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의학속 사상/② 의학의 시발2(동아시아): ‘황제내경’
2000년 전의 지식이 지금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고대에 이룩된 불교나 기독교 같은 종교는 오늘날에도 가장 강력한 종교다. <논어>나 <노자>,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등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고전이다.
하지만 2000여년 전의 의학지식이 현대의 과학시대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은 진실로 놀랄 만한 일이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탄생한 한의학 지식체계는 오늘날 한의학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몸을 이해하고, 병의 성격을 규정하고, 몸의 병을 읽어내고, 그에 대해 적절한 치료법을 제시하는 원칙은 오늘날에도 생생히 살아 있다.
동아시아의 의학이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가? 이는 흥미로운 질문이다. 그 경위를 꼬치꼬치 캐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크게 보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황제내경>이 고대 한의학 역사의 분기점을 이룬다는 점이다. <황제내경>이라는 존재는 잔잔한 평지 위에 갑자기 솟아오른 거대한 산악과 같다. 왜냐하면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몸과 병, 치료술을 일관되게 유기적으로 설명한 저작이 동아시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런 일이 가능했을까? 옛날의 의가들은 <황제내경>이 성현이 내렸다고 믿어왔다. 대자연과 인체, 병과 의술의 엄청난 비밀을 한 눈에 파악한 성현이 그 깨우침을 책자로 정리하여 뭍 인간에게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책 이름에 황제가 붙은 것은 이를 암시한다. 황제는 중국 고대 전설상의 다섯 제왕 중 하나로 의학 이외에도 병장기, 배와 수레, 활과 화살, 의복 등을 창안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황제’는 전설상 인물
<황제내경>이라는 책이름은 전설상 인물인 황제가 일러준 최상의 의학책이라는 뜻이다. 황제라는 이름이 책 이름에 보이듯, 안의 내용이 대체로 황제와 그의 스승들의 문답 형식을 띠고 있다. 내경이라는 말은 생명의 핵심 또는 의학의 핵심을 담은 경전이라는 뜻이다. <황제내경>은 <소문>과 <영추>라는 두 종류의 책을 한데 합쳐 부르는 것이다. 흔히 소문은 평소의 문답 또는 음양오행에 관한 중요한 질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영추는 생명의 핵심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지만 그 뜻이 모호하여 이름 풀이에 대한 똑 부러진 정설은 없다.
<황제내경>이 어떤 책인지 잠깐 맛만 보도록 하자. <소문>의 첫 질문 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옛날 사람들은 모두 백 살이 넘어도 쌩쌩했다고 하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오십만 되면 빌빌거리니 바뀐 세상 때문인가요, 아니면 사람의 잘잘못 때문인가요?” 이렇게 황제가 묻자 기백이 답한다. “옛 사람은 자연에 순응하고, 음식을 절제하고, 정력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서 술에 절어 있고, 툭하면 축첩하고 술 취한 채로 방사하여 정력을 소비하니 어찌 빌빌거리지 않겠습니까?” 이 문답은 <황제내경>이 추구하는 의학의 궁극 목적을 잘 함축하고 있다. <영추>에서도 황제와 기백의 문답을 하나 뽑아 본다. “맥이 진맥 부위에서 땅기게 되면 그 느낌이 어떻습니까?” “그럴 경우에는 맥의 부위가 크고, 맥의 양상은 단단하고 껄끄럽습니다.” <황제내경>에서는 수백, 수천의 전문적인 의학 내용이 이런 식으로 풀이되고 있다.
<황제내경>이라는 말은 <한서> ‘예문지’에 처음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 책에 섞인 여러 학설과 주장으로 미루어 이 책이 전국시대-한대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의가의 합동작업물이라 추측해왔다. 최근의 괄목할 만한 고고학 발견이 이를 뒷받침 한다. 1973년 한왕 마왕퇴 고분에서는 침구법, 진맥법, 치료법, 양생법 등에 관한 15종의 의서가 발굴되었고, 1983~1984년 장가산 한묘 고분에서도 2권의 의서가 나왔다. 이런 자료는 후대에 걸쳐 잘 정리된 의학내용에 익숙해 있던 의학사 연구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정제되지 않은 의학의 맨살을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소설에 비유하자면, <황제내경>은 완결판 출간물이며, 이들 출토물은 지난한 창작과정 중 한 시점의 난필 초고라 할 수 있다. 그 쪼가리들은 <황제내경>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점복적 치료 내용을 담고 있었고, 침놓는 혈자리의 위치와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후대 12경락으로 정리된 그것과 다른 경락의 존재를 싣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최소한 다음 세 가지다. 첫째, 고대 중국의학이 이런 풋풋한 의학지식 사이에서 꽃을 피웠다는 점이다. 즉 고대 중국사회에서 여러 의학적 논의와 방법의 고안과 경쟁, 그것 사이의 취사선택과 보완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는 고대 중국의학의 성립이 더욱 나은 의학지식을 모색했던 수많은 의학자 또는 그 유파들의 열성과 노력의 결과였음을 뜻한다. 둘째, 한대까지만 해도 아직 <황제내경>의 권위가 확립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셋째,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황제내경>이 점복적, 주술적 내용을 배제하고, 의학이론 사이에 보이는 모순점을 최대한 해소한 최종 저작물의 성격을 띠었다는 점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하늘과 땅, 인간과 만물 등에 관한 주제를 탐구하면서 그것을 고도의 질서를 갖춘 학문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들은 세상이 기로 꽉 차 있다고 보았으며, 그것 사이의 질서를 음양과 오행의 순환과 조화, 대립과 갈등으로 설명했다. 심지어는 인간의 정신과 윤리, 도덕까지도 그것으로써 이해했다. 이런 내용은 기원전 저작인 <관자>와 <회남자> 등에서 단초가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확대하여 인간의 몸과 병, 의학에 관해 전문적 논의를 펼친 것은 <황제내경>의 몫이었다. 이 책에서는 몸과 병, 의학을 둘러싼 모든 현상에 대해 초자연적인 해석을 거부했다. 대신에 철저하게 기, 음양, 오행 등의 개념으로 그것을 해석하고 체계화했다. 여러 사상서에 보이는 초보적인 내용과 견주어 볼 때, <황제내경>의 논의는 너무나도 넓고 깊다. 고대 중국사회에서는 이만한 자연학 책은 다른 분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기’를 의학으로 확대
<황제내경> 전통은 한대를 거쳐, 당대를 거쳐, 송대를 거쳐 더욱 완성도를 높였다. 수많은 주석 가운데 양대 전원기의 체제 정리, 수대 양상선의 주석, 당대 왕빙의 세밀한 주석, 송대 임억과 고보형의 신교정 등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이와 함께 한국과 일본의 기여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1091년 고려왕실이 중국에 보낸 <영추>는 당시 가장 완전한 선본으로서 송대 신교정의 저본이 되었으며, 17세기 조선의 <동의보감>은 <황제내경>의 핵심을 기준으로 하여 당대까지의 의학을 훌륭하게 정리했다. 19세기 일본의 학자들은 <황제내경>과 그것의 주석서를 철저히 고증하여 이 분야 연구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이처럼 <황제내경> 전통은 당대 중국인만이 아닌, 후대 동아시아 각국의 의가들이 함께 일구어 왔다.
동아시아 고대 의학으로는 <황제내경>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대 장중경의 <상한론>, 위나라 화타의 외과수술, <신농본초경>의 본초학도 있었다. 낱낱을 보면 이들이 담고 있는 내용은 엄청난 것들이다. <상한론>은 약물 처방의 전통을 만들었으며, 오늘날에도 그 처방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몸속 오장을 수술할 정도였던 화타의 수술은 현대의 수술을 떠올릴 정도로 뛰어났다. <신농본초경>은 그간의 본초학 지식을 망라한 동아시아 최초의 약전이었 다. 이런 것에 견주어본다면 <황제내경>이 제시한 치료술 그 자체가 특별히 더 뛰어났다고 볼 수 없다. 똑 부러진 수술법이 있는 것도 아니며, 약물 처방은 고작 11개에 불과할 뿐이다. 대부분은 침구술이고, 그 가운데 실제 임상에 적합지 않은 것도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내경>을 첫손에 꼽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과연 대우주와 인체라는 소우주의 조화, 기·음양·오행과 관련된 오장육부의 생리학, 기가 온몸을 순환한다는 12경맥이론, 이런 것들을 배제한 한의학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이런 내용을 정립한 <황제내경>을 동아시아 최고의 경전으로 받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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