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기록에서 나타난 문자창조와 발달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밝달나라 시조한웅은 신지 혁덕에게 문자를 만들게 하였는데 사냥나가 사슴발자국을 보고 만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마침내 문자를 만드니 태고문자(그림문자)의 시작이다.(BC.4,000년).
※ 시조한웅은 밝검(환인)으로부터 천부경(天符經: 천지창조경)과 삼일신고(三一神誥: 천지창조의 근원과 사람과 만물의 교화서)를 구두로 전수 받고 왕권을 물려받았는데 신지씨가 녹도문을 만든 뒤 이것을 문자로 기록하였다.
세상에서 맨 처음 지은 책이고 경서이다.(검불본기)
2. 태호복희는 팔괘부호를 만들고 용서(龍書)를 만들었다.(검불본기)
※ 복희와 여호와족이 수메르로 이동한 후 팔괘부호(주로 직선으로 된 부호)와 용서(용의 움직임을 본 딴 그림문자)가 수메르에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BC.3,500년경)
3. 주양은 옛 문자에 의하여 처음으로 육서(六書: 여섯 가지 글자체)를 만들었다.(검불본기)
4. 자부선생(BC.2800년경)이 우서(雨書)를 만들어 칠회제신의 책력(음양오행력)을 만들고 삼황내문(三皇內文: 천황, 지황, 인황의 진리경서)을 지었는데 후세의 은나라는 칠회제신력을 기초로 하여 일주일 내내 해, 달, 물(수성), 불(화성), 목성(나무), 금성, 땅에 차례로 제사를 지내는 풍속을 가졌다. 이것이 일주일의 원형이다.
중국의 황제헌원은 치우한웅을 배알하고 가는 도중 산동성의 자부선생에게 들려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아 공부하여 신들을 부리는 능력을 얻고 군사를 모아 신농국을 멸하여 임금이 되고 마침내 치우한웅과 70여회의 전쟁을 한 중국의 시조다.
후에 삼황내문의 한권을 정리하여 음부경을 지었는데 중국 주(周)나라 초(BC.1,200년경)에 여상 강태공이 주(注)를 달아 자부선생의 뜻을 조술하였다.
치우한웅, 황제헌원과 같은시대의 인물들인 북경서쪽에 위치한 황제헌원 북쪽에 있던 대요(大堯)는 간지의 술(十干十二支의 사용법)을 배웠고, 북경동쪽에 있던 창힐(倉 )은 부도(符圖:천부경이 쓰여진 녹도문: 그림문자)의 글을 배웠다.( 삼성기전하편, 검불본기)
5. 치우한웅 이전에는 산목(계산법을 적는 숫자)이 있고(BC.4,000∼BC.2,700) 치우때는 화서(花書: 투전목: 세계의 카드와 화투의 시초)(BC.2,800)와 산목이 있었고, 부여때는 서산(書算: 계산법)이 있었다.(태백일사)(그림참조).
6. 아사달 시조한검(아사달검) 원년(BC.2,457) 신지(행정장관)에게 글자를 만들게 하다. 신전(神篆)은 은나라 갑골문의 원형이며 부여시대의 왕문이란 사람이 전문이 복잡하여 약간 생략하여 부예(符隸: 예서)를 만들고 진(秦)나라 때 (약 BC.200년경)정막이 숙신(고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王文)의 예서를 바꾸어 팔분(八分)을 만들고 진(晉)나라 때 왕차중(왕문의 후손)이 해서(楷書)로 발전시킨 것이 한문(漢文)이다.
문자의 시원은 모두 밝달의 녹도문이고 한문과 한글 모두 우리민족이 만든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두 가지의 문자를 만들어 오랫동안 사용한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아사달검 67년(BC.2,391) 태자 부루를 (중국 안휘성) 도산에 보내 순임금의 치수관 우사공(나중의 夏나라 禹임금)에게 험난한 곳을 다녀도 해를 입지 않는 천부왕인(天符王印), 물의 깊이를 측정할 수 있는 신침(神針), 황거종(皇鉅宗 : 우주진리, 음양오행, 오행치수법 등을 적은 여러권의 책으로서 표지는 금간옥첩金簡玉牒이라고도 한다.)의 세가지 보물(黃帝中經 : 황제중경은 금간옥첩중의 한권일 것임)을 전해주니 그로부터 중국의 치산치수가 잘 되었고 이 공로로 우사공은 순임금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고 나라이름을 하(夏)로 하여 하나라의 시조가 된다.
(검불본기, 한검세기)
※ 약 200년 후에 수메르에서 왕권의 상징으로 측량자가 나타난다.
7. 아사달 3세 가륵한검 2년(BC.2305) 삼랑 을보륵에게 글자를 만들게 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가림토라 하였다.(한검세기)
※ 이 문자는 한글과 똑같으며 지금도 인도의 구자라트 지역에서 사용하고 있다.
한국, 인도, 수메르가 서로 교류하였으니 이때 이후에 가림토가 전해졌을 것인데 인도에서 쓰는 가림토가 언제 전해졌는지, 또 일본의 아히루 신대문자에는 어떻게 영향 되었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깊이 연구도 하지 않고 외래문명이 한국에 들어왔다고 만 생각하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인도는 우리민족이 6,500년 전부터 이동하여 살았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파동적으로 이동한 역사적 사실(몽골족의 무갈제국 등)들이 있으므로 불교의 석가모니가 사용했던 산스크리트어(범어)가 바로 우리의 방언에 속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를 것이나 석가모니를 믿는 불교인들이 지난 2,000년 동안 한문으로 번역한 불교경서만 달달 외우는 앵무새들이어서 또 하나의 사대주의에 빠지게된 원인이 되었다. 도대체 종교인들이 언어연구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으니 그 한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그러면서 석가모니 이전의 우리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소극적이니 조상님들께서 보시기에 중들은 모두 역적들이다.
기독교인들도 똑같다.
수메루가 인류문명의 시원이라고 주장하고 자기들이 마치 이스라엘민족의 후예인 것처럼 착각하고 단군상의 목을 거침없이 자르는 역적행위들은 종교와 조상을 구분하여 다같이 존경할 수 있는 포용력을 길러주지 못한 지도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
지금 한국인들은 일본의 역사왜곡을 말할 수 있는 자격조차 없는 속빈 강정들이다.
그 동안 한국의 교육정책과 종교교육이 얼마나 엉터리였는가를 증명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먼저 자성하고 자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세종대왕의 한글은 몽골족에 의하여 인도로부터 중앙아시아에 전해진 가림토를 본 따서 만든 것이다. 세종실록 25년 12월조에 "---其字倣古篆"이라고 하여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했다"라고 하였으나 "전자(篆字)에서는 한글원형을 모두 찾기가 어렵다.
8. 아사달 5세 구을한검 4년(BC.2,220) 육십갑자를 이용하여 책력을 만들었다.
※ 십간십이지는 옛부터 있었는데 책력을 만든 것은 처음이란 뜻이다.
중국 서량지의 "중국사 전사화"에 "중국의 책력법은 동이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犧和子)이다.
그의 계통은 은나라 동이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임승국의 한단고기)
9. 아사달 12세 아한한검 2년(BC.1,957) 나라를 순수하다 요하 남쪽(하북성)에 순수관경비를 세워 역대 제왕들의 이름을 새겼다.(문자사용 증거)
10. 아사달 20세 고흘한검 40년(BC.1,465) 공공인 공홀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했다.(문자사용 증거).
11. 아사달 22세 (조선 시조) 색부루왕검 원년(BC.1,409) 금8법 제정(문자사용 증거)
● 여기에서 한국과 수메르의 문자사용 연대를 비교해 보자.
① 수메르는 BC.4,500년∼3,500년까지는 여러 가지 모양의 조약돌 같은 물표를 사용하다가 BC.3,500경에 갑자기 고도문명이 나타나고 물표에 선을 이리저리 그어서 사용했는데 이 시기는 복희-여호와족이 중국에서 밀려난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선들은 복희가 만든 선들로 이루어진 팔괘부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이것을 주장하는 일본학자도 있다.
② 수메르는 BC.33세기경 생활이 발전하고 거래하는 물품이 많아지니 점토판에 수효나 문양을 그려 상형문자를 사용했다. 상형문자의 원형은 이미 밝달나라에서 녹도문으로 사용한지가 오래되었고 또 복희가 상형문자의 일종인 용서(龍書)를 만들었는데 이때부터 선과 그림문자를 병행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BC. 30세기경에는 선을 여러 가지 형태로 복잡하게 조합하여 쓰는 쐐기문자로 발전하고 BC. 1,200년경에 알파벹 원형이 나타난다.
특이한 것은 수메르의 상형문자는 점차 발전한 것이 아니고 갑자기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외부영향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수메르는 한국, 중국과 꾸준히 교류하고 있었다고 판단되는데 여호와족과 신농족, 그리고 소호족은 모두 중국에서 밀려난 사람들이므로 한국보다는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문자는 중국의 문자발전과정과 일치하고 말은 우리민족이니 고대한국과 중국의 말이 모두 나타나지만 한국과 같은 교착어로서 한국의 말에 더 친근하다.
수메르는 BC.2,700년경부터는 교육을 시행할 정도로 문화가 발달했고 BC.2,600년경에 우르 제1왕조를 세우면서 급속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는 중국에서 신농족과 소호족이 쫒겨난 시기로 일치하는데 수메르에서 인구이동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형태가 나타나고 점차 전쟁이 많아지는 시기다.
따라서 역사상에 나타나는 수메르의 뛰어난 조상은 여호아이며 뒤를 이어 소호김천씨인 엔릴(우르 제1왕조)이고 그 다음이 우르남무(우르3왕조)이고 그 다음이 아브라함이다.
1. 밝달나라 시조한웅은 신지 혁덕에게 문자를 만들게 하였는데 사냥나가 사슴발자국을 보고 만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마침내 문자를 만드니 태고문자(그림문자)의 시작이다.(BC.4,000년).
※ 시조한웅은 밝검(환인)으로부터 천부경(天符經: 천지창조경)과 삼일신고(三一神誥: 천지창조의 근원과 사람과 만물의 교화서)를 구두로 전수 받고 왕권을 물려받았는데 신지씨가 녹도문을 만든 뒤 이것을 문자로 기록하였다.
세상에서 맨 처음 지은 책이고 경서이다.(검불본기)
2. 태호복희는 팔괘부호를 만들고 용서(龍書)를 만들었다.(검불본기)
※ 복희와 여호와족이 수메르로 이동한 후 팔괘부호(주로 직선으로 된 부호)와 용서(용의 움직임을 본 딴 그림문자)가 수메르에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BC.3,500년경)
3. 주양은 옛 문자에 의하여 처음으로 육서(六書: 여섯 가지 글자체)를 만들었다.(검불본기)
4. 자부선생(BC.2800년경)이 우서(雨書)를 만들어 칠회제신의 책력(음양오행력)을 만들고 삼황내문(三皇內文: 천황, 지황, 인황의 진리경서)을 지었는데 후세의 은나라는 칠회제신력을 기초로 하여 일주일 내내 해, 달, 물(수성), 불(화성), 목성(나무), 금성, 땅에 차례로 제사를 지내는 풍속을 가졌다. 이것이 일주일의 원형이다.
중국의 황제헌원은 치우한웅을 배알하고 가는 도중 산동성의 자부선생에게 들려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아 공부하여 신들을 부리는 능력을 얻고 군사를 모아 신농국을 멸하여 임금이 되고 마침내 치우한웅과 70여회의 전쟁을 한 중국의 시조다.
후에 삼황내문의 한권을 정리하여 음부경을 지었는데 중국 주(周)나라 초(BC.1,200년경)에 여상 강태공이 주(注)를 달아 자부선생의 뜻을 조술하였다.
치우한웅, 황제헌원과 같은시대의 인물들인 북경서쪽에 위치한 황제헌원 북쪽에 있던 대요(大堯)는 간지의 술(十干十二支의 사용법)을 배웠고, 북경동쪽에 있던 창힐(倉 )은 부도(符圖:천부경이 쓰여진 녹도문: 그림문자)의 글을 배웠다.( 삼성기전하편, 검불본기)
5. 치우한웅 이전에는 산목(계산법을 적는 숫자)이 있고(BC.4,000∼BC.2,700) 치우때는 화서(花書: 투전목: 세계의 카드와 화투의 시초)(BC.2,800)와 산목이 있었고, 부여때는 서산(書算: 계산법)이 있었다.(태백일사)(그림참조).
6. 아사달 시조한검(아사달검) 원년(BC.2,457) 신지(행정장관)에게 글자를 만들게 하다. 신전(神篆)은 은나라 갑골문의 원형이며 부여시대의 왕문이란 사람이 전문이 복잡하여 약간 생략하여 부예(符隸: 예서)를 만들고 진(秦)나라 때 (약 BC.200년경)정막이 숙신(고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王文)의 예서를 바꾸어 팔분(八分)을 만들고 진(晉)나라 때 왕차중(왕문의 후손)이 해서(楷書)로 발전시킨 것이 한문(漢文)이다.
문자의 시원은 모두 밝달의 녹도문이고 한문과 한글 모두 우리민족이 만든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두 가지의 문자를 만들어 오랫동안 사용한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아사달검 67년(BC.2,391) 태자 부루를 (중국 안휘성) 도산에 보내 순임금의 치수관 우사공(나중의 夏나라 禹임금)에게 험난한 곳을 다녀도 해를 입지 않는 천부왕인(天符王印), 물의 깊이를 측정할 수 있는 신침(神針), 황거종(皇鉅宗 : 우주진리, 음양오행, 오행치수법 등을 적은 여러권의 책으로서 표지는 금간옥첩金簡玉牒이라고도 한다.)의 세가지 보물(黃帝中經 : 황제중경은 금간옥첩중의 한권일 것임)을 전해주니 그로부터 중국의 치산치수가 잘 되었고 이 공로로 우사공은 순임금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고 나라이름을 하(夏)로 하여 하나라의 시조가 된다.
(검불본기, 한검세기)
※ 약 200년 후에 수메르에서 왕권의 상징으로 측량자가 나타난다.
7. 아사달 3세 가륵한검 2년(BC.2305) 삼랑 을보륵에게 글자를 만들게 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가림토라 하였다.(한검세기)
※ 이 문자는 한글과 똑같으며 지금도 인도의 구자라트 지역에서 사용하고 있다.
한국, 인도, 수메르가 서로 교류하였으니 이때 이후에 가림토가 전해졌을 것인데 인도에서 쓰는 가림토가 언제 전해졌는지, 또 일본의 아히루 신대문자에는 어떻게 영향 되었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깊이 연구도 하지 않고 외래문명이 한국에 들어왔다고 만 생각하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인도는 우리민족이 6,500년 전부터 이동하여 살았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파동적으로 이동한 역사적 사실(몽골족의 무갈제국 등)들이 있으므로 불교의 석가모니가 사용했던 산스크리트어(범어)가 바로 우리의 방언에 속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를 것이나 석가모니를 믿는 불교인들이 지난 2,000년 동안 한문으로 번역한 불교경서만 달달 외우는 앵무새들이어서 또 하나의 사대주의에 빠지게된 원인이 되었다. 도대체 종교인들이 언어연구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으니 그 한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그러면서 석가모니 이전의 우리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소극적이니 조상님들께서 보시기에 중들은 모두 역적들이다.
기독교인들도 똑같다.
수메루가 인류문명의 시원이라고 주장하고 자기들이 마치 이스라엘민족의 후예인 것처럼 착각하고 단군상의 목을 거침없이 자르는 역적행위들은 종교와 조상을 구분하여 다같이 존경할 수 있는 포용력을 길러주지 못한 지도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
지금 한국인들은 일본의 역사왜곡을 말할 수 있는 자격조차 없는 속빈 강정들이다.
그 동안 한국의 교육정책과 종교교육이 얼마나 엉터리였는가를 증명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먼저 자성하고 자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세종대왕의 한글은 몽골족에 의하여 인도로부터 중앙아시아에 전해진 가림토를 본 따서 만든 것이다. 세종실록 25년 12월조에 "---其字倣古篆"이라고 하여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했다"라고 하였으나 "전자(篆字)에서는 한글원형을 모두 찾기가 어렵다.
8. 아사달 5세 구을한검 4년(BC.2,220) 육십갑자를 이용하여 책력을 만들었다.
※ 십간십이지는 옛부터 있었는데 책력을 만든 것은 처음이란 뜻이다.
중국 서량지의 "중국사 전사화"에 "중국의 책력법은 동이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犧和子)이다.
그의 계통은 은나라 동이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임승국의 한단고기)
9. 아사달 12세 아한한검 2년(BC.1,957) 나라를 순수하다 요하 남쪽(하북성)에 순수관경비를 세워 역대 제왕들의 이름을 새겼다.(문자사용 증거)
10. 아사달 20세 고흘한검 40년(BC.1,465) 공공인 공홀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했다.(문자사용 증거).
11. 아사달 22세 (조선 시조) 색부루왕검 원년(BC.1,409) 금8법 제정(문자사용 증거)
● 여기에서 한국과 수메르의 문자사용 연대를 비교해 보자.
① 수메르는 BC.4,500년∼3,500년까지는 여러 가지 모양의 조약돌 같은 물표를 사용하다가 BC.3,500경에 갑자기 고도문명이 나타나고 물표에 선을 이리저리 그어서 사용했는데 이 시기는 복희-여호와족이 중국에서 밀려난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선들은 복희가 만든 선들로 이루어진 팔괘부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이것을 주장하는 일본학자도 있다.
② 수메르는 BC.33세기경 생활이 발전하고 거래하는 물품이 많아지니 점토판에 수효나 문양을 그려 상형문자를 사용했다. 상형문자의 원형은 이미 밝달나라에서 녹도문으로 사용한지가 오래되었고 또 복희가 상형문자의 일종인 용서(龍書)를 만들었는데 이때부터 선과 그림문자를 병행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BC. 30세기경에는 선을 여러 가지 형태로 복잡하게 조합하여 쓰는 쐐기문자로 발전하고 BC. 1,200년경에 알파벹 원형이 나타난다.
특이한 것은 수메르의 상형문자는 점차 발전한 것이 아니고 갑자기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외부영향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수메르는 한국, 중국과 꾸준히 교류하고 있었다고 판단되는데 여호와족과 신농족, 그리고 소호족은 모두 중국에서 밀려난 사람들이므로 한국보다는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문자는 중국의 문자발전과정과 일치하고 말은 우리민족이니 고대한국과 중국의 말이 모두 나타나지만 한국과 같은 교착어로서 한국의 말에 더 친근하다.
수메르는 BC.2,700년경부터는 교육을 시행할 정도로 문화가 발달했고 BC.2,600년경에 우르 제1왕조를 세우면서 급속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는 중국에서 신농족과 소호족이 쫒겨난 시기로 일치하는데 수메르에서 인구이동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형태가 나타나고 점차 전쟁이 많아지는 시기다.
따라서 역사상에 나타나는 수메르의 뛰어난 조상은 여호아이며 뒤를 이어 소호김천씨인 엔릴(우르 제1왕조)이고 그 다음이 우르남무(우르3왕조)이고 그 다음이 아브라함이다.
출처 : 눈에 보이는 것이 다 진실은 아니다,
글쓴이 : sadk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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