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임금님은 완전한 분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6. 12. 18:51

- 이백일흔네 번째 이야기
2013년 6월 10일 (월)
임금님은 완전한 분 - 채제공의 「노중련전을 읽고 나서..」

 
  “이모비야(爾母婢也)” -네 에미는 종년이야- 이 네 글자는 『사기』「노중련전」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때 제나라 위왕이 이름뿐인 천자를 “질차(叱嗟, 질타와 같은 말)하며” 했다는 이 말은, 영조 이후 금기어가 되었다. 왜냐면 영조는 생모가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천출(賤出)이란 사실을 항상 의식한 영조는 이것과 관련하여 적지 않은 정치적 사건을 생산해 냈다. 거개는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쪽에서 영조의 군주적 권위를 폄훼하려는 소박한 의도로 사용되었지만, 영조는 이것을 되받아 신료를 제어하고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정략적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이런 사례 중의 하나가 채제공의 「노중련전」 일화이다.


1) 네 에미는 종년이야.

  영조대왕께서 보배로운 나이 80여 세쯤 되시자 소일거리가 없으셨다. 항상 홍문관의 한림과 주서를 시켜서 옛 책을 소리 내어 읽게 하여 듣곤 하셨다. 어느 날, 승지가 먼저 읽고 다음에 겸춘추가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다음 부분이 바로 「노중련전」이었다. 읽기를 시작하자 왕께서 침상에 누워서 손을 이마에 얹으셨는데, 코 고는 소리가 참으로 달아 보였다. 그런데 겸춘추가 “질차하며” 다음 문제의 네 자를 읽자,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벌떡 일어나 앉으셨다. 그리고는 손으로 방바닥을 치며 화내어 말씀하였다.
  “어떻게 차마 내 앞에서 그것을 읽는단 말인가. 읽은 놈이 누구냐?”
  겸춘추는 읽기를 멈추고, 신하들은 모두 두려워 떨었다. 당시에 지금의 임금께서 세손으로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얼른 대답하였다.
  “신이 내내 여기에 있었습니다만, 그 네 자 읽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직 거기까지 읽어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정녕코 내가 들었는데, 신료들이 듣지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여러 신하는 세손의 대답을 따라서 한결같이 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러자 상의 안색이 조금 풀려서 다시 침상에 누우셨으며, 신하들도 물러 나왔다.

2) 영조의 화냄도 정조의 속임도 모두 다 성인(聖人)의 모습.

  대개 30년 전에 적신(賊臣)이 “질차”라는 말을 상소에 썼는데 당시에 대신들이 그 의미를 진달하여 마침내 친국에 이르렀다.* 효심이 지극했던 왕으로서 30년을 하루같이 가슴에 맺혔으니 아무리 꿈속이란들 그 네 자를 듣자마자 곧바로 일어나게 된 것이며, 불같은 역정으로 저 미물을 박살 내 버리려고 하였다.
  겸춘추는 먼 시골에서 올라온 미관말직이다. 저가 어떻게 그 글자를 감히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서 읽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 당시에 만약 세손의 기지에 찬 임기응변이 없었더라면 재앙이 어디에까지 이를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자리에서 물러 나온 뒤에 여러 신하가 서로 돌아보며 감탄하였다.
  “세손이야말로 성인이시다. 말 한마디로 위로는 성상(聖上)의 지나친 거조를 멈추게 하고 아래로는 신자(臣子)의 커다란 재앙을 모면케 하니, 성군이 되실 것이 틀림없다.”
  이는 내가 당시에 약원의 제조로 그 자리에 있으며 두 눈으로 직접 본 일이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우연히 『사기영선』 「노중련전」을 읽다가 생각이 나서 기록하니, 후세 사람들에게 성조(聖祖)의 효심(孝心)과 신손(神孫)의 인애(仁愛)가 그 이치는 하나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 이관후(李觀厚) 상소 사건을 말한다. 그 상소에는 “질차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난다.”는 말이 들어있었는데, 질차하는 소리란 바로 “너의 어미는 종”이라는 말이라고대신들이 해석하여, 상소와 관련된 사람들이 죽거나 유배되었다.


英廟當寶筭八十有餘, 無以遣日, 常使玉堂翰注讀古書以聽. 一日, 承旨先讀; 次至兼春秋. 兼春秋所讀, 卽魯仲連傳. 始讀, 上臥枕上, 以御手加額, 鼾睡正甘. 兼春秋讀過傳中叱嗟下四字, 忽驚悟蹶然而坐, 以手拍地曰: “忍讀四字入吾耳. 讀之者誰也?” 兼春秋止其聲; 侍臣皆戰慄. 時, 今上以世孫侍傍, 對曰: “臣始終在此, 未聞其讀四字. 所讀板未及於此矣.” 上曰: “丁寧入吾耳, 諸臣豈有不聞之理乎?” 諸臣以世孫先有所仰對, 一辭言曰: “臣等不聞矣” 上玉色稍解, 復臥枕上, 筵臣遂退出.
盖三十年前, 賊臣以叱嗟字書之章奏, 伊時大臣陳達,遂至親鞫. 以英廟至孝, 三十年結轖如一日, 雖寢睡中, 忽焉有聞, 卽翻身而起, 雷霆將欲擊碎微物. 彼兼春秋者, 遐方冷官之人. 渠何以知四字之不敢讀而爲之不讀乎? 當是時, 若無世孫邸下臨機捷疾周旋, 禍機將無所不至矣. 筵退後, 諸臣相與語曰: “聖人哉世孫也! 發一言, 上以止聖上過中之擧; 下以脫臣子罔測之禍, 佗日之爲聖君决矣." 余時以藥院提擧, 親見筵中事. 今於數十年後, 偶讀史記英選魯仲連傳, 追記之, 使後之人知聖祖之孝神孫之仁其揆一也.
 
- 채제공(蔡濟恭, 1720~1799),「독노중련전(讀魯仲連傳)」,『번암집(樊巖集)』권59

  영조는 자기 생모가 비녀라는 것이 거론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어머니에 대한 효심으로 가득 찬 자신은 차마 들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그런 말을 발설하는 자를 엄하게 처벌하였다. 하긴 신분제 사회에서 비녀 출신의 어머니를 가진 것은 커다란 핸디캡일 것이다. 하지만 숙빈이 비녀 출신이라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고, 아들이 왕이 되어 숙빈으로 귀하게 된 것도 역시 그렇다. 그럼에도 영조는 그것을 자신의 핸디캡으로 단정하여 눈물과 노기로써 대처했다. 눈물은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지만, 그것이 방향을 트는 순간 노기가 되며, 결국 형벌로 귀결되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이 일화이다.

  그런데 내용을 좀 더 뜯어보면, 정조는 조부이자 임금인 영조를 속인 것이요, 영조는 자신의 효심 때문에 무고한 생명을 죽이려 한 것이다. 아무리 왕의 효심이라지만 무고하게 미관말직이 죽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으며, 조부이자 임금을 속이는 정조의 방식은 결코 정도(正道)가 아니다. 그러나 채제공의 해석은 방향을 전혀 달리한다. 정조의 임기응변적 기망을 군주의 덕목인 인애로, 영조의 삐뚤어진 행위를 자식의 지극한 효심으로 해석하며 둘의 완벽한 조화를 칭송하고 있다.

  채제공의 이런 사고는 왕은 언제나 완전한 존재라는, 혹은 존재여야 한다는 동양적 성군론(聖君論)의 한 단면이다. 그런데 이 성군론은 군주가 성인(聖人)으로서 절대 가치를 갖는다는 점에서 “짐이 곧 국가”라는 절대군주론과 동전의 앞뒷면처럼 닮아있다. 오히려 그것이 가치관으로 내재화되었다는 점에서 보자면 더욱 강고하다. 덕치(德治)를 외치며 왕도(王道)를 이상으로 여기는 우리의 문화가, 토론과 합의를 불편해하고 절대(絶對)와 전제(專制)로 쉽게 흐르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서정문 글쓴이 : 서정문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주요저역서
      - 조선시대 당쟁사를 공부했고, 논문으로는 「고전번역의 역사적 맥락에서 본 비문 문제」 2009, 「고전번역사업의 새로운 목표설정을 위한 시론」 2010 등이 있으며, 번역으로는 『명재유고』공역, 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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