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다. 빛과 색이 사라지는 밤은 소리의 세계다. 나뭇잎과 풀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 하늘에서 내려 만물을 적시는 빗소리, 풀숲이나 뜰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열을 지어 날아가며 우는 기러기 소리, 야경꾼이 순찰하며 내는 딱따기 소리, 수심을 달래는 듯한 피리 소리, 산사(山寺)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그리고 여염집 아낙들이 두드리는 다듬이 소리…… 밤에는 눈보다 귀가 더 밝은 법. 밤이 내는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상념에 잠기게 한다. 그런데 밤이 고요하다. 바람도 불지 않고 비도 내리지 않는다. 생명의 노래를 부르던 동식물들은 모두 잠이 들고 주위를 지나다니던 이들도 몸을 눕히러 돌아갔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멈추어버린 밤. 적정(寂靜)의 물결에 몸을 맡긴 채 시인은 등불 밑에서 『주역』을 읽는다. 『주역』의 철리(哲理)를 음미하며 얼마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일까? 은은한 매화 향기를 느껴 눈길을 돌리니 책상 언저리에 어느새 매화 꽃잎 하나가 내려와 앉아 있다. 마치 시인에게 천기(天機)를 누설하려는 듯이..
귀뚜라미는 침상 아래 가까운데 蟋蟀近床下 다듬이 소리 구월 하늘에 맑게 울리네 淸砧九月天 은하는 밤의 초입에 반짝거리고 星河耿初夜 창공은 안개 한 점 없이 깨끗하여라 碧落淨無烟 기러기는 늙은이 읊조리는 곳 지나가고 鴈度翁吟處 등잔불은 아이 글 읽는 곳에 밝구나 燈明兒讀前 새로 빚은 차조술 열어 보고서 試開新秫酒 한 번 들이켜니 마음 흔쾌하여라 一歃卽陶然
최윤창(崔潤昌, 1727~?)의 「밤에 읊다(夜吟)」이다. 가까이 들리는 귀뚜라미 속삭이는 소리, 멀리서 애원하는 듯한 다듬이 두드리는 소리, 청명하여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그 하늘을 하얗게 가로지르고 있는 은하수. 밤하늘을 울며 나는 기러기와 어느 집 방문으로 새어나오는 등잔의 불빛. 묵직하게 읊조리는 노인의 목소리와 낭랑하게 글 읽는 아이의 음성. 시인의 눈과 귀는 가을밤의 소리와 빛깔을 더듬으며 그 정취에 취하고, 시인의 맥박은 이 밤이 빚어내는 뭇 생명의 약동에 고동친다. 벅차오르는 이 마음을 무엇으로 달래랴? 술 한 잔 들이켜고 가을밤 속으로 젖어들어 보리라..
후드득 내리는 밤비에 여관이 그윽한데 夜雨蕭蕭旅館幽 잎에 듣는 소리 창밖 산에 어지러이 가득하네 葉鳴窓外亂山稠 찬 등의 심지 다 타도록 잠 못 이루는데 挑盡寒燈眠不得 지명은 또 무슨 일로 우수란 말인지 地名何事更憂愁
조경(趙絅, 1586~1669)의 「우수원에 묵다(宿憂愁院)」이다. 밤비가 내린다. 가을이 저물어가는 때인 듯 차가운 등불 아래 앉아 창밖으로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다. 온 산에 가득한 빗소리를 타고 한기가 엄습한다. 잠 못 이루게 하는 밤비. 밤비 소리에 젖어 시인의 상념은 어디에 가 닿은 것일까? 그 끝자락에 ‘우수(憂愁)’가 떠오른다. 애초에 ‘우수원(憂愁院)’이라는 지명 때문에 시인의 근심이 더 깊었는지도 모른다.
밤은 계절과 날씨, 장소에 따라 수만 가지 다른 형상과 소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저녁 일찍 곤히 잠든 이들에게 밤은 그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 밤은 반가운 벗과 술잔을 기울이게 하고,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워하게 하고, 책을 읽으며 옛사람과 이야기 나누게 한다. 오늘 밤은 또 무슨 모습으로 나를 찾아올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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