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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의 자식교육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5. 29. 14:33

- 이백일흔두 번째 이야기
2013년 5월 27일 (월)
도둑의 자식교육
  교육 관련 뉴스는 어느 것 하나 암울하지 않은 것이 없다. 교육을 사적 이윤추구 사업의 하나로 여기는 사립대학들에서 잇달아 들려오는 인문학 관련 학과를 폐과한다는 소식, 중등학생의 자기 주도 학습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다는 보고, 교육 폭력에 억압된 학생들의 자기 방어 기제로 나타나는 갖가지 유형의 학교 폭력에 관한 뉴스……

  예로부터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라고 한다. 국가의 백 년 미래를 예견하고 백 년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 교육이라는 말이겠다. 그런데 이 말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교육을 모독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광속도로 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백 년을 내다보는 일은 아예 당키나 한 말이겠는가! 다만 조령모개(朝令暮改) 하듯이 대학 입시제도가 바뀌고 정권의 교체에 따라 교육이념이 엎치락뒤치락하니 백 년은 고사하고 몇십 년이라도 길게 내다보고 교육의 틀을 짜고 운영하기를 바라는 시민의 바람은 언감생심이다. 교육철학은 아예 있어본 적이 없고, 교육행정은 속속들이 부패하고 가닥가닥 헝클어져서 도무지 손을 쓸 수가 없을 지경이다. 대학의 입시제도는 해마다 바뀌어서 인재를 선발한다는 본래 기능을 잃어버렸고 사교육은 학교가 그저 학생들을 관리하고 감시하는 역할만 하도록 만들어버렸다. 대한민국의 교육은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다.

  사회학자, 정치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교육학자, 철학자들이 저마다 다양한 관점과 각도에서 이 나라 교육이 황폐해진 까닭을 분석하고 고찰하고 해결책을 찾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교육에 관한 한 무대책이 유일한 대책이라는 자조 섞인 푸념은 더 이상 과장이 아니다.

  평민 가운데 도둑질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 있었는데 아들에게 도둑질에 관련한 모든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도둑의 아들도 자기 재간을 자부하고 자기가 아버지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여겼다. 그래서 매번 도둑질할 때마다 반드시 아들이 먼저 들어가고 나중에 나왔으며 자질구레한 것은 버리고 귀중한 물건만 훔쳤다. 귀로는 먼 데서 나는 작은 소리도 듣고 눈으로는 어둠 속에서도 살필 수 있어서 도둑들로부터 기림[譽]을 받았다.
  아버지에게 뽐냈다. “내 기술이 아버지 기술과 차이가 없고 게다가 힘은 훨씬 강합니다. 이대로 간다면 무엇인들 못할 게 있겠습니까?”
  아버지 도둑이 말하였다. “멀었다. 지혜란 배워서 성취하는 데서 막히고 스스로 터득하는 데서 넉넉하게 된다. 너는 아직 멀었다.”
  “도둑의 도는 재물을 훔치는 것으로 공을 삼습니다. 나는 늘 아버지보다 공이 배나 많지요. 또 나는 나이가 아직 젊으니 아버지 연세가 되면 당연히 특별한 수단을 갖게 될 것입니다.” “멀었다. 내 기술을 쓰면 겹겹으로 두른 성도 들어갈 수 있고, 몰래 감춘 것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재앙이 따른다. 찾을 만한 자취가 없고 임기응변하여 막힘이 없는 경지는 스스로 터득한 바가 있지 않은 사람은 이를 수 없다. 너는 아직 멀었다.” 
  그러나 아들은 오히려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밤에 도둑은 아들과 함께 어떤 부잣집을 털러 가서 아들에게 보물창고에 들어가게 하였다. 아들이 한참 탐을 내어 보물을 챙기고 있는데 도둑이 밖에서 문을 닫고 자물쇠를 걸고 소리를 내어서 주인이 듣게끔 하였다. 주인집에서 도둑을 쫓아갔다가 돌아와서 보니 자물쇠가 그대로 잠겨 있었다. 주인이 안으로 들어가자 아들은 창고에서 밖으로 나올 길이 없었다. 손톱으로 긁어서 쥐가 물건을 쏘는 소리를 냈다. 주인이 “쥐가 창고에서 물건을 쏠아대니 쫓아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고 등불을 켜고 자물쇠를 끌러서 안을 살펴보려고 하였다. 아들이 그 틈에 빠져나와 달아나자 주인집에서 함께 뒤를 쫓았다. 아들은 궁지에 몰려 벗어나지 못할 줄 생각하고 못을 돌아 달아나면서 돌을 집어서 물에 던졌다. 쫓던 사람들이 “도둑이 물에 뛰어 들어갔다.” 하고 못가의 난간을 둘러막고서 잡으려 하였다. 아들은 이러는 틈에 빠져나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말하였다. “새나 짐승도 오히려 제 새끼를 보호할 줄 아는데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도 몹시 하십니까?”
  도둑이 말하였다. “이제 앞으로 너는 마땅히 천하를 홀로 주름잡게 될 것이다. 사람의 기술이란 남에게서 배운 것은 푼수에 한도가 있고 마음에서 터득한 것은 응용이 무궁하다. 하물며 곤궁하고 답답한 상황은 사람의 의지를 견고하게 하고 사람의 인덕을 완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 내가 너를 곤궁하게 만든 까닭은 바로 너를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고, 내가 너를 함정에 빠뜨린 까닭은 너를 건져주기 위함이었다. 창고에 갇히고 쫓기는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어찌 쥐가 쏘는 시늉을 하고 돌을 물에 던지는 기묘한 꾀를 낼 수 있었겠느냐? 너는 곤궁에 빠져서 지혜를 짜냈고 변고에 마주쳐서 꾀를 냈다. 의식의 근원이 한번 열리면 다시는 헷갈리지 않을 것이다. 너는 마땅히 천하를 홀로 주름잡게 될 것이다.” 그 뒤 과연 천하에 당하기 어려운 도둑이 되었다. -이하 생략-

民有業盜者, 敎其子盡其術. 盜子亦負其才, 自以爲勝父遠甚. 每行盜, 盜子必先入而後出, 舍輕而取重. 耳能聽遠, 目能察暗, 爲羣盜譽. 誇於父曰, “吾無爽於老子之術, 而強壯過之. 以此而往, 何憂不濟.” 盜曰, “未也. 智窮於學成而裕於自得. 汝猶未也.” 盜子曰, “盜之道, 以得財爲功. 吾於老子功常倍之. 且吾年尙少, 得及老子之年, 當有別樣手段矣.” 盜曰, “未也. 行吾術, 重城可入, 祕藏可探也. 然一有蹉跌, 禍敗隨之. 若夫無形跡之可尋, 應變機而不括, 則非有所自得者不能也. 汝猶未也.” 盜子猶未之念聞. 盜後夜與其子至一富家, 令子入寶藏中. 盜子耽取寶物, 盜闔戶下鑰, 攪使主聞. 主家逐盜返, 視鎖鑰猶故也. 主還內, 盜子在藏中, 無計得出. 以爪搔爬, 作老鼠噬嚙之聲. 主云, “鼠在藏中損物, 不可不去.” 張燈解鑰, 將視之. 盜子脫走, 主家共逐. 盜子窘, 度不能免, 繞池而走, 投石於水. 逐者云, “盜入水中矣.” 遮躝尋捕. 盜子由是得脫歸. 怨其父曰, “禽獸猶知庇子息, 何所負, 相軋乃爾.” 盜曰, “而後乃今汝當獨步天下矣. 凡人之技, 學於人者, 其分有限, 得於心者, 其應無窮. 而况困窮咈鬱能堅人之志而熟人之仁者乎? 吾所以窘汝者, 乃所以安汝也, 吾所以陷汝者, 乃所以拯汝也. 不有入藏迫逐之患, 汝安能出鼠嚙投石之奇乎? 汝因困而成智, 臨變而出奇. 心源一開, 不復更迷. 汝當獨步天下矣.” 後果爲天下難當賊.(下略)
 
- 강희맹(姜希孟,1424~1483),「훈자오설(訓子五說)ㆍ도자설(盜子說)」,『사숙재집(私淑齋集) 』권9

 

▶ 강희안(姜希顔,1417~1464)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그림을 그린 강희안은 이 글을 쓴 강희맹의 형이다. 물 흘러가는 것에서 천도의 유행을 관조하며 자연과 인간사의 이치를 스스로 터득하는 현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강희맹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문장에 뛰어났고 행정에도 공정하고 유능하여서 세종과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지식인으로서 박학다식하며 형 강희안(姜希顔)과 함께 그림에도 뛰어났다. 조선 초기 문화 편찬 사업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다. 이 글은 그가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우화 형식으로 쓴 연작 수필 다섯 편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은 누구나 제 삶을 살아야 한다. ‘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당위적인 언명을 하니까 그러면 제 삶을 살지 않는 사람도 있단 말인가 하고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렇다. 제 삶을 스스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제 삶을 산다는 것은 제 발로 딛고 제 손을 놀리고 제 눈으로 사물을 보고 제 귀로 소리를 듣고 제 혀로 음식을 맛보고 제 입으로 말하고 제 머리로 판단하면서 살아가는 일이다.

  교육은 바로 자연에서 생물학적인 존재로 태어난 한 사람을 사회에서 문화적인 한 주체로 빚어내는 일이다. 인류가 축적해온 지혜와 지식을 습득하고 이를 토대로 자기 삶을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가도록 피교육자를 길러 내는 것이 교육의 본령이다. 다시 말해, 교육은 단순히 과거의 지식, 또는 기존의 체계화한 지식을 전수하는 일이 아니라 피교육자가 과거의 지식을 바탕으로 삼아 주체적으로 자기 세계를 구성할 수 있도록 잠재적인 역량을 계발하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서민들이 생각하는 교육의 목표는 결코 피교육자를 주체적 시민으로 키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설령 겉으로 내세우는 교육 이념은 그러하다 하더라도 교육자나 피교육자가 속에 감추어 둔 욕망은 그렇지 않다. 체계화한 단편적인 지식을 남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주입하여 국가가 선발하는 시험에 합격하고 국가가 인정하는 자격을 취득하여서 수익이 많고 지위가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교육은 산교육이 아니며 이렇게 얻은 지식은 산지식이 아니다.

  대학생을 언필칭 청년학도라고 일컬은 적이 있었다. 청년학도라는 말에는 아직은 자기를 스스로 책임지는 성인은 아니지만, 몸과 마음이 다 자라서 앞으로 곧 사회에 나가 자기와 사회를 책임지는 주체가 될 역량을 기르는 청년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제 우리네 대학생은 청년학도라는 말이 무색하다. 몸은 청년이지만 정신은 아직도 부모의 절대적인 양육을 받아야 하는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학생 자녀를 위해 어머니가 성적 이의신청을 하고, 수강 신청을 대신 해준다는 웃지 못할 말을 들은 지는 이미 오래전 일이다. 우리네 대학생은 제 앞가림도 할 줄 모르는 몸만 자란 어린애가 되어버렸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소양마저도 습득하지 못하여 감정을 날것 그대로 발산하고,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줄 모르고, 자기가 하는 일을 성찰할 줄 모르고, 도대체 자기 앞날을 스스로 설계하지 못하고, 삶을 음미할 줄 모른다. 왜, 누가 우리네 청년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헬리콥터 엄마와 기러기 아빠가 우리네 청년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권력과 자본의 결탁이 이렇게 만들었는가?

  아이들은 제 또래에서 저희끼리 어울리고 부대끼고 치고받고 하면서 자라나 앞으로 제 또래와 함께 자기들의 삶을 살고 자기들의 사회를 영위해 간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살아갈 세상은 부모가 사는 세상과 다르다. 부모는 아이들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고 아이들이 살아갈 사회를 대신 만들어줄 수도 없다.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삶은 자기가 살아가야 하고 그들의 사회는 그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네 부모들은 아이의 동무까지 가려서 정해주고 아이가 자연으로 터득해야 할 습성과 소양을 하나하나 지식으로 넣어주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기와 세계를 감성적으로 접해야 할 시기에 그들에게 꼭 필요한 정서적 소양까지도 체계화한 지식과 빈틈없이 짜인 과정을 통해 주입하려고 한다. 이는 마치 1.5볼트 불을 켜는 꼬마전구에 200볼트 전류를 흐르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차라리 무관심한 부모가 어쩌면 더 나은 부모일지도 모른다. 부모가 무관심하면 아이들은 제 세계를 저 스스로 만들어가게 된다. 아이가 한 살 때는 1m, 두 살 때는 2m, 세 살 때는 3m 떨어져서 보아야 한다. 아장아장 걷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고, 쓰리고 아파 울더라도 그러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제 발로 걷는 힘을 지니게 된다. 걸음마를 배우기 위해서는 수백 번, 수천 번 넘어지고 엎어져야 한다. 넘어지고 엎어지는 아이들이 안쓰럽다고 아이들의 걸음마를 대신 해 줄 텐가! 많이 넘어져 본 아이들이 안 넘어지고 거침없이 뛰어다닐 수 있다. 곤궁과 시련은 슬기를 낳고 따분함과 심심함은 창의력을 낳는다.

  아무리 단편적인 지식을 많이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지식을 꿰고 엮어서 새로운 쓸모 있는 지식으로 승화시키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산지식이 되려면 그 지식을 엮어내는 가치관과 통찰이 필요하다. 도둑의 아들은 이미 기술로는 완벽하였고 게다가 한창 원기 왕성한 힘도 넘쳤다. 그러나 꼭 필요한 것이 한 가지 모자랐다. 그것은 바로 낱낱의 기술을 엮어서 자유자재로 부리는 슬기였다. 이런 통찰과 슬기는 스스로 터득할 일이다. 도둑은 아들을 궁지에 몰아넣음으로써 단편적인 기술을 엮어낼 수 있는 슬기를 터득하도록 이끌어냈다. 이처럼 교육은 체계적인 지식을 외부에서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듯이 꼭 필요할 때 꼭 필요한 만큼만 촉발하여서 스스로 터득하게 하는 일이다. 마치 점화플러그가 압축된 공기에 불꽃을 튀기듯이 탁 건드려 주어서 스스로 활연관통(豁然貫通)하게 하는 일이다.


  

  
김태완 글쓴이 : 김태완
  • (사)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 소장
  • 주요저서
    -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소나무, 2004
    - 『중국철학우화393』 소나무, 2007
    - 『율곡문답, 조선 최고 지식인의 17가지 질문』, 역사비평사, 2008
    - 『경연, 왕의 공부』, 역사비평사, 2011
    - 『맹자, 살기 좋은 세상을 향한 꿈』, 아이세움, 201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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