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古朝鮮)의 고신도(古神道)가 고구려 때에는 ‘조의선인(皂衣仙人)’으로 맥을 이었다. |
고구려는 북쪽으로는 당나라의 세력을 막아내야 하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백제의 세력과도 각축을 벌여야 했으므로, 고구려 조의선인들의 무사(武士) 정신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강하였다. 그리하여 위나라가 2회에 걸쳐서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도, 또 수나라의 거대한 적군이 4회씩이나 쳐들어 왔을 때에도, 매번 조의선인(皂衣仙人)들은 죽을 각오로 용맹하게 적군을 물리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구려를 복속시키려던 수나라는 오히려 수나라 자신이 패망하는 결과를 자초하고 말았다. 조의선인(皂衣仙人)들은 수(數)적으로 매우 열악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날 때마다 매번 수십 배나 되는 적군들을 용맹스럽게 무찔렀다. 이는 고구려 조의선인들에게 함양된 무용(武勇) 정신이 생사(生死)를 초월한 희생정신에 있었고, 또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적극적인 실행력에 있었던 것이다. 송나라 사신으로서 고구려에 왔던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조의선인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 고구려의 재가화상(在家和尙)은 가사도 입지 아니하고, 불계도 가지지 아니하고, 흰모시의 좁은 옷에 조백(皂帛)으로 허리를 두르고, 여염에 거하며 처자를 두는데, 매양 공공(公共)한 일에 힘써, 도로의 소제와 도랑의 개통과 성곽 수축 같은 일에 종사한다. 그러다 전쟁이 일면 스스로 양식을 가지고 동류가 단결하여 출전한다. 다 전쟁에 용맹하여 매 전쟁 때마다 먼저 앞서나, 그 실은 형여(刑餘)의 역인(役人)이어늘 다만 삭발을 깎음이 불교도와 같은 고로 화상(和尙)이라 함이니, 이것이 고구려 조의(皂衣)의 유풍이라. 조백(皂帛)으로 허리를 두른 고로, 조의(皂衣)라 함이요, 국가에 대한 신앙이 굳은 고로 생사(生死)를 가벼이 하며, 세속의 의무와 세정에 구애가 없는고로 몸을 공익에 잘 바치며, 평일의 노고로 신체를 잘 단련하여 체육이 건용을 주하므로 전란에 나아감이 용맹함이며, 명임답부(明臨答夫, 연개소문)가 무리로써 기사한 고로 지방적 혁명으로 성공을 용이히 함이라. - 여기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는 그 당시 송나라에서는 죄인들에게 삭발을 시켰으므로, 서긍(徐兢)은 ‘...실은 형여(刑餘)의 역인(役人)이어늘, 다만 삭발을 깎음이 불교도와 같은 고로 화상(和尙)이라 함이라.’며 조의선인들을 형(形)이 남은 죄수들로 오판하고 있다.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은 고구려 ‘조의선인(皂衣仙人)’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 ‘선배(先輩)’는 이두문자로 ‘선인(先人)’ 혹은 ‘선인(仙人)’이라 쓴 바, ‘선(先)’과 ‘선(仙)’은 ‘선배’의 ‘선’의 음(音)을 취한 것이며 ‘인(人)’은 ‘선배’의 ‘배’의 의(義, 뜻)를 취한 것이니, ‘선배’는 원래 ‘신수두’ 교도(敎徒)의 보통명칭이려니, 태조 때에 와서 매년 3월과 10월에 ‘신수두’ 대제(大祭)에 모든 군중들이 모여, 혹 칼로 춤추며, 혹 활도 쏘며, 혹 깨금질도 하며, 혹 택권이도 하며, 혹 강의 얼음을 깨고 물 속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며, 혹 가무(歌舞)를 시연하여 그 아름다움을 보며, 혹 대수렵을 행하여 그 노획의 많고 적음도 보아, 여러 가지의 내기에 승리하는 자를 ‘선배’라 칭하고, ‘선배’ 된 이상에는 국가에서 녹을 주어 그 처자를 먹이어 가실(家室)에 누가 없게 하고, ‘선배’된 자는 각기 군대를 나누어 한 집에서 자며 한 자리에 먹고, 앉으면 고사(故事)를 강습하거나 하여, 일신(一身)을 사회와 국가에 바쳐 모든 곤고(困苦)를 사양치 아니하며, 그 중에서 성품과 학문과 기술이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 스승으로 섬기어, 일반의 ‘선배’들은 머리를 깎고 조백(皂帛)을 허리에 두르고, 그 스승은 조백(皂帛)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그 스승 중에 상두(上首)는 ‘신크마리’ 곧 ‘두대형(頭大兄)’ 혹 ‘태대형(太大兄)’이라 칭하며, 그 다음은 ‘마리’ 곧 ‘대형(大兄)’이라 칭하며, 최하(最下)는 ‘소형(小兄)’이라 칭하고, 전쟁이 일면 신크마리 두대형(頭大兄)이 그 정부의 ‘선배’를 모아, 스스로 일단(一團)을 조직하여 전장에 다달아, 전승치 못하면 전사할 것을 작정하여, 죽어 돌아오는 자는 배성이 이를 이기고 돌아온 군사와 같이 영달로 보고, 패퇴하면 이를 수치하므로, 선배들이 가장 전장에서 용맹하며, 고구려 당시에 각종의 지위를 거의 골품(骨品)으로 얻어, 미천한 자가 고위에 오르지 못하나, 오직 선배의 단체는 미천함이 없이 학문과 기술로 개인의 지위를 정하는 고로, 인물이 ‘선배’ 중에서 가장 많이 배출되었다. - 이 밖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도 ‘선배’를 칭송하는 노래가 있다. 武功뿐 아니 爲하샤 선배를 아르실쌔 鼎待之業을 셰시니이다. 討賊이 겨를업샤대 선배를 다사실쌔 太平之業이 빛나시니이다. 혀근 선배를 보시고 御座에 니르시니 敬儒之心이 엇더하시니. 늘근 선배를 보시고 禮로 꾸르시니 石文之得이 엇더하시니.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은 또 조의선인(皂衣仙人)의 후예들에 대해서 이렇게 회한하고 있다. - 대개 고구려가 망한 뒤에 ‘선배(先輩)’의 유당들이 오히려 유풍을 보전하여 촌락에 은거하여 그 의무를 밟아오던 바, ‘선배(선비)’의 명칭은 유교도에게 빼앗기고, 그 머리를 깎은 까닭으로 재가화상이란 가(假)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이며, 후예가 빈곤하여 학문을 하지 못하여, 조상의 고사(古事)를 날로 잊어, 자가(自家)의 내력을 자증(自證)치 못함이라. -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의 이같은 회한은 오늘날의 우리 민족을 말함이라. 고조선 시대나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우리민족 고유의 ‘고신도(古神道)’가 나라의 국교였으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뼈아픈 현실이다. 아무튼 조의선인 출신인 연개소문은 643년에는 당나라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보장왕(寶藏王)에게 주청하여 도교를 수입하기도 하였으니, 사서(史書)의 내용을 보면 이렇다. - 보장왕(寶藏王) 2년 봄, 연개소문이 왕께 아뢰기를 “3교(敎)는 마치 솥의 세 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빠지면 아니 됩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가 모두 성하고 도교가 그렇지 못하니, 천하의 도술(道術)을 다 갖추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청하옵건데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받아들이시고, 나라의 사람들에게 가르치시옵소서.” 왕이 이를 받아들여 당나라에 청하니, 당태종이 도사 숙달(叔達) 등 8명을 파견하며 도덕경(道德經)을 보내왔다. 왕이 기뻐하며 승려들의 절을 취하여 그들의 숙소로 삼았다. - 이리하여 당나라의 도교 도사들이 천존상(天尊像)과 도덕경(道德經)을 고구려에 가지고 들어와서 처음으로 강론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에는 먼 옛날부터 자생적으로 전승되어 온 한국 고유(固有)의 전통사상을 계승한 조의선인이 있었으며, 조의선인 연개소문의 주청에 의해서 중국 도교가 처음으로 수입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고구려의 관직에 조의선인(皂衣仙人), 선인(仙人), 대형(大兄) 등의 벼슬 이름이 있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바보 온달이 처음에는 장인 평원대왕에게 인정을 못 받다가, 아내 평강공주의 내조로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나서야 비로소 인정을 받아 ‘대형(大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때부터 평원대왕은 온달장군을 옆에 끼고 총애하였으며 ‘대형이 바로 내 사위’라고 자랑하였다고 한다.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 장군도 다 선인(仙人)의 도(道)를 닦은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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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펌] [국선도 이야기] 조의선인(皂衣仙人) 연개소문 |작성자 월광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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