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생의 마지막 봄을 맞으며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4. 1. 10. 14:59

- 일흔일곱 번째 이야기
2014년 1월 9일 (목)
생의 마지막 봄을 맞으며

바람과 눈 스산한 밤은 몹시도 긴데
잠 깨인 찬 창가엔 새벽빛 흔들린다
매화 향기 새어들어 봄소식 전해오니
음기 가득한 대지에 한줄기 양기여라

누런 닭 울음 울어 새 하늘을 알리니
유수 같은 세월 속에 내 나이 칠십이라
세상만사 유유함은 전혀 관여치 않고
전전긍긍 일념 속에 온전히 돌아가리

風雪蕭蕭夜苦長
寒窓睡罷動晨光
梅香漏洩春消息
大地窮陰一線陽

黃雞喔喔報新天
流水光陰七十年
萬事悠悠渾不管
淵冰一念且歸全

- 이상정(李象靖, 1711~1781)
「입춘(立春)」
『대산집(大山集)』
 


  이상정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외증손이자 밀암(密菴) 이재(李栽)의 외손인데, 소퇴계(小退溪)라 불릴 정도로 퇴계(退溪)의 학문을 가장 잘 계승한 학자라고 평가되는 인물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간 적도 있지만, 일생을 학문에 전념하여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많은 문인을 길러냈다. 조정에서는 계속 그에게 관직을 제수하며 정사에 참여하도록 하였으나 번번이 사직하고 학문의 길로 나아갔다.

  위의 시는 그가 71세의 일기로 생을 마친 1781년 입춘을 맞이하며 지은 시이다. 생을 마감하며 지은 유시(遺詩)는 아니지만 언제나 마지막을 생각해야 하는 노년의 심사와 감회가 잘 드러났다 하겠다. 두 편의 절구 중 앞의 시는 새봄의 생동감을 노래하였고 뒤의 시에서는 자신을 돌아보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입춘이 봄의 시작이라고는 하지만 겨울의 끝자락이기도 한 탓에 여전히 밤은 길고 날은 차다. 지나온 겨울과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극에 달한 음(陰)의 기운에 오히려 더 스산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짙은 어둠이 새벽을 잉태하고 있듯이 깊은 겨울은 양(陽)의 기운을 머금었다 토하며 입춘을 맞아 우리에게 봄을 선사한다. 시인은 잠 깨인 새벽녘에 스미는 매화 향기를 통해 새봄의 기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입춘을 맞아 많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느끼고 희망하는 정서의 표출일 수 있다. 시인이 27세에 지은 또 하나의 「입춘」 시에서도 조용한 주변의 상황을 설명한 뒤에 “매화 그림자 어린 뜰에 한 해 봄이 깃들었네[庭梅影裏一年春]”라는 표현으로 시상을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위 시를 지을 때의 시인은 인생의 모든 계절을 거쳐 마지막 끝자락에 처하여 있다. 그리하여 시상은 한 단계 더 깊이 나아간다. 계절은 겨울이 지나면 봄날이 다시 오지만 인생이야 겨울이 지나면 그렇게 그냥 끝나고 마는 것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새 하늘을 알리는 닭소리를 들으며 희망찬 미래가 생각되기보다는 내 생의 끝자락이 어디까지인가를 먼저 더듬어보게 된다. 시인은 자신의 삶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음을 느꼈던 것일까? 이제 세상일과는 차근히 이별하고 온전한 죽음을 맞이하기만을 기원하며 새봄을 맞이하고 있다. 새로운 양의 기운이 출현하는 생동감과 대비되어 봄날의 쓸쓸함이 배가되고 있다.

  지구의 공전이 유지되는 한,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봄이 올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나는 그 봄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무심코 맞이하는 나의 이 봄이 누군가에게는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생의 마지막 봄일 수 있고, 어쩌면 나의 마지막 봄날일지도 모를 일이다.

 

글쓴이 : 이정원(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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