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화(禍)를 자초하다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6. 12. 18:43

- 이백열두 번째 이야기
2013년 6월 6일 (목)
화(禍)를 자초하다
이부자리 위에 독사와 전갈을 두고 보고,
잔칫상 앞에 개와 쥐를 끌어들이다.

玩蛇蝎於衽席之上 引狗鼠於鼎俎之間
완사갈어임석지상 인구서어정조지간

- 최립(崔岦, 1539~1612)
 「사행문록(四行文錄) 밀첩(密帖)」
 『간이문집(簡易文集)』권4

 

  
  최립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대에 자문(咨文), 주문(奏文) 등 외교 문서와 국가의 주요 문서를 도맡아 지은 조선 중기의 대 문장가입니다. 1594년(선조 27), 전란은 일단락되었지만, 여전히 남쪽 지방 곳곳에 왜적이 진을 치고 있었고 언제 다시 대대적인 침략이 일어날지 모를 위태한 상황이었으므로, 우리 조정에서는 계속 주청사를 보내 명나라에 군사 지원을 간곡히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바닥난 재정, 피폐한 군사로 왜구를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명나라 계요총독(薊遼摠督)이자 우리나라를 전담한 경략(經略)인 고양겸(顧養謙)이, 지원을 주청하는 것을 중단하고 왜적과 화의하겠다는 뜻으로 자기네 황제에게 주문을 올리도록 강력히 요구하는 글을 우리 조정에 보냈습니다. 전세가 불리해진 왜국이 항복을 청한 것을 계기로 이를 받아들여 관작을 봉해 주고 공물을 바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정에서는, 왜구의 소행이 반복무상한 것으로 보아 화의가 결코 성사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였고, 이에 명나라에 가는 주청사 편에 요동에 들러 고양겸에게 화의를 중단해달라고 부탁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최립이 그 임무를 맡아 밀첩을 지어 고양겸에게 전하였는데, 윗글은 밀첩에 인용된 구절입니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왜적 소서비(小西飛)가 화의 주청을 핑계로 허다한 산천, 도로, 인구 등에 대해서, 그가 지나가는 동안에 알고 싶은 것은 이미 모두 다 탐지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강화(講和)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필시 이들을 처치할 방도가 물론 마련될 수 있겠지만, 만약 강화가 성립된다면 장차 이들을 모두 돌려보내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될 경우 뒤에 다시 다른 일이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비유컨대, 이부자리 위에 독사와 전갈을 두고 보고 잔칫상 앞에 개와 쥐를 끌어들이는 것과 같다고나 할 것인데, 뭔가 속셈이 있어서 들어온 이들을 그대로 살려서 돌려보낸다면, 어찌 후환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노야(老爺)께서는 조그마한 기미도 살피시고 먼 뒤의 일까지도 걱정하는 분이시니, 결코 허술하게 놓아 보냄으로써 후환을 끼치는 일이 없게 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화를 요청하는 것이 재차 침범을 위한 임시방편의 속임수인 것이 분명한데도 저들의 요구대로 들어주는 것은 마치 침상까지 깊숙이 들어온 독사나 전갈을 그대로 놔두어 독기를 부리게 허락하고, 음식이 차려져 있는 상 앞에 개나 쥐들을 끌어들여 맘대로 먹도록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뜻밖에 닥친 재난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눈앞에 있는 해악(害惡)을 방치하거나 심지어 끌어들여 가까이하기까지 하여 화란을 자초하고 있지 않은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하겠습니다.

 

글쓴이 : 오세옥(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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