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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명과 자발적 가난의 전통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4. 2. 3. 17:17

- 일흔 번째 이야기
2014년 1월 29일 (수)
현대문명과 자발적 가난의 전통

1.작년 말에 타임(TIME)지는 ‘올해의 인물’로 가톨릭 교황 프란치스코를 선정했다.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소수의 거대 부자(super rich)와 다수의 일하는 가난한 자(working poor)로 양극화된 세상에서 가난한 삶을 몸소 실천하면서 가난한 자의 벗이 되려는 교황에게서 많은 사람들이 신선한 충격과 위로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성의 종교지도자들이 겉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가난한 이들보다는 돈 많고 권력 있는 자들과 가깝게 지내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금을 쓰기보다는 교회나 사찰을 크게 짓는 데 관심이 많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그들만의 리그’에 몰두해온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세속화된 권위주의적 종교인들과는 달리 바티칸시티 안에만 머물지 않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낮은 곳으로 내려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고자 했다.

  이러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동서고금의 성인이나 현자들은 대개 헐벗고 굶주리고 아프고 지친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연대를 말해왔다. 불가에서는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중생에게 필요한 것을 보시하고[布施], 희망과 위로의 말을 건네고[愛語], 그들을 이롭게 하며[利行], 같이 일하고 동고동락할 것[同事]을 권면하고 있고, 유가에서도 널리 민중을 사랑하고 어려움에서 구제해줄 것[博施濟衆]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렇게 가난한 사람과 친구가 되어 사랑을 실천하는 삶은 교회에 다니거나 절에 간다고 해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한 대로 극기복례(克己復禮)할 때만이 가능하다. 부단한 수양과 성찰을 통해 지나친 욕망과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자기절제능력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민중을 사랑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도 먼저 훌륭한 인격을 쌓고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가난하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필수적이다.

  노자는 사랑[慈]과 검소함[儉]과 겸손함[不敢爲天下先]이 인간의 세 가지 보배스런 덕목이라고 했는데, 그중에서 검소라는 덕목은 반자연적인 근대문명이 초래한 오늘날 위기 상황에서 특별히 재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미세먼지로 인한 스모그현상과 황사 같은 대기오염, 급격한 기후변화와 해수 온도의 상승, 화석연료의 고갈과 심각한 에너지난, 후쿠시마 원전사고 같은 치명적인 핵 문제 등은 모두 인간의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이 빚어낸 결과이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자연을 낭비해왔다. 급기야 현대인들은 생각하는 인간에서 소비하는 인간으로 변해왔다. 생텍쥐페리가 말한 대로 인간이 껌을 소비하는 동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자본주의 시스템은 껌을 소비하는 인간을 생산해 온 것이다. 내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빈폴이 나를 입고, 내가 신발을 신는 것이 아니라 나이키가 나를 신고, 내가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뤼비똥이 나를 들고 다니고, 내가 정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가 나를 길들이는 지경이 되었다. 주객이 전도되고, 소비에 지배당하는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2.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옛 선현들이 오래전부터 실천해왔고, 우리 시대의 현자인 교황이 몸소 보여주는 ‘자발적 가난의 길’ 밖에 없지 않은가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장자(莊子)』의 「서무귀(徐无鬼)」를 읽다 보니 이런 우언이 눈에 들어왔다.

서무귀가 위(魏)나라 무후(武侯)를 만났을 때 무후가 말했다.

“선생께서 산속에 살면서 도토리와 밤을 주워 먹고 파와 부추를 싫도록 들면서 오랫동안 나를 찾아오지 않아 지금 매우 늙어버린 것 같소. 그래 고기와 술맛을 보러 오셨군요. 아무튼 그대가 온 것은 과인의 나라에는 큰 복이 아닐 수 없소.”

서무귀가 말했다.

“저는 가난하고 천한 몸으로 태어나 아직 한 번도 임금님의 호사스런 술과 고기를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 온 것은 임금님을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자 임금이 말했다.

“무슨 소리요. 어떻게 그대가 나를 위로한단 말이오?”
“임금님의 정신과 몸을 위로해드리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천지자연이 만물을 기르는 것은 똑같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잘하고, 낮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못하지 않습니다. 임금께선 홀로 나라의 주인 행세하면서 나라의 백성을 괴롭히고, 귀와 눈과 코와 입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정신을 가진 사람이 허용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무릇 참된 정신이란 남과 화합하기를 좋아하고 간사한 것을 싫어합니다. 간사하게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은 병입니다. 그래서 위로를 해드리려는 것입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면서 호사스럽게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생활을 추구하던 무후의 입장에서 서무귀 역시 고기와 술맛을 보러 자기를 찾아왔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산속에 살며 도토리와 밤을 주워 먹는 가난한 생활을 하던 서무귀는 오히려 권력과 물욕에 찌든 임금을 위로하고 있다. 평등안(平等眼)을 가지고 도(道)를 추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혼자 나라의 주인 행세하면서 나라의 백성을 괴롭히고, 귀와 눈과 코와 입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임금이 불쌍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탐욕의 병을 앓고 있는 왕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장자는 이 우언을 통해 권력과 물욕에 사로잡힌 인간을 오히려 불쌍하게 형상화하고 인간들의 세속적인 가치를 여지없이 전복시키면서, 바람직한 삶의 길을 묻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위나라 무후처럼, 가난을 병으로 여긴다. 그러나 도(道)를 추구하는 사람은 가난을 오히려 즐긴다. 공자는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돈이 있으면서도 예의범절을 지키기를 좋아하는[貧而樂, 富而好禮]” 경지로 나아갈 것을 주문했고, 맹자(孟子)는 “부귀하더라도 너무 지나치지 않고, 가난하더라도 뜻을 바꾸지 않을 것[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을 사람의 도리라고 여겼다. 조선 후기 실학파 문인 박지원(朴趾源)의 「허생전」에도 “재물 때문에 얼굴에 기름기가 도는 것은 장사치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다. 만 냥이 어찌 도를 살찌울 수 있겠는가.[以財粹面, 君輩事耳. 萬金何肥於道哉]”라는 말이 나온다.

  이렇게 도를 추구하면서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전통을 욕망의 과잉 상태인 우리 시대에 새롭게 되살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진정으로 지속 가능한 미래를 꿈꾼다면 옛 선현들이나 오늘날의 몇몇 현자처럼, 지금부터라도 검소와 절제를 생활화함으로써 이웃과 더불어 살고 자연과 함께 공생하는 생활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글쓴이 : 김 영  
  • 인하대학교 교수
  • 주요저서
    - 『인문학을 위한 한문강의』, 청아출판사, 2013
    - 『김영교수의 영국문화기행』, 청아출판사, 2010
    - 『새민족문학사강좌』(공저), 창비, 2009
    - 『한국한문학의 현재적 의미』, 한울, 2008
    - 『인터넷세대를 위한 한문강의』개정증보판, 한울, 2007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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