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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르호 본 역사증거4-중국대륙의 배달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7. 4. 7. 16:26
 

배달이
중국 대륙에 있었기에


4. 배달이 중국 대륙에 있었기에 조선과 삼국이 그곳에서 건국했다

출처: blog.chosun.com/stormmer


1) 자오지 한웅은 중국 대륙의 서토를 정복했다

삼국의 위치

천문기록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百濟와 新羅가 건국 초부터 日蝕을 발해만과 揚子江 유역에서 관측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百濟와 新羅가 어디서 옮겨온 나라가 아니라, 渤海灣과 揚子江 유역에서 건국한 나라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百濟가 갈라져 나온 高句麗 역시, 中國 대륙에서 건국할 수밖에 없었다. 高句麗의 초기 일식이 중가리아분지 및 大興安嶺山脈 이북 에서만 관측되는 것은 高句麗의 일식이 몇 개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三國史記에 기록된 高句麗 일식은 高句麗가 관측한 전체 일식의 1~2 %에 지나지 않는다.

遼水는 우리나라의 국경이 아니었다. 遼西까지도 우리나라 땅이었기 때문이다. 朝鮮時代 遼水가 현 遼水라면, 三國이 어떻게 중국 대륙에서 건국할 수가 있는가. 朝鮮時代에는 遼水가 동북아 끝에 있었다가, 三國時代에는 遼水가 중국 대륙 끝으로 끌려갔다는 것인가. 그 후 또 다시 遼水가 동북아 끝으로 밀려나고? 그러나 朝鮮의 일식기록도 중국 대륙에서 관측했다.

三國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한 것은 三國 이전의 국가가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이다. 白山이 중국 대륙에 있었다. 神市가 중국 대륙에 있었을 경우, 동북아의 문명이 중국 대륙보다 앞섰다는 󰡔列國時代의 갑옷-朝鮮 갑옷의 발전에 관한 시론󰡕�이 성립할 수 없다. 배달의 중심지는 동북아에 있다가 중국 대륙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慈烏支 桓雄 때 대륙으로 이동

우리나라가 중국 대륙으로 중심지를 옮겨간 시기는 배달 14世�� 慈烏支 桓雄 때다. 우리나라는 배달 말기부터 중국 대륙을 중심지로 삼았다.

4 천년�� 전 … 현재의 호북, 호남, 강서 등지는 이미 묘족(苗族)들이 점령하고 있었고, 중국에 한족(漢族)이 들어오게 된 후에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으며,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黎)이며, 군주는 치우다(한단고기, 임승국)

왕동령(王桐齡)의 中國民族史에 나오는 말이다. 임승국 선생은 바로 아래에서 “慈烏支 桓雄인 치우(蚩尤)를 군주로 하는 구려국(九黎國)의 백성들을 苗族 혹은 유묘(有苗), 三苗라고 하며 현대의 苗族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九黎가 苗族의 나라라면, 漢族에 정복됨으로써 九黎 아닌 다른 나라가 되어야 한다.

정복자는 慈烏支 桓雄이었다. 임승국 선생의 해석대로라면, 우리민족은 원래부터 중국 대륙에 살고 있었고, 中奴가 들어와 우리민족을 정복한 것이 된다. 그러나 王桐齡의 글은 문맥상으로도 중국에 漢族이 들어와 苗族을 정복한 것이 九黎다(九黎는 배달의 별칭이고, 蚩尤는 慈烏支 桓雄의 별칭이다)

우리민족은 韓(漢)民族이지, 苗族 혹은 有苗, 三苗가 아니다. 중국도 東夷族이라 불렀을 뿐이다. 훗날 明이 韓國史와 中國史를 바꾸면서 秦始王 呂政(秦始王은 呂不韋의 자식임)이 우리민족을 濊貊族 이라고 했다고 날조한 것이 전부다. 하나의 종족을 두고 온갖 명칭을 다 갖다 붙인 것은 濊貊族 밖에 없다. 민족명은 아무 것이나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민족과 관련 있는 것으로 짓기 마련이다. 한국(桓國)에서 시작하고, 그 구성원을 구한(九桓)이라 한 우리나라가 한족(桓族, 韓族, 漢族)이 아니라면, 누가 한족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 당시 중국의 한족(漢族)은 없었다. 날조 역사에서도 중국의 漢族은 漢나라 때 와서야 문헌상에서 창작된 종족이다. 그나마도 문헌상 漢나라는 고작 기원전 202년��에 등장한 나라다.

사람들은 漢이 중국의 漢나라를 가리킨다고 생각 하지만, 본래 漢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나라 문자가 녹도문(鹿圖文)에서 漢字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민족을 桓族, 韓族, 漢族이라 번역한 것이다. 漢水, 漢江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사람은 시대는 달라도 한인(桓人, 韓人, 漢人)이라 불렀다. 北夫餘人도, 高句麗人도, 百濟人도, 新羅人도, 大震國人도, 高麗人도 언제나 한인이었다. 서로를 구분할 때나 高句麗人이고, 百濟人, 新羅人 이었던 것이다.

청이 만든 날조 여지전도

그런데 실증 한단고기에는 王桐齡의 글을 아래와 같이 해석했다.

4 천년�� 전 …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苗族)들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는데,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黎)이며, 군주는 치우다.

중국‘에’ 한족(漢族)이 들어오게 된 후가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 오면서로 바뀌어 있다. 이 글자 한 자 때문에 문장 전체의 뜻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주 아주 이상한 문장이다. 원래 苗族이 살고 있었고,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 왔는데, 이렇게 해서 생긴 나라는 中國이 아니고, 우리나라라고 한다. 이 나라의 지배자 역시 우리나라 통치자라는 것이다.

정말 王桐齡이 ‘중국의 한족(漢族)’이라는 의미로 썼다면, 苗族이 우리민족 이라는 뜻이라면, 明이 붙인 漢國에 착안하여 중국인이 진출했다고 우긴 것이라면, 문장 서술까지 바꾸어야 한다.

4 천년�� 전 …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들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이며, 군주는 치우다. 그 뒤 중국의 한족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대체 중국인이 언제, 어디에서 민족 대이동을 했다는 것인가. 우리민족은 기원전 3898년��에 한웅 거발한(居發桓)이 무리를 이끌고 사백력(斯白力 : 시베리아)에서 黑水와 白山 사이로 이주 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중국인은 민족 대이동을 한 사실이 없다. 원래부터 중국 대륙 한 구석에 살고 있던 종족이다. 그래서 神市本紀에서 “공손헌원(公孫軒轅)이란 자가 있었으니 토착 백성들의 우두머리였다(有公孫軒轅者土着之魁)”고 했던 것이다. 中土人(支那人)은 토착민이 대대로 정복되어 외부 유전자와 섞임으로써 만들어진 종족이다. 公孫軒轅은 중국이 황제헌원(黃帝軒轅)이라 부르는 인물로 헌구(軒丘)로 유배 보낸 우리나라 사람 公孫의 후손이다.

우리나라는 배달 개천 당시부터 중국 대륙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桓因 : 한인) 뒤에 桓雄氏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白山과 黑水 사이에 내려왔다(後桓雄氏繼興奉天神之詔降于白山黑水之間 三聖紀全 上篇).”��

백산(白山) : 중앙아시아 일대의 天山山脈과 알타이산맥이라는 설과 白頭山이라는 설이 있다. 임승국씨는 白頭山으로 비정 하는데 임승국씨는 󰡔한단고기󰡕�에서 “白頭山은 유사 이래로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또 최근 일부에서는 이 白山을 중국 甘肅省의 太白山 이라고 하는 학설을 퍼뜨리는 이도 있으나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白頭山을 빼고 중국의 太白山이 白山 이라고 함에는 보다 확실하고 확고한 근거가 필요한 것이다. 중국 󰡔二十五史󰡕�에 보이는 ‘白山’이나 ‘太白’이 의심없이 지금의 白頭山임을 밝혀둔다.”고 말했다 (임승국 선생의 의견을 따른다. 다만 중국대륙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제천의식은 白頭山을 떠나게 된다. 대신 제천을 담당하는 후국을 둔다. 후술한다)

여기서 나오는 黑水도 黑龍江이라는 설과 바이칼호수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편저자는 바이칼호수로 比定한다).

4천년�� 전 … 현재의 호북, 호남, 강서 등지는 이미 묘족(苗族)들이 점령하고 있었고, 중국에 한족(漢族)이 들어오게 된 후에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으며,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黎)이며, 군주는 치우다.

漢族은 우리민족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王桐齡(중국역사학자)의 글을 읽어보면, 중국 즉 中原에서 한족이 들어왔다고 썼음을 알 수 있다. 慈烏支 한웅 때 中土를 정복 하면서 토착종족인 苗族과 접촉했던 것이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치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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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도 동두(銅頭)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므로 苗族은 현재의 湖北, 湖南, 江西 등지에 살고 있지 않았다. 李成桂가 揚子江 이남을 朱元璋에게 주었을 때, 朱元璋은 華夏族을 揚子江 이남 전체로 밀어냈다. 苗族들이 현재의 湖北省, 湖南省, 江西省 등지에서 살게 된 것은 겨우 6 백년 밖에 안 된다.

중국에 한족(漢族)이 들어오게 된 후에 차츰 苗族과 접촉하게 된 곳은 티벳고원 북부로 우리민족이 진출했다는 얘기다. 이렇게 해서 중국 대륙을 포함, 동아시아를 강역(疆域)으로 한 우리나라 이름이 九黎, 군주는 蚩尤였던 것이다.

“東夷는 대륙의 동쪽에, 華夏族은 대륙의 서쪽에 있다”고 한 史記는 中土(西土)를 대륙이라 바꾼 것이다. 華夏는 中土 토착민의 총칭으로 우리나라의 피지배종족 이었다. 慈烏支 한웅이 정복할 당시 토착민 일부가 中土 서부로 밀려난 것이다. 그러나 토착민이 中土 서부에 있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나라는 배달 5世�� 天皇 태우의(太虞儀) 한웅의 아들 태호(太昊) 때부터 中土를 지배하고 있었다.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정복할 당시에도 고신씨(高辛氏)가 中土 서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東夷는 中土로 들어간 太昊와 高辛 등이 中土밖에 살고 있는 同族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 東夷가 中土를 정벌해 회대(淮垈)와 海垈에 눌러 살게 된 것이다. “東夷는 中土의 동쪽에, 華夏族은 中土의 서쪽에 있다” 함은 피지배종족 華夏의 관점에서 본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중국의 남부지방 귀주성(貴州省) 등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민족인 苗族은 蚩尤氏를 종족의 시조로 여긴다.”

(http://bluecabin.com.ne.kr/kyuwon/tasiki.htm 참조).

苗族이 정복된 시기가 4 천년�� 전인 것으로 보아, 苗族의 시조는 慈烏支 한웅이 아니다. 慈烏支 한웅은 81 명의 친척을 장수로 삼아 中土를 정복했는데, 이들 蚩尤氏들은 中土(淮垈)에 정착했다. 漢族이 진출하자 苗族을 포함한 中土 토착민 일부는 서쪽으로 밀려 났는데, 시간이 흘러 蚩尤氏의 후예가 번성하자 앞서 정착한 淮垈에서 벗어나 더욱 깊숙이 서쪽으로 들어가 苗族들을 지배하고 산 것이다.

“司馬遷의 史記에 ‘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다는데 蚩尤가 가장 사납게 굴어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었다. 헌원(軒轅)이 섭정 했는데 蚩尤의 형제가 81 인이 있었다. 이들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였다.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銅頭鐵額)를 가지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장(五丘杖), 도극(刀戟), 태노(太弩)를 만드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 蚩尤는 옛 天子의 이름이다’라고 했다(司馬遷史記曰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爲暴天下莫能伐軒轅攝政蚩尤有兄弟八十一人並獸身人語銅頭鐵額食沙造五丘杖刀戟太弩威振天下蚩尤古天子之號也 三聖紀全 下篇).”��

중국 벽화 속의 치우천황 : 중국의 입장에서 그린 벽화가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던 치우의 모습이다

어떻게 형제가 81 인씩이나 될 수 있는가. 람세스 2세(Ramses II)도 그렇게 많은 아들을 갖지는 못했다. 太白逸史 神市本紀의 ”��집안과 종당(宗黨)에서 장수될 만한 인재 81 명을 골라(選兄弟宗黨中可將者八十一人)”��가 정확한 기술이다.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졌다(獸身人語銅頭鐵額)” 라함은 갑옷 입고 투구 썼다는 말이다. 中土는 아직도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로부터 4 백년 후인 요(堯) 때 후직(后稷)이 농사법을 가르쳤다. 곡식이 뭔지 몰랐던 華夏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쌀 등의 곡식을 먹는 것을 보고, 쌀알이 꼭 모래처럼 작으니까 “모래를 먹었다.(食沙)”고 한 것이다.

헌원(軒轅)이 최후의 승자라면, 慈烏支의 위세가 천하에 떨쳐질 수 있는가. 왕동령(王桐齡)도 慈烏支 한웅에 의해 정복된 中土가 우리나라의 일부가 되었다고 했다. 苗族이 살던 땅을 蚩尤가 정복해 九黎에 병합 시켰다고.

軒轅은 慈烏支 한웅에 패해 도망친 유망(楡罔)을 대신해 섭정했던 것이다. “이때 軒轅이란 자가 있었는데, 楡罔이 패하여 달아나고 蚩尤氏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크게 군사를 일으켜 蚩尤氏에게 대항하여 싸웠다(時有軒轅者聞知楡罔敗走而蚩尤氏爲帝欲代以爲君乃大興兵與蚩尤氏拒戰 揆園史話 太始紀).”�� 楡罔을 패퇴시킨 후에야 蚩尤氏가 제위에 올랐다는 것은 거짓이다. 慈烏支 한웅은 배달의 통치자가

태호복희의 초상

된 후에 中土를 정복했다. 軒轅은 楡罔이 도망치자, 왕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軒轅 역시 慈烏支 한웅에게 패해서 慈烏支 한웅의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威振天下)” 天子는 軒轅이 아니라 蚩尤였던 것이다.

蚩尤氏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 되었기에 黃帝氏는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而蚩尤氏兄弟諸人 乃永據幽靑 聲威自是不撼 黃帝氏亦不得自安 揆園史話).”�� “軒轅의 무리들은 모두다 신하 되기를 원하며 공물을 바쳤다(軒轅之屬皆稱臣入貢 太白逸史 神市本紀).”�� “軒轅은 이로부터 편안하지 못하여 그 대가 끊길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베고 눕지를 못했다. 史記에 이르되 (軒轅이) 산을 뚫어 통로를 내며 일찌기 편안히 살지 못하였으며 탁록(涿鹿)의 강에 고을을 옮겼으나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 하는 전장(營衛)에서 살았다(軒轅以來世不自安終其世而未嘗安枕而臥史記所謂披山通路未嘗寧居邑于涿鹿之河遷徙往來無常定處以師兵爲營衛 太白逸史 神市本紀).”�� ��三聖紀全 下篇 에서는 ”��涿鹿의 벌판에서 軒轅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涿鹿之野擒軒轅而臣之).”��고 했다.

태호(太昊 伏羲)조차 中土를 封土로 받았다. 그런데 어째서 慈烏支 한웅은 제후들이 다스리는 中土를 정복 했는가. 시간이 흐르자 제후들이 점차 말을 안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벌’했다. “유망(楡罔)의 정권이 쇠약 하여지니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다(楡罔衰政乃興兵出征 太白逸史 神市本紀).”�� 李氏朝鮮 중기의 책이라서 그렇다. “��楡罔이 정치를 하면서 급하게 모든 읍의 두 백성(이 글 바로 앞에 神農과 少昊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神農과 少昊의 백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神農과 少昊는 楡罔의 부하다)들이 제휴하도록 했으나 떠나는 백성들이 많아져서 세상의 道가 매우 어지러워졌다.(楡罔爲政束急諸邑携二民多離散世道多艱 太白逸史 神市本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기사는 이렇다. “楡罔의 정권이 덕을 잃으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연전연승하고, 적병들을 혼미케 하여 혼란에 빠지게 하고, 헌원(軒轅)의 무리들이 모두 다 신하되기를 원하였다면서 湖南, 湖北, 江西 등지만 慈烏支 桓雄이 지배한 九黎(구려, 구리) 땅일 수 있는가. 배달의 통치자 慈烏支 한웅이 湖北, 湖南, 江西 등지만으로 만족했단 말인가.

慈烏支 한웅이 고작 湖北, 湖南, 江西 일대만 지배했다면, 어떻게 “천하의 태평을 맹세”할 수 있는가. 중국 문헌에도 慈烏支를 가리켜 천하의 임금이라 했다(蚩尤古天子之號也). 전쟁에서 패한 軒轅은 慈烏支 한웅의 신하가 되었다.

이 때에 자부선생(紫府先生)의 일곱번 신에게 제사 지내는(七回諸神) 역법을 만들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천왕이 있는곳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고 三淸宮을세우사 그곳에 살게 하였는데, 공공(共工), 헌원(軒轅), 창힐(倉頡), 대요(大撓)의 무리가 모두 와 여기서 배웠다(紫府先生造七回諸神之曆進三皇內文於天陛天王嘉之使建三淸宮而居之共工軒轅倉頡大撓之徒皆來學焉 馬韓世家)

헌원(軒轅)이 일어나자 바로 탁록(涿鹿)의 벌판에 나아가 헌원(軒轅)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고 뒤에 오장군(吳將軍)을 보내어 서쪽으로 고신(高辛)을 공격하여 공을세우게 하였다(軒轅之立也直赴涿鹿之野擒軒轅而臣之後遣吳將軍西擊高辛有功 神市本紀)

이와 똑같은 글이 원동중(元董仲)의 三聖紀 에도 있다.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헌원의 모습

헌원(軒轅)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涿鹿)의 벌판으로 나아가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을 보내 서쪽으로 고신(高辛)을 쳐 공을세우게 하였다(軒轅之立也直赴涿鹿之野擒軒轅而臣之後遣吳將軍西擊高辛有功)

제곡고신(帝梏高辛)이 黃帝(軒轅)의 증손이라면, 黃帝를 신하로 삼은 기사 바로 뒤에 나올 리가 없다. 서쪽이라 함은 아직 정복하지 않은 中土를 말한다. 高辛만이 아니라, 神農도 끊임없이 나온다. 高辛과 神農은 姓이기 때문이다. 中奴가 五帝라 부르는 인물들은 軒轅의 자손이 아니다.

吳나라는 우리나라의 제후국이다. 吳나라는 慈烏支 한웅이 정복한 中土의 최전방에 위치했다. 高辛의 나라와 접해 있어 吳나라에 침공군을 집결시킨 것이다.

高辛에 대요(大撓), 창힐(倉頡), 神農 등도 가세하여 中土를 나눴다. 軒轅은 티벳고원조차 저 혼자서 지배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吳장군”은 “吳나라의 장군으로”의 오기다. 神市本紀의 “軒轅黃帝가 즉위함에 이르자”는 “黃帝軒轅이 일어나자”의 오기다. 필사하는 과정에서 잘못 적은 것이다.

軒轅은 皇帝가 아니었다. 秦始王 이전에는 皇帝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中奴 스스로 날조하지 않았던가. 皇帝라는 호칭이 三皇五帝에서 한 자씩 따왔다고? 軒轅은 帝位에 오를 수 없었던 인물이다. 中奴의 날조사 에서는 5帝가 모조리 軒轅의 자손으로 나온다.

春秋戰國時代를 통일한 呂不韋의 자식이 도토리 같은 春秋五覇1)나 戰國七雄(秦,魏,趙,燕,齊,韓,楚)과는 다르다고 뭔가 특별한 것으로 불리고 싶다고 해서 3皇 5帝에서 한자씩 따 皇帝라고 했다나. 그러나 皇帝가 三皇五帝에서 한 자씩 땄다는 말부터가 거짓말이다.

기원 전후로 한자는 이미 2 만자를 넘었다고 했다. 이름에 공통적으로 ‘皇’과 ‘帝’가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그 많은 글자 가운데 어째서 3‘皇’이라고 하고, 5‘帝’라고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皇帝’를 염두에 두고 明 때에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5帝는 軒轅의 자손 이라면서, 皇帝라는 호칭은 3皇 5帝에서 한 글자씩 땄다면서, 炎‘帝’, 黃‘帝’라 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3皇 5帝가 누구인가는 문헌마다 제각각이다. 三皇만 해도 史記에서는 천황(天皇)·지황(地皇)·태황(泰皇)이라 하고, 河圖에서는 天皇·地皇·人皇이라 하고, 尙書大典에서는 수인(燧人)·복희(伏羲)·神農이라 하고, 백호통의(白虎通義)에서는 伏羲·神農·축융(祝融)이라 하고, 춘추운과추(春秋運科樞)에서는 伏羲·여와(女媧)·神農이라 하고, 尙書에서는 伏羲·神農·黃帝라 했다. 五帝도 史記와世��本 등에서는 黃帝·전욱(顓頊)·제곡(帝梏)·堯·舜이라 하고, 帝王世紀에서는 少昊, 전욱(顓頊), 帝梏, 堯, 舜이라 하고, 禮記에서는 伏羲, 神農, 黃帝, 少昊·顓頊이라 하고, 周易에서는 伏羲, 神農, 黃帝, 堯, 舜이라 했다.

모두가 3皇 5帝를 언급하지만,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말은 원래 中奴史에는 3皇 5帝가 없다는 의미다. 3皇 5帝 역시 우리나라 역사에서 착안해서 明 때 졸속으로 만들어낸 것이다(한단고기의 三神五帝本紀 참조).

3皇은 여러 황제 가운데 가장 뛰어난 3 인으로 桓因(한님), 배달을 개천한 神市氏 桓雄(거발한한웅), 慈烏支 桓雄(蚩尤天皇)을 일컫고(太白逸史 三神五帝本紀), 5帝는 관념적인 존재로 천지창조의 주관자 黑帝, 赤帝, 靑帝, 白帝, 黃帝(黃帝軒轅이 아니다)를 말한다.

천황(天皇)·지황(地皇)·인황(人皇)이 당시 인간세상의 황제였다고? 땅위의 皇帝가 누구였나. 배달과 朝鮮의 天皇이다. 天皇은 배달, 朝鮮의 통치자에 대한 호칭이다. 하늘의 皇帝라는 뜻으로 천손민족을 자부한 우리민족이 아니면 쓸 수 없다. “天子라는 호칭은 東夷(배달)에서 시작되었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생각했기 때문에 天子라고 한 것이다(天子之號稱始於東夷父天母地故曰天子 獨斷)”라는 蔡邕(채옹 : 後漢의 학자)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天皇·地皇·人皇은 우리민족에게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희한하게도 3皇 5帝는 모두 넉자 이름이다(千字文에도 나타난다).

기원전 수천년�� 전에 하나같이 넉자 이름을 가진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물론 성은 있었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넉자 이름을 가지지 않았기에 제요도당(帝堯陶唐=堯)은 제요방훈(帝堯放勳=陶唐氏)이라고도 하고 제순유우(帝舜有虞=舜)는 제순중화(帝舜重華=有虞氏)라고도 한다. “우순(虞舜)은 맥족(貊族)이며, 貊族은 東夷의 부족을 형성하고 있는 하나의 자손이다(中國史前史話-臺灣大學의 徐亮之 교수 저).”��라더니, 무슨 帝舜重華? 날조사를 창작하던 인간들이 제각각이 썼던 것이다. 帝舜有虞라 하고 帝舜重華라 날조당한 인물의 실명은 우순(虞舜)이다.

더욱 기가막힌 것은 아들은 모두 2 자 姓인데, 炎帝神農, 黃帝軒轅, 帝舜有虞의 母는 모두 강씨[姜(羌)氏], 희씨(姬氏), 요씨(姚氏)로 1 자 姓이다. 모두 2 자 姓 가진 남편을 만났다고 생각 하겠지만, 중국 문헌에 이 당시 中土는 母系社會였다. 모계사회란 다수의 남편이 있어서 부(父)를 확정하지 못해(유전자 검사법이 없으니까) 부득이 母의 姓氏를 따르는 사회다. 더구나 中土의 모계사회는 더욱 현란하여 다수의 여자와 다수의 남자가 ‘결혼’하는 형태였다. 결국 태어난 아이들에게 남자의 姓을 하나씩 골고루 붙여줄 수밖에 없었다는 소리였던 것이다.

神農의 母가 姜氏이고, 黃帝의 母가 姬氏 라면서 그 아들을 炎帝神農, 黃帝軒轅이라 부르는 것은 父의 성을 따랐다는 것인데, 神農과 軒轅 이후로는 母의 성으로 돌아가 姬氏, 姜氏라 불러, 姬氏의 시조가 軒轅, 姜氏의 시조가 神農 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軒轅의 아들이 소호금천(少昊金天)이고, 軒轅의 외손자가 전욱고양(顓頊高陽)이라고 횡설수설한다. 제곡고신(帝梏高辛)은 軒轅의 증손자, 帝堯陶唐은 軒轅의 고손자로 변신했다. 날조사에 의하면 결국 軒轅은 姬氏의 시조 이면서 姬氏를 姓으로 물려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母系社會였다는 것은, 軒轅의 아내는 하나가 아니었고, 軒轅의 아내들은 남편이 하나가 아니라는 소리다. 뭘 근거로 軒轅의 아들, 손자라고 하는지 밝혀야 할 것이 아닌가. 후대에 일관성 없이 날조하지 않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얘기다.

中土에서 母系社會를 구성한 것은 華夏族이지, 우리민족이 아니다. 미개 華夏族의 치부를 감추고자 우리민족을 끌어들인 것이다. 華夏라는 명칭은 周나라 武 임금 때에 ”��華夏와 蠻貊이 따라 오지 않음이 없다(華夏蠻貊 罔不率俾 周書)”��라 한 글에서 비로소 처음 나타났다. 周나라를 건국할 때만 해도 中土人들은 華夏와 陌(貊), 漢族으로 뚜렷이 구분됐다. 하지만 漢族(?)도 점차 모계사회 풍습에 빠져들어 周나라 말기 이후 혹은 漢나라 이후는 華夏族과 구분이 안 갔을 것이다. 그래서 高句麗와 百濟가 저들을 통틀어 한위노(漢委奴)라 했다.

“혹 말하기를 창힐(倉頡)은 高辛과 더불어 역시 모두 蚩尤氏의 후예다(或曰倉頡與高辛亦皆蚩尤氏之苗裔 太白逸史 神市本紀).”�� 帝梏高辛은 軒轅의 후손이 아니라 蚩尤氏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帝梏高辛 뿐만 아니라, 少昊金天, 顓頊高陽 도 軒轅과는 혈통의 연결이 없는 사람들이다. 모두 軒轅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軒轅을 신하로 잡은 다음에 오나라에 장군으로 보내 서쪽으로 高辛을 공격하여 공을세우게 하였다(擒軒轅而臣之後遣吳將軍西擊高辛有功 太白逸史 神市本紀).”�� 神農, 高辛 등은 모두 성이다. 그래서 무수한 神農과 高辛, 少昊 등이 있었다. 神農은 소전(少典)의 아들로, 神農을 성으로 바꾼 것이다.

우리나라 중심지가 中國 대륙으로 옮겨가자, 더 이상 太白山(현 白頭山)은 祭天儀式 장소로써의 기능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현 白頭山이 화산폭발하기 전에는 보통 크기의

 

 

“혹 말하기를 창힐(倉頡)은 高辛과 더불어 역시 모두 蚩尤氏의 후예다(或曰倉頡與高辛亦皆蚩尤氏之苗裔 太白逸史 神市本紀).”�� 帝梏高辛은 軒轅의 후손이 아니라 蚩尤氏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帝梏高辛 뿐만 아니라, 少昊金天, 顓頊高陽 도 軒轅과는 혈통의 연결이 없는 사람들이다. 모두 軒轅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軒轅을 신하로 잡은 다음에 오나라에 장군으로 보내 서쪽으로 高辛을 공격하여 공을세우게 하였다(擒軒轅而臣之後遣吳將軍西擊高辛有功 太白逸史 神市本紀).”�� 神農, 高辛 등은 모두 성이다. 그래서 무수한 神農과 高辛, 少昊 등이 있었다. 神農은 소전(少典)의 아들로, 神農을 성으로 바꾼 것이다.

우리나라 중심지가 中國 대륙으로 옮겨가자, 더 이상 太白山(현 白頭山)은 祭天儀式 장소로써의 기능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현 白頭山이 화산폭발하기 전에는 보통 크기의 산이라서 우리나라의 靈山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데, 太白山은 神市氏가 처음으로 정착한 땅이라서 우리나라 靈山이 된 것이지, 높고 큰 산이라서 우리나라 靈山이 된 것이 아니다). 너무나 멀기 때문이다. 교통이 발달한 요즘도 먼 거린데, 탈 것이라고는 말과 가마밖에 없었던 그 옛날, 제사 한 번 지내러 가기 위해 6 개월씩, 1년�� 씩 투자할 수는 없다. 1년��에도 몇 번씩 祭天儀式을 거행했기 때문이다.

“戊戌 28년��(B.C. 1583), 구한(九桓)의 여러 한(汗)들이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三神과 上帝에게 제사지냈으니, 한인(桓因), 한웅(桓雄), 치우(蚩尤) 및 檀君王儉을 함께 배향 하였다(戊戌二十八年九桓諸汗于寧古塔祭三神上帝配桓因桓雄蚩尤及檀君王儉而享之 檀君世記).”��에서 보듯이 16世�� 檀君 위나(尉那)가 제후국의 한(汗)을 모조리 대동하고 太白山까지 가서 매번 제사 지내기는 불가능했다.

백두산 천지의 풍경

그래서 중국 대륙에 새로운 靈山을 마련해야 했다. 西安 서쪽의 太白山은 長安, 鷄林(桂林), 星宿海와 함께 아마도 중국 대륙의 지명중에서 유일하게 옮겨지지 않은 지명일 것이다. 朝鮮時代 제사를 올린 곳은 여러 장소로 그 외에도 寧古塔, 九月山 등이 있는데, 모두 중국 대륙에 있다.

섬서성(陝西省)에 太白山이 있다는 사실은 朝鮮의 도읍도 그 근처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朝鮮時代에는 여러 번 遷都했으나, 太白山에서 먼 곳에 도읍할 수는 없다.

위서(魏書)·물길전(勿吉傳)에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太白 이라고 한다. 범과 표범·곰·승냥이 등이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은 산위에 올라 가서는 방뇨를 하지 않았다. 하였고, 北史·勿吉傳에도 역시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중원의 말로 “太白”이라 하며, 풍속에 그곳을 매우 삼가며 공경한다.(魏書勿吉傳曰國有徒太山魏言太白有虎豹熊狼不害人人不得上山鏽溺 … 云云 北史勿吉傳曰亦國有徒太山華言太白俗甚畏敬之 揆園史話).”��? 太白山은 우리나라 말이다. “한웅(居發桓桓雄)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太白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 오시니 이곳을 神市라 하고 이분을 한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桓雄率衆三千降于太白山頂神壇樹下謂之神市是謂桓雄天王 三聖紀全 下篇).”�� 역사를 남의 나라 말로 기록하나? 역사를 뒤바꾸면서 우리나라 말까지 제 것이라 우긴 것이다. 이제껏 太白山이 남의 나라 말인 줄 알고 太白山, 太白山 했단 말인가.

“��이 때에 한 곰족(熊族)과 한 범족(虎族)이 이웃하여 살고 있었다. 이들은 신단수(神檀樹)에 와서 빌기를 ‘원하옵기는 변하여 신계의 백성(神戒之氓)이 되게 하옵소서’ 하였다. 환웅(桓雄)이 이 말을 듣고 ‘가르칠만하다’하고, 이에 주술(呪術)로써 뼈를 바꾸고 정신을 고쳐 신(神)이 보낸 깨우침을 가지고 영(靈)을 삼았다. 그리고 쑥(艾 : 애) 한 줌과 마늘(蒜) 스무 개를 주면서 경계 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체를 얻을 것이다.' 하였다(時有一熊一虎同隣而居嘗祈于神壇樹願化爲神戒之氓雄聞之曰可敎也乃以 呪術換骨移神先以神遺靜解靈其艾一炷蒜二十枚戒之曰爾輩食之不見日光 百日便得人形 三聖紀全 下篇).”��

이 기록에서 桓雄(거발한한웅)은 熊族과 虎族에게 산(蒜 : 마늘) 스무 개를 준다는 내용이 나온다. 마늘의 자생적인 원산지는 중앙아시아 파미르고원 및 천산산맥 일대 중가리아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기록은 우리민족의 천산산맥 기원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마늘(蒜)은 파(蔥), 쑥(艾)과 함께 아득한 태고적부터 우리 겨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온 소중한 식품이며 약재이다. 우리의 옛 문헌을 살펴보면 마늘의 기원을 추측할 수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파미르 고원에는 “마고성(麻姑城)”이라고 하는, 바둑판처럼 네모지게 생긴 城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천부단(天符壇)”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은 지상천국 이었다. 여기에 4 형제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형제 중의 하나가 禁忌를 범하여 4 형제 모두가 쫓겨나게 되었다. 아버지가 연대책임을 지운 것이다.

쫓겨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맏아들은 천산산맥을 지나 북쪽으로 가고 둘째는 동쪽 중국으로, 셋째는 서쪽 중동지방(수메르지역)으로, 넷째는 남쪽 인도로 가서 각각 인간을 다스렸다. “환국(桓國)”이 바로 여기서 나오는 “麻姑城”을 가리킨다. 또한 “桓雄”은 이들 형제 중에서 직계 宗孫이었다. 桓雄은 天山山脈을 지나서 요동, 만주 등의 기름진 땅에 도착하여 농경사회를 일구었는데 이때 파미르 고원에서 가져온 파와 마늘이 나중에 여러가지로 큰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신계지맹(神戒之氓) : 맹(氓)이라 함은 外來의 이주민, 외래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마늘(蒜)은 天孫(神國)의 의미를 쑥(艾)은 토착민(氓)의 의미를 갖는다.

코리(Khori)族이 고리국(槀離國)사람? 비리(卑離)가 부이르 호수? 蒙古族은 1270년�� 이전까지는 蒙古高原에 살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았다.

수백 개씩 城을 쌓은 高句麗나 百濟를 서슴없이 유목국가라 부르는 것이 이 땅의 사학자들이다. 유목국가에 대한 개념 정립부터 안 돼 있어서 그렇다. 하기야 東洋史를 날조한 인간들도 高句麗나 百濟가 수백 개씩 성을 쌓은 기록을 남기고도 遊牧民族이라 우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蒙古高原과 티벳고원에 가보면, 유목민의 실체를 알 수 있다. 천막 치고 살다가,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천막을 걷고 가축을 몰아서 간단하게 이동한다. 가축만 빼면 천막 안에 있는 것이 遊牧民이 가진 전부다. 유목민에게 그 이상의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蒙古高原에 蒙古族이 살게 된 것은 12세기 후반이고, 티벳고원에 티벳이 살게 된 것은 明 때다. 그 땅에 남아 있는 유적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들었다. 수시로 이동하는 유목민에게는 高度文明을 개발할 시간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이삿짐이 간단해야 하니까, 고도문명을 개발해야 할 이유도 없다. 정착생활은 문화의 기원이다.

匈奴도 유목민이라 오르도스(鄂爾多斯)로 이주 했다고 간단히 날조 당했다. 그러나 오르도스는 천문기록으로 나타나는 高句麗 疆域이다. 蒙古年表 대로 기원전 4 백년��경에 匈奴族이 오르도스로 이주 했다면, 우리나라 강역을 빼앗긴 것이고, 보통 큰일이 아닌데, 桓檀古記 어디에도 匈奴族을 포함해서 蒙古族의 침입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기원전 425년�� 부터 삼신영고(三神迎鼓)의 제사를 지냈고, 감찰관을 파견하여 효도 잘 하는 자와 청렴결백한 관리를 천거하도록 하고, 燕나라 사신이 새해 문안인사를 올리는 한가한 얘기나 있고, 다만 구물(丘勿) 檀帝가 붕어하고 태자 여루(余婁)가 즉위한 것이 큰 사건이다. 성을 쌓거나, 燕나라가 변두리나 遼西에 침범하다가 내쫓긴 것이 가장 큰 사건이다.

匈奴나 蒙古에 대한 기사라고는 온통 한가로운 얘기뿐이다. “甲申 원년(B.C. 2137) 天皇(4世�� 檀君 烏斯丘)의 동생 烏斯達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다(甲申元年封皇弟烏斯達爲蒙古里汗 檀君世紀).”�� “戊寅(B.C. 703)년에 흉노(凶奴)가 番韓에 사신을 파견해 天王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로 칭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戊寅凶奴遣使番韓求見天王稱臣貢物而去 三韓管境本紀 番韓世家 下).”��

“甲辰 6년�� 열양(列陽)의 욕살(褥薩) 색정(索靖)에게 명하여 약수(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하였다. 뒤에 이를 용서 하시고 곧 그 땅에 封하니 그가 흉노(凶奴)의 조상이 되었다(甲辰六年命列陽褥薩索靖遷于弱水終身棘置後赦之仍封其地是爲凶奴之祖 檀君世記).”��

弱水 : 곤륜산(崑崙山)에서 흘러 내리는 강, 부력(浮力)이 약하여 기러기의 털도 가라 앉는다고 한다. 옛날에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적인 강이다. 천문기록으로 찾은 한국사에서는 약수의 위치를 티벳고원 동쪽으로 비정한다. 옮겨진 지명이다.

凶奴 : 곧 흉노(匈奴)이며 지금의 몽고지방에서 살았다. 후에 고구려에게 쫒겨 티벳으로 들어간다.

蒙古가 蒙古高原에 없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日本이 베낀 大震國의 일식기록이다. 日本이

가릉강의 삭도

베낀 710년��에서 792년��까지의 일식관측지가 蒙古高原 이북이다. 蒙古高原이 蒙古 땅이라면, 黑龍江 상류의 黑水女眞을 숙여진(熟女眞)처럼 전력화하지 않고서는 蒙古高原 이북을 지킬 수 없다. 수초나 찾아 떠돌도록 방치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蒙古高原이나 오르도스에서 티벳고원 북부의 漢나라를 위협할 수 있는가. 중국이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했다고 날조한 결과, 종이 위에서 匈奴가 오르도스로 이동했던 것이다.

천문기록으로 살핀 高句麗의 강역이 동아시아 북부로 나타난 이상, 新羅가 揚子江에서 건국하고 百濟가 동북아를 차지하고 있는 이상, 高句麗가 滿州에서 소국으로 출발했다던가, 百濟와 新羅가 韓半島에서 건국했다는 주장은 성립할 여지가 없다. 고리국1) 역시 蒙古에 없었다.

2) 고려 말의 난하가
북부여 시대의 패수다

癸亥 3년��(B.C. 118) 우거(右渠)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해 해성(海城) 이북 50 리 땅이 모조리 우거(右渠)의 땅이 되었다. … 丙寅 6년�� 단제께서 몸소 정예군 5000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海城)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薩水)에 이르니 구려하(九黎河)의 동쪽은 모두가 항복해왔다(癸亥三年右渠賊大擧入寇我軍大敗海城以北五十里之地盡爲虜有 … 丙寅六年帝親率精銳五千襲破海城追至薩水九黎河以東悉降 北夫餘記)

北夫餘 4世�� 檀君 고우루(高于婁) 때의 기사이다. ”��九黎河의 동쪽”��에서 九黎河는 남북으로 흐르는 강임을 알 수 있다. 남북으로 흐르는 강은 가릉강(嘉陵江 : 중국 四川省을 흐르는 揚子江의 제3대 지류. 면적 15 만 9700 ㎢, 길이 1,119 km. 四川省의 省都는 成都이다. 成都에 王建墓가 있다) 부터다. 티벳고원 남부에 몰려 있다.

구려하(九黎河)를 건너 요동(遼東)의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니, 바로 고리국(槀離國)의 땅이다(渡九黎河追至遼東西安平乃槀離國之地 北夫餘記)

嘉陵江 서쪽에 있는 평야가 西安平이다. 바로 四川盆地이다. 高句麗의 영토가 “西로는 遼水를 건너 2 천리“라는 것은 西安平이 高句麗 영토라는 뜻이다. 高句麗는 西安平을 상실할 때도, 西安平을 획득할 때도 “西로는 遼水를 건너 2천리“를 갖고 있었다.

九黎河는 嘉陵江이다. 西安平이 遼東에 있었으니까 西安平(四川盆地)에 있는 강들은 모두 遼水가 될 수 없다. 西鴨綠江은 西安平 以西에서 찾아야 한다. 西鴨綠江은 남북으로 흐르는 강으로 西鴨綠江은 중토에서 우리나라를 침략할 때 반드시 건너지 않으면 안되는 관문이었다. 작은 강이 아니므로 민강(岷江) 밖에 없다.

太白逸史 大震國本紀에서 “西鴨綠은 고리(槀離)라는 옛 나라의 땅이다.(西鴨綠槀離古國地也)” “서경(西京) 압록부(鴨綠府)는 본래 槀離國(西京鴨綠府本槀離古國)”이라고 했다. 大震國 당시의 西鴨綠水는 嘉陵江이고, 槀離國 당시의 西鴨綠水는 岷江이다. 그러나 槀離國의 땅 西安平이 嘉陵江과 접해 있으므로 大震國 시대의 西鴨綠水도 槀離國의 옛 땅이었던 것이다.

己亥 38년��(B.C. 202), 연(燕)나라의 노관(盧綰)이 다시금 요동(遼東)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浿水)로써 경계를 삼으니 패수는 오늘날의 난하(灤河)다(己亥三十八年燕盧綰復修遼東故塞東限浿水浿水今灤河也 北夫餘記)

北夫餘記를 쓸 당시의 난하(灤河)가 北夫餘 시대의 浿水라는 말이다. 北夫餘記는 高麗 末 범장(范樟)이 썼다. 결국 高麗 末의 灤河가 첫 浿水다. 오늘날의 灤河는 黃河와 遼水 사이에 있다. 날조 中奴史 에서는 강 위치를 기준으로 지명을 밀어 냈으니까, 高麗 末에도 灤河는 금사강(金沙江 : 黃河)과 嘉陵江(遼水) 사이에 있었다. 부강(芙江)은 高麗 末의 태천(泰川)이었다. 遼東을 정벌 한다던 李成桂는 西鴨綠江(嘉陵江)을 건너 泰川(威化島回軍 1388)에 이르렀다가 회군했다. 타강(沱江)이 高麗 시대의 灤河 즉 北夫餘 시대의 浿水다.

‘다시금’에 주목하자. 예전에도 노관(盧綰)이나 중구(中寇)가 遼東을 점령했던 것이다. 그때 막조선(莫朝鮮)이 멸망했다. 이미 莫朝鮮이 사라졌으니까, 莫朝鮮이라 하지 않고 遼東이라 한 것이다.

“百濟는 본래 高句麗와 함께 遼東의 동쪽 천 여리에 있었다(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는 宋書의 기록도 날조기사다. 莫朝鮮이 멸망했기 때문에 盧綰이 匈奴로 도망친 이후에는 岷江 이동까지 北夫餘의 영토였다. 단강(丹江) 이남만 沃沮 땅이었을 뿐이다.

朝鮮時代에는 제후국의 위치가 자주 바뀌었다. 夫餘가 그러했고, 高矢氏의 나라도 그러했다. “夫餘에게 북방의 땅을 더하여 봉하고 … 高矢氏는 그 봉토를 고쳐 남쪽의 땅에 봉하였다(乃益封夫餘 北方之地… 更封高矢氏於南方之地 揆園史話 檀君紀).”�� 番韓의 위치도 변경됐다.

진한(眞韓)은 나라 안을 진정 시키고 도(道)로 다스리니 모두 새로워졌다. 모한(慕韓 :馬韓)은 왼쪽을 보필하고 번한(番韓)은 그 남쪽에 대비하여 험준한 바위가 사방의 벽을 둘렀다(眞韓鎭國中治道咸維新慕韓保其左番韓控其南巉岩圍四壁 檀君世紀)

6世 檀君 달문(達門) 재위시의 기사다. 番韓이 眞韓(辰韓)의 남쪽을 대비한다 했으니까, 薩水(丹江) 이남에 있었다. 馬韓은 왼쪽을  보필한다 했으니까 중구(中寇)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뜻이다. 馬韓은 浿西에 내내 있었다.

여원흥(黎元興)에게 명하여 마한(馬韓)으로 삼아 막조선(莫朝鮮)을 통치하고 … 여원흥(黎元興)이 이미 대명을 받아 대동강(大同江 : 浿水)을 장악하니, 역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命黎元興爲馬韓治莫朝鮮 … 元興旣受大命鎭守大同江亦稱王儉城 太白逸史 三韓管境本紀)

朝鮮時代의 浿水는 타강(沱江)이다. 여원흥(黎元興)이 명을 받았을 때, 莫朝鮮은 番朝鮮과 西鴨綠水(岷江)를 사이에 두고 위치했던 것이다. 馬韓(莫朝鮮)은 동으로 沱江, 서로는 岷江에서 番朝鮮과 접하고 남으로는 揚子江에 이르렀다.

티벳고원 남부는 부우(扶虞), 부소(扶蘇), 부여(扶餘)에게 봉토로 주웠다(扶婁,扶餘,扶虞,扶蘇는 檀君王儉의 아들들이다)가, 扶餘의 봉토가 된 땅이다. 三韓은 檀君王儉 통치 마지막해인 기원전 2241년��에 생긴 管境이니까, 扶餘가 티벳고원 남부에 터잡은 것이 먼저다.

“檀君王儉은 천하를 평정 하시고 三韓으로 나누어 관경(管境)을 만드시고 곧 웅백다(熊伯多 : 馬韓의 시조)를 봉하여 馬韓 이라고 하였다. 달지국(達支國)에 도읍 하였으니 역시 백아강(白牙岡) 이라고도 불렀다(檀君王儉旣定天下分三韓而管境乃封熊伯多爲馬韓都於達支國亦名白牙岡也 太白逸史 三韓管境本紀 馬韓世家 上)” 達支國이 국호인지 지명인지는 알 수 없다. 지명 이라면, 처음부터 馬韓이 岷江 이동에 있었다는 것이고, 扶餘의 위치는 바뀌었다. 도읍지는 白牙岡 阿斯達이다. 馬韓의 시조인 熊伯多는 熊族의 후손으로 보여진다.

後漢書와 三國志의 기록을 보면 馬韓은 54 개 나라를 거느리고 있으며 辰韓은12 개의 나라를, 番韓 역시 12 개의 나라를 거느리고 있어서 三韓을 합치면 모두 78 개의 나라를 거느리고 있었다(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韓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後漢書)고 말한다. 三韓의 대륙존재를 말하고 있다.

(B.C. 1284 22世�� 檀君 索弗婁는) 황하(黃河) 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번한(弁韓)의 백성들을 회대(淮垈)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했다(河上而受捷賀遷弁民于淮岱之地使之畜農 檀君世紀)

“番韓(弁韓)의 백성들을 회대(淮垈)의 땅으로 옮긴(遷弁民于淮岱)” 것은 番韓이 淮垈에서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 하겠지만, 淮垈는 노강(怒江) 상류와 金沙江 상류 사이다. 番韓(弁韓)이 이미 丹江 이남에서 옮겨와 岷江 이서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22世�� 檀君 색불루(索弗婁) 이전부터 馬韓은 岷江 以東, 타강(沱江) 以西에, 番韓은 岷江(西鴨綠江) 이서에 위치했다.

後漢의 유학자 왕부(王符)가 쓴 잠부론(潛夫論)에 “周나라 宣王(B.C.827~782 재위) 때 한후(韓侯)가 있었는데, 연(燕)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 후 韓의 서쪽에서도 성(姓)을 한(韓)이라 하더니 衛滿에게 망하여 海中으로 옮겨갔다(周宣王時有韓候於燕濱…….立姓韓 爲衛滿所伐 還居海中)”고 쓰여 있다면서 韓氏朝鮮이라 부르는 자(이병도)들도 있다. 그러나 이 당시 番朝鮮을 다스린 건 서우여(徐于餘)의 후손이다. 番朝鮮의 왕위는 蚩氏(蚩頭男)부터 徐氏(徐于餘), 箕氏(箕詡), 衛氏(衛滿)까지 여러 姓氏로 바뀌었기 때문에 箕氏朝鮮, 衛氏朝鮮이라는 말 자체가 부적절한 용어다. 더구나 箕氏, 衛氏는 단명한 왕조다.

날조 춘추강역도(春秋疆域圖)에서 韓은 燕나라 근처에 없었다. 燕과 韓 사이는 趙, 魏 등의 나라가 가로막고 있었다. 날조 春秋疆域圖에서 韓은 秦의 동쪽에, 날조 대륙의 중앙부에 위치했다. 韓의 서쪽은 鄭, 宋, 魯, 齊 따위의 소국이 존재한다고 했으므로 番朝鮮이 있을 자리가 없다. 날조사에서 韓과 番朝鮮은 1000 km나 떨어져 있었다.

燕은 怒江(예전 長江) 이남에 있었다. 黃河 이남으로 확대된 明 때도 揚子江 이남에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문구, ‘왜(倭)는 연(燕)에 속한다(倭屬燕 山海經 海內北經)’가 나온 것이다. 周나라 제후라는 韓도 燕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그 좁은 怒江 이남에도 戰國七雄 중 두 나라나 있었던 것이다.

番朝鮮 내지 朝鮮이 韓의 서쪽에 있었다? 韓의 서쪽이 아니라 동쪽이다. 怒江 이동은 番朝鮮(番韓; 番韓을 포함한 三韓管境은 기원전 2241년��에 생겼다)의 영토였다. 티벳고원만 잘라놓고, 韓의 서쪽에 朝鮮이 있었다고 한 것이다. 그래도 番韓(番朝鮮)이 가장 크다. 周나라 宣王은 기원전 827년��에서 782년�� 까지 왕위에 있었다. 朝鮮의 32世�� 檀君 추밀(鄒密) 때, 周나라에 韓이라는 제후국이 생긴 것이다.

어째서 韓의 동쪽이 아니라, 서쪽에 우리나라가 있다고 했겠는가. 실은 後漢 王符의 潛夫論도 우리나라 책을 그대로 베꼈다. 32世�� 檀君 鄒密 때, 番朝鮮의 ‘서쪽’(怒江 이서)에 燕이 있었고, 그 옆에 나라가 새로 생겨 韓이라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나라라서 韓이라 했다.

檀君 鄒密을 周나라 宣王으로, 番韓을 韓으로 바꾸고, 국호를 성(姓 : 韓氏)이라고 재치까지 부렸으나(너무 눈에 띄는 거라서), 서쪽을 동쪽으로 바꿔야 하는 것은 놓쳤던 것이다.

날조 韓의 구체적인 위치는? 廣東省과 福建省에 걸쳐 한강(韓江)이라고 있다. 한수(漢水), 한강(漢江)이 아니다. 우리나라하고 전혀 관계없는 강이다. 明이 티벳고원 북부에서 빠져나왔을 때, 春秋戰國 시대의 소국들이 있을 자리에 강 이름을 하나씩 붙였다. 韓이 있을 곳에 韓江, 민(閩)이 있을 곳에 閩江하고. 中奴가 중국 대륙을 차지했다고 우길 심산에서 그랬는지, 하도 나라가 많아서 자신들도 헷갈려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중국 대륙에 아직도 우리나라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갑자기 대폭 늘어난 江에 뭐라 이름 붙일지 몰라서 그랬던 것 같다.

운장의 위치

원래 韓江과 閩江에는 中國倭가 있었다. 倭는 燕에 속한다면서, 韓과 閩을 中國倭에 포개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韓과 閩을 지금의 자리에 갖다놓은 건 淸이다. 淸은 中國倭를 중국 대륙에서 삭제해 버렸다. 燕은 渤海灣으로 빠졌다. 倭는 우리나라의 위치를 추정할 근거가 되고, 수치스러운 中奴史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오늘날 中國 지도의 지명은 淸이 최종적으로 밀어낸 위치다. 그러나 지금 현재도 새로운 지명을 만들어 내며 현 중국은 지나간 역사를 점점더 五里霧中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盧綰의 부하 衛滿이 西鴨綠江(岷江) 이서의 番朝鮮 땅을 가로채자, ”��戊申 2년��(B.C. 193) 檀帝(모수리 : 慕漱離)께서 上將 연타발(延佗勃)을 파견하여 平壤에 성책(城柵)을 설치하고 도적 떼(中寇를 말한다. 北夫餘記를 쓴 高麗 시대만 해도 중국은 제대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 미개 소국 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李氏朝鮮 중기에 쓴 太白逸史에서는 中奴의 왕을 皇帝라 높여주고 있다)와 衛滿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戊申二年帝遣上將延佗勃設城柵於平壤以備賊滿 北夫餘紀).”��

番朝鮮의 王儉城은 창도(昌都)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衛滿의 꼬임에 빠져 箕準이 들어간 강은 난창강(瀾滄江)이다. 瀾滄江이 라오스로 들어가면 메콩강으로 불린다. 衛滿의 꼬임에 빠진 箕準이 “마침내 바다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遂入海而不還 檀君世紀)” 함은 어딘가에서 나라를세웠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현 라오스와 베트남의 접경지대까지 갔다가, 교지국(交趾國)을세운 것은 아닐까?

운장(雲障)은 어디인가? “壬辰 31년��(B.C. 209) 진승(陳勝)이 군대를 일으키니 秦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지러웠다. 이에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番朝鮮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上下의 雲障에 갈라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하여 감독케 하였다(壬辰三十一年陳勝起兵秦人大亂燕齊趙民亡歸番朝鮮者數萬口分置於上下雲障遣將監之 北夫餘記 上).”��

우선 雲障은 番朝鮮 지역에 있었다. 중국인들을 살게 한 곳이라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은 아니다. 전략적 지역 이라면, 아무리 도망쳐 나왔다고는 하나,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모여 살게 할 리가 없다. 더구나 저 중국인들은 馬韓 땅을 잠시 점거하고 있던 盧綰의 부하 衛滿이 番朝鮮으로 도망쳐오자, 같이 모의해 番朝鮮의 왕위를 찬탈한다. 그러므로 雲障은 중국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올 때의 관문인 西鴨綠江(岷江)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지역이다.

운장(雲障). 구름이 막히는 곳이다. 티벳고원은 유난히 구름이 많은 지역인데, 岷江 서쪽으로 한정하면, 탕구라 산맥(唐古拉山脈) 부근이 유력하다. 唐古拉山脈에 막혀 서쪽에서 바람이 불지 않으니까, 구름이 흩어지지 못하고 모여 있게 된다.

丙辰 32년��(B.C. 365) 연(燕)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와서 요서(遼西)를 함락시키고 운장(雲障)에까지 육박해왔다. 이에 번조선(番朝鮮)이 상장 우문언(于文言)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고 진조선(眞朝鮮) 막조선(莫朝鮮)도 역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을 숨겨두고 연(燕)나라 제(齊)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쳐부수니 요서(遼西)의 여러 성이 모두 회복 되었다(丙辰三十二年燕人倍道入寇陷遼西逼雲障番朝鮮命上將于文言禦之眞莫二朝鮮亦派兵來救設伏來攻破燕齊之兵於五道河遼西諸城悉復 檀君世紀) 45世�� 檀君 여루(余婁) 때의 기록이다.

遼西가 함락되고 雲障까지 위기에 처했는데, 番朝鮮이 眞朝鮮, 莫朝鮮보다 앞서 군대를 급파한 것은 倍道가 番朝鮮 지역에 쳐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의 遼水는 怒江 이서에 있던 조그만 강이다.

이 당시 遼水가 岷江이라면, 倍道의 공격로는 이상하기 짝이 없다. 遼西를 함락시킨 倍道는 그대로 직진해서 遼東까지 함락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岷江이 遼水라면, 倍道가 곧장 동쪽으로 공격했다면, 遼西 다음에는 곧바로 遼東이므로 雲障이 위치할 공간이 없다.

“倭는 燕에 속한다.”에서 알 수 있듯이 朱元璋은 燕을 揚子江 이남으로 밀어냈다. 원래 燕이 怒江 상류 이남에 있었기 때문이다. 岷江이 遼水라고 하면, 倍道는 동쪽으로 침입 하다가, 갑자기 서쪽으로 군대를 돌려 공격 대상을 바꾼 셈이다. 三朝鮮은 倍道가 雲障까지 육박해 왔을 때야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니까 倍道는 장애물도 없는 상태에서 공격로를 바꿔 탕구라 산맥(唐古拉山脈)으로 막힌 곳을 향했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처음부터 倍道는 燕에서 곧장 아래로 공격로로 잡았던 것이다. 倍道는 眞朝鮮이 아니라, 番朝鮮을 목표로 침입했다. 이 당시에는 遼水=西鴨綠江이 아니었던 것이다.

燕나라가 작다 보니까, 莫朝鮮이나 眞朝鮮까지 쳐들어올 수는 없었다. 衛滿이나 右渠는 番朝鮮을 차지했으니까, 衛滿朝鮮은 작은 나라가 아니다. 眞朝鮮은 番朝鮮의 상국으로서, 莫朝鮮은 眞(辰)朝鮮을 보필할 의무로서 구원했던 것이다. 長安에 도읍한 것은 番朝鮮도 아니고 莫朝鮮도 아닌, 眞(辰)朝鮮이었다.

가을 8월��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였는데 요하(遼河)의 남쪽에 이르자 순수관경(巡狩管境)의 비를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과 호를 새겨 이를 전하게 하였다. 이것이 금석문의 최초이다. 뒤에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은 이곳을 지나며 시 한 수를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마을과 들은 변한(弁韓)이라 하였는데 홀로 빼어난 돌 하나 있네
대(臺)는 거칠고 철죽(躑躅)은 붉게 피었는데 글자는 파뭍히고 이끼만 푸르구나
천지가 처음 열릴 때 생겨서 나라가 흥하고 망할 때세우기를 다 하였네.
문헌으로 고증할 수 없으나
이 어찌 단군(檀君)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秋八月帝巡國中至遼河之左立巡狩管境碑刻歷代帝王名號而傳之是金石之最也後滄海力士黎洪星過此題一詩曰 村郊稱弁韓別有殊常石臺荒躑躅紅字沒苺苔碧生於剖判初立了興亡夕文獻俱無徵此非檀氏跡 檀君世紀)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는 12世�� 檀君 아한(阿漢) 때세운 것이다. 遼水는 中土와의 경계선 근처에 있었다. 遼水 아래 雲障이 있었다. 위로부터 燕나라, 遼水, 雲障 순으로 위치했다.

黎洪星은 시를 읊을 당시, 中土에 있었다. 유방(劉邦)을 도와서 漢나라를세웠거나세우기 직전일 것이다. 番韓(番朝鮮)은 中土 밖이다. 그래서 ‘마을 밖 弁韓이라 이르는 곳에’ 즉 中土 밖에 서 있는 巡狩管境碑를 보고 시를 읊은 것이다. 또한 黎洪星의 시를 통하여 朝鮮時代에 글자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黎洪星은 우리 역사서에만 나온다. 다만 史記에는 滄海力士라고 하여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黎洪星과 함께 秦始王의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던 張良은 韓나라 사람이였다)

“高句麗의 도읍 平壤城은 본래 漢나라 樂浪郡 王險城이다(高麗治平壤城本王險城 史記)”��. 이곳에서의 治는 다스렸다는 뜻이 아니라 도읍을 말한다. 朝鮮의 계승국 高句麗가, 모든 한민족을 대표 한다면서 遣韓使(遣漢使), 한맹(寒盟)이라 한 高句麗가 고작 제후국의 왕성에 도읍을 정하겠는가. 高句麗가 도읍으로 정한 平壤城은 眞(辰)朝鮮의 王儉城이다. 三朝鮮이 도읍을 똑같이 王儉城이라 불렀다는 사실에 착안해 중국은 番朝鮮의 王儉城을 眞朝鮮의 王儉城에다 포갰던 것이다.

유철(劉徹 漢武王) 은 中土 서부에서 漢나라를 침범하는 匈奴의 상국 北夫餘에게 탄원하려고 했지만, 右渠가 막아 뜻을 이루지 못하자, 보복으로 右渠가 차지한 番朝鮮을 침입했고 패퇴했다. 고두막한(高豆莫汗 : 北夫餘 5世�� 檀君)은 右渠 땅을 4분해 그 중 하나를 樂浪에 주었다. 樂浪이자, 番朝鮮의 王儉城은 岷江 이서에 있었던 것이다. 漢나라가 설치했다고 날조한 漢四郡의 위치도 山東省과 渤海灣이 아니라, 岷江 이서에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高句麗에서 갈라져 나온 百濟가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 나라를 (遼西에 있는) 帶方에서 시작했다(有仇台者 始國於帶方)”는 周書나, “그 나라는 帶方의 옛 땅에서 처음 일어났다(始立其國于帶方故地)”는 隋書도 사실이 아니다. 三韓의 도읍을 다같이 王儉城이라 부르는 것을 기화로 番韓을 辰韓에다 포개버렸기 때문에 百濟가 帶方에서 시작했다고 날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明은 우리나라 역사를 다 훔친 상황에서 舊唐書에다 高句麗가 箕子神을 섬겼다고 슬쩍 끼워 넣었다(其俗多淫祀事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 高句麗는 番朝鮮(후의 箕子朝鮮, 衛滿朝鮮)이 아니라, 朝鮮, 大夫餘, 北夫餘를 계승한 天子의 나라다. 그런데 高句麗가 朝鮮의 제후국 番朝鮮의 가공 지배자를 神으로 모실 수가 있는가. 그것도 

티벳고원 북부의 피지배종족을. 더구나 高句麗 시대에는 우리나라 역대 역사서가 다 존재했기 때문에 箕子朝鮮이 날조임은 단번에 알 수 있다.

神人王儉도 北東의 제후들을 모아 神市氏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南西의 제후를 모아 蚩尤氏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南東의 제후를 모아 高矢氏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했지, 자신이 신하를 위해 제사 지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神人王儉도 북쪽으로 순행 하면서 太白山의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남쪽으로 순행하면서 갑비고차(甲比古次)에 이르러 두악(頭岳 : 摩利山의 별칭)의 꼭대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12世�� 檀君 阿漢의 巡狩管境碑의 위치도

箕子朝鮮은 없었다. 箕子가 요동에 살았다? 티벳고원 북부의 기(箕)라는 땅에서 살았기 때문에 箕子라고 불렀다(대청일통지 : 大淸一統志). 箕는 그 당시 開封에서 서쪽으로 90 리에 있었다. 箕子의 무덤도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다. 梁나라 몽현(蒙縣) 박벌성(薄伐城)에 성탕(成湯 : 殷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의 무덤 서쪽에 만들었다(杜預曰梁國蒙縣北有薄伐城城內有城湯塚其西有箕子塚 水經注)

箕準이 箕子의 40 대 후손?(三國志) 箕子의 姓氏는 成이다. 殷나라를세운 成湯의 후예다. 사람들이 땅 이름을 따서 箕子라고 부른다고 냉큼 箕氏로 바꿨단 말인가. 箕子의 후손이 아니다. ‘수유(須臾)의 사람 기후(箕詡)(須臾人箕詡)’라고 했다. 箕子의 후손이면 ‘箕子의 후손 箕詡’라고 했다. 箕氏라고 해봐야 箕詡에서 箕準까지 6 대에 불과하다. 解慕漱가 北夫餘를세우고 자신에게 동조한 수유후(須臾侯) 기비(箕丕)를 番朝鮮王으로 봉했으니, 箕丕조차 箕詡의 직계가 아니다.

노관(盧綰)이 다시금 岷江(西鴨綠江)에서 沱江(浿水)까지 차지했다가 8년�� 뒤 丙午 45년��(B.C. 195) 韓信등을 兎死狗烹시키고 있던 劉邦을 피해 匈奴로 도망치고, 盧綰의 부하 衛滿이 番朝鮮으로 가서 왕을 내몰자, 戊申 2년��(B.C. 193), 平壤에 성책(城柵)을 설치하고 도적 떼와 衛滿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 이듬해 檀帝의 동생 고진(高辰)으로 하여금 海城을 수비케 하고, 癸丑 42년��(B.C. 128) 고해사(高奚斯) 檀帝가 직접 衛滿(기원전 128년��은 衛滿朝鮮을 右渠가 지배하고 있었다)의 도둑 떼를 남려성(南閭城)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癸丑四十二年帝躬率步騎一萬破衛賊於南閭城置吏 北夫餘紀 上).

辛酉 원년(B.C. 120)에 장수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치게 하였으나 이롭지 못하여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 하는데, 공이 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高句麗侯)로 삼았다 (辛酉元年遣將討右渠不利擢高辰守西鴨綠增强兵力多設城柵能備右渠有功陛爲高句麗侯 北夫餘紀 上)

西鴨綠江의 수비가 右渠를 대비하는 것이다. 衛滿朝鮮이 西鴨綠江(岷江) 너머에 있었던 것이다.

기유(己酉) 3년��(B.C. 192) 海城을 수비한 高辰이 辛酉 원년(B.C. 120)에도 西鴨綠江을 수비할 수는 없다. 기원전 192년��에 수비 책임을 맡은 高辰은 63년�� 뒤라면 벌써 죽었거나 백세에 가까운 나이다. 젊은 사람들을 놔두고 노인에게 수비를 맡기고 제후로 삼는 것은 이상하기 짝이 없다. 北夫餘記의 저 기사는 필사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겼거나 해모수(解慕漱 : 해머슴)의 아들과 다른 인물이다.

解慕漱가 北夫餘의 檀君이 될 때 그의 나이 23 살로서 생일은 4월 8일이었다. 한국 불교는 이날을 따서 석가탄일로 정했다고 한다. 석가탄일을 4월 8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는 나라는 불교국가들 중에서도 한국 불교만이 유일하다. 한국에 불교가 들어올 때 불교의 이질적인 모습들을 한국민들의 배척과 저항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의 정서와 절묘한 접목을 이루어냈는데, 우선 석가탄일을 天王郞 解慕漱의 탄일 4월 8일로 맞추어 정한 것이 그 하나요, 또 부처님을 모실 본전(本殿)을 한국민 정기의 총본산인 한웅전(桓雄殿)에 모신 것이 그 둘이다.

불가에서 쓰고 있는 대웅전(大雄殿)의 ”��대(大)”��자는 “한웅(桓雄)”��의 “桓”��자를 크고, 높고, 넓다는 우리말의 뜻만을 취하여 큰 대(大)자로 바꾼 것이다. 韓民族 뿌리思想의 보고인 高麗時代의 팔관잡기(八觀雜記)에 佛像을 大雄殿에 모신 것이 비록 古俗을 따른 것이지만 본래 僧家의 말이 아니다(高麗八觀雜記 … 佛像始入也建寺稱大雄殿此僧徒之襲古仍稱而本非僧家言也 神市本紀) 라고 기록되어있다. 한웅(桓雄)을 大雄天이라 한다(桓雄稱大雄天 三神五帝本紀).

대개 한 종교가 이민족에게 전파를 시도할 때에는 원주민들의 정서와 접목시켜 거부감을 없애려하는 것이다. 이 점은 불교 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기독교들도 그들의 신칭(神稱)인 GOD 대신에 우리민족 고유의 神稱인 ”��하나님”��을 택하여 쓰는 것과 같다. 기독교의 神稱인 GOD(神)이나 JEHOVAH(여호와)는 우리의 神稱인 하나님(또는 하느님)과는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番朝鮮王 箕準이 衛滿에게 上下 雲障을 봉토로 준 해는 모수리(慕漱離)가 北夫餘 2世�� 檀君으로 즉위한 기원전 195년��이다. 衛滿이 番朝鮮을 차지하자, 戊申 2년(B.C. 193), 平壤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 떼와 衛滿의 무리에 대비했다. 이듬해 檀帝의 동생 高辰으로 하여금 海城을 수비케 했지만, 西鴨綠江을 수비케 했다는 말은 없다. 癸丑 42년��(B.C. 128) 檀帝가 직접 衛滿(右渠)의 도둑 떼를 南閭城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을 뿐이다.

解慕漱의 아들이자 高辰의 형 慕漱離는 기원전 194년��에 즉위했다. 기원전 120년��은 4세 檀君 고우루(高于婁) 때로 解慕漱의 증손이다. 고추모(高鄒牟)의 부친 고불리지(高弗離支)는 高辰의 손자다. 기원전 120년��까지 高辰이 살았다고 보기도 사실상 어렵다. 高辰은 衛滿을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고, “右渠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는” 인물은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同名異人?).

신유(辛酉) 원년(B.C. 120)에 이르러 槀離國의 영토가 浿水(沱江)에서 西鴨綠江(岷江)까지 확장된 것이다. 馬韓이 있었을 때는 嘉陵江(九黎河)에서 沱江까지가 槀離國(가우리)의 땅이었다. 그래서 西安平을 옛 槀離國의 땅이라 한 것이다.

“己亥 38년��(B.C. 202), 燕나라의 盧綰이 다시금 遼東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浿水로써 경계를 삼았다(己亥三十八年燕盧綰復修遼東故塞東限浿水)”가 중국 역사책에 실리면 “漢나라가 일어나자 朝鮮 땅은 너무 멀어서 지킬 수 없다 하여 遼東에 요새를 쌓아 浿水까지를 경계로 삼았다(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史記).”로 바뀐다. 실제로는 莫朝鮮의 여러 성을 수리해 8년��간 岷江 유역에서 沱江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멀기는커녕 지척지간이다. 漢나라가 “朝鮮 땅이 너무 멀어서 지킬 수 없었다”면서 朝鮮 땅에 漢四郡을 설치했다는 것은 모순 아닌가. 이것만 봐도 漢四郡이 종이 위의 창작품임을 알 수 있다.

燕이 장성을 쌓고 漢이 요새까지 쌓았는데도 高句麗와 百濟는 岷江 이서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하긴 秦始王이 쌓았다는 萬里長城도 高句麗 영토 안에 있으니까. 종이 위에서 쌓은 상상의 長城이라서 그렇다. 楊廣(隋 煬王)은 상상 속에서 열흘에 60 만명을 죽이면서 百濟長城을 증축했던 것이다. 물론 明때 날조된 것이기는 하지만,,

史記의 저 기사는 盧綰 이전에 燕나라가 같은 땅을 점령했다는 것인데, 문맥상 “遼東에 요새를 쌓아 浿水까지를 경계로 삼은” 朝鮮 땅은 莫朝鮮이 아니라, 眞番朝鮮이 된다. 그러나 이 당시 眞番朝鮮은 없었다. 그러면 燕나라가 점령했던 땅은 어딜까.

庚辰 19년��(B.C. 221) … 燕나라는 장수 진개(秦開 : 原典에는 秦介로 표시되어 있는데 秦開의 오기로 보임)를 파견하여 우리나라 서쪽 변두리를 침략하더니,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국경을 삼게 되었다(庚辰十九年 … 燕遣將秦介侵我西鄙至滿番汗爲界 北夫餘紀) 만번한(滿番汗)이니까 번조선(番朝鮮) 지역에 있었다. 燕나라에 귀속된 滿番汗은 燕나라에 가까운, 番朝鮮 북부이다. 燕나라가 怒江 이남에 있었으니까, 滿番汗은 怒江 상류에 있던 지명이다. 그러니까 燕나라가 귀속시킨 땅과 漢나라가 일시 점령했던 땅은 다른 땅이다.

後漢書에는 예군(濊君) 남여(南閭) 등이 원삭(元朔 : 漢武王시의 연호) 원년(B.C. 128년)에 右渠王에게 반기를 들고 28 만구(당시의 인구수는 口로 표시)를 이끌고 요동군(遼東郡)에 내속 하였는데 漢武帝는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 이라했고, 수년후 폐지되었다(元朔元年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武帝以其地爲蒼海郡數年乃罷)고 했다1).

이때는 朝鮮, 漢 전쟁이 일어나기 20년�� 전이라 날조 漢四郡조차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遼東郡은 北夫餘의 영토였다. 당시 遼水는 岷江이었다. 濊君 南閭는 遼西(岷江 이서)에 있었던 것이다. 右渠를 배반한 것도 아니다. 右渠의 조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衛滿은 番朝鮮을 기만과 술수로 가로챘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衛滿이 점령한 땅을 떠나 우리나라로 찾아온 것이다. 濊君, 南閭 백성이 北夫餘를 찾아온 해인 癸丑 42년��(B.C. 128), 高奚斯 檀帝는 친히 보병과 기병 만 명을 이끌고 衛滿의 도둑 떼를 南閭城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癸丑四十二年帝躬率步騎一萬破衛賊於南閭城置吏 北夫餘紀).

癸亥 3년��(B.C. 118년) 右渠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해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해 海城 이북 50 리의 땅이 모조리 右渠에게 점령되자, 丙寅 6년��(B.C. 115) 檀帝(高于婁)가 몸소 정예군 5,000 을 이끌고 海城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薩水에 이르니 九黎河(嘉凌江)의 동쪽은 모두 항복해 왔다(癸亥三年右渠賊

秦始王陵(?)에서 발굴된 병마용(兵馬俑)

大擧入寇我軍大敗海城以北五十里之地盡爲虜有 … 丙寅六年帝親率精銳五千襲破海城追至薩水九黎河以東悉降 北夫餘記). 이 당시 西鴨綠江(岷江)은 회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목책(木柵)을 좌원(坐原)에 설치하고, 군대를 岷江 이서의 南閭에 배치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한 丁卯 7년��(B.C. 114)에서야(丁卯七年設木柵於坐原置軍於閭以備不虞 北夫餘紀) 西鴨綠江을 탈환했다.

癸酉 元年(北夫餘 檀帝 高豆莫 元年, 檀君 高于婁 13년�� : B.C. 108) 漢나라의 劉徹(漢 武王)이 右渠가 차지한 평나(平那)를 노략질하자, 高豆莫(北夫餘 5世�� 檀君)이 앞장서서 劉徹을 물리쳤다. 내버려 두면 衛滿朝鮮에 이어 우리나라도 침범할 것이기 때문이다(癸酉十三年漢劉徹寇平那滅右渠仍欲置四郡盛以兵四侵於是高豆莫汗倡義起兵所至連破漢寇遺民四應以助戰軍報大振 北夫餘紀). 더구나 高豆莫의 영토 옛 槀離國이 衛滿朝鮮과 접하고 있었다.

朝鮮, 漢 전쟁을 지휘해 승리로 이끈 高豆莫은 樂浪(崔)과 협(陿), 참(參), 음(霒)장군에게 右渠가 살해된 番朝鮮 땅을 나눠주었다. 槀離國의 제후가 제 마음대로 상국 北夫餘의 땅을 나눠줄 수는 없다. 高豆莫은 朝鮮, 漢 전쟁 직전에 卒本에서 檀帝로 즉위하고 帝號를 東明, 국호를 卒本夫餘라 했다. 그래서 北夫餘와 卒本夫餘가 병존했다.

대륙 조선의 입장으로 본 한반도의 지형에 대한 편견 바꿔서 보기

北夫餘와 구분 하고자 卒本夫餘라 했다. 天王郞 解慕漱가 大夫餘와 구분하기 위해 藏唐京 阿斯達(長安)보다 고위도에 있는 白岳山 阿斯達(洛陽)에서 즉위하고 北夫餘라 한 것처럼.

癸酉 원년(B.C. 108), 이 해는 檀君 고우루(高于婁) 13년��이다. 帝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찍이 북부여(北夫餘)가 쇠약해지고 漢의 도둑들이 강성함을 보고 분개하여세상을 구할 뜻을세워 졸본(卒本)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東明이라 하였는데 혹은 고열가(高列加)의 후손 이라고도 한다(癸酉元年是爲檀君高于婁十三年帝爲人豪俊善用兵嘗見北夫餘衰漢寇熾盛慨然有濟世之志至是卽位於卒本自號東明或云高列加之後也 北夫餘紀 下)

사람됨이 호탕한 帝는 高于婁가 아니고, 고두막(高豆莫)이다. 北夫餘의 檀君 高于婁 13년��이 高豆莫 즉위 원년이다.

졸본2)이 어딘가. 高豆莫이 卒本에 도읍을 정하고 卒本夫餘라 했다. 卒本은 解慕漱의 옛 도읍이 아니다.

解慕漱는 白岳山 阿斯達 즉 현 은허(殷墟)에서 즉위했다. 槀離國의 땅이 西鴨綠水(岷江)에서 九黎河(嘉凌江)까지라서 高于婁는 長安에, 高豆莫은 殷墟에 있는 상황이 절대 벌어질 수 없다. 高豆莫이 殷墟에 도읍 했다면 드넓은 槀離國(가우리)을 포기해야만 한다. 高豆莫은 槀離國 땅을 기반으로 檀君을 자처했다. 도읍만 北夫餘 檀君 高于婁가 있는 皇城 이서에 정하면, 槀離國 땅을 보유할 수 있다. 高于婁 이전까지 白岳山 阿斯達(현 殷墟)에서 건국한 北夫餘가 천도했다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卒本은 長安(현 西安)이다.

北夫餘(卒本夫餘) 불세출의 영웅 高豆莫汗! 그가 집권했을 당시의 도읍은 長安이며 이곳에서 秦始王의 무덤이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夫餘가 殉葬制度를 시행했고 수많은 인원들이 王陵築造에 동원되었던 사실이 역사에 전한다. 百濟는 東明帝 高豆莫汗의 제사를 皇帝 등국시는 물론 수시로 성대하게 올렸다. 그러나 여산릉(驪山陵)의 축조 시기는 百濟時代로 알려지고 있다. 과연 지금의 秦始王陵은 누구의 무덤인가?

“乙未年(B.C. 86) 漢나라 소왕(昭王)때 夫餘의 故都를 진격하여 점령하고 나라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니 이것이 新羅의 옛땅이다(乙未漢昭時進據夫餘故都稱國東明是乃新羅故壤也 三聖紀全 上篇).”�� 東明은 國號가 아니고, 帝號다.

夫餘의 옛 도읍은 漢四郡을 설치했다고 날조한 番韓(後日의 衛滿朝鮮)의 도읍도 아니고, 北夫餘의 도읍도 아닌, 辰韓 즉 大夫餘의 도읍이다. 그래서 北夫餘 시대임에도 夫餘의 옛 도읍이라 한 것이다.

“丙辰年(B.C. 425)에 상장(上將) 구물(丘勿)이 마침내 사냥꾼의 마을(獵戶) 두목 우화충(宇和沖)을 죽여 버리고 도성을 藏唐京으로 옮겼다(丙辰上將丘勿遂斬獵戶頭目宇和沖移都藏唐京 三韓管境本紀 馬韓世家).”�� 乙卯 36년��(B.C. 426)에 43世�� 檀君 물리(勿理)가 붕어하셨기 때문에 이듬해 3월 16일 上將 丘勿은 44世�� 檀君으로 藏唐京에서 즉위했다(丘勿爲諸將所推乃於三月十六日築壇祭天遂卽位于藏唐京 檀君世紀). 도읍이 藏唐京이니까, 藏唐京에서 즉위했다. 그리고 국호를 大夫餘로 고쳤다(改國號爲大夫餘).

高豆莫汗이 차지한 夫餘의 옛 도읍은 藏唐京 즉 長安 이었던 것이다. 長安이 卒本 이었던 것이다. 長安은 藏唐京 阿斯達에서 卒本(忽本 : 홀본, 골본으로 발음되며 忽은 고을을 뜻하는 音借이다), 長安城(平壤城)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大震國 때는 忽汗이 되고, 高麗 시대에는 西京으로 바뀐다. 卒本川은 오늘날의 渭水다. “高朱蒙은 어머니 柳花夫人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엄리대수(淹利大水)를 건너 卒本川에 이르렀다.”는 거짓이다. 동남쪽으로 가면 伽倻에 이른다. 高朱蒙은 서북쪽으로 도망쳐 卒本에 이르렀던 것이다. 물론 “이듬해 새 나라를세우니, 高句麗의 시조가 되었다(高朱蒙奉母柳花夫人命東南走渡淹利大水到卒本川明年開新國是爲高句麗始祖也 迦葉原夫餘紀).”도 거짓이다. 高鄒牟는 고무서(高無胥 )에게서 北夫餘를 물려 받았다(冬十月帝崩高朱蒙以遺命入承大統 北夫餘紀 上).

洛陽은 눌현(訥見)이다. 국내위나암(國內尉那巖)은 산수가 매우 험하다는 이유로 천도했다. 國內尉那巖城은 낯선 땅으로 역대 왕조 배달, 朝鮮, 北夫餘의 기존 皇城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洛陽은 白岳山 阿斯達(은허)이 있던 땅과 인접해 있다. 결국 高句麗는 卒本(長安), 訥見(洛陽), 國內城, 海城(平壤城, 長安 서남쪽), 平壤城(長安)

으로 遷都했던 것이다. 북위 33°~ 35° 사이에 있다. 平壤은 여러곳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평평한 땅이라는 의미의 보통명사로 보인다.

중국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黃山의 운무(安徽省을 관통하는 長江은 黃山江으로도 불렸다)

乙未 22년��(B.C. 86) 解夫婁1)가 항복하자 東夫餘侯로 삼고 高豆莫은 卒本夫餘에서 北夫餘로 개칭했다. 그러므로 朱蒙이 北夫餘로부터 난을 피하여 卒本夫餘에 이르렀다는 三國史記는 날조기사다. 朱蒙은 東夫餘로부터 난을 피하여 과거에 잠시 卒本夫餘라 불렀던 北夫餘에 이르렀다. 사실과 진실을 뒤죽박죽 섞어 날조기사를 만든 것은 절대 우리나라 역사를 알아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大夫餘의 옛 도읍 長安(卒本 ; 藏唐京 阿斯達)은 新羅의 옛 땅이 아니라, 高句麗의 옛 땅이다. 新羅가 長安을 차지한 것은 高句麗 멸망 668년��부터 大震國(大震國은 668년�� 後高句麗로 건국했다)이 平壤城을 차지한 699년�� 까지다. 669년�� 太祖(高王) 대조영(大祚榮)이 忽汗城을 쌓아 도읍을 옮겼는데, 長安城 이라고도 불렀다.

解夫婁가 옮겨가서세운 東夫餘는 어딘가. “통하(通河)의 물가 가섭원(迦葉原)에 땅이 기름지고 오곡을 키우기에 마땅하오니 도읍할 만한 곳입니다(通河之濱迦葉之原有地上壤膏腴宜五穀可都 北夫餘紀 上).”�� 北夫餘 남쪽에 있었다면 南夫餘라 해야 한다. 黃山江(揚子江) 유역은 新羅와 伽倻가, 그 아래에는 왜(倭)가 있었다. 東夫餘가 倭의 침입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으니까, 揚子江 이북에 있었다. 東夫餘와 倭 사이에 新羅와 伽倻가 있었기 때문에 倭가 東夫餘를 침입할 수 없었다. 漢水(黃河) 유역에는 百濟가 있었으니까, 자연히 東夫餘가 있던 迦葉原은 淮水 유역으로 좁아진다. 더불어 通河는 淮水다. 帶水는 通河에서 바뀐 이름이다.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夫餘라는 이름을 살펴보고 가자. 6 夫餘가 있었다. 1世�� 檀君王儉의 아들 扶餘를 封한 제후국 扶餘가 있었다. 丙辰 원년(B.C. 425), 44世�� 檀君 丘勿이 즉위 하면서 朝鮮을 大夫餘로 개칭했다. 大夫餘의 수도가 藏唐京 阿斯達이라서 夫餘의 시조인 解慕漱가 白岳山 阿斯達에서 즉위했는데, 白岳山 阿斯達이 藏唐京 阿斯達보다 북쪽에 위치해서 北夫餘라고 했다. 洛陽(은허)이 長安보다 약간 고위도에 위치한다. 藏唐京 阿斯達은 長安이고 解慕漱가 즉위한 白岳山 阿斯達은 洛陽이었던 것이다.

卒本夫餘는 槀離國의 제후 高豆莫汗이 檀君을 자처 하면서 高于婁가 檀君으로 있는 北夫餘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국호다. 도읍이 卒本이라 卒本夫餘라 했다. 高于婁를 계승한 解夫婁가 北夫餘의 檀帝 位를 내놓고 迦葉原으로 가 東夫餘를세우자 高豆莫은 卒本夫餘에서 北夫餘로 개칭했다(北夫餘의 大統을 이었다).

迦葉原夫餘는 北夫餘 皇城의 동쪽에 위치해서 東夫餘라고 했다. 百濟는 538년��(聖帝 16년)에 泗沘(현 北京)로 천도 하면서 南夫餘라고 국호를 바꿨다. 南夫餘는 상실한 黃山江(揚子江) 이남 땅을 되찾겠다는 의지에서 붙인 이름이다.

夫餘라는 한자어는 별 뜻이 아닌데, 우리나라는 夫餘라는 국호를 여섯 번이나 사용할 정도로 夫餘에 집착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1世�� 扶餘侯는 남이(南夷)의 환난을 진정 시키고, 열수(洌水 : 揚子江)의 남쪽을 天王의 교화에 복종토록 했으며, 설유(稧兪)의 난도 평정했다. 한 마디로 군사적 재능이 탁월했던 인물이다. 大夫餘에서 南夫餘까지 줄줄이 夫餘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은 강대국을 염원했기 때문이다. 慈烏支 한웅은 티벳고원 일부를 정복 하면서 軒轅과 10년�� 동안 73 번이나 싸워야 했다. 그에 반해 扶餘는 단번에 揚子江 이남도 정복하고 稧兪도 평정했다. 요컨대 군사적 재능면 에서는 扶餘가 慈烏支 한웅보다 한수 위였던 것이다.

“옛 夫餘의 풍속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王에게 돌려, 갈자느니 혹은 죽이자느니 하였다고 한다(舊夫餘俗 水旱不調 五穀不熟 輒歸咎於王 或言當易 或言當殺).”는 三國志의 기사는 어떤 夫餘의 풍속도 아니다. 1世�� 檀君王儉의 아들 扶餘를 봉한 제후국의 주민들이 농사가 안된다고 제후를 바꾸고 죽일 수 있는가.

東夫餘는 기원전 86년��에 건국한 나라로 옛 夫餘라고 할 수도 없다. 더구나 東夫餘 땅은 오곡이 잘 되고 짐승이 많아서 사냥하기에 편했다. 얼마나 풍족하게 살았던지, 백성들이 왕에게 감사의 노래까지 지어 바쳤을 정도다(正春之謠). 동아시아의 지배자인 大夫餘나 北夫餘, 卒本夫餘의 檀君을 바꾸거나 죽이자고 할 수는 없는 일. 南夫餘 즉 百濟의 황제는 그 권한이 막강하여 7 백년 동안 시도 때도 없이 백성을 高句麗와의 전쟁에 동원했다. 요컨대 제임스 프레이저(James George Frazer)가 황금가지(The Golden Bough)에서 인용했다는 “옛 夫餘의 풍속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갈자느니 혹은 죽이자느니 하였다고 한다.”는 三國志魏志東夷傳의 기사는 中土의 풍속 이었던 것이다.

中土(西土)는 연간 강수량이 450 mm 밖에 안되는 건조기후대로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다. 지금도 유목이나 하고 산다. 자연상태에서 농경이 가능 하려면, 연간 강수량이 600 mm 이상 되어야 한다고 한다. 옛날에는 降水量이 오늘날 보다 많았을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많아봐야 농경 한계선 전후다. 곡식이 잘 될 리 없는 땅에 농사를 지었으니, 오곡의 결실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명과 직결되는 중대사였던 것이다.

高豆莫은 朝鮮 47世�� 檀君 高烈加의 후손이자, 解慕漱(高慕漱)의 후손이다. 그래서 高豆莫은 檀君을 자처했던 것이고, 樂浪과세 장군의 군대가 高豆莫 휘하에서 漢나라에 맞서 싸운 것이다.

乙亥 3년��(B.C. 106) 임금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000 명이 모여 漢의 도둑들이 그대로 무너지니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를 건너 요동(遼東)의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곧 옛날 고리국(槀離國)의 땅이다(乙亥三年帝自將傳檄所至無敵不旬月衆至五千每與戰漢寇望風而潰遂引兵渡九黎河追至遼東西安平乃古槀離國之地 北夫餘紀 下)

이때 까지도 九黎河는 있었다. 西安平을 옛 槀離國의 땅이라 표현한 것은 槀離國 제후 高豆莫이 卒本夫餘 檀君으로 즉위 하면서 槀離國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槀離國은 卒本夫餘의 영토가 된 것이다.

朝鮮, 漢 전쟁 이후 乙亥 3년��(B.C. 106)에 또 다시 漢寇가 쳐들어왔다는 기사다. 乙亥 3년��은 高于婁 16년��으로 高豆莫 在位 3년��이다. 高豆莫이 직접 전투를 지휘 했지만, 이 당시는 西安平 까지만 탈환한 탓에 岷江 이서의 주민들이 유민이 되어 西安平으로 건너왔다. “甲午 22년��(B.C. 87) 檀君 高于婁 34년��이다. 檀帝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裵川)의 漢나라 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漢나라 도둑(漢寇) 떼를 연파 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 잡았으며 적을 막으며 대비 하였다(甲午二十二年是爲檀君高于婁三十四年帝遣將破裵川之漢寇與遺民幷力所向連破漢寇擒其守將拒以有備 北夫餘紀 下).” 즉위 23년�� 째라서 高豆莫도 나이가 들어, 직접 나서지 않고 장수를 보냈던 것이다.

壬戌 원년(B.C. 59), 漢나라 도둑들이 遼水의 왼쪽에서 널리 소란을 피웠으나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壬戌元年 … ��漢寇騷亂遍于遼左屢戰得捷 北夫餘紀 下). 기원전 59년��은 北夫餘의 마지막 해다. 高句麗 때에는 西鴨綠江을 옮길 명분이 없다. 이미 後漢도 高句麗의 속국이고, 遼西는 樂浪에 이어 高句麗와 百濟가 지배했다. 高句麗나 百濟가 西鴨綠江을 밀어 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中奴의 강 遼水는 더욱 더 밀어내지 않는다. 西鴨綠江과 遼水가 嘉凌江으로 밀려날 기회는 北夫餘 시대밖에 없다. 西鴨綠江 주민들이 유민이 되어 西安平으로 건너왔을 때 자신들이 살던 곳에 있던 유명한 강 이름을 따서 九黎河를 西鴨綠江이라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자 漢寇도 새로운 西鴨綠江을 遼水라 불렀다. 高句麗 때는 언제나 西安平이 遼西에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遼東에 있었다고 할까. 桑乾河 이동의 조그만 평야를 차지하는데, 엄청 힘들었다고 날조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중국 대륙 침공을 실천에 옮길 수 없으니까.

“연타발(延佗渤)은 卒本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曷思)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를 이루어(致富)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朱蒙을 도와 창업입도(創業立都)의 공을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九黎河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여 이익을 얻었는데 高朱蒙聖帝가 北沃沮를 칠 때에 곡식 5,000 석을 바쳤다(延佗渤卒本人往於南北曷思而理財致富累至巨萬陰助朱蒙其創基立都之功居多後率衆轉徙九黎河而賈漁鹽之利及高朱蒙聖帝伐北沃沮納穀五千石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高鄒牟는 高無胥에게서 北夫餘를 물려 받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創業立都의 공을세울 수가 없다. 날조 역사를 보고 베낀 대목이다. 高朱蒙의 부친 高弗離支가 沃沮侯였기 때문에, 北沃沮가 있었다면 高弗離支가 죽고 나서 생긴 나라라는 말이 된다.

“海州에 南海軍 節道使를 두었는데, 이곳은 본래 沃沮國의 땅이었다. 高句麗는 사비성(沙卑城)을 두었는데, 일찍이 唐나라 장수 李世勣이 공략한 곳이다. 渤海는 南京 南海府라 불렀다(海州南海軍節度本沃沮國地高麗爲沙卑城唐李世徠嘗攻焉渤海號南京南海府 遼史地理志).”�� 唐이 아니라 新羅 수군이 浿水 중류의 沙卑城을 공략했다. 沙卑城 일대에 沃沮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太白逸史에는 “大震國의 南京인 南海府는 본래 南沃沮의 옛 땅이다(大震國南京南海府本南沃沮古國).“고 했다. 결국 沃沮를 南沃沮라 날조했던 것이다.

“東沃沮는 高句麗의 蓋馬太山의 동쪽에 있다. 東으로 큰 바다를 접해 있고 北으로 읍루(浥婁 : 邑婁 : 挹婁)와 더불어 접해 있다 하고는 그 주석에 平壤城의 서쪽에 있다 하였다(東沃沮在高句麗蓋馬太山之東 東濱大海 北與浥婁接 註云在平壤城西 揆園史話).”�� 蓋馬太山이 오늘날의 秦嶺山脈이라 했다. 秦嶺山脈 바로 옆이 큰 바다 즉 浿水(漢水)다. 그 사이에 나라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東沃沮의 실체 역시 沃沮였던 것이다. 沃沮의 북으로 高句麗가 있었다. 平壤城의 남쪽에 沃沮가 있었다. 沃沮가 있을 당시는 卒本이라 불렀다.

결국 北沃沮, 南沃沮, 東沃沮 하는 나라는 없었던 것이다. 그냥 沃沮다. 高句麗가 中土를 침공한 기사를 배당할 나라를 찾다 보니까, 沃沮를 쪼갰던 것이다. 薩水 이남, 浿水 이서, 嘉凌江 以東, 黃山江(揚子江) 이북에 있던 나라는 沃沮다.

그런데 西沃沮는 있었다. 12世�� 檀君 阿漢은 乙卯 29년�� 西沃沮의 褥薩 고사침(高士琛)을 왕(汗)으로 封했다(乙卯二十九年命 … ��西沃沮褥薩高士琛 … ��爲汗 檀君世紀). 薩水 이남을 둘로 나누지 않았을까. 하지만 高弗離支(高鄒牟의 父) 때에는 沃沮가 하나였다. 그래서 高弗離支를 西沃沮侯, 東沃沮侯 하지 않고 ‘沃沮侯’라 했다.

北夫餘 시대에 西鴨綠江이 嘉陵江으로 옮겨 왔으므로 高句麗 때는 九黎河가 거강(渠江 ; 취강)쯤 되었을 것이다. 延佗渤이 九黎河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했다는 것은 九黎河에서 생선을 잡고 소금을 만들었다는 소리다. 생선이야 담수어(淡水魚)도 있다지만, 소금은 염수(鹽水)에서 만든다. 그렇다면 渠江이 鹽水란 말인가. 揚子江도 淡水다. 1996년��에 우리나라 南海 표층의 低鹽化現狀이 출현한 원인이 揚子江 유역에서 평년보다 훨씬 많은 강수량에 의해 막대한 양의 淡水가 유출 되었기 때문 이라고 한다. 九黎河가 동북아의 강이라고 날조하자, 延佗渤은 종이 위의 바닷가에서 소금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순수창작이 아닌 날조기사 이므로 朱蒙聖帝가 어떤 나라를 정복할 때, 延佗渤이 곡식 5,000 石을 바친 것은 사실일 것이다. 朱蒙聖帝는 동아시아를 정복한 인물이다. 高句麗가 소국으로 출발한 나라라고 날조하면, 高句麗의 전쟁을 중국이 가지면 된다. 그런데 엉뚱하게 沃沮를 분리해서 北沃沮, 南沃沮라는 가상의 나라를 내세운 것은 朱蒙聖帝가 中土를 정복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다.

薩水는 어느 강인가. 太白逸史에, ”��이 때 을지문덕(乙支文德)이 능히 기이한 계략으로 군사를 일으켜 이를 공격하고 뒤쫓아 薩水에 이르러 대파했다. 隋나라 군사는 수륙 양군이 모두 무너져 살아서 遼東城(지금의 昌黎)까지 돌아간 자는 겨우 2700 명 이었다(文德能以奇計出兵鈔擊之追至薩水遂大破之隋軍水陸俱潰生歸遼東城今昌黎者僅二千七百人 高句麗國本紀)”고 했다. 薩水를 건너야 遼東이 나오는 것이다. 또 “庚寅년에 장정 30 인을 파견하여 선박을 薩水에서 건조케 하였다. 곧 辰韓의 남해안이다(庚寅遣民丁三十人造船舶于薩水乃辰韓南海岸也 三韓管境本紀).”��고 한 것으로 보아, 薩水는 東西로 흐르는 강이다.

長安 이남, 嘉陵江 以東에서 동서로 흐르는 강은 단강(丹江 : 단장강) 밖에 없다. 따라서 漢水(浿水)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지류 丹江이 薩水다. 薩水는 강폭이 2 km쯤 된다. 이 당시에는 웬만한 강을 바다라 표현했다. 중국 대륙의 강은 韓半島의 강보다 크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南海岸이라 표현한 것이다.

현재 북한에 있는 덕흥리 고분 전실 벽화.왼쪽에 묘지 주인공이 꽃무늬로 장식된 화려한 방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다.위에는 주인공의 신상을 기록해 놓았는데, 이에 따르면 그는 이름이 진(鎭)이고, 遼東太守와 幽州刺使 등을 지냈으며 77세에 죽었다.

薩水(丹江)는 辰韓의 남해안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만일 辰韓이 揚子江까지 이르렀다면, 丹江은 辰韓의 남해안이 될 수는 없다. 揚子江이 남해안이 되었을 것이다. 薩水 이남에는 제후국들이 있었다는 의미다.

薩水에서 섬멸된 “楊廣은 사신을 보내 화해를 구걸했으나 文德은 듣지 않고 임금(嬰陽帝)도 또한 이를 추격케 하였다. 文德은 제장과 더불어 승승장구하여 똑바로 몰아붙여 한쪽은 현토(玄菟) 길로부터 태원(太原)까지 추격하고, 한쪽은 樂浪 길로부터 유주(幽州)에 이르렀다(楊廣使乞和文德不聽帝亦嚴命追之文德與諸將乘勝直驅一自玄菟道至太原一自樂浪道至幽州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고 했다.

遼東城 이후의 기술이니까, 遼西에서 벌어진 상황이다. 玄菟와 樂浪은 岷江 以西의 番朝鮮을 차지한 衛滿朝鮮을 高豆莫이 분할해 參將軍과 樂浪王에게 封土로 준 땅이다. 高句麗가 岷江 이서를 차지한 후 樂浪王과세 장군에게 준 땅을 그대로 玄菟道, 樂浪道, 臨屯道, 眞番道라 하여 행정구역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幽州와 太原도 岷江 이서에 있었다.

甲戌 67년��(B.C. 2267) 檀君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공(虞司空)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로 하여금 오행치수의 방법(五行治水法)을 전하게 하였으며 나라의 경계를 정하게 하였는데,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의 두 곳 땅이 우리에게 속하게 하였다(甲戌六十七年帝遣太子扶婁與虞司空會于塗山太子傳五行治水之法勘定國界幽營二州屬我 檀君世紀)

幽州와 營州는 티벳고원 북부에 가까운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太原은 岷江 이서에서 黃河 이북까지 밀려났다. 幽州가 韓半島 중부라고? 德興里 고분의 피매장자는 덕흥리에 살았던 사람이지, 德興里를 다스리던 사람이 아니다.

海城의 위치를 찾아보자. 海城은 藏唐京이 아니다. 檀君世紀에도 “丘勿(44世�� 檀君)은 여러 장수들의 추앙을 받아, 마침내 3월 16일에 壇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藏唐京에서 즉위하였다. ��… ��7월��에는 海城을 개축하도록 하여 平壤이라 부르도록 하시고, 離宮을 짓도록 하였다(丘勿爲諸將所推乃於三月十六日築壇祭天遂卽位于藏唐京.....七月命改築海城爲平壤作離宮)”고 했다. 北夫餘紀에 “丙寅 6년�� 檀帝께서 몸소 정예군 5000을 이끌고 습격하여 海城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薩水에 이르렀다(丙寅六年帝親率精銳五千襲破海城追至薩水)”라고 했으므로 海城은 薩水 즉 丹江 이북에 있었다.

“癸亥 3년�� 右渠賊이 크게 쳐들어 왔다. 우리의 군사가 크게 패하여 海城 이북 50 리 땅이 모두 노략질 당하여 그들의 소유가 되었다(癸亥三年右渠賊大擧入寇我軍大敗海城以北五十里之地盡爲虜有 北夫餘紀).”��

藏唐京은 우리나라 제1의 도읍 이므로 만일 藏唐京을 빼앗겼다면, 藏唐京 이북 몇 里라 했을 것이다. 따라서 海城은 藏唐京 이남 50 리 이상 아래에 위치 했음을 알 수 있다.

“大武神烈帝 20년��, 皇帝는 樂浪國을 습격하여 멸망 시켰으니, 東鴨綠 이남이 우리에 속했는데 유독 海城의 남쪽, 바다 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함락되지 않았다(大武神烈帝二十年帝襲樂浪國滅之東鴨綠以南屬我獨海城以南近海諸城未下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海城의 남쪽이 바다 근처라고 했다. “大震國의 南京인 南海府는 본래 南沃沮의 옛 땅이니, 지금의 海城縣이 그곳이다(大震國南京南海府本南沃沮古國今海城縣是也 太白逸史 大震國本紀).”�� 南海府가 海城縣이라고 했다. 海城은 秦嶺山脈 이남에 있었던 것이다. 海城은 長壽弘濟好太烈帝가 新羅 매금(寐錦 : 新羅王의 칭호), 百濟 어하라(於瑕羅 : 百濟王의 칭호)를 만나 納貢과 수비 군사의 수를 정했던 ‘남쪽 平壤’이다.

長安 역시 平壤이다. 長安城은 長壽弘濟好太烈帝가 천도한 平壤城이고, 海城은 東川帝가 천도한 平壤城이다.

유리명제(琉璃明帝) 19년�� 또 눌현(訥見)으로부터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겼으니 또한 황성(皇城) 이라고도 한다. 성안에 환도산(丸都山)이 있는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산해경에 나타나는 치우의 형상

무슨 일이 있으면 이곳에서 거처했다(琉璃明帝十九年又自訥見移都于國內城亦曰皇城內有丸都山山上築城有事則居之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山上帝는 丸都城으로 천도하지 않았다. 高句麗는 宮・山城 이원체계를 갖추어 황제가 평소에는 宮에서 거주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수비가 양호한 山城으로 옮겨갔다. 山上帝 역시 전쟁이 발발하자, 國內城 내의 丸都城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3) 축소된 회대, 해대.
그러나 중토는 급팽창했다

우리민족은 하늘의 자손(天孫民族)으로 하늘의 들판(天坪)에서 살았다. 우리나라는 하늘나라(桓國)로 하늘의 통치자(天王, 天皇)가 다스렸고, 하늘의 뜻을 받들어 군대(天兵)를 일으켰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은 신농씨(神農氏)가 쇠약해짐을 보고 마침내 뜻을 크게 품고 서쪽에서 여러 번 천병(天兵)을 일으켜 진격하여 회대(淮垈) 사이를 차지하였다(蚩尤天王見神農之衰遂抱雄圖屢起天兵於西進據淮岱之間)

三聖紀全 下篇 및 三韓秘記를 인용한 太白逸史 神市本紀의 기사다. 그런데 三韓秘記는 中國을 대국으로 상정한 책으로 李氏朝鮮에 들어와 쓴 책이다. 그러므로 慈烏支 한웅이 겨우 中土를 정복 하면서도 뜻을 크게 품어야 했던 것이다.

神農氏는 배달의 제후다. 그러니까 중국 대륙 전체를 지배한 인물이 절대 아니다. 배달나라 10世�� 갈고(葛古) 한웅 때도 神農과 공상(空桑)을 기준으로 영토 경계를 정했다. 葛古 한웅은 기원전 3071년��에 즉위했고, 慈烏支 한웅은 

기원전 2707년��에 즉위했다. 慈烏支 한웅 때는 少典의 아들인 神農의 후손 神農氏가 中土를 다스리고 있었다.

(神農 이전에) 伏羲는 서쪽 변방(西鄙)에 봉토를 받더니 직에 있으면서 정성을 다 하였다(伏羲旣受封於西鄙位職盡誠 太白逸史 神市本紀)

神農과 軒轅, 유망(楡罔), 高辛 등이 난립한 中土는 중국 대륙 서쪽의 변방(西鄙)에 있었던 것이다.

치우(蚩尤)는 청구(靑邱)에 우뚝 서 만고에 무성(武聲)을 떨치므로, 회대(淮垈)의 모든 왕이 거기에 쏠리니 천하에 능히 칠자가 없도다(蚩尤起靑邱萬古振武聲淮岱皆歸王天下莫能侵 檀君世紀)

靑邱는 본래 배달 開天 당시부터 중국 대륙에 있던 우리나라 땅이고, 淮垈 지방은 慈烏支 한웅이 획득한 땅이다. 慈烏支 한웅은 동북아의 神市에서 중국 대륙의 靑邱로 중심지를 옮겨, 제후국 정복에 착수했다. 封土를 재정복한 이유는 제후들이 독립적인 지배자 행세를 하는 걸 막기 위해서다.

회대(淮垈)에 집을 짓자, 헌원(軒轅)의 족속이 모두 다 신하 되기를 원하며 공물(貢物)을 바쳤다(宅於淮岱軒轅之屬皆稱臣入貢 太白逸史 神市本紀)

淮垈는 西土를 장악하는 전략지역인 동시에 西土 안에 위치했던 것이다. 또한 淮垈는 東土(배달나라)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慈烏支 한웅은) 정예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은 예탁(芮涿)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淮垈)의 땅을 빼앗아 성읍을 삼고, 헌원(軒轅)의 동쪽 침략의 길을 지키게 하였다(分遣精銳西守芮涿之地東取淮岱爲城邑而當軒轅東侵之路 太白逸史 神市本紀)

회대는 원래 淮岱가 아니라 淮垈였다. 淮垈는 淮水에서 泰山 사이 땅이 아니다. 岱山도 泰山의 별칭이 아니다. 어떻게 강 하나, 산 하나로 지명을 붙일 수 있는가. 강과 산 사이의 땅은 삼각형 지형인가. 아니면 강과 산 사이의 최단거리 혹은 최장거리를 폭으로 해서 강 전체로 확대시킨 것인가. 그러면 강줄기가 굽이칠 때마다 淮水의 반대편 끝도 산과 들을 가로지르며 굴곡이 생기나? 역사를 날조 하려고 꾸며낸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왜(倭)는 연(燕)에 속한다(蓋國在鉅燕南倭北倭屬燕)는 山海經의 구절은 淮岱가 아니라, 淮垈라는 강력한 증거다. 燕이 怒江 상류 이남에 있었기 때문에 明의 날조사 속에서 揚子江 이남으로 왔고, 중국 남부의 倭와 접했던 것이다.

인터넷에서 보니까, 淮垈라 쓰고 揚子江 하류와 黃河 하류 사이라고 설명한 사이트가 있었다. 淮垈가 淮水에서 泰山 사이거나 揚子江 하류와 黃河 하류 사이라면, 慈烏支 한웅이 애써 정복할 가치가 없다. 慈烏支 한웅은 淮垈가 西土로 부터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라서 정복했던 것이다.

淮垈는 淮水의 터, 다시 말해 淮水가 들어앉은 자리라는 뜻이다. 淮垈는 회수(淮水) 유역에서 발전한 개념으로 揚子江과 黃河 사이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과거 티벳고원에 있던 지명은 중국 대륙 전체로 확대 되었다. 역사날조를 위한 지명 밀어내기는 거리와 방위 등을 참고해서 한다. 티벳고원에는 큰 강이 5개, 중국 대륙도 큰 강이 5개 이상이다.

티벳고원(중토)의 지도

 

① 신산(神山) : 6714 m
��Mt.Kailash 수미산(須彌山)

② 안나푸르나(Annapurna) : 8091 m

③ 마나슬루(Manaslu) : 8163 m

④ 시샤팡마(Shisha Pangma) : 8012 m

⑤ 초 오유(Cho Oyu) : 8201 m

⑥ 에베레스트 (초모랑마 :
��Qomolangma) : 8848 m

⑦ 로체(Lhotse) : 8516 m

⑧ 마칼루(Makalu) : 8463 m

⑨ 칸첸중가(Kanchengzungar) : 8586 m

 

 

금사강(金沙江: 진사강) 양자강(長江)의 상류

란창강(瀾滄江 :란창강) 메콩강의 상류

노강(怒江 : 누장강) 살윈(Salween)강의 상류

브라마푸트라강(雅魯藏布江 : 야루장뿌강) ����-하류(방글라데시)에서 갠지즈(Ganges) ���� 강과 만나 벵골(Bengal)만으로 빠진다

 

 

티벳고원에 있던 지명은 중국 대륙 전체로 확대 되었다. 역사날조를 위한 지명 밀어내기는 거리와 방위 등을 참고해서 한다. 티벳고원에는 큰 강이 5개, 중국 대륙도 큰 강이 5개 이상이다.

도시명

1. 게르체(改則)

2. 초첸(措勤)

3. 동파(仲巴)

4. 사가(薩?)

5. 갼체(江孜)

6. 라오그(然烏)

7. 자율(察隅)

호수

① 청해호(靑海湖) : 염호,
��중국에서 제일 큰 호수다.

② 남쵸(納木錯)호수

③ 얌드록 쵸(羊卓雍錯)호수

귀호(鬼湖): 락샤스 탈(Rakshas Tal)호수

성호(聖湖): 마나사로바(Manasarova)호수

티벳고원에 있는 아노장포강(雅魯藏布江 : 야루짱뿌강), 怒江(누장강 : 살윈강이라고도 하며 중국과 미얀마를 흐른다), 난창강(瀾滄江 : 란창강), 금사강(金沙江 : 진사강), 민강(岷江 : 민장강)을 중국 대륙으로 확대시켜 현 黃河와 揚子江의 위치와 비교해보라. 주강(珠江 : 주장강), 長江, 淮水, 黃河, 그리고 동북아의 遼水. 明初까지 중국의 黃河는 金沙江이고, 長江은 怒江 이었던 것이다. 자연히 淮水는 瀾滄江이 된다.

현 黃河는 黃土高原에서 유입된 진흙으로 강물이 누렇다. 金沙江도 그 옛날 강물이 누랬다. 금사강(金沙江)이라는 말 자체가 中土가 원시, 미개 땅이라는 증거다. 金沙江 상류에서 沙金을 채취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朱元璋이 티벳고원 북부에서 빠져 나오면서 黃河 대신 붙인 이름이다. 그 당시에도 사금이나 채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보면 사금을 채취할 때, 강물에 흙을 다 씻는다. 떼거지로 몰려와 사금채취 한다고 상상해보라. 온통 흙탕물이 될 것은 뻔한 일. 요컨대 黃河나, 金沙江이나 다 沙金을 채취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다만 黃河는 黃土高原으로 부터 끊임없이 黃土가 유입되고 黃沙바람의 원인을 제공해 준다.

黑水女眞(生女眞; 東女眞)도 黑水에서 沙金을 채취해 高麗에 조공품으로 진상한 미개 종족이다(高麗史). 무수히 많은 족속들이 고려에 사금을 진상하는 기사들이 발견된다. 우리나라의 피지배 종족들은 주로 사금을 채취해 우리나라에 진상했던가 보다. 그런 미개종족을 가련히 여겨 우리나라에서는 후히 하사품을 내려주었다(高麗史).

江南. 옛 長江(怒江)은 남북으로 흐르는 강이다. 상류에서 휘어져 東西로 흐른다. 결국 옛 長江은 상류 끄트머리만 江南이었던 것이다.

江湖. 중국 영화, 중국 소설에 나오는 江湖는 원래는 怒江, 金沙江 유역이다. 怒江, 金沙江 상류 끄트머리에 보면 호수도 꽤 있다. 어떤 사람들이 江湖에 살았나. 요즘 중국 영화에서 보여주는 허풍떠는 무술인이 아니고, 사금 채취하던 미개인이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금사강(金沙江)이다. 明代에야 洞庭湖와 長江사이를 이르는 關中지대를 江湖라 이름하게 되었지만 굳이 江湖의 원류를 찾자면 西土에서 찾아야 한다.

굳이 瀾滄江과 산 하나 사이나 金沙江 하류와 怒江 하류를 통과하지 않더라도 軒轅은 얼마든지 동쪽으로 침입 가능했다. 淮垈는 강 전체였던 것이다. 長江(怒江)과 黃河(金沙江) 사이의 전체 땅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淮垈지, 淮岱가 아니다.

淮垈는 군사전략적 지역이었다. 淮垈 이동1)은 葛古 한웅 이후 우리나라 땅이었다. 淮垈(怒江과 金沙江 사이) 以西는 예탁(芮涿)이다. 淮垈 남부는 怒江이 동남아에 바짝 붙어 있으므로 국경까지 다 淮垈라고 불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芮涿은 淮垈 북부의 이서다. 바꾸어 말하면 怒江 상류 以西(혹은 이남. 怒江 상류는 동서라기 보다는 북서에서 남동 방향이다)다. 그래서 “蚩尤天王은 서쪽으로 芮涿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淮垈를 평정하셨다(蚩尤天王西征涿芮南平淮岱 番韓世家)”��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재정복한 이후로 海垈, 淮垈는 사실상 海垈, 淮垈의 북부만을 가리켰다. 즉 淮垈는 長江 상류와 黃河 상류 사이였던 것이다. “甲戌 67년��(B.C. 2267) … 淮垈지방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分朝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케 했다(甲戌六十七年……. 定淮岱諸侯置分朝以理之使虞舜監其事 檀君世紀).”�� 虞舜에게 맡긴 땅은 長江 상류와 黃河 상류 사이다. 淮垈 이남은 이미 扶蘇, 扶虞, 扶餘의 후손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22世�� 檀君 索弗婁2)는 “친히 구한(九桓)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싸워 殷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 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파멸 시켰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黃河 주변에서 승전의 하례를 받았다(親率九桓之師屢戰破殷都尋和又復大戰破之明年二月追至河上而受捷賀 檀君世紀).” 索弗婁 檀帝가 殷나라와 싸워 승전의 축하를 받은 黃河 주변은 金沙江 상류다. 전쟁에 진 殷나라는 淮垈 이북으로 밀려났다.

番朝鮮이 이미 岷江 이서에 있어, 淮垈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였다. 중구(中寇)의 침입을 막을 임무를 부여해 索弗婁 이전에 番朝鮮의 위치를 丹江 이남에서 岷江 이서로 옮겼던 것이다.

“남후(藍侯 : 藍國은 蚩尤의 후손의세운 나라이다)가 殷나라 淮水의 남쪽 땅에 선모국(鮮牟國)을세웠다(藍侯立鮮牟國於殷淮南之地 揆園史話).”�� 淮水 남쪽 땅은 慈烏支 天皇의 中土 정벌 이래로 내내 우리나라 영토였다. 殷나라는 金沙江 상류에서 건국한 나라로 기원전 11, 12세기에 망했다. 기원전 1284년��, 索弗婁 天皇이 殷나라의 淮垈를 정벌했을 때 부터 中土는 淮垈를 상실했다. 鮮牟國을세운 땅은 殷나라 남부로 淮水의 북쪽에 있었다. 淮水의 남쪽이라는 저 揆園史話의 기사는 날조다.

중토의 회대(淮垈)와 날조된 회대(淮岱)

乙酉 2년��(B.C. 1236) 남국(藍國)의 임금 금달(今達)이 靑邱의 임금, 구려(句麗)의 임금과 주개(周愷)에서 회합하고 몽고리(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殷)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오지(奧地)에 까지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垈)의 땅을 평정하였다(乙酉二年藍國君今達與靑邱君句麗君會于周愷合蒙古里之兵所到破殷城柵深入奧地定淮岱之地 檀君世紀)

23世 檀君 아홀(阿忽) 때의 기록이다. 淮垈의 땅을 평정했는데, 오지(奧地)라는 것이다. 金沙江 북부는 奧地다. 이 역시 현 淮水에서 泰山(太山) 까지가 淮垈라는 날조가 통할 수 없는 말이다. 현 淮水 이북에는 東夫餘가 있었다. 얼마나 곡식이 잘 자라는지, 백성들이 왕(解夫婁)에게 노래까지 지어 받쳤다(正春之謠).

“周나라 穆王 때, 周나라와 일대 결전을 벌여 이 淮垈지방을 할양받아 중원 대륙에 空前無後의 대제국을 건설했던 저 서언왕(徐偃王)의 이른바 大徐帝國의 터가 바로 이곳 淮垈지방”이라고? 淮水와 岱山(泰山) 사이에 공전무후(空前無後)의 대제국을 건설할 수는 없다. 周나라는 淮垈를 차지하지 못했다. 殷나라 때 우리나라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어떻게 제 것도 아닌 땅을 할양해줄 수 있단 말인가. 徐偃王의 정체는 22世�� 檀君 索弗婁다.

丙申 원년(B.C. 1285) 11월�� 몸소 구한(九桓)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싸워 은(殷)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 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파멸 시켰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黃河 주변에서 승전의 하례를 받고 번한(番韓)의 백성(弁民)들을 회대(淮垈)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丙申元年 … 十一月親率九桓之師屢戰破殷都尋和又復大戰破之明年二月追至河上而受捷賀遷弁民于淮岱之地使之畜農國威大振 檀君世紀)

시차가 3 백년 가까이 벌어지나, 원래 中奴史家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베끼면서 연대를 정확히 일치 시키지는 않았다. 周, 楚의 침략을 받자 백성을 생각한 徐偃王이 싸움을 포기했다고? 殷나라가 다시 淮垈로 밀려왔다는 뜻이다. 그래서 23世�� 檀君 아홀(阿忽)이 또 다시 淮垈를 평정해야 했다.

淮垈가 중국 땅 가운데 제일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고? 하기야 淮垈는 티벳고원에서는 제일의 요충지였다. 淮垈 너머에는 그나마 큰 강의 상류조차 없으니까. 우리가 알고있고 사용하고 있는 현재의 지명들은 明의 대륙점령을 기화로 中土(西土)에서 대륙으로 옮겨진 것이다.

番韓은 太子(扶婁)의 명을 받고 나라에 크게 경당(扃堂)을 일으키고 아울러 三神을 태산(泰山)에서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三神을 받드는 옛 풍속은 회사(淮泗 : 淮水와 泗水) 지방 사이에서 크게 행해지게 되었다(番韓以太子命令境內大興扃堂幷祭三神于泰山自是三神古俗大行于淮泗之間也 番韓世家 上).”�� 그런데 番韓은 저 당시 淮垈가 아니라, 丹江 이남에 있었다. 扶餘 또한 淮垈 이남에 있었다.

番韓世家는 1520년��에 이맥(李陌)이 쓴 太白逸史의 일부다. 1520년��에도 淸은 揚子江 이북에 버젓이 존속 했지만, 역사날조는 揚子江 이남까지 차지한 이후에 했다. 아직은 明의 역사날조 뿐이었다. 明이 揚子江 하류에서 黃河 하류까지를 淮垈라 날조한 결과, 淮垈 안에 泰山이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三神을 태산(泰山)에서 제사지내자, 三神을 받드는 옛 풍속이 淮泗 지방 사이에서 크게 행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泰山은 오악(五嶽)의 하나로 우리나라 聖山이다. 원 泰山은 우리나라 땅에 있었지, 이 당시 中土였던 淮垈 즉 怒江 상류와 金沙江 상류 사이에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泰山이 티벳고원 남부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丹江 이남에는 항산(恒山)이 있었다. 五嶽 가운데 둘이나 丹江 이남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태산(泰山)은 오늘날의 그 자리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중토의 해대(海垈)와 날조된 해대(海岱)

후진(後晋 : 936~ 946)때 기록에서는 

 태산(太山)으로, 宋(1060)때 기록에서는 태산(泰山)으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태산(泰山)은 山東省에 있는데 대(岱) 또는 대산(岱山)이라 쓰였고 󰡔史記󰡕�권6에는 태산(泰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의 󰡔史記󰡕�에서 처음에 대(岱)로 불리웠다고 했으며 單字로 표현 되었으나 두 문자로 만들어 현재까지 태산(泰山)으로 2 천년 동안 불리웠다면 그동안 아무것도 다른 문자로 기록되어 있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그러나 태산(太山)의 명칭이 후진(後晉)때 사용되었다는 것은 한(漢)나라 때부터 宋(960~1126)때까지 대산(岱山), 태산(太山), 태산(泰山)이 동시에 사용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中奴가 티벳고원 북부를 빠져 나오면서 큰 강 둘을 黃河와 長江으로 이름을 붙이자, 淮水는 그 가운데 작은 강으로 귀착 되었다. 淮垈는 黃河 상류와 揚子江 상류 사이에서 黃河 하류와 揚子江 하류 사이가 되었다. 明 때의 淮岱다. 그래도 淮垈는 그 폭이 자그만치 500 km가 넘는다. 淮垈, 淮水 유역이라 부르기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넓은 지역이다. 이 淮垈마저 날조 역사 속에서나마 우리나라에 주기가 아까웠다. 그래서 淸은 “淮水와 泰山 사이”로 축소했다. 그러면서 태산을 대산(岱山)이라고 우기는데, 그래야 淮岱가 되기 때문이다.

해대(海垈) 일대는 일찍부터 그(蚩尤氏)의 부족들이 자리잡고 앉은 땅이 되었다.

淮垈에서 보았듯이 해대 역시 海岱가 아니다. 원래는 海垈다. 黃海와 泰山 사이가 海岱가 된 것도 淸 때 이르러서다. 黃海와 泰山. 海泰밖에 안되니까, 泰山을 岱山이라고 우기면서 해대(海岱)로 고쳤다. 그러나 한 점 산에서 바다까지를 지명으로 붙일 수 있는가.

태산정상(泰山頂上)에서, 건물이 산정을 흉물스럽게 차지하고 있다. 泰山에는 도교(道敎)의 女神으로 추앙받는 벽하원군(碧霞元君)을 모신 사당이 있다.

泰山에서 黃海에 이르는 경계는 무수히 많이 존재할 수 있다. 山東半島 반대편에 泰山이 있으니까. 적당히 우길 수 있다고 생각 했겠지만, 실제로 각자 선을 그어보면 천차만별이다. 중국 대륙이 커서 그 땅 차이가 별것이 아니다 생각할지 몰라도 소위 春秋戰國 시대에는 백 개가 넘는 나라가 난립하고 있었다. 淸은 그 당시 海岱에 濟와 魯가 있었고, 인근에는 宋, 鄭, 燕 등이 있었다고 날조했다.세계 어디에도 그렇게 애매하게 지명을 정하지는 않는다.

이 경우 과연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海岱인지 海岱 밖인지 알 수 있는가. 지명이란 강과 산을 경계로 해서 정하는 법인데, 海垈, 淮垈는 물론 중국의 현 행정구역 까지도 지형을 무시하고 있다. 明 때도 해대는 海垈였다. 바다가 있는 지역이란 뜻이었다.

“薩水가 곧 辰韓의 남해안(薩水乃辰韓南海岸也)”이라는 馬韓世家 및 “좌익위(左翊衛) 대장군 내호아(來護兒)가 江·淮의 수군 선단을 이끌고 수백 리에 이르도록 바다(揚子江)에 떠서 먼저 浿水(漢水)로 들어갔다(左翊衛大將軍來護兒 帥江淮水軍數百里浮海先進入自浿水 高句麗本紀)”는 三國史記의 기록에서 보듯이 중국이 우리나라 영토를 갈취하고 역사를 바꾸기 전까지는 웬만큼 큰 江은 다 바다(海)라고 불렀다.

창수사자(蒼水使者), 창해역사(滄海力士)는 薩水를 바다로 가진 나라의 使者, 力士라는 뜻이다. 즉 蒼水, 滄海는 ‘바다처럼 큰 강’이라는 의미로 곧 大國 이라는 뜻이다.

中土의 바다 역시 강이다. 아노장포강(雅魯藏布江), 怒江, 난창강(瀾滄江), 金沙江, 岷江(金沙江 끄트머리와 雅魯藏布江만 中土다)은 모조리 큰 강 상류에 불과 함에도 바다라 불렸던 것이다. 海垈는 그 가운데 하나의 유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의 滄海, 東海 너머에 우리나라가 있으므로 서쪽에 치우친 雅魯藏布江, 怒江, 瀾滄江은 바다는 될 수 있어도 滄海, 東海는 될 수 없다. 옛날에는 黃山江(揚子江)도 바다라 불렀으므로 黃山江 상류인 金沙江이나 岷江 가운데 하나가 滄海였다. 岷江 유역은 전부 우리나라 땅이니까, 金沙江(옛 黃河)이 滄海였던 것이다. 21世�� 檀君 소태(蘇台)가 索弗婁에게 제위를 물려주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나라를 버리고 밭을 갈며 살았다는 東海의 해변가는 바로 金沙江 유역이다. 海東은 金沙江 동쪽이다. 海東盛國은 예전 黃河 金沙江의 동쪽에 있는 大帝國이라는 뜻이다.

위의 지도에서 보라색으로 표시된 것이 해대이다. 주황색은 朱元璋이 날조한 海岱, 분홍색은 淸이 날조한 海岱다. 淸의 海岱는 明의 海岱 내부에 위치한다.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재정복한 이후 海垈, 淮垈는 사실상 海垈, 淮垈의 북부만을 가리켰다. 즉 海垈는 淮水 상류와 黃河 상류 사이였던 것이다.

海垈는 黃河(金沙江) 유역에서 발전한 개념이다. 하지만 淮水(瀾滄江)와 遼水(岷江)가 金沙江 보다 길이가 짧다. 中奴의 江北이 番朝鮮 땅이므로 이후 전쟁터가 된 海垈는 金沙江 발원지 까지다. 海垈도, 淮垈와 마찬가지로 군사 전략적으로 중요한 海垈의 북부만을 가리켰다.

淮垈가 金沙江 상류와 怒江 상류 사이의 땅이기 때문에 海垈는 淮垈와 일부 겹친다. 그래서 海上1)을 “海垈와 강회(江淮)”라 표현한 것이다. 海上 − 海垈 =江淮. 江淮는 長江(怒江) 상류와 淮水(瀾滄江) 상류 사이를 말한다. 淮垈의 서쪽 절반이다.

“무릇 海垈와 강회(江淮)의 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지하고 살아온 지 오래되었는데, 殷나라의 도가 쇠퇴해지자 남후(藍侯)가 제후들과 더불어 공격하여 들어간 것이다(盖海岱江淮之地 爲東人占居者已久 及至殷道之衰 而藍侯與諸侯進攻 揆園史話).”�� 江淮 역시 북부만을 가리켰다.

遼水가 桑乾河인 明 때의 날조 海垈는 黃河 하류였다. “海垈와 江淮의 땅에는 마침내 마을을 이루어 漢나라 땅의 백성들과 교류하며 섞여 살게 되었다.(東人之占居淮岱者甚多 與漢土之人雜處)”는 揆園史話의 淮垈는 현 淮水에서 桑乾河 까지이다.

“개국(蓋國)은 거연(鉅燕) 남쪽에 있고, 倭의 북쪽이며 왜(倭)는 연(燕)에 속한다(蓋國在鉅燕南倭北 倭屬燕 山海經).”에서 倭와 접했다던 연(燕)은 어떻게 발해만까지 진출했나. 淮垈를 淮水와 岱山 사이로 날조한다고 해도 海垈가 黃河 하류라면, 연(燕)은 淮水 이남이나 長安 쯤에 있어야지, 발해만(渤海灣)으로 진출할 수가 없다. 그러나 淸이 海垈를 岱山과 黃海 사이로 고치자, 燕은 거뜬히 渤海灣에다 長城까지 쌓은 것이다. 실제로 渤海灣에 長城을 쌓은 나라는 百濟다. 燕이 倭와도 접하고 渤海灣에다 長城까지 쌓을 정도면, 秦이 아니라, 燕이 中土를 통일했다. 萬里長城도 秦이 아니라 燕이 쌓아야 했다. 그래서 淸은 중국 대륙에서 倭를 없애버렸다.

중토의 회대(淮垈)와 날조된 회대(淮岱)

왜(倭)는 燕에 속한다(倭屬燕). 이 말은 조그만 中土에서 빠져나와 揚子江 이남만을 차지했던 明 때 고친 날조기사다. 이 당시에는 戰國 七雄의 하나인 燕이 발해만이 아니라, 중국 남부에 있다고 날조했던 것이다. 淮垈 너머에 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위 春秋戰國 시대에는 倭가 없었다. 연대를 일치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燕이 倭를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이다.

倭를 거느린 燕은 5 胡 16 國에 속하는 北燕, 後燕, 西燕(西燕은 존속기간이 짧다고 16 國에 넣어 주지도 않는다. 947년��에서 950년�� 까지 있다 망한 後漢도 있거늘, 그래도 西燕은 10년��이나 버틴 나라가 아닌가), 前燕, 南燕이 아니다. 北燕, 後燕, 西燕, 前燕, 南燕은 모두 揚子江 이북에 있었다고 날조했기 때문이다. 北燕, 後燕, 西燕, 前燕, 南燕은 中土 서쪽에 산재한 호수 너머에 있었다.

보라색이 진짜 회대다. 주황색은 朱元璋이 날조한 淮垈, 분홍색은 淸이 날조한 淮岱다. 淸의 淮岱는 明의 淮垈 내부에 위치하고 있다. 淮垈는 군사전략적 지역이었다. 그래서 “蚩尤天王은 서쪽으로 예탁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淮垈를 평정하셨다”(번한세가)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날조 淮岱는 군사전략상 아무 쓸모도 없는 지역이다.

中土를 확대시키자, 淮垈와 海垈 즉 揚子江에서 遼水(桑乾河)까지는 우리나라 영토였기 때문에 燕은 揚子江 이남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明의 날조 역사 속에서도 揚子江에서 桑乾河, 그리고 桑乾河에서 동북아 전체가 우리나라 강역이었다.

淸이 우리나라 영토를 가로채면서 遼水를 현 遼水까지 밀어내자, 淮垈, 海垈는 일시에 揚子江에서 현 遼水까지로 확장된 셈이다. 海垈가 淮水에서 현 遼水까지라는 것은 누가 봐도 어색하다. 더구나 탐욕스러운 濊貊族(淸)에게는 淮垈조차 너무 커 보였다. 그래서 淮垈를 淮岱로 날조해 淮水에서 泰(岱)山까지, 海垈를 海岱로 날조해 泰山(岱山)에서 黃海까지로 축소하고 나자, 燕은 발해만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티벳고원 내의 淮垈, 海垈는 中土로 부터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군사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위치지만, 축소한 淮岱, 海岱는 무가치한 지역이다. 明이나 淸이 날조한 淮岱, 海岱를 아무리 점령하고 있어 봐야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淮岱, 海岱를 우회해서 침공하면 되니까. 요컨대 淮岱, 海岱를 만든 이유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날조 中奴史 속에서 우리나라는 遼水와 泰山(岱山) 사이는 정복하지 못한 셈이었다. 그래서 배 타고 黃海를 건너가 淮岱와 海岱를 정복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李成桂와 朱元璋은 우리나라의 한단사(桓檀史)를 말살하고 中奴가 갖기로 합의했다. 날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축소된 淮岱와 海岱조차 정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春秋戰國시대의 날조 강역도에는 海岱에 齊, 魯를 그려 두었다.

소위 春秋戰國時代의 疆域圖에는 齊·楚·秦·燕·魏·韓·趙를 戰國七雄이라며 모조리 중국 대륙 동부, 그것도 揚子江 이북에다 그려 놓았다. 齊는 山東半島에, 楚는 漢水 유역에, 秦은 長安 일대에, 燕은 桑乾河 이서에, 魏·韓·趙는 현 黃河 중류 東岸에 있었다고 날조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楚는 남방에, 秦은 서방에, 魏·韓·趙는 중앙에 있었다고 한다. 결국 春秋戰國 시대의 中土는 揚子江 이북 동쪽이라는 소리다. 그러면서도 秦始王은 萬里長城을 오르도스 이남에 쌓았다. 티벳고원이나 揚子江 이남의 적을 막는 게 더 시급할 텐데도. 戰國七雄을 揚子江 이북 동쪽에 다 몰아 넣었으니, 정복활동을 하려고 해도 戰國七雄끼리 싸워야 한다.

淮垈와 海垈에 상응하는 말로 패대가 있다. 그런데 패대의 한자는 浿帶다. 역사를 날조하면서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고, 또 한 가지는 浿水는 淮水(瀾滄江)나 黃河(金沙江)와 지형이 같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浿水(漢水)와 나란히 흐르는 강이 양쪽에 없기 때문에 垈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癸丑年은 索弗婁 임금의 원년이다. 商나라(殷나라)와 싸워 이긴 후 얼마 있지 않아 화해하였다. 뒤에 다시 크게 싸워 商나라를 깨트리고 그 국경 안까지 들어가서 마침내 해상(海上)에 주둔하니 많은 백성들이 다시 점차 옮겨갔다(癸丑歲壬儉索弗婁元年 與商戰破之 尋和 後 復大戰破之進入其境 遂屯海上 庶民復漸遷徙 揆園史話).”��

江을 끼고 있는 땅에 주둔하고 이주했다는 뜻이지, 수상가옥을 지었다는 뜻이 아니다. 海上이란 여러 강이 모이는 땅을 일컬었다. 바다 위가 아니다.

海上은 원래 5 대강이 모여 있는 티벳고원 남부다.2)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재정복한 이래로 中土의 4 대강 상류(雅魯藏布江은 하류)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나 揆園史話의 저 기사에서는 海上이 金沙江 상류만을 가리킨다. 揆園史話라는 책을 보면 볼 수록 北崖라는 인간은 어떻게 저리도 거짓말을 잘할 수 있을까 허탈해 진다.

“黃河 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番韓의 백성들(弁民)을 淮垈의 땅으로 옮겼다(追至河上而受捷賀遷弁民于淮岱之地 檀君世紀).”�� 東中國海, 南中國海도 바다라 불렀기 때문에, 그때그때 문맥에 따라 진짜 바다인지, 강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는 진짜 바다를 가리키는 경우는 드물었다.

“燕나라와 齊나라의 바다(燕.齊海上) 위에 괴이한 방사(方士)가 있다(而燕齊海上之方士傳其術不能通 史記 秦始皇本紀)”에서 燕나라와 齊나라가 江을 끼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江이라고 해봤자, 怒江 상류 이남에 있는 것으로 燕나라와 齊나라의 바다는 雅魯藏布江의 지류다.

“돌아오는 길에 바다 위에 이르니(還至海上) 붉은 용이 상서러움을 드러내 보이고 神女가 함(柙)을 받들어 바치는데, 한 동자가 붉은 비단 옷(緋衣)을 입고 그 함속에서 나와 檀君을 알현하기에, 그를 사랑스럽게 여겨 성을 비(緋)라 하고 이름을 천생(天生)이라 지어 주었더니 마침내 남해상장(南海上長)이 되었다(還至海上赤龍呈祥 神女奉柙 有一童子 衣緋衣 從柙中出謁 檀君愛之 因姓曰緋 名曰天生 遂爲南海上長 揆園史話 檀君紀)” 돌아오는 길에 이른 바다는 薩水(丹江)다. 南海上長은 薩水上長이다.

”��隋나라 왕 양견(楊堅 : 文王)은 은밀하게 해칠 마음을 품고 감히 원수 갚기 위해 군사를 출병시켜 몰래 위충(韋沖)을 보내어 총관(摠管)이라는 이름으로 관가를 부수고 邑落에 불지르고 약탈 하였다, 이에 皇帝(嬰陽武元好太烈帝)는 곧장 장병을 보내 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죽이니, 山東지방은 이에 다시 평정되고 해역은 조용해졌다(隋主楊堅陰藏禍心敢出讎兵密遣韋沖摠管爲名潰破管家焚掠邑落乃遣將兵擒殺賊魁山東平服海域 太白逸史).”�� 물론 海域도 金沙江 상류 양안이다. 山東, 山西는 中土의 金沙江 상류 이서에 있었다.

탁록(涿鹿)은 어딘가.

탁록(涿鹿)은 어딘가. 慈烏支 한웅은 “서쪽에서 여러번 天兵을 일으켜 진격하여 淮垈의 사이에 거처했다. 軒轅이 일어나자 즉시 涿鹿의 벌판에 나아가 軒轅을 사로잡았다(屢起天兵於西進據淮岱之間及軒轅之立也直赴涿鹿之野擒軒轅 神市本紀).”��

우선 涿鹿은 벌판이다. 淮垈에 집결한 후 涿鹿의 벌판에 나아간 것으로 보아, 지형상 淮垈 서쪽이나 북쪽에 있다. 또 涿鹿에는 江도 있다. 軒轅이 “涿鹿의 江에 도읍하고 옮겨 다니며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켜 영위(營衛)하게 하여 살았다(居邑于涿鹿之河遷徙往來無常定處以師兵爲營衛 神市本紀, 史記).” 이제 남은 단서는 涿鹿이라는 한자. 涿鹿. 탁은 치다, 물방울 떨어지다, 고을이름.문지르다의 뜻이 있다. 鹿은 사슴, 산기슭, 방형 모양의 쌀창고, 權座라는 뜻이다.

이에 해당하는 땅은 라사(Rasa)가 있는 평야지대다. 라사는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강의 상류인 雅魯藏布江의 지류 라사강(카츄)이 이루는 곡저평야(谷底平野)에 자리한다. 谷底平野는 골짜기 안에 발달한 평야다. 즉 골짜기가 사슴 뿔 형상(V)을 이룬다. 라사강이 있으니, 물방울도 떨어진다 하겠다. 예탁(芮涿)은 涿鹿의 또 다른 이름으로 추정된다.

“한때 天下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涿)의 북쪽에 대요(大撓)가 있었고 동쪽엔 창힐(倉頡)이 있었으며 서쪽엔 軒轅이 있었다?(時天下鼎峙涿之北有大撓東有倉頡西有軒轅 三聖紀全 下篇).”�� 여기서의 天下란 티벳고원 북부도 아니고, 涿鹿 일대만을 가리킨다. 李氏朝鮮 이전에는 中土 일부를 천하라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三聖紀의 저 기사는 잘못된 기사이다).

라사 시내의 포탈라 궁

“이 때 반고(盤固)라는 자가 있어 기이한 술책을 즐기며 길을 나누어살기를 청하매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재물과 보물을 꾸리고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의 神將들을 거느리고 공공(共工), 유소(有巢), 유묘(有苗), 유수(有遂)와 함께 삼위산(三危山)의 납림동굴(拉林洞窟)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군주가 되니 이를 제견(諸畎)이라 하고 또 반고가한(盤固可汗)이라 했다(時有盤固者好奇術欲分道而往請乃許之遂積財寶率十干十二支之神將與共工有巢有苗有燧偕至三危山拉林洞窟而立爲君謂之諸畎是謂盤固可汗也 三聖紀全 下篇).”�� 저 부분만 빼면 앞뒤 문장 연결이 자연스러워진다.

盤固를 빼고 써보면, 안파견(安巴堅) 한인(桓因)이 “그대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무리 3,000을 이끌고 가 하늘의 뜻을 열고 가르침을 세워 세상을 이치로 교화하여(在世理化) 자손만세의 큰 법(洪範)을 세워라 하셨다 … ��이에 한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太白山 꼭대기의 神檀樹 밑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神市라 하고 이분을 한웅천왕이라 한다(君勿惜厥勞率衆三千而往開天立敎在世理化爲萬世子孫之洪範也 … 於是桓雄率衆三千降于太白山頂神壇樹下謂之神市是謂桓雄天王也).”

三聖紀全 下篇의 나머지 기사는 우리나라가 동아시아의 天子國이라는 관점에서 쓴 글이다. 원동중(元董仲)은 高麗 시대 사람이고, 三聖紀全 下篇은 李氏朝鮮 때 첨삭됐다.

안함로(安含老)의 三聖紀全은 “丙辰年, 周나라 考王 때(丙辰周考時)”를 기준으로 

이전은 實史를, 이후는 날조사에 따라 식민지의 왕을 연대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다. 三聖紀全 上篇의 백미가 바로 “丁未(B.C. 194)년 漢나라 惠王 때 燕나라 추장(酋長)이었던 衛滿(丁未漢惠時燕酋衛滿)”이다. 燕나라 장수는 추장(酋)인데, 酋長의 나라들을 통일한 秦, 漢은 皇帝의 나라? 이것이 中奴史의 진실이다. 酋長들을 하나같이 皇帝로 격상 시켰다.

八條法을 만든 것은 大夫餘 때가 아니라 索弗婁 天皇 때였다. “衛滿이 이(解慕漱)를 맞아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바다 길을 택해서 멀리 망명 하였다. 이로부터 三韓의 무리는 거의 漢水의 남쪽으로 옮겨갔으나 한때에는 여러 영웅(群雄)들이 요해(遼海)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다(三韓所率之衆殆遷民於漢水之南一時群雄競兵於遼海之東 三聖紀全 上篇).”는 대목도 거짓이다.

우리나라 강역을 韓半島와 그 이북으로 상정하고 우리나라 영웅들이 발해만 동쪽에서 전쟁을 했다는 소리다. 遼海(渤海灣)가 中土로 변한 것은 淸碑를세우고 부터다(그 이전 까지는 李氏朝鮮의 땅이였다). 날조사에서 三韓을 부족국가로 만들어 漢水 이남에 집어넣었다. 衛滿은 解慕漱와 싸운 적도 없다. 衛滿이 箕準을 속이고, 番朝鮮을 빼앗자, 箕準이 瀾滄江(淮水)으로 들어갔다.

“夫餘의 옛 도읍을 차지하여 東明(進據夫餘故都稱國東明)”이라고(?) 國號가 아니라 帝號를 지으니 新羅의 옛 땅(是乃新羅故壤也)이 아니라, 槀離國의 옛 땅이다. 高鄒牟가 “解慕漱를 제사하여 太祖로 삼다(祀解慕漱爲太祖)”는 것도 李氏朝鮮人이 썼다는 증거다. 太祖,世��祖 등의 묘호(廟號)는 大震國 시대부터 등장한다. 安含老의 三聖紀全이 전반부와 후반부의 시각이 다르다는 점, 후반부가 거짓 역사라는 점 등은 安含老의 三聖紀全 역시 첨삭되었음을 말해준다.

李氏朝鮮은 온갖 역사책을 다 뜯어고쳤다. 安含老와 元董仲의 三聖紀全 뿐만이 아니고, 檀奇古史도 형체를 알 수 없을 만치 완전히 뜯어고친 檀君世紀다. 李氏朝鮮이 존재한 기간 내내 역사날조가 이루어졌다. 檀奇古史는 李氏朝鮮이 멸망하기 직전에 최후로 날조한 책이다. 역사날조는 李氏朝鮮을 멸망에 이르게 한 병이었던 것이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포탈라궁은 17세기 중반에 지었다고 합니다. 이미 몽고가 中土를 정복한 13세기에 서양인들이 티벳고원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PECHELI. sive PEKING. IMPERII SINARVM PROVINCIA PRIMA 도 그때 서양인이 그린 것입니다.

포탈라궁이 동양식 건물로 보입니까? 포탈라궁은 서양인이 만든 건축물입니다. 高句麗人이 만든 唐의 長安城 위에 만든 것입니다.

갈고(葛古) 한웅이 신농(神農)의 나라와 국경을 획정하여 공상(空桑) 동쪽이 우리에게 속했다(葛古桓雄與神農之國劃定疆界空桑以東屬我 太白逸史 神市本紀).

‘새롭게’ 空桑 동쪽을 얻었다는 의미다. 空桑이 神市氏가 개천할 당시의 배달의 영토 가장자리 즉 白山 근처에 있다면, 기록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영토 분쟁이 생겼고, 우리나라 영토가 더 늘어났다는 의미다. 배달나라 10世�� 葛古 한웅은 배달의 통치자고, 神農은 배달의 제후이므로 실은 하사했던 封土의 일부를 환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神農의 나라란 神農의 여러 후손들이 다스리던 나라다.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들을 이끌고 양수(洋水)를 건너 출진하여 재빨리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空桑)은 지금의 진류(陳留)이며 유망(楡罔)이 도읍했던 곳이다. 이 해에 12 제후(諸侯)의 나라를 아울러 합병하니 죽인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다. 이에 西土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하여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整師躬率而出陳洋水殺至空桑空桑者今之陳留楡罔所都也時歲之中兼倂十二諸侯之國殺得伏尸滿野西土之民莫不喪膽奔竄 太白逸史 神市本紀)

공상(空桑)은 한자를 봐도 어디에 있었는지 전혀 도움이 안된다. 空은 하늘; 비(우)다; 쓸쓸하다; 헛됨의 뜻이고, 桑은 뽕나무다. 그렇다면 空桑은 뽕나무가 없다는 뜻? 잠상(蠶桑)과 길삼(길쌈 績)은 우리나라에서 시작됐다. “처음 神市氏의 말기에 蚩尤氏의 형제가 비록 涿鹿으로부터 물러나서 돌아 왔으나 東方의 사람으로 淮垈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漢나라 땅의 사람들과 섞여 거처하면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初神市之末蚩尤氏兄弟 雖自涿鹿退歸而東人之占居淮岱者甚多 與漢土之人雜處 農蚕織牧 資以爲業 揆園史話 檀君紀).”��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정복하기 전까지는 中土는 누에치기는커녕 길삼(織)조차 하지 못했다. 누에치고(蚕), 삼을 재배하는 것은 농사인데, 中土는 기원전 4300년��에야 后稷이 농사를 가르쳤다. 그 당시까지도 中土의 토착민은 짐승가죽이나 뒤집어쓰고 살았던 것이다.

軒轅의 아내 나조(螺祖)가 누에를 치고 실을 잣는 것을 가르쳐 의상의 제도를 처음으로 열었다고? 3 백년 뒤인 堯 때서야, 后稷이 온갖 곡식과 과일의 종자를 中土로 들여와 농사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그래서 后稷을 농사의 시조라고 부른다. 곡식재배 조차 못해서 일일이 가르침을 받은 처지에 양잠(養蠶)은 어떻게 하고, 길삼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양잠을 못하던 西洋도 농사만은 지었다.

軒轅이 內經을 지어 처음으로 의약 처방의 길을 열었다고? 그런데 中奴들은 軒轅이 아니라, 神農을 의약의 시조라고 떠받든다.

“神農은 수많은 약초들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神農..嘗百草之滋味制藥).”는 太白逸史는 날조사(淮南子)를 그대로 읊조린 것에 불과하다. 혀로 맛본다고 약을 만들 수 있나. 임상실험 해야 약을 만들 수 있다. 아픈 사람에게 처방을 해봐야 약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맛보아서 만들 수 있는 건 음식뿐이다. 이미 배달 개천 당시 병을 주관하는 저가(猪加)가 있었다. 한국(桓國) 시대에도 猪加가 있었다(三聖紀全 下篇). 神農은 배달의 의학지식을 中土로 가져갔을 뿐이다.

軒轅은 中奴의 상상 속에서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대요(大撓)에게 명하여 甲子를 짓게 하였으며, 창힐(倉頡)에게 명하여 六書를 짓게 하였으며, 영륜(伶倫)에게 명하여 율려(律呂)를 정하게 하였으며, 예수(隸首)에게 명하여 산수(算數)까지 정하게 하고, 기백(岐伯)에게 자문하여 내경(內經)을 지어 의학처방의 길을 열었다고 했다.

한민족의 이동경로

甲子는 伏羲가 만들었다. 그래서 韓易(周易이 아니다)을 선천팔괘(先天八卦), 복희팔괘(伏羲八卦)라고 날조하지 않았나. 軒轅은 共工, 倉頡, 大撓와 함께 紫府 先生에게 가르침을 받던 무리다(紫府先生造七回諸神之曆進三皇內文於天陛天王嘉之使建三淸宮而居之共工軒轅倉頡大撓之徒皆來學焉 馬韓世家). 軒轅은 大撓, 倉頡과 함께 中土 한 쪽을 삼분하던 자로 慈烏支 한웅과의 전투에서 매번 패하자, 大撓에게 기대려다가 거절당하고, 倉頡에 기대려고 했으나 역시 거절당한 비참한 인물이다(三聖紀全 下篇). 大撓는 甲子를 지은 게 아니라 배웠고, 倉頡도 六書를 지은 게 아니라 부도(符圖 : 天符經이 쓰여진 글)의 글(鹿圖文, 鹿書)을 배웠다. 이전에는 中土의 무리 중에 글을 아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軒轅이 백년을 왕위에 있었다고? 왕위에 있었다한들,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涿鹿에 도읍만 정하고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니 항상 거처하는 곳은 없었으며, 군사와 병졸들로 영위(營衛:막사를 지키게)하게 하였다(披山通路未嘗寧居邑于涿鹿之河遷徙往來無常定處以師兵爲營衛 太白逸史 神市本紀).”

그렇게 전전긍긍해 하며 살다가 慈烏支 한웅에게 정복 되었다. 慈烏支 한웅의 신하가 되고, 장수가 되어 살아야 했다. 그후에도 비참하긴 마찬가지였다. 蚩尤氏의 형제들이 모두 幽靑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되었기에 軒轅은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而蚩尤氏兄弟諸人, 乃永據幽靑, 聲威自是不撼, 黃帝氏亦不得自安 揆園史話). 蚩尤氏 형제들 사이에 끼어 中土 한 줌을 封土로 받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들을 이끌고 洋水를 건너 출진하더니 재빨리 空桑에 이르렀다. 空桑은 지금의 陳留이며 楡罔이 도읍했던 곳이다. 이 해에 12 諸侯의 나라를 점령하고 죽이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가득 메우게 되었다. 이에 西土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하여 숨지않는 자가 없었다(整師躬率而出陳洋水殺至空桑空桑者今之陳留楡罔所都也時歲之中兼倂十二諸侯之國殺得伏尸滿野西土之民莫不喪膽奔竄 太白逸史 神市本紀).”�� 西土의 백성들이 간담이 서늘해져 도망하여 숨지않는 자가 없었던 이유는 자신들의 사는 땅에서 벌어진 전쟁이기 때문이다.

우리민족은 神市氏가 남하하기 전에 살던 한국(桓國) 땅(시베리아)으로 도로 진출했다. 녹색은세부 진출경로

楡罔의 도읍 空桑은 西土, 즉 티벳고원 안에 있었던 것이다. “少昊는 크게 패하고 황망히 물러나 空桑으로 들어가더니 楡罔과 함께 도망 나와서 되돌아 涿鹿으로 들어갔다. 蚩尤氏는 이에 空桑에서 제위에 올랐다(少顥大敗 落荒而走入空桑 與楡罔出奔反入涿鹿蚩尤氏乃於空桑卽帝位)”는 揆園史話 太始紀는 사실이 아니다. 慈烏支 한웅은 배달 14世�� 天皇으로 즉위한 후 정복활동에 나섰다. 涿鹿으로 되돌아 들어갔다는 것도 거짓이다. 楡罔이 涿鹿으로 도망친 것은 涿鹿이 慈烏支 한웅의 군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회대(淮垈)와 기연(冀兗)의 땅을 모두 점거 하였으며, 탁록(涿鹿)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 잡아서 옮겨 왕래하며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淮岱冀兗之地 盡爲所據乃城於涿鹿宅於淮岱遷徙往來號令天下 揆園史話 太始紀)

中土가 중국 대륙일 때나 가능한 얘기다. 동아시아의 통치자가 도읍할 곳이 없어서 고작 미개 땅 티벳고원 안에 皇城을 짓고 살았단 말인가.

우선 눈이 괴롭다.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은(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 華夏가 사방의 “들에서 함부로 野合”하는 꼴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동아시아를 다스리는 대제국의 지배자가 번창한 도시를 다 팽개치고, 고작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는 땅에 들어가, 皇城만 번듯하게 지어놓고 살겠는가. 어느 나라 지배자가 화려한 도시를 팽개치고, 빈민굴에 皇城을 지어두고 산단 말인가.

慈烏支 한웅이 거처한 宮은 三淸宮이다.

자부선생(紫府先生)께서 칠회제신(七回諸神)의 책력을 만드시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천폐(天陛 : 궁전의 층계)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를 칭찬하였다. (慈烏支 한웅이) 三淸宮을세우사 그곳에 거하시니, 공공(共工), 헌원(軒轅), 창힐(倉頡), 대요(大撓)의 무리가 모두 와 여기서 배웠다(紫府先生造七回諸神之曆進三皇內文於天陛天王嘉之使建三淸宮而居之共工軒轅倉頡大撓之徒皆來學焉 馬韓世家)

中土를 정복한 후 동아시아의 통치자답게 웅장한 궁을세우고, 거기서 살았다. 紫府先生에게 거처하라고 지어 주었다면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해도 宮이 될 수 없다. 宮은 황제나 왕이 거처하는 건축물이다. 紫府先生은 제후조차 아니지 않는가. 慈烏支 한웅이 거처한 三淸宮에 紫府先生도 같이 살았던 것이다. 三淸宮에 慈烏支 한웅이 계시니까, 共工, 軒轅, 倉頡 , 大撓 등이 와서 알현하는 김에 紫府先生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서쪽에서 天兵을 일으켰다. 또 색도(索度)로 부터 군사를 진군시켜 淮垈 사이를 차지했다(起天兵於西又自索度進兵據有淮岱之間 三聖紀全 下篇, 太白逸史 神市本紀).”�� 淮垈의 안으로 군대를 진입시킨 것은 空桑이 淮垈에 있었기 때문이다. 空桑 동쪽은 葛古 한웅 이후 우리 땅이다. 결국 군대를 집결시킨 곳은 空桑 동쪽이다. 慈烏支 한웅은 楡罔의 도읍 코앞에다 군대를 포진시킨 것이다.

배달나라 청구 강역도

空桑의 후보지는 昌都와 제꾸(腊久) 정도. 강가에 있는 昌都가 空桑일 가능성이 더 높다. 옛날에는 육상교통보다 수상교통에 의지했기 때문에 도읍을 강가에 정했다. 그러므로 慈烏支 한웅이 空桑에 이르기 위해 건넌 洋水는 瀾滄江이다. 4700년�� 전의 도시가 오늘날까지 도시로 이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결국 瀾滄江 서안 어디엔가 空桑이 있었던 것이다.

空桑이 瀾滄江 서안에 있었으니까, 空桑 以東으로 영토경계를 정한 葛古 한웅 때부터 淮垈 일부는 우리나라 땅이었다. 空桑과 그 주변을 지배한 楡罔을 패퇴시킨 후로는 淮垈 전체가 우리나라 땅이 되었다. 지리상으로도 涿鹿은 空桑을 획득한 후에 정복했다. 그러므로 “淮垈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자 하여 곧 涿鹿에 城을 쌓고 淮垈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에 軒轅의 무리는 모두 다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는 잘못 쓴 글이다. 정확한 글은 아래와 같다.

涿鹿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자 하여 곧 점령한 淮垈에 성을 쌓았다. 이에 軒轅의 무리는 모두 다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慈烏支 한웅은 軒轅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은 다음, 또 다시 吳나라에 장군으로 보내 서쪽으로 高辛氏를 공격하여 공을세우게 하였다. 中土에는 수많은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高辛氏는 中土의 서쪽, 즉 캐시미르(Kashmir)를 포함한 땅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慈烏支 한웅 때 동북아에서 중국 대륙으로 중심지를 옮겼다. 白山은 우리나라 영산이 아니다.

“신지씨(神誌氏)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僳黰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한다(神誌氏之後 封于北東之地河嶽鹿鈵崷莊 風氣勁雄 曰嫘黰國 亦稱肅愼 方言 豪莊之稱也 揆園史話 檀君紀).” 동북아의 풍경이다. 다음 설명에서 神誌氏가 받은 봉토에 대한 더욱 자세한 위치를 알 수 있다.

“神誌氏는 속진국(僳黰國)에 봉함을 받으니, 땅의 기후는 모질게 한랭하여 오곡에 마땅하지 않았으나 넓은 지역에 사람이 드물어 목축이 매우 적합하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활을 메고 검을 차고 유목과 수렵에 함께 종사하게 하였다(神誌氏受封於嫘黰國 地旣勁寒 不宜五穀 土廣人稀牧畜頗適 乃使民帶弓佩劒 幷事遊獵 揆園史話 檀君紀).”�� 만주는 농사에 적합한 지형이다. 그래서 이 땅의 사학자들은 만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곡식이 잘 자라는 기름진 땅으로 女眞族이 살고 있었다. 혈거생활하며 水草를 찾아다닌 女眞族이 유목민이라서 李氏朝鮮人들이 鴨綠江 너머로 건너가 그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李氏朝鮮이 개간한 땅이라 女眞族이 淸을세운 다음 淸碑를세워 李氏朝鮮과 사이좋게 그 땅을 나눠가졌다. 다시 말해 떠돌이 미개 유목민족은 沃土인 거대 滿州를 차지한 반면, 고도 농경민족인 우리나라는 비좁은 韓半島의 산악지대만 차지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新石器人처럼 떠도는 유목민족조차 내쫓지 못해서 滿州를 침이나 흘리며 바라 보고만 있었다는 것이다. 유목민족이 대대로 침입해서 나라를세운 中奴史가 끝없이 부풀려지는 바람에 유목민족이 뭐 대단한 문명을 가진 민족처럼 날조되어 왔지만, 유목민족이 가진 문명이란 천막과 짐승 몇 마리가 전부다. 고도문명의 유목민족은 오직 東洋史에서만 존재하는 허구의 역사다.

神誌氏의 땅은 북동쪽인데, 滿州가 아니었던 것이다. 神人王儉이 神誌氏에게 주었던 땅은 大興安嶺山脈 이북이다. 우리나라 강역이 시베리아까지 라면서 어째서 大興安嶺 이북을 북동쪽이라 하는가. 朝鮮은 우리나라 강역 일부에서 개국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시베리아는 아직 朝鮮의 땅이 아니었다.

高矢氏에게는 바람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오곡은 풍성하게 살찌는 중국 대륙 동부를 주고서 어째서 神誌氏에게는 동북아 전체도 아니고, 大興安嶺山脈 이북만 줬을까. 이 땅의 사학자들이 버려진 땅이라 단언하는 滿州에는 神市와 太白山이 있었기 때문이다.

慈烏支 한웅 이후 중국 대륙으로 중심지를 옮겨와 중국 대륙의 산을 太白山이라 부르고는 있지만, 가짜 太白山에 지나지 않는다. 神市氏가 무리 3,000을 이끌고 처음 정착한 곳은 동북아의 太白山이 있는 神市였기 때문이다. 우리민족의 聖山이기 때문에 비록 몸은 중국 대륙에 있으나, 歷代 檀君이 대대로 직접 다스렸던 것이다.

辰韓의 강역은 薩水 이북에서 黃河 하류를 거쳐 大興安嶺山脈 이남이다. 渤海灣도 檀君의 직접 통치지역이니까, 泗沘城(北京)에서 천문관측한 것은 기원전 1916년 부터다. 溫祚는 그 천문대를 접수해서 계속 천문관측한 것이다.

“高矢氏는 靑丘國으로 나아가 산천을 둘러보고 토지의 형세를 관찰하고 밭과 들녘을 개간하여 농업과 잠업을 일으켰다. 바람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오곡은 풍성하게 살찌니 백성들은 모두 가볍고도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지고 훌륭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며 옷을 갖춰 입고 신을 차려 신는 등 자못 천하의 풍채가 있었기에 文武가 아울러 일어나게 되었다(高矢氏就靑丘國 觀山川 相土地 開田野 興農桑 風氣溫昜 五穀豊肥 民皆衣輕暖煖而食肥俍 頗有冠帶衣履天下之槪 文武亦得以幷興 揆園史話 檀君紀).”�� 중국 대륙 동부다. 이 당시는 揚子江 이북이었다.

설유(稧兪)의 난을 진압한 후 高矢氏의 봉토를 고쳐 남쪽의 땅에 봉했는데, 바로 揚子江 이남이다. 靑邱의 백성이 揚子江 이남으로 건너가 살고, 揚子江 이남 사람들도 檀君에게 복속하자, 高矢氏의 봉토를 변경한 것이다. “夫餘가 남이(南夷)를 평정하니 열수(洌水)의 남쪽은 완전히 天王의 교화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 까닭에 靑丘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가서 살게 되었고, 홍수가 완전히 다스려진 뒤로는 남쪽으로 넘어가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로서 남이의 사람(南夷之人)들도 함께 神人의 교화에 물들어 마침내 그 풍속이 변화 하였으니, 후의 眞·弁의 뭇 부족들이 모두 그들이다(夫餘之平南夷也 洌水以南 完服王化 以故靑丘之民 得漸遷居 及洪水旣平南渡者益多 於是南夷之人 幷沾於神化 遂變其俗 後之辰弁諸族 皆是也 揆園史話 檀君紀).” 眞·弁은 3차 辰韓, 弁韓이니까, 南夷가 모두 眞·弁 사람은 아니다. 眞·弁의 뭇 부족들? 中土도 아니고, 고작 揚子江 하류 유역에 여러 부족이 살았을 리가 없다.

列水는 揚子江이다. 열수가 洌水라는 건 날조고, 원래는 列水다. “神農은 列山에서 일어났는데 列山은 列水가 흘러나오는 곳(神農起於列山列山列水所出也 太白逸史 神市本紀)”이라 했다. 揚子江이 발원하는 곳에 列山이 있었던 것이다. 후대에 揚子江 상류만 따로 떼어내 黃河(金沙江)니, 遼水(岷江)니 했지만, 이 당시에는 揚子江 상류까지 포함해서 列水라 한 것이다. 金沙江이 岷江보다 더 크니까, 列山은 金沙江이 발원하는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南‘夷’라 하고, ‘夷’人이라 한 것으로 보아 揚子江 이남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분명하다. 다만 나머지 夷는 1世 檀君王儉을 ”마음 깊이 복종하여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제왕으로 모셨(完服王化)“는데 반해 南夷는 아직 檀君王儉의 다스림에 복종치 않았던 것이다.

列水 남쪽의 南夷는 朝鮮 개국 10년�� 만에 亂을 일으킨 南夷가 아니다. 이 당시는 檀君의 교화가 남쪽으로 淮垈까지만 미쳤기 때문에 南夷는 “갑비고차(甲比古次) 남쪽의 이인(夷人)들(南夷之患卽甲比古次以南夷人也 揆園史話 檀君紀)”이었다. 즉 揚子江 이북, 丹江 이남의 사람들을 南夷라 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민족의식을 가졌던가. 高麗 시대니, 近代에 들어와서니 분분하지만, 최소한 1世�� 檀君王儉 때 부터였다. 배달시대에도 땅을 나누어 수많은 제후국을 만들어내고 그 종족들을 九桓이라 불렀지만, 慈烏支 한웅이 수행한 무수한 전쟁에서 보듯 하나의 민족 이라는 개념은 형성되지 않았다. 1世�� 檀君王儉은 朝鮮의 영토를 분할해 제후국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하나같이 天孫民族이라 자부하며 辰韓을 중심으로 뭉쳤던 것이다. 三國이 서로를 정복하려 한 것도 다 同族이라는 인식에서였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민족이라는 개념은 산업혁명 이후 이거나 열강이 식민정책에 물불을 가리지 않을 싯점에 서양사학자들의 주장에 의한 민족의 개념이 성립 되었다고 하지만 앞으로의 글에서 구체적으로 풀이 하겠지만 西洋은 高麗의 멸망 이전 까지는 미개의 극을 달렸다. 高麗의 멸망으로 西洋은 東洋을 문화적, 과학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北海에 나라가 있는데 朝鮮이라 이름한다. 하늘이 그 사람들을 길렀고 물가에 살면서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 山海經).”�� 北海는 현 黃河를 가리킨다. 물가는 물론 강도 포함되지만, 辰韓이 黃海, 渤海灣, 東海를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檀君이 하늘에 제사를 지냄은 단지 두악(頭嶽)에서 만이 아니었다. 북으로 사냥을 나가면 곧 太白에서 제사를 지내고, 남으로 순행할 때는 곧 頭嶽에서 제사를 지냈다. 甲比古次는 바닷가에 있어서 배를 통하기에 용이하므로 남쪽을 순행할 때는 반드시 들러 제단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檀君祭天 非但頭嶽也 北狩則祭太白 南巡則祭頭嶽也 而甲比古次傍在海濱 通航容易 則南巡之際必致祭於壇所也 揆園史話 檀君紀).”

薩水는 辰韓의 남해안이다. 바닷가는 朝鮮의 남해안 丹江을 말한다. 甲比古次는 薩水(丹江) 北岸에 있었다. 남쪽을 순행할 때는 반드시 들러 제사지내던 甲比古次에 관한 기사가 檀君世紀에도 나온다. “檀帝께서 나라 안을 돌아 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海城에 이르러 父老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노래와 춤을 추었다(帝巡狩國中南至海城大會父老祭天歌舞 檀君世紀).” 21世�� 檀君 蘇台 때의 기록이다. 甲比古次(山)는 海城 일대에 있었던 것이다.

歷代 檀君은 왜 남쪽을 순행 했을까. 중국 남부에 제후국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薩水가 辰韓의 남해안 이었던 것이다.

티벳고원은 중국 대륙의 축소판이다. 우리나라 땅인 남부를 제외하면, 완전히 똑같아진다. 티벳고원은 큰 강의 상류가 모여 있는 지역이다. 5 대강 雅魯藏布江, 怒江, 瀾滄江, 金沙江, 岷江은 모두 큰 강의 상류다. 雅魯藏布江은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江, 怒江은 살윈(Salween)江, 瀾滄江은 메콩강(Mekong), 金沙江과 岷江은 揚子江의 상류다.

雅魯藏布江은 예전 中土의 珠江(주장강), 라사江은 紅水河(홍수이강)였다. 怒江은 長江, 瀾滄江은 淮水, 金沙江은 黃河, 岷江은 遼水였다. 怒江(長江)과 金沙江(黃河) 발원지에는 호수도 산재해 있다.

원 中土는 강 상류에 호수가 몰려 있는데 반해, 확대된 中土에는 강 하류에 호수가 모여 있다. 티벳고원 남부는 우리나라 영토니까, 호수 위치까지 절묘한 셈이다. 중국 동부에는 호수가 揚子江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모여 있는데, 中土에는 4 대강 너머에 있다.

티벳고원에 있던 珠江(雅魯藏布江), 長江(怒江), 淮水(瀾滄江), 黃河(金沙江)는 중국 대륙으로 진출했다. 遼水(岷江)는 明 때 桑乾河로 옮겨졌다가, 淸 때 난하(灤河)로, 大凌河로, 다시 현 遼水로 옮기자, 中土는 티벳고원 북부에서 중국 대륙에다 동북아 대륙을 합친 넓이로 팽창했다.

中土는 초기 우주가 빅뱅(big bang)을 일으키듯, 급팽창했던 것이다.

태백산, 백산, 신시, 청구

4) 신시씨의 영토 끝 백산은
중국 대륙에 있었다

平壤(西京)은 본래 신인왕검(神人王儉)이 자리잡은 곳이다(平壤者 本神人王儉之宅也 揆園史話 檀君紀).

김부식(金富軾)이 했다는 말이다. 高麗의 西京은 大震國의 西京이다. 忽汗城(平壤)은 大震國의 上京이었다. 揆園史話조차 상경(上京) 忽汗城이라 했다. 忽汗城은 고작 西京이 아니라, 최고의 서울이었던 것이다. 平壤은 高麗의 西京이 아니라 開京이었다. 文皇帝 때 忽汗城에서 上京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날조사는 결국 遷都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平壤을 회복한 太祖 高皇帝 때부터 大震國이 멸망할 때까지 내내 忽汗城이 수도였다.

大震國의 西京은 鴨綠府에 있었다(西京鴨綠府 太白逸史). 唐과의 관계에서 ‘압록조공도(鴨綠朝貢道)’의 중심 도성이 西京이라 했다. 그렇다면 大震國의 西京은 현 중경(重慶)이다.

大震國의 나머지 5 京은 나중에 찾도록 하고, 中京은 成都였다. 成都가 唐에서 더 가까운데, 어째서 成都가 鴨綠朝貢道의 중심 도성 西京이 아닌가. 그것은 唐의 사신이 물길을 따라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않아서 육로보다 수로를 더 선호했다. 唐은 金沙江에서 揚子江으로 들어와 현 重慶에 이르러 大震國에 조공을 바쳤던 것이다.

날조사에 의하면, 唐이 韓半島 鴨綠江까지 와서 조공을 받아갔다고 주장하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朝貢을 품위 있게 앉아서 받지, 구차하게 찾아와서 받아가나. 장터 양아치도 아니고, 長安에서 東鴨綠江 까지의 거리가 대체 얼마인가. 唐이 티벳고원 북부의 소국이니까, 朝貢을 하러 西鴨綠 강변의 西京(重慶)까지 온 것이다. 唐이 西鴨綠 강변의 西京에 와서 조공을 받아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大震國의 西京이 鴨綠朝貢道라 함은 唐이 조공을 바쳤다는 의미지, 조공을 받았다는 의미가 절대 될 수 없다. 날조사 에서라도 唐이 조공을 받았다면 黃河朝貢道나 渭水朝貢道여야 했다.

神人王儉이 神市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으로 정한 阿斯達은 현재의 重慶이었던 것이다. 神人王儉을 말했다면 金富軾이 한단사(桓檀史)를 부정 했다는 말조차 성립하지 않는다. 실상 高麗 시대까지 朝鮮 이래의 피지배종족들도 모두 한단사(桓檀史)를 믿었는데, 金富軾이 한단사를 부정 했다는 것은 모순이다. 李氏朝鮮이 한단사를 수거, 분서하면서 모든 책임을 金富軾에게 전가한 것이다.

揆園史話의 거짓말

모든 고을의 지세를 살피고는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牛首河)의 벌판에 도읍을 세워 임금성(壬儉城)이라 했다(相地於諸州 乃建都于太白山西南牛首河之原 曰壬儉城 揆園史話 檀君紀)

첫 도읍이 현 重慶이니까 牛首河는 嘉陵江으로 九黎河 이전에 불리던 이름이다. 牛首河의 벌판은 四川盆地다. 太白山에서 현 重慶은 서남쪽에 해당한다.1)

우수하(牛首河)의 물가에 거처한 지 10년�� 만에 白山의 남쪽 패수(浿水)의 북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평양(平壤)이라 하니 곧 두 번째의 임금성(壬儉城)이다(居牛首河畔十年乃遷都於白山之南浿水之北 曰平壤 卽第二壬儉城也 揆園史話 檀君紀)

燕나라 노관(盧綰)이 침입했을 때 까지만 해도 浿水는 타강(沱江)이었다. 다음에 “대저 지금의 속말(涑沫)의 땅은 바람 기운에 냉기가 돌고 토양이 척박하여 비록 들판의 기세는 광활하게 트였으나 농사를 짓는 이로움은 남쪽 땅만 못하였다(盖 今涑沫之地 風氣凄冷 土味勁寒 雖野勢通豁 而耕農之利不如南土 揆園史話 檀君紀)”고 하였다. 첫 번째 王儉城이 嘉陵江에 있었으니까, 남쪽 땅은 四川盆地다. 四川盆地는 항상 흐리고 습하다. 아열대 습윤기후(濕潤氣候)로 겨울은 온난하고, 여름은 덥고, 가을에는 비와 안개가 많고, 일조가 적다. 과거에는 벼농사를 지었다.

沱江 북쪽의 四川省 서부는 고원 기후에 속한다. 겨울이 길고 여름이 없으며 일조가 많다. 연 강수량은 600~800mm다. 토양이 척박한 것은 사실이나, 냉기를 넘어 추위가 혹독했다. 그래서 李成桂가 그 땅을 공략하면서 “추위와 기근으로 더 오래 머무르지 못해 부근 주민들에게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回軍”했다고 날조했던 것이다.

모든 고을의 지세를 살피고는 太白山 서남쪽 牛首河의 벌판에 도읍을 세워 王儉城이라 했다가 갑자기 춥고 건조한 白山의 남쪽 浿水의 북쪽으로 도읍을 옮길 이유가 없다. 神人王儉은 白山으로 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그 땅은 아무리 비가 많이 온다 한들 홍수가 날 땅이 아니다. 무엇보다 白山의 남쪽 浿水의 북쪽은 동아시아를 다스리는 통치자의 궁성이 될 만한 땅이 절대 아니다. 慈烏支 한웅조차 淮垈와 涿鹿이 아니라, 長安으로 추정되는 三淸宮에서 거처했다.

나라를 다스린 지 30 여년 만에 홍수를 만났는데, 엄청난 파도는 하늘까지 치솟아 요만(遼滿)의 들녘을 품으며 올라서니 패수(浿水)의 물은 불어 넘치고 평양(平壤)은 물에 잠겨 버렸다(御國三十餘年 正値洪水 浩波溜天懷襄遼滿之時野浿水漲溢平壤沈潛 揆園史話 檀君紀).

이 당시의 浿水는 沱江이었다. 浿水의 물이 아무리 불어 넘친다 한들 浿水 너머의 白山이 물에 잠기겠는가, 長安이 물에 잠기겠는가. 神人王儉이 처음으로 도읍한 현 重慶도 浿水 에서는 상당한 거리다. 그러나 홍수로 沱江이 넘쳤다 함은 揚子江이 넘쳤다는 것이고, 浿水(沱江)만이 아니라, 牛首河(嘉陵江)도 넘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揚子江과 嘉陵江의 합류점에 위치한 첫 번째 王儉城이 물에 잠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淸平이 말하기를 ‘속말수(粟末水)의 북쪽에’ 渤海 中京 현덕부(顯德府)의 땅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檀君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임금성(壬儉城)으로 곧 平壤이다(淸平云粟末水之陽 有渤海中京顯德府地 此乃檀君始都處 故壬儉城卽平壤也)”고 한 이다.

이와 반대되는 문장이 “모든 고을의 지세를 살피고는 太白山 서남쪽 牛首河의 벌판에 도읍을 세워 임금성(壬儉城)이라 하니, 지금의 滿洲 吉林 땅에 소밀성(蘇密城)이 있어 ‘속말강(涑沫江)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땅이다. 涑沫江은 또한 소밀하(蘇密河) 라고도 일컬어지며 곧 옛날의 속말수(粟末水)이다(相地於諸州 乃建都于太白山西南牛首河之原 曰壬儉城 今 滿洲吉林之地 有蘇密城 在於涑沫江之南 此卽其地也 涑沫江 亦稱蘇密河 乃古之粟末水也 揆園史話 檀君紀).”�� 전자는 朝鮮의 첫 도읍지가 粟末水의 북쪽인 반면, 후자는 粟末水의 남쪽이라는 소리다.

大震國의 中京(成都)은 浿水(沱江)에서 떨어져 있다. 中京은 강가에 있지도 않다. 涑沫은 濊貊族을 몰아넣은 땅으로 中京에서 500km나 고위도에 위치한다. 첫 번째 王儉城도 涑沫의 땅에, 두 번째 王儉城도 涑沫 땅의 남쪽경계선인 白山의 남쪽에, 모조리 涑沫에 갖다 붙이고 있다. 자신의 거짓말을 정당화 하고자 진역유기(震域遺記)의 저자 淸平(李茗)을 물귀신처럼 끌어들인 것이다. 震域遺記가 아니라, 대변경(大辯經)을 보고 날조 했으면서도.

檀君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王儉城도 平壤이고, 두 번째의 王儉城도 平壤이다? 그러면서도 “檀君의 두 번째 도읍인 平壤은 鴨水(鴨綠江)의 북쪽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則檀君第二之平壤 當在於鴨水之北)”고 했다. 첫 번째 도읍도 平壤 이었다면, 이렇게 써야 한다. “두 번째 平壤은 鴨綠江의 북쪽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첫 번째 王儉城은 平壤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천왕(東川王)이 천도한 해에 이르러서야 겨우 平壤은 본래 神人王儉이 자리잡은 곳이다 혹은 왕이 왕검에 도읍을 하였다 등의 글귀가 있을 뿐이다(至於東川遷都之年而僅有平壤者 本神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儉等自字 揆園史話 檀君紀).”�� 東川帝가 천도한 곳은 海城이다. 海城은 神人王儉이 도읍한 곳이 아니다. 海城은 南平壤이다. 첫 번째 平壤인 長安을 기준으로 보고 정한 것이다. 현 重慶도 平壤이라면 重慶을 최소한 西平壤이라고 해야 했다. 그런데 한단고기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다. 平壤은 두 곳 뿐이었다.

조선시대의 지명

영고탑은 신인왕검이 처음으로 도읍(아사달)로 삼은 곳이다. 그 당시는 그냥 아사달이었다. 당장경으로 천도하고 나서, 당장경이 새로운 아사달이 되자, 옛 아사달을 영고탑이라 부른 것이다.

홍수가 나자, “네 아들을 보내 마땅한 땅을 두루 살피게 하고는 阿斯達 아래 당장(唐藏)의 들녘을 차지하여 거처케 하였다.” 장당경(藏唐京)은 당장경(唐藏京)이라고도 하는데(檀奇古史), 唐藏의 들녘에서 따온 지명으로 唐藏에 있는 서울이라는 뜻이다. 唐藏을 揆園史話에서는 唐莊이라 하지만, 檀奇古史에서는 唐藏이라 표기하고 있다. 한단고기에서도 藏으로 표기하고 있다. 藏과 莊은 같은 뜻이거나 날조일 가능성도 있다.

唐藏의 들녘은 渭水盆地이고, 요만(遼滿)의 들녘은 四川盆地이다. 阿斯達 아래 唐藏의 들녘이라 했다. 長安은 渭水盆地 내에서 솟아오른 지대이다. 藏唐京을 阿斯達 이라고 이미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阿斯達은 서울이라는 의미이다. 만일 홍수가 현 黃河에서 일어났다면, 渭水盆地가 잠겼을 것이고, 神人王儉은 네 아들을 唐藏의 들녘에 거처케 할 수가 없다.

神人王儉은 朝鮮 개국 10년�� 째, 白山이 아니라, 藏唐의 들녘으로 천도했던 것이다. 渭水盆地가 있는 陝西省의 기후는 뚜렷한 대륙성 계절풍 기후로 연평균 기온은 11.6℃, 연평균 강수량은 653mm이다. 즉 바람 기운에 냉기가 돌고 토양이 척박한 땅이다. 날조 이전의 원래 기사는 아래와 같다.

대저 당장(唐藏)의 들녘은 바람 기운에 냉기가 돌고 토양이 척박하여 비록 들판의 기세는 광활하게 트였으나 농사를 짓는 이로움은 남쪽 땅만 못하였다.

첫 번째 王儉城은 물에 잠겼지만, 홍수가 날 당시의 王儉城은 무사했다. “나라를 다스린지 30 여년 만에 홍수를 만났는데, 엄청난 파도는 하늘까지 치솟아 요만(遼滿)의 들녘을 품으며 올라서니 浿水의 물은 불어 넘치고 平壤은 물에 잠겨 버렸다(御國三十餘年 正値洪水 浩波溜天懷襄遼滿之時野浿水漲溢平壤沈潛 揆園史話 檀君紀).”��는 원래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라를 다스린지 30 여년 만에 홍수를 만났는데, 엄청난 파도는 하늘까지 치솟아 

요만(遼滿)의 들녘을 품으며 올라서니 우수하(牛首河)의 물은 불어 넘치고 처음으로 도읍한 아사달(阿斯達)은 물에 잠겨 버렸다.

대저 소밀(蘇密)·속말(涑沫)·속말(粟末) 등은 모두 우수(牛首)의 의미와 서로 가까운데, (그 말은) 대대로 그릇되게 전해 졌지만 오히려 그 뜻을 잃지 않았으니, 이는 聖人이 자리잡은 곳에 神의 조화가 두루 미쳐 만세가 지나도록 그 운치가 끊어지지 않았음이 어찌 아니겠는가(盖蘇密涑沫粟末 皆與牛首之意相近 歷世傳訛 猶不失其意 豈聖人所宅 神化洽被 經萬載而其韻不絶者耶 揆園史話 檀君紀).”�� 牛首는 四川盆地이고, 涑末은 柴達木盆地이다. 牛首는 神人王儉이 도읍한 곳이고, 涑末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섞이지 말라고 속민 濊貊族을 몰아넣은 곳이다. 의미가 절대 서로 가까울 수 없다. 소밀(蘇密)·속말(涑沫)·속말(粟末)의 뜻은 하나같이 시덥잖다. 차라리 그 뜻까지 잃었다고 해야 했을 것을. 한단 시대, 하늘에 제사지내던 蘇塗(소도)는 길을 구한다(天神의 뜻을 묻는다)는 뜻이다.

“牛首州에 또 다시 앙골(鞅骨)이라는 자가 있어 그의 동생 장골(長骨)과 함께 난을 일으키니 서쪽 지방의 백성들이 모두 그에게 괴롭힘을 당하였다(牛首州復有鞅骨者 與其弟長骨作亂 西鄙之民 皆被其虐 揆園史話 檀君紀).”�� 牛首州는 牛首河가 있는 四川盆地를 포함하는 지명이다. 牛首가 柴達木盆地가 될 수 없는 것이 柴達木盆地의 서쪽은 中土이다.

“지금의 春川 淸平山 남쪽 10 여 리에 소양(昭陽)과 신연(新淵)의 두 江이 합쳐지는 어귀에 우두대촌(牛頭大村)이 있으니, 산 속에 드넓게 펼쳐져 있으면서 강의 흐름을 안고 도는 이곳이 바로 맥국(貊國)의 옛 도읍지이다. 貊國 역시 檀君 때에 나왔기에 도읍을세우며 그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今春川淸平山南十餘里昭陽新淵兩江合襟之處 有牛頭大村 山中展闊而江流抱回是爲貊國故都貊國亦出於檀氏之世則建都襲名必有之理也 揆園史話 檀君紀)”는 韓半島를 우리나라 강역으로 축소한 날조다.

동아시아의 현대지도

貊은 藍侯의 백성이라더니만, 이제는 貊國으로 격상된 것이다. 12世�� 檀君 阿漢이 乙卯 29년�� 맥성(貊城)의 욕살(褥薩)인 돌개(突蓋)를 汗으로 封했으니까(乙卯二十九年命貊城褥薩突蓋封爲汗 檀君世紀), 貊國이 있긴 했었다. 中土 서쪽에. 高句麗 이래로 濊貊族이 거주한 柴達木은 盆地 지형으로 강이 모두 盆地 중앙으로 모인다. 즉 柴達木盆地는 “산 속에 드넓게 펼쳐져 있으면서 강의 흐름을 안고 도는(山中展闊而江流抱回)” 곳이다.

柴達木盆地의 환경

濊貊은 高句麗 이래로 우리나라 屬民이다. 그런 땅에 도읍이 있을 리 만무하다. 796년�� 4월��에 작성한 日本人 在唐留學僧 영충(永忠)의 편지 에서도 드러난다.

“��2000 리다. 州, 현(縣), 관(管), 역(驛)들이 없고 곳곳에 村里(마을)들이 있는데 다 말갈인(靺鞨人)들의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고 土人(高句麗人)은 적다. 다 토인들로써 촌장을 삼는데 큰 촌의 촌장은 도독(都督)이라고 하고 다음 가는 촌의 촌장은 자사(刺使)라고 하며, 그 이하는 다 백성들이 수령(首領)이라고 부른다. 토지는 지극히 추워 논농사(水田)에는 마땅하지 않다. 자못 풍속에 글을 안다(二千里無州縣管驛處處有村理皆靺鞨部落其百姓者靺鞨多土人少皆以土人爲村長大村日都督次日刺使其下百姓皆日首領土地極寒不宜水田俗頗知書 類聚國史).”��

大震國 전체가 아니라, 柴達木盆地에 대한 설명이다. 柴達木盆地는 연평균 기온이 -5~8°C, 1월��에는 -18.2~ -7°C로 “지극히 추운” 곳이다. 靺鞨을 감독하는 관리 말고는 高句麗人이 전혀 없었다. 靺鞨이 거주하는 땅이니까, 州, 縣, 管, 驛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高句麗 영토에서 百濟를 공격하기 위해 濊貊族을 거주시킬 장소는 柴達木盆地 밖에 없었다. 한낱 미개한 濊貊族을 高句麗의 중심지에 거주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高句麗가 濊貊族을 柴達木盆地에 거주케 한 탓으로 大震國 및 高麗도 濊貊族이 柴達木盆地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고친 것이라면 高句麗人을 土人이라 바꾼 정도. 우리나라 사람은 濊貊族과 섞여 살지 않았다. 감시 감독자와 그 가족을 빼면. 강조하지만, 역사날조를 해도 순수창작은 절대 안한다. 이것저것 바꾸느니, 大震國 영토의 오지 한 곳을 大震國으로 날조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옛 숙신(肅愼)의 땅에 거주하였는데, 백산(白山)이라 불리는 산이 있었으니 곧 장백산(長白山)으로서 금(金)나라가 일어난 곳이다(黑水末曷居故肅愼地

춘천 우두산에 있는 조양루와 그 앞에 있는 소슬묘(?)

有山曰白山 蓋長白山金國之所起焉 金史).

黑水에 살았다고 黑水靺鞨이라 했다. 白山은 沱江 상류 너머에 있고, 黑水는 동북아 끝에 있다. 金汗은 黑水靺鞨(生女眞)이 아니라 숙여진(熟女眞)이세운 나라다.

옛 肅愼의 땅에 거주 하였다. 高麗를 韓半島의 나라로 날조하자, 高麗 이전의 우리나라 강역은 상실한 셈이 되었다. 靺鞨이 韓半島 이북에 살았다는 날조가 가능해진 것이다. 東鴨綠江은 黑水가 아니니까, 實史 에서는 黑水가 黑水靺鞨 거주지의 남단 이었으나, 날조사에는 黑水가 黑水靺鞨 거주지의 북단인 셈이다. 그래서 이 땅의 사학자들은 東北平原에서 黑水를 찾아 헤메고 있다.

“金나라가 일어난 곳(金國之所起)”이라 거창하게 썼지만, 白山 너머 柴達木盆地는 中土에서 기어나와 이리저리 떠도는 熟女眞을 몰아넣은 땅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을 세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동생 ‘스사노 오노미코도(素盞鳴尊)’가 한반도의 ‘소시모리’에 건너갔다가 다시 출운국(出雲國)으로 귀환하였는데, 한반도의 ‘소시모리’는 다름 아닌 이 곳 우두산 소슬묘다.’라고 날조되어 있다.

우수주(牛首州). 우두주(牛頭州 : 날조사에 의하면 韓半島의 春川이라는 곳이다), 우두산(牛頭山). 스사노오 노미코도(素盞鳴尊 : 天照大神의 동생)는 新羅의 牛頭州에서 비롯된 명칭이 아니다. 牛首는 新羅가 일어난 지역과는 무관한 지명이다. 牛首河, 牛首川은 嘉陵江이고, 牛首州는 牛首川을 포함한 四川盆地 이니까, 우수홀(牛首忽)은 현 成都로 추정된다. 百濟 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 春川에 牛頭山이 있다고 날조 했으니까, 新羅 땅이어야 했고, 牛頭에서 비롯된 스사노오 노미코도(素盞鳴尊)는 新羅神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나라를 다스린지 40 여년 만에 설유(稧兪)의 난이 있었다 … 곧 부여(夫餘)로 하여금 안팎의 모든 병사를 모아 그를 토벌하여 평정케 하였다. 이에 부여에게 북방의 땅을 더하여 봉하고 우수홀(牛首忽), 곧 먼저 평양에 자리잡게 하였으며, 부루(夫婁)로 하여금 임금성(壬儉城)에 거처하게 하고, 부소(夫蘇)에게는 낙랑홀(樂浪忽)을 다스리게 하고, 부우(夫虞)는 당장경(唐莊京)을 살펴보게 하였으며, 고시씨(高矢氏)는 그 봉토를 고쳐 남쪽의 땅에 봉하였다(御國四十餘載 而有稧兪之亂 … 卽使夫餘會集中外之兵討平之 乃益封夫餘北方之地 使宅牛首忽卽先平壤 使夫婁居<王>壬儉城 令夫蘇修樂浪忽 夫虞監唐莊京 更封高矢氏於南方之地 揆園史話 檀君紀).

설유(稧兪)의 난을 평정하고 나서, 얼마 전에 확보한 揚子江 이남을 합쳐 제후의 봉토를 조정했다. 원래 夫蘇(扶蘇)에게는 九黎를, 夫虞(扶虞)에게는 辰番, 夫餘(扶餘)에게는 夫餘를 봉토로 주었다. 九黎와 辰番, 夫餘는 나라의 서쪽 즉 티벳고원 남부에 있었다. 嘉陵江은 牛首河에서 九黎河, 西鴨綠江으로 변천했다.

夫餘에게 북방의 땅을 더해 봉했다는 것은 거짓이다. 夫餘의 북방은 이미 蚩尤氏의 후손에게 주고 藍國이라 했다. 夫蘇에게는 낙랑홀(樂浪忽)을 다스리게 하고, 夫虞는 당장경(唐莊京)을 살펴보게 했으니까, 티벳고원 남부는 전부 夫餘의 봉토가 되었다. 夫餘에게는 서방의 땅을 더해 주었던 것이다.

“첫해 9월에 가운데 아우 扶餘를 망구왕(茫球王=遼西)으로 삼고, 셋째아우 扶虞를 동해왕(東海王=東海邊)으로 삼으니 三韓은 東海王의 후세이다.” 檀奇古史는 대야발(大野勃)의 이름을 빌려 한단사(桓檀史)를 철저하게 날조해서 쓴 책이다. 扶餘가 遼西를 다스렸다는 대목 하나만은 사실이지만, 檀奇古史는 東아시아를 우리나라 강역으로 해서 쓴 책이 아니다.

丘乙 “15년��에 監星官 황보덕(皇甫德)이 임금께 아뢰기를 “제가 천문을 관측한 지 50년��이 되므로 천체의 대강을 추측 하였습니다. 천체 중에 제일 큰 것은 북극성 같은 항성입니다. 그 다음은 태양의 종류이며, 다음은 水星 金星 지구성(地球星) 火星 木星 土星 天明星 海明隱星 明星 같은 行星이 있어 太陽을 중추(中樞)로 삼아 회전하니, 우리가 살고 있는 地球도 역시 太陽系의 하나인 行星입니다. 해는 땅의 온도를 조화하여 만물의 생장을 돕는 것이며, 지구의 외각에는 붉은 막이 포위하고 있어, 지면의 각종 기체를 보전함으로써 기체가 발산하지 못합니다.” 천명성(天明星)은 天王星이고, 해명은성(海明隱星)은 海王星, 冥星은 冥王星이다. 冥王星은 1930년�� 1월��에 발견 되었다. 요컨대 檀奇古史는 1930년�� 이후에 쓴 책이거나 1930년�� 이후에도 가필, 윤색한 책이다. 檀奇古史는 1949년��에 출간했다.

한민족의 이주경로 (녹색은세부 진출경로)

檀奇古史는 우리나라 땅이 韓半島로 축소된 이후에 쓴 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檀奇古史의 遼西는 현 遼水 以西이다. 李氏朝鮮이 쪼그라들자, 우리나라 강역도 축소되어 扶虞에게 東海邊을 봉토로 주자, 韓半島에 쑤셔 넣은 三韓의 시조가 되었던 것이다.

扶婁는 2世�� 檀君으로 이 당시 太子였다. 太子가 있을 곳은 檀君이 계시는 곳이다. 마치 唐藏京이 아닌 양 썼지만, 扶婁가 거처한 王儉城은 첫 번째 阿斯達이 아니라, 唐藏京이었던 것이다. 扶虞는 唐藏京(藏唐京)을 살펴보게 하였다. 이 말은 唐藏京의 수비를 맡겼다는 뜻이다. 봉토를 扶餘에게 준 扶蘇에게는 高矢氏의 봉토인 樂浪忽을 다스리게 하고, 高矢氏에게는 揚子江 이남을 주었던 것이다.

“속말(涑末)의 물은 북으로 흘러 혼동강(混沌江)으로 들어가기에 남쪽으로의 교통에는 자연히 많은 불편이 있었다.” 涑末은 柴達木盆地이니까, 涑末水는 柴達木盆地 안에 있는 강이다. 混沌江은 柴達木盆地 아래를 지나는 黃河다. 柴達木盆地에 강은 많지만, 북으로 흘러 黃河로 들어가는 강은 없다.

“속말부(粟末部 : 涑末部)가 가장 남쪽에 살고 있는데, 太白山(徒太山)과 맞닥뜨린 곳에서 高句麗와 더불어 접해 있다(粟末部居最南抵太白山 亦曰徒太山 與高麗接 唐書, 揆園史話).”�� 韓半島를 염두에 둔 날조기사다. 太白山은 長安 서쪽에 있다. 濊貊族의 주거지는 白山(白頭山)과 맞닥뜨린 곳에서 高麗와 더불어 접해 있었다. 粟末部(涑末部)는 柴達木盆地 남부이다.

신시씨(神市氏)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미 白頭山에 있으면서 점차 서남쪽으로 옮기고, 다시 浿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삼씨(三氏)의 겨레들은 각자 더욱더 사방으로 옮겨갔다 [神市氏之降 旣在白頭於山(於白頭山) 乃漸徒(徙)西南復沿浿水而南來 三氏之族 又各四遷也 揆園史話 檀君紀].

우리나라는 神市氏가 남하하기 전에 살던 한국(桓國) 땅(시베리아)으로 도로 진출했다.

현 白頭山은 원래 太白山이었다. 그걸 李氏朝鮮이 역사날조 차원에서 白頭山으로 고쳤다. 원 白頭山 즉 白山 북쪽에 濊貊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영토를 축소하고 濊貊族을 우리민족으로 둔갑 시키자면 濊貊族이 韓半島 이북에 산 것으로 날조해야 한다. 우리나라를 韓半島로 축소해 보라. “白頭山에 있으면서 서남쪽으로 옮겨”봐야, 鴨綠江 하류에 살았다는 것밖에 더 되나. 그러나 神市氏 당대에 이미 우리나라의 영토는 黑水까지(정확하게는 黑水부터)였다.

개천 당시는 神市가 있는 동북아가 중심지 였다가, 慈烏支 한웅 때 중국 대륙으로 중심지를 옮겼으니까, 서남쪽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한인 뒤에) 한웅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後桓雄氏繼興奉天神之詔降于白山黑水之間 三聖紀全 上篇).

白山은 타강(沱江) 상류 너머에 있었다. 黑水는 黑龍江 상류다. 黑水는 

 

한웅씨(桓雄氏)가 개척한 영토의 시작이고, 白山은 영토의 끝이다. 그래서 한웅氏가 黑水와 白山 사이에 자리 잡았다고 했다. 白山과 黑水 사이에 자리잡은 한웅氏는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天坪)에 마련하고 그곳을 靑邱로 정했다.

대문구 문명권

천평(天坪). 하늘의 들이라는 뜻이다. 그냥 들판인데, 우리나라가 천손민족이다 보니까, 天자를 넣어 부른 것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靑邱가 韓半島라고 주장 하지만, 韓半島에 天坪이라 부를 만한 장소가 있는가. 韓半島는 육지의 75 %가 산으로 이루어진 산악지대이다.

黑水와 白山 사이에 넓은 벌판은 두 곳으로 黃河 하류와 滿州다. “배달 한웅은 천하를 평정하여 차지한 분의 이름이다. 그 도읍한 곳을 神市라고 한다. 뒤에 靑邱國으로 옮겨 18世�� 1,565년��을 누렸다(神市之季有治尤天王恢拓靑邱傳十八世歷一千五百六十五年 三聖紀全 上篇)”에서 神市가 靑邱國 내의 지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靑邱는 黃河 하류를 가리키는 말이다(중심지를 神市에서 靑邱로 옮겼으니까, 배달시대를 神市時代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배달은 神市時代와 靑邱時代로 구분된다).

長壽弘濟好太烈帝는 靑邱 즉 黃河(漢水) 하류를 절반가량 차지했던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百濟가 차지했다. 그래서 百濟 영토가 黃山江(揚子江) 유역까지 뻗어 있었고, 황산벌 전투가 가능했던 것이다.

1977년�� 山東半島에서 발견된 5785년�� 전의 대문구 문명권(大汶口文明圈)은 中國하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유적이다. 우리나라는 배달 개천 당시부터 이미 黃河 하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少昊가 그 땅의 통치자라면 배달의 靑邱國 혹은 靑邱國의 일부를 다스리는 제후라는 뜻이다. 少昊는 배달의 농업을 관장한 高矢氏의 傍系다. 5800년�� 전의 문자는 鹿圖文이다.

“神市 말기에 蚩尤天王이 있어 靑邱를 개척하여 넓혔다(神市之季有治尤天王恢拓靑邱 三聖紀全 上篇).” 慈烏支 한웅이 揚子江 이남을 개척 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揚子江 하류 이남에 사는 사람들도 夷(南夷)라 한 것으로 보아, 배달의 영토다.

“복희(伏羲)는 서쪽 변방에 봉토를 받더니 직에 있으면서 정성을 다 하였다(伏羲旣受封於西鄙位職盡誠 神市本紀).”�� 우리나라 땅이니까, 봉토로 준 것이다. 티벳고원도 우리나라 땅인데, 揚子江 이남이 우리나라 땅이 아니겠는가. 靑邱를 남쪽으로도 개척했을 가능성이 높다. 쓸모없는 티벳고원도 재정복했거늘, 揚子江 이남을 지나쳤겠는가.

朝鮮은 우리나라 영토 일부에서 개국해 神人王儉 당대에 우리나라 전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夫餘가 南夷를 평정하니 열수(洌水)의 남쪽은 완전히 천왕의 교화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이런 연유로 靑丘(靑邱)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가서 살게 되었고, 홍수가 완전히 다스려진 뒤로는 남쪽으로 넘어가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夫餘之平南夷也 洌水以南 完服王化 以故靑丘之民 得漸遷居 及洪水旣平南渡者益多 揆園史話 檀君紀).”��

“한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太白山 꼭대기의 神檀樹 밑에 처음 내려오시니 이곳을 神市라 한다(雄率徙三千初降于太白山神檀樹下謂之神市 神市本紀).” 太白山이 있는 神市는 동북아에 있었다. “太白山은 북쪽을 달리는 산으로 높게 비서갑(斐西岬)의 땅에 우뚝 서 있다(太白山北走屹屹然立於斐西岬 太白逸史 三韓管境本紀).”�� 岬 즉 곶은 바다로 뾰족하게 내민 땅이다. 첫 번째 太白山 즉 韓半島의 白頭山에 대한 기술이다. 강을 바다라 한 것을 보면, 李氏朝鮮 이전에 쓴 글을 인용했다. 慈烏支 한웅 이후 중심지를 중국 대륙으로 옮기면서 기존의 太白山은 너무 머니까, 새로 太白山을 정해야 했다.

檀君(神人王儉)은 서쪽으로 임금성(壬儉城)에 이르러 모든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제후들을 크게 모아 명하여 다시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을 천하에 널리 펴게 하였다. 이에 북쪽으로 순행하여 太白山의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의 산악과 하천의 신을 봉하니 무릇 3 천 곳 남짓 되었다. 우수홀(牛首忽)을 지나 숙신홀(肅愼忽)에 이르러 북동의 제후들을 모아 명령하기를, 신지씨(神誌氏)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숙사달(夙沙達)에 사당을 세웠다(檀君西至壬儉城 按撫庶民 大會諸侯令復申天下農桑之政 乃北巡而祭天于太白之麓 封天下山嶽河川之神 凡三千餘 歷牛首忽 而至肅愼忽 會北東諸侯 令祭神誌氏之靈 遂立廟于夙沙達 揆園史話 檀君紀).

藏唐京에서 보면 첫 번째 王儉城 이었던 현 重慶이 서남쪽에 있다. 서남쪽을 서쪽으로 고친 것이다. 북쪽으로 순행하여 이른 太白山은 동북아에 있는 첫 번째 太白山을 가리킨다. 북동쪽을 북쪽으로 고친 것이다. 두 번째 太白山은 藏唐京의 서쪽에 있다. 牛首忽은 현 成都로 서남쪽이니까, “牛首忽을 지나 肅愼忽에 이르렀다”는 것도 거짓이다. 이미 동북아의 太白山에 와서 하늘에 제사까지 지냈다.

“檀君의 두 번째 도읍인 平壤은 鴨綠江의 북쪽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第二之平壤 當在於鴨水之北 揆園史話 檀君紀).”�� 두 번째 王儉城에서 첫 번째 王儉城이 서쪽에 있다고 해놓고, 두 번째 王儉城이 鴨綠江의 북쪽에 있으면 첫 번째 王儉城도 鴨綠江의 이북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李氏朝鮮은 현 平壤에 檀君廟[揆園史話에도 “世宗이 檀君廟를 平壤에 설치했다(我世宗 設檀君廟於平壤 檀君紀)]을 만들고 檀君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곳이라고 날조했다.

4世�� 檀君 烏斯丘는 “甲申 元年(B.C. 2137) 겨울 10월��에 북쪽을 순시 하다가 太白山에 이르러 三神님께 제사하고 신비한 약초를 얻었는데 인삼 이라고도 하고 선약 이라고도 한다(甲申元年 … ��冬十月北巡而回到太白山祭三神得靈草是謂人蔘又稱仙藥 檀君世紀).”�� 烏斯丘 檀帝 때의 王儉城은 藏唐京임에도 불구하고 烏斯丘 檀帝는 북쪽을 순시하다가 太白山에 이르렀다. 長安 서쪽의 太白山 이라면 서쪽으로 순시 했다고 해야 한다. 더구나 長安 서쪽의 太白山에는 人蔘이 없다.

인삼은 長白山脈을 중심으로 韓半島와 黑龍江 연안 밀림지대에서 자생하던 식물이다. 중국 대륙의 삼은 인삼이 아니라, 전칠삼(田七蔘)이다. 田七蔘은 인삼과는 모양부터 다르며 중국 남부에 분포한다. 약효도 인삼에 미치지 못한다. 요컨대 烏斯丘 檀帝가 갔던 太白山은 현 白頭山이다. 5世�� 檀君 丘乙은 명을 내려 太白山에 단을 쌓고 사자를 보내 제를 올리게 했다(壬戌元年命築壇于太白山遣使致祭 檀君世紀). 韓半島의 太白山(현 白頭山)이라 너무 멀어 직접 가지 못했던 것이다.

新唐書에서는,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붙어 있던 자로 姓은 大氏이다.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는 자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 및 고구려의 남은 무리(餘衆)와 함께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수(遼水)를 건너 太白山의 동북을 확보하여 오루하(奧婁河)에 근거하였다. 중상(仲象)이 죽고 아들 조영(祚榮)은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도망 가다가, 곧 비우(比羽)의 무리를 합쳐 땅이 거칠고 먼것을 의지하여 여기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이름하고 부여(夫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바다 북쪽(海北)의 여러 나라를 모두 얻었다’고 하였다(新唐書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姓大氏乞乞仲象者與靺鞨酋長乞四比羽及高麗餘衆東走渡遼水保太白山東北阻奧婁河仲象死子祚榮引殘痍遁去卽拜比羽之衆恃荒遠乃建國自號震國王盡得夫餘沃沮弁韓海北諸國 太白逸史 大震國本紀).

姓은 大氏라면서 乞乞은 또 무엇인가. 粟末靺鞨이니, 乞乞仲象이니, 餘衆이니 하는 소리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날조지만, 날조와 사실을 적절히 섞는다는 원칙에 따라 사실도 있다. “동쪽으로 도망하여 遼水를 건너 太白山의 동북을 확보했다(渡遼水保太白山東北)”는 대목. 大仲象은 新羅에 의해 遼西로 이주 당했다. 嘉陵江을 건너 太白山의 동북, 바로 長安을 확보했던 것이다. 그러나 大仲象 振國烈皇帝는 遼西에서 붕어하고, 太子 祚榮이 동쪽으로 이동, 두 번째 太白山의 동북에 있는 平壤城(長安)을 탈환하여 大震國의 도읍으로 삼고 忽汗城이라 했다.

해북(海北). 바다의 북쪽 이라는 뜻으로 揚子江 이북을 말한다. 그러나 大震國의 영토는 揚子江 이남에도 있었다. 현 重慶이 西京 이니까. 국경에 수도를 두는 나라는 없다. 아무리 큰 강이라고는 하나, 고작 상류가 국경이 될 수 있는가. 漢水 하류조차 전쟁에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中土를 처음으로 통일했다는 秦나라에 대한 기술을 大震國史로 둔갑시킨 것이다. 秦나라는 金沙江 너머에 있었다.

결론적으로 太白山은 두 개였다. 慈烏支 한웅 때 中國(靑邱)으로 중심지를 이동한 후 새로운 太白山을 정했던 것이다. 15世�� 檀君 代音(또는 後屹達)이 丁未 28년��(B.C. 1634)에 올라 비석을 세워 역대 檀君의 공적을 새긴(丁未二十八年帝登太白山立碑刻列聖群汗之功 檀君世紀) 太白山은 長安 서쪽의 太白山이다.

지명 밀어 내기는 역사날조의 핵심수법 이었다. 지명 밀어 내기에 의해 東아시아를 疆域으로 하는 우리나라가 韓半島의 나라로 축소되었다. 白山도 太白山으로 밀어냈다.

“흑수말갈(黑水末曷)이 옛 肅愼의 땅에 거주하였는데, 白山이라 불리는 산이 있었으니 곧 長白山 으로서 金나라가 일어난 곳이다(黑水末曷 居故肅愼地 有山曰白山 蓋長白山 金國之所起焉 金史 高麗傳).”�� 白山 이북에 산 것은 黑水靺鞨이 아니라, 白山靺鞨 등이다.

中奴史와 揆園史話는 白頭山=太白山으로 날조했다. 그러나 李氏朝鮮은 白頭山을 太白山으로 밀어 내면서 太白山도 밀어냈다. 손발이 안 맞아 날조사 조차 일치 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太白山은 우리 민족의 靈山이지만, 기껏 濊貊族의 거주지 남쪽에 있던 白頭山은 靈山이 아니다. 그것이 아까워서 北崖가 白頭山을 靈山이라 날조한 中奴史에 따라 白頭山=太白山으로 날조했다.1)

우리나라가 太白山을 靈山으로 삼은 것은 우리민족의 國祖 神市氏가 처음 정착한 땅이기 때문이지, 揆園史話의 날조처럼 초목과 동물이 흰색이라서도, 山蔘이 나서도 아니다. “산에 사는 백성들이 이(산삼)를 캐고자 하면 반드시 목욕하고 정성을 들여 산에 제사를 드린 후에야 감히 캐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山氓欲採取 則必沐浴致齋祭山以後 敢發 揆園史話)”던 것은 不老草 라서가 아니고, 民族의 靈山에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한(桓)의 건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 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사백력(斯白力)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吾桓建國最古有一神在斯白力之天爲獨化之神光明照宇宙權化生萬物 三聖紀全 上篇).

斯白力은 어디인가. 한인 뒤에 “한웅씨(桓雄氏)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白山과 黑水 사이에 내려왔다(後桓雄氏繼興奉天神之詔降于白山黑水之間 三聖紀全 上篇)”는데 주목하자. 白山은 沱江 위쪽에 있고, 黑水는 黑龍江 상류이다. 神市는 동북아에 있었고, 慈烏支 한웅 때 중국 대륙의 靑邱로 옮겼다. 만일 斯白力이 揚子江 이남에 있었다면, 거발한(居發桓)은 神市를 揚子江 유역에 정했을 것이다. 神市氏가 중앙아시아에서 왔다면, 神市는 西安이 되었을 것이다. 神市氏는 남하했지, 북상했거나 동진하지 않았다(南下를 降이라 한 것은 신화적 요소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斯白力은 白山과 黑水 이북에 있었던 것이다. 바로 시베리아를 말한다.

한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太白山의 神檀樹 아래 내려 오시니 이를 神市라 한다(雄率徙三千初降于太白山神檀樹下謂之神市 太白逸史 神市本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고, 시베리아(斯白力)에서 남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기원전부터 동서간의 교류가 있었지만, 우리나라가 서양의 기원까지 알 만큼 서양을 알았던 것은 아니니까, “이세상”은 동아시아만을 가리킨다. 서양의 역사가 짧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한(桓)의 건국은 이 세상(地球)에서 가장 오랜 옛날(吾桓建國最古)”이었던 것이다. 斯白力에서 일어난 문명이 동아시아에 전파된 것은 아니니까, 밝은 빛이 비춘 “온 우주”는 시베리아 이다.

한국(桓國)시대는 문자가 없었다. 그래서 神市氏가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문자(鹿圖文)를 만들게 했다. 문헌기록이 없었으므로 한국시대가 3301년 이었다고도 하고 63,182년 이었다고도 한다(歷年三千三百一年或云六萬三千一百八十二年未知孰是 三聖紀全 下篇).

우리민족은 한국(桓國) 백성의 한 갈래이므로 한인(桓因)은 우리민족의 시조이다. 黑水와 白山 사이에 영토를 정한 한웅 거발한(居發桓桓雄)은 우리민족의 國祖이고, 神人王儉은 우리민족의 中祖이다.

“불씨 또한 없던 때라, 백성들은 모두 풀의 푸성귀나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신선한 피를 마시며 날고기를 먹었으니, 그 고초는 참아내기 어려웠다(無火種 民皆就食草蔬木實 啜鮮血 茹生肉 殆不堪其苦 揆園史話 太始紀).”�� “고시씨(高矢氏)가 이에 점차 곡식을 심고 거두는 방법은 가르쳤으나, 여전히 불이 없는 것이 근심이 되었다(高矢氏 乃漸敎稼穡之方 猶以無火爲憂 揆園史話 太始紀).”�� 기원전 3898년��에야 불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三聖紀全 上篇에는 “한님(桓因)은 또한 감군(監群)으로서 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桓因亦以監群居于天界掊石發火始敎熟食).”고 했다. 솔직히 한국시대가 3301년��이던 63,182년��이던 이 당시부터 불을 만들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인류가 불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수십만년�� 전이다. 내용에 완벽을 기하고자 수십만년��사를 함축 시키면서 불씨를 만든 얘기를 집어 넣었던 것이다. 윤색이라 할 것도 없고, 정확하게 말하면 축약이다. 이 정도도 윤색하지 않은 역사를 가진 민족은 어디에도 없다.

“夫餘에서는 또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며 소를 잡아서 그 발굽으로 길흉을 점치는 풍속이 있었다(夫餘則又有 祭天殺牛 以踶占吉凶之俗 揆園史話 檀君紀).”�� 소의 발굽 대신에 거북의 등을 이용해 갑골문자를 써넣는 풍속은 기원전 11세기 까지 있었다. 殷나라는 黃河 하류에 없었다.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다. 黃河 하류는 辰韓 땅이었다. 우리나라 풍속 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夏나라는 물론이고 殷나라 역시 고고학적 발견은 없었던 셈이다.

한단고기나 檀奇古史에는 寧古搭에 이르는 지형이나 방위에 대한 설명이 전무하다. 揆園史話에는 寧古塔이 나오지 않는다.

영고탑(寧古塔)의 한자를 풀어보면, 寧은 편안하다, 문안하다, 古는 예전, 塔은 탑, 층집이란 뜻이다. 층집이니까, 규모면에서 거대했다. 이 당시 거대한 건물이라면, 궁궐 정도다.

첫 번째 도읍지는 그저 阿斯達일 뿐,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서울을 서울이라 하는 것처럼, 첫 도읍(阿斯達)할 당시 阿斯達은 한 곳 뿐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첫 번째 도읍이 平壤 이라는 것은 거짓이다. “모든 고을의 지세를 살피고는 太白山 서남쪽 牛首河의 벌판에 도읍을세워 임금성(壬儉城)이라 했다(相地於諸州 乃建都于太白山西南牛首河之原 曰壬儉城 揆園史話 檀君紀).”�� 阿斯達은 도읍, 王儉城은 皇城 이라는 의미다. 長安은 藏唐京 阿斯達 내지 平壤城이고, 현 은허(殷墟)는 白岳山 阿斯達이다. 牛首河 즉 嘉陵江에 위치했던 첫 번째 阿斯達의 王儉城(현 重慶)의 이름이 寧古塔 이었던 것이다.

문안하는 옛 층집. 寧古塔에서 자주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寧古塔이 현 重慶이라서 누사(婁沙 : 番韓 42世��) 4년��에 箕子朝鮮과 辰韓의 중간지점인 寧古塔에 太子를 보내 서로 같은 조상 같은 자손의 옛 정을 나누었다(檀奇古史)고 싶겠지만, 箕子朝鮮의 실체는 番韓이다. 上國 朝鮮에 매년 조공을 해야 하는 나라가, 寧古塔 까지만 가서 朝鮮의 太子를 만났다는 것은, 여러 제후를 모아놓고 寧古塔에서 제사를 지낼 때, 참석했던 것을 李氏朝鮮의 시각에서 바꾼 것이다.


藏唐京은 千年 帝業의 땅이었다. “辛丑 6년��(B.C. 1280) 臣智인 육우(陸右)는 ‘천년 제업의 땅이라 해도 대운이 이미 다했으며 寧古塔은 왕기가 짙어 白岳山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 합니다. 청컨대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시옵소서’라고 상주 하였다(辛丑六年臣智陸右奏曰阿斯達千年帝業之地大運已盡寧古塔王氣濃厚似勝於白岳山請築城移之 檀君世紀).”�� 22世�� 檀君 索弗婁 때의 기록으로 예언처럼 들리지만, 사실의 적시다.

神人王儉이 牛首河의 寧古塔에서 藏唐京으로 천도한 것은 朝鮮 개국 10년��째인 기원전 2324년��. 그로부터 1045년��이 흘렀으니, 藏唐京은 천년 동안 줄곧 도읍이었다. 대운이 다했다는 것은 索弗婁가 21世�� 檀君 蘇台로 부터 帝位를 빼앗은 격이 되었기 때문이다. 寧古塔이 王氣가 짙다는 것은 神人王儉이 도읍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도읍이었던 寧古塔이 왕기가 짙다고 했으니까, 白岳山은 그보다 도읍 기간이 짧거나 도읍을 한 적이 없다는 의미다.

은허 殷墟 :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샤오툰촌[小屯村]에 있는 고대 은(殷)나라 수도 유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사에 의하면 백악산 아사달이 있던 곳이다. 중국 허난(河南)성 안양(安陽)현 샤오툰(小屯)촌에 있는 은허(殷墟) 유적지에서 고대 마차와 청동검 유물이 발견됐다.

“신도(新都)에 이미 집이 있는데 어째서 다시 옮길 것인가?(新都已宅更何他往 檀君世紀)”라고 한 索弗婁의 대답에서도 알 수 있다. “우현왕(右賢王)은 좌우의 신하들과 사냥족(獵戶)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夫餘의 신궁(新宮)에서 즉위하였다(右賢王率左右及獵戶數千遂卽位于夫餘新宮 檀君世紀).” 蘇台 檀君이 徐于餘에게 帝位를 물려주기로 결심하고 薩水의 땅 백리를 封해 후계자 수업을 시키려고 했을 때, 右賢王이었던 索弗婁가 반대 했으나 蘇台 檀君이 강행하자, 帝位를 강탈 당하지 않기 위해 索弗婁는 夫餘의 新宮에서 먼저 檀君으로 즉위 해버린 것이다.

白岳山이 索弗婁가 즉위식을 거행한 신도(新都)였던 것이다. 索弗婁가 기원전 1285년��에 白岳山에서 즉위식을 올렸으니까, 이 당시 白岳山의 도읍 기간은 陸右가 천도를 거론한 기원전 1280년��까지 6년��에 불과했다.

白岳山에 夫餘의 신궁(新宮)이 있었다. 이 당시에도 夫餘는 神人王儉의 아들 扶餘를 봉한 나라밖에 없었다. 티벳고원 남부에 있었던 夫餘의 위치를 옮긴 모양이다. 番韓을 岷江 이서로 옮기자 夫餘에게는 현 殷墟를 중심으로 한 땅을 주었던 것이다. 어째서 제후들의 봉토를 계속 바꾸었을까. 티벳고원 남부는 中寇가 우리나라로 침입하는 관문이다. 그 땅을 다스리던 제후의 힘이 약화되면, 새롭게 부상하는 제후로 대체해야 했던 군사전략 지역이다. 索弗婁가 즉위할 당시, 夫餘가 존속했다면, 나라를 또 옮겨야 했다.

“丙辰年(B.C. 425)에 上將 丘勿이 마침내 사냥꾼들의 두목 우화충(宇和沖)을 죽여버리고 도성을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丙辰上將丘勿遂斬獵戶頭目宇和沖移都藏唐京 三韓管境本紀 馬韓世家).”�� 丘勿이 천도할 수 있었던 것은 檀君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의 추앙을 받는바 되어, 마침내 3월�� 16 일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藏唐京에서 즉위하였다(丘勿爲諸將所推乃於三月十六日築壇祭天遂卽位于藏唐京 檀君世紀).”�� 기원전 425년��에 白岳山에서 藏唐京으로 다시 천도한 것이다. 그리고 국호를 大夫餘로 고쳤다.

“종실(宗室)의 대해모수(大解慕漱)는 몰래 수유(須臾)와 약속하고 옛 서울 白岳山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天王郞이라 칭했다(宗室大解慕漱密與須臾約襲據故都白岳山稱爲天王郞 檀君世紀).”�� 또 다시 藏唐京이 도읍이 되었으니까, 白岳山은 옛 서울이 된 것이다. “解慕漱가 하늘로 부터 내려와 熊心山에서 일찍이 살다가 夫餘의 옛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夫餘의 시조라고 한다(解慕漱從千而降嘗居于熊心山起兵於夫餘古都爲衆所推遂立國稱王是謂夫餘始祖也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大夫餘의 高列加(古列加) 檀君이 藏唐京에 있으니까, 解慕漱는 白岳山에서 개국하고 北夫餘라 했다. 夫餘의 옛 서울은 白岳山이다. 索弗婁가 白岳山에서 즉위했을 때는 藏唐京이 천년 帝業의 땅이라 白岳山이 新都였고 新宮이었지만, 解慕漱 때는 또 다시 藏唐京이 도읍이니까, 夫餘의 옛 서울이 된 것이다.

“壬戌 57년�� 4월 8일 解慕漱가 熊心山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槀離國사람이었다(壬戌五十七年四月八日解慕漱降于熊心山起兵其先槀離國人也 檀君世紀).”�� “解慕漱가 하늘로 부터 내려와 熊心山에서 일찍이 살다가 夫餘의 옛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夫餘의 시조라고 한다(解慕漱從千而降嘗居于熊心山起兵於夫餘古都爲衆所推遂立國稱王是謂夫餘始祖也 太白逸史).”�� 解慕漱가 도읍으로 정한 땅은 白岳山(殷墟)이다. 槀離國에 熊心山이 있었다면, 군대를 이끌고 大夫餘의 도읍 藏唐京을 지나 白岳山까지 와서 나라를세워야 했다. 解慕漱의 선조는 “槀離國 사람이었다.” 이 말은 解慕漱 당대에는 槀離國에 살지 않았다는 말이다. 熊心山은 白岳山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解慕漱가 왕으로 자칭할 경우, 高列加 檀君이 位를 내놓지 않는다. 天王이라 했던 것이다. “大解慕漱는 몰래 須臾와 약속하고 옛 서울 白岳山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天王郞이라 칭했다(宗室大解慕漱密與須臾約襲據故都白岳山稱爲天王郞 檀君世紀).”��

천왕랑(天王郞). 郞은 젊은 남자 한테나 붙이는 말이다. 天王을 수호하는 젊은 남자라는 뜻으로 원래 花郞의 다른 이름이다. “源花는 女郞을 말하고 남자는 花郞이라 하며 또 天王郞 이라고도 하니, 上命(檀帝의 명령)으로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烏羽冠)를 하사받는다(源花稱女郞男曰花郞又云天王郞自上命賜烏羽冠 太白逸史 三神五帝本紀)”��. 解慕漱는 花郞 출신 이었던 것이다.

이미 帝位에 58년��이나 있은 高列加 檀君은 23 살의 젊은 解慕漱를 당할 수 없었다. 제후들이 解慕漱 한테로 몰리자, 天王이 둘일 수 없으니, 高列加 檀君이 位를 내놓고 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解慕漱는 北夫餘를세우고, 王이 아니라 天王이 되었다. 그러니까 한단사(桓檀史)에 檀君이 王이라 표기되어 있는 것은 天王이라 읽고, 皇은 天皇으로 읽어야 한다.

天王, 天皇 둘 다 사용했다. 加臨土에서 한자로 옮긴 문자라서 그렇다. 우리나라를 桓, 漢, 韓이라 하는 것처럼. 땅은 무수히 나누고, 그 땅마다 지배자가 나와도 하늘은 나눌 수 없다. 하늘의 지배자는 1 인 이므로 天王이라 하든, 天皇이라 하든 하늘의 지배자라는 뜻에는 변함이 없다.

5) 미개 예맥족사를 한단사의 위치로 끌어올린 규원사화

“蚩尤氏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蚩尤氏之後 封于南西之地 巨野浩豁 海天靚碧 曰藍國宅奄慮忽 檀君紀).” 및 “후세에 蚩尤氏·高矢氏·神誌氏의 후예들이 가장 번창하여 융성하였다. 蚩尤氏의 부족은 서남의 땅에 자리를 잡았다(而後世蚩尤高矢神誌之苗裔 繁衍最盛蚩尤氏之族 則占居西南之地 揆園史話 太始紀).”��만 보면, 마치 대륙의 남서부를 연상 시킨다. 그러나 개국 당시 朝鮮의 영토는 揚子江 이북 까지였다.

“蚩尤氏는 藍國에 봉함을 받고서 선조의 뜻을 이어 백성들을 위무하고 생업을 편케 하며 군사의 일을 배워서 익히니, 항상 서남방으로 울타리가 되었다. 또한 그 백성들을 수차례 海垈의 땅으로 옮겨가게 하니, 후세에 이르러 항시 漢나라 땅의 뭇 나라들과 더불어 서로 각축하게 되었다(蚩尤氏旣受封於藍國 乃紹先祖之志 撫民安業 講習戎事恒爲西南藩蔽 且其民 數遷徙海岱之地 以致後世 恒與漢土諸國 互相角逐 揆園史話 檀君紀).”��만 보면, 藍國은 티벳고원 남부로 보인다. 그러나 티벳고원 남부는 扶虞, 扶蘇, 扶餘의 봉토였고, 곧 扶餘의 땅으로 다시 馬韓, 番韓의 땅이 되었다.

22世�� 索弗婁 檀君에 이르러 藍侯의 행동에서 藍國이 위치가 파악된다. “이즈음 藍侯가 자못 강성하여 차츰 제후들을 부리고 거느리게 되었는데, 고죽군(孤竹君)을 몰아내고 도읍을 남쪽으로 옮겨 엄독홀(奄瀆忽 : 忽은 골 로도 발음한다. 고을이라는 뜻)에 거처하였다. 그 곳은 殷나라와 매우 가까왔다(至是藍侯頗强 稍役率諸侯逐孤竹君 南遷其都 居奄瀆忽 與殷逼近 揆園史話, 檀君世紀).”�� 남부로 천도 했는데, 殷나라와 가까왔다고 한다. 藍國이 티벳고원 남부에 있었다면, 남으로 천도하면 殷나라와 멀어진다.

30世�� 檀君 내휴(奈休)는 서쪽으로 엄독골(奄瀆忽)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汗들과 모여서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周)나라 사람들과도 수호 하였다(三十世檀君奈休…….西至奄瀆忽會分朝諸汗閱兵祭天與周人修好 檀君世紀).

엄독골(奄瀆忽)은 辰韓의 도읍에서 서쪽에 있었다. 22世�� 檀君 索弗婁 이후 辰韓의 도읍은 白岳山 阿斯達로 현 은허(殷墟)이다. 辰韓의 도읍에서 서쪽인 藍國은 柴達木盆地에 위치했다. 奄瀆忽은 柴達木盆地 남단에 있었다. 그래서 殷나라 땅과 가까웠던 것이다.

柴達木盆地에서 藍侯가 “백성들을 수차례 海垈의 땅으로 옮겨가게 하니, 후세에 이르러 언제나 漢나라 땅의 뭇 나라들과 더불어 서로 각축하게 되었(且其民 數遷徙海岱之地 以致後世 恒與漢土諸國 互相角逐)”던 것이다. 그러므로 蚩尤氏가 “항상 서남방으로 울타리가 되었다(恒爲西南藩蔽).”는 것은 거짓이다. 番韓의 시조 蚩頭男도 慈烏支 한웅의 후손 이었지만, 朝鮮 전기에는 丹江 이남에 있었다.

蚩尤氏가 항상 울타리가 된 땅은 柴達木盆地이고, 백성들을 옮겨가게 한 海垈는 金沙江 상류이다. 金沙江 상류에서 항시 中土의 나라들과 서로 각축했던 것이다.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다(巨野浩豁 海天靚碧).” 들녘에 바다가 있다고 했다. 진짜 바다가 아닌 것이다. 柴達木盆地는 강수량이 적어 강물이 크게 불어나는 일이 없지만, 여기서의 바다는 대기를 뜻하는 말이다. “바다가 고요하다(海靚).”는 말은 바람이 잠잠하다는 뜻이다. 柴達木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니까, 바람이 별로 불지 않는다.

柴達木盆地의 하늘이 푸른 것은 푄 현상('푄'이란 말은 원래 라틴어의 favonivs에서 유래하는데 '西風'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때문이다. 분지 밖에서는 상승기류가, 분지 안에서는 하강기류가 생긴다. 바람받이 사면(분지 밖)을 올라가면서 100m당 0.5℃씩(습한 공기가 상승할 때에는 수증기 응결로 숨은열이 방출되어 공기를 가열시킨다) 내려 가므로 포화 수증기량에 도달하고 더욱 기온이 내려가면, 비를 뿌리게 된다. 비를 뿌린 공기는 건조해진 상태에서 이번에는 바람의 지사면(분지 안)을 내려가면서 100 m당 1.0℃씩 올라간다. 하강 기류에서는 포화 수증기량이 증가해 구름이나 습기가 모두 증발,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날씨가 쾌청해지는 것이다.

북반구에서는 기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한다. 柴達木盆地는 저지대의 평균 해발고도가 2600~3000m인 반면, 서쪽의 타림분지는 평균 해발고도가 800∼1,200m 이다. 게다가 타림분지의 연간 강우량은 10mm 이하다. 옛날에는 좀 더 습윤했다. 타림분지에서 유입되는 건조한 공기는 바람받이 사면을 상승 하면서 더욱 건조해진 다음(매우 건조한 공기이므로 100m당 1.0℃ 가까이 내려간다), 바람의 지사면을 하강하면서 포화 수증기량이 증가하여 남아 있는 습기마저 모두 증발, 하늘이 파랗게 보인다. 그 외에 영향은 미약 하지만, 가시광선의 산란 탓도 원인이다.

가시광선은 파장이 짧을수록 산란이 잘되고, 산란을 거듭 할수록 에너지를 잃게 된다. 柴達木盆地는 고지대이니까, 파장이 짧은 보라색의 산란이 가장 많이 일어나고, 저지대 에서는 파장이 긴 노란색과 빨간색도 일부 산란된다. 사람의 눈은 파란색에 더 민감하니까, 저지대 까지 도달하는 일부 보라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藍國(巨野浩豁 海天靚碧 曰藍國)”이라 한 것이다.

揆園史話는, 檀奇古史 따위는 비교가 안되는, 대단히 교묘하게 쓴 날조사다. 揆園史話를 읽다보면, 北崖라는 인간에 대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인간심리를 완전 파악하고 있는 대단히 지능적인 모사꾼이다. 揆園史話의 특징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한 문장 내에 실사와 날조사를 교묘히 섞었다. 자신의 거짓말을 사실로 둔갑시키기 위해 남의 말이라며 인용형식을 취했다. 감정에 호소하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상적으로 만들어 판단력을 둔화시킨다.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자.

己丑年은 연나(延那) 임금의 원년이다. 이듬해 상(商)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여 그 군사가 남쪽 경계에 까지 이르렀는데, 남후(藍侯)가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싸워 이겼으며, 뒤에는 서로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였다.(己丑歲壬儉延那元年 叔父固弗加攝政 翌年商人攻我 師至南界藍侯率諸軍 戰克 後 互相戰和 揆園史話 檀君紀)

24世�� 檀君 延那가 즉위한 해는 기원전 1161년��이다. 己丑年이 아니고, 庚子年이다. 商나라는 殷나라의 별칭이다. 殷나라는 기원전 11, 12세기에 망한 나라다. 기원전 12세기에는 殷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져 우리나라를 공격할 수가 없었다. 藍侯가 강성했던 시기는 22世�� 檀君 索弗婁 때로 기원전 13세기였다.

壬子年은 해모(奚牟) 임금의 원년이다. 남후(藍侯)로 하여금 비류후(沸流侯) 및 청구후(靑丘侯)와 더불어 소니수(溸泥水)에 모이게 하였다.(壬子歲壬儉奚牟元年 使藍侯與沸流侯靑丘侯 共聚 溸泥水 揆園史話 檀君紀)

28世�� 檀君 奚牟가 즉위한 해는 기원전 971년��이다. 壬子年이 아니고, 庚戌年이다. 이것은 檀君世紀에 없는 내용이다.

乙卯年은 두홀(豆忽) 임금의 원년이다. 비류후(沸流侯)가 큰 자라(大鼈)를 바쳤는데 길이가 한 길이 넘었다. 속진후(鞻溍侯)가 용가(龍加)가 되었다. 처음 흘달(屹達) 임금 때 우리나라 사람으로 빈(邠),기(岐) 지역으로 나아가 거처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상(商)나라 탕왕(湯王)이 일어나니 마침내 점차 물러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빈천한 백성으로서 농사짓고 누에치는 것을 생업으로 하던 자들은 여전히 그 땅에 흩어져 살면서 오랫동안 풍속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즈음 藍侯가 자못 강성하여 차츰 제후들을 부리고 거느리게 되었는데, 고죽군(孤竹君)을 몰아내고 도읍을 남쪽으로 옮겨 엄독홀(奄瀆忽)에 거처하였다. 그 곳은 殷나라와 매우 가까우므로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빈(邠),기(岐) 사이로 나아가게 하여 그 유민들과 더불어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세우고 '여(黎)'라고 이름 짓고 여홀(黎忽)을 도읍으로 하니, 이에 마침내 殷나라의 제후 및 서융(西戎)의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거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藍侯의 위세가 점차 번성하여 졌으며, 임금의 명령 또한 항산(恒山)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乙卯歲壬儉豆忽元年 沸流侯獻大鼈 長丈餘鞻溍侯爲龍加 初屹達之世 東人之進據邠岐者甚衆 及商湯之興而遂漸撤退 然細民以耕桑爲業者 猶散處其地 久不失其俗 至是藍侯頗强 稍役率諸侯孤竹君 南遷其都 居奄瀆忽 與殷逼近 使黎巴達將兵 進至邠岐之間 與其遺民相結 立國曰黎 治黎忽 遂與殷家諸侯及西戎之人相雜處 於是藍氏侯之威漸盛而壬儉之命亦及乎恒山以南之地矣 揆園史話 檀君紀).

39世�� 檀君 豆忽은 기원전 545년��에 즉위했다. 乙卯年이 아니고, 丙辰年이다. 545년��은 殷나라가 망한지도 5, 6 백년��이 넘었다. 저 기사는 檀君世紀에도 나온다. 22世�� 檀君 索弗婁 20년�� 때로 乙卯年(B.C. 1266) 기사이다.

乙卯 20년(B.C. 1266) 이때에 남국(藍國)이 자못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쫒고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골(奄瀆忽)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殷)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邠), 기(岐)를 점거하고 그곳의 유민과 서로 결합하여 나라를세워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殷)나라 제후들 사이에 섞여사니 남씨(藍氏)의 위세가 매우 강성하여 황제의 교화가 멀리 항산(恒山) 남쪽 지방까지 미쳤다 (乙卯二十年至是藍國頗强與孤竹君遂諸賊南遷至奄瀆忽居之近於殷境使黎巴達頒兵進據邠岐與其遺民相結立國稱黎與西戎雜處於殷家諸侯之間藍氏威勢甚盛皇化遠及恒山以南之地 檀君世紀).

孤竹君은 朝鮮의 제후국 이었으나, 역사날조 하면서 殷나라의 諸侯國으로 둔갑시킨 나라의 하나이다. 그러니까 孤竹君을 내몬 것이 아니라, 함께 군사행동을 했다는 檀君世紀의 기사가 맞다. 그래서 21世�� 檀君 蘇台가 물러나자, 孤竹君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東海(金沙江)가에 살면서 힘써 농사를 지어 스스로 살아갔다(伯夷叔齊亦以孤竹君之子遜國而逃居東海濱力田自給 檀君世紀).

殷나라 땅을 정벌해서 黎國을세운 결과, 殷나라와 인접해 殷나라 제후들이 지척에 있게 된 것이지, 殷나라 제후와 “더불어 섞여 거처(與西戎雜處於殷家諸侯之間)”하게 된 것은 아니다. 西戎은 靺鞨(濊貊族)로 中土 서쪽에 있었다.

“檀君의 명령이 항산(恒山)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된(皇化遠及恒山以南之地)” 것은 39世�� 豆忽이 아니라, 22世�� 索弗婁 때이다(檀君世紀). 索弗婁는 皇位 찬탈자이다.

“새 임금이 白岳山에 도읍하자 여러 욕살(褥薩)이 안된다고 고집하였으나, 여원흥(黎元興)과 개천령(蓋天齡) 등이 檀帝의 조서(詔書)를 받들어 이들을 타이르니 여러 褥薩들이 복종하게 되었다(新帝相都於白岳山諸褥薩執不可黎元興蓋天齡等奉詔諭之於是諸褥薩畢服 馬韓世家 下).”�� 하지만 恒山 이남은 아직도 索弗婁에게 복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索弗婁를 따르는 藍候의 위세가 점차 번성하자, 索弗婁의 교화가 또한 恒山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邠, 岐의 유민이라 한 것은 13世�� 檀君 흘달(屹達) 때 이미 정벌해 우리나라 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처음 흘달(屹達) 임금 때 우리나라 사람으로 빈(邠)·기(岐) 지역으로 나아가 거처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상(商)나라 탕왕(湯王)이 일어나니 마침내 점차 물러 나오게 되었다(初屹達之世 東人之進據邠岐者甚衆 及商湯之興而遂漸撤退 揆園史話 檀君紀).

“우리나라 사람으로 빈(邠)·기(岐) 지역으로 나아가 거처한 자가 매우 많았”던 것은 邠·岐를 정벌했기 때문이다. 屹達 天皇이 邠, 岐를 정벌한 시기가 바로 商나라(殷나라의 별칭) 湯王 때이다.

이 해 겨울에 은(殷)나라 사람이 하(夏)나라를 정벌하니 夏나라 걸왕(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단제(檀帝)께서 읍차(邑借)인 말량(末良)으로 하여금 구한(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殷나라의 탕왕(湯王)이 사신을 보내 사죄 하였다. 곧 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夏나라 桀王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고 하였다. 이에 殷나라 사람들과 함께 夏나라 桀王을 쫓기로 하여 은밀히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파견하여 견군(畎軍)을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關中)의 빈(邠), 기(岐)의 땅에 거하며 관제(官制)를 설치하였다(是歲冬殷人伐夏其主桀請援帝以邑借末良率九桓之師以助戰事湯遣使謝罪乃命引還桀違之遣病遮路欲敗禁盟逐與殷人伐桀密遣臣智于亮率畎軍合與樂浪進據關中邠岐之地而居之設官制 檀君世紀).

13世�� 檀君 흘달(屹達 또는 代音達 이라고도 한다)의 기사이다. 殷나라 湯王 때 邠·,岐가 우리나라 땅이 되었던 것이다. 殷나라 湯王은 中土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일부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도 北崖의 날조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戊寅年은 흘달(屹達)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은 무예에 용맹이 있음에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 하면서도 좋아 하였다. 해문(奚門)을 얻어 용가(龍加)로 삼았다. 하(夏)나라 사람이 건너오자 임금이 그를 예절로서 대우 하였다. 이 때 夏나라의 덕이 이미 쇠퇴하니 사람을 시켜 가서 그 정치를 살펴보게 하고는, 또 춤과 노래를 보내어 그를 시험하게 한 후에, 奚門과 남후(藍侯)로 하여금 모든

영인본 규원사화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엄(奄)에서 빈(邠)·기(岐) 사이의 지역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 후 夏나라 왕과 서로 화해 하였다(戊寅歲壬儉屹達元年 有武勇 國人畏愛之 得奚門爲龍加夏人來至壬儉優禮之 時夏德旣衰 使人往觀其政 又送舞樂而試之 及後 使奚門與藍侯率諸兵 進征奄至邠岐之間 後與夏王和 揆園史話 檀君紀).”

춤과 노래 시험에 통과하지 못해 정벌 했던가. 13世�� 檀君 屹達의 즉위 원년은 己卯年(B.C. 1782)이다.

癸未年은 달음(達音) 임금의 원년이다. 청구후(靑丘侯)의 여식 아시씨(阿施氏)를 취하여 황후로 삼으니, 어질며 덕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흠모 하였다. 개마후(蓋馬侯)가 신령스러운 풀을 바쳤다. 옛적에 부여(夫餘)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설유(稧兪)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貊)'이라 하였다. 다시 점차 옮겨와서 엄려(奄慮)의 북서쪽 땅에서 살게 되어 마침내 남씨(藍氏)의 백성이 되었다(癸未歲壬儉達音元年 娶靑丘侯之女阿施氏爲后 賢而有德 國人慕之 蓋馬侯獻靈艸 昔 夫餘民有遁居于稧兪之地 遂與其民雜處 頗習其俗 殆無恒業 以狩獵爲生 獸皮爲服 人謂之貊復漸遷徙 處於奄慮北西之地 遂爲藍氏之民 揆園史話 檀君紀).

40世�� 檀君 達音이 즉위한 해는 기원전 509년��이다. 癸未年이 아니라, 壬辰年이다. 이 당시 藍國은 없었다. 檀君世紀에는 22世�� 檀君 索弗婁를 끝으로 藍國이 등장하지 않는다. 언제인지는 모르나, 高句麗 때 癸未年에 濊貊族이 藍國의 영토였던 柴達木盆地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이다.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殆無恒業 以狩獵爲生 獸皮爲服)”었던 것은 이 당시 濊貊族의 실상이다.

淸이 寧古塔이라는 사라진 지명을 되살렸다는 점(그리고 지명을 밀어냈다)에서 熟女眞(濊貊)은 朝鮮의 속민이다. 濊貊이 캐시미르(Kashmir)에 있었을 때도 역시 朝鮮의 영향 아래 있었다. 더 이상 藍國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蚩尤氏 후손에게 주었던 柴達木盆地를 선뜻 濊貊族 따위에게 내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濊貊族이 柴達木盆地에 있다는 사실은 高句麗가 濊貊族을 그곳에 집어 넣었음을 추측케 한다. 당시 遼西를 지배하고 있던 百濟와의 전쟁에 濊貊族을 이용하기 위해 柴達木盆地에 거주케 한 것이다.

濊貊族의 시조로 둔갑시킨 藍侯는 揆園史話에서는 7世�� 檀君 한율(翰栗) 때부터 그 위세를 발휘한다.

壬戌年은 한율(翰栗) 임금의 원년이다. 아질(阿叱)이라는 자가 있어 난을 일으켜 백성을 해치니 임금이 이르기를 「죄(罪)는 오로지 그것을 범한 자에게로 돌아가며, 

도(道)는 오로지 그것을 삼가 닦은 자에게서 이루어진다」라 하고 더욱 덕스러운 정치를 닦으며 여로(黎老)에게 그를 정벌하게 하니, 삼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사로 잡았다. 또한 당시 하(夏)나라의 정치가 바야흐로 융성해 지므로 남후(藍侯)로 하여금 군사 일을 힘써 다스리게 하니, 오랫동안 이로써 평화로왔다(壬戌歲壬儉翰栗元年 有阿叱者 作亂害民 壬儉曰 惟罪歸于作犯 惟道成于謹修 乃益修德政 使黎老征之 三年而後始禽 且當時夏政方殷 使藍侯勤修戎事 而終世以和 揆園史話 檀君紀)

7世�� 檀君 翰栗의 즉위 원년은 壬戌年(B.C. 2047)이다. 7世�� 檀君 翰栗 때의 기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乙丑年은 물리(勿理)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은 어질면서도 무도(武道)의 용맹을 좋아 하였다. 이 때의 제후들은 이미 강성 하였으나 여전히 임금을 존중하여 때를 맞추어 항상 알현 하였다. 남후(藍侯)인 검달(儉達)이 청구후(靑丘侯), 구려후(句麗侯), 속진후(嫘黰侯) 등과 더불어 병사를 거느리고 은(殷)나라를 정벌하여 마침내 그 땅의 회대(淮垈) 사이로 깊이 들어가게 되니 반가이 맞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제후들이 이에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고 박고씨(薄姑氏)를 청주(靑州)의 땅에세워 '엄국(奄國)'이라 이름하고, 영고씨(盈古氏)를 회수(淮水)의 북쪽 서주(徐州)의 땅에세워 '서국(徐國)'이라 이름 하고는, 서로 연맹하여 원조하고 단결하니 은(殷)나라 사람들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였다. 무릇 해대(海岱)와 강회(江淮)의 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지하고 살아 온 지 오래되었는데, 은(殷)나라의 도가 쇠퇴해지자 남후가 제후들과 더불어 공격하여 들어간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바다를 인접한 곳의 백성들은 모두 그들의 마을을 바치며 흔쾌히 군사를 환영 하였던 것이다. 치우씨(蚩尤氏)가 물러난 이후 다시 이 때에 번성함을 보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제후들 역시 조금씩 왕실을 가볍게 여기게 되었으니, 비록 겉으로는 맡은 일을 처리 하였지만 마음으론 받들지 않게 되었다 (乙丑歲壬儉勿理元年 仁而好勇 時 諸侯已强而猶尊壬儉時常朝覲藍侯儉達 與靑丘侯句麗侯嫘黰侯 率兵伐殷 遂深入其地淮岱之間 莫不響應 諸侯乃定淮岱之地 乃立薄姑氏於靑州之地曰奄國盈古氏於淮北徐州之地曰徐國 互相聯盟而援結殷人莫敢當者 盖 海岱江淮之地 爲東人占居者已久 及至殷道之衰 而藍侯與諸侯進攻 於是濱海之民 皆以其州欣迎其師也 自蚩尤氏撤退以後 復見斯時之盛矣 雖然諸侯亦稍輕王室 雖外修其職 不甚崇戴焉 揆園史話 檀君紀)

43世�� 檀君 勿理가 즉위한 해는 기원전 461년��으로 周나라 말기에 해당한다. 乙丑年이 아니라, 庚辰年이다. 이 기사도 檀君世紀에 있다. 23世�� 檀君 아홀(阿忽) 2년�� 乙酉年(B.C. 1236) 기사이다.

乙酉 2년��(B.C. 1236) 남국군(藍國君) 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에서 회합하고 몽고리(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殷)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淮垈)의 땅을 평정했다(乙酉二年藍國君今達與靑邱君句麗君會于周愷合蒙古里之兵所到破殷城柵深入奧地定淮岱之地 檀君世紀)

殷末 이후 海上이 완전히 우리나라 땅으로 굳어졌다. 저 기사는 기원전 1236년에 일어난 사건을 北崖가 역사날조 차원에서 8 백년 이나 뒤로 뺐다. 藍侯를 강성한 인물로 만들기 위한 北崖의 의도적인 날조이다. 단지 藍國이 高句麗 때 穢貊族을 몰아넣은 땅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藍侯는 濊貊族(穢貊族)의 시조로 날조당한 인물이다.

반가이 맞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檀君世紀에는 “殷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殷人風惶怯莫敢近之 檀君世紀).”고 했다.

丁亥年은 여루(余婁) 임금의 원년이다. 남후(藍侯)가 은(殷)나라 회수(淮水)의 남쪽 땅에 선모국(鮮牟國)을세웠다 (丁亥歲壬儉余婁元年 … ��藍侯立鮮牟國於殷淮南之地 揆園史話 檀君紀)

45世�� 檀君 余婁가 즉위한 해는 기원전 396년��이다. 丁亥年이 아니라, 乙酉年이다. 이 당시는 殷나라가 망한지도 7 백년이 넘었다. 殷나라는 金沙江 상류에세운 나라로 淮水(瀾滄江) 이북에 있었다.

壬辰年은 보을(普乙) 임금의 원년이다. 남후(藍侯)가 마침내 제후들을 총괄하여 거느리게 되니 임금을 알현하는 자가 드물었다 (壬辰歲壬儉普乙藍侯遂總帥諸侯朝覲者遂稀 揆園史話 檀君紀)

46世�� 檀君 普乙이 즉위한 해는 기원전 341년��이다. 壬辰年이 아니라, 庚辰年이다. 나라의 힘이 약해진 것은 乙丑 46년��(B.C. 296), 한개(韓介)의 난 이후다(乙丑四十六年韓介率須臾兵犯闕 檀君世紀).

解慕漱가 箕丕와 짜고 군대를 일으켜 白岳山(현 殷墟)에서 즉위한 다음 北夫餘를 건국한 것을 끌어당겨 쓴 것으로 추정된다. 解慕漱가 北夫餘를세운 해는 고열가(古列加) 檀君 57년��으로 기원전 239년��이다. 이때 解慕漱의 나이 23세였다(天王郞年二十三從天而降是檀君古列加五十七年壬戌四月八日 北夫餘紀).

이로서 나라는 마침내 없어지니, 임금으로 있은 지 30년��이요, 단검신인(檀儉神人)이 큰 위업을 처음으로 펼친 때부터 역년이 47세요 1,195년��이다 … 그후로 제후들은 자못 무력으로 서로 경쟁하였는데, 유독 남후(藍侯)만이 제후들의 강성함 가운데에서도 뛰어나서 항상 모든 제후들을 거느리고 국정을 행하게 되었기에 이로서 열국이 되었다(是國遂除在位三十歲自檀儉神人開創鴻業歷四十七世一千一百九十五年 … 自後諸侯頗以武力相競獨藍侯者出諸家之右時常役率羣后以行國政是爲列國焉 揆園史話 檀君紀)

古列加 檀帝는 30년��이 아니라, 58년�� 동안 제위에 있었다. 퇴위한 해는 癸亥年(B.C. 238)이다. 그러므로 神人王儉이 큰 위업을 처음으로 펼친 때 부터 2096년��이다. 2096년��을 1195년��으로 줄이다 보니까, 47世��에 이르는 檀君의 즉위원년이 2世�� 扶婁만 제외하고 하나도 맞는 게 없다. 60 甲子 중에 마지막인 癸亥年에 朝鮮의 역사가 끝났다는 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새로이 시작되는 北夫餘의 역사가 甲子로 부터 시작된다. 물론 건국은 그 이전 이지만,,,

揆園史話에는 古列加 檀帝가 제위를 내놓은 뒤에도 藍侯가 등장하는 반면, 한단고기(桓檀古記)에는 30世�� 檀君 내휴(奈休) 이후1)로 등장하지 않는다. 揆園史話에 의하면, 藍侯가 北夫餘 시대에도 강자로 떠올라야 하나, 北夫餘紀에는 그런 기술이 전혀 없다.

강성한 藍候가 있다면, 고작 사냥꾼(于和沖) 따위가 도성을 에워싸고 공격할 수 있는가. 普乙 檀帝는 몽진(蒙塵)까지 떠났다. 燕나라 배도(倍道)가 遼西를 함락 시키고, 雲障까지 육박했을 당시도 三朝鮮이 격퇴 시켰지, 藍侯는 등장하지 않는다. 藍侯가 융성 했다면, 노관(盧綰), 裵川의 漢寇 등이 우리나라 땅을 일시나마 점령 할 수 있었겠는가.

“옛적에 夫餘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설유(稧兪)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貊)'이라 하였다. 다시 점차 옮겨와서 엄려(奄慮)의 북서쪽 땅에서 살게 되어 마침내 남씨(藍氏)의 백성이 되었다(昔夫餘民有遁居于稧兪之地遂與其民雜處頗習其俗殆無恒業以狩獵爲生獸皮爲服 人謂之貊復漸遷徙 處於奄慮北西之地 遂爲藍氏之民 揆園史話 檀君紀).”와 관련하여 韓民族 으로서의 濊貊의 기원을 만들어내기 위한 날조다. 揆園史話를 쓸 당시에는 한단(桓檀) 역사서가 모조리 분서되고 숨겨진 때라 마음놓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濊貊族의 시조로 둔갑시킨 藍侯를 강성한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 北崖는 시기적으로 앞선 역사를 뒤로 뺐다. 北崖의 거짓말은 이 뿐만이 아니고, 揆園史話 전반에 걸쳐 있다.

乙亥年은 가륵(嘉勒) 임금의 원년이다. 하(夏)나라 왕이 덕을 잃어 그 신하 가운데 왕위를 넘보고 반역하는 자가 있으므로, 이내 식달(息達)로 하여금 남국(藍國)과 진번(眞蕃)의 백성들을 이끌고 가서 그를 정벌케 하니 나라의 위세가 더욱 빛났다 (乙亥歲壬儉嘉勒元年 … ��夏王失德其臣有簒逆者乃使息達率藍眞蕃之民以征之於是國威益彰 揆園史話 檀君紀) 3世�� 檀君 嘉勒의 즉위 원년은 己亥年(B.C. 2182)이다. 저 기사는 檀君世紀에도 나오는데, 4世�� 檀君 烏斯丘 때의 기사로 내용도 틀리다.

壬寅 19년(B.C. 2118) 夏나라 왕 상(相)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버리니 檀帝께서는 식달(息達)에게 명하여 남(藍), 진(眞)변(弁)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치니 천하가 이 소문을 듣고 모두 항복 하였다(壬寅十九年夏主相失德帝命息達率藍眞弁三部之兵往征之天下聞之乃服 檀君世紀)

揆園史話에는 烏斯丘 天皇 때 夏나라 정벌 기사도 나오지만 이기지 못했다(壬儉烏斯征夏王后相 不克 後和)고 했다.

하(夏)나라 왕 후상(后相)을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후에 화해하여 사신을 보내고는 서로 교통하였다 (征夏王后相不克後和遣使相通 揆園史話 檀君紀)

揆園史話에는 丙寅年이 4世�� 檀君 烏斯丘의 즉위 원년이라 했다. 또 烏斯丘를 烏斯라고 기술하고 있다. 烏斯丘 檀君의 즉위원년은 甲申年(B.C. 2137)이다.

庚寅年은 달문(達門) 임금의 원년이다. 서쪽으로 설유(稧兪)를 달래고 북쪽으로 앙숙(軮肅)을 진정시켰으며, 남으로 하(夏)나라를 물리치고 동쪽은 창해(蒼海)에 이르렀다 (庚寅歲壬儉達門元年 … ��乃西撫稧兪北安軮肅南攘夏東至于蒼海 揆園史話 檀君紀)

6世�� 檀君 達門의 즉위원년은 戊寅年(B.C. 2083)이다. 夏나라는 朝鮮의 남쪽에 있지 않았다. 동쪽은 神市氏 이후 언제나 蒼海(滄海)에 이르렀다.

10世�� 檀君 노을(魯乙)의 즉위 원년 辛卯年(B.C. 1950)을 壬子年으로 날조했다. “처음으로 우리를 만들어 바깥의 짐승들을 길렀다(始作大囿養畜外之獸 檀君世紀).”고 했는데, 이미 太始紀에서 “神市氏가 ��… ��高矢氏에게는 소·말·개·돼지·수리·범 등의 짐승을 사로잡아 데려와서 가두어 기르게 하였다(神市氏乃使 … ��高矢氏生致牛馬狗豚雕虎之獸而牧畜 揆園史話 太始紀)”고 했다. 우리를 만들어 기른 것은 가축 이외의 짐승이었다.

庚寅年은 벌음(伐音) 임금의 원년이다. 이 때 하(夏)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 와서 구원을 청하므로 말량(末良)에게 군사를 일으켜 나아가 구원하게 하였다. 뒤에 夏나라 왕이 또다시 병사를 요청 하였으나 임금이 그의 무도함을 들어 청을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았다. 탕왕(湯王)이 상(商)나라를 일으키고 크게 어진 정치를 닦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덕이 있는 군주로다. 서로 침범할 수 없도다” 하고는 군사를 거두어들인 뒤 화해 하였다 (庚寅歲壬儉伐音元年 … ��時夏王遣使請援乃使末良興兵進救後夏王復請兵壬儉以其無道却而不許及湯王商大修仁政壬儉曰有德之君也不可相侵乃戢其兵後和 揆園史話 檀君紀)

伐音은 15世�� 檀君 代音(혹은 後屹達)의 誤記다. 檀君世紀에는 “殷나라 왕 소갑(小甲)이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구했다(庚辰元年殷主小甲遣使求和)”고 했다. 다음 기사가 같다. “이 해에 80 분의 1의세법을 개정하였다(是歲改八十稅一之制).” 小甲이 화친을 구하자 군대를 거둔 것이지, 殷(商)나라 왕이 덕이 있어, 먼저 군대를 거두고 화해한 것은 아니다. 代音의 즉위 원년은 庚寅年이 아니라 庚辰年(B.C. 1661)이다.

庚午年은 아물(阿勿) 임금의 원년이다. 아우 고불가(固弗加)에게 영을 내려 낙랑홀(樂浪忽)을 다스리게 하였다. 웅가(熊加) 을손(乙孫)을 보내 남쪽으로 정벌을 나간 군사들을 살펴보게 하고는 상(商)나라 땅에 고을을세웠다. 뒤에 商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화해하지 않으니 병사를 진격시켜 이를 공격하고는 얼마 있지 않아 물러나왔다 (庚午歲壬儉阿勿元年令弟固弗加治樂浪忽遣熊加乙孫觀南征之兵立邑商地後商人互爭不和乃進兵攻之尋罷 揆園史話 檀君紀)

檀君世紀에는 23世�� 檀君은 아홀(阿忽)이며, 즉위년��도는 甲申年(B.C. 1096)이다. 또한 固弗加는 檀帝의 아우가 아니라, 叔父이다. ”��첫 해(甲申)에 황숙(皇叔)인 고불가(固弗加)에게 명을 내려 낙랑홀(樂浪忽)을 다스리게 하고 웅갈손(熊乫孫)을 보내어 藍國의 임금과 함께 남쪽을 치는(南征) 병사들을 돌보게 하였다(甲申元年命皇叔固弗加治樂浪忽遣熊乫孫與藍國君觀南征之兵).

壬寅年은 솔나(率那) 임금의 원년이다. 북쪽 궁벽한 곳으로 순행을 나갔다가 어린 백성들이 어렵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달팽이도 집이 있고(蝸牛有室) 벌과 전갈에게도 먹이가 있는데(蜂蠆有餌) 어찌 나의 백성을 유랑 하게만 하겠는가”라고 하며, 백성들에게 권하여 물자를 서로 교환하고 옮기게 하여 그 쓰임새를 더욱 넓히게 하였다. 따라서 남북의 백성들이 배와 수레를 사용하여 서로 교통하게 되었다 (壬寅歲壬儉率那元年出巡北鄙見小民艱苦爲生歎曰蝸牛有室蜂蠆有餌安使我民有或流離耶乃勸民貿遷以廣其用於是南北之民舟車相通 揆園史話 檀君紀)

25世�� 率那 檀君의 원년은 辛亥年(B.C. 1183)이다. 檀君世紀에는 이미 2世�� 檀君 부루(扶婁) 때 시장의 저울과 가격을 통일했다.

癸卯 3년��(B.C. 2238) 말(斗)과 저울을 모두 관청의 표준에 따르도록 하였고 베(布)와 모시(苧)의 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게하며, 백성들이 서로 속이지 않으니 멀고 가까운 곳이 두루 편했다 (癸卯三年 … ��斗衡諸器悉準於官布苧市價無處有二民不自欺遠近便之 檀君世紀)

또한 檀君世紀 에서는 4世�� 檀君 烏斯丘 “庚寅 7년��(B.C. 2131) 배 만드는 곳을 薩水의 상류에 설치(庚寅七年設造船于薩水之上)”했고, 11世�� 檀君 道奚 “乙亥 46년��(B.C. 1846) 송화강(松花江) 기슭에 관청을 세우니 배(舟)와 노(楫)등 기물이 크게 세상에 퍼졌다(乙亥四十六年設作廳于松花江岸舟楫器物大行).”고 했다.

戊午年은 추로(鄒盧) 임금의 원년이다…. 丁卯년은 두밀(豆密) 임금의 원년이다. 사람을 시켜 환검(桓儉) 이래 열성조(列聖祖)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여 궁문의 안쪽에 걸어 두고는 입조(入朝)하여 알현하는 사람에게 이를 읽도록 하였다 (戊午歲壬儉鄒盧元年….丁卯歲壬儉豆密元年使人記桓儉以來列聖之詞掛於宮門內側使出入朝覲者閱之 揆園史話 檀君紀)

26世�� 檀君 鄒盧의 즉위 원년은 己卯年(B.C. 1062) 이다. 또한 27世�� 檀君 豆密의 즉위 원년은 甲申年(B.C. 997)이다.

乙亥年은 오루문(奧婁門) 임금의 원년이다. 도읍을 낙랑홀(樂浪忽)로 옮기고 진번후(眞番侯)를 시켜 옛 도읍을 감독하게 하였다 (乙亥歲壬儉奧婁門元年遷都樂浪忽使眞番侯監舊都 揆園史話 檀君紀)

34世�� 檀君 奧婁門의 즉위 원년은 丙午年(B.C. 795)이다. 朝鮮의 도읍은 寧古塔에서 藏唐京으로, 白岳山으로 다시 藏唐京으로 옮겨졌다. 樂浪忽에 도읍한 적이 없다. 23世�� 檀君 阿忽 때 皇叔인 固弗加가 다스린 곳이다.

寧古塔에서는 10년��간 있었고, 藏唐京은 천년 제업의 땅2)이고, 白岳山은 22世�� 檀君 索弗婁가 檀君으로 즉위한 후 丘勿(揆園史話에서는 丘忽이라 했다)이 즉위 이전3)까지 朝鮮의 도읍이었다.

그러므로 癸卯年은 “고열가(古列加) 임금의 원년이다 …. 임금은 이에 제기(祭器)를 받들고 당장경(唐莊京)으로 피하여 거처 하다가 마침내는 아사달(阿斯達)에 자리를 잡았다. 기내(圻內)의 백성들 가운데 임금을 좇아 온 자가 매우 많았는데, 모두 唐莊京에 집을 정하였다(癸卯歲壬儉古列加元年….壬儉乃奉祭器遜居于唐莊京遂宅于阿斯達圻內民從來者甚衆皆宅于唐莊京 揆園史話 檀君紀).”도 사실이 아니다. 藏唐京은 44世�� 丘勿 이후 멸망 당시까지 朝鮮의 도읍이었다. 阿斯達도 寧古塔, 藏唐京, 白岳山세 곳이나 되니까, 불분명한 말이다. 阿斯達은 지명이 아니라 도읍지를 일컸는 보통명사이다.

北崖의 거짓말은 이미 慈烏支 한웅에 대한 기술에서 본격화 되었다.

치우씨(蚩尤氏)는 이에 공상(空桑)에서 제위에 오르고 병사를 되돌려 탁록(涿鹿)의 들판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또 크게 패퇴시켰다 (蚩尤氏乃於空桑卽帝位回兵圍攻於涿鹿之野又大破之 揆園史話 太始紀)

慈烏支 한웅은 배달의 天皇으로 즉위한 후 中土를 정복했다. 누구도 두 번씩 즉위식을 거행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慈烏支 한웅은 병사를 되돌리지 않았다. 진격시켰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은 즉시 하늘에 제사지내 천하의 태평을 맹세 하였다.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涿鹿)을 에워싸 일거에 이를 멸망시켰다(蚩尤天王乃卽祭天而誓告天下泰平更復進兵圍迫涿鹿一擧而滅之 太白逸史 神市本紀)

윗글 기사 뒤에 오는 말이 檀君世紀와 揆園史話의 기사가 똑같다. “관자(管子)가 말하는 바 ‘천하의 임금(天下之君)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管子所謂天下之君頓戰一怒伏尸滿野者是也).’는 대목이 이를 말함이다.” 北崖 스스로 진역유기(震域遺記)만을 보고 揆園史話를 썼다고 밝혔는데, 太白逸史는 대변경(大辨經)이 출처라고 했다.

揆園史話의 날조기사와 최종적으로 날조한 淮垈, 海垈를 보고 풀이한 모 사이트 (http://bluecabin.com.ne.kr/kyuwon/main.htm) 에 보면, 黃河와 淮水 사이(오늘날의 商水쯤)에 空桑이 있다 하고, 우리나라는 난하(灤河) 이서에 그려 두었다. 空桑 이동까지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三聖紀全 下篇, 太白逸史 神市本紀는 무시하고 空桑과 우리나라를 뚝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空桑은 楡罔이 거처를 정한 곳일 뿐, 楡罔의 땅은 空桑만이 아니고, 주변(空桑 이동을 뺀 空桑 이북, 이서, 이남)을 포함한다. 우리나라가 空桑과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空桑만을 향해 한 방향4)에서 진격하면, 空桑에 도달하기도 전에 측면 공격 및 배후공격에 놓이게 된다.

승리는 고사하고, 궤멸 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용케 궤멸의 위기를 피했다고 해도, 난하(灤河) 이서까지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요행히 날조한 淮岱와 海岱로 흩어져 농성전을 펼친다 해도 고립되어 있으므로 굶어죽기 쉽상이다.

근공원교(近攻遠交). 멀리 있는 나라와는 교류하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 한다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전쟁의 상식이다. 가까운 나라를 놔두고 먼 나라를 공략해서 설령 성공했다 해도 적진 속에 자국 영토를 확보했다는 소리이다. 그 땅을 지킬 수 있는가.

더구나 (http://bluecabin.com.ne.kr/ kyuwon/main.htm) 에서는 탁록(涿鹿)이 北京이라고 주장한다. 慈烏支 한웅이 병사를 ‘되돌려’ 涿鹿을 공략, 패퇴 시켰다는 揆園史話에 따른 해석이다. 軒轅은 길을 내주고, 다시 慈烏支 한웅과 맞붙는다는 것이다. 慈烏支 한웅이 먼 곳부터 치고, 가까운 곳을 나중에 공략했다면, “군사를 주재하는 자가 절대 제사지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소호(少昊 : 揆園史話에는 少顥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패했고, 죽기로 작정 했던지 그 너른 중국 대륙을 다 놔두고, 楡罔과 함께 우리나라 국경 쪽으로 달아났다5)는 것이다.

涿鹿이 北京이고, 空桑이 상수(商水)라면(空桑 이동이 우리나라 땅이니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가까운 涿鹿부터 공략해야 한다.

揆園史話는 慈烏支 한웅이 中土에서 물러 나왔다고 한 반면 太白逸史에는 中土에서 물러 나왔다는 기사가 없다.

치우씨(蚩尤氏)가 비록 물러나 돌아 왔지만 중토는 이로서 쓸쓸해지고, 유망(楡罔) 또한 다시 그 제위를 회복하지 못하여 염제(炎帝)의 유업은 이로서 영원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헌원(軒轅)이 대신 중토의 주인이 되었으니, 곧 황제(黃帝)이다. 그러나 치우씨(蚩尤氏)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되었기에 황제는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蚩尤氏雖然退歸中土以是蕭然楡罔亦不得復位炎帝之業以是永墜矣自是軒轅代爲中土之主是爲黃帝而蚩尤氏兄弟諸人乃永據幽靑聲威自是不减黃帝氏亦不得自安終其世 揆園史話 太始紀)

헌원(軒轅)이 이로써 망연히 사라지니 유망(楡罔)도 이에 따라 영원히 떨어져 버렸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의 업적은 세상에 전하여 능히 떨치고 그윽한 푸르름 속에 그 명성과 위엄을 떨어지지 않고 있음이라. 헌원(軒轅) 이래로 세상은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그가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베고 눕지를 못했다(軒轅以是索然楡罔亦從以永墜矣蚩尤天王之餘烈世襲能振盡有幽靑聲威不墜軒轅以來世不自安終其世而未嘗安枕而臥 太白逸史 神市本紀)

바로 뒤에 둘 다 “史記에 이른바‘ 산을 헤쳐서 통로를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涿鹿의 물가에 도읍만 정하고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니 항상 거처하는 곳은 없었으며, 군사와 병졸들로 진영을 호위하게 하였다’고 한 것은 그 전전긍긍해 하는 마음을 역력히 볼 수 있다(史記所謂披山通路未嘗寧居邑于涿鹿之河遷徙往來無常定處以師兵爲營衛者蓋其戰兢之意歷歷可觀)”가 나온다. 中土의 주인은 軒轅이 아니라 慈烏支 한웅이었다.

軒轅이 중토의 주인 이라면 神農(炎帝)의 혈통도 끊이지 않은 것이 된다. 神農은 소전(少典)의 아들이고, 軒轅은 少典의 별고(別故)인 公孫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楡罔 집안과 軒轅 집안은 대대로 누비혼인(두 姓 사이에 대대로 겹쳐서 하는 婚姻)까지 했다고 날조하지 않았던가.

이때 치우씨(蚩尤氏)가 우러러 천체의 형상을 관찰하고 굽어 민심을 살펴보니 中土에 왕성한 기운이 점차 번성해지고, 또한 염제(炎帝)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굳게 단결하여 가볍게 모두 죽여 버릴 수 없으며, 하물며 각각의 백성들이 그들의 군주를 섬기는데 무고하게 함부로 죽일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물러나 돌아갈 것을 마음먹고 형제와 종당(兄弟宗黨)의 무리에게 힘써 크게 싸워 위세를세움으로서 적이 감히 추격하여 습격할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게 한 뒤, 다시 헌원(軒轅)과 크게 싸워 한 무리를 도륙한 후에 비로소 물러 나왔다. 이때 부장 가운데 불행히도 서둘러 공을세우려다 진중에서 전사한 자가 있었는데, 史記에서 이른바 ‘마침내 치우 라는 자(蚩尤者)를 사로잡아 죽였다’라고 한 것은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치우씨(蚩尤氏)는 이에 동쪽으로 회대(淮垈)의 땅에 할거하고 있으면서 이로써 헌원(軒轅)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막고 있었으나, 그가 죽자 점차 물러서기에 이르렀다(時蚩尤氏仰觀乾象俯察人心深知中土旺氣漸盛且炎帝之民所在固結不可勝誅况各事其主不可漫

殺無辜乃決意退還使兄弟宗黨務要大戰而立威使敵不敢生意追襲復與軒轅大戰混殺一陣然後方此時部將不幸有急功陣沒者史記所謂遂禽殺蚩尤者盖謂是也蚩尤氏乃東據淮岱之地以當軒轅東進之路及至其沒漸至退鐛矣 揆園史話 太始紀)

(헌원이) 더욱더 크게 군사와 말을 일으켜 우리의 신시(神市)를 본 따 널리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또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감히 100 번이고 싸우려고 나섰다. 이에 天王은 불같이 진노하사 형제와 종당(兄弟宗黨)들로 하여금 싸움의 준비에 힘쓰도록 하면서 위세를 떨쳐서 헌원(軒轅)의 군으로 하여금 감히 공격해 올 뜻을 품지도 못하도록 하였다. 한바탕 싸움이 크게 일어나자 한 개의 진(陳)을 여지없이 죽여 버린 후에야 비로소 멈췄다. 우리 쪽 장수 가운데에 치우비(蚩尤飛)라는 자가 있어 불행하게도 공을 서둘다가 진중에서 죽게 되었다. 사기(史記)에서 말하는 ‘치우(蚩尤)라는 자를 잡아 죽이다’라고 기록한 대목은 아마도 이를 말하는 것인 듯하다. 천왕은 크게 화가 나시어 군사를 움직여 새로이 돌을 날려 보내는 기계(飛石迫擊之機)를 만들어 진을 치고 나란히 진격하니 적진은 끝내 저항할 방도조차 없었다. 이에 정예를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은 예탁(芮涿)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淮垈)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게 하고, 헌원(軒轅)의 동쪽 침략의 길을 지키게 하였다(益大興士馬效我神市而廣造兵甲又制指南之車敢出百戰天王赫然震怒使兄弟宗黨務要大戰而立滅使軒轅之軍不敢生意於追襲與之大戰混殺一陳然後方熄是役也 我將蚩尤飛者不幸有急功陳沒 史記所謂擒殺蚩尤者蓋謂此也 天王赫怒動師新造飛石迫擊之機成陳聯進賊陳終不能抗也 於是分遣精銳西守芮涿之地東 取淮岱爲城邑而當軒轅東侵之路 太白逸史 神市本紀)

그 다음에는 揆園史話, 太白逸史 둘 다 “지금 漢書·地理志에 의하면, 그의 묘가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의 괄향성(闕鄕城) 안에 있으며, 그 높이가 다섯 장(丈)이라 한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주민들이 한결같이 10월에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서 한 폭의 진홍빛 비단과도 같이 솟아오른다고 하니,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치우기(蚩尤旗)'라 한다(今據漢書地理志其陵在山東東平郡壽張縣闕鄕城中高七丈秦漢之際住民猶常十月祭之必有赤氣出如疋絳謂之蚩尤旗).”가 이어진다.

“中土에 왕성한 기운이 점차 번성해지고, 또한 炎帝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굳게 단결하여 가볍게 모두 죽여 버릴 수 없(中土旺氣漸盛且炎帝之民所在固結不可勝誅)”는 민심 따위는 애초부터 中土에 없었다. 그 땅은 누가 들어가도 지배할 수 있는 땅이었다. 그 땅은 누가 들어가 지배해도 환영하는 땅이었다.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고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는 華夏가 지배자가 누군들 환영하지 않았을 것인가.

北崖는 한단(桓檀) 역사책은 震域遺記만을 참고했다고 했으나, 太白逸史에는 大辨經이 출처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震域遺記의 저자라는 청평(淸平) 이명(李茗)의 말을 줄곧 인용하고 있다. “청평산인(靑平山人) 李茗이 있었는데, 그는 고려 때의 사람으로서 震域遺記세 권을 저술하였다.…. 나는 차라리 淸平의 말을 취함에 의심이 없는 것이다(古有淸平山人李茗者高麗時人有震域遺紀三卷…. 余寧取淸平之說而欲無疑云).” “淸平이 말하기를 ‘속말수(粟末水)의 북쪽에 발해(渤海)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의 땅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檀君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임금성(壬儉城)으로 곧 平壤이다. 북으로 상경(上京) 홀한성(忽汗城)과는 육백여 리 떨어졌으며(淸平云粟末水之陽有渤海中京顯德府地 此乃檀君始都處故壬儉城卽平壤也 北去上京忽汗城六百里云)” 라고 하였다. 檀君의 첫 王儉城은 金富軾이 말한 西京으로 粟末水보다 한참 저위도에 있었다. 上京 忽汗城이 곧 平壤城으로 첫 王儉城과는 700 km나 떨어진 거리이다.

“이 때 부장(部將) 가운데 불행히도 서둘러 공을세우려다 진중에서 전사한 자가 있었는데, 사기에서 이른바 ‘마침내 蚩尤氏를 사로잡아 죽였다’라고 한 것은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此時部將不幸有急功陣沒者史記所謂遂禽殺蚩尤者盖謂是也).”? 中土가 慈烏支 한웅 이래로 우리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蚩尤를 잡아 죽이다’고 말할 수 있는가. 大辨經 역시 明 때 날조한 역사를 보고 李氏朝鮮人이 썼을 가능성이 높다.

太白逸史 神市本紀는 ‘震域遺記의 神市紀에서 말한다(震域留記神市紀云).’로 시작하는데, 그 끝에 이렇게 써놓았다. “공구(孔丘)의 春秋에 이르러 이(夷 : 원전 표기는 大밑에 弓을 표시했다)의 이름을 마침내 융적(戎狄)과 나란히 냄새나는 더러운 호칭이 되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孔丘氏春秋之作而夸之名遂與戎狄並爲腥臊之稱惜哉).” 春秋는 孔子가 쓰지도 않았고, 미개 中寇가세계를 밝힌 문명을 창출한 대제국을 오랑캐라 부를 수도 없었다. 게다가 揆園史話의 많은 내용이 檀君世紀에 나온다. 달랑 大辨經만 보고 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孔丘가 우리나라를 오랑캐라 불렀다는 소리는 揆園史話에도 나온다. 震域遺記를 보고 쓴 유일한 것이 아닐까 싶다.

거짓말을 하다 보니까, 일관성이 없어서 “神市의 말기에 蚩尤氏의 형제가 비록 涿鹿으로부터 물러나서 돌아왔다(神市之末蚩尤氏兄弟雖自涿鹿退歸 檀君紀)”고 하면서도 “通志·氏族略에 ‘치(蚩)씨는 蚩尤의 후손이다’라 하였으니, 곧 이들은 蚩尤氏의 후손으로서 영원히 漢나라 땅에 머무른 자들이다(通志氏族略蚩氏蚩尤之後也云 則是蚩尤氏之後而永居漢土者也 檀君紀).”는 둥, “蚩尤氏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되었기에 황제는세상을 마칠 때까지 편안함을 얻을 수 없었다(蚩尤氏兄弟諸人乃永據幽靑聲威自是不撼黃帝氏亦不得自安 終其世 太始紀).”는 둥 횡설수설 했던 것이다. 檀君世紀의 기사가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포기한 적이 없음을 알려준다. “甲戌 67년��(B.C. 2267). …. 淮垈 지방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分朝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케 했다(甲戌六十七年 … ��定淮岱諸侯置分朝以理之使虞舜監其事 檀君世紀).”�� 이미 淮水 중, 하류는 扶蘇, 扶虞, 扶餘가 다스리고 있었다. 虞舜에게 맡긴 淮垈는 淮水 상류 즉 長江(怒江) 상류와 黃河(金沙江) 상류 사이다. 淮水 상류도 우리나라 땅이니까, 제후라 한 것이다. 말 안 듣는 제후들 이라서 평정해야 했던 것이다.

내가 일찍이 나라의 역사를 써보고자 하는 뜻은 있었으나 본디 그 재료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으며, 또한 이름 있는 산의 석실에 조차 귀하게 비장된 것 하나 없음에, 나와 같이 청빈(淸貧)한 필부(匹夫)가 이 또한 어쩔 도리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산골짜기에서 청평(淸平)이 저술한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얻으니, 그 가운데 삼국 이전의 옛 역사가 있음에 비록 간략하여 상세하지는 않으나 항간(巷間)에 떠도는 구구한 말들에 비하면 자못 내비치는 기상이 견줄 바가 아니라, 여기에 다시 중국(漢)의 사서에 전하는 모든 글들을 가려 뽑아 사화(史話)를 지으니, 그 재미로움은 밥 먹는 것도 자주 잊을 지경이었다(食肉忘味之). 비록 그렇지만 지금의 사람 가운데 과연 누가 이러한 것에 뜻이 있어 그 감흥을 같이 할 수 있으리오! 경전에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듣게 되면 저녁에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朝聞道 夕死可矣 )’ 하였으니, 역시나 오직 이를 두고 한 말 같구나. 만약 하늘이 나에게 오랜 수명을 누리게 한다면 하나의 역사를 완성하게 될 것이지만, 이는 단지 그 선구(先驅)에 불과할 뿐이로다. 오호라! 후세에 만약 이 책을 붙잡고 곡소리를 내는 자가 있다면, 이는 곧 나의 유혼이 무한히 기뻐할 바로다(余嘗有志於述史 而固無其材 且名山石室 渺無珍藏 以余淸貧匹夫 亦竟奈何哉 然何幸峽中得淸平所著震域遺記中有三國以前故史 雖約而不詳 比於巷間所傳區區之說 尙可吐氣萬丈 於是復采漢史諸傳之文 以爲史話 頗有食肉忘味之槪矣 雖然 凡今之人 孰能有志於斯而同其感者哉 經曰 朝聞道 夕死可矣 亦惟此而已矣 若天假我以長壽 則卽可完成一史 此不過爲其先驅而已也 噫 後世若有執此書而歌哭者 是乃余幽魂無限之喜也 揆園史話 序)

갈 지(之) 자 무늬 대롱(筒) 형의 항아리 또는 두레박(筒形罐) 역시 신석기시대의 유물로 알려져 있다.

이제 北厓가 얼마나 교활한 모사인지, 어째서 실명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알았을 것이다. 北崖가 揆園史話를 쓴 목적은 먼 훗날, 濊貊族을 韓民族으로 만드는 것 그 이상은 아니다. 北崖가 살았을 당시는 濊貊族을 아무도 韓民族이라 여기지 않았다.

“이름 있는 山의 石室에조차 貴하게 秘藏된 것 하나 없(名山石室渺無珍藏)”을 정도로 李氏朝鮮은 혈안이 되어 우리나라 역사책을 수거했던 것이다. 그래놓고 求書의 諭示?

우리나라 역사를 抹殺한 후 李成桂가 “우리나라가 三韓을 통일한 이후 성실 근면하게 大國을 섬겼고, 홍무(洪武) 2년��(1369) 明나라에 복종했던 정성도 그러했다(我國家統三以來事大以勤玄陵於洪武二年服高麗史 辛禑列傳).”로 시작하는 상소문을 강능제1)에게 올렸다고 날조한 李氏朝鮮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高麗)가 어서어서 멸망해 줘야 했다.

그래서 北崖는 “유독 藍侯만이 제후들의 강성함 가운데에서도 뛰어나서 항상 모든 제후들을 거느리고 국정을 행하게 되었기에 이로서 열국이 되었다(獨藍侯者出諸家之右時常役率羣后以行國政是爲列國)”고 날조했던 것이다.

북방 신석기 시대 초기 문화 분포도

北崖가 스스로 밝혔듯이 揆園史話는 한단사(桓檀史)를 쓴 책이다. 그래서 太始紀와 檀君紀로 나누어져 있다. 그런 한단사에 엉뚱하게도 미개 濊貊族에 대한 기술을 대폭 할애하고 있다. 날조한 미개 濊貊族史가 여러 종족명으로 등장하면서 한단사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揆園史話는 망각된 한단사를 후세에 전하려는 애국심에서 쓴 글이 아니다. 濊貊族을 한민족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썼던 것이다.

藏唐京은 千年 帝業의 땅이니까 “3세 가록(嘉祿) 첫해, 서울을 九月山 唐藏京에 정했다.”는 檀奇古史는 사실이 아니다. “丁丑 16년��(B.C. 2084) 5世�� 檀君 丘乙이 친히 藏唐京으로 행차 하셔서 三神의 壇을 봉축하고 많은 한화(桓花)를 심었다(丁丑十六年親行藏唐京封築三神壇多植桓花 檀君世紀).”�� 이 당시는 藏唐京이 阿斯達(도읍) 이니까, 궁 밖으로 나온 것을 藏唐京으로 행차 했다고 한 것으로 보이며, 한화(桓花 : 무궁화)를 많이 심었다.

“丁巳 2년��(B.C. 1984) 청해(靑海)의 褥薩 우착(于捉)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니 檀帝께선 상춘(常春)으로 몸을 피하신 후, 새 궁궐을 九月山의 남쪽기슭에 창건하게 하셨다(丁巳二年靑海褥薩于捉擧兵犯闕帝避于常春創新宮于九月山南麓).”는 檀君世紀 역시 사실이 아니다. 9世�� 아술(阿述)檀帝 “2년�� 여름에 靑海侯 간촉(干促 : 于捉도 함께? 于捉의 오기는 아닐까?)이 군사를 일으켜 성에 들어가 궁궐을 포위하니, 임금께서는 常春으로 피난하시고, 上將 지간속(支干粟)이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치니, 7월��에 임금께서 다시 宮으로 돌아오셨다.”고 한 檀奇古史가 맞다. 檀君世紀는 檀君이 피신해 새 거처를 마련했기 때문에 궁궐을 창건 했다고 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식적 으로도 난을 피해 간 곳에다 천도해 아주 눌러 앉았다고 보기 어렵다.

“성스러운 檀君님께서 신경(新京)에 나아가심은 마치 저울추 저울그릇과 같으니라(聖主幸新京如秤錘).” 6世�� 檀君 達門의 기사다. 이 당시 도읍지는 唐藏京으로 그에 앞서 寧古塔이 도읍 이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신경(新京)은 唐藏京이다. 唐藏京이 저울추, 저울그릇이라는 것인데, 잘못 쓴 말이다. 그 다음에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저울그릇은 白牙岡이요 저울대는 소밀랑(蘇密浪)이라. 저울추는 안덕향(安德鄕)이니 앞뒤가 균형이 잡혀 평균을 이뤄 나란히 있고, 덕을 신뢰하고 신정(神精)을 지키며 나라를 일으켜 태평을 유지하니라(極器白牙岡秤幹蘇密浪錘者安德鄕首尾均平位賴德護神精興邦保太平).” 唐藏京은 저울추가 아니고, 저울그릇이다. 唐藏京이 白牙岡 이었다.

“庚寅年, 명을 받아 三神壇을 탕지산(湯池山)에세우고 관가(官家)를 옮기니 湯池는 옛날의 安德鄕이다(庚寅以命設三神壇于湯池山徙官家湯池古安德鄕也 番韓世家).”�� 이 당시 계전(季佺 : 임승국의 한단고기 역대표에는 李佺으로 되어 있다)이 番韓 이었다. 番韓은 丹江 이남에서 岷江 이서로 나라를 옮긴 적이 있다. “치두남(蚩頭男 : 番韓의 시조)은 蚩尤天王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게세상에 알려졌다. 檀君이 곧 불러 보시더니 이를 기특하게 여기시고 番韓에 벼슬을 주고 겸하여 우(虞)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庚子年 요중(遼中)에 열두 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險瀆), 영지(令支), 탕지(湯池), 통도(桶道), 거용(渠鄘), 한성(汗城), 개평(蓋平), 대방(帶方), 백제(百濟), 장령(長嶺), 갈산(碣山), 여성(黎城)이 그것 들이다(頭男蚩尤天王之後也以勇智著聞於世檀君乃召見而奇之卽拜爲番韓兼帶監虞之政庚子築遼中十二城險瀆令支湯池桶道渠鄘汗城蓋平帶方百濟長嶺碣山黎城是 番韓世家).”��

티벳고원 남부는 扶餘의 封土이고, 蚩頭男이 받은 봉토는 丹江 이남이다. 이 당시 遼水는 怒江 근처에 있던 작은 강이다. 蚩頭男이 番韓에 임명된 것은 기원전 2241년��으로, 淮垈 지방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分朝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虞舜이 감독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虞舜은 蚩頭男의 감독을 받았다. 극성스러운 燕나라나 漢나라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사실상 遼中에 城을 12 개나 쌓을 필요는 없었다. 蚩頭男은 九黎河(嘉陵江) 유역에 성을 쌓아 辰韓을 수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湯池와 安德鄕은 嘉陵江 유역에 있었다. 삼협(三峽) 서쪽에 白帝城이 있지만, 遼中이 아니다. 밀린 지명이다.

白牙岡이 唐藏京이고, 安德鄕은 番韓의 도읍 이니까, 결국 저울대 蘇密浪은 馬韓의 도읍이다. 檀君王儉이 三韓管境을 만들 때 馬韓은 達支國에 도읍하고 白牙岡 이라고도 불렀다. 白牙江을 蘇密浪 이라고도 불렀는지, 천도한 곳이 蘇密浪인지는 알 수 없다.

“이 해(庚子 93년�� B.C. 2241) 3월 15일 檀君께선 봉정(蓬亭)에서 붕어하시니 교외(郊外)로 10 리쯤 떨어진 곳에 장사지냈다(是歲三月十五日帝崩于蓬亭葬于郊外十里之地 檀君世紀).”�� “檀君廟를 寧古塔 서쪽에 건립 하였다(檀奇古史).”�� 하지만 檀君世紀 에서는 같은 해(戊子 7년��), 寧古塔 西門 밖 감물산(甘勿山) 밑에 삼성사(三聖祠)를세우고 33世�� 檀君 甘勿이 친히 제사를 올렸다(戊子七年寧古塔西門外甘勿山之下建三聖祠親祭)고 했다. 三聖祠를세운 것을 檀君廟로 바꾼 것이다. 47世�� 檀君 高列加에 이르러 檀君王儉의 사당을 白岳山에 새로세우기는 했다. “己卯 14년��(B.C. 282) 檀君王儉의 廟를 白岳山에세우고 유사(有司)에게 명을 내려 사철(四時)마다 제사 지내게 하고 檀帝께서는 1년��에 한 번 친히 제사를 지냈다(己卯十四年立檀君王儉廟于白岳山令有司四時祭之帝歲一親祭).”

九月山은 檀君世紀에서 太白山 만큼이나 자주 나오는 산이다. 그만큼 자주 제사 드리는 九月山도 藏唐京 가까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長安의 서쪽을 보면 太白山(4166m)이 있다. 太白山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長安의 동쪽을 보면, 화산(華山 1997m)이 있다. 원래 華山은 中土인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다.

華夏의 華에 관해 장태염(章太炎)은 말하기를 華는 화산(華山)의 산 이름을 따서 된 것인데, 여러 華들의 이름이 그 겨레가 처음에 이른 땅이름을 따서 되었다고 하였으며 ”��夏”��란 이름이 ”��夏水”��라는 강물 이름을 따서 되었다고 하였다.

(http://www.hopia.net/ries/silk/silk10-3.htm, 실크로드 絲綢之路 제 10호 참조)

(華는 華山에서 땄는데, 華가 여럿이나 되고, 여러 華들의 이름이 그 겨레가 처음에 이른 땅이름을 따서 되었다면, 華山이 여러 개란 말인가. 하기야 鮮卑族의 종족명을 땄다는 鮮卑山도 여러 개가 있다)

華山은 밀려난 지명 이었던 것이다. 華山은 朝鮮時代의 九月山 이었다. 歷代 檀君은 西安(藏唐京)에 거처 하면서 동쪽 산과 서쪽 산에서 수시로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6世�� 檀君 達門 때(B.C. 2048)인 “壬子 35년�� 모든 汗을 상춘(常春)에 모이게 하여 三神을 九月山에 제사케 하고 神誌 발리(發理)로 하여금 서효사(誓効詞)를 짓게 하였다.(壬子三十五年會諸汗于常春祭三神于九月山使神誌發理作誓効詞 檀君世紀)” “壬子年에 韓은 명령을 받고 常春에 들어가 九月山에서 三神님께 제사지내는 것을 도왔다(壬子韓以命入常春助祭三神于九月山 太白逸史 三韓管境本紀 馬韓世家 上).” “丁巳 2년��(B.C. 1984) 靑海의 褥薩 于捉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니 檀帝께선 常春으로 몸을 피하신 후, 새 궁궐을 九月山의 남쪽 기슭에 창건하게 하셨다(丁巳二年靑海褥薩于捉擧兵犯闕帝避于常春創新宮于九月山南麓 檀君世紀).” “壬寅年에 아들 물한(勿韓)을 파견하여 九月山에 가서 三聖廟에 제사 지내게 하였으니 이 사당은 常春의 주가성자(朱家城子)에 있다(壬寅遣子勿韓往九月山助祭三聖廟廟在常春朱家城子也 三韓管境本紀).” 九月山은 늘 常春과 함께 나온다. 常春에 九月山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檀君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大荒)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偰兪)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해대(海垈)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창해(蒼海)에 닿았다(當是之時檀君之化 洽被四土 北曁大荒 西率偰兪 南至海岱 東窮蒼海 揆園史話).

朝鮮 개국 당시의 상황이다. 朝鮮은 배달의 영토 일부에서 개국한 나라이다. 이 당시는 扶餘가 南夷를 평정하기 전이라, 朝鮮의 영토는 淮垈가 남방 하한선 이었다. 淮垈 즉 티벳고원 남부는 扶蘇, 扶虞, 扶餘에게 주고, 蚩尤氏 후손에게는 柴達木盆地를 주었다.

대황(大荒). 荒은 거칠다; 흉년이 들다; 변방 … ��이런 뜻이다. 크게 거친 땅. 大荒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티벳고원과 蒙古高原, 중앙 시베리아고원 뿐이다. 北으로 大荒에 다다른다 했으니, 大荒이 될 수 있는 곳은 蒙古高原과 중앙 시베리아 고원이다. 아직 揚子江 이남을 다스리지는 못하고 있었으니까, 北으로도 중앙 시베리아 고원에 이르지는 못했다. 시베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한 시기는 2世�� 檀君 부루(扶婁) 때이다.

“大荒의 가운데 山이 있으니, 이름하여 불함(不咸)이라 하며 肅愼氏의 나라가 있다(大荒之中 有山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 山海經 大荒西經) 여기서 발전한 것이 太白逸史에 나와 있다. “대저 白頭의 큰 산은 大荒의 가운데 자리 잡았으니 가로가 1,000 리에 뻗쳐있고 높이 200 리로 솟아있다. 웅장하고 험하며 구불구불 꿈틀 거리는듯 거창하여 倍達天國의 진산(鎭山)이라 한다. 神人이 오르내림은 실로 여기에서 시작 되었다(蓋白頭巨岳盤居大荒之中橫亘千里高出二百里雄偉嶝峻蜿蜒磅磚爲倍達天國之鎭山神人陟降實始於此 神市本紀).” 三韓秘記를 인용한 太白逸史의 기록이다. 三韓秘記는 우리나라를 韓半島로 축소하기 위해 李氏朝鮮의 濊貊族이 쓴 글이 분명하다. 北崖가 揆園史話를 쓴 것처럼. 三韓秘記의 글을 인용한 太白逸史의 글도 날조이다.

大荒에 살고 있던 족속은 中奴였다. 大荒의 가운데 있던 山은 華山 정도일 것이다. 티벳고원 가운데 큰 산을 끼고 中奴의 어떤 나라가 있었던 것이다.

“설유(偰兪)는 험윤(獫狁)의 족속이다. 홍수를 만났을 때는 요행히 그 해를 면하더니, 물과 흙이 겨우 안정을 되찾은 뒤 마을과 고을이 쓸쓸해졌다(偰兪者獫狁之屬也 洪水之際 僥倖得免 及看水土纔定而州里蕭然 揆園史話 檀君紀).”�� 夏나라 때는 훈육(獯鬻), 殷나라 때는 험윤(獫狁). 진(秦)·한(漢) 때는 흉노(凶奴)로 불렀다(모두 다 朝鮮時代에 부른 이름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달리 불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偰兪 땅은 타림분지 일대이다. 특히 투르판(Turfan)은 보고다산(博格達山)과 카라우청 山에서 萬年雪이 녹아 여름철에 홍수가 자주 일어난다.

(http://www.uygurpeople.com/tribe/tulufan.htm 참조)

서쪽 변경을 침범하고 동쪽으로 침략해온 것으로(偰兪復侵西鄙 … 乃乘舋東侵 揆園史話 檀君紀) 보아 柴達木盆地를 통해 티벳고원 남부 및 藏唐京으로 침입했다.

“옛적에 夫餘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偰兪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狩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貊)’이라 하였다(昔夫餘民有遁居于偰兪之地 遂與其民雜處 頗習其俗 殆無恒業 以狩獵爲生 獸皮爲服 人謂之貊 揆園史話 檀君紀)”��는 날조기사이다. 티벳고원 남부의 扶餘와 타림분지(塔里木盆地)의 偰兪 사이에는 柴達木盆地가 끼어 있다. 다른 나라를 통과해 이주할 만큼 타림분지가 살기 좋은 땅인가. 타림분지에 산 것은 凶奴이고, 貊族은 中土 서부에 살았다.

동쪽에 있는 큰 바다는 韓半島 東海이다. 동아시아가 우리나라 영토였을 때에도 내내 東海는 韓半島 東海만을 가리켰다. 黃海는 黃海 그대로, 西海는 內陸에 있었다.

6) 중토는 동으로 읍루, 서로 선비와 접했다. 북에는 약수가 있었다 

東鴨綠 皇城. 李氏朝鮮 말 까지도 현 遼水 유역에 高句麗의 平壤城이 있다고 날조했다. 그런데 거란(契丹)이 1세기 이래 현 遼水 상류인 시라무렌(Siramuren) 유역에서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거주했다? 鮮卑가 西遼水 상류 시라무렌 江 유역에 있었다? 현 遼水 유역은 神市가 위치한 땅이다.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 872?~926)가 여러 부족을 통합한 후 中土로 진출하기 위해 926년�� 大震國을 멸망시킨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땅으로 진출하기 위해 907년�� 唐을 멸망 시켰다. 耶律阿保機가 부족 통합한 것은 916년��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後梁의 주전충(朱全忠 : 852~912)이 唐을 멸망 시켰다는 것도 날조다. 한단사(桓檀史)에 거란에 대한 언급이 일체 없는 것은 後代에 캐시미르(Kashmir)를 통해 中土로 침입한 종족이기 때문이다.

미개 中奴史가 文明國史로 둔갑했듯이 거란사(契丹史)도 엄청나게 부풀리면서 몇 번이나 뜯어 고쳐졌다. 太白逸史에는 “감로

(甘露) 27년�� 겨울 庚辰에 遼는 東京 중대성(中臺省)을 없애자 동단국(東丹國)도 없어졌다(甘露二十七年冬十二月庚辰遼罷東京中臺省東丹國除 大震國本紀).”고 했는데, 오늘날에는 “東丹王의 아들인 야율완(耶律阮)이 遼의 3 대 황제인세종(世宗 : 947 ~ 951)이 되었다.”고 날조했다. 東丹王(耶律倍)은 耶律阿保機의 長子로 ‘甘露’라고 개원했다(二月丙午遼太祖建東丹國以長子倍爲人皇王王之建元甘露 大震國本紀).

靺鞨에 대한 설명은 高句麗 이전에는 고작 “金나라는 靺鞨氏에서 나왔으며 靺鞨은 본래 물길(勿吉)로 불렀다. 勿吉은 옛날 肅愼의 땅이다(金之先 出靺鞨氏 靺鞨本號勿吉 勿吉 古肅愼地也 金史世��紀)”는 것 정도다. 그 후 高句麗의 屬民 이라는 말로 건너뛴다. 靺鞨을 周나라 때는 肅愼, 漢나라 때는 읍루(挹婁)라 불렀다? 肅愼은 靺鞨이 아니라 朝鮮 이라고 전술했다.

乙卯年은 두홀(豆忽) 임금의 원년이다. 남후(藍侯)가 도읍을 남쪽으로 옮겨 엄독홀(奄瀆忽)에 거처 하였다. 그곳은 은(殷)나라와 매우 가까우므로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빈(邠)·기(岐) 사이로 나아가게 하여 그 유민들과 더불어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세우고 "��여(黎)"��라고 이름 짓고 여홀(黎忽)에서 다스리게 하니, 이에 마침내 殷나라의 제후 및 서융(西戎)의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거처하게 되었다(乙卯歲壬儉豆忽元年….藍侯….南遷其都 居奄瀆忽與殷逼近使黎巴達將兵 進至邠岐之間 與其遺民相結 立國曰黎 治黎忽 遂與殷家諸侯及西戎之人相雜處 揆園史話 檀君紀)

39世�� 檀君 豆忽은 丙辰年(B.C. 545)에 즉위했다. 中土에는 周나라와 일단의 소국들이 있었다. 저 기사는 檀君世紀에도 나온다. 22世�� 檀君 索弗婁 20년��(B.C. 1266)의 기사다. 이 당시는 殷나라가 있었다. 北崖가 의도적으로 연도를 바꾼 것이다.

殷나라가 존속할 당시는 中土에 南凶奴도, 鮮卑도 없었다. 南凶奴는 기원전 4 백년에, 鮮卑는 3세기 중엽에 中土로 침입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西戎은 靺鞨이다. “檀帝께서는 풍백(風伯)인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 강을 평정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다(帝命風伯彭虞治水定高山大川以便民居 檀君世紀).”�� “武帝가 즉위한 지 몇년�� 만에 팽오(彭吳)가 濊貊 및 朝鮮과의 길을 터놓았다(武帝卽位數年彭吳察濊貊朝鮮 漢書 食貨志).”�� 팽우(彭虞), 팽오(澎吳). 漢書 食貨志의 澎吳는 彭虞를 슬쩍 고친 것이다. 百濟城, 白帝城처럼 韓國史를 훔친 中奴史에는 이런 예가 무수히 많다. 漢 武王 때 기사로 날조한 저 기록은 檀君王儉 때의 기사를 슬쩍 바꾼 것이다. 그러나 檀君王儉 당시 濊貊族은 없었다.


濊貊族은 朝鮮 개국 후 등장한 종족

濊貊族은 朝鮮 개국 후에 우리나라 강역에 등장한 종족이다. “옛적에 夫餘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稧兪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貊)"��이라 하였다(昔夫餘民有遁居于稧兪之地遂與其民雜處頗習其俗殆無恒業以狩獵爲生獸皮爲服人謂之貊 揆園史話).”는 날조기사도 朝鮮 개국 당시에는 貊族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서’융(西戎, 서쪽 오랑캐)이라는 말에서도 濊貊族이 캐시미르를 통해 침입한 종족임을 알 수 있다. 濊貊族은 中央 아시아에서 동진했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나라를 칭하사 朝鮮三韓이라 하니 高離 시라(尸羅) 高禮 南北의 沃沮 東北의 夫餘, 濊와 貊은 모두 그의 管境이었다(始稱國爲朝鮮三韓高離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夫餘濊與貊皆其管境也 太白逸史 神市本紀)”��도 거짓이다. 貊은 12世�� 檀君 阿漢 이래로의 管境이다. 이 기사 바로 앞에 “그 뒤 호를 檀君王儉이라 하는 분이 도읍을 阿斯達에 정하시니 지금의 松花江이다(其後有號曰檀君王儉立都阿斯達今松花江也 神市本紀).”도 날조다.

檀君王儉이 처음 도읍한 곳은 嘉陵江으로 九黎河 이전에는 牛首河라 불렸다. “모든 고을의 지세를 살피고는 太白山 서남쪽 牛首河의 벌판에 도읍을세웠다(相地於諸州 乃建都于太白山西南牛首河之原曰壬儉城 揆園史話).”�� 11世�� 檀君 道亥 46년��(B.C. 1845)에 관청을세우고(乙亥四十六年設作廳于松花江), 12世�� 檀君 阿漢 2년��(B.C. 1833) 외뿔 가진 짐승이 나타난 松花江(戊子二年夏四月一角獸見於松花江北邊)은 오늘날의 岷江이다.

濊貊族은 北崖의 바램과는 달리 藍侯의 백성이 아니라, 突蓋의 백성이다.

乙卯 29년��(B.C. 1806) 맥성(貊城)의 욕살(褥薩)인 돌개(突蓋)를 봉하여 왕으로 삼으셨다(乙卯二十九年命貊城褥薩突蓋封爲汗 檀君世紀)

中土에 침입한 濊貊族이 우리민족이 쌓은 城을 차지하자, 褥薩로 봉했다가, 이윽고 하나의 나라로 인정하고 王(汗)으로 봉한 것이다.

고유 풍속을 간직한 生女眞에서 보듯이 濊貊族은 미개하기 그지없었다. “항시 토굴에 있어 깊은 것을 귀하게 여기어 큰 집은 사다리 아홉 개에 이른다. 돼지 기르기를 즐겨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 기름을 두터히 나누어 몸에 발라 이로써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벌거벗고 그 전후에 베로 가린다. 사람이 냄새가 많이 나고 더러움을 알지 못하여 변소를 가운데 짓고 그 주위에 살았(常爲穴居 以深爲貴 大家至接九梯 好養豕 食其肉 衣其皮 冬以豕膏塗身厚數分 以禦風寒 夏則裸袒 以尺布蔽其前後 其人臭穢不 作於中之而居 後漢書卷八十五 東夷列傳第七十五)”으니까 짐승이나 다를 바 없었다.

濊貊(穢貊)이라는 종족명 자체가 더러운 오랑캐라는 뜻이라고 전술했다. 우리나라는 濊貊族을 대대로 오랑캐라 불렀다. “平壤 땅은 황폐해 진지가 자못 오래 되었으니, 예전의 기초는 비록 남아 있다고 하지만 가시덤불이 무성히 자라고 오랑캐(蕃人)들이 수렵하여 노닐며 주변의 고을을 약탈 하였다는 것이 高麗 太祖 初年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즉 高句麗가 망한 뒤 3 백년이 지난 후 平壤은 가시덤불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渤海人들이 그곳을 수렵하며 노닐었던 것을 그저 ‘오랑캐(蕃人)들이 침입하여 주변의 고을을 약탈했다’라고 한 것은 단지 같은 민족을 욕하는 커다란 해악을 한탄하는 것이다(平壤之地 荒廢頗久 舊基雖存而荊棘滋茂 蕃人游獵 侵掠邊邑者 太祖初年所記也 然則 高句麗亡後三百年 而平壤不免荊棘 渤海人之遊獵其間者 則輒稱之以蕃人侵掠邊邑 則只恨其大害 揆園史話)”? 大震國은 “이 해(735) 唐나라, 新羅 및 倭도 나란히 사신을 보내 朝貢을 바치니 천하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칭송(是歲唐倭及新羅병遣使入貢天下稱爲海東盛國 大震國本紀)”한 아시아의 天子國이었다.

同族을 오랑캐라 부른 나라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李氏朝鮮을세운 濊貊族이다. “저들(滿州族)이 女眞을 대함에 있어서도 이미 오랑캐(蠻胡)로 여기고 그들을 배척하고 있다(彼等之於女眞 已以蠻胡斥之).” “스스로(李氏朝鮮의 濊貊族) 女眞을 오랑캐(胡)로 여겨 물리치고 滿洲를 호로(胡虜)로 여겨 배척한다(而又自却女眞以爲胡斥滿洲以爲虜).” “만주의 오랑캐들을 도륙할 것이다(而戮滿胡).” (이상 揆園史話)

渤海人? “高王의 꿈속에 神人이 나타나 금부(金符)를 주며 ‘천명이 네게 있으니 우리 진역(震域)을 통치하라’고 하였기에, 나라의 이름을 ‘진(震)’이라 했다(高王夢有神人 授以金符曰天命在爾統我震域故國號曰震 揆園史話 檀君紀).”��고 하고서도 北崖는 끝까지 大震國을 渤海라고 부른 濊貊族이다. 震域, 辰韓이 아니라 眞韓이라고 전술했다. 太白逸史에도 辰韓이라 한 것은 고쳐졌기 때문이다. 檀奇古史에는 辰韓 = 眞이라 했다. 그러나 辰은 동아시아를 강역으로 하는 大帝國의 통치자가 직접 다스리는 땅의 이름으로 삼기에는 한참 부족한 글자다.1)

大震國이 아니라 大眞國이었던 것이다. 大眞國을 大震國이라 날조하고, 大眞國은 濊貊族 포선만노(蒲鮮萬奴)가 세운 나라에 할당했다. 大帝國 高麗가 건재한데, 蒲鮮萬奴가 우리나라 제1의 요충지인 遼東에 나라를 세울 수는 없다. 蒲鮮萬奴가 세운 나라는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다. 蒲鮮萬奴가세운 나라의 이름이 渤海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오늘날 渤海가 黃河와 遼水 사이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그 옛날에는 티벳고원 내에 위치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무조[武照 : 무측천(武則天 : 624~705)]가 周나라를 표방? 독재 권력을 휘두르며 탄압정치를 한 여자가 봉건제 나라를 표방했다?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 : 大仲象)가세운 後高句麗가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 : 大祚榮)에 이르러 眞國(朝鮮)을 표방, 국호를 대진국(大眞國)이라 변경한 것을 날조한 기사다.

新羅가 浿水 이남을 가졌다고 날조했으니, 平壤은 大震國 영토다. “新唐書에서는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는 자가 … 동쪽으로 도망하여 遼水를 건너 太白山의 동북을 확보하여 오루하(奧婁河)에 근거하였다(新唐書… 乞乞仲象者… 東走渡遼水保太白山東北阻奧婁河 太白逸史).”�� 太白山의 동북은 西安이다. 大震國은 平壤城을 탈환한 것이다. 平壤은 朝鮮의 藏唐京이자 高句麗의 卒本이다. 그런 땅을 大震國人들이 황폐해지도록 잘도 방치했겠다.

平壤을 수렵하며 노닐던 오랑캐가 바로 濊貊族이다. 大震國 멸망 후 大震國 유민과 거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平壤이 황폐화되고 방치되자 弓漢里(柴達木盆地)의 濊貊族이 슬그머니 平壤으로 기어나와 제 땅 삼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오랑캐를 大眞國이라고 하면 모를 줄 알고 제 조상의 얘기를 써둔 간교한 인간이다.

黑水靺鞨이 거란에 복속되어 女眞이라 불렸다? 靺鞨 전체가 女眞이다. 하기야 黑水가 白山에서 흐른다고 했으니, 女眞族 전체가 곧 黑水靺鞨이라는 날조가 성립한다. 金汗을세운 것은 熟女眞이다. 生女眞은 李氏朝鮮의 屬民이었다. 李氏朝鮮의 영토가 축소됨에 따라 滿州로 남하했다가, 熟女眞이세운 淸이 동북아 대부분을 차지하자, 淸의 피지배종족이 되었다.

新羅 때에 속말말갈(粟末靺鞨)이 있어서 속수(粟水)의 땅을 점거하고 있다가 대씨(大氏)가 흥기하자 그 선봉이 되었다. 대저 말갈(靺鞨)은 옛 숙신(肅愼)의 후예로서 이 또한 단군(檀帝)의 자손인데, 뒤에 점차 쇠퇴해져 선조의 옛 강역을 모조리 다른 사람의 손에 던져 주고는 구구하게 말갈의 일개 지파가 되어서 여전히 분유(妢楡)고향 땅에 옮겨 살더니, 大氏가 한 차례 호령함에 그 그림자를 쫓는 자가 수십만이 되었으며, 천문령에서 크게 이기고(天門大捷)는 나라의 기초를 이로서 바로잡게 되었다(新羅時 有粟末靺鞨者 占居粟水之地 及大氏之興爲其先敺盖靺鞨者古肅愼之後 而亦檀帝遺族也後屬凌夷 盡擲先祖舊疆於他人之手而區區靺鞨一支 猶能拪捿息於妢楡之地大氏一號 影從者數十萬天門大捷 國基賴定 揆園史話)

靺鞨은 柴達木盆地에 살았으니까 粟水는 柴達木盆地에 있었다. 大祚榮이 흥기하자 그 선봉이 되었다고 날조했으니, 점차 쇠퇴해진 것은 高句麗다. 新羅가 三國을 통일해 高句麗, 百濟의 영토를 모두 가졌다. 先祖의 옛 疆域을 모조리 던져준 다른 사람의 실체는 新羅였던 것이다. 날조사에서는 唐이다. 靺鞨의 고향 땅은 弓漢里(柴達木盆地)이다.

區區하게 靺鞨의 일족이 되어? 粟末靺鞨은 靺鞨이 아니라는 억지다. 그래놓고 또 다시 靺鞨이라고 주장한다. “후세에 漢나라는 읍루(挹婁)라고 일컬었고, 元魏 때는 勿吉이라 하였으며, 隋와 唐나라는 靺鞨이라 불렀으며, 점차 북쪽 끝의 오랑캐들과 서로 섞이더니 점차로 그 풍속을 잃어버리고 한탄스럽게도 자못 쇠미해져 갔다. 가까이는 金나라와 女眞 등이 모두 그 후손으로 같은 족속을 달리 일컬은 것이다(後世漢曰挹婁元魏曰勿吉隋唐曰靺鞨 稍與窮北蠻人相混 漸失其俗 頗有陵夷之歎近古金女眞等 皆其後身 同族異稱也 揆園史話 檀君紀).”��라고 횡설수설하고 있다.

자신들을 예속하던 高句麗가 멸망했는데, 독립을 모색해야지, 그 나라가 재건되도록 돕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한단고기(桓檀古記)를 고치면서도 “女眞은 人面獸心으로 변덕이 몹시 심하다(女眞人面獸心反復無常 高麗國本紀).”는 말은 남겨 두었다. 大震國이 멸망했을 때의 상황이 大震國 건국 당시 濊貊族이 앞장서지 않았음을 유추케 한다. 大震國 멸망을 기화로 나라까지 세웠다.

大震國 유민들이세운 나라는 날조사나마 太白逸史에 다 나오는데, 올야국(兀惹國)은 없다. 兀惹國은 大震國 유민이 아니라, 大震國의 屬民 濊貊族이 大震國 멸망을 기화로세운 나라였던 것이다. “평양 땅은 황폐해진지가 자못 오래 되었으니, 예전의 기초는 비록 남아 있다고 하지만 가시덤불이 무성히 자라고 오랑캐(藩人)들이 수렵하여 노닐며 주변의 고을을 약탈 하였다는 것이 高麗 太祖 초년에 기록되어 있다(平壤之地 荒廢頗久 舊基雖存而荊棘滋茂 蕃人游獵 侵掠邊邑者麗太祖初年所記也 揆園史話 檀君紀).”�� 濊貊族은 平壤을 차지하고 나라 이름까지 지었던 것이다.

靺鞨이 大震國 건국에 앞장서지 않았음은 다음 한 마디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선황제는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세력을 복속시켰다.

黑水靺鞨은 “방이 없고 땅을 파서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그 속에서 살며 水草를 찾아 다녔으므로 언제나 정처없이 옮겨 살았다.”(高麗史) 이 땅의 사학자들은 그런 흑수말갈이 싸움 하나만은 무진장 잘해서 우리나라에 정복되지 않았다고 한다. 뛰어난 전투능력 때문에 靑邱大陸으로 가서 明을 정복하고 淸을세웠다고 주장한다. 다 헛소리다. 정처없이 떠도는 종족이 어떻게 일치단결해서 전투를 치룰 수 있단 말인가. 전투는 최고의 문명국이 가장 잘 한다. 전쟁에는 언제나 그 당시의 최첨단 과학기술이 동원되어 왔다. 慈烏支 한웅조차 “갈로산(發葛山)의 쇠(金)를 캐내어 도개(<金+刃>鎧) 모극(矛戟) 대궁(大弓) 호시(楛矢)를 만들(發葛盧山之金制<金+刃>鎧矛戟大弓楛矢 神市本紀)”고, “수금석(水金石)을 캐어내어 예과(芮戈)와 옹호창(雍狐之戟)을 만들어(發水金石而制芮戈雍狐之戟 神市本紀)”냈다.

宣皇帝 때, 대부분의 靺鞨세력을 복속시켰다는 것은 거짓으로 太白逸史에는 武皇帝(719~738) 때라고 했다. 仁安 원년 “개마(蓋馬), 구다(句茶), 黑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가 될 것을 청하며 공물을 바쳤다(蓋馬句茶黑水諸國皆稱臣納貢 太白逸史).”�� 朝鮮의 제후국인 蓋馬國(熊心國), 句茶國(瀆盧國)이 아니다. 蓋馬國, 句茶國은 음산산맥(陰山山脈) 일대에 있다가 高句麗에 정복되었다. 蒙古는 蒙古高原에 없었다. 어째서 濊貊族의 갈래를 蓋馬, 句茶라 했을까. 陰山山脈 일대에 있었던가.

武皇帝 때, 여러 靺鞨이 복속하고 항복했다는 것조차 거짓이다. 仁安(大震國 2世�� 황제인 武皇帝의 연호) 元年 “구다(句茶), 蓋馬, 黑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가 될 것을 청하며 공물을 바쳤다(蓋馬句茶黑水諸國皆稱臣納貢).”했으면서 같은 몇 줄 뒤에 다시 “仁安 16년�� 句茶 蓋馬 黑水의 여러 나라들이 항복해 오니, 이들을 성읍으로 삼았다(仁安十六年句茶蓋馬黑水諸國以其國來降取爲城邑 太白逸史)고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책에서조차 모순되는 것은 나중에 악의적으로 고쳤기 때문이다.

靺鞨 따위가 무슨 대단한 세력이라고 735년��(仁安 16년��)까지 저항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저들 靺鞨의 실체는 長城 이북에 점처럼 흩어진 유목 부족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大震國이 시베리아에서 관측한 일식기록이 710년��부터 日本 역사책에 남아 있다. 句茶, 蓋馬, 黑水 등의 靺鞨이 시베리아 북단에 살지 않은 이상, 그 전에 항복 해야만 했다.

高句麗가 멸망하자, 濊貊族도 제 살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래놓고 高句麗 재건의 선봉이 되었다고 날조했다. 濊貊族은 이런 종족이다. 나중에는 平壤이나 西安平과는 비교가 안되는 아시아와 9 천년의 文明史를 훔친다.

오르도스(鄂爾多斯)에 살았다고 날조된 匈奴는 弱水에 살고 있었다. “甲辰 6년��(B.C. 2177) 열양(列陽)의 욕살(褥薩) 색정(索靖)에게 명하여 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하였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 곧 그 땅에 봉하니 그가 凶奴의 조상이 되었다(甲辰六年命列陽褥薩索靖遷于弱水終身棘置後赦地仍封其地是爲凶奴之祖 檀君世紀).” “索靖을 弱水로 流配시켰더니 나중에 凶奴族이 되었다(索靖流于弱水後爲凶奴之族 檀奇古史).”�� 索靖은 凶奴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현 사학계는 弱水를 黑水라며 黑龍江이나 松花江 등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李氏朝鮮의 영토가 단계적으로 축소해 끝내 우리나라를 한반도에 집어넣고 북쪽에 弱水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三國志는 3세기의 東夫餘를 설명하면서 “남쪽으로는 高句麗, 동쪽은 읍루(挹婁), 서쪽은 鮮卑와 접하고 있다. 북쪽에는 弱水가 있다(夫餘… 南與高句麗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三國志卷30魏書烏桓鮮卑東夷列傳 第30).”고 날조했다.

東夫餘는 남쪽으로 新羅, 伽倻와 접했다. 북쪽과 서쪽은 百濟에 접했다 (東夫餘가 동쪽으로 바다와 접하지 않았다면, 百濟와 伽倻는 처음부터 접하고 있었다). 지금의 淮水 유역에 있었다. 순수창작을 안한다는 점에서 “남쪽으로는 高句麗와 동쪽은 挹婁와 서쪽은 鮮卑와 접하고 있다. 북쪽에는 弱水가 있다(南與高句麗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라는 기사는 우리나라 역사책에 있었다.

우선 동쪽의 挹婁는 靺鞨의 또 다른 이름으로 高句麗, 大震國, 高麗 때, 柴達木盆地에 있었다. 결국 中土의 지정학적 위치를 설명한 기사였던 것이다. 서쪽의 鮮卑는 티벳고원 북부의 서쪽을 말한다. 鮮卑는 西 遼水 상류 시라무렌(西拉木倫) 江 유역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中土의 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남쪽은 티벳고원 남부로 高句麗가 大武神烈帝 때 樂浪을 정복하고 일시 차지했다가, 百濟에게 빼앗겼다.

따라서 中土 북쪽의 弱水는 타림강(代江)이다. 己丑 10년��(B.C. 1652) 15世�� 檀君 代音이 서쪽으로 행차해서 신지(臣智) 우속(禹粟)에게 명하여 금, 철 및 고유(膏油)를 채취하도록 한 弱水(己丑十年帝西幸弱水命臣智禹粟採金鐵及膏油 檀君世紀)는 타림분지에 있었다. 凶奴는 타림분지에서 中土를 위협했던 것이다.

凶奴는 甲辰 6년��(B.C. 2177), 列陽의 褥薩 索靖이 流配되어 있다가, 그 땅을 封土로 받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속했다.

당시 檀君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大荒)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稧兪)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해대(海垈)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다.(當是之時檀君之化洽被四土北曁大荒西率稧兪南至海岱東窮蒼海 揆園史話 檀君紀)

같은 책에서 “설유(稧兪)가 다시 서쪽 변경을 침범했다(稧兪復侵西鄙).”고 모순된 말이 나온다. 揆園史話 역시 濊貊族이 썼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西方限界線은 타림분지가 아니다.

”��戊寅年(B.C. 703), 凶奴가 番韓에 사신을 파견하여 天王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로 봉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戊寅凶奴遣使番韓求見天王稱臣貢物而去 番韓世家 下).”�� 凶奴가 잘못을 저질러 구한(九桓)에서 배제 되었다가, 용서를 구한 대목으로 추정된다.

1세기 말 北匈奴가 後漢에게 격파되자, 鮮卑가 匈奴에 이어 몽고지역에서 번영했다고? 北匈奴는 高句麗에 정복되었다. 高句麗 일식관측지 중 하나가 天山山脈 일대이다. 高句麗에 패한 北匈奴는 파미르(Pamir) 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Kirgiz) 초원지대인지 더 서쪽인지로 이동 했지만, 그 땅도 우리나라 강역이었다. 北匈奴가 高句麗의 직접 지배권 밖으로 나갔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史記에도 나오듯이 匈奴는 北夫餘 시대에도 우리나라에 직속해 있었다. 北夫餘 末 독립을 모색하다 高鄒牟의 정벌을 받았던 것이다. 아시아를 정복한 高鄒牟가 北匈奴만은 남겨 두었을리 없다. 89년�� 부터 연속으로 高句麗의 공격에 패한 뒤에도 반세기 동안 高句麗와 싸웠다? 高鄒牟 사후 北匈奴가 高句麗에 대항한 것으로 추정된다. 타림분지의 여러 종족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北匈奴가 高句麗와 다투는 것은 불가능하다. 北匈奴에 대한 예속 완화를 두고 싸운 것이다. 北匈奴가 중앙아시아로 옮겨가자, 鮮卑가 北匈奴의 예속에서 풀려났다.

朝鮮時代만 해도 鮮卑는 凶奴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았다. 己未 40년��(B.C. 1622) 15世�� 檀君 代音이 동생 代心을 南鮮卑의 大人으로 봉했다(己未四十年封皇弟代心爲南鮮卑大人 檀君世紀). 朝鮮이 大夫餘, 北夫餘를 거치면서 쇠약해지자, 匈奴에게 정복 되었던 것이다. “甲寅 3년��(B.C. 847) 선비산(鮮卑山)의 酋長 문고(們古)가 공물을 바쳤다(甲寅三年鮮卑山酋長們古入貢 檀君世紀).”��는 것으로 보아 鮮卑山은 타림분지에 

에 있었다.

鮮卑가 3세기 중엽에 점차 華北으로 옮겨갔다는 것은 中土 서부로 이동했다는 말이다. 北匈奴가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후 高句麗가 타림분지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자, 鮮卑는 자유롭게 살 땅을 찾아서 中土로 침입한 것이다. 高句麗의 압박을 받자, 2세기 중엽 단석괴(檀石槐, 137? ~ 181?)가 타림분지에 있던 鮮卑族을 통합해서 中土를 노리고 後漢을 침입한 것이다.

돌궐(突厥)이 583년�� 분열하여 東突厥이 蒙古高原을 지배했다는 것도 날조다. 蒙古高原에는 13세기 후반까지 農耕國家가 있었다. 中奴와 다퉜다는 기사는 中土 에서의 隋, 唐과의 싸움이었다. 583년��에 분열 했으니까, 西突厥은 中土에 있다가 캐시미르를 통해 중앙아시아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높다. 隋末에서 唐初에 걸친 中土 내부의 혼란을 틈타 중앙집권화를 도모했던 것이다. 위구르(回紇 Uighur)가 과연 軍紀 빠진 군대의 대명사 唐나라 군대에 토벌 되었을까. 高句麗軍에 토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오늘날의 타림분지에 있게 된 것이다. 突厥의 족장을 가한(可汗)이라 부르는 것은 九汗(桓)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高句麗에게 정벌된 것이 北匈奴라는 점에서 南匈奴는 티벳고원 북부 안에 있었다. 티벳고원 북부 서쪽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南匈奴는 티벳고원 내에 있으면서 ·5胡 16國 시대를 거치면서 中土에 나라를세웠다. 前漢은 朱蒙聖帝가 정복했다.

원래 중국은 날조사에서 黃河 이남만 통일해도 통일국가라 우겼다. 明 이래로 정복민을 北朝라 불러온 중국이다. 그렇다면 漢나라 역시 통일국가가 아니다. 南匈奴에게 中土 서부를 빼앗겼으니까. 匈奴가 오르도스(鄂爾多斯, Ordos)로 이주했다는 기원전 4 백년에 南匈奴가 中土로 옮겨갔던 것이다. 戰國時代 초부터 南匈奴는 티벳고원 북부의 서쪽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秦도, 漢도 통일국가가 아니었다.

濊貊族과 中土를 나눈 商(殷)도, 夏도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던 수많은 우리나라 侯國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정복할 당시에도 楡罔, 軒轅, 神農, 高辛 등 수많은 지배자가 난립해 있었다. 唐이 蒙古高原을 정복했다는 날조는 突厥이 蒙古高原에 있었다고 날조한 탓이다.

과연 軍紀 빠진 군대의 대명사 唐軍이 中土를 침입한 突厥을 정복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明 때도 揚子江 이북에 淸과 李氏朝鮮이 있었고, 淸 때도 티벳고원에 티벳이 있었다. 中華民國 때 잠시 통일국가 였다가, 곧 中華人民共和國이 수립되어 오늘날까지 분단되어 있다.

유목민들이 우리나라와 싸웠다면서 어째서 그들이 우리나라에 세운 나라는 없는가. 어째서 유목민들은 우리나라와 싸우면서 나라는 모두 中土에세웠는가.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어한다는 말은 우리나라가 사용한 전략이다.

中土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유목민들이 싸웠다. 그런 상태를 방치해 두는 것이 우리나라의 기본전략 이었다. 그래야 쓸데없이 우리나라 영토를 집적대지 않을 테니까. 우리나라는 高句麗가 北匈奴와, 百濟, 新羅가 高句麗의 屬民 靺鞨과 싸운 적이 있을 뿐이다. 鮮卑族 隋, 唐도 新羅의 屬國이라 高句麗로 침입해야 했지만, 우리나라를 자유의지로 침입한 유목민은 거란(契丹)이 유일하다. 거란도 中土에 나라를 세웠고, 大震國을 멸망 시켰다지만, 高麗에 패해 도로 中土의 소국으로 줄어들었다. 蒙汗은 우리나라를 침입한 적이 없다.

“朝鮮의 東夷는 천성이 유순하여 南蠻, 北狄, 西戎과 다르다. 그러므로 孔子가 道가 펴지지 않음을 한탄하여 바다를 건너서 九夷 나라에 살고자 하였다. 孔子가 道가 펴지지 않는 魯나라를 버리고 뗏목을 타고 東夷 나라에 가고자 함은 이 나라에는 어진 敎化가 있어서 가히 道를 펼 수 있는 까닭이다(然東夷天性柔順異於三方之外故孔子悼道不行 設浮於海欲居九夷 漢書).”��

東夷, 西戎, 南蠻, 北狄? 北狄은 타림분지에 살던 유목민이다. 南匈奴는 기원전 4 백년 中土를 침입하고, 鮮卑 역시 3세기 중엽 中土를 침입해서 西戎에 가세했다. 北匈奴는 2세기 중엽 高句麗에 패해 중앙아시아로 빠졌다. 西戎은 캐시미르(Kashmir)를 통해 中土로 침입한 靺鞨을 가리키나, 날조 중국사가 연대를 대폭 하향 조정했다는 점에서 이들 부족들의 中土 침입시기가 훨씬 일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南蠻을 고집한다면, 티벳고원 남부에 있던 나라다. 九黎, 眞番, 夫餘에서 夫餘로 통합되고 다시 番韓, 馬韓으로 바뀌었다. 그 뒤로도 百濟, 高句麗, 新羅, 大震國, 高麗가 계속해서 그 땅을 차지했다. 우리나라가 中土에세워진 나라들의 上國이라는 점에서 원래 中土의 南蠻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中土의 토착민들은 匈奴, 鮮卑, 靺鞨, 倭奴에 못지않은 미개종족이었다. 그런데 東夷를 오랑캐라 할 수 있는가. 東夷는 대대로 中土 土着民의 支配者의 출신국이다. 태호(太皞)와 神農이 어떻게든 中土를 변화시키려고 하고 蚩尤氏 후손들이 우리문화를 이식하면서 간신히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바꾸었지만, 5 胡가 날뛰고 隋, 唐이 들어서자 未開의 바닥까지 떨어졌다. 宋 때 이르면, 中土 서민의 삶은 太皞와 神農이 저 땅에 들어가기 전으로 回歸한다.

이(夷)는 오랑캐라는 말이 아니라, 근본, 군자국(東方曰夷 言仁而好生 故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不死之國焉 後漢書), 어질다(仁也 說文通訓定聲, 爾雅), 오직 東夷만이 큰 것을 따르니 大人이다(惟東夷從大大人也 說文字解), 夷는 易의 假借이다(夷卽易之假借也 說文解字)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한없는 공경의 뜻을 담은 말이었던 것이다. 천재일우(千載一遇) 보다 더한 요행(僥倖)으로 현 揚子江 이남을 차지하자, 中華思想을 날조하면서 四方의 오랑캐도 만들었던 것이다.

동서무역은 漢武王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관심을 가졌다. 서역으로 특파된 장건(張騫) 역시 우리나라 사람이다. 역사를 날조하면서 우리나라 사람을 일일이 中奴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역사책에 등장하는 인물이 너무 많고 중국은 역사기록을 하지 않아서 한세대 전에도 누가 살았는지 몰랐다. 大仲象을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 부른 것처럼 특별히 유목민으로 둔갑시켜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本名을 그대로 두었다. 동서무역에 열의를 나타내 비단길을 통과하는 여러 오아시스 나라가 아니라 부족들을 지배한 나라는 高句麗다. 타림분지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한 나라도 高句麗다.

중국이 3皇 5帝라 부르는 인물들은 다 우리나라 사람(東夷族이라고 기록. 伏羲는 배달 5世�� 太虞儀 한웅의 아들이고, 神農의 부 少典은 배달에서 주곡(主穀)을 맡은 高矢氏의 傍系이다. 軒轅은 軒邱로 유배 보낸 公孫의 후손이고, 舜의 父 역시 高矢氏의 일족이다. 나머지는 伏羲와 神農의 후손이다)이다. 왜냐하면 이 당시 中土의 토착민은 너무나 미개해서 도저히 나라를세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堯 때 농사를 관장하는 직책이 생겼고, 5帝의 한 명으로 둔갑시킨 제곡고신(帝嚳高辛)의 아들1)이라는 后稷이 담당했다.

중국고대신화는 “후직이 일찍이 하늘나라에 가서 온갖 곡식과 과일의 종자를 가지고 와 이를 백성들에게 가르쳤다.”고 하였는데, 당시 중원에서 하늘나라라고 할 만한 곳은 배달과 단군조선 밖에 없었다(실증 한단고기)

겨우 4300년�� 전이다. 中土는 연간 강수량이 450 mm 밖에 안되는 건조기후대로 자연상태에서 농사가 불가능하다. 農事가 안되기 때문에 기원전 2267년�� 五行治水法을 전해줘 관개농사(灌漑農事)를 지으라고 했던 것이다.

高麗 末에 쓴 檀君世紀에는 中土에 홍수가 났다는 기사가 없다. 홍수가 나서 五行治水法을 알려 주었다는 얘기는 李氏朝鮮 때 쓴 太白逸史에 나온다. 어째서 관개농사법을 홍수조절법 이라고 고쳤는가. 中土가 靑邱大陸 전체가 아닌 일부 지역 즉 건조 기후대라는 사실을 숨겨야 했고, 중국은 우리나라 역사를 훔쳤으므로 홍수기록을 그대로 베꼈지, 창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아노장포강(雅魯藏布江) 유역에서 간신히 농사라는 것을 지었던 것이다.

베옷을 입으려고 해도 삼을 재배하고 비단옷을 입으려고 해도 뽕나무를 지배해야 한다. 다 농사다. 4300년�� 전에야 농사법을 배웠다면, 伏羲가 中土로 들어간 5500년�� 전에는 옷조차 없어서 벌거벗고 살거나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썼을 것이 아닌가.

“虞舜은 貊族이며, 貊族은 東夷의 부족을 형성하고 있는 하나의 자손이다.”라는 中國史前史話는 “옛적에 夫餘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설유(稧兪)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貊)'이라 하였다. 다시 점차 옮겨와서 엄려(奄慮)의 북서쪽 땅에서 살게 되어 마침내 남씨(藍氏)의 백성이 되었다(昔夫餘民有遁居于稧兪之地 遂與其民雜處 頗習其俗 殆無恒業 以狩獵爲生 獸皮爲服 人謂之貊復漸遷徙 處於奄慮北西之地 遂爲藍氏之民 揆園史話 檀君紀).”와 같은 맥락의 날조다.

虞舜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神人王儉에 의해 中土의 제후로 봉해졌고, 貊族은 캐시미르를 통해 中土로 침입해 12世�� 檀君 아한(阿漢) 29년��에 이르러서야 突蓋가 왕(汗)으로 임명되었을 뿐이다. 中奴史에는 이제는 虞舜을 禹舜으로 표기하고 있다.

“蚩尤氏는 진실로 萬古에 있어 강인하고 용맹함의 조상이 되었다(蚩尤氏實爲萬古强勇之祖 揆園史話 太始紀).” “蚩尤氏는 웅가(熊加)로 삼아 병사를 주관하게 했다(蚩尤氏爲熊加曰主兵 揆園史話 檀君紀).”(五加에서 牛加는 농사를, 馬加는 목숨을, 狗加는 형벌을, 猪加는 병을, 羊加는 선악을 관장한다. 여기서 善惡이란 교육이 분명하다. 교육을 받으면 선악을 구분할 능력이 생긴다. 狗加가 형벌을 猪加가 병을 관장하는 상황에서 馬加가 목숨을 관장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蚩尤氏는 대대로 병기 만드는 일을 맡았으며, 항시 나라 안을 편안하게 안정시키고 적을 토벌하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蚩尤氏世掌兵戎制作之職時常鎭國討敵未嘗少懈 揆園史話 太始紀).” “군사를 주재하는 자는 蚩尤氏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蚩尤氏는 만대에 걸쳐 굳셈과 용맹의 조상으로서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몰아쳐 부렸으니(안개는 염초를 태운 연기다. 물과 불을 부렸다는 것은 水攻과 火攻을 말한다), 또한 만대에 걸친 道術(兵法)의 근본이 된다. 그러한 까닭에 太初의세상에서는 항상 東方의 군사를 주재하는 자가 되었다(兵主祠蚩尤蚩尤氏爲萬代强勇之祖作大霧驅水火又爲萬代道術之宗是以太初之世恒爲東方戎事之主 揆園史話 檀君紀).” 치우씨는 배달 개천 당시부터 비범한 군사적 재능을 대대로 발휘했다. 이런 蚩尤氏의 후손이 中土로 들어간 뒤에는 일개 凡人으로 살았겠는가.

蚩頭男. 蚩尤氏의 후손에 蚩氏가 있었지만, 番韓의 시조로 中土의 얘기가 아니다. 複字姓 蚩尤에서 單字姓으로 고치면서 蚩尤氏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다같이 치(蚩)氏로 하자고 결의 했던가. 그런데 창힐(倉頡)과 대요(大撓), 高辛도 蚩尤氏의 후예라 했다. 蚩尤氏는 慈烏支 한웅 이전에 이미 여러 성으로 갈라졌던 것이다. 蚩氏는 中土가 아니라 우리나라 땅에 머문 蚩尤氏의 후예다. 우리나라 성씨가 기록된 통지(通志)·씨족략(氏族略)은 당연히 우리나라 족보책이다. 우리나라 족보책에 中奴의 인물을 입힌 것이다. 人名과 나라이름, 地名, 절대 中奴史라 볼 수 없는 대목만 바꿔 中奴의 族譜冊으로 둔갑시켰다.

결국 “通志·氏族略에 ‘치(蚩)氏는 蚩尤의 후손이다’라 하였으니, 곧 이들은 蚩尤氏의 후손으로서 영원히 漢나라 땅에 머무른 자들이다(通志氏族略蚩氏蚩尤之後也云 則是蚩尤氏之後而永居於漢土者也 揆園史話).”도 날조였던 것이다. 어째서 날조 했는가. 中土에 나라를세웠기 때문이다. 대대로 조상으로부터 군사적 재능을 물려받은 蚩尤氏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蚩尤氏 형제들은 慈烏支 한웅을 따라 中土를 정복해 그곳을 封土로 받았다. 慈烏支 한웅이 가문에서 선발한 81 명의 蚩尤氏들을 장수로 삼아 “서쪽은 예탁(芮涿)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淮垈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게 하고, 軒轅은 동쪽 침략의 길을 지키게 하였다(西守芮涿之地東取淮岱爲城邑而當軒轅東侵之路 神市本紀).” 이 말은 蚩尤氏들이 怒江 이동에서 살았음을 알려준다. 慈烏支 한웅이 정복한 땅은 아시아이므로 실제 中土를 封土로 받은 蚩尤氏는 몇 안된다고 전술했다. 怒江 以西 에서도 역시 蚩尤氏의 일족인 창힐(倉頡), 대요(大撓)가 軒轅과 땅을 분할하고 있었다. 中土 내부에서 정복으로 나라를세운 것은 殷나라 이후다. 殷나라가 黃河 하류에서 일어난 나라라고 하는데, 中土에는 黃河 상류밖에 없다. 殷나라는 黃河 상류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예전 黃河인 金沙江 상류의 淮垈 북부에 있던 蚩尤氏의 1인이 夏나라를 멸망 시키고 殷나라를세웠던 것이다.

중국도 東夷族이 정복해세운 나라이며 노예사회 였다고 인정한다. 우리민족이 정복자라면, 華夏는 노예였던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중국도 殷나라가 우리민족이세운 나라라고 인정 하므로 殷나라 때문에 족보까지 바꾼 것은 아니다.

周나라의 시조는 朝鮮에서 온갖 곡식과 과일의 종자를 가져와 농사를 가르친 后稷 이라는데, 5帝도 만들어내 줄줄이 軒轅의 자손으로 둔갑시킨 華夏가 아닌가. 어쨌거나 后稷의 조상이라는 제곡고신(帝嚳高辛)도 우리나라 사람이다. 秦나라는 소호금천(少昊金天)의 후예이니, 帝嚳高辛의 후예니 하지만, 秦나라는 소위 통일국가다. 中土의 서부에는 靺鞨과 南匈奴가 있었으나, 中土의 토착민과 東夷族을 통일한 최초의 나라인 셈이다. 中土를 통일한 秦始王은 장양왕(莊襄王 : 子楚)의 아들이 아니라, 呂不韋의 자식이다. 呂政의 생모는 呂不韋의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이를 숨기고 子楚에게 시집갔다. 그러니까 呂不韋가 華夏族인지, 東夷族인지에 따라 달라지는 셈이다. 그러나 장사꾼 呂不韋는 東夷族일 수는 있어도 蚩尤氏의 후예는 아니다.

漢나라에 이르면 우리나라 풍속을 그대로 갖고 있다. 蚩尤氏 사당을 만들고 전투에 나갈 때마다 제사를 지냈다. 漢나라는 원래 靑帝, 白帝, 黃帝, 赤帝를 主神으로 했는데, 劉邦이 “나는 하늘에 五帝가 있다고 들었다“면서 黑帝까지 다 챙겼다. 어째서 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이 漢나라의 창업공신이 됐었는가. 어째서 劉邦이 나라 이름을 漢이라 했겠는가. 劉邦이 蚩尤氏의 후예였기 때문이다. 明이 역사날조 하면서 그 사실도 지워버렸던 것이다.

“漢나라 高祖는 풍패(豊沛)에서 병사를 일으키며 蚩尤氏에게 제사를 지내고 북과 깃발에 희생의 피를 발랐으며, 마침내 10월에 파상(灞上 : 灞水(沛水) 유역이라는 뜻. 中土에도 패수가 있었을까. 우리나라가 長安이라 하자 따라서 長安이라 부르고, 開京이라 하자 역시 開封이라 하고, 江南이라 하자 덩달아 江南이라 한 屬國이다. 中土에도 沛水가 있었거나 朱元璋 이후 우리나라 영토에 中土를 위치 시키고 날조했다)에 이르러 제후들과 더불어 함양(咸陽)을 평정하고 漢나라의 王으로 즉위 하였다. 그런 연유로 10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비록 秦의 책력(正朔)을 이어서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蚩尤氏를 공경함에서 연유 되었다 할 것이다. 그 뒤 4년��에 천하가 이미 안정되자 곧 축관(祝官)에게 명하여 蚩尤氏의 사당을 長安에세우게 하였으니, 蚩尤氏를 공경함이 이와 같이 돈독하였다(漢高起兵於豊沛則祠蚩尤釁鼓旗 遂以十月至灞上 與諸侯平咸陽 而立爲漢王 則因以十月爲年首此雖襲於秦之正朔而亦有因於敬蚩尤也 後四歲 天下已定 則令祝官 立蚩尤之祠於長安 其敬蚩尤之篤如此 揆園史話 檀君紀).”��

전투에 임하면서 정복자에게 제사 지내는 사람도 있던가. 정복자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敵軍보고 이기라는 소리다. 漢나라가 華夏族의 나라고, 軒轅이 華夏族이라면, 그리고 慈烏支 한웅과의 전쟁에서 軒轅이 승리 했다면, 劉邦은 軒轅에게 제사 지냈다. 정말 劉邦이 蚩尤氏를 공경함이 돈독 했다면, 자신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漢나라는 우리나라다. 漢나라가 존속한 4 백년�� 동안 華夏의 나라는 없었다.

秦은 冊曆 같은 것은 만들 줄 몰랐던 미개국이다. 秦이 책력을 만들고 천문관측한 나라라면, 明이 책력을 이름만 바꿔 불렀겠는가. 혜성을 분류하면서 정복자의 이름을 붙이는 나라도 있던가. 장사꾼의 자식이세운 秦이 혜성의 꼬리에 군신의 이름을 붙일 리가 있는가. “치우기(蚩尤旗) 유형의 혜성은 그 뒤꼬리의 곡선이 마치 깃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주로 나타나는 방향의 아래에는 병사가 있다(蚩尤旗類彗而後曲象旗主所見之方下有兵).”는 秦書·天文志는 우리나라 天文志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太白逸史를 쓸 당시만 해도 漢나라와 秦나라의 연초가 달랐다. “劉邦은 東夷 계통의 인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병사를 풍패(豊沛)에서 일으켰는데 곧 豊沛의 풍속은 蚩尤에게 祭를 지내므로 나라도 역시 그 풍속 

을 따라 蚩尤에게 祭를 지냈다. 그리하여 흔고(釁鼓 : 북에 피를 칠한것)하고 깃발을 들고 마침내 10월��에 灞上에 이르러 제후와 더불어 咸陽을 평정하고 즉위하여 漢王이 되었던바 이로 인해 10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정하고 이것이 秦나라의 정월 초하루(正朔)를 빼앗는 일이긴 하나(劉邦雖非夷系而起於豊沛豊則沛之俗祠蚩尤也故邦亦因俗以祠蚩尤而釁鼓旗遂以十月至灞上與諸侯平咸陽而立爲漢王則因十月爲歲首此雖襲秦正朔 神市本紀)” 그런데 揆園史話에 이르면, “비록 秦의 책력을 이어서 따른 것이긴 하지만 역시 蚩尤氏를 공경함에서 연유되었다 할 것이다(襲於秦之正朔而亦有因於敬蚩尤也).”로 바뀐다. 지금은 한단시대(桓檀時代)의 모든 역사가 中奴史로 둔갑했다.

成桂와 朱元璋은 아시아의 정복자 慈烏支 한웅을 한낱 中土의 정복자로 축소하기로 합의했다. 劉邦이 정복자에게 제사 지내고, 秦이 정복자의 이름을 따서 慧星 이름을 붙였다? 中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漢나라가 秦의 曆法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고 다시 고쳤다. 戰國時代 小國의 하나인 秦나라가 만든 曆法1)을 中土의 통일국가 漢나라가 백년이 넘도록 사용하다가 기원전 104년��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曆法(太初曆)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래도 漢나라가 음력 10월��을 연초(歲首)로 했다는 것은 내버려두고, 秦나라(顓頊曆)가 음력 정월이 아니라, 음력 10월을 연초로 한 것으로 고쳤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나라의 일식기록을 고쳐 漢나라에 배당했기 때문이다. 中土 왕의 연대에 이어 연초까지 고려한 일식기록이 아까워서 차마 劉邦 때부터 음력 정월을 연초로 한 曆法을 사용했다고 고치지 못한 것이다.

“丁卯年에 모불(牟弗)이 즉위했다. 乙亥年에 감성(監星)을 두다(丁卯子牟弗立乙亥置監星 番韓世家 下).” 番韓의 36 대 왕 牟弗은 기원전 1074년��에 즉위 했으므로 乙亥年은 8년�� 후다. 辰韓은 기원전 1916년��경에 천문대를 설치해서 고정된 위치에서 천문관측하기 시작했고, 辰韓 아닌 지역은 그 땅의 제후들이 각자 천문대를 설치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中土에서 천문관측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解慕漱는 檀君을 자처 했으므로 北夫餘는 천문관측했다. 北夫餘는 기원전 239년��에서 기원전 59년��까지 존속한 나라로 수도 白岳山 阿斯達(殷墟)에서 천문관측했다. 기원전 108년�� 高豆莫이 檀君을 자처하고 지금의 西安에서 卒本夫餘를 건국했다. 기원전 87년��에 高于婁 檀君이 붕어하자 解夫婁가 제위를 내놓고 東夫餘를세웠다. 그러니까 은허(殷墟)에서 천문관측한 것은 기원전 239년��에서 기원전 87년�� 까지다. 그런데 기원전 202년��에서 기원후 8년��까지 존속한 前漢은 지금의 西安을 수도로 했다고 날조했다. 西安은 檀君王儉이 두 번째로 정한 阿斯達로 千年 동안 朝鮮의 수도였다. 기원전 1916년��경에 천문대를 설치한 곳도 현 西安으로 索弗婁가 白岳(殷墟)을 도읍으로 정한 이후에도, 아니 高麗 末까지 내내 천문관측 했음이 분명하다.

10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삼은 것은 秦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다. 그러나 그 시기는 秦, 漢 때가 아니라, 기원전 21세기다.

檀君 구을(邱乙)이 처음으로 甲子를 써서 10월��을 상달(上月)이라 하고 이를 한해의 시작(歲首)이라 했다(檀君邱乙始用甲子以十月爲上月是謂歲首 太白逸史 神市本紀) 5世�� 檀君 邱乙은 기원전 2099년��에 즉위했다. 4년�� 처음으로 60 甲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었으니, 기원전 2096년��이다. 우리나라는 39世�� 檀君 豆忽 21년��에 이르면 이미 음력 正月이 연초였다. 秦나라? 기원전 222년��에야 中土를 통일한 나라다. 그나마 통일왕조를 유지한 기간도 BC 221∼BC 207으로 불과 14년�� 동안 존속한 나라이다.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지금 西安(長安)에 있는 秦始皇陵이라는 것도 당시 천하를 호령했던 高豆莫 檀君의 陵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저 神市氏가 하늘에서 내려온 이래로 신의 교화가 점차세월에 따라 더욱 더 깊어감에, 나라를세우고세상을 경영하는 근본이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와는 자못 다르게 되었기에, 그 신성한 풍속이 멀리 漢나라 땅에까지 퍼져서 漢나라 땅의 사람 가운데 신의 교화를 사모하는 자가 있었으니, 오로지 三神을 추앙하여 동북 지방에는 '神明의 집(神明之舍)'이라는 명칭까지 있게 되었다(盖神市以降 神化之漸逐歲益深 立國經世之本 自與人國逈異 其神風聖俗 遠播於漢土漢土之人有慕於神化者 必推崇三神至有東北神明之舍之称焉 揆園史話 檀君紀).” 漢나라가 東夷族의 나라라서 東夷族의 풍속을 계승했던 것이다. 漢나라를세운 劉邦도 蚩尤氏의 후손인데, 隱나라를세운 成湯이 蚩尤氏의 후손이 아닐 수는 없다.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재정복하기 전부터 中土로 들어간 蚩尤氏들은 다른 姓을 썼다. “倉頡은 高辛과 더불어 역시 모두 蚩尤氏의 후예(苗裔)이다(倉頡與高辛亦皆蚩尤氏之苗裔 太白逸史 神市本紀).” “軒轅이 蚩尤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大撓에 의존코자 했으나 이룰 수 없었고 또 倉頡에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안되었으니 이는 두 나라가 모두 蚩尤의 무리였기 때문이다(軒轅稍後起於蚩尤每戰不利欲依大撓而未得又依倉頡而不得二國皆蚩尤之徒也 三聖紀全 下篇).” 慈烏支 한웅이 一族의 인재들을 대거 장수로 삼아 中土를 정벌한 것이 4700년�� 전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中土에 눌러앉은 蚩尤氏도 여러 곳으로 흩어져 각자 다른 姓을 갖게 된 것이다.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정복한 지 천여 년�� 뒤에 殷나라가, 2500년�� 뒤에 漢나라가 蚩尤氏 후손들에 의해 건국되었던 것이다.

치우씨(蚩尤氏)는 남국(藍國)에 봉함을 받고서 선조의 뜻을 이어 백성들을 위무하고 생업을 편케 하며 군사의 일을 배워서 익히니, 항상 서남방으로 울타리(藩蔽)가 되었다. 또한 그 백성들을 수차례 해대(海垈)의 땅으로 옮겨가게 하니, 후세에 이르러 항시 漢나라 땅의 뭇 나라들과 더불어 서로 각축하게 되었다.

처음 신시(神市)의 말기에 치우씨(蚩尤氏)의 형제가 비록 탁록(涿鹿)으로부터 물러나서 돌아 왔으나 동방의 사람으로 회대(淮垈)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漢나라 땅의 사람들과 섞여 거처하면서 농사짓고 누에치며(蚕)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 또한 남쪽 지방의 해도(海島)의 백성들은 모두 진주와 물고기 및 조개 등으로 漢나라 땅에서 서로 교역하더니, 차차 해변의 땅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해대(海垈)와 강회(江淮)의 땅에는 마침내 마을을 이루어 漢나라 땅의 백성들과 교류하며 섞여 살게 되었다(蚩尤氏旣受封於藍國乃紹先祖之志 撫民安業 講習戎事恒爲西南藩蔽 且其民 數遷徙海岱之地以致後世 恒與漢土諸國 互相角逐… 初神市之末蚩尤氏兄弟 雖自涿鹿退歸而東人之占居淮岱者甚多與漢土之人雜處 農蚕織牧 資以爲業 且南鄙海島之民 皆以璸珠魚貝 相交易於漢土稍稍住息於濱海之地至是海岱江淮之地 遂爲其州里與漢土之民交游而錯居 揆園史話).

北崖는 자신이 “通志·氏族略에 ‘치(蚩)氏는 蚩尤의 후손이다’라 하였으니, 곧 이들은 蚩尤氏의 후손으로서 영원히 漢나라 땅에 머무른 자들이다(通志 氏族略 蚩氏蚩尤之後也云則是蚩尤氏之後而永居於漢土者).”, “蚩尤氏의 형제들이 모두 幽靑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 되었기에 黃帝는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蚩尤氏兄弟諸人乃永據幽靑聲威自是不减黃帝氏亦不得自安終其世).”고 한 것도 망각하고 거짓말을 늘어놓은 것이다.

마치 蚩尤氏 후손과 漢나라 주민들이 다른 종족인 것처럼 써 두었지만, 漢나라는 蚩尤氏의 후예가 中土를 통일해세운 나라이다. 漢나라가 北夫餘를 꽤나 침입 했다는 데 착안해서 中奴의 나라로 둔갑시킨 것이다.

淮垈와 海垈는 中土에 남은 蚩尤氏 형제의 후손들이 다스리고, 채달목분지(柴達木盆地)는 우리나라에 있던 蚩尤氏 후손이 다스렸던 것이다. 蚩尤氏의 후손이 다스리는 나라는 하나 더 있었는데, 番韓이다. “蚩頭男은 蚩尤天王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게세상에 알려졌다. 檀君은 곧 불러보시더니 이를 기특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番韓으로 삼았다(蚩頭男蚩尤天王之後也以勇智著聞於世檀君乃召見而奇之卽拜爲番韓 太白逸史 番韓世家).”�� 番韓은 丹江 이남에서세워져 아롱강(雅礱江) 이서로 옮겨간 나라이다.

“옛날부터 구주(仇州)와 대마(對馬)는 곧 三韓에서 나누어 다스리던 땅이며 본래 倭人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自古仇州對馬乃三韓分治之地也本非倭人世居地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倭가 靑邱大陸 끝에 살 때의 기술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列島 최초의 나라가 성립한 것은 395년��. 日本은 9세기 까지도 중국을 안전하게 오고 갈 항해술이 없었다고, 일본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倭人이 南方系 아시아인이면, 이질적인 생김새라고 명시해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三國志에서 고작 倭가 “크거나 작거나 구별없이 얼굴에 검은 색으로 문신(文身)하고 머리는 짧게 밀었다(男子無大小皆黥面文身斷髮褊頭 三國志 魏書 東夷傳 倭人條)”고 했을 뿐이다. 黥面文身은 인위적으로 만든다. 요컨대 倭人은 南方系 아시아인의 풍모가 보인다. 전형적인 中國倭의 모습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아니므로 倭人은 中土에서 왔다.

”��檀君世紀에는 36世�� 檀君 매륵(買勒) 甲寅 38년��(B.C. 666), 협야후(陝野侯) 배반명(裵幋命 )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해 12월��에는 三島가 모두 평정 되었다(甲寅三十八年遣陝野侯 裵幋命 往討海上十二月三島悉平)”��고 했고, 太白逸史 馬韓世家 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馬韓 ”��궁홀(弓忽)이 甲寅年에 협야후(陝野侯)에게 명하여 전선 500 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海島)를 쳐서 倭人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弓忽甲寅命陝野侯率戰船五百艘往討海島定倭人)”��고 했다. 倭人을 토벌한 것은 馬韓 이었던 것이다. 馬韓은 티벳고원 남부에 있었으므로 바다는 金沙江을 의미한다. 海島 혹은 三島는 金沙江 유역의 땅이다.

따라서 남쪽 지방의 海島는 海垈 일대에 있었다. 남쪽 지방의 섬에 살다가 차차 해변의 땅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고 했으니, 섬은 金沙江 상류 너머의 점점이 흩어진 湖水다. 섬이 남쪽 지방이라는 것은 거짓이었던 것이다. 海島가 中土 서부의 호수니까, 진주와 조개잡이를 했을 리 없다. 섬에 살다가 차차 해변의 땅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는 말은 호수 일대에 살다가 金沙江 상류로 이주 했다는 의미이다. 즉 倭人들은 中土에서 우리나라 땅으로 슬그머니 이주했다. “漢나라 땅에서 서로 교역하더니, 차차 해변의 땅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海垈와 江淮의 땅에서 마침내 마을을 이루었다(交易於漢土稍稍住息於濱海之地至是海岱江淮之地遂爲其州里 揆園史話).”에서 우리민족에 대한 기술로 날조한 부분을 걷어내면, 中土에 대한 설명만 남는다. 섬에 살다가 차차 해변의 땅에 머물러 산 것은 華夏였던 것이다. 애국심이 절절이 넘친다던 北崖는 우리민족을 倭奴로 둔갑시킨 것이다.

왜(倭)는 연(燕)에 속하지 않았다. 燕이 倭 옆에 없었기 때문이다. 北燕, 後燕, 西燕, 前燕, 南燕 모두 옛 長江(怒江) 너머(中土 西部)에 있었으나, 이때는 倭가 靑邱大陸 동남부로 이주한 후다. 春秋戰國 시대의 燕 하나만 옛 長江 남안 즉 淮垈 이남에 있었으나, 燕과 倭 사이에는 番朝鮮이 버티고 있었다.

왜(倭)는 연(燕)에 속한다(倭屬燕). 이 말은 中奴가 黃山江(揚子江) 이남으로 기어나온 明 때 고쳤다. 이 당시에는 春秋戰國時代의 燕이 靑邱大陸 남부에 있다고 날조했다. 淮垈 너머에 燕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 黃河 이남으로 中土가 확대되자, 淮垈는 揚子江 하류와 黃河 하류 사이가 되었다. 倭는 百濟에 속했다. 百濟에 복속해서 百濟의 지시를 받고, 百濟 땅으로 확장하려는 新羅를 침범했다(倭人百濟之介百濟先與倭密通使之聯侵新羅之境). 그래서 太白逸史에 倭人은 百濟의 보좌였다(백제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했다. 종이 위에서 燕이 倭와 접하자, 百濟를 燕으로 고친 것이다.

倭를 三島라 하는 것은 金沙江 너머에 살던 中國倭가 金沙江 상류로 슬금슬금 기어나오고, 다시 靑邱大陸 끝으로 갔다가, 列島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日本史를 날조하면서 中國倭의 모든 지명을 列島에 갖다 붙였다.

“秦나라와 漢나라 때의 주민들이 한결같이 10월��에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서 한 폭의 진홍빛 비단과도 같이 솟아 오른다고 하니,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치우기(蚩尤旗)'라 이름하였다(秦漢之際住民猶常以十月祭之 必有赤氣 出如疋絳 民名謂蚩尤旗 揆園史話 神市紀).”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정복한지 2500년��이나 지나서 피정복민들이 갑자기 蚩尤를 생각해냈다? 秦나라, 漢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배달과 朝鮮時代) 사람들이 10월��에 제사를 지내면서 붉은 기운을 보고 蚩尤旗라 명명한 것이다. 상인 呂不韋의 자식이세운 秦나라는 蚩尤氏 후손의 나라가 아니고, 漢나라 역시 中土를 통일(?)한 나라로 주민 다수가 華夏族이다. 中土에서 蚩尤氏에게 제사지낸 사람들은 蚩尤氏의 후손 뿐이다. 蚩尤氏를 잊지 않고 기억한 사람들은 우리나라 주민들이다. 우리나라 역사책을 무분별하게 모조리 베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漢族을 하나의 민족으로서 부르는 것은 강응량(江應梁)이 주장한 ”��민족이라는 것은 국가와 동시에 형성되는 것이고 또한 국가라는 것은 민족이 존재하고 발전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

(공봉진, http://www.hopia.net/ries/silk/silk10-3.htm, 실크로드 絲綢之路 참조)

실로 별 희한한 말이다. 티벳고원 북부는 백 개가 넘는 나라가 존재한 春秋時代를 제외한다 해도 戰國 時代, 5胡 16國, 5大 10國으로 난립했던 땅이다. 그렇게 나라가 흩어지고 모일 때마다 민족이 무수히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말인가. 그 나라들 마저 매번 강제적으로 외부종족의 유전자를 공급 받아야 했다. 우리나라 역사로 옷을 입혀서 그럴싸하게 보이지, 매번 외부 종족에게 정복당한 中土의 역사는 비참 그 자체다.

華夏는 타림분지와 캐시미르를 통해 中土로 침입한 종족들과 靑邱大陸을 차지한 韓民族에 의해 이중으로 지배받던 식민종족이다.世��界史 에서도 타종족의 지배를 숨가쁘게 받아온 유일한 종족이다.

중국 말고 그 어떤 나라가 그 땅에 들어섰던 온갖 종족이세운 나라를 제 역사라 우긴단 말인가. 中國史는 없다. 中土史에 지나지 않는다. 中土 조차 티벳고원 북부에서 揚子江 이남으로 다시 현 黃河 이남으로 옮겨지고 靑邱大陸으로, 동아시아로 확대됐다. 그러니까 그 땅의 역사조차 아닌 것이다. 결론적으로 中國史란 피지배 종족의 시각에서 본 植民史로 기술할 때나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韓民族이 고작 大韓帝國에서 따온 이름이며, 우리민족이 濊貊族 이라고? 濊貊은 挹婁, 勿吉, 靺鞨, 女眞, 滿州라 불리던 미개 종족이다. ”��혈거생활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常爲穴居冬以豕膏塗身厚數分 以禦風寒 作於中廁之而居 三國志 魏書)”��으며 살던 지구 최후의 원시인이다. 우리민족의 결속력은 강했지만, 민족이란 단어가 근대에 생긴 것이라?, 배달과 朝鮮 시대에는 우리민족을 桓族, 韓族, 漢族이라 불렀다. 加臨土에서 한자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여러 글자를 사용했다.

中土 최초의 통일국가(?)라는 秦은 고작 14년�� 밖에 존속하지 않았고, 後漢(947~950)이라는 나라는 고작 3년 존속했다. 실상 저 땅에는 십여년�� 내지 수년 존속하다 사라진 나라가 무수하다. 그때마다 민족이 생겨나고 사라지나. 그 짓도 엄청 바쁘겠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민족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야 하니까.

濊貊族의 거주지가 弓漢里이다.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는 다까마스(高松塚)에 대한 글을 쓰며 한국의 지도자라는 의미로 漢師라고 썼다. 아직기(阿直岐)를 倭漢直(倭는 5세기 전후에세운 나라이므로 阿直岐의 본명이 倭漢直일 리가 없다. 阿直岐는 倭로 건너간 다음 만든 이름이다. 엄연히 百濟皇帝가 列島에 말을 갖다 주도록 시켰던 阿直岐를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서는 중국인이라 날조했다)이라 쓰고, 東漢氏라고 불렀다. 阿直岐에게 왜한사주(倭漢使主)라는 벼슬을 주었다고 하고, 왜한판상직(倭漢坂上直)은 阿直岐의 후손이다. 긴데츠(近鐵) 나라역 주변에 있는 한국신을 모신 한국신사도 漢國神社다. 현 黃河는 漢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漢族은 무려 1 만년의 역사를 가진 이름이다. 대조선의 민족을 이르는 말이다.

맡기다; 버리다; 쌓다; 자세하다; 끝; 시들다; 굽다; 곳집; 옹용하다. 옥편을 찾아보면 委의 뜻이 저렇게 나오지만, 옛날에는 ‘예속되다’라는 뜻이었다. ‘맡기다’에서 발전한 의미다. ”��日本의 역사는 없다(최성규)”��에서는 ‘쓰러지다’, ‘고개 숙이다’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 漢에 예속된 노예나라의 왕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委를 예속되다 이외의 뜻으로 새길 수 없다. 漢委奴國王은 華夏와 倭, 匈奴, 거란, 靺鞨 등을 한꺼번에 부르는 말이었다. 三國이 존속할 당시에도 五胡十六國(5胡 16國 이전의 나라들은 모두 우리민족이세웠다)에서 唐까지 스물도 넘는 나라가 명멸했다. 中國倭는 많을 때는 백 나라(? 촌락)나 되었다. 이들 나라를 일일이 부르기 귀찮았던 것이다. 그래서 한 단어로 만들어낸 것이 漢委奴國王이었다. 漢에 예속된 노예를 漢委奴, 漢에 예속된 노예나라를 漢委奴國, 漢에 예속된 노예나라의 우두머리는 漢委奴國王이라 불렀다.

日本은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 새긴 金印을 만들어놓고 ‘고대 列島의 왜(倭)는 하나의 국가였고 왕이 다스렸다는 증거’라고 우긴다. 박물관에 전시해놓은 金印을 보려고 연일 수많은 日本人들이 몰려든다. 金印은 日本이 애지중지하는 國寶다. 金印의 출토지(?)는 공원화 해놓고 있다. 노예국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스스로 노예국임을 자랑하다니, 천만뜻밖이 아닌가.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 漢에 예속된 노예나라의 왕’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일본도 알기에 委(위)가 倭(왜)를 잘못 새긴 것이라 주장한다. 그래봤자 한에 예속(倭)된 노예나라 왕이라는 뜻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이제는 漢자는 빼버리고 왜노국왕(倭奴國王)이라 가르친다. 그래도 ‘노예의 나라’라는 뜻이 어디 가지 않는다.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 날조해놓고 마음에 안 든다고 한왜노국왕(漢倭奴國王)에서, 왜노국왕(倭奴國王)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왜노국왕(倭奴國王)의 뜻은 ‘순종해야 하는 노예나라의 왕’이다. 왜노(倭奴)는 ‘순종해야 하는 노예’라는 뜻이다.

이것을 두고 日本은 교과서에서 “왜노국(倭奴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기술한다. ‘왜(倭)라는 노예나라‘가 있었단다! ‘왜(倭)라는 노예나라‘가 있어서 자랑스럽단다! 왜(倭)라는 노예나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華夏의 식민지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식민지였다. 倭奴의 근원이 바로 華夏다.

한위노국왕이 음각되어 있는 금인 : 1784년�� 후쿠오카시(福岡市)에서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고 박힌 순금의 인장이 발견됨. 「後漢書」에 '서기 57년�� 倭의 노국(奴國)이 공물을 바치러 왔다. 광무제(光武帝)는 인수(印綬)를 하사했다' 는 기록과 합치되는 금도장이 발견된 것이다. 위조설도 있음.

金印에서 한(漢)자를 빼버리고 위(委)자도 왜(倭)로 고치면, 즉 왜노국왕(倭奴國王)이 맞다면, 어떻게 되는가. 다른 좋은 말 다 놔두고 하필이면, ’왜(倭)라는 노예나라의 왕’이라고 왜(倭)가 스스로 새겨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옥쇄로 사용했다는 소리다. 이것으로 외교문서에도 찍어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왜(倭) 내지 왜노(倭奴)라 불린 비천한 역사를 가진 日本은 확실히 희한한 나라다. ‘漢에 예속된 노예나라의 왕’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재빨리 가짜 금인을 국보로 지정했다.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 새긴 금인이, 일본의 주장대로 한(漢)나라의 타칭 황제가 왜(倭)에게 하사한 것이라 해도 비천한 일본의 실체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모욕적인 金印을 받은 왜노국(倭奴國, 순종해야 하는 노예나라)은 고쳐달라는 항의도 하지 않고, 금인을 반환하지도 않고 기꺼이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독립된 나라라 자랑할 수 있는가.

‘어떻게 日本 이전의 국호가 왜(倭)였을까. 제 정신인 상태에서 국명으로 왜(倭)를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일까’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필자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왜노국(倭奴國, 순종해야 하는 노예나라)이라는 나라도 있었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日本이 아닌가. 확실히 왜(倭)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을 때, 감지덕지하며 허겁지겁 國號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는 대대로 倭人, 왜놈, 왜년을 왜노(倭奴)라 불렀다. 다시 말해 日本이 우리나라 노예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배려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던 日本에 대한 당연한 인식이었다.

漢委奴國王이던, 漢倭奴國王이든 비천하기 짝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漢에 예속(委)된 노예나라 왕이든, 漢에 예속(倭)된 노예나라 왕이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역사왜곡을 하면서도 자신들이 비천하기 짝이 없는 존재임은 심중에,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저 날조 금인도 실은 일정한 진실을 가리켜주고 있다. 그냥 무턱대고 날조한 것이 아니라, 어딘가 문헌 속의 기록을 보고 가짜 금인을 만들었다. 기록 속의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의 漢은 華夏가 아니라, 우리나라다. 왜노(倭奴)는 華夏의 노예가 아니라 우리나라 노예다.

어떻게 중국의 한(漢)나라가 아니라고 장담 하는가’하고 묻겠지만? 漢나라는 前漢, 後漢 다 합해 기원전 202년��부터 기원후 220년��까지 있었다. 중간의 新나라 15년��을 뺀 407년��간 존속했다. 三國志 魏志東夷傳의 ‘倭人條’에 등장하는 야마다이국(邪馬台國)의 히미꼬(卑彌呼)와 30 小國 연합체는 中國倭에 대한 기술이다. 이 당시 倭‘國’이나 倭奴‘國’이 없어서 ‘倭人條’라 기록한 것이다. 그 외 匈奴族 족장 유연(劉淵)이 304년��에세운 한(漢)도 있다. 그러나 국호를 조(趙)라고 고쳤다. 匈奴族 石氏가세운 조(後趙)와 구별하기 위해 전조(前趙)라고 부르는데, 304년��에서 329년��까지 존속했다. 또 947년��에서 950년��까지 존속한 後漢이 있었다. 劉邦의 漢나라와 구분하고자 後漢이라 부른다.

물론 倭奴들도 304년��과 947년��에세워진 이들 漢나라에서 금인을 주었다고, 이때부터 列島에 나라가 등장했다고 날조하려는 욕심에 눈이 멀어 노예국이라고 스스로 폭로한 것은 아니다. “왜(倭)는 연(燕)에 속한다.”는 山海經의 구절을 두고 기원전 부터 列島에 倭가 있었다고 日本이 우기는 데서도 알 수 있다. 漢委奴國王이나, 倭는 燕에 속한다는 전부 노예국이라는 비천한 기사다. 이마저 日本에 국가가 등장한 시기에 대한 허위근거로 삼아야 하는 것이 日本史다. 고작 靑邱大陸의 한줌을 차지했다는 燕이 어떻게 천 수백 km의 바다를 건너 日本列島를 지배할 수 있었단 말인가. 더구나 中土의 소국들과 泥田鬪狗를 벌인 燕이 바다 건너 섬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있었을까.

中土의 나라들은 明 이전까지 日本과 교류가 없었다. 그래서 日本은 갑자기 揚子江 이남에 등장, 天子國 행세를 하는 華夏의 나라에 접근하기 위해 李氏朝鮮에 매달려야 했다. 李氏朝鮮 前期에 거의 5 천 건에 가까운 日本國王使, 거추사(巨酋使), 규슈탐제사(九州探題使)와 대마도주특송사(對馬島主特送使), 제추사(制酋使) 등 온갖 명칭의 사절을 보내 明과의 ‘통교’를 주선해 주기를 간청했다.

(http://opendic.naver.com/100/entry.php?entry_id=60278)

漢이 우리나라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었다면, 華夏가 漢族 이었다면 우리나라는 華夏를 한위노(漢委奴)가 아니라, 한노(漢奴)라고 불렀을 것이다. 漢나라가 우리민족이세운 나라가 아니었다면, 한구(漢寇;한나라 도둑)가 아니라, 한노(漢奴)라 불렀을 것

이다.

중국의 漢族은 漢나라 때가 아니라 明나라 때 만들었다. 우리민족을 부르는 漢族을 그대로 베꼈다. 華夏가세운 나라가 없어서 漢나라를 華夏의 나라로 둔갑시키려고 종족명까지 훔쳤다.

우리민족을 부르는 漢族을 그대로 차용했기에 “화족(華族)이나 하족(夏族)이나 화하족(華夏族)이란 글자나 또는 그것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華나 夏나 지극히 아름답지 못한 뜻이기 때문이다. 미개의 바닥을 헤매는 ”��華夏族의 문화적 정치적 수준에 대해서 언급된 기록”들은 中奴가 모조리 삭제 하거나 우리나라의 역사라고 전가했다.

중국의 漢族은 없었다. 잡다한 종족들을 이리 저리 끌어 모아 우리 민족명을 갈취했을 뿐이다. 굳이 종족명을 붙이겠다면 명족(明族)이라고 해야 한다. “明族이란 오로지 明나라의 정치적세력 밑에 든 여러 갈래의 종족들을 합친 말이다. 明族은 어떤 하나의 특수한 독립적 종족이 아니라 여러 종족들 혹은 민족들의 혼합체인 까닭에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민족의 개념으로서의 明族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明나라에 속한 사람, 백성, 혹은 국민으로서의 明族이라는 것이다.”

濊貊族이세운 淸 때는 明族이라 부를 수 없고, 淸族이라 해야 한다. 물론 그 뜻은 ”오로지 淸나라의 정치적세력 밑에 든 여러 갈래의 종족들을 합친 말이다. 淸族은 어떤 하나의 특수한 독립적 종족이 아니라 여러 종족들 혹은 민족들의 혼합체인 까닭에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民族의 개념으로서의 淸族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淸나라에 속한 사람, 백성, 혹은 국민으로서의 淸族“이다.

中奴의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 단어가 中族이다. 그 뜻은세계의 중심 종족이 아니고, 단순히 “수많은 종족의 집합체”이다. 그러나 華夏族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華夏族은 미개 종족의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한민족은 단일민족인가. 우리는 그 동안 우리나라가 내내 한반도에 한정되어 있었다고 단정해 왔으므로 서슴없이 단일민족이라 말해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高麗 末까지 靑邱大陸을 중심지로 삼아 아시아를 지배한 나라다. 단일민족이 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타임 라이프북스(Time, Life Books)의 2 차 대전에서는 일본조차 단일민족이라 단언했다.

日本 국민이 정확하게 언제 어디서 왔는가는 신화나 전설 속에 묻혀 잘 알 수 없다. 기원전 어느 시기에 기본적으로 몽고계에 속하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이동의 흐름이 韓半島를 거치고 바다를 건너서 동아시아의 가장자리에 솟은 화산섬 열도에 속속 상륙했다. 이들은 선주민과 섞이면서 남쪽에 있는 3 개의 섬에 정착했다. ��… ��1941년�� 서양과의 전쟁에 돌입한 日本人은 바로 이 원시적 이주자들의 직계순혈 자손이다. 전쟁 당시 총인구 중 불과 1 % 미만이 타혈종이었다. 공동의 문화와 미래를 함께 영유하면서 지리적으로 때로는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세계와 격리된 채 살아온 일본인은 아마 세계의 주요민족 중에서도 손꼽히는 동일혈통족일 것이다.

(http://library.lhs.usd497.org/japan.htm )

1 %만이 他血種? 日本民族은 기원전에 온 것도 아니고, 純血民族은 더더욱 아니다. 청구대륙에서 이주한 中國倭만 해도 25.8 %요, 말살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先住民도 4.8 %나 된다(일본국립유전자협회에서 인정하는 호라이의 단독연구). 韓國人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비율은 24.2 %라고 했으니, 나머지 45.2 %는세계 각지의 온갖 잡다한 유전자라는 결론이다. 서양인이 일본을 맨 처음 방문한 1543년��부터 시작된 일본 민족과의 생물학적 교배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더 확대되어 갔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로티(Pierre Loti, 1850-1923)는 19세기 말 여러 번 일본에 다녀 갔었다는데, 그는 두 권의 '일본일기'라는 책을 남겼다. 그 책은 거의 일본 여자들과의 성행위의 기록이라고 한다. 대낮에 떼거지로 배로 찾아온 일본 처녀들과 프랑스 선원들의 선상 난교, 저녁이면 아무 마을이나 찾아가도 반겨주는 마을처녀들의 … 한 마디로 일본은 서양인들도 이해 못하는 성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http://tango.kist.re.kr/..0602.htm )

그러므로 日本人은 절대 민족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메국민족(米國民族)이라는 것과 똑같다. 일본인이 대부분 北方系 아시아인의 混血이다 보니까, 생김새에 큰 차이가 없을 뿐이다.

政治的인 목적으로 격리된 것이 아니라, 航海術과 造船術이 없어서 격리 되었다. 中國倭가 이주하자 三漢은 同族이라는 책을 焚書하고, 國風이라며 한문화(漢文化)를 이상하게 비틀었다. “공동의 문화와 미래를 함께 영유”하기 위하여 漢文化를 미개의 바닥까지 끌어내려 倭文化를 만들어냈다. 그런 미개 日本人이 “세계의 주요민족”으로 부상한 것은 고작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漢委奴國의 기나긴 日本史를 모르는 서양인들에 의해 극찬받는 민족으로 거듭난 것이다.

한민족은 單一民族이 아니다

한민족은 單一民族이 아니다. 한민족이란 배달과 朝鮮의 지배하에 모여든 種族 가운데 獨自種族으로서의 존재를 포기하고 장구한세월 동안, 같은 傳統을 계승하고 같은 文化를 향유하여 오는 동안 同化되어 同族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 종족들의 集合體이다. 따라서 과거에 한민족으로 살았다고 해도 어느 시기에 떨어져 나가 더 이상 한민족이라는 인식을 소유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한민족이 아니다. 또한 韓半島에 살면서도 스스로를 濊貊族이라 인식하는 자들도 한민족이 아니다. 현재 한민족이 單一血統을 가진 민족으로 인식되는 것은 淸이 李氏朝鮮의 땅을 계속해서 빼앗은 결과, 해부학상 같은 계통에 속하는 종족만이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三韓은 모두 五家 64 族을 포함 하였다(三韓皆有五家六十四族 檀君世紀).”�� ”��남부인은 풍족이라고도 하며 또 야자나무 색깔의 인종이라고 한다. 그 피부는 암갈색으로 모양은 오히려 황부인과 같다(藍部之人一云風族又棕色種其皮膚暗褐色貌猶黃部之人也 三神五帝本紀).”�� 64 族 대부분은 한민족이 아니다. 64 族은 아시아에 거주하는, 檀君의 지배를 받은 모든 種族을 가리킨다. 수로왕비(首露王妃)가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이름이 허황옥(許黃玉)이라는 것, 伽倻人과 대화가 가능했다는 것 등은 阿踰陀國이 우리와 같은 말, 같은 문자를 사용했음을 알려준다. 인도 역시 朝鮮의 거수국(渠帥國)이었던 것이다. 인도 역시 한문명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말해준다. 동남아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나라가 부탄(Bhutan)이다.

종카(Dzongkha)語 노래를 듣다보면 우리나라 전통 민요와 비슷한 약간 단조풍의 음색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의 놀이문화에도 제기차기,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등 동일한 놀이문화가 많고 부탄의 전통의상인 고(Gho·남자의상)와 기라(Kira·여자의상)도 얼른 보기에는 개량한복과 아주 유사한 모양이다(또 다른 한국 부탄, 노은오. 부탄 주재 한국어 강사)

(http://blog.naver.com/ilong4u.do?Redirect=Log&logNo=140002070066)

◀ 부탄 왕정의 표식

특히 종카語는 발음만 빼고 韓國語와 유사하다. 두 言語는 어순이 같고,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서 만든다. 경어법도 비슷하고, 발음에 있어 친숙한 단어들이 많다. 아빠, 엄마를 종카語로 아빠(Apa), 아마(Ama)라고 발음한다. 종카語 알파벳 상당수가 한글 알파벳과 비슷한 발음을 가지고 있다. 카(Ka) 차(Cha) 자(Ja) 타(Ta) 다(Da) 나(Na) 파(Pa) 바(Ba) 마(Ma) 와(Wa) 아(A) 야(Ya) 라(la) 사(Sa) 하(Ha)

종카語는 잡드룽 나왕 남게이(Zhabdrung Nawang Namgay)가 티벳어를 변형시켜 1616년�� 쯤에 만들어졌다. 그 전에도 종카語가 쓰이고 있었다는데, 그리 오래 전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成桂가 韓半島로 내뺀 1388년�� 이전에는 티벳이 티벳고원의 땅 한 줌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티벳고원에 들어오기 전에 티벳은 중앙아시아에 있었다. 중앙아시아에서 티벳고원 남부 이남에 있는 부탄에 언어를 수출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IUNNAN, QUEICHEU, QUANGSI ET QUANTUNG, PROVINCIAE REGNI SINENSIS, PRAEFECTURAE DICTAE c1700 or c1707

부탄에는 方言이 많은데, 종카語와는 완전히 다른 方言들도 존재한다. 부탄의 지형적 영향으로 오랜 기간 다른 지역과 교류 없이 고립된 지역들이 많아 方言的 차이가 심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日本의 예로 보건데, 아무리 고립되었다 해도 원래 사용하던 언어가 완전히 다른 언어로 변하지는 않는다. 부탄에 방언이 많은 것은 옛날부터 지역마다 다른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탄의 지리적 위치에 기인한다. 부탄은 방글라데시와 함께 우리나라(靑邱大陸)와 인도, 동남아 나라들의 문화 수렴대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다. 부탄은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로 부터 사람들이 흘러 들어가서 살던 지역인 것이다. 부탄이 하나의 나라로 통합된 것은 16세기부터 였지만, 지방은 토후들이 지배했다. 중앙집권제가 성립한 것은 1907년��에 와서다.

종카語가 韓國語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배달, 朝鮮時代에 부탄 역시 구한(九桓)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明 때 티벳고원에 티벳이 이주하고, 티벳불교를 받아들이면서 티벳어를 배우는 대신, 티벳어 발음만 기존 말에 접붙인 것이다. 종카語를 부탄의 일반인들이 배우기 시작한지는 수십년�� 밖에 안 된다.

LE ROIAUME DE LA CHINE ET SES PROVINCES... 1672

“대저 구한(九桓)의 족속은 나뉘어 5 종이 되고 피부의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었다. …. 남부인은 풍족이라고도 하며 또 야자나무 색깔의 인종이라고 한다. 그 피부는 암갈색으로 모양은 오히려 황부인과 같다(蓋九桓之族分爲五種以皮膚色貌爲別也…. 藍部之人一云風族又棕色種其皮膚暗褐色貌猶黃部之人也)”는 太白逸史 기사는 南方系 아시아인도 우리나라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동남아는 중국과 같은 처지였다. 속국이었다. 後漢의 儒臣 황락(黃洛)이 교지국(交趾國)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다고 하지만, 동남아의 나라들이 티벳고원 북부의 중국과 실제로 교류 했는지는 의문이다. 黃洛이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해도, 靑邱大陸에서 살았다는 것만으로 李氏朝鮮은 黃洛을 中國人으로 둔갑 시켰다. 중국이 동남아와 외교관계를 맺어 얻을 이익이 있었을까. 설령 동남아가 우리나라 외에 중국과 교류했다고 해도 大國을 小國으로, 小國을 大國으로 착각할 수는 없다. 중국은 동남아와 접한 우리나라만큼 활발히 교류할 수 없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上國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동남아의 역사문헌에는 우리나라의 諸侯國이라는 사실이 나와 있지 않은가. 어째서 中國이 靑邱大陸 전체를 차지했다고 되어 있는가.

PARTE OCCIDENTALE DELLA CHINA...PARTE ...INA c1695

우리나라의 屬國에서 중국의 속국이 된다? 東南亞의 국가들에게는 전혀 이익이 없다. 대가가 지불되지 않고서는 역사를 고치지 않는다. 역사책을 쓰지 않아서 우리나라가 上國인 것을 몰랐다? 우리나라는 모든 屬國, 植民種族에 역사책을 대대로 하사했다. 심지어 濊貊族도, 華夏族도 수천년��간 우리나라의 植民種族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成桂는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고, 朱元璋은 우리나라 역사를 갖길 원했던 것이다.

단순히 韓國史와 中國史만 바꿔치기 했다면, 주변국들이 반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나라의 속국 기술을 대폭 삭제 하거나 완화시켜 주었다면, 기꺼이 自國史도 뜯어 고친다. 말이 좋아 渠帥國이지, 植民地史다. 그것을 누가 자랑 하겠는가. 인간심리는 어디나 똑같다. 기회가 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식민지사를 삭제하는 것은 당연하다. 華夏나 倭奴만이 아니라, 모든 종족, 모든 나라가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15세기가 아니라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날조 韓中史에 맞춰 日本史를 고쳤다는 사실은 日本人이 얼마나 무지했는가, 日本이 얼마나 대외관계에서 소외된 나라였는가를 단적으로 대변한다.

朱元璋과 成桂(본명: 伯顔帖木兒)에게는 서양 역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아직 서양과는 본격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기 전이라 동양에 관한 그들의 지식은 단편적이었고, 中奴가 漢族으로, 秦國으로 둔갑한 상태에서 문헌기록은 모두 中國史로 단정되지, 역사 훔치기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1)

한제국(漢帝國)이 주변의 이민족을 정복하여 한문화(漢文化)를 침투시켜 나갔다? 漢나라는 한제국의 극히 조그만 일파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漢나라는 이민족을 정복한 적이 없다. 史記에 의하면, 匈奴에게 매번 막대한 공물을 바치다 견디지 못해, 漢 武王에 이르러 匈奴의 上國 北夫餘에 탄원하기 위해 右渠에게 길을 내달라고 뇌물까지 주었다. 右渠가 뇌물만 챙기고 길을 막자, 衛滿朝鮮을 침략했다가 卒本夫餘의 檀君 高豆莫에게 격퇴되었다. 그러자 분풀이로 군사령관 양복(楊僕)과 순체(荀彘), 사신 공손수(公孫遂), 위산(衛山)을 찢어발겨 죽이고 길거리에 전시했다(太史公曰 右渠負固 國以絶祀 涉何誣功 爲兵發首 樓船將狹 及難離咎 悔失番禺 乃反見疑 荀彘爭勞 與遂皆誅 兩軍俱辱 將率莫侯矣 史記)

漢帝國은 우리나라다. 한국에서, 배달, 朝鮮, 大夫餘, 北夫餘, 三國, 大震國, 高麗로 이어지는 大帝國이다. 중국은 늘상 異民族에게 정복된 나라다. 中土의 異民族은 漢나라에 정복되어 한문화(漢文化)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정복되자 中土로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고 우리나라 문화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주변의 異民族을 정복해 한문화(漢文化)를 침투시켜 나갔다. 고작 기원 전후가 아니라, 배달시대 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