이다. 卒本城은 우리나라 대대로 皇城 이므로 공격할 가치는 충분했다. 생포할 사람도 많고, 파괴할 건축물도 많았을 테지만, 訥見이 百濟 영토에서 더 가깝다. 그래서 琉璃明帝가 기원후 3 년, 산수가 험하고 百濟에서 멀리 떨어진 國內城으로 천도한 것이다. 그 동안 訥見을 많이 파괴해서 공격대상을 바꾸었을 수도 있지만, 黃山江 이남의 沸流百濟의 침공일 가능성이 높다. 癸酉 19 년(A.D. 13), 溫祚帝는 또다시, 高句麗를 침략했다가 대패했다.

22 년(壬午) 2 월 高句麗가 침공한 나라 역시 東夫餘가 아니고 百濟다. 진흙탕을 만나 皇帝의 말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이 괴유(怪由)가 살해 했는데, 溫祚帝는 28 년에 붕어 했다고 하니까, 연도가 맞지 않는다. 沸流가 전사하자,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沸流百濟의 영토를 가지고 溫祚에게 왔던 것이다.

百濟가 浿水 유역과 黃山江 중, 상류 이남을 차지했기 때문에 嘉陵江 이서를 차지할 수 있었다. 黃山江 중, 상류 이남이 百濟 영토가 아니라면, 百濟軍이 다른 나라를 통과해 遼西로 이동해야 했다는 소리다. 무장 병력을 자국 영토 내에 들여 놓으면, 百濟軍이 黃山江 이남까지 정복할 것이 아닌가.

이 글 제목이 ‘天文記錄으로 찾은 韓國史’지만, 그것은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를 보고 韓國史를 쓰기로 결심한 데서 붙인 것이고, 사실 天文記錄이 없어도 우리나라의 疆域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長城의 형태를 보면, 대립하는 두 나라가 쌓았다. 小國 新羅가 건국 초기부터 高句麗나 百濟와 대립할 수는 없는 일이고, 長城의 동서로 있던 나라는 高句麗와 百濟로 결정된다. 長安城과 西鴨綠江, 浿水는 독특한 지형 이니까. 高句麗가 서쪽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면, 자연히 百濟의 위치도 드러난다. 黃河 유역에는 新羅와 伽倻가 들어갈 자리가 없으니까, 揚子江이 黃山江으로 결정되고, 현 黃河는 자연히 漢水가 된다. 지난 글 ☞ 지명을 옮길 수는 있어도 지형은 바뀌지 않는다 참조

百濟는 遼西도 차지 했으니까 揚子江 이남에도 땅이 있어야 한다. 百濟도 黃山江 이남을 가졌으니까, 新羅와 伽倻의 위치도 밝혀진다. 천문관측 기록의 가치는 우리나라가 東아시아를 차지 했다는 결정적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단고기가 공개된 직후에는 植民種族들이 훔쳐간 韓國史의 복원이 가능했다.

百濟가 黃山江 이남을 차지했기에 “倭人은 百濟의 보좌(倭人百濟之介也 高句麗國本紀)"가 될 수 있었다. 왜(倭)는 연(燕)에 속한다(倭屬燕). 山海經의 원문은 “倭는 百濟에 속했다(倭屬百濟)”였다.

그렇다면 東夫餘는 大武神烈帝에 의해 멸망하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廣開土境大勳跡碑를 보면, “영락 20 년(410) 庚戌年, 東夫餘는 옛날 鄒牟王의 속민 이었다. 속민 중에 반란을 일으켜 조공을 하지 않았다. 임금이 몸소 이끌고 가서 군을 쳤다. 군사가 여성(餘城 : 夫餘城?)에 이르러 廣開土大王의 은혜가 널리 곳곳에 퍼졌다[甘年 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城國駭□(服)□(獻)□(出)□□□□□□ 王恩普□(覆)]”고 했다.4)

朱蒙聖帝 때의 속민(東夫餘는 우리민족의 국가다. 高句麗의 일부로 병합 시켰다면, 住民이라 하지, 屬民이라 하지 않는다. 속민이라 한 것은 東夫餘를 정복하긴 했어도 國體는 보존케 했다는 의미다)이라는 말은 나오지만, 가장 중요한 大武神烈帝 때 멸망 시켰다는 말은 없다. 廣開土境大勳跡碑를 날조한 李氏朝鮮 初에는 아직 百濟의 전투를 東夫餘에 배당하지 않은 것이다.

◀ 호태왕비(好太王碑) : 지안(集安)에 위치한 가짜 廣開土境大勳跡碑

廣開土境好太皇도 東夫餘軍을 쳤다는 말은 나오지만 멸망 시켰다는 말은 없다. 浿水 유역은 三國이 나눠 갖고 있었다. 高句麗는 상류, 百濟는 중류, 新羅는 하류를 차지했다. 淮水 유역에 있던 東夫餘는 百濟와는 南과, 西로, 新羅, 伽倻와는 北으로 접했지만, 高句麗와는 영토를 접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廣開土境好太皇이 東夫餘를 멸망 시켰다면, 남 좋은 일을 했다는 뜻이다. 百濟 영토가 될 수는 있어도 高句麗의 영토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高句麗가 浿水 중류도 차지하지 않았겠냐고 물을 수 있지만, 嘉陵江 이서와 揚子江 중류 이남이 百濟 영토다. 百濟가 浿水 중류를 상실 했다는 것은 嘉陵江 이서와 揚子江 중류 이남도 상실 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들 영토는 504 년에 이르러서야 高句麗에 귀속된다. 자국 영토 내에 무장한 적군 병력을 통과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 浿水 중류는 廣開土境好太皇 당시에도 高句麗의 영토가 아니었다. ‘廣開土’란 帝號는 모든 나라를 高句麗의 발 아래 두었다는 말이지, 高句麗의 영토로 삼았다는 말은 아니다.

朱蒙聖帝 때도, 大武神烈帝 때도, 廣開土境好太皇 때도 東夫餘를 멸망시킨 것이라면, 같은 나라를 두고 무려 4 번이나 멸망 시켰다는 얘기다. 高句麗는 百濟에게서 浿水 유역을 빼앗기 전에는 東夫餘를 멸망시킬 수 없다. 395 년에 高句麗와 百濟가 浿水에서 싸웠을 수는 있으나 百濟가 浿水 유역을 상실한 것은 훨씬 뒤다. 高句麗가 浿水 중류를 획득 했다는 것은 百濟가 遼西와 黃山江 이남을 전부 상실 했다는 의미다. 遼西조차 文咨好太烈帝 12 년에 高句麗 땅이 되었다.

그러나 百濟와의 전투를 東夫餘에 배당하자, 東夫餘는 멸망해야 했고, 있지도 않은 復興運動까지 일어나 廣開土境好太皇 때 완전히 멸망 했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늘어놓은 것이다. 갈사국(曷思國) 따위는 존재 하지도 않았다. 地名을 國名으로 바꾼 예다. 解明이 黃龍國 사신에게 결례를 범했다는 얘기가 黃龍國 역사의 전부다. 北燕을 黃龍國이라 불렀지만 시차가 4 백년이 넘는다(北燕은 409 년에서 438 년까지 존재한 나라다. 朝貢은 宋에 바치고 宋으로부터 관작까지 받았는데, 北魏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자, 高句麗로 도망치고! 상식적으로 大帝國 高句麗에 朝貢하고 관작을 받고, 首都가 함락되면 지척의 宋으로 도망쳐야 하는 것 아닌가). 高句麗를 위협한 黃龍國은 가상의 나라였던 것이다.

小國으로 출발 했다고 날조한 高句麗와 百濟가 건국 당시부터 하도 자주 싸우다 보니까, 중국으로 둔갑시켜 싸우게 한 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나라까지 만들어 싸우게 해야 했고, 나라를 멸망시키고 또 재건 시켜야 했던 것이다.

琉璃明帝는 형제들과 맞서 싸우는 대신, 깊숙한 곳으로 遷都한 인물이다. 그러한 부친을 보면서 琉璃明帝의 아들들은 반발했다. 琉璃明帝는 자신을 이해 못하는 아들이 야속했다. 그래서 홧김에 죽어 버리라고 한 것인데, 解明은 자신이 죽어 아버지가 달라진다면 하고 정말 자살해 버렸다. 세 아들[都切, 解明, 여진(如津)]을 앞세우자 琉璃明帝도 슬픔 속에서 죽어갔다.

그런 형제들과 부친을 지켜본 무휼(無恤)은 즉위하자, 수비에서 적극적인 공격으로 전환했다. 大武神. 큰 전쟁의 神이라는 帝號는 百濟(혹은 樂浪)와의 싸움에서 얻은 칭호다. 沸流를 죽였지만, 혼전이라 大武神烈帝도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沸流百濟는 자신들의 皇帝를 죽인 高句麗가 아니라, 百濟에 나라를 바쳤던 것이다.

高句麗人과 百濟人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같은 나라 사람들 이었지만, 모시는 皇帝가 달라졌기 때문에 원수같이 싸워야 했다. 高句麗 皇帝와 百濟 皇帝의 관계는 처음부터 남보다 못한 血族이었다. 원래 작은 것은 쉽게 양보해도 큰 것은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심리라고 한다. 느닷없이 나타난 琉璃가 東아시아 땅 대부분을 가져갔으니까, 溫祚와 沸流는 원한에 사무친 것이다. 그것이 7 백년을 이어졌다.

柳花 夫人은 왜 끝까지 東夫餘에서 살다가 죽었는가. 柳花 夫人은 高弗離支의 정식 부인이 아니다. 朱蒙과 같이 산다면, 그 사실이 계속해서 입에 오르내릴 테고, 高句麗 皇帝인 아들이 곤란해 질까봐 東夫餘에 머물렀던 것이다.

온달(溫達) 전설은 실은 高鄒牟의 실화를 각색한 것이다. 溫達이 平岡公主와 혼인하여 平岡上好太烈帝(平原帝)의 부마가 되자, 高鄒牟의 실화를 살짝 바꾼 것이 人口에 膾炙됐다. 東夫餘를 도망쳐 나온 高鄒牟는 궁술대회에서 1 등을 하고 北夫與의 高無胥 檀帝를 알현한 자리에서 자신이 高弗離支의 아들 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檀帝는 高鄒牟를 장군으로 임명 했는데, 독립 하려는 제후국들을 연이어 평정하자, 자신의 딸과 혼인 시켰다. 高句麗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로 平岡上好太烈帝 이전에는 平民의 출세길이 차단되어 있었다. 平岡上好太烈帝는 大貴族들을 누르기 위해 평민 중에서 능력 있는 자를 가려 뽑아 자신의 세력으로 키웠는데, 그 중 에서도 특히 출중한 능력을 가진 溫達을 附馬로 삼은 것이다.

高句麗, 百濟가 건국 당시부터 수도 없이 전투를 한 대제국이라고 하면, 百濟의 高句麗 침략을 중국의 高句麗 침략으로 바꿀 수 없다. 한 번도 우리나라를 침략하지 못한 중국은 어떤 나라인가. 우리나라 속국이다. 속국 중에서도 보잘 것 없는 속국. 그것이 중국이다.

樂浪, 東夫餘 등 여러 나라의 침입을 받는, 볼모까지 보내는 高句麗는 절대 大國이 아니라는 날조도 가능해진다. 실상 高句麗는 도시국가에서 출발 했다고 날조 당했다. 百濟의 高句麗 침략을 뒤로 늦춘 것도 百濟는 小國 高句麗마저 침입할 수 없는 더욱 작은 小國 이라고 날조하기 위해서다.

沸流가 죽고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後沸流薨其臣民以其地歸附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해 오자, 百濟의 영토는 일시에 揚子江 이남에서 黑龍江 너머 까지로 확대 되었다. 高句麗가 ”南으로는 百濟에 인접했다(高麗者其地 東至新羅 西遼水二千里 南接百濟 北隣靺鞨千餘里)“는 周書, 北史의 기사는 高句麗가 발해만 위쪽에서 百濟와 접했다는 것이 아니라, 黃山江을 경계로 南으로 百濟와 접하고 있다는 말이다.

“북으로는 말갈과 1 천리에 걸쳐 인접해 있다(北隣靺鞨千餘里 周書)”는 거짓말이다. 靺鞨은 高句麗 영토 안에 있었던 高句麗의 속민이다. 날조하지 않고 넘어간 대목은 없다. 周書는 周나라의 史官이 기록하여 모아놓은 史書고, 北史는 唐 때 쓴 책이라는데, 물론 다 거짓말이다. 周書, 北史 등은 朱元璋이 黃河 이남을 차지하기 전에는 존재 하지도 않은 책이 분명하다. 周나라에 史官이 어디 있는가. 周나라는 티벳고원 북부 동쪽을 백여 개의 나라가 분할할 당시, 그 땅의 한 줌을 차지하고 있었다.

“百濟王은 곤핍해서 남녀생구 일천인과 세포 천필을 내어 헌납하였다(而殘王因逼獻□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廣開土境大勳跡碑)"? 李成桂는 皇帝가 아니라, 王에 불과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皇帝를 모두 줄줄이 王으로 격하시키고, 역사를 날조해야 했다.

百濟는 東아시아 제1의 大國이었다. 百萬의 군대를 보유한 상태에서 廣開土境好太皇에게 패했던 것이다. 全盛期 때 百濟 영토는 嘉陵江 이서에서 黃山江(揚子江) 중, 상류 이남, 漢水(黃河) 하류와 동북아다. 中土의 齊, 魯, 吳, 越, 燕 지역까지 지배하고 있던 百濟다. 百濟軍이 廣開土境好太皇이 이끄는 高句麗軍에게 패한 것은 한 마디로 지켜야 할 영토가 너무나 광대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高句麗는 西鴨綠江과 浿水 사이만 수비했던 것이다.

▲ 백제의 공격 루트

百濟皇帝는 곤핍한 것이 아니라 너무도 부유해서 헌납할 것도 많았다. 百濟 皇帝는 이 당시 세계 최고의 부자였다. 그래서 百濟는 廣開土境好太皇에 패한 이후로 막대한 수탈을 당하고 있었다. 여산릉(驪山陵)과 8 천의 병마용(兵馬俑)을 만든 것도 百濟의 자원과 인력이다. 그런 百濟를 小國으로 날조한 것은, 우리나라를 韓半島로 축소하자, 百濟가 들어갈 자리가 韓半島 남부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東아시아 끝에서 끝까지를 영토로 가진 百濟가 궁궐 하나 짓는다고 국력이 바닥날 수 있는가? 순수창작은 없다는 점에서 궁궐 하나 짓고 국력이 바닥난 것은 中土에 있는 宋의 廢王(徽宗)이거나 北魏의 獻文王(拓跋弘)이다.

물론 百濟는 高句麗의 속국이 아니었다. 百濟와 高句麗는 영토 면적은 비슷 하지만, 高句麗 영토는 사막이나 고원, 분지가 대부분이다. 살만한 땅이라고는 黃土高原 이남의 西鴨綠江(嘉陵江)과 浿水(漢水) 사이 뿐이다. 우리나라는 속민이 아닌데 부풀려서 속민이라고 하지 않는다. 또 高句麗를 능가하는 强大國 百濟를 정복하는 것이 더 큰 업적이 된다. 新羅는 百濟 영토 너머에 있기 때문에 百濟를 정복하지 않고서는 高句麗의 속민으로 삼을 수도 없다. 원래 廣開土境大勳跡碑에는 百殘新羅舊是屬民이라 새겨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비가 오랫동안 풀숲에 묻혔다가 최근에 영희(榮禧)가 이를 발견 하였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주몽) 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중국인들이 모두 도부(刀斧)로 쪼아내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도리어 생겨나서 진적(眞的)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된 사실이 첨가된 것 같습니다(조선상고사 신채호)

진짜 廣開土境大勳跡碑는 없애고, 李成桂가 날조사에 맞춰 가짜 廣開土境大勳跡碑를 새겼다. 그 내용조차 마음에 안든다고 깎아내고 회칠했던 것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가짜 廣開土境大勳跡碑에 매달려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대륙이 우리나라 땅이라는 사실만 밝혀지면, 倭奴의 任那日本府가 들어설 자리는 절로 사라진다. 그런데 어째서 이 땅의 사학자들은 허구한 날 중요하지 않은 문제만 찾아서 헤매는지 모르겠다.

“新羅國은 ......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서 끝나고 西로는 百濟와 접했으며 北으로는 高句麗가 있다(新羅國…本弁韓之苗裔 其國在漢時樂浪之地 東及南方俱限大海 西接百濟 北隣高麗 東西千里 南北二千里 舊唐書)”. 新羅의 동쪽은 東中國海, 남쪽은 南中國海가 있었다. 揚子江 이남 에서는 西로 百濟와 접하고, 揚子江 이북 에서는 百濟 영토 너머로 高句麗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날조가 빠지지 않았다. “동서로는 천리이며 남북으로는 2 천리다(東西千里 南北二千里)”? 신라의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서 끝난다고 했으니까, 倭도 섬으로 내몰고 伽倻도 멸망시킨 직후의 상황이다. 현 武漢에서 南中國海 까지가 2 천리? 東西로도 2 천리가 넘는다.

百濟의 영토가 浿水 유역에서 高句麗, 新羅 사이에 끼어 있었다. 嘉陵江 이서와 揚子江 중, 상류 이남도 百濟 영토였다. 揚子江 이북 에서는 高句麗 영토의 동쪽에 新羅 영토가 있고(東至新羅 周書, 北史), 揚子江 이남에서는 新羅 영토 서쪽에 百濟도 있었(西接百濟 舊唐書)던 것이다. 三國의 영토가 개의 이빨처럼 얽혀 있었다(犬牙相制)는 高麗圖經의 기록이 실감 나는가.

百濟는 揚子江 이남에, 高句麗는 揚子江 이북에 있으면서 대립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高句麗는 北朝 文化, 百濟는 南朝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했다”고 가르친다. 바다를 건너지 않고서는 百濟가 遼西도 정복할 수 없다더니, 바다 건너 중국의 문화가 韓半島 百濟에 영향을 주는 것은 가능하다고 한다.

三國의 服飾

우리 역사를 훔친 중국에서는 우월한 漢族文化가 정복자 유목민족으로 전수 되었다고 날조한다. 실제로는 中土의 토착종족은 정복민보다 하나 나을 것 없는 미개종족이다. 그래도 복식은 북방 유목민의 간편한 복식을 도입했다고 했다. 죽어라 싸우는 것이 일이었던 高句麗와 百濟다. 전투에 적합한 복식으로 발전하는 것은 당연하다.

高句麗와 百濟는 하나의 나라를 분할했는데, 문화가 달라봤자, 얼마나 다를 것인가. 그래서 중국의 토착 문화와 정복민의 문화가 필히 융합 되어야 했던 것이다.

춘추전국 시대에는 봉건질서가 붕괴되고 각국이 잇달아 군국주의를 실시하며 부국강병 정책에 힘을 쏟으면서 북방민족의 가볍고도 몸에 맞는 기마복식이 중원에 전래되었으며, 이는 한족과 호족의 복식 사이에 일어난 최초의 융합으로 기록된다.

오호(五胡)가 중국을 어지럽히던 남북조시대는 정치적 암흑기요 혼란기였으나 예술과 종교 방면에서는 오히려 눈부신 성취가 있었는데, 이는 한족(漢族)과 호족(胡族)의 복식에 있었던 두 번째의 대융합이라 할 수 있다.

호인(胡人)과 혈연관계를 가진 이연(李淵) 일가가 당(唐)으로 천하를 통일하자 북조의 귀족자제들의 상당수가 당의 대신이 되었다. 중국의 전통적인 예의나 사상에 대한 구속력이 비교적 약하고, 국세가 강성해져 외국과의 내왕이 빈번해지자, 당의 복식은 마침내 중외의 한복과 호복을 함께 받아들여 더욱 참신하고 아름다워졌을 뿐만 아니라 대담해지고 국제화 되었다.

송인(宋人)은 유학, 도가, 불교의 세 사상을 융합하여 이학을 이루었고, 문학, 사학, 시, 사의 각 방면에서 찬란한 업적을 거두었다. 복식에서는 하늘이나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 의식 때 입는 예복은 화려한 기품을 추구하는 한편, 일상복은 간단하고 소박하였다.

(http://www.anseo.dankook.ac.kr/~ahns/cul-67.html, 중국의 복식사)

정치적 암흑기요 혼란기에는 예술과 종교방면의 눈부신 성취는 고사하고 발전도 없다. 정치적 암흑기요 혼란기에는 경제마저 쇠퇴해서 문화가 발전할 여력마저 사라지는 것이다. 中土에 백 나라가 들어서서 싸울 때, 미개의 나락으로 추락했다.

◀ 貫頭衣の倭の婦人 : 밑의 치마는 연출임

중국이 아니라, 우리나라 복식에 대한 설명이다. 다만 春秋戰國 時代가 아니고, 高句麗, 百濟가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을 당시다. 五胡가 중국을 어지럽히던 시대(?)는 新羅까지 가세한 이른바 三國時代라 불리는 시기다. 新羅가 성장 하면서 新羅의 服飾도 참신하고 아름다워졌을 뿐만 아니라 대담해지고 국제화 되었던 것이다. 新羅의 屬國 唐은 복식마저 新羅의 것을 그대로 따랐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복식은 풍성하고 많이 겹쳐 입는 것이 특징이므로 가난한 唐의 피지배층 까지 우리나라 복식으로 바꿀 여력은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다(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 宋은 高麗 時代에 대한 설명이다.

중국이 광활한 대륙과 유구한 역사, 다양한 민족 구성으로 인하여 각 민족의 풍습이나 思想, 慣習이 服飾生活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그 좁디좁은 中土마저 정복민이 차지하고 남은 손바닥만 한 땅에서 명맥만 유지해야 했다.

유구한 역사 동안 우리나라의 지배를 받아왔다. 고작 이룬 문화라고는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 三國志)”는 것과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고, “遊女도 많고, 男女가 들에서 함부로 野合을 하며 냇물에서 親分을 가리지 않고 함께 沐浴하고, 父母와 자식이 한 방에서 자”는 것뿐, 그 어떤 文化도 中土에서 일어난 적이 없다. 다양한 민족구성은 맞다. 언제나 침입자들과 유전자를 섞었으니까. 그런데 좁은 땅, 유구하지 못한 역사, 다양한 민족구성마저 복식생활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中土의 풍습이나 사상, 관습은 모두 우리나라의 풍습, 사상, 관습을 그대로 베낀 날조 역사다.

중국 대륙의 문화를 이끈 우리민족은 三國 時代 이전에 벌써 한족(漢族)이라는 자각으로 單一化된 종족이다. 라이프 2차 대전은 중국계 유전자 25.8 %와 아이누族 유전자 4.8 %에 기타 세계 각국의 유전자가 섞인 日本도 單一民族 이라고 단언했다. 單一民A族이라 해도 우리나라가 각 시대에 따라 같은 명칭의 복식 이라도 색채나 형태에 있어서 각각의 특징적인 美意識을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梁書에는 晉나라(265~ 316) 때 百濟가 遼西에 있었다(晉世句驪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고 했지만, 晉나라 훨씬 이전부터 504 년까지 東아시아 끝에서 끝까지가 百濟의 영토였다. 여기에 티벳고원 북부의 吳, 越, 燕, 齊, 魯 지역까지 다스렸다. 百濟의 전성기는 4 세기 까지였던 것이다. 392 년 高句麗에게 漢水 이남의 10 여 성과 관미성(關彌城)을 빼앗길 때 까지가 百濟의 全盛期였다.

百濟皇帝는 東西의 두 城에 거처한다(百濟 扶餘之別種 東北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 北高麗 其王所居 有東西兩城 舊唐書). 百濟는 沸流百濟와 합쳤을 때부터 皇城이 두 개였다. 沸流百濟도 열성적으로 高句麗 침공을 감행했다. 그러므로 首都가 黃山江 유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될 수 없다. 장사(長沙)로 추정된다. 두 개의 수도를 百濟는 南京, 北京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百濟가 교역했다는 분황국(芬皇國 : 캄보디아)은 百濟 땅 아래 있고, 印度도 육로로 갈 수 있다. 百濟 향로에 코끼리, 원숭이 장식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372 년 高句麗에 佛敎를 전한 순도(順道)는 百濟人이다.

三國史記에는 高句麗 武烈帝 3 년(A.D. 55), 遼西 지역에 10 城을 쌓아 漢나라 군사에 대비했다(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三國史記)는데, 희한하게도 高句麗는 漢나라가 아니라, 百濟에게 遼西를 빼앗겼다. 줄줄이 모든 중국 역사책이 遼西가 百濟 땅이라고 했다. 梁書와 南史에도 百濟가 遼西와 晉平 2 郡을 차지하고 百濟郡을 설치했다(其國本與句麗在遼東之東千餘里 晋世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南史 百濟傳)고 했다. 宋書에는 “高句麗가 遼東을 다스렸고 百濟는 遼西를 다스렸다(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 宋書 百濟傳).”고 했다.

漢나라가 遼東은커녕 遼西를 차지했다는 기사도 없다. 원래 衛滿朝鮮이 遼西에 있었으니, 날조 漢四郡도 遼西에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욕심이 너무 지나쳐 番韓을 辰韓에 포개 버리자, 漢四郡의 위치도 遼西인지 遼東인지 애매모호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학자들은 漢四郡은 껍데기뿐 이었다느니, 이름만 漢四郡이고 실질적으로 우리민족이 지배 했다느니, 漢四郡 중 일부는 몇 년 존속하다 망했다느니, 거센 저항을 받아 몇 차례에 걸쳐서 위치를 옮겨 다녀야 했다느니 하면서 헤매왔던 것이다. 實史에서 漢나라는 朱蒙聖帝 때 정복되어 屬國이 되었다. 그래서 중국이 가짜 廣開土境大勳跡碑를 혈안이 되어 깎아냈던 것이다.

沸流가 黃山江 중류 이남을, 溫祚가 漢水 하류 유역에서 黑龍江 중, 하류 까지를 차지하자, 인구 밀집지역은 高句麗에서 다 떨어져 나갔다. 黃山江 이남의 沸流百濟까지 溫祚에게로 넘어가자, 百濟는 遼西와 접하게 되었다. 高句麗는 시베리아를 갖고 있었지만, 溫祚조차 탐내지 않던 혹독한 추위에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다. 高句麗 武烈帝(날조사의 太祖王)는 東아시아 제1의 강대국 百濟의 군대에 대비하기 위해 遼西에 10 城을 쌓았던 것이다. 10 城까지 쌓았지만 결국 百濟에게 遼西(嘉陵江 以西) 즉 티벳고원 남부를 빼앗겼다.

宋書에는 “백제가 요서를 다스렸다(百濟略有遼西)”고 했다. 梁書와 南史5)에도 百濟가 遼西와 晉平 2 郡을 차지하고 百濟郡을 설치했다(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고 했다. 三國史記에는 百濟는 全盛期에 백만이 넘는 대군으로 吳, 越, 燕, 齊, 魯 지역을 장악 하였다(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三國史記 列傳 第6 崔致遠傳)고 했다. 遼西와 晉平 2 郡은 吳, 越, 燕, 齊, 魯의 땅이 아니다. 遼西와 晉平 2 郡은 티벳고원 남부이고, 吳, 越, 燕, 齊, 魯는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다.

◀ 안악 3호분의 동수묘 벽화 : 안악 3호분은 대동강 하류에 존재하고 있는데 평양지역에 있는 고분 중 가장 이른시기의 것이다. 안악 3호분의 벽화의 주인공, 즉 무덤의 주인공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그는 부채를 들고 모자를 쓰고 있는데 그 모자가 중국에서 쓰는 관의 형태라고 한다. 그래서 주인공의 정체에 대해 많은 논란이 일고 있지만 이는 백제관리였던 동수의 무덤이다. 또한 벽화 중에 여성이 머리를 위로 틀어올린 그림이 있는데 이 또한 중국식 머리형태이다. 그리고 명문에서도 중국의 관직 이름이 거론 되지만 당연히 백제의 관직명이다.

遼西를 침입한 燕이나 吳, 越, 齊, 魯 역시 그 초라한 中土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百濟가 차지한 땅은 淮垈 상류 너머에도 있었다. 百濟는 한때 티벳고원 북부의 이른바 中原을 상당부분 잠식했던 것이다.

吳, 越, 燕, 齊, 魯는 中土가 黃河 이남으로 확대 되면서 현 黃河와 揚子江 하류로 옮겨왔다. 그래서 吳, 越, 燕, 齊, 魯를 지배한 百濟가 중국 대륙 동부 전체로 진출한 셈이 되었던 것이다.

百濟가 南朝를 지배했다고? 三國史記와 太白逸史는 구체적으로 百濟가 지배한 땅을 언급하고 있다. 과거 吳, 越, 燕, 齊, 魯의 땅이었던 지역이다(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三國史記). 吳, 越, 燕, 齊, 魯가 中土 남부에 있었다면, 怒江의 연장선 이남에 있었다는 소리다. 揚子江은 큰 강이라 건너기가 쉽지 않아서 南朝, 北朝의 경계선이 된다6)고 하지만, 怒江의 연장선이 장애물이 될 수 있는가.

원래 대륙에는 南朝니, 北朝니 하는 말이 없었다. 三國史記와 太白逸史에 百濟가 중국 南朝를 다스렸다고 하지 않고 吳, 越, 燕, 齊, 魯를 다스렸다(先是百濟以兵平定齊魯吳越之地 太白逸史)고 한 것은 그 당시 대륙에는 南朝니, 北朝니 하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吳, 越, 燕, 齊, 魯는 대륙 남부에 없었다. 西部에 있었던 것이다. 중국 대륙의 南朝는 百濟였고, 北朝는 高句麗였다. 우리나라 역사를 용어까지 다 베꼈던 것이다.

後漢 이후 隋(隋, 唐은 新羅의 屬國이다) 이전까지 중국과 했다는 高句麗의 전쟁은 전부 百濟와의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중국과는 전쟁이 없었다면서 百濟는 吳, 越, 燕, 齊, 魯를 屬國으로 거느리고, 高句麗는 유목민 국가를 屬國으로 거느릴 수 있었는가. 後漢은 高句麗의 屬國이었다.

後漢이 망하고 魏, 蜀, 吳(소위 날조사의 삼국시대로 三國志의 무대)가 서자, 百濟가 中土로 쳐들어갔다. 百濟軍이 온다는 소리에 魏, 蜀, 吳의 王이 미리 도열해 있다가, 百濟의 屬國이 되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西晉, 東晉, 宋, 齊 때에도 그대로 百濟의 屬國으로 있었다. 캐시미르(Kashmir)를 통해 中土로 침입한 유목민은 朝鮮時代 부터 우리나라의 속민이었다. 高句麗軍을 기다리지도 않고 高句麗로 사신을 보내 中土에 나라를 세웠다고 앞으로도 변치 않는 屬國이 되겠다고 알려왔던 것이다.

高句麗와 百濟의 전쟁은 대개 華夏가 高句麗를 침공한 전쟁이나 中土 내부의 전쟁으로 날조되었다.

우리나라 역사를 韓半島와 그 이북으로 축소 하면서 百濟를 韓半島 남부에, 高句麗를 韓半島 북부에 집어넣은 이유는 百濟가 南朝이고, 高句麗가 北朝였기 때문이다. 新羅는 揚子江 이남의 百濟 옆에 있었다. 韓半島 남부를 新羅와 나누다 보니까, 百濟의 전력은 확실히 高句麗보다 약했다고 날조해야 했던 것이다. 더구나 華夏族이 세운 나라는 南朝라 했으니까, 百濟는 高句麗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歷史를 掠奪 당해야 했다.

高句麗 王만 백라관(白羅冠)을 썼다(唯王五綵 以白羅爲冠 白皮小帶 其冠及帶 咸以金飾 官之貴者則靑羅爲冠 次以緋羅 揷二鳥羽 及金銀爲飾 舊唐書)? 百濟 侯王인 列島의 倭王도 면류관(冕旒冠)을 썼다(일본문화사, 홍윤기). 白羅冠을 쓴 것은 高句麗 皇帝도, 百濟 皇帝도 아닌, 百濟의 관리였다. 안악 3 호분의 주인공인 冬壽도 벽화에서 白羅冠을 쓰고 있고, 그 안에는 흑색 책으로 머리를 묶었다.

중국 대륙의 南朝를 中奴의 南朝로 바꾸자, 百濟 皇帝의 冠마저 中奴가 차지하고, 百濟 皇帝는 쓸 冠조차 없어졌다. 그래서 百濟 관리 중 한 직책이 쓰는 冠을 百濟王도 아닌, 高句麗王의 冠이라 날조한 것이다. 高句麗 皇帝의 冠도 유목민이 세운 나라에 배당됐던 것이다.

百濟가 다스렸던 吳, 越, 燕, 齊, 魯 지역(토착민)이 百濟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中土의 정복민(이민족)은 高句麗의 영향을 받았다. 中土의 南朝(?)는 百濟에, 北朝(?)는 高句麗에 견한사(遣漢使)를 보냈던 것이다.

中土의 北朝(?)를 세운 종족들이 누구인가. 유목민족이다. 그런 종족에게 무슨 文化가 있단 말인가. 기원전 39 세기부터 농경을 해온 농경민족의 후예 高句麗가 고작 천막 하나 가진 유목민족보다 열등하단 말인가. 티벳고원의 토착종족 한 테도 제대로 된 文化가 없었다. 그래서 百濟 역사를 베껴서 南朝의 역사로 둔갑시킨 것이다. 저 高原地帶 북부에 文化의 흔적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百濟가 다스리고, 高句麗人들이 건너가서 일구어 놓은 것이다.

中土를 정복한 異民族들은 타림분지에서 침입 하거나 중앙아시아에서 현 캐시미르 지방을 통과해 침입했다는 사실에서 티벳고원 북부의 동쪽에는 土着種族의 나라가, 서쪽에는 異民族의 나라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각국의 인구

春秋時代에는 무려 100 개가 넘는 나라가 저 좁은 땅에 있었다. 그러니까 齊, 吳, 越은 春秋五覇이고 齊, 燕은 戰國七雄 이라고 해도 조그만 小國이다. 宋, 齊, 梁, 陳이 차지한 땅(南朝)은 티벳고원 북부 중에서도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다.

春秋五覇, 戰國七雄의 허상! 隋나라 때 티벳고원 북부의 인구가 69 만호였다. 그렇다면 春秋時代에는 얼마였을까. 秦나라 때 인구가 십여만 호라고 한다.

땅은 사방 5 천리이며 호구는 십여 만이고 승병(勝兵)은 수만이다.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다 차지하였다(祚榮即并比羽之眾恃荒遠乃建國自號震國王遣使交突厥地方五千里戶十余萬勝兵數萬頗知書契盡得扶餘沃沮弁韓朝鮮海北諸國 新唐書)

십여 만호? 大震國은 高句麗와 百濟 땅 일부를 차지했고, 高句麗는 69 만호, 百濟는 76 만호라고 날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大震國이 고작 십만 戶라? 그래서 이 땅의 사학자들은 저것을 大震國 初의 기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3 세기에 썼다는 三國志에도 夫餘가 사방 2 천리고, 戶는 8 만(夫餘 … 方可二千里 戶八萬) 이라고 날조했다. 3 세기에도 東夫餘 밖에 없었다. 東夫餘는 나라와 백성이 모두 풍족했다. “필요할 때마다 비가 내려 분릉(岔陵)을 기름지게 하는지라,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正春)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時雨滋岔陵民歌王正春之謠 迦葉原夫餘紀)."

朝鮮은 神人王儉이 세운 나라니까, 辰韓만을 말한다고 해주자. 弁韓은 岷江 이서의 1 차 番韓이라고 해주자. 沃沮는 丹江 이남에 있던 나라다. 東, 西, 南, 北 沃沮가 없었으니까 날조자 간에 손발이 맞지 않아 그냥 沃沮라 한 것이다. 東夫餘를 빼고 沃沮, 弁韓, 朝鮮 등을 다 합쳐 黃山江(揚子江) 이북에 있는 나라의 인구가 3, 4 萬戶라는 것이다. 이들 나라는 모두 기원전(기원전 24 세기부터)에 있었으니까, 천년 뒤, 2 천년 뒤 십여 萬戶 라는 것은 사실상 인구가 하나도 증가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大震國이 아니라, 秦나라에 대한 설명이다. 中土에도 바다가 있다. 金沙江. 그 당시의 黃河였다. 바다(金沙江)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은 戰國時代에 존속했던 小國들을 가리킨다. 우리나라 역사책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일부 이 글에 대해서 소설로 읽는 분들이 있는데 편자는 이글이 소설로 읽히기를 경계합니다. 올곧은 우리 역사가 바로서게 되기를 염원하는 것은 마구잡이식의 얼토당토않은 그런 난전의 잡상인같은 牽强附會의 글이 아닙니다. 이 시간에도 파렴치하고 식민사관의 주문에 세뇌된 자들이 이 나라의 역사를 이민족들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우리의 광활한 하늘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天網이 恢恢하나 疎而不漏 입니다.

索弗婁 檀帝가 黃河(金沙江) 상류를 정복하고 番韓의 주민을 옮겨와 岷江 以西가 番韓 땅이 되었다. 그래서 中土가 金沙江 너머로 축소 되었던 것이다.

캐시미르(Kashmir)를 통해 들어온 濊貊族과 타림분지(塔里木盆地)에서 기원전 4 백년 경에 南下한 南凶奴가 中土 서부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秦은 中土 전부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다 차지하였다(頗知書契盡得 … 海北諸國).”고 한 것이다.

夫餘가 사방 2 천리이고, 戶는 8 만 이라고 한 三國志의 날조기사는 어느 나라에 대한 설명일까. 殷나라 혹은 周나라 초기로 추정된다.

인심 좋게 春秋時代에도 10 여만 戶가 있었다고 해주자. 그러나 여기에는 변수가 있다. 中土는 母系社會라서 多數의 男子와 多數의 女子가 ‘결혼’하는 형태였다(知母不知父的母系氏族部落階段 中國古代性文化槪述 : 王立)

(http://www.folkdoc.idv.tw/classic/p03/sex/sex003.htm 참조).

戶當 가족수가 족히 15 명은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직은 우리나라 풍속이 유지될 때라 모두 다수의 남자, 여자가 결혼하는 형태를 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150 만 명 보다 적었다.

100 개가 넘는 나라가 난립하던 春秋時代의 小國들은 평균 1 만 5 천 명의 인구도 갖고 있지 못했다. 漢 나라가 얼마나 되는 병력을 보유할 수 있을까. 百濟도 百萬强兵을 보유했을 당시조차 인구대비 2 %를 상회했을 뿐이다. 春秋戰國 時代의 小國이 인구의 2 %를 병력으로 보유했다면 300 명이고, 3 %라면 450 명이다. 그 小國들도 크고 작은 나라가 있기 때문에 100 명의 병사조차 없던 나라도 있었을 것이다. 春秋五覇, 戰國七雄! 초라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中國이 무슨 말인가

中國이 무슨 말인가. 옛날에는 수많은 나라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玉篇을 찾아보면, 中이 “가운데; 안; 중; 마음; 몸; 대궐 안; 반; 곧다; 바르다; 차다; 고르다; 뚫다; 맞다; 맞히다”라고 좋은 말은 모조리 갖다 붙여 놨다. 중국이 玉篇(字典) 만들면서 의미를 바꾼 것이다.

“中” 字가 물건 가운데 창 꽂은 것으로 보이는가?

칼로 물건을 반으로 나눈다고 해서 만든 글자다. 물건을 반으로 나누고 자른 물건을 또 다시 반으로 나누고 이렇게 하다 보면 무수한 쪼가리가 생긴다.

원래 티벳고원 북부에는 秦, 漢, 隋, 唐만 빼고 무수한 나라가 병존 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저 무수한 나라들을 총칭하기 위해 中을 쓴 것이다. 그것을 明이 ‘중심 中’ 자로 바꿔 中華思想 어쩌고저쩌고 한 것이다.

中華思相 조차 중국의 순수창작이 아니라, 배달, 朝鮮, 夫餘, 高句麗, 百濟, 大震國, 高麗의 天下觀을 盜用한 것이다. 배달, 朝鮮, 高句麗, 百濟, 大震國, 高麗는 自國이 세계의 중심이라 확신했다. 고작 한반도 북부와 만주만 차지하고 세계의 중심 운운할 수 있는가. 하기야 이 땅의 史學者들은 馬羅島만 차지해도 天下觀 云云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高句麗가 郡公에 봉함을 받았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형식적 이었다, 天子를 예우해서였다 등 이 땅의 사학자들은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쥐어 짜냈다.

세계의 중심 高句麗가 다른 天子國을 인정 했다는 희한한 소리다. 郡(君)公에 封함을 받은 것은 中土의 나라들이다. 郡公. 中土는 우리나라의 행정구역 중 郡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 郡을 다스리는 자로 임명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中土의 王이 갈릴 때마다 우리나라에 와서 郡公에 封함을 받았다. 中華思想은 明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우리나라 피지배종족들은 우리나라의 온갖 것을 다 모방했다. 天下觀 뿐만이 아니라, 國名7), 種族名(漢族, 鮮卑族), 우두머리 호칭(칸, 可汗), 전설(배달개천사).… 순수창작할 능력조차 안 되었던 미개인들이다.

東아시아를 지배한 우리나라 疆域을 韓半島로 축소시키고 그 자리에 중국을 집어넣자, 미개 小國 중국을 침입한 異民族의 세력까지 부풀려져 묘사되어 왔다. 遼汗, 金汗, 蒙汗 등의 전력도 그만큼 과장되어 왔던 것이다.

北魏(386∼534)의 君長 탁발의로(拓跋倚盧)가 315 년 西晉의 관작을 받고 대왕(代王)으로 봉해졌다? 西晉 으로부터 땅을 빼앗아 세력을 신장한 拓跋倚盧가 아닌가. 침입자 北朝가 南朝에 朝貢하고 王에 封함을 받았다니 참으로 희한한 말이다. 異民族들이 매번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쳐들어가서 땅 주인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고는 떠받들었단 말인가. 이런 것이 더욱 발전한 것이 高麗圖經에 나온다.

북송 성종 연간에 금나라가 고려와 함께 조공을 하였다.

우선 宋나라(960∼1279)에는 成宗이 없다. 소위 北宋 왕계표는 太祖, 太宗, 眞宗, 仁宗(1023∼1063), 英宗, 神宗, 哲宗(及宣祖), 휘종(徽宗), 흠종(欽宗) 뿐이다. 北宋이 아니라, 高麗 成宗 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宣和奉使高麗圖經은 宋나라人이 쓴 것이 아니고, 高麗人이 쓴 책이다. 宣和奉使高麗圖經 역시 날조해서 高麗史는 宋史로 바꾸고, 宋史를 따로 집어넣어 高麗史라 한 것이다.

▲ 고구려 출신 북위 문소황태후 고조용 묘지명 : 고구려 출신 북위(北魏) 문소황태후(왼쪽,文昭皇太后) 고조용(高照容.469-519) 묘지명(墓誌銘)과 그의 딸인 장락장공주(長樂長公主) 원영(가운데,元瑛) 및 황태후의 오빠 고곤(高琨)의 아들이자 원영의 사위인 고맹(오른쪽,高猛) 묘지명이 백석대학 민경삼 교수에 의해 아울러 공개됐다.

金汗은 1115 년에 건국해 1120 년에 宋과 동맹을 맺고 遼汗을 協擊 했다니까(金汗과 宋은 高麗의 3 차례에 걸친 침공을 받고 명맥만 남은 遼汗을 멸망 시켰다), 1120 년부터 朝貢 하다가 6 년 뒤에 갑자기 돌변해서 宋을 침입해 上王(徽王)과 王(欽王)을 끌고 갔다는 소리다. 金汗은 宋을 업신여겨 上王(徽王)과 王(欽王) 뿐만 아니라 宋 王室에서만 3000 여(?) 명의 포로를 끌고 갔다.

朝貢은 上王과 王까지 끌려가 죽고 首都까지 빼앗긴 후 쫓겨난 宋이 해야지, 宋나라 땅을 떡 하나 차지한 金汗이 하는가. 宋은 高麗에게도 朝貢을 한 이중의 朝貢國이었다. 물론 柴達木盆地에 살다가, 高麗의 허락을 받고 中土로 들어간 濊貊族도 金汗을 세우자마자 高麗에 朝貢했다. 高麗圖經의 원문은 이렇다.

고려(高麗) 성종(成宗) 연간에 요한국(遼汗國)이 송(宋)나라와 함께 조공(朝貢)을 하였다.

물론 宋은 高麗 太祖 당시부터 朝貢했다. 遼汗은 916 년에 세운 나라인데, 무려 80 년 가까이 東아시아의 天子國 高麗에 朝貢도 않고 버틴 것이다. 그래서 成宗 12 년(993년)에 서희(徐熙)가 80 만 대군을 이끌고 거란(契丹)을 정벌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라서 역사는 오직 常識 위에서만 성립한다. 상식적으로 강한 北朝(?)가 南朝(?)의 朝貢을 받고 王으로 封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나마 南朝가 北朝를 떠받들지 않은 것은 東아시아의 제1강국 百濟의 屬國이었기 때문이다. 廣開土境好太皇 이전에는 高句麗도 어쩌지 못할 만큼 百濟는 강했다. 小獸林帝는 부친 昭烈帝(故國原帝)가 百濟軍에 살해되자, 내리 3 년을 出兵 했으나, 원한을 풀 수 없었다.

高句麗人 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王妃로 삼고, 高句麗 皇帝가 崩御할 때마다 애도의식을 올리던 北魏가 高句麗가 아닌, 南朝에 朝貢을 했단 말인가. 그런 北魏가 高句麗의 屬國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나라가 屬國이 된단 말인가.

진실은 中土의 北朝(?) 전체가 高句麗의 관작을 받고 高句麗의 諸侯로 封해졌고, 南朝 전체가 百濟의 官爵을 받고 諸侯로 封해졌던 것이다. 北朝 전체가 高句麗에 朝貢 하면서 高句麗 皇帝가 崩御할 때 마다 哀禱儀式을 올리며 高句麗人 신하를 떠받들었고, 南朝(?)는 百濟에 朝貢 하면서 百濟 皇帝가 崩御할 때 마다 哀禱儀式을 올렸던 것이다.

明이 급하게 역사날조 하느라고 중요한 나라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北魏 같은 이른바 北朝는 제대로 고치지 못했던 것이다. 같은 鮮卑族 이라도 隋와 唐은 中土 전체를 통일한 탓에 역사날조에도 공을 들여야 했지만, 北魏가 존속할 당시는 宋, 齊, 梁, 陳 등의 토착종족의 나라가 있어서 소홀히 다룬 것이다.

百濟가 472 년 高句麗를 치라고 사주하는 내용의 국서는 北魏가 아니라, 宋8)에게 보낸 것이다. 北魏는 高句麗의 屬國이다. 그런 나라에 高句麗를 공격하라고 지시할 수는 없다. 百濟는 자국의 속국인 南朝 宋에 국서를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宋은 廣開土境好太皇 이래로 百濟의 屬國인 동시에 高句麗의 속국이었다.

百濟의 속국이라는 사실이 高句麗 황제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노심초사 했지만, 자국의 힘으로는 百濟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百濟가 高句麗에 패했다고 하나, 아직도 강력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百濟가 高句麗를 공격할 때 지원 하라고 國書를 보내니까, 高句麗에 잘 보일 기회라 판단하고 얼른 高句麗로 국서를 보냈던 것이다.

저 劉宋이 9 년밖에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모용선비(慕容鮮卑 : 前燕 337∼370)가 342 년 高句麗의 수도를 점령하고 美川帝의 시신과 주씨태후(周氏太后)를 끌고 갔다고? 昭烈帝(故國原帝) 때 高句麗를 침입할 수 있는 대국은 百濟 뿐이었다. 그렇다고 百濟軍이 陵을 파서 시신까지 도굴해 갔겠는가. 高句麗를 침입했다는 慕容鮮卑의 이어지는 행적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慕容鮮卑가 高句麗를 굴복시킨 여세를 몰아 宇文鮮卑(北周 건립)를 멸망시키자, 宇文鮮卑의 왕 일두귀(逸豆歸)가 高句麗로 망명했다고 날조한 것이다.

高句麗가 宇文鮮卑族 따위를 받아줄 리 만무하다. 逸豆歸는 東晉(317∼420)으로 망명했다. 慕容鮮卑가 東晉의 수도를 점령하고 東晉 成王(325~342)의 사체와 康王(342~344)의 母를 끌고 간 것을 高句麗, 百濟 전투에 갖다 붙인 것이다. 그래야 모용외(慕容廆)가 진(晉)의 관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朱元璋은 中國史와 韓國史를 바꾸면서 뒤죽박죽 섞은 것이다. 얼마나 중국이 미개했으면 온전히 맞바꾸지도 못했겠는가.

前秦(351∼394)의 酋長 부건(符健)이 351 년 長安을 공략하여 도읍으로 정했다고? 이 당시는 長安 아래에 있는 海城(東川帝가 천도한 南平壤)이 高句麗의 도읍 이었다. 高句麗를 침입하기 전에 遼西의 百濟부터 공략해야 한다.

東川烈帝(?~248)는 관구검(毌丘儉 ?~ 255)의 침공으로 鴨綠原, 즉 嘉陵江 상류까지 피신해야 했다. 鴨綠江이 발해만 이동에 있다면, 이 당시 高句麗는 국가 멸망 직전까지 갔다는 소리다. 魏(220~265)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티벳고원 북부의 한줌을 차지한 小國이다. 거기서 韓半島까지 침공했다는 소리다. 그런 나라가 中土 통일은 왜 못했을까. 누누이 강조하지만, 高句麗는 朝鮮, 大夫餘, 北夫餘를 계승한 대제국이다. 中土의 통일국가 漢도 꿈만 꾸다 말았고, 隋, 唐도 고작 新羅의 지원군9)에 지나지 않았다. 통일국가도 못 이룬 나라(?)가 高句麗 정복을 고작 小國 後魏 따위가 이룰 뻔했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東夫餘에서 高句麗를 침입하는 魏나라 군대에 식량을 제공할 수 있는가. 魏나라 군대는 東夫餘까지 왔다가, 다시 高句麗로 침입했다는 말인가. 티벳고원 북부에서 淮水 유역이 어디인가. 무장한 군대가 다른 나라를 통과할 수 있는가. 黃山江(揚子江) 이북은 高句麗 영토이고, 黃山江 이남은 百濟 영토이다.

梁書에는 晉나라 때 百濟가 遼西를 차지했다(晉時百濟有於遼西)고 했지만, 魏나라 때도 遼西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魏 건국에서 晉 건국까지는 45 년의 시차밖에 없다. 梁書는 宋, 齊를 거쳐 梁 건국 당시까지 百濟가 遼西에 있었다는 사실도 누락 시켰다. 遼西가 高句麗 땅이었다면, 東川帝는 鴨綠原이 아니라, 遼西로 피신했다. 百濟와의 국경까지 피신해야 할 정도로 급박했던 것이다.

東川帝가 鴨綠原으로 피신했다는 사실은 魏가 아니라, 百濟의 침공이었음을 말해준다. 漢水 하류, 黃山江 이남, 黃土高原 쪽에서 공격했지, 티벳고원 북부에서 진격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遼西마저 百濟 땅이다. 魏나라는 절대 침입할 수 없었다.

毌丘儉은 百濟의 장수였던 것이다. 그래서 東夫餘가 百濟軍에게 식량을 제공할 수 있었다. 최종 공격목표가 적국 깊숙이 있을 경우 통상 한 방향에서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漢水 하류 및 黃山江 이남의 두 방향이나 漢水 하류 및 중류, 黃山江 이남의 세 방향에서 공격했다.

百濟의 도읍에서 출발하는 漢水方面軍이 군량미도 조달하지 못할 리는 없다. 그 지경이면 전쟁 자체를 계획할 수 없다. 東夫餘는 黃山江 이남에서 北上하는 百濟軍에게 군량미를 조달했다. 毌丘儉은 黃山江 이남의 百濟軍을 지휘했던 것이다.

高成帝(618~641)는 어째서 오르도스(鄂爾多斯) 이남에다 長城을 쌓았나. 百濟軍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다. 百濟는 이미 386 년에 오대산맥(五臺山脈)으로 이어지는 長城을 쌓아 高句麗軍의 침공을 봉쇄했다. 이후 百濟는 오르도스 쪽으로 해서 高句麗를 침공했다.

사막 지역은 대규모 수비군을 주둔 시키기에 여의치 않았다. 장기주둔에는 막대한 식수를 확보해야 하지만, 공격로로 이용할 경우에는 沙莫을 건너올 동안의 식수만 운반하면 된다. 高句麗가 7세기 초에 長城을 쌓았다는 사실은 新羅의 성장으로 高句麗의 전력이 많이 약화되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百濟가 三國 時代 말기에도 여전히 막강한 전력으로 오르도스를 건너 高句麗를 지속적으로 침입했음을 알려준다.

▼ 관구검기공비(?)

연개소문(淵蓋蘇文 : ?~666)은 어째서 高成帝가 長城을 쌓는 것을 반대 했는가. 長城을 쌓는다는 것은 長城 밖 高句麗 주민들의 보호를 포기 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百濟長城의 경우에는 이와 다르다. 우선 高句麗가 동북아에 없었고, 大興安嶺山脈 이남은 인구 밀집지역이라 黃河 이북으로 부터의 지원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실제로 동북아의 병력은 新羅가 韓半島를 침공했기 때문에 韓半島에 투입되었다.

중국 대륙의 南朝는 百濟이고, 北朝는 高句麗라는 사실을 日本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호오류지(法隆寺) 百濟 觀音像 등의 목상은 百濟나 南朝系의 佛像의 흐름을 보여준다10)고 했던 것이다. 揚子江 하류의 중국 南朝인 梁나라의 양식”(나라와 대화로)? 揚子江 하류에는 新羅와 伽倻가 있었다.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을 만든 지리불사(止利佛師)는 “중국”에서 온 司馬達등의 손자(나라와 대화로)? 완전 말장난이다.

아스카(飛鳥) 문화를 낳은 것은 주로 朝鮮諸國에서 渡來해온 자손 이었으나, 南北朝 時代의 중국이나 멀리 인도, 그리이스 문화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도쿄서적 고교 신찬일본사B)?

아스카(飛鳥) 문화는 주로 이주 당대의 百濟人이 만들었다.

5 세기 초부터 거의 1 세기 동안 5 대의 왜왕(倭王)은 중국의 남조에 조공했고, 왜국의 왕으로서 지위와 조선반도 남부를 지배하는 장군 으로서의 지위를 인정 받으려고 했다. 이것은 중국 황제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여러 나라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유리하게 꾀한 것이다.

이러한 조선반도에의 진출에 의해 야마토(大和)정권은 대륙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군사적으로나 경제적 으로도 큰 힘을 지니게 되었다(일본서적, 동경서적, 실교출판사, 자유서방, 삼성당 등)

列島 최초의 왕인 應神은 5 세기 전후에 百濟에서 列島로 갔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는 아직도 倭가 10 나라나 있었다. 이들 中國倭는 바로 옆에 있는 百濟에 대대로 조공하고 있었으나, 廣開土境好太皇의 정복활동 이후 高句麗에도 朝貢했다.

이들 中國倭 중 하나가 倭 전체의 王으로서의 지위를 인정 받으려고 1 세기 동안 부지런히 노력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유리하게 꾀할 수는 없었다. 우리나라가 바로 중국의 南北朝 이니까.

中國倭든, 列島倭든 韓半島로의 진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百濟와 新羅가 倭에 大陸의 先進文化를 이식해준 것도 사실 이지만, 군사적 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힘을 갖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었다.

倭는 百濟와 新羅의 植民地였고, 高麗의 屬國, 李氏朝鮮의 朝貢國 이었다.

倭國은 日本國이다. 倭라는 원래 이름을 부끄러워 했는데, 極東에 있다고 해서 日本이라고 부른다. 高麗의 屬國이다(倭國乃日本國也 本名倭旣恥其名 又自以在極東因號日本也 今則臣屬高麗也 郭若虛『圖畵見聞志』 卷6 高麗國)

3) 375 년, 백제 땅 한반도에 신라가 침공했다

韓半島에 伽倻는 없었다. 伽倻는 揚子江 하류에 있었다. 韓半島에 伽倻가 있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지역에서 出土되는 갑옷은 百濟와 新羅의 것이 혼재되어 있다.

몽고발형투구(蒙古鉢形胄)? 蒙古는 蒙古高原에 없었다. 大震國이 蒙古高原 이북에서 일식관측한 기록이 日本 역사책에 日本의 일식기록으로 둔갑해 있다. 高句麗는 蒙古高原 이서, 이동에서 일식관측했다. 蒙古高原 역시 高句麗 땅이다. 그러나 韓半島에는 高句麗가 없었다. 溫祚가 黃河 하류, 渤海灣, 滿州, 黑龍江 중, 하류로 이어지는 영토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몽고발형투구(蒙古鉢形胄)는 百濟의 투구(胄)였던 것이다.

몽고발형투구(蒙古鉢形胄)가 북방민족의 영향이 강한 투구라고? 북방민족은 없다.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를 훔치면서 날조 해냈을 뿐이다. 中土 너머 타림분지(塔里木盆地)에는 北匈奴와 鮮卑, 蒙古 등이 있었고, 中土의 서쪽에는 南匈奴와 靺鞨이 있었다. 모두 우리나라의 지배를 받은 종족이다. 당연히 우리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蒙古와 北匈奴는 일찌감치 중앙아시아로 빠졌다.

伽倻 古墳에 부장된 中國系, 북방 유목민족의 물품? 揚子江 중, 상류 이남은 百濟 영토였고, 揚子江 이북에는 高句麗가 있었다. 오르도스형 동복(銅復)? 오르도스는 高句麗 영토다. 그러나 百濟가 高句麗에서 갈라진 나라이기 때문에 똑같은 문화를 갖고 있었다. 일식기록은 도무지 염두에 두질 않는가 본데, 우리나라 영토가 중국 대륙을 포함한 東아시아라는 명백한 증거다.

유목민족을 중국이 날조한 蒙汗이나, 金汗, 遼汗 등으로 생각 해서는 안된다. 蒙汗, 金汗, 遼汗은 高麗의 역사를 배당받은 나라다. 실제의 유목민은 현재의 蒙古나, 티벳의 유목민에 불과하다. 천막 하나 쳐놓고, 온 가족이 기거하며, 천막만 걷어서 손쉽게 이 땅에서 저 땅으로 이주하는 민족이다.

오늘날 蒙古의 도시나 티벳의 도시는 현대화된 산물이다. 그 옛날 蒙古가 그처럼 우수한 문화를 개발 했다면, 蒙汗 이후에는 퇴보만 거듭했다는 것인가. 일례로 유목민족의 하나인 濊貊族은 “穴居生活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살았다(常爲穴居冬以豕膏塗身厚數分 以禦風寒 作於中廁之而居 三國志 魏書)” 우리나라의 은혜에 기대어 빌빌대며 柴達木盆地에 살기 전에는 熟女眞도 저랬다.

韓半島는 百濟의 퇴직관리들이 이주한 땅으로 휴양지 역할을 하던 곳이다. 그 땅을 중국 대륙에서 黃海를 건너온 新羅軍이 기습 상륙 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新羅가 韓半島로 진출한 시기는 언제인가. 新羅는 百濟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내물(奈勿) 麻立干 37 년(393)에 이르러 高句麗 편으로 돌아선다. 高句麗가 강성하다 하여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인질로 보냈다(三十七年 春正月 高句麗遣使 王以高句麗强盛 送伊 大西知子實聖爲質 三國史記)고 하지만, 실은 百濟 땅 韓半島를 침공 함으로써 百濟와의 관계가 악화 되었던 것이다. 이를 감추느라 新羅가 강자 편에 붙었다고 날조한 것이다.

◀ 수지형금동관 : 전남 나주군 신촌리 9 호분 을호(乙號) 옹관에서 출토된 것으로 나뭇가지 모양을 한 입식을 장식한 외관(外冠)과 반원형 동판 두 장을 맞붙여 만든 내관(內冠:모자)로 구성되어 있다.

三國史記에 百濟에 漢字가 들어온 해로 기록되어 있는 375 년(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 得博士高興 始有書記 然高興未嘗顯於他書 不知其何許人也 三國史記)이 新羅가 韓半島로 침공한 해이다. 우리나라를 모두 집어넣은 韓半島에 新羅가 상륙작전을 펼칠 수는 없으니까, 百濟에 漢字가 들어온 해라 날조한 것이다. 그러나 漢字는 우리나라가 개발했다. 漢字의 원형 甲骨文字가 발견된 黃河 하류는 三國의 영토가 맞닿은 곳이다. 글자없는 甲骨, 즉 `無字甲骨'이 발견되는 지역도 滿州를 포함한 韓半島 전역 등이다. 가장 오래된 것은 西滿州 渤海灣 북쪽에서 出土 되었다. 지금의 漢字꼴은 渤海灣 지역과 山東半島에서 먼저 나타났다.

“丙申年(B.C. 925)에 漢水 사람 王文이 이두법(吏讀法)을 지어 바치니 天王께서 좋다고 하시며 三韓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하였다(丙申漢水人王文作吏讀法以獻天王嘉之命三韓如勅施行 番韓世家 下).” 이 당시 벌써 漢字가 개발 되었기에 吏讀法을 지었다. 黃河가 漢水다. 漢字조차 우리나라가 개발한 것이다. 漢字는 커녕 甲骨文字 조차 중국이 개발한 문자가 아니다.

400 년의 이 사건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0 년대,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발굴이 끝나면서다. 4 세기 말 까지도 금관가야는 고분 묘광의 크기가 10 m 이상이고, 그 안에서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는 아주 광대한 세력 이었다. 그런데 5 세기 초 이후에는 김해지역에서 묘광 크기가 2 m 이상 되는 고분이 나오지 않는다.

400 년 무렵부터 철갑옷을 함께 묻은 대형 고분들이

◀ 몽고발형투구와 갑옷 : 갑옷은 몸을 보호하는 쇠로 만든 옷으로 따로따로 주조된 철판을 결합하여 만든 판갑옷과 작은 비늘을 가죽이나 천에 덧대어 만든 비늘갑옷(찰갑)으로 구분된다. 판갑옷(단갑)은 일단 착용하면 몸의 신축이 쉽지 않기 때문에 보병용으로, 비늘갑옷은 몸의 움직임이 자유로워 기병용에 적합하다. 투구에는 차양이 달려 있지 않은 세모꼴 투구, 차양이 달려 있는 몽고발형 투구가 있다.

돌연 자취를 감춘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가야가 멸망한 6 세기 중엽까지 계속 만들어지던 대형 고분이 가야의 출발지이자, 절대적인 맹주였던 금관가야에서만은 5 세기 초엽에 중단된다(역사스페셜 1권)

금관가야(金官伽倻)가 古墳에 철갑옷을 부장품으로 넣지도 못할 만큼 무장해제 되었다면, 盟主의 지위를 다른 伽倻가 넘겨 받았다면, 상식적으로 국력이 신장된 나라가 金官伽倻를 멸망 시켰을 것이다. 그 결과 金官伽倻 지역에는 새로 떠오른 伽倻가 지배자를 파견했을 것이고, 여전히 大型 古墳에, 철갑옷이 발견되어야 한다.

新羅가 375 년에 韓半島를 침공하고, 393 년에는 高句麗 편으로 돌아섰다. 전투가 한창인 지역에 큰 고분을 만들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철갑옷 제작에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전쟁 중에 부장품으로 넣어줄 수도 없다. 金官伽倻로 착각하는 지역에 新羅가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 新羅는 중국 대륙에서 黃海를 건너 韓半島에 교두보를 마련했으니까, 고분 제작자를 충분히 동반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古墳은 만들어야 하니까, 古墳의 크기를 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북아 전체가 百濟 영토인 상황에서 중국 동부의 新羅가 배 타고 黃海를 건너와서 韓半島에 직접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륙작전은 육상작전보다 훨씬 어렵다. 新羅는 南海의 섬을 전진기지화 했던 것이다. 前進基地는 진공목표 지점에서 가까운 對馬島이다.

韓半島는 百濟人의 휴양지 같은 곳이라, 帝王의 근위대 및 치안 유지군이나 있었을까 전투병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1 만 내지 2 만명 으로도 韓半島에 橋頭堡를 마련할 수 있다. 교두보 확보에 성공하면, 증원군은 對馬島를 거치지 않고 韓半島로 직행했다.

상륙지점은 金海 부근이다. 新羅軍은 對馬島에서 金海 부근으로 침공했다. 金海는 3 세기에는 수심 5 m 내외의 灣이었고, 4 세기에는 평야였다. 金海가 육지화 되었다면, 灣이 물러난 지역에 상륙했다.

韓半島 철갑옷의 90 %가 伽倻 지역이라 착각하는 곳에서 발굴 되었다는 사실에서 百濟軍과 新羅軍은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를 전개 했음을 알 수 있다. 고도의 철기기술을 보유한 나라는 百濟였다.

남아 있는 787 년 이후의 新羅 日蝕의 최적 관측지가 慶州보다 저위도다. 교두보를 확보 하자마자 天文臺부터 세웠음을 알 수 있다. 北崖도 揆園史話(1675년)에서 첨성대가 천 수백 년이 지났다고 했다. 華夏族과 濊貊族은 新羅가 韓半島에서 건국 했다고 날조 했으니까, 瞻星臺 건립 연도까지 날조할 이유는 없다. 新羅가 韓半島에서 天文觀測하기 시작한 것은 400 년 이전 이었던 것이다. 文武 19 년(684) 8월 10일(양력) 새벽에 일어난 太白入月 현상도 慶州가 아니라, 南海岸에서 관측했다(夏四月 熒惑守羽林 六月 太白入月 流星犯參大星 秋八月 太白入月 三國史記). 남아 있는 新羅의 기상현상 까지 500 년 이후는 韓半島에서 발생했다. 기상현상 관측도 천문관측과 동시에 시작 했거나 약간 나중일 것이다.

慶州로 瞻星臺를 옮긴 것은 李氏朝鮮이다. 한 장소에서 천문관측 했다면 통상 首都에서 천문관측하기 때문이다. 新羅의 예에서 우리나라는 영토를 확보하면, 天文臺 부터 세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天象列次分野之圖에 나타나는 李氏朝鮮 初의 하늘이 38.4°인 것으로 보아, 新羅는 三國統一 후 韓半島에서 두 군데(남해안과 38.4°)에서 천문관측했다.

나무가지형(樹枝形) 금동관(金銅冠)? 고작 교두보만 마련한 지역에 왕급 인물을 파견했을 리도 없고, 무덤 부장품도 일반적으로 만드는 물건으로 추정된다. 羅州 新村里 9 號墳에서 출토된 金銅冠 역시 新羅 것이다. 韓半島의 왕이라면 百濟 候王과 7 세기 전후의 新羅 侯王 뿐이다.

伽倻가 멸망한 6 세기 중엽까지 계속 만들어 지던 大型 古墳이 伽倻의 출발지이자, 절대적인 맹주였던 金官伽倻에서만은 5 세기 초엽에 중단된” 것은 新羅가 교두보를 넓혀 가면서 新羅의 지휘관들도 전쟁터에서 죽어갔기 때문이다. 이미 金海지역은 新羅의 후방이 되었던 것이다.

4 세기를 기준으로 목곽묘(木槨墓)의 부장품 위치가 달라진 것은 新羅 진출이 원인이다.

4 세기 이후 편두(褊頭 : 두개골이 뒤쪽으로 치우치게 인위적으로 만든 머리)人骨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金海지역을 百濟가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百濟人은 褊頭人이 아니다. 무엇보다 韓半島 일대의 무수한 고분 벽화의 등장인물 가운데 褊頭人은 없다.

“지금 辰韓 사람 모두 褊頭(今辰韓人皆褊頭 魏書 東夷傳)”라는 三國志가 사실 이라면, 중국 대륙 중부와 黃河 하류, 大興安嶺山脈 이남 사람들이 모두 褊頭라는 소리다. 그러나 三國志는 魏, 蜀, 吳의 역사로 배당한 책이고, 魏, 蜀, 吳는 3 세기에 존재한 나라다. 辰韓을 물려받은 나라가 高句麗이고, 百濟가 高句麗에서 나왔으니까 결국 高句麗와 百濟人이 모두 褊頭라는 소리다. 요컨대 티벳고원 北部와 중국 동부를 제외한 東아시아인이 전부 褊頭라는 소리다. 百濟人이 褊頭라면, 百濟 식민지 日本에서도 褊頭人骨이 발굴 되어야 한다.

그런데 褊頭人은 이 땅의 사학자들이 伽倻라고 착각하는 협소한 지역에서 극소수만 출토 되었을 뿐이다. 高句麗, 百濟人은 褊頭人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 褊頭人은 어디서 왔을까.

百濟가 嘉陵江 이서 즉 티벳고원 남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티벳고원 북부는 中土였다. 百濟는 과거 吳, 越, 燕, 齊, 魯가 있었던 中土의 상당부분도 지배하고 있었다. 漢委奴라는 말까지 만들지 않았던가. 실제로 百濟人 상당수가 華夏族을 노예로 삼았던 것이다. “百濟王은 곤핍해서 男女生口 一千人과 세포 천필을 내어 헌납하였다(而殘王因逼獻□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廣開土境大勳跡碑).”는 날조기사에서 보듯이 옛날에는 사람으로 朝貢을 하기도 했었다. 中土의 南朝로 날조된 나라들은 자신들의 노예를 百濟에 바친 것이다. 百濟人이 韓半島로 이주 하면서 華夏族(中土族) 출신의 노예들도 함께 데려온 것이다. 新羅는 中土와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中土族을 노예로 삼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五胡가 中土에 나라를 세운 지도 백 년이 지났을 때라, 褊頭 풍습은 거의 사라졌다. 五胡가 中土의 토착민에게 褊頭를 강요할 리 없고, 五胡를 막기에 여념이 없던 南朝(?)에서도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있어 褊頭風習도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百濟에 中土 출신의 노예는 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褊頭를 강요하지 않으니까, 2 세 이후로는 무시무시한 풍습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

中奴가 褊頭였다는 사실은 현 역사책에도 남아 있다. 三國志 에서는 “지금 辰韓 사람 모두 褊頭”라고 했고, 後漢書 에서는 “辰韓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秦나라가 망해서 도망해온 사람으로 피난 가는 것이 고역이다. 韓國의 馬韓 땅이 적당할 것 같아 馬韓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秦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秦韓이라고 하였다(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適韓國馬韓割東界地與之 … 有似秦語故或名之爲秦韓)”고 했다. “지금 辰韓 사람 모두 褊頭”라는 기술은 秦나라 유민 다시 말해 中奴가 褊頭라는 뜻이다. 中奴는 역사책을 날조 하면서도 제 조상들이 褊頭였다는 사실을 없애지 못한 것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褊頭가 그 당시 미인의 조건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그랬다면 전 세계로 褊頭風習이 퍼졌다. 오히려 褊頭는 희귀풍속이다. 그보다는 종족식별을 위해 고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慈烏支 한웅이 정복한 이후 中土로 우리민족이 상당수 이주했다. 中土의 미개 토착민들이 우리민족의 노예로 전락 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고 유전적 교류까지 막을 수는 없다. 특히 남자들은 적극적으로 토착민 여자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토착민 여자를 괴상한 모습으로 바꾸었던 것이 아닐까.

中土로 들어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土着民과 유전적 교류를 하지 않았음은 낙빈기(駱賓基 1917~1994)에서도 알 수 있다. 慈烏支 한웅이 우리민족을 대거 이끌고 中土로 들어가기 전까지, 楡罔 집안과 黃帝 집안은 누비혼인을 했다. 楡罔 집안의 남자는 대대로 黃帝 집안의 여자한테 장가가고, 黃帝 집안의 남자는 대대로 楡罔 집안의 여자한테 장가갔던 것이다. 褊頭가 美의 조건 이었다면, 中奴는 기꺼이 제 역사라 인정했다. 褊頭가 노예식별 표시라서 中奴가 제 풍속임을 부정했던 것이다.

(종교의식과 관련된 고대 이집트 조각품에 등장하는 6 천 년 전의 여인이 褊頭인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巫女는 神에게 바쳐진 처녀다. 褊頭는 태어난 직후에 인위적으로 만들었으니까, 스스로 원해서 巫女가 된 것이 아니다. 일반인과 생김새가 똑 같다면, 모든 巫女가 도망치고 말았을 것이다. 요컨대 종교의식을 神聖視하는 시대에 巫女의 도주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서 간난아기를 데려와 褊頭로 만들고 巫女로 키운 것이다)

그러나 褊頭人骨이 中土에서 발견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中土의 예속민들은 죽은 자를 땅에 묻지 않았다. “시체를 들 가운데 버려 땅강아지, 까마귀와 솔개가 파먹는 대로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벳고원은 산사태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다. 그때 죽은 사람들의 인골은 토굴이나 땅속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기원전 209 년 陳勝의 亂 때 番朝鮮에 귀순한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인(壬辰三十一年陳勝起兵秦人大亂燕齊趙民亡歸番朝鮮者數萬 北夫餘紀)”의 상당수도 褊頭人 이었을 것이고, 百濟가 遼西를 지배할 당시, 華夏族을 노예로 거느렸으므로 티벳고원 남부 에서도 褊頭人骨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百濟 땅에서는 中奴들도 “시체를 들 가운데 버려 땅강아지, 까마귀와 솔개가 파먹는 대로 두”는 걸 자제했을 테니까, 티벳고원 남부에서 褊頭人骨이 발견될 가능성이 더 높다 하겠다.

순장제도(殉葬制度)는 百濟 문화(高句麗 문화)이다. 그러나 殉葬 제도의 특성상, 피매장자나 매장자의 선호에 달렸지, 모든 지배자의 무덤에 殉葬을 한 것은 아니다. 3 세기 말부터 등장하는 殉葬制度는 百濟가 首都에서 韓半島에 侯王을 파견한 시기가 3 세기 중반 이후라고 추정할 근거가 못 된다.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모두다 동굴로 옮겨서 천신(天神)과 나란히 모시고 이어 제사 지냈다. 뒤에는 혹은 평지에 장사지내는 자도 있고, 둘레에 박달나무・버드나무・소나무・잣나무 등을 심어 이로써 표지(表識)를 하였다. 이는 신시(神市)의 세상에서는 능묘(陵墓)의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에 중고(中古)시대에 이르러 나라는 부유해지고 민족은 강성하게 되었으니 점차 번거로워 져서 장례를 사치스럽게 치르게도 되었고, 제사를 지냄에도 예의가 있었고, 묘를 쓰는 것도 자못 융성하게 되었다. 혹은 둥글게 혹은 모나게도 하여 지극히 사치스럽게 장식 하였으며, 높이・크기・넓이・폭 모지고 바른 것까지 규격이 생겼으며, 안쪽은 벽과 바깥쪽은 덮는 것까지 고르게 잘 정돈하고 정교하였다. 고구려에 이르러서는 능묘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의 으뜸이 되었다(上自國王皆遷置於隧穴並配天神以祭後或有平地而葬之環植檀柳松栢以識之是以神市之世無陵墓之制然後至中古國富族强養生得

◀ 독무덤(옹관묘) : 토기를 관으로 사용한 묘를 말한다.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묘제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보이고 있으며 토광을 파고 항아리 1 개를 직립시켜 뚜껑 돌을 덮어 묻은 단식 옹관과 항아리 2-3 개를 아구리를 맞붙여 놓은 합구식옹관의 2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贍送死亦侈祭之有禮治墓頗隆或圓或方克厥侈飾高大廣狹方正有䂓內壁外墳均整兼巧至于高句麗陵墓䂓制冠於天下 太白逸史 神市本紀)

高句麗 때 기술이 따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中古時代는 朝鮮時代이다. 國王이라 함은 배달의 제후들이다. “평지에 장사 지낸다(平地而葬)” 함은 고인돌을 말한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朝鮮을 부정하기 때문에 모든 墳墓를 三國時代의 것으로 몰아간다. 三國史를 기술하는 것을 보면, 이 땅의 사학자들 대부분이 배달, 朝鮮史를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옹관묘는 기원전부터 사용된 고대 무덤 양식의 하나인데, 황해도 일부와 경기 이남 전지역에서 해안에 고루 분포한다. 특히 영산강 유역의 수많은 옹관들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늦은 6 세기 중반까지 이어진다(역사스페셜 1권)

옹관묘(甕棺墓)가 분포하는 지역이 해안이나 평야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인구가 적은 시대에는 살기 편한 해안과 평야에 몰리는 게 당연하다. 榮山江을 비롯해서 韓半島 서해안은 우리나라 중심지가 있는 중국 대륙으로의 연안항해도 가능한 교통의 요지다. 그러나 百濟와 新羅의 전쟁은 내륙, 해안을 가리지 않고 韓半島 전역을 무대로 벌어졌다. 그러니까 百濟와 新羅가 甕棺을 만들었다면, 해안, 내륙을 가리지 않고 甕棺墓가 분포해야 한다.

韓半島에는 배달시대의 고인돌은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11), 朝鮮時代의 고분은 없다. 물론

◀ 출토된 옹관 : 약 3 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옹관묘가 해남군 송지면 영평 마을 뒷산 언덕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나온 옹관묘 중 가장 빠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이지역의 고대사뿐만 아니라 옹관묘 연구에 큰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땅의 사학자들이 朝鮮을 부정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날조사에서 周나라, 漢나라로 접어들면서 甕棺 사용이 점점 쇠퇴·소멸 했다고 한 점에서 甕棺은 朝鮮時代의 풍습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베낀 宋書에 “옹관은 東胡의 풍습”이라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소멸시기에는 시차가 있다. 宋書를 기준으로 甕棺이 6 세기 까지 사용 되었다고 하는데, 역사책은 그 나라가 존속할 당시의 풍속을 적는 것이지, 역사책을 쓸 당시의 풍속을 적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明이 우리나라 역사책을 베끼면서 연대를 일치 시키지 않았으니까, 5 세기 까지 甕棺이 사용 되었다고 단정할 근거조차 못 된다.

甕棺墓가 韓半島에서 사라진 시기는 몇 백 년은 더 빠르다. 큐슈(九州)의 甕棺墓는 기원전 3 세기부터 韓半島人들이 건너가서 만든 것이다.12)

羅州平野가 있고, 榮山江이 흐르는 지역을 百濟軍이 순순히 포기할 리도 없고, 新羅軍이 지나칠 리도 없다. 新羅軍을 구축하기 위해 列島에 식민지까지 세운 百濟이다. 新羅 역시 榮山江 유역을 확보하고 나서 중국 대륙의 본국에서 증원군이 도착하는 항구로 사용했다. 榮山江 유역은 지형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百濟軍과 新羅軍의 격전지가 될 수밖에 없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6 세기 중엽 까지는 韓半島 남해안 대부분이 전장으로 화했다. 남해안 동부는 위쪽으로 밀려난 百濟軍이 상실한 땅을 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개시하고, 新羅軍은 남해안 서부로 진출하고 있었다.

375 년에 상륙작전을 실시했는데, 2 백년 가까이 남해안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 복암리 고분군 : 사적 제404호로 지정되어있는 나주 복암리 고분군 아파트형 고분군으로 알려져 있다

것은 그만큼 전쟁이 치열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新羅軍을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百濟軍이 점점 더 고분을 제작할 여력이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百濟의 반격이 거세 질수록 新羅 역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고분을 제작할 여력이 없으니까 대안을 찾아야 했다.

榮山江 유역의 상당수 甕棺들은 이전 甕棺의

◀ 복암리 옹관묘에서 발굴된 금동신발 : 복암리 고분은 1996 년에 발굴이 시작 되었는데, 도굴을 당하지 않았던 3 호분에서는 놀라운 유적이 발굴되었다. ‘96 석실'로 이름 붙여진 이 무덤양식은 독특하게도 석실안에 옹관이 놓여져 있을 뿐 아니라 금동신발, 큰칼, 구슬, 토기 등 많은 부장품들이 발굴되었다. 뿐만 아니라 총 일곱 종류의 묘제에 41 개의 유구가 확인되어 학계를 놀라게 하여 아파트형 복합묘제 고분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 고분은 묘제의 변천과정으로 보아 400 여년간 사용된 고분이라는 것도 밝혀져 영산강 유역 세력과 백제후국인 한반도 묘제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높이 6 m의 복암리 3 호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일본 고대문화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또 무덤에서 발굴된 유리구슬의 경우 그 원료의 산지가 중국 북부로 밝혀지기도 하였으며,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옹관 3 개에서 출토된 인골 10 조각을 분석한 결과 이들은 모두 동일 모계 이거나 부부일 경우 근친혼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피매장자를 바꾸면서 부장품까지 새로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에 이겼다 해도, 다음 전투가 언제 시작될지 모르니까, 서둘러 무덤을 마련해야 했다. 사망자는 계속 나오고 古墳을 만들 시간은 없고 해서 이전 무덤의 피매장자를 꺼내고, 사망자를 매장한 것이다.

古墳에 묻히는 인물은 승자의 지휘관급에 해당하는 귀족이므로 나주에 있는 500~600 개(상당수의 고분이 멸실되었다고 보면, 원래 고분의 수는 그보다 더 많았다)에 달하는 古墳의 被埋葬者 전부가 전투 중의 사망자는 아닐 것이다.

羅州 고분의 피매장자 상당수가 전몰자인지 아닌지는 시신의 성별을 확인하면 간단히 알 수 있다. 전투에서 사망하는 사람은 남자지만, 평화 시에는 부부가 같이 묻히거나 인근에 묻히기 때문이다.

羅州 복암리(伏岩里) 3 호분 96 석실에서 출토된 羅州 金銅신발은 百濟나 新羅 것과는 다르다? 장인이 다르면, 작품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甕棺墓가 다수 있는 것으로 보아 韓半島人의 무덤이고, 7 세기 초의 부장품이 있는 것으로 보아 新羅가 羅州를 차지한 후에 완성된 고분이다. 羅州 伏岩里 3 호분은 수십 기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족묘로 시작했다. 가족묘로 사용할 고분을 만든 것을 보면 그 지방의 지배층에 속하는 집안 이었을 테니, 新羅가 진출 하고도 그 땅에 눌러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소한 상층의 고분은 가족묘가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百濟가 먼저 倭와 밀통하여 倭로 하여금 新羅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百濟先與倭密通使之聯侵新羅之境).” 太白逸史에도 百濟가 倭를 시켜 新羅를 침범 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伽倻13)를 침범 했다는 기록은 없다. 伽倻가 대부분의 기간 동안 百濟 영토와 직접 접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 武漢 일대에서 건국한 新羅는 黃山江(揚子江) 이남의 百濟 영토까지 진출하며 성장한 나라이다. 百濟는 高句麗와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으니까, 新羅가 자국 땅을 침공할 여력을 갖지 못하도록 倭로 하여금 新羅를 수시로 침입하게 한 것이다.

倭가 新羅城을 함락시킨 것(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廣開土境大勳跡碑)은 시기적으로 新羅가 韓半島를 침공한 뒤에 일어난 사건이다. 新羅가 韓半島를 침입하자, 百濟가 보복에 나선 것이다. 百濟가 倭에 무기를 공급하고 사주한 것이지, 伽倻軍이 주축이 되어 倭와 합동작전을 펼친 것이 아니다.

三國史記에서 伽倻에 관한 기술을 대량으로 빼버린 것은 李成桂와 朱元璋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모조리 中國史로 둔갑 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三國의 역사 였지만, 三國의 역사를 훔치면서 伽倻의 역사를 남겨두면, 三國史記가 아니라, 伽倻國史가 되니까, 같이 빼버린 것이다. 하긴 伽倻國史도 유용하게 써먹을 것이다. 5胡 16國의 소국 들이나 春秋戰國 시대의 小國들에 배당해야 할 역사도 있어야 하니까.

日本의 최초의 왕은 應神이다. 古事記나 日本書紀에는 神武가 최초의 왕이라고 적혀 있지만, 18 세기 이후 역사왜곡 하면서 꾸며낸 것이고, 다무라 엔초(田村圓澄) 등 일본학자들도 應神 혹은 仁德을 일본 최초의 왕으로 본다.

仁德이 일본 최초의 왕이 아닌 이유는? 결정적인 증거가 仁德14)이 매(鷹)를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仁德이 생전 처음 보는 새를 보고 주군(酒君)에게 무슨 새냐고 물었다. 그러자 酒君이 “百濟에는 이런 종류의 새가 많습니다. 잘 길들이면 사람을 곧잘 따릅니다. 또한 빠르게 날아 다니면서 여러 가지 새도 잡아옵니다.”고 했다.

( http://www.donga.com/docs/magazine/ new_donga/9912/nd99120450.html 참조 )

이 매를 길들이게 하고 실제로 매가 수많은 꿩을 잡은 날, 비로소 응감부(鷹甘府)라는 부서를 설치했다고 니혼쇼키(日本書紀)에도 나온다. 中國倭라면, 매가 百濟, 新羅 땅에는 날아 가면서, 新羅, 百濟에 인접한 倭만 피해 날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仁德은 列島에서 태어났고, 應神이 일본 최초의 왕이다.

列島倭(百濟倭라고도 한다. 물론 신라왜도 있지만)가 中國倭가 옮겨간 것이 아니라면, 倭라는 국명을 사용했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倭는 지극히 아름답지 못한 이름이라서 왜(倭)가 아니라면 倭라 이름 붙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倭國者古倭奴國也 … 倭國自惡其名不雅 舊唐書) 의미가 좋지 않은 말이라서 일본도 왜(倭)라고 부르는 것을 엄청 싫어한다. 그래서 日本은 18 세기 이후 야마토(大和)라고 부르면서 倭 외에도 和, 大倭, 大和15)까지 만들어 냈다. 倭, 和, 大倭, 大和의 吏讀式 발음이 모두 야마토(大和)라고 하면서. 이유는 應神이 中國倭의 王 이었거나 왕자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應神은 百濟人이다.

왜는 倭 혹은 委라는 두 가지 음에 倭國, 두르다, 순하다, 추하다는 뜻이다. 왜국은 왜(倭)라는 국명이 생겨난 후에 파생된 의미다. ‘왜소하다’라는 뜻도 있다고 하는데, 褊頭人骨이 난장이라는 지적은 없다. 華夏가 난장이가 아닌데, 같은 종족 倭奴가 난장이일 수는 없다. ‘矮小하다’는 말은 日本의 先住民 아이누族과의 생물학적 교배가 활발히 이루어진 후에 생겨난 말이다. 기모노섹스, 혼욕, 요바이가 성행한 천 년 전에. 무엇보다 왜소하다는 말이 국명조차 바꿀 정도로 “아름답지 못한” 이름은 아니지 않는가.

주목할 것은 옛날에는 ‘순종하다’라는 의미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르다, 순하다에서 파생된 의미라고 한다

(http://www.paikmagongja.org/new_files/outside/japen_3.htm) 

中國倭가 華夏族 출신이다 보니까, 中奴가 玉篇을 만들면서 삭제해 버린 것이다. 倭의 의미는 순종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上國 百濟가 멸망하자, 국명을 바꾼 것이다.

七支刀

七支刀는 百濟 皇帝가 新羅軍을 협공할 목적으로 應神을 倭王으로 임명 하면서 하사한 칼이다.

▲ 칠지도의 모습

태화 4년 5월 16일 丙午날 정양(正陽)에 무수히 거듭 단근질한 강철로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었노라. 모든 적병을 물리칠 수 있도록 이 영도를 후왕에게 보내주는도다. □□□□작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 )辟百兵宜(復)供侯王口口口口作 前面]

선대 이후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奇生聖音)은 왜왕을 위해서 만들었으니 이 칼을 후세에까지 길이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後面]

泰和는 近肖古帝의 年號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泰和 4 년은 369 년이 된다. 하지만 新羅는 375 년에 韓半島를 침공했다.

七支刀는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 다이쿠우시(大宮司)직에 있던 스가 마사토모(菅政友)가 자신이 손을 댔다고 실토했고, 깎인 銘文도 있다. 그 뒤 스가 마사토모(菅政友)의 행적에서도 七支刀가 날조됐음을 알 수 있다. 스가 마사토모(菅政友)는 日本 內閣과 도꾜(東京) 大學으로 자리를 옮겨 百濟王이 倭王에게 七支刀를 갖다 바쳤다며 任那日本府說을 주장했다. 그러나 날조명문에도 供侯王이라 되어 있다. 侯王에게 준다는 뜻이다. 倭가 植民地라는 뜻이다. 侯王이 바쳤다면 侯王供이라고 써야 한다. 이런 것도 내버려두고 任那日本府를 설치했다고 우긴 것이다.

무엇보다 판독됐다는 七支刀 銘文은 절대 있을 수 없는 글이다. 百濟의 太子가 자신을 世子라 하고, 父王을 王이라 부를 수는 없다. 이 당시 百濟는 嘉陵江 이서에서 揚子江 이남, 中國 東部, 東北亞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다수의 諸王과 諸侯를 거느린 東아시아 제1의 大國 이었다. 太白逸史와 三國史記도 百濟가 齊, 魯, 吳, 越, 燕 등의 땅을 평정하고 땅을 나누어 王과 諸侯를 封했다고 했다. “백제는 병력으로써 齊나라 魯나라 吳나라 越나라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을 분봉했다(百濟以兵平定齊魯吳越之地設官署索籍民戶分封王爵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百濟 太子가 만들게 한 칼 이라면, 百濟 皇帝가 하사한 칼조차 아니다. 그러나 太子가 侯王을 임명할 수는 없다. 칼 한 면은 百濟 皇帝가, 다른 면은 太子가 만들라고 지시 했다는 것도 우습다. 일부만 깎아내고 다시 쓰면 그 부분이 함몰되니까, 새로 만들었거나 양면 혹은 한 면 전체를 다 깎아내고 새겼을 것이 분명하다. 高句麗 皇帝를 烈帝라 불렀으니까, 百濟皇帝도 溫祚帝, 多婁帝, 己婁帝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太白逸史에 보면 長壽弘濟好太烈帝가 “新羅 매금(寐錦), 百濟 어하라(於瑕羅)와 남쪽 平壤에서 만나 納貢과 수비 군사의 수를 정했다(長壽弘濟好太烈帝……. 與新羅寐錦百濟於瑕羅會于南平壤約定納貢戌兵之數 高句麗國本紀).”고 했다. 그런데 寐錦이라는 호칭은 卑稱이 아니라고 한다. 新羅가 세운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에서도 新羅皇帝를 寐錦王 이라고 했다.

소서노(召西弩)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 하였는데, …….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朱蒙帝)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朱蒙帝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칭찬하고 召西弩를 어하라(於瑕羅)라고 책봉했다(召西弩慮將不利於二子……. 遣人致書于朱蒙帝願以內附帝甚悅而奬之冊號召西弩爲於瑕羅 太白逸史)

召西弩는 北夫餘 6世 檀君 高無胥의 둘째 公主로 朱蒙聖帝와 혼인 했으니까, 高句麗의 皇后다. 그런데 朱蒙聖帝가 또 다시 於瑕羅에 책봉할 수 있는가. 지위가 높다한들, 高句麗 皇后만 하겠는가, 高句麗 皇帝와 동격이겠는가. 召西弩를 於瑕羅에 책봉 했다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召西弩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다.” 다음에 오는 글도 모조리 엉터리다.

於瑕羅가 臣下의 지위에 해당 한다면, 百濟 皇帝는 於瑕羅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百濟와 高句麗는 모든 면에서 경쟁국 이었다. 廣開土境大勳跡碑에 나와 있는 百濟 皇帝에 대한 卑稱은 잔주(殘主)이다. 高句麗 皇帝를 烈帝라 하고, 新羅王을 寐錦이라 하는 것처럼, 百濟 皇帝는 於羅瑕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七支刀의 원문을 되살려 보면 아래와 같다.

선대 이후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 황제 아신(阿薪) 어하라(於瑕羅)가 왜왕을 위해서 만들었으니 이 칼을 후세에까지 길이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皇帝於瑕羅阿薪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七支刀는 369년(近肖古帝 4년)이 아니라, 395년(阿薪帝 4년)에 만든 칼이다. 395년에 日本 최초의 나라가 성립한 것이다. 應神은 百濟 皇帝가 韓半島의 新羅軍을 驅逐하기 위해 植民地 王으로 임명한 인물이다. 應神을 倭王으로 封하면서 新羅軍을 물리치라며 칼을 하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忠誠을 다하라고 下賜한 칼이지, 應神과 그의 後世를 축복하기 위해 하사한 寶刀조차 아니었다.

百濟 皇帝가 七支刀는 하사 했지만, 列島에 植民地를 건설하는 것은 韓半島의 侯王에게 일임했다. 曇徵도, 王仁도, 阿直岐도 다 韓半島의 侯王이 보내 주었다. 應神을 제외하면, 倭를 세운 百濟人들은 대부분 韓半島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應神이 세운 나라는 百濟 侯王의 지원을 받는 2 류 侯國 이었던 것이다. 蓋鹵帝가 高句麗軍의 공격으로 사망한 뒤로는 百濟 皇族들이 안전한 列島로 가서 살았으니까, 이후에는 百濟 皇帝의 직접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列島에 植民地를 세우는 계획이 얼마나 갑작스레 결정 되었는지, 應神이 列島에 도착한 지 14 년 후에야 재봉사를 보내 주었다고 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역시 百濟王이 바쳤다고 뜯어 고쳤다. 재봉사도 韓半島의 百濟 侯王이 보내 주었다. 그래 놓고도 이때 간 재봉사 眞毛津이 日本의 의봉시조(衣縫始祖)라는 대목은 내버려 두었다.

토우테이칸(藤貞幹 1732~1796)은 그의 저서인 쇼오꼬오하츠(衝口發 1781)에서 일본결척(日本決尺)을 인용하여 이렇게 밝혔다.

오우진(應神) 천황 시대에 봉녀(縫女) 두 명을 보내 주어서, 비로소 임금과 신하들이 한복(韓服)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만 서민들은 옷을 입지 않은 벌거숭이 모양 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배달 시대부터 양잠을 하고 베를 짰다. 韓半島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옷을 입지 않았을 리는 없고, 先住民을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 옛날에는 列島에 짐승마저 귀해서 닌토쿠(仁德)는 매조차 본 일이 없고, 新羅와 百濟가 온갖 동물을 하사했다. 그러니 나라가 서기 전에는 짐승 가죽조차 걸칠 수 없었던 것이다.

토우테이칸(藤貞幹 : 藤原貞幹 후지와라 사다모토 라고 표기하기도 한다)은 에도시대(江戶時代) 사람이다. 韓服이라 함은 李氏朝鮮의 복식과 똑같다는 얘기다. 중국 대륙을 차지한 朱元璋이 高麗의 服飾을 그대로 입자, 李成桂는 해결책으로 그 옛날 百濟의 복식을 되살렸던 것이다.

그 당시 스이코(推古) 여왕을 비롯해서 백제계 여왕들은 한국식과 조금도 다를 데가 없는 똑같은 모양의 비단 치마인 어상(御裳)과 양 어깨와 소매에 걸쳐서 큰 용을 수놓은 곤룡포(袞龍袍)인 어대수를 입었다. 지금의 한국 버선과 똑같은 코끝이 오뚝한 버선을 신었다. ...... 그뿐 아니라 왕이 정복을 입을 때 머리에 쓰던 면류관, 왕의 신발인 어석(御舃), 심지어 여왕과 왕후들의 옥패물인 어옥패(御玉珮) 등등 이 모든 왕실 복식 제구 등은 고대 한국 왕실의 복식 제구와 동일한 것들이다(일본문화사, 홍윤기)

古代 韓國 王室이라 함은 李氏朝鮮을 말한다. 倭는 百濟의 侯國이다. 李氏朝鮮도 明의 侯國이다. 그러므로 李氏朝鮮王이나 日本王은 百濟 皇帝의 복식과 제구를 할 수 없었다. 百濟 侯王의 복식, 제구였던 것이다.

應神은 급히 列島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책 한 권 안 가지고 가서 應神의 아들이 성인이 되자, 王仁이 건너가서 글자부터 가르쳐 줘야 했다. 그러니까 王仁이 건너간 것은 405 년이 아니라, 420년대 이다.

韓半島 남해안을 잠식한 新羅軍을 협격 하려면 倭軍의 출발지점은 어디라야 하는가. 北九州이다. 바로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이 있었다고 우기는 곳이다. 하지만 邪馬台는 중국 대륙에 있었다. 應神은 北九州에 도착 했다가, 카와치(河內)로 향했다. 北九州는 군사기지화 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韓半島人들을 병사로 훈련 시켰던 것이다. 그러니까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유적은 기원전 3세기에 건너간 韓半島人과 4 세기 말에 건너간 百濟人의 유적이 혼합되어 있다.

배달은 기원전 27 세기에 鐵器時代로 진입 했는데, 기원전 3 세기에 건너간 韓半島人은 靑銅器를 사용한 이유는? 未開 땅으로 이주 하고픈 철기 제작자는 없다. 韓半島에 있어도 대우받고 사니까. 韓半島人이 列島까지 간 이유는 韓半島 에서는 희망이 없는 계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列島로 간 극소수의 韓半島人은 문명이 후퇴하여 靑銅器부터 다시 제작해야 했던 것이다. 고인돌 역시 韓半島 에서는 배달시대에나 사용했던 분묘제도이다. 列島로 건너간 韓半島人들은 전체적으로 문명이 퇴보한 것이다.

倭는 국가 차원에서 전격적으로 건설한 식민지이고, 원래 목적이 列島의 軍事基地化에 있었기 때문에 철기 제작자들을 이주시킨 것이다.

“農耕的, 呪術的이고 평화롭게만 살”던 列島의 韓半島人이 어째서 12 m나 되는 망루대가 필요 했을까. 바다풍경을 감상 하려고? 倭軍이 百濟軍과 협공 하니까, 新羅軍이 北九州까지 공격범위에 넣은 것이다.

400 년 무렵 일본열도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난다. 갑작스레 새로운 형태의 철갑옷이 출현 하는데, 여기에는 가야의 정결기법이 그대로 도입되어 있다. 이때를 경계로 일본 철갑옷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도 심상치 않은 조짐 이라고 할 수 있다(역사스페셜 1권)

韓半島에 교두보를 마련한 新羅軍을 협공하기 위해서 倭에서도 철갑옷을 만든 것이다. 당시 日本에는 철 수입권을 장악하는 것이 힘을 키워 나가는데 중요 했다는 말은 사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주장이다. 그러므로 伽倻 고분에서 출토된 파형동기(巴形銅器), 벽옥제품(璧玉製品), 청동투검창(中廣形銅矛) 등은 교역의 산물이 아니라 百濟가 만들었다. 列島가 百濟 식민지라서 百濟의 물건들이 건너간 것이다. 스에키(須惠器)도 伽倻가 아니라, 百濟 土器이다.

농경적, 주술적이고 평화적인 성격의 유물은 기원전 3 세기 이후 건너간 韓半島人의 遺物이다. 5 세기 이후가 되면서 鐵劍, 馬具, 甲胄와 같이 전투적이고 한편 귀족적 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격이 강화되는 갑작스런 변화를 보이는 것은 應神이 건너갔기 때문이다. 新羅를 韓半島에서 구축하기 위해 百濟가 列島에 倭를 세우고, 무기를 제작했던 것이다.

이전 까지는 미미했던 고령(高靈)의 대가야 지역에서 400 년대에 접어들며 이전까지 전혀 보이지 않던 철갑옷이 등장하는 것이다. 같은 시기 일본에 출현한 판갑(板甲)과 같은 양식이다. 환두대도(環頭大刀)를 위시한 권위의 상징물도 출토된다. 이를 통해 대가야 지배층의 권력이 강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역사스페셜 1권)

韓半島는 百濟人들의 휴양지 이니까, 군대가 없었을 것이다. 新羅가 침공하자, 그제서야 군대를 파병한 것이다. 新羅 침공을 미리 감지 했다면 예상 상륙지점에 군대를 집결 시켰겠지만. 그러니까 전장에만 군대가 몰렸다.

金官伽倻라고 착각하는 지역을 新羅에 빼앗겼으니까, 밀려난 지역에서 또 다시 철갑옷을 만들고 무기를 제작해야 했다. 그 지역을 이 땅의 사학자들은 大伽倻라고 부른다. 철갑옷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 변화되어 가는 것도 百濟軍이 계속해서 밀렸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金官伽倻에서 大伽倻로 권력이 넘어 갔다는 역사스페셜의 저 글은 유적, 유물의 자의적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니 중국 대륙의 우리 遺跡, 遺物을 중국의 것으로 쉽게 둔갑 시켰던 것이다.

日本의 倭가 新羅軍을 구축하기 위해 세운 百濟 식민지 이니까, 百濟와 같은 무기, 같은 유물이 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 당시 궁월군(弓月君)이 列島의 倭軍을 지휘한 것으로 추정된다.

全羅北道 미륵사(彌勒寺)가 三國遺史에 써 있는 대로라고? 三國遺史는 한단사(桓檀史)부터 철저히 날조된 책이다.16)

◀ 미륵사지 터

기이(紀異) 같은 소리! 다 사람 자식이다. 무지개(虹)가 아니라 태우의(太虞儀) 한웅이고, 龍이 아니라 少典이다. 결국 신모(神母)의 실체는 太虞儀 한웅의 부인이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데, 太虞儀 한웅의 長子는 6 대 한웅(多儀發한웅)이 되어 대제국 배달을 다스리는 최상의 위치에 있었지만, 막내 伏羲는 中土로 들어가 미개 토착민과 더불어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했다. 기술하는 투가 누구라도 中奴가 뜯어 고쳤다고 하지, 우리나라 사람이 썼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으로부터 2 천 년 전에 檀君王儉이 있었다(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三國遺史가 1200 년 경에 쓰여 졌다니까, 2 천년 전이면 기원전 800 년 이라는 소리이다. 그럼에도 堯와 같은 시기라고 했다. 堯는 기원전 2400 년 때 인물이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데, 堯는 檀君王儉의 제후였다. 하도 무능한 인물이라, 檀君王儉이 내쫓아 버렸다. 그래도 中奴들은 태평성대 였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더 중요한데, 三皇五帝는 中土의 토착민이 아니고,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다.

三國遺史에는 神檀樹로 내려온 1 세 한웅 居發桓이 熊女와 혼인하여 檀君王儉을 낳았다고 했지만, 檀君王儉은 18 세 한웅 거불단(居弗檀)의 아들이다. 한웅 居發桓과 혼인한 熊女는 熊族의 女王이었고, 한웅 居弗檀과 혼인한 熊女는 熊族의 王女였다. 熊族이 王儉(배달의 제후)을 배출하기 시작한 것은 배달 개천 이후 천 년이 지나서 이다.

“周나라 武王이 즉위하던 己卯年에 箕子를 朝鮮에 封하였다. 檀君은 藏唐京으로 옮겼다가, 그후 阿斯達로 돌아와 ‘숨어 살면서’ 산신이 되었다(周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三國遺史).” 周나라는 11 세기인지 12 세기인지 개국연대가 아리송한 나라다. 1 世 檀君王儉이 기원전 800 년경에 있었다면서 마지막 檀君이 11 세기인지 12 세기에 생존 했다는 것이다. 箕子朝鮮도 없었던 것이 箕子의 姓은 成이었다. 자기 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자신의 조상이 ''숨어 살면서''라고 쓸 수 있는가? 얼마나 많은 날조와 왜곡이 우리 역사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는지를 이해 하겠는가?

그런데도 이 땅의 사학자들은 三國遺史 紀異編이 민족 자주적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는 民族 自主的일 필요가 없는 나라다. 동아시아의 지배자 였으니까. 민족 자주적이라는 용어는 우리나라의 속국 이었던 중국, 일본 등이나 찾아 헤매야 할 시각이다.

“아! 사악(四岳)이여. 넘실대는 홍수는 넓은 땅을 뒤덮고 질펀한 물은 산을 잠기게 하며, 언덕 위에 오르는 거친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다. 아래로 백성들이 이를 한탄하고 있는데, 누가 이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嗟四岳湯湯洪水滔天浩浩懷山襄陵下民其憂有能使治者 史記)”하고 堯 임금이 묻자 모두 곤(鮌)이라는 사람을 추천 했다고? 史記와 書經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티벳고원에 홍수가 날 수 있는가. 450 mm 밖에 안되는 건조기후대 이다. 그 옛날에는 中土의 연간 강수량이 4500mm였던가.

檀君世紀에도 甲戌 67 년(B.C. 2267) 太子 扶婁가 塗山에서 虞司空에게 五行治水法을 전해 주었다(甲戌六十七年帝遣太子扶婁與虞司空會于塗山太子傳五行治水之法)고 했지, 洪水가 났다는 기술은 없다. 中土가 건조기후라 관개 농사법을 알려준 것이다. 五行治水法으로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는 太白逸史는 역사가 날조된 李氏朝鮮 중기의 책이다. 丁巳 50 년(B.C. 2284) 朝鮮에 홍수가 났을 당시의 상황(丁巳五十年洪水汎濫民不得息帝命風伯彭虞治水定 檀君世紀)을 기록한 우리나라의 역사책을 베꼈던 것이다. 神人王儉이 팽우(彭虞)에게 물을 다스리게 한 것을 곤(鮌)으로 슬쩍 바꿔치기 한 것이다.

▲ 위의 그림은 《신찬성씨록》을 현대일본어로 번역해 놓은 사이트[http://www.h4.dion.ne.jp/~munyu/ookimikeizu/siryo.htm]의 좌경제번(左京諸蕃)上에 수록되어 있는 태진공(太秦公 우즈마사の키미)스쿠네 부분을 캡쳐한 것인데, 이를 살펴보면 출자(出自)는 진시황의 3 세손인 효무왕(孝武王)이라는 것이고, "그 아들 공만왕은 츄우아이(仲哀)천황 8 년에 내조하였고, 다른 아들인 융통왕[혹은 궁월왕(弓月王)이라 한다]은 오우진(應神)천황 14 년에 27 현의 백성을 거느리고 와서 귀화하여 금·은·옥·비단 등의 물건을 바쳤다"는 것과, 그리고 "닌토쿠(仁德)천황 치세에 127 현의 하타(秦)氏를 여러 군(郡)에 나누어 설치하고 곧 누에를 치고 실크를 짜서 바치도록 하였다"는 것과 함께, 닌토쿠천황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秦王=궁월왕이 바친 실, 목화솜, 명주실로 짠 비단은 짐이 입어보니 유연하고 따뜻한 것이 마치 사람의 피부[肌膚 hada)와 같다」라고 하였다는 것, 그로 인하여 하타(波多)라는 姓을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수록되 있다. 물론 날조기사이다.

中奴는 彭虞를 삭제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檀君이 홍수를 만나자 팽우(彭虞)로 하여금 산천을 다스려 백성들의 거처를 정하게 하였다(洪水汎濫民不得息帝命風伯彭虞治水定高山大川以便民居牛首州有碑 檀君世紀)”가 漢書·食貨志에서는 이렇게 바뀐다. “檀君이 洪水를 만나자 팽오(彭吳)를 사신으로 보내 산천을 다스리게 하였다(檀君遭洪水 使彭吳治山川).”

우리나라 역사책을 가져가 베끼면서 문장 하나 놓치지 않고 다 베꼈다면, 우리나라 역사책은 얼마나 방대해야 하는가. 기원전 58 년(한단고기에 따른 高句麗 건국 연도)부터 해서 668 년까지의 高句麗, 百濟, 新羅 등의 역사를 漢(BC 202∼AD 8), 新(8~22), 後漢(25~220), 魏(220~265), 蜀(221∼263), 吳(222∼280), 西晉(266∼316), 東晉(317∼419), 5胡 16國(304~439), 宋(420~479), 齊(479~502), 梁(502~557), 陳(557~589), 隋(581~618), 唐(618~907)의 역사로 분해한다고 해보라. 三國史記는 40 권이 아니다. 高句麗 留記도 100 권이 아니다. 大震國史도, 高麗實錄도 실로 방대한 문헌 이었다.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를 다 빼가고 남은 것이다. 그 뿐인가. 朝鮮, 北夫餘의 역사는 殷, 周, 漢이 차지했다.

유적, 유물을 보고 문헌을 고치는 것은 가장 저렴한 역사 날조 방법이다. 武王의 승부수 라면서 중국 대륙이 아닌, 韓半島에다 가람을 세울 수는 없다. 더구나 7 세기의 韓半島 남부는 新羅가 점령했다. 新羅의 가람을 百濟 皇帝(武帝)가 건립한 彌勒寺라고 날조한 것이다. 彌勒寺라고 우기는 유적이 新羅 감은사지(感恩寺址)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에서다.

미륵사 지하공간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단서는 경주 근처의 감은사지, 통일신라 때 창건된 감은사 금당터에도 이런 지하공간이 있다(역사스페셜 1권)

武王(武帝)의 모친은 사비(泗沘) 남쪽에 살았다면서 무슨 益山의 몰락귀족 서동(薯童)? 12 번(?)이나 전투를 했다는 전초기지에 수십 년의 국력을 결집해서 건축물을 세우는 경우도 있는가. 전쟁 하면서 彌勒寺를 허물겠다는 소리 밖에 안 된다.

益山 왕궁평(王宮坪)의 성벽은 新羅가 진출하기 전 百濟가 쌓았다. 그래서 안압궁(雁鴨宮)의 성벽과 건축기법이 같다. 百濟의 성벽을 新羅가 진출 하면서 그대로 활용한 것이다.

( http://yushin.or.kr/@history/dvd-kbshistory/kbs013.htm 참조)

교토(京都) 청련원(靑蓮院)에서 발견 되었다는, 중국 6朝17) 때 편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百濟 무광왕(武廣王)은 지모밀지(枳慕蜜地)로 천도했다(百濟武廣王遷都枳慕密地)”고 나온다고? 중국에 6 朝가 어디 있는가. 티벳고원 북부, 그것도 한 모퉁이에 자리잡고서 6 朝니, 南朝니 하면서 부를 수 있는가. 靑蓮院이 중국 천태종(天台宗)을 섬기는 사찰로 대대로 중국 문물을 수입 했다고? 날조 중국 6 朝 때 日本은 자력으로 중국 대륙을 갈 수가 없었다.

◀ 복원한 미륵사 석탑의 조감도

일본의 이른바 국풍 문화라는 것은 헤이안 시대 후기인 10세기 이후의 일본문화를 일컫고 있다. 지금까지 1천여 년 간 거의 완전히 한국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일본문화였다. 그런 가운데 9세기 이후부터는 당나라 문화도 조금씩 수용하게 되었다.

설령 일본이 당나라의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 하려고 한다 하더라도 일본에는 당나라에 갈 만한 큰 선박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일본의 견당사나 학승들은 백제배나 신라배를 얻어 타고 고생스럽게 대당 외교나 불교 유학을 겨우 다닐 수밖에 없었다(일본문화사, 홍윤기)

마쓰키 사토루(松来藤曉), 다무라 엔쵸(田村圓澄)는 遣唐使(?)가 唐나라(?)에 갈 때도 新羅 선박을 이용 했다고 밝혔다. 唐나라가 아니라, 大震國이다. “日本의 唐나라 學僧이 新羅의 송사(送使)편에 日本으로 돌아올 때는 반드시 新羅를 경유”(田村圓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大震國이 내륙국 이라서 중국 대륙의 해안을 다 차지한 新羅의 선박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송사(送使)가 아니고, 日本으로 왔다가 本國 新羅로 돌아가는 귀사(歸使)편이다. 그 외 新羅의 무역선을 이용해서 日本은 大震國을 드나 들었다.

百濟 식민지 倭는 百濟 선박에 얹혀서 중국 대륙의 百濟를 드나들며 百濟 문물을 수입했다. 靑蓮院은 韓國 天台宗을 섬기는 사찰로 대대로 한국 문물을 수입했던 것이다. 武廣王? 觀世音應驗記가 眞書라면, 武廣帝라고 써 있어야 했다. 18 세기 이후 있지도 않은 고대 일본의 크나큰 영광을 떠벌리면서 날조했던 것이다. 日本의 역사 문헌치고 날조 안 된 것은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왕궁리 5층 석탑(益山王宮里五層石塔)이 百濟 석탑을 모방한 統一新羅의 석탑? 新羅가 만들었으니까, 新羅 석탑과 비슷할 수밖에.

列島는 나라조차 없는 땅이지만, 新羅는 列島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韓半島를 침공했다. 先占만 하면 되는 땅을 놔두고 韓半島에서 처절하게 싸워댄 것이다. 列島가 가치를 가진 적은 딱 한 번뿐으로 2차 대전 후의 메국(米國)이 유일하다. 列島는 문화의 흔적조차 없는 땅18)이었다. 百濟의 例에서 알 수 있듯이 列島를 식민지화하기 위해서는 수 세기를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百濟가 列島에 倭를 세워 協擊하자, 新羅도 列島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倭를 견제할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변한에서 철이 난다. 韓, 濊貊, 倭가 모두 이것을 가져간다. 마치 돈처럼 사용하며 두 郡(樂浪과 帶方)에 공급한다(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巿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는 三國志 魏書, 東夷傳 역시 날조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책의 내용을 바꾼 것이다. 우선 高句麗 때 中土에서 기어 나온 濊貊은 柴達木盆地로 들어가 高句麗의 속민이 되었다. 속민 스스로 鐵을 가져다 무기를 만들 수는 없다. 高句麗의 감시 하에 농기구나 만들었을까. 그러나 柴達木盆地는 너무 추워 농사에 적당치 않은 지역이다. 그래도 스가하라(管原道眞)의 《유취국사(類聚國史)》 권 193에 수록되어 있는 일본의 學僧 永忠의 편지에 의하면, 밭농사는 지은 모양이다. 濊貊이 낙후된 기술로 무기를 만들어 百濟와의 전투에서 싸워봤자 아무 도움이 안 되니까, 高句麗가 제작한 첨단무기로 무장하고 싸웠다.

高句麗, 百濟 둘 다 스스로를 漢이라 했다. 서로가 한민족을 대표한다고 해서. 우리나라는 기원전부터 高麗 時代까지 桓, 韓보다는 漢을 즐겨 사용했다.

韓이라 한 것은 朝鮮의 三韓이다. 중국은 역사날조 하면서 연대를 일치 시키지도 않았고19), 우리나라 강역 전체의 풍속을 番韓이나 馬韓

◀ 화천 : 해남 군곡리 패총에서 발굴된 화폐의 일종인 화천(貨泉). 중국 新나라의 화폐로 날조 당했다.

등 특정지역의 풍속으로 한정 시키는 버릇이 있다. 일례로 後漢書, 三國志에는 “馬韓 사람들은 잠상(蠶桑)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馬韓人知田蠶作撓布 後漢書)”고 했다. 그러나 蠶桑을 알고 솜과 베를 만든 것은 배달의 강역 전체이다.

慈烏支 한웅이 미개 땅 中土를 정복했을 당시에도 中土로 이주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農蚕織牧 資以爲業 揆園史話)." 누에치며 길쌈해서 만든 비단과 베는 미개 華夏族에게 판 것이 아니라, 朝鮮의 諸侯國들과 교역했다. 미개 中族은 宋 때 까지도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다.” 설마 비단을 가지고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다(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 三國志).”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철전(鐵錢)을 만든 나라는 弁韓이 아니고, 朝鮮이었던 것이다. 朝鮮의 강역 전체에서 鐵錢을 사용했다. “癸卯(B.C. 2238) 9 월, 쌀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 하도록 하였고 ,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으며, 백성들이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했다(斗衡諸器悉準於官布苧市價無處有二民不自欺遠近便之 檀君世紀)." 中土에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鐵錢을 사용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夫餘가 8 萬戶 라는 三國志의 날조기사는 殷나라나 周나라의 인구라고 전술했다. 8 萬 戶는 토굴 속에 살던 未開 華夏族까지 포함한 수치다. 扶婁 檀帝가 계량형과 가격을 통일할 때, 中土에는 돈을 사용할 만한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다. 中土가 鐵錢을 가지고 있었다면, 朝鮮의 제후국과 무역할 때나 사용했다. 朝鮮時代에는 倭가 없었다.

5 세기 무렵 까지 倭는 鐵을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때 등장하는 철정(鐵鋌 : 쇠덩이)은 伽倻에서 건너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列島 최초의 나라 倭가 395 년에 성립했다. 당연히 5 세기 이전에는 鐵을 생산할 수가 없었다.

日本에 있는 鐵鋌은 伽倻가 아니고, 百濟가 만들었다. 그러나 화폐가 아니다. 朝鮮時代에 사용한 鐵鋌이 三國 時代까지 화폐로 사용 하지는 않았다. 新羅가 교두보를 마련한 伽倻라 착각하는 지역의 고분에는 鐵鋌이 많이 발견된다. 전쟁터에서 죽은 장수의 무덤에 화폐를 가득 넣어 두었단 말인가. 百濟의 고분이 아니라 평화롭던 朝鮮時代의 고분 이라면, 가능하다. 百濟의 화폐는 鐵鋌이 아니라 해남 군곡리 패총(海南 郡谷里貝塚)에서 발견된 화천(貨泉)이다. 중국 新나라의 화폐로 날조 당했으나, 티벳고원 북부에 화폐가 있다면, 高句麗나 百濟의 화폐로 교역을 할 때나 사용했다.

그렇다면 전투 중에 무기로 제작할 수 있는 鐵鋌을 부장품으로 넣었단 말인가. 韓半島는 百濟 땅이니까, 철기로 생활용품이나 농기구 등을 충분히 제작하고 있었다. 新羅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 중국 동부에서 철 기술자를 다 데려와야 했다. 전쟁터에는 사람이 살 리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으니까, 百濟의 철기 제작자는 무기 제작자로 변신하면 된다. 韓半島의 철 기술자는 百濟가 新羅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패해서 후퇴하는 마당에 철제품을 방치하고 간다면 新羅가 사용할 것은 뻔한 일. 그렇다면 무덤 속에 감추는 편이 훨씬 百濟에게 유리하지 않은가. 그래서 百濟는 고분에다 남은 鐵鋌을 보이는 곳에 쌓아두지 않고 바닥에 묻어둔 것이다.

百濟軍이 무덤 속에 鐵鋌을 감춘 것을 新羅軍은 알았지만 당장 쓸 것만 꺼낼 수밖에 없었다. 다음 전투지까지 운반할 수레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新羅가 아무리 항해술과 조선술이 뛰어 나다고 해도 중국 대륙 동부에서 선박으로 병력과 말을 수송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수레 제작자 까지 충분히 데려 오지는 않았다. 新羅는 현지에서 전리품으로 조달 하려고 했고, 百濟는 후퇴 하면서 수레를 모두 파괴하고, 수레 제작자는 모두 데려갔다.

日本 최초의 화폐는 텐무(天武) 때 新羅의 부본전(釜本錢)으로 통용 시키지는 못했다. 日本이 본격적인 화폐경제로 전환한 것은 壬辰倭亂 이후이다. 일본은 壬辰倭亂을 통해 李氏朝鮮의 國富를 모조리 긁어갔다. 壬辰倭亂은 李氏朝鮮을 明으로 가는 길목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부를 약탈하기 위한 전쟁 이었다. 征明假道? 홋가이도(北海道) 조차 정복하지 못했다. 더구나 明 이전에 淸부터 정복해야 한다. 현 揚子江 이북에는 李成桂 당시부터 淸이 있었다.

왜성은 일본으로 끌고 갈 조선인이 잠시 머물던 임시 수용소의 역할을 했다. 왜성을 통해 일본에 포로로 건너간 조선인은 15 만명이 넘는다. 왜성은 문화 약탈의 중심지 였던 것이다(역사스페셜 6권)

壬辰倭亂과 丁酉再亂 기간에 축조한 倭城은 남해안을 따라 28 곳이나 되었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뿐만 아니라 다른 일본 장수들도 이들 倭城에서 전쟁 기간의 절반을 주둔 했다는 사실은 壬辰倭亂이 우리나라의 國富를 약탈하기 위해 벌인 전쟁 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壬辰倭亂을 통해 日本은 우리민족이 5500 년 동안 축적해온 동북아의 막대한 재화와 보물 뿐만 아니라, 陶工과 기타 예술가들까지 납치해 갔다. 납치된 陶工 등이 상품을 만들어 내고 이렇게 만든 상품으로 이른바 쇼군(將軍)들은 서양과 교역을 해서 부를 축적했다. 이렇게 손에 쥔 富는 다시 쇼군 밑에 있는 사무라이들을 거쳐 상인들에게 흘러 들어갔다. 자연히 화폐경제가 발달한 것이다. 그래서 에도시대(江戶時代)는 商人의 時代 라고도 한다.

◀ 가부키 선전 포스터

朝鮮通信使의 가르침과 넘쳐 나는 富로 창출한 것이 겐로쿠 문화(元綠文化)이다. 겐로쿠 문화의 특징은 한 마디로 퇴폐성이다. 기껏 우리나라 문화재와 부를 약탈하고 李氏朝鮮의 陶工과 藝術家를 납치하고 朝鮮通信使를 초빙해서 한다는 짓이 섹스고 퇴폐문화의 융성 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一字無識 했던 사무라이들도 덩달아 겐로쿠 문화에 참여했다.

사무라이들은 미개했던 倭奴 땅에서 朝鮮通信使에 의해 계몽된 마지막 집단 이었다. 朝鮮通信使에 의해서 먼저 깨어난 것은 도시 상공인 즉 쵸오닌(町人) 들이었다. 사무라이들이 朝鮮通信使에 의해 직접 계몽 됐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무라이들이 문맹상태에서 벗어 나기로 분연히 일어선 계기는 바로 퇴폐문학의 한 형태인 우키요조우시(浮世草子)였기 때문이다.

倭奴의 퇴폐문화는 문학에만 그치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으로 가부키(歌舞伎)가 있다. 가부키의 ‘키’는 원래 기생 기(妓)자였던 것을, 메이지 때 재주 기(伎)자로 고쳤다. 가부키가 기생들의 연희로 출발한 퇴폐적인 것임을 은폐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자 표기를 보면, 가부키가 얼마나 음란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가(歌:노래), 무(舞:춤, 환롱: 자유자재로 꾸며 농락하다), 기(妓:기생)를 쓴다. 한때 가부키는 性의 문란을 가져온다고 해서 퇴폐적인 일본 당국조차 폐지 명령을 내렸을 정도다. 그 때문에 300 여 년간 남자가 여자 역할을 맡아왔다.

武寧王陵은 가짜다. 어째서 日本은 다른 고분은 모조리 도굴해 갔으면서 武寧王陵(?)만은 온전히 남겼는가. 武寧王陵(?) 역시 도굴 되었었다. 다만 부장품을 바꿔놓은 것이다. 상대적으로 작은 무덤이다 보니까, 韓半島가 倭의 속국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고 여긴 모양이다.

百濟는 黃海를 건너지 않았다. 黃海에서 발해만으로 해안을 따라 沿岸航海를 했다20). 육로가 빠르다면 육로를 택했겠지만, 당시 육로수송은 마차가 전부니까, 대량수송은 배로 했을 것이다. 黃海를 왕래한 나라는 新羅였다.

百濟 영토 韓半島에 新羅가 진출 하면서 남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列島의 倭는 韓半島 북부까지 배(백제 선박)로 가서 육로로 이동하거나 역시 발해만을 거쳐 연안 항해를 했다.

▲ 죽성리 왜성 성벽 : 기장군(機張郡) 죽성리(竹城里)에 위치하고 있는데 무심한 세월에 잡풀만 돋아나고 있다.

百濟가 韓半島에 없었다면, 列島를 식민지화 하지 않았다. 列島는 중국 동부, 渤海灣에서 黃海를 오가면서 식민지를 경영할 만한 가치가 없는 곳이었다. 더구나 식민지를 건설한 5세기 이후의 百濟는 중국 대륙과 韓半島에서 高句麗, 新羅와 전쟁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 이었다.

百濟가 列島를 식민지화 하지 않고, 군사기지화 하는 것으로 그쳤다면, 百濟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植民地로 삼았기 때문에 文明 이라고는 全無한 땅에 온갖 것을 이식해 줘야 했다. 그것도 중국 대륙 에서는 高句麗, 新羅와, 韓半島 에서는 新羅와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서.

滿州도 안전지대 임에도 百濟의 皇族부터 줄줄이 列島에 가서 살았다. 기후가 동북아에 비해 온화해서였겠지만, 이때부터 高句麗에 밀리기 시작해서 西鴨綠江(嘉陵江) 이서와 黃山江(揚子江) 이남을 상실했다. 皇帝로 즉위해야 돌아 오니까, 本國의 귀족들과도 틈이 벌어지고, 정치혼란이 초래된 것이다.

百濟 멸망 전쟁 에서도 列島라는 물러설 곳이 있어서 쉽게 무너졌다. 白江 전투에서 패한 부여용(扶餘勇)은 列島로 가서 왕위(24대 天智)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