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하는 노인의 성은 박(朴)씨요 세당(世堂)은 그의 이름이다.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는 정헌공(貞憲公)과 충숙공(忠肅公)으로 인조임금 시절 다 같이 높은 벼슬을 하셨다.
노인이 태어나 네 살 때 아버지 충숙공께서 세상을 버리셨고, 여덟 살 때 병자호란을 만났다. 고아가 되고 가난하여 배울 기회를 놓쳤다. 10여 세 무렵에야 비로소 둘째 형님으로부터 학업을 배우게 되었으나 그마저도 열심히 하지 못했다. 나이 서른둘 나던 현종 임금 첫해에 과거시험을 통해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임금을 모시는 시종(侍從)의 반열에 끼어 팔구 년을 보냈다.
그 무렵 자신을 되돌아보니, 재주는 짧고 힘은 부쳐서 세상에서 무슨 큰 일을 할 능력도 없었고, 세상은 또 날이 갈수록 기강이 무너져 어떻게 바로잡을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관직을 벗어던지고 조정을 떠나 동대문 밖에 물러났다.
한양 성곽으로부터 삼십 리 떨어진 수락산 서쪽 골짜기에 터를 잡아 살면서 골짜기 이름을 석천동(石泉洞)이라 하였다. 그곳에 머물면서 자신의 호를 서쪽 개울에서 나무하는 늙은이라는 뜻으로 서계초수(西溪樵수[嫂-女])라 지었다.
계곡물에 바짝 붙여 집을 짓고 울타리는 따로 만들지 않았다. 복숭아와 살구, 배와 밤을 심어서 집을 에워쌌다. 오이를 심고 벼를 수확하는 논을 만들었으며, 나무를 해 팔아서 생계를 꾸려갔다. 농사짓는 철이 닥치면 논밭 사이에서 몸을 놀리지 않은 때가 없어 호미 쥐고 쟁기 멘 농부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처음에는 가끔씩 조정에서 내려오는 명을 받들기도 했다. 하지만 뒤에는 몇 번을 불러도 가지를 않았다. 삼십여 년을 그렇게 지내다 인생을 마쳤다. 나이는 칠십 세를 넘겼다. 그가 살던 집 뒤편 백 수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 장사를 지냈다.
그는 일찍이 <통설(通說)>을 지어 시경과 서경, 그리고 사서(四書)의 뜻을 밝혔다. 또 노자와 장자 두 종의 책에 주석을 달아 그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드러냈다. 특히, 맹자(孟子) 말씀을 몹시 좋아하였다.
차라리 외롭고 쓸쓸하게 남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살아갈지언정, 이런 세상에 태어났으니 이런 세상을 위해 일하고 좋게좋게 지내면 되지 않느냐는 것들에게는 머리를 수그린 채 뒤따르는 짓거리는 결단코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의 의지가 그랬다.
(서계초수묘표(西溪樵수墓表), 《서계집(西溪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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