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권력이 생성한 자료 중에는 1924년 말에 ‘보천교 혁신회 간부의 교도 이민정책’에 관한
관동청 경무국의 비밀 보고서가 보인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보천교 혁신회 간부 등은 작년부터 조선 내에 있는 교도를 만주로 이주 발전시켜
영구 안주의 땅으로 삼으려는 계획을 세워 봉천 동성(東省)실업회사에 원조를 청하고,
계획이 점차 구체화됨에 이르렀다. 길림성 액목현(額穆縣)의 토지는 약 10만 향지((晌地.
그 안의 약 3만 향지는 이미 수전水田 경지이다)가 된다.
따라서 이번에 이곳으로 보천교도를 이주시킬 예정이다.
일본 측 대표(동성실업회사 지배인-역자)와 중국 측 지주 대표들 사이에 작년 11월 중 합변계약(合辨契約. 중국에서 외국 자본과 공동으로 사업을 경영하는 것을 말한다-역자)이 성립되어,
일본 측에서 돈 70만원, 중국 측에서 앞에 적은 10만 향지(견적 가격 70만원)를 출자해서
삼익공상호(三益公商號) 명의로 해서 사업을 일으키는 것으로 하였다.
보천교 간부의 동정과 교도이민 정책1 |
보천교 간부 등은 이번 음력 정월 급히 교도 3백호 내지 5백호를 액목현으로 이주시키려 희망하여,
제1차 투자금 십 수만 원을 준비해 1월 27일경 다시 길림에 올 의향을 내놓고 있었다.
동성(東省)실업회사는 본 사업에 관해 출자하거나 기타 하등의 관계도 없음은 물론 모든 자본금은
보천교 혁신회로부터 나온 것이다.”
보고서에 의하면, 보천교 혁신회가 길림성 액목현 지역(현재의 길림성 교하현 일대)을 영구 안주의
땅으로 만들어 이주하려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자금을 확보하여 봉천지역 실업가의 협조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우선 1차로 1925년 음력 정월에 교도 300호 내지 500호의 교도들을 이주시켜 농경지 개척을 계획하였다. 그런데 그 규모가 너무 엄청나다.
모든 자본금은 보천교 혁신회로부터 나왔다고 했다. 일제시대 1원이 순금 두 푼(750㎎),
1925년 급여 40원이 쌀 2가마에 해당하였다는 사실 등을 고려한다면
당시 1원은 현재 약 4만원(2017년 금 시세 참조) 정도로 볼 수 있어,
합변계약을 한 70만 원이라면 현재 시세로 280억 정도로 추정가능하다.
그리고 보천교는 이 자금으로 농업 특히 수전(水田)사업을 계획했고, 면적 약 10만 향지(晌地)를
계약 체결하였다. 향(晌)은 한 나절이므로 ‘한 나절 갈이 토지’로 추정 가능하다.
그런데 ‘하루갈이 토지’는 보통 경(耕)이라 하고 약 1,500평 정도로 본다.
이를 따른다면 향은 경의 4분의 1, 곧 375평 정도쯤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시각도 있다. 곧 1향은 소 한 마리가 하루에 경작할 수 있는 면적으로 약 6묘(畝) 정도로
보는 입장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산지의 면적 단위에서 묘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30평坪(99.174㎡)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1향은 180평 정도가 된다.
이처럼 아직까지 향에 대한 정확한 면적은 밝히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1향은 180~375평 내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10만 향지는 1,800만 평~3,750만 평의 범위에 있음을 알게 된다. 현재 행정도시인
세종시 면적이 2,200만평이다. 1향을 평균하여 약 270평 정도로 보면 계약 면적이 약 2,700만 평에 이르기
때문에,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위의 승려 백용성이 용정에 마련한 대각교당의 자리가 70여 향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 불교계에서는
1향을 400평으로 계산하여 28,000평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정광호, 1999). 참고할 만한 자료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덧붙일 내용이 있다.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혹은 1932년)에 증산을 신앙하는
종교집단 100여 호가 요령성 강평현(康平縣) 요양와보로 집단적으로 이주한 사실이 있다(박명익, 1994). 그
들은 1939년에 다시 길림성 유하현(柳河縣) 대전자촌(大甸子村)으로 옮겨갔고 여기서 조선으로부터
다시 40여 호가 와서 130여 호에 달했다. 그러나 1920년대에 이미 보천교는 정의부와 관련을 맺고 김좌진
장군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등 만주지역에서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때문에 유하현에 들어온 집단이 이러한 보천교와 어떻게든 계보적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일본어를 쓰지 못하게 했고 중앙 치성장소에 태극기를 그려 놓았다.
그 후 일제는 대전자촌에 밀탐(密探)을 잠입시켜 내막을 파악하면서 감시하다가,
1942년에는 ‘태극기를 그리고 일본을 반대한다’는 죄명으로 28명의 교도들을 체포하였다. 광복 후에
교도들이 석방되었지만, 이들 역시 1945년 이후 중국 사회주의 정부의 탄압으로 모두 사라져 버렸다.
보천교의 만주이주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차경석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의 의중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물론 『보천교연혁사』를 보면 이상호의 의중은 드러났다. ‘만주개척을 빙자하여
보천교의 돈을 뜯어낼[欺瞞] 목적을 가졌다가 이루어지지 못하자 보천교를 탈퇴하였다.
이후 김형렬 교단 등을 전전하다 동화교(東華敎)를 조직하여 교주라 칭하기까지 했다’ 한다.
기록자의 시선까지 더해진 평가로 보인다. 어찌되었든 간에 차경석은 끊임없이 만주에 대한 관심을 지녔다는 것만큼은 사실로 보인다. 다만 식민권력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알려진 대로 식민권력의 만주이주 권유 혹은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내용은 신중한 재고를 요한다.
보천교의 발자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