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자는 사람이다. 왜 잠을 자는가? 잠자지 않으면 깨지 않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는 사람 역시 나다. 깼다가 잠이 들고 잠이 들었다가 깨어 밤낮이 서로 시작하고 끝이 되며 순환한다.
내가 태어난 지 26년이다. 그 사이 몇 밤을 잠잤고, 몇 날을 깨어있었던가? 세 살 이전은 멍하게 지각이 없으므로 깨어있어도 실은 잠을 잔 것이다. 세 살 이후에는 조금씩 일곱 가지 감정이 생겨 잠자고 깨어있는 것이 비로소 나뉘었다. 장성한 뒤로는 병이 많아 외지고 조용한 곳에 머물러 지냈는데 피곤이 몰려들면 잠을 잤다. 날마다 걸핏하면 낮에도 몇 시간씩 잤다. 게다가 술을 잘 하지도 못하면서 좋아하여 술 한 잔 마시고는 피곤에 지쳐 잠들어버린 일도 종종 있었다. 지난 일을 되짚어 헤아려보니 밤낮으로 잠을 잔 시간이 깨어있는 시간보다 많았다.
아! 깨어있는 시간은 살아있는 것이요, 잠자는 시간은 죽은 것이다. 살아있는 것을 좋아하고 죽어있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렇건만 나는 탐욕스럽게 오로지 잠을 즐길 뿐 싫증을 내지 않는다. 대체 무슨 이유일까? 사실은 자고 깨는 것에도 도가 있는 것이다.
마음이 환경과 어울리고, 몸이 일 때문에 바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소나무 울타리와 국화꽃 핀 화단 사이를 바장이면서 느긋하게 흥얼거리노라면, 더불어 화답할 사람이 없어도 기분이 좋아져 빙그레 웃으며 쓰러져 잠이 든다. 만약 자는 중에 먼 옛날의 고매한 선비나 숨어사는 은사를 만나서 대화라도 주고받는다면 잠을 자는 중이지만 깨어있는 셈이다.
새벽에 나가 밤에 들어오며 작은 이익을 추구하느라 오로지 남의 것을 덜어 제 것을 보태는 일에만 골몰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다 보니 독서하는 책상과 거문고 놓인 탁자를 무슨 죄지은 놈처럼 치워놓고 대신에 쌀 푸대와 돈 궤짝을 친자식보다 사랑한다. 그것 외에는 어떤 즐거움이 또 있는지 모르고 우쭐대며 한 세상을 마친다. 그런 자는 깨어있는 중이지만 실제로는 잠자는 것이다.
제게 주어진 몸뚱어리를 하찮게 여기고, 맑고 깨끗함만 숭상하면서 우리 성인의 도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런 자는 잠자는 것과 깨어있는 것 중간에 있다.
나는 수교(水橋)에 산다. 그 수교를 소리가 같은 글자인 수교(睡覺)란 이름으로 바꿔 붙이고서 그 이름에 내가 지향하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도시에 살기 때문에 고결한 군자들과 어울려서 인생을 꾸려가지 못한다. 그래서 천박하고 인색한 생각이 눈길 던지는 곳마다 일어난다. 더욱이 슬프고 화가 나는 일이 번갈아 마음을 공격해댄다. 그런 것을 잊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았다. 잠을 빼놓고는 달리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맛있게 잠을 자고 있을 때는 내가 잠 속에 있는 줄을 몰랐다가 잠에서 깬 뒤에는 비로소 내가 있게 되었다.
아! 백년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인데 종일토록 번잡하고 바쁘게 지내느라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일을 볼 수 없다. 그럴진댄 잠자는 시간은 많고 깨어있는 시간은 적을까봐 걱정이다.
한밤중이 되어 온갖 소리가 모두 잦아드는 시간에 병풍 너머에서 남들은 한창 코를 골며 잠에 빠져있다. 그때 나 홀로 정신을 퍼뜩 차리고 앉아서 책을 읽는다. 허공을 쳐다보다 책을 보는 그 즐거움은 헤아리기 어렵다. 그렇다면 나는 깨어있는 시간을 밤에 두고 잠자는 시간을 낮에 두어야 할까보다. 자고 깨는 시간을 거꾸로 하면서도 자고 깨는 맛을 아는 자는 나밖에 없다고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수교변명수교설(水橋變名睡覺說)〉, 《서어유고(西漁遺稿)》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