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촌의 글밭 - 詩.書.畵/南村先生 詩書

왕산 등반후기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8. 12. 1. 18:37

왕산 등반후기 ------- 南村 서 호원 

 

고향땅 왕산의 산행은

간밤에 잠을 설칠 정도로 설려는 산행길이다

50년 동안이나 고이 싸서 갈 머 두었던 그 소중한 추억이

스물 스물 기어 나와 새벽 세시까지 천리 길 유림 땅을 헤매어

뜬 눈으로 지새웠다. 내 고향 함양 땅은 유난히 감나무가 많다.

가을걷이가 끝나갈 즈음이면 집집마다

처마 끝에 감을 깎아서 주렁주렁 내어 건다.

에머랄드빛 푸른창공에서 눈이 시리게 해맑은 가을햇볕이 쏟아 내려와

농익은 햇 감의 속살을 파고들면 선홍색의 그 아름다운 자태가

눈부시게 빛나는 꽃이 된다 하여 꽃 감이라 하였으리라.

개구쟁이 녀석들이 못내 참지 못하고 어른들 눈길 피해 꽃 감을

빼어다가 뒤 곁으로 돌아가 키들거리며 동무하고 마주보며 한입 베어 물면

몰캉하고 쫀득한 것이 씹을 것도 없이 스르르 녹아 넘어갈 때

그 깊은 향내와 단맛을 누구라서 잊을 수 있더란 말인가?

유림초등학교 휴천 초등학교 소풍을 가면 왕릉으로 간다.

삼베 보자기에 빨간 햇고구마 몇 개 싸고 밤을 쪄서 실에 꿰어

넣어 주고 돈도 20환 쥐어 준다. 해져서 실로 꿰매어 신던

검은 고무신! 불쌍하신 우리 어머니는 꼭 소풍 때 맞춰서 새 걸로

사 주신다. 지금 생각하면 6.25전쟁이 휩쓸고 간 황량한 시대에

이것도 오감타! 밤새 머리맡에 놓아둔 그 새 신발을 몇 번이나

손으로 쓰다듬으며 내일 소풍 생각에 마음 설랬다.

엄청 강이 엄청 깊은 것으로 기억 된다 육학년 형님 누나들이

1-2학년들 업어 건네준다. 그때만 해도 수염이 시커먼 사람들도

있고 결혼을 한사람도 있었다. 또 어린동생을 업고 학교에 오는

여자아이들도 많았으나 소풍날만은 예외였다.

 

그 코 묻고 때 국에 절은 가난한 추억의 왕산을 오늘 달려가고 있다.

때마침 김장철이라 여성 향우들이 많이 보이지 않고 버스가

헐 빈 하다. 했더니 신갈에서 7사람이 동승했다. 정재삼 등반 대장이

초대한 백두산 산악회대원들이라 소개 됐다. 그로서 버스가 정원이

찼다 모두 그분들을 반갑고 고맙게 생각 했다. 대장의 奇智가 놀랍다.

나는 준비 해 간 건강 관련 강의를 했다.

내 직업이 참 옻 진액사업을 하는 사람이니 물건 팔려는 것 아닌가?

오해 받는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건 아니기에 용기를 내었다.

 

                      (유림 사람들 대부분이 이 화장산 정기를 받고 태어 났다.)

이들이 모두 나와 같이  지리산/화장산 정기를 받고 태어난

정말로 내 살덩이 같은 향우들 더구나 40대/50/60대가 대부분인데

건강을 챙길 나이이기 때문에 그들의 건강을  위해서 진정으로

도움 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다.

생리학/병리학/약리학으로 나누어 대강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새벽 5시부터 일어나 설쳐왔던 향우들인지라

눈을 감고 조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 세월 230여회 강단에 서왔지만

오늘처럼 맥 빠지는 것도 처음이다. 그래서 혼자의 욕심이려니 하고

그 정도에서 접고 다음기회를 보기로 했다.


별로 막히지 않는 고속도로 아주 맑은 날씨와 1급 기사님의 운전 기술

덕택에 불과 3시간 여 만에 왕산 아래에 도착 했다.

그리고 강 성갑 유림 면장님이 마중을 나와 탑승했다.

그리고 반가운 인사말씀을 나누고 함께 산행을 했다. 왕산 자락을 굽이돌아

류의태 선생의 동상이 있는 한의원 박물관 입구에서 모두 하차 했다.

내 고향 지리산아래에 명의들이 많았다 류의태 선생을 비릇 하여

동의보감을 쓰신 허준선생 최근에 죽염을 만드셨던  명의

김일훈 선생에 이르기 까지

 

모두 모여 기념사진을 촬영 하는데 유림 면장님께서 솔선하여 촬영을 해주시는

번쩍이는 써비스 모습이 매우 돋보였다.

한의를 공부 하는 내게 한의원 박물관은 참으로 큰 의미가 있는

곳이지만 시간이 되지못하여 들어가 보지 못하고 아쉽게 지나쳤다.


해발 848m의 필봉산자락을 오르니 키를 넘는 갈대가 우리를

반긴다. 그 갈대숲을 헤치며 오르는 산행은 가을 산행의 백미다.

가다가 갈대숲에서 길을 잃고 “여기가 아닌 게비여!”

 

하고 되돌아 내려오기도 하고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없는

험난한 길로 오르면서 “여기도 아닌게 비여? 아까 거긴가?

하고 농을 하면서 길도 아닌 산비탈을 오르고 또 올랐다.

 

붓끝과 같다 하여 필봉산이라 했다는데 과연 그 정상은

가파르고 험했다. 험난한 바위절벽 암벽의 틈바구니를

기어서 오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결국 필봉산 정상에 올랐다.

모두 싸온 도시락을 내어 놓고 술도 한잔씩 곁들였다.

높은 산 정상인데도 식사하는 동안은 바람도 불지 않고

눈이 시리게 파란 가을 하늘 아래 펼쳐진 고향의 산하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날씨를 부조해 주시는 옥황상제님과

필봉산 산신령께 감사를 드렸다.

 

그 유명한 지리산 천황봉이 바로 보이고 그 아래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첩첩산중 숫한 봉우리들이 용트림으로 구비 쳐서

바람을 갊머 마을을 형성하고  명당 묘자리도 수수만만이다.

그 산맥 골짝마다 큰물 작은 물  모이고 합쳐져서

큰 산을 만나서는 오래 기다려 주느라 큰 강을 이루고

작은 산을 만나서는 넓게 크게 멀리멀리 돌아주는 후덕함에 돈 밭 전답이 수수 천천

 

산줄기가 바람을 갊어 만물을 낳고 

강줄기가 물을 얻어 만물을 기르는

風藏得水(풍장득수) 풍수지리의 혜택으로 우리가 이 함양 땅에 태어나

수수천년 넉넉히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던가?

대저 사람이 무엇을 갖고 있는가? 평생 수십 트럭 음식을 먹고도 아직도

더 달라고 벌리고 있는 입 구멍 밖에 더 있던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수수천년동안 백만석 천만석 저 땅에서 구하여

먹었는데 올해도 저 山河는 한 치 어김없이 넉넉한 오곡백과를

주렁주렁 열어낸다.

사람이 그 골짜기에 살 때는 모르고 살다가 오늘

왕산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니 천지조화가 한눈에 보인다. 어찌 天地가 베푸는

大德에 머리 숙여 감사하지 않으리요? 누구라도 천지 앞에 겸허해야 하고

이 모든 것을 주재 하시는 상제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면장님은 연신 저곳에 체육공원을 만들고 저곳에 농공단지... ...

하면서 유림면 발전의 청사진을 설명 하신다.

그래! 이 땅을 마리개질 하는 저 훌륭한 일꾼들이 있어

이 땅이 척박해지지 아니하고 년년세세 새롭게 발전 하리라.

필봉산의 능선을 따라 함양군과 산청군의 산천경계에 흠뻑 취해

가다 보니 어느새 왕산의 정상에 다다랐다. 해발923m

 

이 나라의 산 이름 중에 王자를 붙이는 산이 또 있을까?

신라에게 좃겨 가다가 이산 아래에 묻힌 가야국의 왕

가야국의 화려한 역사가 신라에 의해 망해버린 그 한을 왕산의

이름으로라도 해원이 되었으면 한다.

 

내려오는 산행은 곧게 뻗어 잘 자란 소나무 숲 사이로 내려 왔다

너무 빽빽하게 심어 가늘고 길게 자란 저 소나무들을 솎아주어

잘 다듬어 기르면 훌륭한 휴양림이 될 것이다. 지리산은 분명

내 고향 함양에 큰 재산이다. 잘 가꾸면 필경에는

세계의 관광객들이 다 찾는 자연 휴양림이 될 것을 믿어본다.

류의태 약수터->구형왕릉->망경루->덕양전 을

돌아보며 하산을 하니

 

유림면 사무소에 술과 고기와 과일을 차려두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

콧등이 시큰하도록 고마웠다. 면장님 이하 파출소장님과

각 동네 이장님 그리고 여러 유지 분들과 임원들이 차려로 소개 되었다.

고향을 찾아본 것만으로도 감회가 깊은데 이렇듯 따뜻하게

맞아주는 고향 분들의 후의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1시간여 짧은 시간이건만 흐뭇하고 흠흠한 시간이었다.

나는 면장님과 기관장님들에게 말했다.

 

오늘 같은 이런 시간은 참으로 잘 하신 일입니다.

이 땅에서 태어나 천리타향으로 뿔뿔이 떠나간 유림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 사람들 가슴에는 항상 고향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는 자본과 기업 /기술이나 과학/ 예술이나 학술

정말 우리가 알 수도 없는 많은 것들을 객지에서 구축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런 향우들을 고향에서 감싸 않으면 그리고 그들이

고향을 위해서 무언가 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거대한 자산이요

인프라입니다. 부디 타관객지 외로이 떠난 사람들이 이제는 고향의

거대한 자산이 되어 돌아와 윈윈이 이루어지게 하시길

간절히 당부 하고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다.

그리고 관광버스 바퀴가 구르기 시작 하자

언제나처럼 노래방이 열리고

30분간 미치는 디스코 타임이 있은 후에 사당동에서 후다닥 헤어졌다.

이번 산행은 고향의 땅을 밟아보는 것에 큰 의미가 있었고

내 고향 산하를 한 눈에 내려다 본 것이 평생의 기념이 될 만하며 

내 고향 기관장/유지 분들과 서로 함께 도울 수 있는

길을 모색 하자는 대화를 했던 것이 큰 성과였다고 봅니다.


동물이나 물고기 중에도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種이 많습니다.

인간에게도 회기본능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늙으면 타향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어릴 때 같이 놀던 친구들과 어울려 노년을 보내고 싶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향우님들이여! 지난 세월동안 님께서

타향에 쌓은 공적들을 그대로 고향땅으로 가지고 가서

고향발전에도 기여 하고 님이 평생 꿈꾸던  금의환향의 소원도

이루신다면 그야 말로 금상첨화가 아닐까요?

끝으로

이번 산행을 준비하여 끝까지 힘써 주신 등반 대장을 비릇한

모든 임원진께 모든 회원들을 대신하여 깊은 감사드립니다.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남촌의 왕산 산행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