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술잔 들어 봄을 보내며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6. 1. 14:09

- 예순한 번째 이야기
2013년 5월 30일 (목)

술잔 들어 봄을 보내며

많은 백발 술잔 앞에 다시금 서글픈데
가는 세월 물과 같아 쉼 없이 흘러가네
산새도 시름하지만 봄은 이미 저무니
아무리 울어본들 지는 꽃을 어이 하리

 對酒還憐白髮多
 年光如水不停波
 山鳥傷春春已暮
 百般啼柰落花何

- 오경화(吳擎華, ?~?)
「술잔 앞에 감회가 일어[對酒有感]」 
『풍요삼선(風謠三選)』


  이 시를 지은 오경화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자형(子馨), 호는 경수(瓊叟)라는 정도의 정보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중인 계층인 위항인(委巷人)들의 시를 모은 『풍요삼선』에 이름을 올려 위의 시 1수를 전하고 있으니, 위항시인으로 판단된다.
  
  계절은 봄으로 시작되어 여름과 가을을 거쳐 겨울에 이르러 하나의 고리를 완성한다. 봄은 계절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만물이 생겨나 꽃을 피우는 시절이기도 하다. 겨우내 숨죽이고 있던 풀과 나무는 싹을 틔우고 꽃망울을 터트려 화려한 모습으로 세상의 주인공이 된다. 새로운 탄생과 화려함, 그리고 더 많은 성장을 내포하고 있는 봄은 인간에게 있어서도 흔히 젊은 날에 비유되고 있다. 우리는 ‘청춘(靑春)’이란 단어로 인생의 젊은 날을 말하면서도 그 말에 봄을 뜻하는 ‘춘(春)’이 들어 있음을 거의 인지하지 않는 듯하다. 그렇게 봄은 더 이상 인생의 비유가 아니라 그냥 인생의 젊은 날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시인은 꽃잎 지고 녹음이 짙어가고 있는 늦봄 어느 날, 새소리 울리는 산중 어디에선가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햇살 좋은 자연에서 새소리를 벗하고 있으니 즐겁고 한가로워야 할 것만 같은데, 시인은 술잔 속에 깊은 서글픔을 담아 마시고 있다. 저무는 봄에 꽃잎만 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젊음도 백발로 변해가고 있음을 알겠기에. 저 새들이야 어찌 지는 꽃이 서글퍼 울겠는가만, 내 마음이 서글프니 새소리도 서글프게 들리나 보다. 계절의 봄이야 순환의 연결 고리 속에서 아무리 추운 겨울이 닥치더라도 그 안에 잉태되었다가 다시 찾아오지만, 인생의 봄이야 한 번 가면 그만이라 더더욱 우리네 마음을 시름겹게 하는가 보다.

  요즘 사람들은 바쁜 일상에 봄날이 가는지 돌아볼 여유도 없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봄뿐만 아니라 여름, 가을도 다 지나고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는 꽃잎을 보며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것도 크나큰 여유일 것이다. 이제 한 발 더 나아가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을지도 모르겠지만 시들어가는 꽃보다는 남은 인생을 위하여 술잔을 들어보자.

 

글쓴이 : 이정원(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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