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직언보다 중요한 것은 용납이다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4. 3. 18. 20:26
- 삼백열네 번째 이야기

2014년 3월 17일 (월)

직언보다 중요한 것은 용납이다
임금에게 생선 가시처럼 따끔한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신하를 골경지신(骨鯁之臣)이라고 했다. 임금에게 직언을 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실제로는 자신의 운명을 건 대단한 용기가 있어야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런 신하만 있어서는 반쪽의 미담일 뿐이다. 그런 과감한 직언을 좋게 받아들이는 도량을 지닌 임금이 있어야 미담은 완성된다.

간관(諫官)을 설치한 것은 좋은 제도로서, 개보(介甫, 왕안석(王安石))가 그것을 그르게 여긴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 의론이 불가한 이유는 대개 3가지가 있다.
이제 그의 말에, “간관은 관직이 낮고 책임이 중하여, 공자(孔子)가 명분을 바로잡았던 뜻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간관의 직임은 반드시 신진(新進) 사류(士類)를 쓴다고 한다. 그래서 그 관직이 낮을 수밖에 없다. 대개 돈후하고 신중하여 천하의 상도(常道)를 지키고 천하의 사물을 진정시키는 것은 노성(老成)한 이보다 나은 이가 없지만, 지기(志氣)가 날카로워 천하의 시비를 바로잡고 천하의 득실을 논하는 것으로는 신진보다 나은 이가 없다. 이것이 간관은 반드시 신진을 쓰는 이유이다. 관직은 비록 낮지만, 자신은 관직이 낮다고 해서 스스로 낮게 여기지 않고, 남들은 관직이 낮다고 해서 그 말을 낮게 여기지 않는다. 유독 개보만이 그 낮음을 혐의스러워하니, 불가한 첫 번째 이유이다.
그의 말에, “옛날에는 관사(官師)가 서로 바로잡고, 백공(百工)들이 각각 자신이 맡은 일을 가지고 간언하였으니, 간관은 옛날의 제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듣기로 옛날에는 풍속이 순후하고 일이 간단하여 유사(有司)가 각각 그 직분에 따라 가부를 아뢰었다고 하니,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후세에는 형편상 그렇게 할 수가 없었으니, 만약 그대로 행한다면 장차 그 번잡함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대개 간관의 책임은 의당 공평하고 충직한 사람이 맡아야 하니, 사납게 굴거나 들추어내는 것을 가지고 능력의 척도로 여기지 않는다. 이 때문에 간관의 재주는 백, 천사람 중에서 한두 사람에 불과하니, 이 한두 사람을 들어서 별도로 간관으로 삼아서 맡기는 것이 좋겠는가, 아니면 간관을 두지 말고 백관들로 하여금 구차하게 나란히 서서 일마다 하나하나 따지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이에 간관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래서 좋은 제도가 되는 것이다.
만약 옛날에 없던 것을 지금 새로 만들었다고 그르게 여긴다면, 삼공(三公), 삼고(三孤), 육경(六卿)은 주(周)나라에서 만든 것으로, 요순(堯舜) 임금 시대에는 삼공, 삼고, 육경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서경(書經)』에 “요순 때에 백 가지 관직을 두었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하(夏)나라, 상(商)나라 때는 관원이 배가 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세대가 내려올수록 일이 번다하여 관직이 옛날에 비해 늘어났다는 뜻일 따름이다. 개보는 유독 옛것에 집착하여 오늘을 규제하려고 한단 말인가? 불가한 두 번째 이유이다.
그의 말에 “임금의 명이 나온 뒤에 간관이 그것에 대해 간언하니, 위에서 받아들여 고치게 되면 이는 선비가 명령을 내고 임금이 듣는 꼴이 될 것이고, 만약 받아들이지 않고 행해버린다면 이는 신하가 말을 다하지 못하고 임금이 허물을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경우가 된다.”라고 하였다.
대개 임금의 과실은 일식(日蝕)이나 월식(月蝕)과 같고 허물을 고치는 것은 해와 달이 바뀌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 침식이 있고 바뀔 때에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으니, 어찌 감출 수 있겠는가?
이제 개보가 간관의 간언을 가지고 ‘명령을 낸다.’고 하고, 임금이 들어주는 것을 가지고 마치 덕이 부족한 듯이 여겨, 사전에 은밀하게 진언하여 장차 있을 일을 구제하는 것만을 간쟁(諫諍)의 도라고 말하고, 명령이 나오고 일에 드러난 뒤에 간쟁하는 것을 불가하다고 한다면, 이는 그 마음이 장차 천하 사람들에게 허물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다.
성왕(成王)이 군진(君陳)에게 경계하기를, “너는 아름다운 꾀와 아름다운 계책이 있거든 들어와 안에서 네 임금에게 고하고, 너는 마침내 밖의 백성들을 가르쳐 말하기를 ‘이 꾀와 이 계책은 오직 우리 임금님의 덕이다.’라고 하라.”라고 하였다. 옛날 사람이 이것 때문에 성왕이 광명정대함을 다하지 못했다고 의심하였는데, 개보가 또 그런 뜻을 답습한단 말인가? 불가한 세 번째 이유이다.
아아. 개보가 뜻이 강한 선비들을 시기하여 핍박하다 보니, 바야흐로 신법(新法)을 행하려고 할 때 언관(言官)들이 헐뜯는 경우가 많았다. 개보는 그것이 싫었기 때문에 이런 논의를 낸 것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후세의 간관들은 대개 녹봉이나 축내는 쓸데없는 관직일 뿐이니, 없애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도 없애지 못하는 것은 대개 또한 공자께서 그 예(禮)를 아낀 뜻*이 아니겠는가?

*공자께서 그 예(禮)를 아낀 뜻 : 형식이라도 남아 있으면 언젠가는 그 예의 본뜻을 복원할 수 있음을 말한다. 노(魯)나라 문공(文公)이 삭일(朔日)에 지내는 종묘(宗廟)의 제사에 아예 불참하자 자공(子貢)이 그 제사에 소용되는 양(羊)조차 아까워하여 없애려 하였는데, 공자가 “사(賜)야, 너는 그 양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를 아끼노라.”라고 한 것에서 나왔다. 『논어』 「팔일(八佾)」


諫官之設良制也。而介甫非之非也。其論之不可。蓋有三焉。今其言曰諫官官卑責重。非孔子正名義也。蓋聞諫之任。必用後進之士。故其官不得不卑。夫敦厚周愼。守天下之典常。鎭天下之事物。莫善於老成。志氣鋩銳。直天下之是非。斥天下之失得。莫先於後進。此所以諫官必用後進者也。官雖卑。己不以官卑自卑。人不以官卑卑其言。獨介甫嫌其卑。不可一也。其言曰古者官師相規。工執藝事以諫。諫官非古也。蓋聞古也風淳事簡。有司之臣。各以其職陳可否。誠美矣。然後世勢不得因。縱因而行之。將不勝其紛然矣。夫諫之任。公平忠直之人所宜居。不以悍厲强訐爲得。是以諫官之材。百千人乃一二。則擧此一二。別爲諫官而任之可乎。勿置諫官而使與百執事者。苟然竝列。以一職一事責之可乎。於是諫官不得不設。而所以爲良制也。若以無於古刱於今爲非。則三公三孤六卿。周家所立。唐虞上世。未聞有三公三孤六卿者。書曰唐虞建官惟百。又曰夏商官倍。言世下事繁。官增于古耳。介甫獨奈何膠古而法今耶。不可二也。其言曰君命已出而諫官諫之。上聽而改。是士制命而君聽也。不聽而遂行。是臣不得言而君恥過也。蓋聞人君之過如日月之蝕。改過如日月之更。其蝕也更也。人皆見之。豈可使諱也。今介甫以諫官之諫謂制命。以人君之聽有若歉德。密陳於前。救之於將然。謂諫爭之道。而出於命發於事。然後爭之謂不可。則是其心將以諱過於天下之人也。成王戒君陳曰。爾有嘉謀嘉猷。入告爾后于內。爾乃順之于外曰斯謀斯猷。惟我后之德。嘗以此疑成王未盡光明正大。介甫又襲其意耶。不可三也。於乎。介甫猜隘執拗之士。方新法之行。言事者多毁之。介甫病之。故爲此論與。雖然後世諫官。大抵靡廩宂官耳。去之可也。然而不去者。蓋亦夫子愛其禮之意乎哉。


- 이의숙(李義肅, 1733~1807), 「간관론변(諫官論辨)」,『이재집(頤齋集)』 , 잡저(雜著)


조선 후기의 문인인 이재(頤齋) 이의숙이 송(宋)나라 왕안석(王安石)의 「간관론(諫官論)」에 대해 논박한 글이다.

왕안석이 간관 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크게 3가지이다. 첫째는 직책이 낮고 경륜이 풍부하지 못한 신진관료에게 간관이라는 중요한 일을 맡기는 것이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백관들이 각자 맡은 일을 가지고 서로 견제하고 간언하면 된다는 것이고, 셋째는 한 번 내려진 임금의 명령을 다반사로 뒤집는 것은 상하의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신법(新法)에 대해 간관들이 집요하게 반대했던 것이 이런 주장을 하게 된 배경일 테지만, 왕안석의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의욕이 앞서서 이상론적인 주장만 고집하거나, 임금이 추진하고자 하는 일을 언관(言官)이라는 직책을 빌려 저지하려고만 하는 폐단은 늘 있어왔기 때문이다. 이재(頤齋)도 그런 면에서는 일견 동의하지만, 그런 제도를 남겨둠으로써 거둘 수 있는 순기능이 더 크다고 보았다.

옛날에는 직언을 용납하고 우대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직언을 하는 방식도 과감하였다.

북조(北朝) 때 위(魏)나라의 고필(古弼)은 재가를 받으려다가 임금이 다른 신하와 바둑을 두면서 돌아보지 않자 임금의 면전에서 그 신하의 머리채를 잡고 때리면서, “조정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실로 이 놈 때문”이라고 일갈하였고, 위나라 문후(文侯) 때 사경(師經)은 임금이 실언을 하자, 임금을 폭군인 걸주(桀紂)에 비유하며, 타고 있던 거문고로 임금을 내리쳐 면류관을 망가뜨리기까지 하였다.

조선 선조(宣祖) 때 김성일(金誠一)은 경연(經筵)에서 임금을 걸주 같은 폭군에게 비겨 ‘대전 위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고, 내관 이봉정(李鳳禎)은 왜 요즘 살이 쪘느냐는 광해군(光海君)의 물음에 선조 임금 때는 밤늦도록 정사를 보시는 임금을 모시느라 힘들어서 살이 찔 겨를이 없었지만 지금은 놀고먹느라고 살이 쪘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과격한 방식의 간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간언을 할 때는 임금이 관심이 있고 잘 아는 부분부터 시작하라는 『주역(周易)』의 ‘납약자유(納約自牖)’라는 말이나,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大夫) 사어(史魚)가 임종 때 남긴 유언으로 문상 온 임금을 깨우치게 만든 ‘시간(尸諫)’의 고사는 후대에까지 간언의 주요 원칙으로 널리 인용되었다.

이렇든 저렇든 신하는 임금을 바로잡고, 이상 국가를 구현하겠다는 간절한 충성심이 있고, 임금은 그런 직언을 받아들일 도량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상하관계도 많이 변했다. 이제는 이런 직언을 해 줄만큼 정성스런 아랫사람을 기대하기 어렵다. 옛날에도 신하는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임금을 버리고 떠나도 된다고 했으니, 하물며 지금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직언을 하는 사람보다, 직언을 잘 받아들이려는 윗사람의 노력이 더 절실한 시점이다.



권경열 글쓴이 : 권경열
  •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 주요역서
      - 『국역 오음유고』, 민족문화추진회, 2007
      - 『국역 국조상례보편』공역,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 『국역 매천집 3』, 한국고전번역원, 2010
      - 『국역 가례향의』, 국립중앙도서관, 2011
      - 『임장세고』, 한국국학진흥원, 2013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