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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으로 보는 역사증거-3-지명은 옴길수 있어도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7. 4. 7. 16:46
 

지명을 옮길 수는 있어도
지형은 바뀌지 않는다

                          2005/03/23 05:02

  

3. 지명을 옮길 수는 있어도
지형은 바뀌지 않는다

요수(遼水)가 있는 땅은 百濟와 高句麗의 영토이고, 大震國의 영토다. 高麗도 遼西를 차지하고 있었다.

1) 동으로, 남으로 밀려난 지명들

천문관측은 우리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기록을 남겼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과학적인 증거다. 그런데도 이 땅의 사학자들은 과학적 증거가 제시 되었음에도 기껏 자구해석에나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엉뚱한 데서 헤매고 있다. 절대적인 증거는 결연히 외면하고 언제든지 부정될 수 있는 문헌기록(文獻記錄)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中國은 천문 관측할 수 없는 땅이다. 중국 역사책에 기록된 천문관측 기록은 中國이 한 관측이 아니다. 中國 역사책에서 조차 우리나라 땅이라고 나와 있는 지역에서, 더구나 전쟁터에서 천문관측하는 사람은 없다. 중국 통일국가의 일식(日蝕:사서에서는 日食으로 표시되어 있다) 관측지 조차 표시되어 있지 않은 기록들을 수작업으로 위도가 다른 三國의 천문관측 기록으로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국이 정말로 천문관측한 나라라면, 여러 천문대를 운용한 나라라면, 천문기록을 뒤섞어 놓지는 않았다.

우리나라가 실측했고 中國(정확하게 明, 淸)이 베꼈던 것이다. 천문기록은 과학적 증거이다. 과학적 증거는 절대적 증거이다. 그러므로 천문관측 기록은 절대적인 증거이다. 中國이, 日本이 수십 억 권의 책을 가공하고 날조해도 일식기록 하나만 있으면 소설책 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없애지 않는 한, 3 조원 아니라, 30 조원, 300 조원을 들여 역사왜곡 한다해도 다 소용없는 짓이다.

우리나라가 중국 대륙을 지배 했었다는 과학적 증거는 이제 충분하다. 그런데도 이 땅의 사학자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은 桓檀史를 부정(桓檀古記의 부정) 하는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더불어 증거의 가치를 전혀 모른다는 것과 종합적인 사고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도 큰 문제다. 재야 사학자들의 문제제기에 대한 것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치부해 버리고 새 하늘이 있음을 애써 외면하면서 이러한 역사찾기 운동을 아주 사악한 것으로 본다. 도대체 누가 더 사악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늘에 새긴 역사』가 출판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발해(渤海)연안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하여 高句麗 시기 동북아시아 문화의 황금기를 구가했다.”는 책이 나오는 실정이다. 발해만(渤海灣)에는 高句麗가 아니라, 百濟가 있었다. 그리고 한민족 문화는 “渤海연안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하지도 않았다. 만주(滿州)와 韓半島에서 발생하여 慈烏支 桓雄(蚩尤天皇) 이후 중국 대륙에서 발전한 문화가 韓文化를 주도했다. 三國時代에는 百濟가 한문화(韓文化)를 주도했다. 渤海灣은 百濟의 중심지에서 떨어진 관계로 “동북아시아 문화의 황금기를 구가”할 수도 없었다.

三國史記의 日蝕記錄에 의하면, 高句麗는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 이북에서 중국 北部, 百濟는 渤海灣, 新羅는 揚子江 유역에 있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일식기록이 극소수라서 三國의 영토는 이들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朝鮮의 일식관측지가 黃河 이남이고, 大震國의 일식관측지가 시베리아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중국대륙의 전 지역 이라는 의미다.

中國 동부에는 아직도 우리나라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중국 동부에서 三國은 수세기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벌여왔던 것이다. 그런데도 중국 고지도를 보면, 黃河 하류에다 殷나라 발생지와 夏나라 도읍까지 다 그려두었다. 일식기록으로 본 三國의 영토가 접하는 지역에, 三國이 치열하게 접전을 벌인 지역에 중국의 주요도시와 수도가 몰려 있었다고 표시해둔 것이다. 당연히 날조다.

우리나라가 중국 대륙에 있었는데, 어째서 우리역사에는 黃河와 長江이 등장하지 않을까. 黃河와 長江이 있었다면, 김부식(金富軾)에게 책임을 전가해 한반도 어디에다 억지로 끼워 맞추었거나, 못 찾았다는 지명 360개에다 포함시켰을 것이다. 반면 中國史에는 黃河와 長江이 나온다. 중국이 黃河라 불렀던 것은 역사왜곡일까. 중국사를 빈번히 장식하는 이런 중요한 江도 왜곡할까. 솔직히 中國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모든 나라는 江을 끼고 성립한다. 그만큼 물이 중요한 까닭이다. 中國 東部는 三國의 혼전 지역이다. 그러므로 중국 동부를 차지한 고구려, 백제, 신라 영토 너머 중국 내륙부까지 강이 뻗어가야 했다. 중국에 그런 강이 몇 개인가. 黃河하고 揚子江 둘이다. 夏, 殷, 周가세워진 강은 黃河가 아니라, 揚子江이다. 양자강을 잘라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것이다. 지금도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중국 남부 한강(韓江) 동북쪽에 금강(錦江), 백마(白馬)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錦江이니까, 강이어야 하고 白馬江 역시 어딘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금강, 백마강 이전에 사비하(泗沘河)라고 불렀다. 白馬는 江 이외에 마을 지명으로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韓江? 우리나라 강은 漢江이다1). 韓江 이전에는 한수(漢水)였다. 한수(漢水)는 섬서성(陝西省) 영강현 북쪽 파총산(播潨山)에서 흐르는 물을 말한다.

朝鮮과 三國 그리고 일본이 베낀 일식기록은 중국의 역사가 중국 대륙 전체와 동북아에서 일어났다고 기술한 중국의 25史가 전면적으로 날조되었음을 증명한다. 중국 고지도에서도 지명이 단계적으로 밀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朝鮮과 三國 그리고 일본이 베낀 일식기록은 中國의 地名이 동북아 이전부터 전부 밀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중국 대륙의 지명이 밀린 사실은 중국의 현재 지도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다. 南京이 中京보다 위도 3 ° 가량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300 km쯤 된다. 南京, 中京은 중국이 붙인 지명이 아니다. 그래서 밀어낸 것이다. 중국이 스스로 붙인 지명 이라면 남경, 중경의 지명이 서로 바뀌었을 것이다. 고위도 부터 北京, 中京, 南京 순으로.

사천성(四川省)에는 揚子江 북안, 삼협(三浹)(중국말로? 싼샤라고 발음하고 있지만) 서쪽에 백제성(白帝城)이 있다. 한자는 바꾸었지만, 누가 봐도 百濟城을 白帝城으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白帝는 태백일사(太白逸史)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에 나오는 우리나라 오제(五帝 : 靑,黃,赤,白,黑帝)의 하나로 성수(星宿 : 별자리)를 주관한다. 중국이 훔친 28 수(宿)에도 白帝가 나오는데, 28 수는 桓檀 이래로 우리나라 천문용어이다. 百濟城이 아니라, 白帝城이라면 어째서

고려영의 위치

나머지 五帝城은 없는가. 청제(靑帝)城 적제(赤帝)城 황제(黃帝)城, 흑제(黑帝)城도 있어야 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중국이 자기네 시조(始祖)로 떠받는 염제(炎帝 : 神農氏)城, 황제(黃帝: 軒轅氏)城부터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지명을 같은 음의 다른 한자로 바꾼 것은 비단 百濟城, 白帝城만이 아니다.

新羅가 현 武漢과 중국 남부, 한반도(韓半島), 흑룡강(黑龍江) 등에서 천문관측한 것처럼, 百濟도 발해만 에서만 천문관측 하지 않았다. 백제는 중국 남부에도 있었다. 白帝城은 북쪽으로 밀린 지명 이었던 것이다.

高麗營2)의 유래를 보면 唐나라 시기에 朝鮮人들이 이곳에 모여 살면서 발전을 한 것이 유래이며 淸나라 시기에는 강희(康熙)년간에 칠촌(七村) 청진사(淸眞寺)가 있었으며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곳은 회족(回族)들이 예배를 보던 중요한 장소라 한다. 옛부터 장사치들이 운집을 하여 거래가 왕성했으며, 이로써 이곳이 "北京과 河北省의 제일중진(第一重鎭)"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据史料记载, 中国唐朝年间有部分鲜族人内徙定居于此, 逐步发展成集镇, 是为高丽营的由来. 北京市顺义区高丽营镇历史悠久, 有着丰厚的文化底蕴. 建于清朝康熙年间的七村清真寺, 至今保存完好, 是当地回族居民做礼拜的重要场所.且自古商贾云集, 购销两旺, 成为远近闻名的"京北第一重镇". http://www.gaoly.bjshy.gov.cn/ 참조). 이 곳 高麗營은 北京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20 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사통팔달 교통의 중심지이며 인구가 3 만 명 정도이며 2 개의 초등학교와 2 개의 중학교가 있다고 합니다. 지나인(支那人)들이 순의(順義)區를 설명하는 구절에 이곳이 어양(漁陽)지역 이였다고 설명 합니다.

49년�� 모본열제(慕本烈帝) 때 漢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공격했는데, 실증 한단고기에는 이들 지명이 후대에 생겨났다고 했다. 閔中烈帝의 뒤를 이은 慕本烈帝는 大武神烈帝의 아들로 대단히 흉포했다고 한다. 그러나 폭군이였는지는 다시 논의할 필요가 있다. 慕本烈帝 2년��(A.D. 49) 왕은 장수를 보내어 後漢의 右北平, 漁陽, 上谷, 太原을 습격케 하니 後漢의 요동태수 채융(蔡彤)이 정성을 다해 우리에게 대하므로 다시 後漢과 화친했다는 기록이 三國史記, 後漢書에 기록되어 있다(二年春 遣將襲漢 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後漢書). 여기서 右北平은 지금의 北京 동북 300 리 지점이고, 漁陽은 北京 동부 지역이며, 上谷은 北京 북부지역으로 중국의 북방 전진기지로 중요한 요충지이며, 太原은 오늘날 山西省의 성도(省都)로 당시 북중국의 중심지였다.

天文觀測으로 찾은 韓國史에 의하면 後漢은 百濟의 다른 이름이다.

한서와 후한서 지리지에는 낙랑군, 조선, 패수, 수성, 누방, 열수, 열구 등이 있다고 했는데, 이러한 지명들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차츰 새로운 이름으로 대치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새로 생겨난 지명들이 북평, 우북평, 상곡, 어양, 현토, 요동 및 요서, 영주, 평주, 대방, 상산 등이다.

漢書는 92년��에, 後漢書는 70년�� 말에 완성했다면서, 漢書와 後漢書에도 없는 지명을 慕本烈帝는 어떻게 공격할 수 있었는가. 北平, 右北平, 上谷, 漁陽, 玄兎, 遼東 및 遼西, 營洲, 平州, 帶方, 象山은 새로 생겨난 지명이 아니다. 原 中土에 있던 지명이다.

中土의 지명을 中土 밖으로 밀어낸 것은 역사를 날조한 朱元璋이다. 이들 지명은 李氏朝鮮 땅을 단계적으로 빼앗은 淸 때 여러 번의 재조정을 거쳐 현재의 장소로 밀려났다.

원래 北平은 산서성과 하북성 일대를 가리키는 이름 이었으며, 元, 明을 거치면서 비로소 현재의 北京을 북평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25史 지리지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한서지리지에는 현 북경의 서남쪽인 하북성 역현(易縣) 지역을 북평이라 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중원의 여러 지명이 점차 동쪽으로 이동해 왔음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역현은 옛날 연(燕)나라의 도읍지가 있던 곳이다. 즉 연나라의 도읍을 북평 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북평이란 지명이 북경으로 옮겨지자, 마치 연나라의 도읍지가 북경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 원래 연나라의 도읍지는 역수가 있는 역현과 탁현 일대이다.(실증 한단고기)

後漢書의 일식기록은 百濟가 현 北京에서 관측한 기록이다. 그러니까 현 河北省과 山西省 일부는 百濟 영토였다.

訓民正音 解例本에 中國을 “江南의 황제가 있는 나라다3)”라는 주석이 있다. 明은 揚子江 이남에 있었고, 따라서 揚子江 이남으로 北京(북평)을 밀어냈던 것이다. 燕은 옛 長江 이남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明이 역사날조 당시 “倭는 燕에 속한다.”고 했다. 燕이 발해만에 있다고 날조한 것은 淸이다.

山東, 山西의 기준이 되는 산은 太行山脈

河北은 原 黃河 너머를 가리키던 지명이다. 北平이 山西와 河北 일대를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날조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山西도 원 黃河 부근에 있었다. 현재 중국의 행정구역을 보면, 山西와 山東이 떨어져 있지만, 예전에는 붙어 있었다. 예전에는 河北지방이 山西지방 남서쪽에 있었다.

오늘날의 山東은 산의 동쪽(山東)이 아니다. 山東, 山西의 기준이 되는 산은 太行山脈이다. 그런데 태행산맥 서쪽을 산서(山西)라 하면서 태행산맥 동쪽을 山中도 아니고 하북, 하남이라 한 것이다. 山東 이라면서 黃河 너머에서 부터 시작하고 있다. 원 中土의 지명을 중국 대륙에 억지로 끼워 맞추다 보니까, 불가피했던 것이다.

李氏朝鮮 초에서 중기 까지는 遼水가 상건하(桑乾河)였기 때문에 黃河 이북에는 遼西, 遼東의 지명을 붙였다. 李成桂가 중국 대륙에 있던 지명을 韓半島를 중심으로 우겨넣고, 明에 이어 淸이 中土의 지명을 밀어내자, 마치 처음부터 北京이 오늘날의 위치에 있었던 것처럼 인식된데 불과하다.

몽한 중토 침입시의 고려강역도

 

元은 北平을 밀어내지 않았다. 元은 중국의 왕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明이 지명을 밀어내면서 元을 물귀신처럼 끌어들인 것이다. 元은 朝鮮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우두머리를 징기스칸(汗;한), 쿠빌라이칸(汗)이라 하고, 그들이세운 나라를 오고타이‘汗國’, 차가타이‘汗國’, 일‘汗國’, 킵차크‘汗國’이라 했다. 몽골은 우리민족이다.

蒙古와 거란(契丹), 女眞은 朝鮮, 高句麗의 계승국을 자처했던 나라다. 나머지 異民族도 모두 정복한다는 생각으로 中土를 차지한 것이지, 中奴가 되기를 염원해 中土에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다. 단 滿州族(揚子江 이북의 淸)은 中奴가 되기를 열망해 역사도 날조하고, 지명도 밀어냈다. 그래도 隸貊族이 “혈거생활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살았다.”는 기록은 남겨 두었다. 滿州族으로 종족명을 바꾸면 “혈거생활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산” 미개종족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다고 여겼던가. 하기야 끝내는 滿州族이라는 종족 명조차 生女眞에게 넘기고, 漢族으로 변신했으니까.

蒙古가 세운 나라의 國名은 元이 아니었다.

蒙古가세운 나라의 國名은 元이 아니었다. 제 자식들에게 분봉한 땅은 오고타이‘汗國’, 차가타이‘汗國’, 일‘汗國’, 킵차크‘汗國’이라 하고, 정작 본국은 元이라 했단 말인가. 蒙古는 통치자의 호칭마저 한(汗)이라고 했던 나라다. 우리나라의 계승국이 되는 것이 蒙古의 최대염원 이었다.

그래서 국호마저 몽한국(蒙汗國)이라 했다. 이는 일본원정에 나선 몽고군을 몽한군(蒙漢軍)이라 부른 데서도 알 수 있다. 汗은 우리민족만을 지칭하는 말이다. 蒙漢軍은 蒙汗軍이었다. 明이 역사를 날조하면서 蒙汗軍을 蒙漢軍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蒙軍, 元軍은 이상했던가.

汗이 땀나다는 뜻이라고? 그렇다면 거란도, 女眞도, 蒙古도 汗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저들은 우두머리 까지도 汗이라 불렀다. 당연히 유추할 수 있는 汗의 뜻은 왕, 지배자다. 明이 字典을 만들면서 지운 것이 분명하다. 구한1)을 나누어 다스리는 각각의 우두머리2)를 汗이라 불렀다. “戊戌 28년�� 구한(九桓)의 여러 한(汗)을 영고탑(寧古塔)에 모이게 하여 三神과 上帝에게 제사 지냈다(戊戌二十八年會九桓諸汗于寧古塔祭三神上帝 檀君世紀)."

정작 원(元)이라 한 것은 우리나라이다. 대원국(大元國). 大震國 유민이 세운 나라의 하나다. 우리나라나 피지배종족들은 한단사(桓檀史)에서 국호를 따왔으니까, 元도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 있는 이름이 분명하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보면 淸 역시 처음에는 금한국(金汗國)이었다. “태조 누루하치(努爾哈赤)에 이르러 궐연히 건주(乾州) 땅에서 떨치고 일어나서 팔기병을 거느리고 滿州를 석권, 금한국(金汗國)을세웠다(太祖努爾哈赤蹶然奮興於建州之地 率八旗之師而席卷滿洲創金汗國).” 1115년��에 세운 금나라(金國) 역시 금한국(金汗國)이었다. 그래서 淸을 일명 後金이라 했다. 요나라(遼國)도 요한국(遼汗國)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隋, 唐 역시 다른 국명을 사용했을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遼는 요만(遼滿)의 들녘에서, 唐은 당장(唐莊 혹은 唐藏)의 들녘에서 따온 글자이다. 遼라는 말도 우리나라가 먼저 사용했다. 흥요국(興遼國). 1029년��에 大震國 유민이 세웠다는 것은 날조고, 929년��쯤에 세웠다. 나라가 멸망하고 104년��이나 지나서 재건하는 예는 세계사에 없다. 이스라엘은 유대인들 스스로세운 나라가 아니라, 잉글랜드와 미국 주도하에 유대인들을 이주시켜 만든 나라다. 무엇보다 大震國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들은 大震國의 핵심 요충지에 몰려 있었는데, 高麗가 後三國을 통일한 936년�� 직후 그 땅을 회복했다. 거란(契丹)이 먼저 遼라고 했다면, 거란에게 멸망한 大震國의 유민이 세운 나라가 국호로 遼를 사용할 리 없지 않은가. 거란은 946년��에 遼汗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興遼라 한 것으로 보아 요만(遼滿)의 들녘에 세운 나라로 추정된다.

나라이름 遼는 興遼를 세우고 나서 파생된 뜻이다. ‘멀다’라는 뜻으로 국호를 짓는 나라는 없으니 이 역시 중국이 지운 것으로 추정된다. 桓은 하늘이라는 뜻이고, 韓은 크다는 뜻, 漢은 기록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玉篇에는 銀河水라고 나온다. 6 천년 이상 지속적으로 천문관측해온 우리나라에 딱 어울리는 말 아닌가.

지명을 밀어내면, 蒙汗은 朝鮮의 계승국이 아니라, 中國의 왕조로 변하고 만다. 현 北京은 몽고간섭기(?)3)를 제외 하고는 내내 百濟, 新羅, 高麗의 영토였다. 몽고간섭기에도 현 黃河 이남에는 高麗가 건재했고, 동북아도 高麗의 영토이다. 蒙汗이 유독 北京만을 中土 밖으로 옮겼단 말인가. 中奴가 싫다고 중토봉쇄까지 단행한 나라가 아닌가. 蒙汗은 현 北京을 大都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元, 明을 거치면서 비로소 현재의 北京을 北平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北平이라 부른 北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중국 대륙에 있었던 우리나라 지명

이제 중국 대륙에 있었던 우리나라 지명을 찾아보자. 黃河 하류에 아주 중요한 지명이 보인다. 요택(遼澤)이라고. 요택(遼澤)이 어떤 곳인가. 1차 高唐(?) 전쟁에서 唐王 李世民이 패주할 때 허겁지겁 정신없이 이용한 퇴각로다. 遼澤은 자연 늪지가 도처에 널려 있는 땅이라고 했다. 지금이야 개발한다고 黃河에 늪지를 남겨두지 않겠지만, 黃河가 큰 강인 만큼 그 옛날에는 늪지가 도처에 널려 있었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전쟁도

황제(李世民)는 1 만명의 군사에게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는 수레를 다리 삼아 건너게 했다. 황제가 직접 말채찍(馬鞘)으로 나무를 묶어 이 일을 도왔다(命無忌將萬人翦草塡道水深處以車爲梁帝自繫薪於馬鞘以助役 三國史記).

半島史觀을 만들어냈다는 金富軾의 三國史記에 나오는 기록이다. 그 遼澤이 黃河 하류에 버젓이 존재하는 것이다. 黃河가 遼水라면, 黃河 하류를 중심으로 위쪽이 遼西가 되고, 아래가 遼東이 된다.

그러면 과연 黃河 이남에다 성을 몇 개씩이나 쌓을 전략적 가치가 있는가. 물론이다. 百濟가 발해만에, 新羅가 중국 동부에 있었다. 高句麗가 반드시 현 黃河 중류나 하류를 차지해야만, 三國 간에 전투가 수세기 동안 전개 가능하다. 그렇다면 李世民이 黃河 하류로 부터 침공 하겠는가. 唐이 黃河 중류 이남에 있었고 高句麗 皇城이 黃河 하류 이북에 있었다면, 공격로는 오대산맥(五臺山脈)과 黃河 하류 두 갈래가 될 것이므로 黃河 하류로 부터의 공격은 필수적이다. 이 경우 黃河 하류의 성들을 그대로 두고 가면, 배후공격을 받아 패할 수밖에 없다. 배후공격은 승리의 첩경이다. 그래서 적의 배후를 찾아 기동전이 발달한 것이다.

그렇다면 黃河가 遼水인가. 이런 의문이 든다. 과연 遼澤만이 제자리에 붙박혀 있을 수 있는가. 요택도 밀려났던 것이다. 더구나 黃河는 동서로 흐르는 강이라 遼北, 遼南은 돼도 遼東, 遼西로 나눌 수는 없는 지형이다. 결정적으로 “百濟는 본래 高句麗와 함께 遼東의 동쪽 천 여리에 있었다.”는 宋書의 기사가 성립할 수 없다. 遼東의 동쪽 천 여리는 黃海니까. 또한 百濟 영토가 桑乾河 以東4)이고 상건하 以西가 高句麗 영토면, 新羅와 百濟의 전쟁이 불가능해진다.

百濟가 말기에는 발해만도 일부 상실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水經注의 기록대로 桑乾河가 遼水가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만일 상건하가 遼水라고 한다면, 요택은 중국 지명 사상, 유일무이하게 뒤로 물러나온 지명이 된다. 물론 中國은 지명을 南으로도 밀었다. 그러나 遼水를 북동방으로 밀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遼水의 한 지점이 반대로 이동하는 것은 명백한 후퇴다. 더구나 遼東은 고구려 영토니까, 桑乾河가 遼水라면, 요동의 동쪽 천 여리에 위치한 百濟는 발해만에 없었다는 결과가 되고 만다.

중국 지도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중국 지도는 역사왜곡용으로 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三國史記와 삼국사기의 일식관측기록에 따라 漢水와 황산강(黃山江)을 찾기로 했다.

일식기록으로 찾은 新羅의 강역이 揚子江 이라고 했다. 新羅는 黃山江에서 시작했다. 날조사에 의하면 끝까지 黃山江에 위치했다. 바로 揚子江이 黃山江 이었던 것이다. 高句麗가 최대 판도였을 때(文咨好太烈帝), 黃山江 이남까지 확보했다. 廣開土境好太皇은 黃山江 이남으로 진출, 倭를 격파했다.

천문기록으로 살펴본 百濟의 강역은 발해만이다. 백제는 漢水에서 건국한 나라다. 그러면 영정하(永定河)나, 조백신하(潮白新河), 난하( 灤河), 대능하(大凌河)가 漢水? 百濟는 나중에 漢水를 상실했다. 高句麗도 한때 漢水 유역을 차지했고, 新羅도 漢水 유역을 차지한 적이 있다.

韓江은 글자도 틀리지만, 漢水가 될 수 없다. 이 경우 高句麗가 漢水에서 싸우기 위해서는 언제나 黃山江부터 건너야 한다는 모순에 빠진다. 高句麗는 黃山江(揚子江) 이남으로 일시 진출했을 뿐이다. 상강(湘江 :상장강)이나 주강(珠江 : 주장강)도 마찬가지 이유로 漢水가 될 수 없다. 회수(淮水)가 漢水라면, 新羅는 6세기 중반이 아니라, 건국 초부터 漢水를 차지했다. 黃河가 漢水였던 것이다. 

사비성(泗沘城)은 百濟의 마지막 수도이다. 百濟가 마지막까지 상실하지 않은 땅에 있었다. 일식기록과 百濟長城 위치로 보면 현 北京이 泗沘城이고, 상건하(桑乾河)가 泗沘河이다. 낙화암(落花巖)은 현 北京 서쪽을 통과하는 강가에 있었다. 永定河 東岸에. 錦江과 白馬를 발해만에서 중국 남부까지 끝없이 밀어냈던 것이다.

唐이 黃河 중, 하류를 차지했다고 가정하면 高句麗와 百濟는 新羅와 전쟁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高句麗가 新羅를 위협할 수 없다는 모순에 빠진다. 어쨌거나 날조 역사책 속에서는 “新羅가 高句麗의 위협을 받아, 국가 존망의 위협에 처한 탓으로 唐에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양국 사이에 다른 나라가 끼어 있었다면, 新羅는 高句麗의 침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唐은 黃河 중, 하류까지 진출하지 못했던 것이다.

隋와 唐은 高句麗를 공격할 때 매번 遼西를 거쳐 遼東으로 갔다. 遼水는 新羅와는 관련이 없는 지명이다. 隋나, 唐이 水軍을 동원하여 遼水 지역을 공격하지 않았다. 水軍은 다른 곳에 있는 비사성(卑沙城)을 공격했다.

협동작전을 구사하면 승리할 가능성이 한층 높다는 것은 전술의 기본. 隋, 唐의 군대가 수, 륙 협동작전을 펴지 못한 이유는 遼水가 내륙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고려해볼 지역은 高句麗의 보다 큰 최적 일식관측지다. 天山山脈과 그 주변이다. 中國 대륙의 서북부에 해당한다.

隋나 唐이 요수지역을 공격한 것은 그저 高句麗 땅이나 빼앗자는 것이 아니다. 隋에 있어서도, 唐에 있어서도 王까지 참가한 총력전이었다. 高句麗 황성에 이르는 길목이기 때문에 공격목표로 선정되었다. 옛날에는 한 나라의 통치자가 사는 皇城 내지 王城을 함락시키면, 그 나라는 정복되었다. 다시 말해 遼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高句麗의 平壤城이 위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遼水가 高句麗 영토 깊숙이 위치한 것은 아니다. 高句麗의 도읍이 타림분지(塔里木盆地)나 중가리아분지(準喝爾盆地)에 있으면, 우선 거리상으로도 百濟, 新羅와 전쟁을 하기 힘들다. 高句麗가 고작 사막과 고원을 지키기에 급급하여 長城을 쌓았단 말인가. 高句麗의 도읍은 百濟(漢水=黃河 하류)와, 新羅의 도읍(현 武漢)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長城 이남에 高句麗 皇城이 있었다.

1차 高唐(?) 전쟁에서 李世民이 공격한 遼水는 내륙에 있었다. 安市城 전투에서 패하고 왔던 길을 차단당하자, 李世民은 遼澤으로 퇴각했지만, 萬里長城으로 가지는 못했다. 平壤城이 만리장성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李世民이 만리장성으로 갔다면 唐(그리고 中國)은 몽고고원에 있었다는 소리밖에 안 된다. 그러나 中國은 몽고고원에 시종일관 몽고가 있었다고 했고, 日本이 베낀 710년��에서 792년�� 까지의 일식관측지가 시베리아 남부다. 大震國은 百濟 영토 절반과 高句麗 영토를 차지했다. 몽고고원은 몽고간섭기 이전까지 내내 우리나라 영토였다.

高麗 말까지 長城 지역은 내내 우리나라 영토였다. 長城은 우리나라가 축조했다. 秦始王은 종이 위에서 長城을 쌓았던 것이다. 百濟는 386년��에 長城을 축조 했다지만, 386년��부터 축조했을 것이다. 百濟를 한반도의 소국으로 만들고 보니까, 한 해만 長城을 쌓아도 충분했다. 청목령(靑木嶺)에서 팔곤성(八坤城)과 黃海로 이어지는 長城을 쌓았다. 장성 위치로 보건대, 이 당시의 靑木嶺은 五臺山脈일 가능성이 극히 높다. 八坤城은 현 北京 이서나 이북에 있을 것이다. 黃海라는 것은 百濟를 한반도의 소국으로 축소 시켰기 때문에 맞춘 것이다. 長城은 발해만으로 이어진다. 高句麗長城은 百濟長城에 이어진 부분으로 오르도스사막(鄂爾多斯沙漠) 아래쪽에 쌓았다. 농경국가 百濟가 현 北京에서 오르도스사막을 건너 채달목분지(柴達木盆地))를 통해 高句麗의 平壤城을 침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柴達木盆地 위쪽을 지나는 長城은 高麗가 쌓았던 것이다.

현재 北京 아래는 파괴되어 일부만 남아 있는데, 과거 전쟁으로 파괴된 것이 아니고, 현대 중국인들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 중국의 13 억 인구 중 9 억 명은 급성장 중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광대하고 궁핍한 외진 곳에 살고 있다. 長城의 대부분도 이러한 벽지에 있다.

이 때문에 長城 부근에 살면서도 그 건축물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는 농민들도 적지 않고 심지어 長城의 벽돌을 빼내 짐수레로 옮겨 집이나 양의 울타리, 돼지우리 등을 짓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 목격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와이어드뉴스에 따르면 北京에서 가까운 河北省 주민들이 돌이나 토대물을 가져가는 바람에 1km에 걸친 長城의 일부분이 1년�� 만에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이처럼 관광객이 적은 곳은 자연 파괴나 주민의 약탈행위에 무방비로 놓여져 있는가 하면 관광객이 어느 정도 찾아오는 長城에서는 기념품으로 벽돌을 빼내가는 통에 몸살을 앓고 있다. 관광객의 이름을 조각해 주고 장성 벽돌을 3달러에 팔아먹는 것이다.

[http://blog.naver.com/singular.do?Redirect=Log&logNo=140000062534 참조]

中國이 내세우는 萬里長城은 百濟長城과 高句麗長城 그리고 高麗長城을 합친 것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동북아의 소국으로 축소된 高句麗가 날조 萬里長城 아래로 밀어낸 지명들을 공략했다고(百濟가 지배한 吳, 越, 燕, 齊, 魯 땅의 지명들을 중국 동부로 밀어 냈지만, 한반도의 百濟가 중국 대륙을 침공할 수는 없다며 가능성을 전면 부인한다), 黃河 이북에 있었다고 날조된 유목민족들이 揚子江 이북에 나라를 세웠다며 長城이 쓸모없는 건축물이라고 단언하지만, 長城은 무수한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축조된 건축물이다.

長城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百濟人과 高句麗인이 죽어 갔기에 중국은 “秦나라 사람의 절반은 萬里長城 때문에 죽었다.” “隋 楊廣이 1 백만 명을 동원했는데 열흘 동안 60 만 명이나 죽었다.”고 날조할 수 있었다.

적을 막을 수 없다면, 애초에 長城을 쌓지도 않았다. 新羅로 부터의 침공을 막는 장성이 없었기에 新羅가 三國을 통일할 수 있었다. 長城이 적의 침입을 막는데 효과적 이었기에 高麗는 백년 가까이 蒙汗을 정복하지 못했다. 高麗의 장성 이북 공략을 막기 위해 蒙汗은 어부지리로 얻은 땅에 서둘러 東寧府와 雙城總管府에 8 참(站)까지 설치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百濟에 이어 高句麗, 新羅, 高麗가 줄줄이 長城 축조에 가세했다는 사실은 長城이 얼마나 효과적인 방어물 이었는지를 말해준다.

날조된 명의 강역도

http://cn.news.yahoo.com/041015/264/268mn.html 에서 발췌

長城 축조는 공격에서 수비로 국방 정책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래서 長城이 적의 침입을 막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百濟도, 高句麗도 長城을 쌓은 직후부터 쇠퇴했다. 단 高麗는 예외로 長城을 축조한 직후 거란(契丹)을 中土로 내쫓았다.

검증해보자. 萬里長城을 여정5)이 쌓았다면, 中國이 長城 아래쪽에 있었다는 소리다. 新羅는 長城을 뚫고 揚子江 유역에다 나라를 세운 셈이다.

高句麗, 百濟가 長城 위쪽에 있었다면, 新羅와 전투를 벌일 수 없다. 공세 때마다 長城을 부숴야 하니까, 中國은 長城 보수 하다가 세월 다 보내야 한다. 長城을 넘어 나라를 세운 新羅는 고립된 채, 漢나라, 魏, 蜀, 吳, 晉, 宋, 齊, 梁, 5胡 16國, 隋가 망하고 唐이 들어설 때까지도 존속했다는 것이다. 百濟가 韓半島의 小國 이라면, 吳, 越, 燕, 齊, 魯 땅을 차지하자마자 중심지를 옮겼지, 韓半島에 남아 있지 않는다. 百濟에게는 더 넓은 땅을 차지하겠다는 야심이 없었단 말인가.

통일국가도 아니고, 고작 戰國時代의 列國 중 하나인 燕이 발해만을 다 집어 삼켰다고 왜곡하는 중국이다. 燕이 발해만에다 長城까지 쌓았다고 우긴다. 당시 燕은 上國 朝鮮에 조공을 바치는 처지였다. 史記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에도 나온다.

연(燕)나라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天子께 조공을 바치도록 했는데, 그 조공품이 성주(成周) 때와 같았다. 그리고 연(장공 : 莊公)에게 소공(召公)의 법도를 다시 세우고 잘 따르도록 하였다(使燕共貢天子如成周時職使燕復修召公之法 史記卷三十四 燕召公世家 第四).

“天子라는 호칭은 東夷(배달)에서 시작되었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생각했기 때문에 天子라고 한 것이다(天子之號稱始於東夷父天母地故曰天子).” 채옹(蔡邕 : 132~192)의 말처럼 이 당시, 天子란 朝鮮의 檀君 뿐이었다. 여불위(呂不韋 ; ?~BC 235)의 자식 때에 이르러 겨우 皇帝 칭호를 모방 했다고 날조한 중국이 아닌가. 무엇보다 燕이 발해만에 있었다면, 百濟가 발해만을 차지하고 건국 초부터 일식 관측할 수가 없다.

燕나라 長城의 실체는 百濟長城이다. 百濟長城을 燕이 쌓았다면, 南으로 부터는 공격받지 않았던가. 春秋戰國 시대에는 中土의 소국들끼리 싸워댔다. 결국 燕은 秦에게 망했다. 明이 날조한 역사 속에서 燕은 揚子江 이남에 있었다. 중국 남부의 倭가 燕에 속한다고 山海經을 뜯어고치지 않았던가.

역사스페셜 6 권에 보면, “현재는 영성자 산성(英城子山城)을 안시성(安市城)이라 지목하고 있다. 英城子城 옆에는 李世民이 지시 했다는 흙산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라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흙산은 安市城 여부를 비정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옛날 攻城戰에서 공격자는 으레 흙산을 쌓았던 것이다. 三國은 중국 하고만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三國 간에도 치열하게 싸웠다. 神市氏가 개천한 黑水와 白山 사이도 그냥 굴러 들어온 땅이 아니었다.

흙성(土城)이니, 암성(巖城)이니, 혼합성(混合城)이니 하는 것도 安市城을 비정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성은 흙성 아니면, 巖城, 混合城 중의 하나였다. 山城이라고 해서 安市城이 될 수도 없다. 城은 산 아니면 평지에 세워졌다. 城에 문이 두 개 있다고 하여 安市城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원래 성은 보통 문을 두 개 만든다. 門이 하나면, 무너졌을 경우 방어자가 퇴각할 방법이 없고, 문이 여러 개면, 적의 공격을 받을 장소가 그만큼 늘어나기 때문이다.

三國의 일식기록은 三國 이전부터 우리나라가 大帝國 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실은 朝鮮의 일식기록에 의해 뒷받침된다. 三國과 朝鮮의 최적 일식관측지는 黃河 하류가 우리나라 영토임을 알려준다. 黃河 하류는 三國이 각축전을 벌인 접경지역이다. 따라서 殷나라는 黃河 하류에 없었다. 殷나라의 존재는 고고학적 증명이 없었던 것이다. 은허(殷墟)6)라 하는 것은 朝鮮의 유적지이다.

어떤 수단으로든지, 영토를 차지하기 직전이나 직후에만 지명을 밀어낼 수 있다7). 中土의 지명은 李成桂가 朱元璋에게 우리나라 역사와 영토를 준 明 때 이르러서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역사왜곡의 일환으로 밀어냈던 것이다. 遼水를 끝없이 밀어낸 淸은 남아 있는 우리나라 지명마저 동으로, 남으로 밀어냈다.

서압록강 및 요수의 이동과정

中土가 워낙 작은 땅이라, 中土의 지명 만으로는 중국 대륙을 다 채울 수가 없었다. 해결책으로 中土에 섰다는 무수한 나라의 국명을 따서 산과 강 이름 등을 만들어 냈지만, 그것으로도 역부족이었다. 부득이 우리나라의 지명을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자를 同音異語로 바꾸었다. 百濟城, 白帝城이 그것이다. 이런 지명은 많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새로 만든 지명으로 대체되어 갔던 것이다.

여기서 혹자는 한자의 뜻이 다르다면서 그 변조 여부에 회의를 품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이는 한자의 음이 우리식으로 발음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자는 우리가 만들었으며 한자의 발음은 고려 말까지 중국 대륙의 표준말이였다. ☞ 고려시대 대륙의 표준말은 고려어였다 참조

역사 및 영토 훔치기의 목적에서 지명을 밀어내면서 고작 몇 개만 밀어내지 않는다. 모든 지명을 밀어내야 한다. 原地名을 남겨둔다는 것은 中國이 원래 어디에 있었는지 알려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명을 밀어내기 이전에는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가. 아니다. 날조 역사 속에 地名을 설명하는 단서를 남겨 놓았다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다. 지명을 옮길 수는 있어도 지형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2) 살수가 곧 진한의 남해안이다

三國遺史는 “遼水를 일명 鴨綠이라 한다.”고 했다. 이것만 갖고는 현재의 遼水를 鴨綠江이라 불렀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三國遺史가 편찬된 지 이백년�� 가까이 지나세워진 明의 지도에서도 遼水는 난하(灤河)다. 이 말은 明이 존속할 당시, 淸이 李氏朝鮮의 영토인 현 灤河까지 차지한 후 遼水를 밀어 냈다는 말이다. 明에 이어 淸도 역사날조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遼水의 또 다른 이름이 鴨綠江이었던 것이다.

鴨綠江은 우리나라의 강이름이고, 遼水는 중국의 강이름이다. 원래 遼水와 鴨綠江은 같은 강이 아니었다. 중국이 우리나라 땅을 일시 점령해 遼水를 밀어내자, 한 동안 같은 강을 지칭 하다가, 西鴨綠江 유역이 일시 明나라의 점령 하에 있게 되었을 때 西鴨綠江 유역의 주민들이 이주 하면서 새로 거주하게 된 땅의 강을 西鴨綠江이라 부르자, 明나라도 다시 遼水를 밀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遼水를 일명 鴨綠이라 한다.”는 말은 중국의 관점에서 쓴 것이다. 원래는 ‘西鴨綠을 일명 遼水라 한다.’고 써 있었다. 三國遺史도, 三國史記와 같이 明이 뜯어고쳤던 것이다. 이 사실은 三國遺史 첫 페이지 紀異編에서 부터 알 수 있다. 어떤 나라도 역사책을 쓰면서 타국의 역사로 시작하지는 않는다.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것이 현 遼水가 두 갈래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일봉(실증 한단고기 저자) 선생만 해도 현 遼水가 西鴨綠, 東鴨綠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淸이 날조한 明나라(1368∼16??) 지도에도 遼水는 난하로 한 줄기다.

李成桂와 朱元璋 등이 합의한 遼水는 상건하(桑乾河)다. 遼汗은 916년��에서 1125년��까지 존속한 나라이다. 요한(遼汗)은 현 요수(遼水) 지역을 차지해본 적도 없다. 大震國의 동북아 영토는 大興安嶺山脈 이북이었기 때문이다. 현 遼水는 新羅 영토이다.

중국은 遼水를 중국 쪽으로 끌고 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지명을 동으로 남으로 밀어내는 것은 저들의 역사왜곡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니까. 현재의 遼水는 후대에 역사왜곡용으로 붙여진 이름이었던 것이다.

중국 삼대간용총람지도나 여지전도에는 현 遼水가 鴨綠江이다. 靑邱圖에는 대능하(大凌河)가 鴨綠江이다. 韓半島 위쪽에도 압록강이 있었으니까, 압록강은 두 개였던 것이다. “辛酉 원년(B.C. 120년)고진(高辰)을 발탁하여 西鴨綠을 수비하도록 했다(辛酉元年 … 擢高辰守西鴨綠 北夫餘紀)”, “乙卯 36년��(B.C. 426) 동서 鴨綠 18 성1)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乙卯三十六年 … 東西鴨綠十八城皆遣兵來援 檀君世紀)” 등의 한단고기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언제부터 西鴨綠江이 있었을까. 우리는 지명을 밀어내지 않았으니까, 첫 번째 서압록강을 차지했을 때 붙였을 것이다. 배달 10세 한웅 갈고(葛古)가 神農과 공상(空桑) 以東으로 국경을 정했을 때이다.

국방부 청사 앞의 모조 광개토경대훈적비

광개토경대훈적비(廣開土境大勳跡碑)는 東鴨綠 皇城에 없었다. 東鴨綠江에는 皇城이 없었다. 百濟, 新羅부터 해서 東夫餘, 伽倻, 심지어 倭까지 전부 중국 대륙에 있었다. 東北亞에는 百濟 뿐이었다. 廣開土境好太皇이 정복활동을 벌일 당시 新羅는 韓半島 남부에 간신히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었다. 중국 대륙의 百濟만 정복해도 百濟 땅 동북아는 정복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 戰勝勳跡碑를 高句麗 영토에 세워야지, 百濟나 新羅 땅에 세웠다가는 당장 파괴되고 만다. 3, 4세기 이후 동북아는 高句麗 영토가 아니었다. 거리상으로도 百濟 땅 깊숙이 있는 東鴨綠江으로 高句麗 군대가 진격할 수는 없었다(우리가 알고 있는 高句麗의 지경은 百濟의 영토였다).

百濟를 한반도 남부에 집어넣었으니까, 西鴨綠江(桑乾河) 以西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해군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다. 현 遼水 이서로 진출하는 것조차 가능성이 없다고 이 땅의 사학자들은 百濟가 遼西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朱元璋과 李成桂는 百濟, 新羅를 처음부터 韓半島 남부에 집어넣었고, 廣開土境大勳跡碑는 百濟 정복을 최우선 공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李成桂는 韓國史를 축소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무대를 東鴨綠江으로 끌고 갔으므로 처음부터 東鴨綠江 근처에 가짜 비를 세웠다.

고려가 신라를 계승 하였다고는 하지만 강토는 이미 압록강에서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는 땅이 되었으며, 북방과 더불어 스스로 관계를 가지지도 않았었다. 또한 요(遼)나라와 金나라의 기세가 국경을 위세로 억누르니, 구구하게 압록강 이남의 수천 리 땅으로 다시금 웅혼 하고도 거대했던 나라와 비교될 수가 없었기에, 백성의 기세가 저절로 쇠미해짐이 옛날보다 심하게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김씨(김부식)가 역사를 서술할 때는 이미 압록강 이북의 일에 대해 묻는 자가 없었다(高麗旣承羅後 而疆土不出鴨水以外一步之地 自與北方無涉 且遼金之勢 威壓境上 區區鴨水以南數千里地 更非雄邦巨國之比 則民氣之衰微 自有甚於古者矣 是以金氏撰史之時 已無過問鴨 揆園史話)

鴨綠江 이남으로 수천 리 밖에 안 되는 땅은 東鴨綠江이다. 李成桂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東鴨綠江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날조하고, 黃河 이북까지 차지한 표리부동한 濊貊族이다. 애국심을 가장한 北崖가 얼마나 교활한 자인지는 揆園史話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거짓말이 아닌 대목을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윗글 에서도 “高麗가 新羅를 계승하였다”는 것만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大震國 땅도 회복 했으니까, 高麗가 大震國을 계승하지 않았다고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국경을 위세로 억눌렀다고 날조한 遼汗과 金汗은 李成桂와 北崖 조상(濊貊族)의 나라다. 결국 제 자랑을 했던 것이다.

東鴨綠 皇城.

皇帝가 사는 城이니까 皇城이다. 高句麗는 稱帝建元했던 것이다. 채옹(蔡邕)도 天子는 우리나라의 호칭이라 했다. 百濟가 병력을 동원하여 吳, 越, 燕, 齊, 魯 등의 땅을 평정하고 땅을 나누어 王과 諸侯를 封했다는 太白逸史와 三國史記의 기록은 百濟가 皇帝의 나라였음을 말해준다. 百濟가 皇帝의 나라였기 때문에 百濟를 정복한 高句麗 皇帝는 太皇 내지 太烈帝라 칭했다. 新羅는 高句麗에 버금가는 대국으로 국력이 신장되었을 때부터 稱帝(날조사에서는 法興王 때로 기록되어 있다)했을 것이다. 高句麗의 속국에서 百濟의 속국으로, 다시 高句麗에서 新羅의 속국이 된 中國은 建元稱帝할 수가 없었다.

滿州는 百濟 영토다.

黑龍江 상류에서 일식관측한 高句麗는 大興安嶺山脈 이북을 차지했다가 3, 4세기에 상실했다. 大震國과 新羅는 百濟 영토 동북아를 이분했다. 日本이 베낀, 黑龍江 중, 하류에서 관측한 794년��에서 1183년�� 까지의 일식은 新羅와 高麗가 관측한 것이다.

大興安嶺山脈 이남이 高句麗 영토라면, 日本은 大震國 멸망 후에는 黑龍江 중류의 일식기록을 베낄 수 없다. 高麗는 11세기 초에도 오르도스(鄂爾多斯)의 高句麗 長城을 서로 연장했다. 거란(契丹)이 11세기 초에도 오르도스와 그 이북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大興安嶺山脈 이남이 高句麗 영토라서 大震國 영토가 되고 그래서 거란(契丹)이 차지 했다면, 大震國이 멸망한 926년�� 이후 거란을 구축한 11세기 초까지 黑龍江 중류에서 일식관측할 수 없었다. 거란 같은 미개 유목국가가 일식관측했을 리 없고, 설령 했다 하더라도 日本이 온 사방의 나라에 다 朝貢한 것은 아니다. 日本이 거란 역사책까지 하사받은 것은 아니다.

설령 滿州가 高句麗의 강역이라고 해도 滿州는 高句麗의 최후방 지역에 해당한다. 최후방에 수도를 둘 경우 高句麗가 수도에서 출발해 중국 내륙부를 정복하자면, 어마어마한 거리를 진군해야 한다. 요즘이야 빠른 수송수단이 많지만 그 옛날에는 말과 배 뿐이었다. 전투에 들어가기도 전에 군대가 지친다. 그러므로 高句麗는 도읍을 정복 대상지에 가깝게 전진 배치해야 했다.

高句麗가 드넓은 중국 대륙과 동북아를 다 놔두고 韓半島에 수도를 둘 리는 없다. 溫祚가 동아시아 대부분에 이르는 高句麗 영토에서 고작 발해만 만을 가져갔을 리는 없다. 大興安嶺山脈 이남은 百濟 영토다. 大興安嶺山脈 이남이 高句麗 영토라면, 고작 한반도 혹은 한반도 남부에 있는 百濟를 구축하지 못할 리 없다. 百濟가 한반도에 영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大興安嶺山脈 이남이 百濟 영토였기 때문이다.

百濟는 高句麗에서 분리된 나라다. 高鄒牟는 北夫餘 檀君 고무서(高無胥)의 사위로 高句麗는 배달, 朝鮮에서 大夫餘, 北夫餘로 이어지는 동아시아의 天子國으로 부터 영토를 물려받은 나라이다. 유리명제(琉璃明帝) 때 이복동생 溫祚와 비류(沸流)가 高句麗 땅을 떼어갔기 때문에 高鄒牟가 건설한 대제국은 다음 代에 大帝國의 지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옛 땅을 회복하자고 했다(多勿). 중국 대륙에 있는 朝鮮의 옛 영토는 百濟, 新羅, 樂浪, 東夫餘, 伽倻로 분할되어 있었다. 중국 대륙에는 중국과 倭도 있었다. 동북아는 高句麗에서 분리된 百濟가 있을 뿐이다. 高句麗의 정복대상국은 모두 중국 대륙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海城은 百濟 영토였다. 따라서 천혜의 해군기지라는 海城 위쪽에 두 번째 平壤城이 있었다는 주장이나 이세적(李世勣)이 海城을 공격했다는 주장은 성립할 여지가 없다. 唐이 굳이 百濟 땅 현 海城으로 가려고 해도 渤海灣은 百濟 땅이니까, 발해만을 건널 수 없다. 628년��에서 709년까지의 日本 일식기록으로도 알 수 있듯이 중국 남부는 新羅 땅이다. “新羅가 高句麗의 위협을 받아, 국가 존망의 위협에 처한 탓으로 唐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날조 했으니까, 黃海로 항해해야 하지만, 내륙국가 唐의 항해술로는 어림도 없다.

장군총 : 3세기 초부터 427년�� 까지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장군총은 당시에 이곳을 지배했던 국가가 百濟로 보는 『天文記錄으로 찾은 韓國史』에서는 당연히 百濟의 유물로 본다. 이 주변에는 사신총(四神塚) 등 石陵과 토분(土墳) 1 만 기(基)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完存)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지금의 중국이 高句麗를 자국의 국가로 인식하는 이면에는 東北三省에 대한 영토주권을 주장하는 의미도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식민사관에 물들은 현 사학계가 桓檀史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桓檀의 역사가 北夫餘를 통해 高句麗로 연결되었다는 이 史實이 부정되는 데에 중국의 동북공정은 그 의미가 빛을 발하게 되며 나약하고 천박한 강단사학자들에 의해 우리의 高句麗史가 中奴들의 역사로 편입되게 된다. 이를 사학자들에게 맡겨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취지가 이 글 곳곳에 녹아 있음을 찾기를 바랍니다.

史記는 蓋馬大山에 平壤城이 있다고 했다. 後漢書에는 高句麗의 平壤城이 蓋馬大山 서쪽에 있다(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고 했다. 韓半島는 百濟 영토니까, 蓋馬高原은 蓋馬大山이 될 수 없다. 大興安嶺山脈이 蓋馬大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 역시 정복 대상지에서 너무 떨어져 있다. 산맥에 첩첩이 둘러싸여 어떻게 정복활동을 한단 말인가.

西鴨綠江은 중국 대륙에 있었다. 三國의 접경지역인 중국 대륙 동부에는 西鴨綠江이 없었다. 그래서 新羅는 한 번도 西鴨綠江을 차지해 보지 못했다. 平壤城이 최적 일식관측지 중 큰 지역인 天山山脈에 있고, 그 일대에 西鴨綠江과 浿水가 있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高句麗가 중국 동부를 놔두고 사막지역만 정복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또 天山山脈은 百濟, 新羅와 너무 떨어져 있다. 遼西(西鴨綠江 이서)는 百濟 땅인데, 高句麗의 都邑이 天山山脈에 있으면, 百濟는 수백 년��이나 遼西를 지배할 수 없다. 三國이 중국에서는 화목하고, 韓半島에서만 치열한 전투를 전개해 왔다고 볼 수도 없다. 新羅도, 百濟도 중국 동부와 발해만에 있었는데, 과연 高句麗가 중국 동부를 피해갔을 것인가. 이 지역에 일식기록이 없다고 하나, 朱元璋이 다 삭제해 버렸기 때문이다.

中國 지도는 역사 왜곡용으로 우리나라 지도를 뜯어고친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설령 중국 역사책에 史實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도 중국 지도를 참고하면 거짓이 되고 만다. 중국 古地圖를 믿을 수 없는 탓에 나머지 지명을 찾는 것도 三國史記의 일식기록에 의존하기로 한다.

平壤城은 高句麗의 일식관측지 바깥에도 존재할 수 있다. 高句麗의 일식기록은 극히 일부밖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百濟와 新羅도 마찬 가지다. 단적인 예로 한반도 북위 38.4°에서 기원전 65년��경에 천문관측해 작성한 天文圖가 기토라 고분에 남아 있음에도 이 지역의 일식기록 조차 누락됐다. 무엇보다 高句麗가 長城 이남에 영토를

기토라고분의 백호도 : 7세기 후반의 것으로 알려진 나라(奈良)縣 아스카(明日香)村 기토라(キトラ) 고분벽화중의 백호도(白虎圖)

가져야 三國戰爭이 가능하다. 平壤城도, 西鴨綠江도, 浿水도 모두 長城 이남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黃土高原에 平壤城이 있었을까. 黃土高原 바로 위쪽에 高句麗 長城이 지나간다. 그러나 하고 많은 땅을 다 놔두고 427년��에 黃土高原으로 遷都해서 7세기 초까지 百濟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시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太行山脈 이서는 도읍으로 정할 지형도 아니지만, 결정적으로 山西省 대부분이 長城 위치로 본 百濟 영토다. 百濟長城은 386년��부터 쌓았고, 長壽弘濟好太烈帝가 平壤城으로 遷都한 것은 427년��이다. 百濟가 長城을 쌓자마자 빼앗겼다면, 高句麗가 2 백년 뒤에 長城을 쌓았을 리 없다. 게다가 百濟는 중국 대륙 동해안을 멸망 당시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揚子江 유역의 黃山벌에서 계백(堦伯)이 新羅와 사실상의 결전을 벌였으니까. 隋, 唐이 高句麗를 수군공격하기 위해서는 新羅만이 아니라 百濟의 허락까지 구걸해야 한다.

五臺山脈이 국경이면서 蓋馬大山일까. 국경에 도읍을 둔다? 高成帝는 皇城을 보호하기 위해 長城까지 쌓았다. 黃河가 많은 지류들과 합치면서 방향을 전환하기 전까지가 漢水이고 그 위쪽은 遼水라기엔 高句麗 땅이 너무 협소하다. 百濟가 遼西를 지배했을 때 高句麗는 정복되고 말았을 것이다. 더구나 “平壤城 남쪽을 흐르는 浿水가 없다.(舊唐書와 新唐書) 黃河가 다시 돌아 내려오는 강이 遼水라면, 中土는 蒙古高原에 있어

야 한다.

秦嶺山脈이 蓋馬大山인가. 秦嶺山脈 서쪽에 平壤城 남쪽을 흐르는 浿水가 될 만한 것은 가릉강(嘉陵江)이다. 中土가 揚子江 상류 이남 이라면, 嘉陵江을 따라 수군공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西鴨綠江이 될 만한 강이 없다. 中土가 揚子江 상류 이남 이라면, 新羅는 건국 하자마자 朝貢해야지, 280년��까지 미적거리고 있을 수가 없다. 新羅가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揚子江 이남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 新羅와 중국 간에 전쟁이 수시로 일어나야 하는데, 날조사이긴 해도 그런 일은 없었다. 史記나 舊唐書와 新唐書의 기사를 사실로 받아 들이고서는 중국 대륙 어디에도 平壤城이 위치할 장소가 없다. 하기야 史記와 唐書는 浿水 위치도 서로 틀리는 엉터리 기록이긴 하다.

확실한 것부터 찾아보자. 일식기록으로 보면, 北京 주변에서 渤海灣에 이르는 長城은 百濟가 쌓았다. 高句麗의 공격으로 부터 도읍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지금은 長城이 많이 허물어 졌지만, 그 옛날에는 五臺山脈과 나란히 달리고 있었을 것이다(전투시 한 방향에서 공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니 한 방향만 차단해도 나머지 예상공격로에 방어전력을 집중할 수가 있다). 五臺山脈 以西가 高句麗가 쌓은 長城이다. 高麗가 연장한 부분도 있지만, 어쨌거나 오르도스 이남에 長城을 축조한 이유도 수도방위를 위해서다. 長城을 축조한 나라는 넷이나 되지만, 하나같이 수도방위를 목적으로 했다. 고성제(高成帝 : 榮留, ?~641) 때 高句麗 長城을 축조했고, 이 당시 高句麗 도읍은 平壤城이었다. 요컨대 平壤城은 현 黃河가 굽이치는 부분 아래쪽에 위치한다.

高句麗 일식기록이 天山山脈 일대와 黑龍江 상류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 낀 蒙古高原과 오르도스(鄂爾多斯)도 당연히 高句麗 땅이다. 中土가 위치할 곳은 長城 以南밖에 없고, 中土에서 高句麗를 침공할 때마다 건너야 했던 西鴨綠江 역시 長城 以南에 있었다.

江東 6州에서 보듯, 西鴨綠江은 南北으로 흐르는 강이다. 長城 以南에서 그런 江은 티벳고원 南部에 몰려 있다. 西鴨綠江 너머로도 2 천리 이상 있어야(周書, 北史에 高句麗의 영토는 遼水를 건너 2 천리라고 했다.) 하므로 탕구라(唐古拉)산맥 가까이 있는 누장강(怒江), 난창강(瀾滄江), 진사강(金沙江)은 西鴨綠江이 될 수 없다. 민장강(岷江)도 이세민(李世民)이 건넜다는 遼澤이 있을 지형이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가릉강(嘉陵江) 뿐이다. 嘉陵江이 西鴨綠江 이었던 것이다.

嘉陵江이 강줄기가 굽은 하(河)에 해당 하는가. 遼河는 계속해서 밀려난 지명이다. 어느 한 지점에서 굽은 강을 가리켰다면, 遼河라 불리게 된다. 岷江도 한때는 遼河였고, 상건하(桑乾河)도, 난하(灤河)도 잠시나마 遼河였다. 河를 붙이고 안붙이고는 지명 만드는 사람 마음대로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朱元璋과 淸이 江의 지명을 河로 바꾸긴 했지만 그 이전의 河는 黃河라는 고유명사임을 인식해야 한다.

舊唐書와 新唐書에는 “平壤城 남쪽에 패수(浿水)가 있다(高麗 … 其君居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去京師五千里而贏隨山屈繚為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 新唐書)”고 했다. 長安이 平壤城이고, 그 아래를 흐르는 漢水가 바로 浿水다. 平壤城은 산맥의 서쪽이 아니라, 북쪽에 있었다. 진령산맥(秦嶺山脈) 북쪽에 있었던 것이다. 秦嶺山脈이 개마대령(蓋馬大嶺)이다(漢水는 漢나라의 江이라고 남겨둔 것이다. 中國은 역사날조를 위해 온갖 것에 중국의 왕조라고 우기는 나라이름을 붙여 놓았다. 秦嶺산맥도 秦나라의 산맥이라고 붙인 것이다).

유리명제(琉璃明帝 ?~18)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鴨綠江 以北까지 차지하고, 동천제(東川帝 209~248)에 이르러서 浿水 以北까지 차지했다고? 浿水 以北도, 西鴨綠江(上流)도 高句麗 建國 當時부터 차지하고 있었다. 날조사(捺造史)에서는 고구려가 韓半島 以北에 있었으니까, 南下하면서 鴨綠江과 浿水를 차례로 차지해야 했던 것이다. 너무 큰 지도 말고 동아시아가 나와 있는 지도를 펴보자.

티벳고원에서 장안성(長安城)으로 가기 위해서는 西鴨綠江(嘉陵江)을 반드시 건너야 한다. 西鴨綠江이 黃山江(揚子江)과 漢水(黃河) 사이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늪지(遼澤)도 널려 있을 지형이다.

長安城은 552년��에 쌓기 시작해 586년��에 완공된 성이다. 國內城과 安鶴宮城은 통치 계급의 주거 지역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쌓았으므로 일반 주민들은 城 밖에서 살았다. 그러나 後期의 都城인 長安城은 도시 주민들이 모두 城 안에서 살게 되면서 크게 쌓은 성이다. 長安城은 北城, 內城, 中城, 外城등 4 개의 성으로 구성 되었으며, 그 둘레는 23 km, 성 안 총면적은 1186 만 ㎡에 이르는 큰 城이다.

隋, 唐이 차지한 땅은 지도에서 가장 검붉게 나오는 부분이다. 티벳고원에 있어야만 高句麗 침공을 위해 嘉陵江을 건너지 않을 수 없다. 매번 패하면서도 똑같은 전술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765년��의 일식 : 35世�� 檀君 사벌(沙伐) 8년�� 4월�� B.C.765 … 컴퓨터로 재현한 시물레이션에 의하면 B.C.764년�� 6월�� 실행. 1년�� 뒤에 실행되었네요. (음력 4월��이 6월�� 정도에 해당하겠죠) 그런데, 위치가 약간 … 북쪽에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관측이 불가능 하여서 (물론 중국도 관측이 불가능하죠) 이상한데, 그 경로가 실크로드를 가로지르기 때문에 관측의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여겨집니다. 중국과는 상관없는 일식입니다.

티벳고원조차 온전히 中土가 아니다. 周書, 北史는 高句麗의 영토가 “西로는 遼水를 건너 2천리“라고 했다. 梁書도 “晉나라(265~316) 때, 고구려는 遼東에 있었고, 百濟는 遼西에 있었다.”고 했다. 遼西는 嘉陵江 以西다. 티벳고원 南部도 우리나라 땅이었던 것이다.

北夫餘 시대에도 遼東, 遼西는 漢나라의 땅이 아니었다. 衛滿朝鮮은 우리나라도 아니었지만, 漢나라도 아니었다. 衛滿朝鮮이나 漢나라나 모두 우리나라 제후국(諸候國)이다. 漢, 朝鮮 전쟁 이후 衛滿朝鮮이 사라진 遼西(1차 西鴨綠江인 岷江 以西)에는 樂浪·玄兎·眞番郡·臨屯이라는 우리나라 諸侯國이 생겼다. 樂浪은 이전부터 있었다. 요컨대 漢나라는 절대 遼東, 遼西에서 日蝕觀測을 할 수 없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주변부는 34.3°에서 관측한 1세기의 하늘인데, 1세기에 高句麗의 首都는 國內城이었다. 長安은 수도가 아니었을 때도 天文觀測해온 장소였던 것이다. 長安은 처음으로 監星을 둔 곳이고, 卒本夫餘를 北夫餘에 포함 시키면, 長安을 차지한 모든 王朝가 그 땅에서 한 번 이상 都邑했다. 그렇다면 長安에 도읍하지 않을 때에도 언제나 그곳에서 천문관측 했을까.

기원전 765년�� 및 기원전 525년��, 기원전 248년�� 日蝕(食)은 黃河 下流의 白岳山 阿斯達(은허)에서 관측했을 가능성이 높다. 白岳山 阿斯達은 색불루(索弗婁)가 22世�� 檀君으로 즉위한 기원전 1285년��부터 44세 檀君 구물(丘勿)이 다시 藏唐京(高句麗 平壤城이며 長安이다)으로 遷都한 기원전 425년�� 이전까지, 860년��이나 朝鮮의 都邑이었다. 이 경우, 500 km 남짓 떨어진 長安에서도 천문관측 했겠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前漢의 日蝕記錄에서 찾을 수 있다. 中土의 長安이 首都인 前漢이 존속할 당시(B.C. 202~ A.D. 8)는 北夫餘 시대로 白岳山 阿斯達에 도읍하고 있었다. 이 당시 長安(藏唐京)에서 일식관측했다면(前漢이 베낀 일식기록에 현 西安에서 관측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면), 長安은 기원전 1916년�� 이래로 高麗 末까지 천문관측해온 지점이 거의 확실하다.

“水軍 艦船을 이끌고 수백 리(거리도 다 축소됐다. 한반도에 맞춰야 하니까)에 이르도록 바다에 떠서 먼저 浿水로 들어가 平壤과 60 리 거리에서 우리 군사와 마주한 뒤(左翊衛大將軍來護兒帥江淮水軍舳艪數百里 浮海先進 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與我軍相遇 進擊大破之)”라는 三國史記 기사에서 바다는 진짜 바다가 아니다. 高麗는 長安城을 首都로 한 나라이므로 金富軾은 절대 敵이 진짜 바다를 통해 高句麗를 공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옛날에는 너른 평지도 바다로 표현했다고 하지만, 水軍이 陸地를 航海할 수 있는가.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에 “庚寅年에 장정 30 인을 파견하여 선박을 살수(薩水)에서 건조케 하였다. 곧 辰韓의 남해안이다(庚寅遣民丁三十人造船舶于薩水乃辰韓南海岸也)”고 했다. 薩水가 辰韓의 南海岸 즉 江이 바다라는 것이다.

역시 三韓管境本紀를 보면 “기비(箕丕)가세상을 뜨니 庚辰年에 아들 기준(箕準)이 섰다. 丁未年(B.C. 146)에 떠도는 도적 衛滿에게 유인당해 敗하여 바다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箕丕薨庚辰子箕準立丁未爲流賊衛滿所誘敗遂入海而不還).”고 했다. 北夫餘紀 에서도 箕準이 바다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나 番朝鮮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지역 이었다. 箕準이 들어간 바다는 江이었던 것이다. 水經注에는 浿水가 동쪽으로 바다에 흘러드는 물이라고 했다(出樂浪郡鏤方縣 東方過出於臨浿縣 東入干海 : 浿水는 樂浪郡 鏤方縣에서 흘러나와 동쪽으로 臨浿縣을 지나서 동쪽으로 바다에 흘러든다). 浿水 즉 현재의 漢水는 揚子江으로 흘러든다.

黃氏 始祖는 後漢의 儒臣 이었던 황락(黃洛)으로 28년��, 교지국(交趾國 : 현재 베트남 북부)에 使臣으로 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 표류 하다가 新羅 평해(平海)까지 왔다고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에 나와 있다. 中土에서 東南亞로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揚子江의 물길을 따라 新羅로 들어가 상장강(湘江), 류장강(柳江), 우(욱)장강(郁江)을 거쳐야 했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에는 陸路보다 水路를 더 선호했다. 平海는 揚子江邊에 있었고, 風浪은 揚子江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風浪에 가깝다고 해봐야 비(雨)로 江의 물살이 거세졌을 경우다. 그러니까 風浪은 李氏朝鮮이 捺造한 말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나라가 中國 大陸을 지배했던 高麗 末까지는 웬만한 江 역시 바다로 불렀음을 말해준다. 中國 大陸이 크다 보니까, 江을 바다로 表記한 것이다. 아직도 江을 바다로 불렀던 흔적이 남아 있다.

티벳고원(靑藏高原) 동북부에 있는 바얀카르(巴顔喀拉) 山脈 북쪽 기슭의 下原을 성숙해(星宿海)라 부른다. 별이 잠드는 바다를 그대로 남겨둔 것은 시적인 표현이라 우길 心算 이었겠지만1), 過去에는 거의 江이나 湖水 등을 바다라 불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사해동포(四海同胞)라는 말에서의 海도 물론 바다를 의미하지 않는다. 통일신라시대의 靑海鎭에서 海역시 바다를 의미하지 않는다. 靑海省에 있는 靑海鎭을 반도 땅 莞島에서 찾으려는 半島史觀은 경계해야 될 사관이다.

浿水(漢水)는 黃山江(揚子江)의 支流이다. 그런데 浿水가 끝나는 武漢은 新羅 영토다. 일식기록으로 찾은 新羅의 金城은 武漢이다. 南京이 金城이 될 수 없는 것은 新羅 初期 日蝕(201년 이전)이 武漢에서 관측한 것이기 때문이다. 小國에서 출발한 新羅의 영토가 建國 當時부터 南京에서 武漢에 이르렀다고 볼 수는 없다. 더구나 黃山江 下流에는 新羅의 母胎가 되는 3 차 辰韓뿐만 아니라, 伽倻가 건국하는 3 차 弁韓도 있었다.

비사성(卑沙城, 卑奢城, 畢奢城, 卑斯城 등으로 불렸다)은 浿水(漢水) 유역에서 新羅의 영토 너머 高句麗 영토 내에 있었던 것이다. 浿水는 上流로 부터 高句麗, 百濟, 新羅 영토 順으로 분할되어 있었는데, 6세기 초에 百濟 영토를 高句麗가 획득했다. 그러므로 卑沙城은 오늘날의 양반(襄礬 : 샹판)이나 십언(十堰 : 스옌)이다. 이렇게 보면, 隋나 唐의 水軍이 浿水를 거슬러 올라가고 卑沙城을 공격하는 것은 新羅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곤란하다. 新羅가 隋, 唐을 끌어들여 高句麗와의 전쟁을 획책한 것이다.

隋, 唐은 新羅의 屬國이었던 것이다. 元史에는 唐이 新羅를 다스렸다고 나온다. 그러나 廣開土境大勳蹟碑2) 및 中原高句麗碑, 太白逸史3)를 보면, 中國 大陸의 新羅는 唐이 아니라, 高句麗의 지배를 받았다.

揚子江 상류나 차지하고 있던 隋, 唐에 水軍이 있었다는 얘기를 믿을 수 있는가. 설령 있었다 해도 이들의 수군 전투력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중국은 春秋戰國 시대부터 광적으로 運河를 파왔다고 했다. 楊廣(隋 煬王 : 569~618)도 운하를 팠다. 기록에는 大運河(?)라고 한다. 그런데 운하를 보면 중국 東部에 몰려 있다. 우리나라가 판 運河를 중국이 팠다고 날조했던 것이다.

隋, 唐의 水軍이 黃山江(揚子江)을 따라 新羅 영토로 들어가서 浿水를 거슬러 올라갔던가. 隋, 唐은 내륙 국가다. 창원황씨(昌原黃氏) 시조 황락(黃洛)도 고작 揚子江에서 조난을 당해 표착했을 정도이다. 그런 형편없는 隋, 唐의 수군에게 高句麗를 공략케 하는 것은 전투도 하기 전에 지겠다는 소리다. 長安城을 공격한 水軍은 新羅軍이었던 것이다. 唐나라라니 무슨 말인가? 唐나라 군대(唐軍)라는 말은 군기도 엉망인 백전백패를 뜻하는 고사성어이다. 요즘은 당근이라고 하는가??

武漢은 高句麗의 平壤城에 대한 수군 공격시 출발지점에 위치한다. 新羅의 국력이 약할 때는 상관없으나, 新羅가 차츰 강성해 지면서 국가 안보상 高句麗는 武漢을 반드시 차지해야 했다. 옛날에는 皇城이 무너지면 나라 자체가 멸망했다. 실제로 高句麗가 新羅人들을 이주 시켰다는 사실이 太白逸史에도 나온다.

AD 201년 신라 내해이사금 6년 3월의 일식

江南에는월��주(越州)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山陰) 산월(山越) 좌월(左越)이 있었다. 문자제(文咨帝)의 명치(明治)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越州)를 쳐서 빼앗고, 군현의 이름을 고치니 송강(松江)과 회계(會稽)와 오성(吳城)과 좌월(左越) 산월(山越) 천주(泉州)인데,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겨 알맹이로 삼았다 (江南有越州其屬縣一曰山陰二曰山越三曰左越至文咨帝明治十一年十一月攻取越州改署郡縣曰松江會稽吳城左越山越泉州十二年移新羅民於泉州以實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江南은 黃山江 이남이다. 黃山江(揚子江)이 新羅의 수도 金城(武漢)을 통과한다. 高句麗가 江南의 新羅 땅까지 취했다면 新羅는 수도 역시 옮겨야만 한다. 武漢 등을 취한 이유는 高句麗 영토를 한 뼘이라도 더 넓히겠다는 생각에서라기보다는, 新羅의 金城이 高句麗의 平壤城에 대한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新羅의 백성을 泉州로 옮기고 알맹이로 삼았다는 것은 新羅 수도로 삼았다는 의미다. 首都가 아니라면 그냥 그 땅과 주민을 차지하면 그뿐이다. 또한 언제나 그래왔고. 새삼스레 주민을 이주시킨 것은 首都民이기 때문이다.

渭水는 그 옛날의 하수(河水)다. 渭水도 약간 굽은 강이다. 河라 부르고 말고는 부르는 사람에 달렸다고 전술했다. 三國史記에는 高句麗가 멸망하기 직전, “가을 7월��에 平壤의 河水가 3 일 동안이나 핏빛이었다.(十九年 秋七月 平壤河水血色凡三日)”고 기록되어 있다.

왜 그런가? 平壤城(長安城)이 河水(渭水) 바로 남쪽에 있어 치열한 전투로 죽은 장병들의 시체가 강물을 붉게 물들였던 것이다.

백년하청(百年河淸)에서 河는 黃河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유명사로 쓰였다. 河南 慰禮城은 굽이쳐 흐르는 강 아래쪽에 쌓은 城이라는 뜻이다. 百濟의 초기 도성 河南 慰禮城의 위치는 漢水(黃河) 이남이다. 河南이라는 말까지 붙은 것을 보면, 黃河에 바짝 붙어 있다. 현 開封이 河南 慰禮城이다. 사비성(泗沘城)은 北京이다.

동아시아 현대지도

티벳은 티벳고원에 없었다. 747년4) 토번(吐蕃 : 티벳)과 사라센(Saracen)이 동맹을 맺고 동진(東進)하자, 高仙芝가 1 만의 군사로 파미르고원을 넘어 사라센과 동맹을 맺은 72 개국의 항복을 받고 사라센의 東進을 저지한 것으로 보아, 티벳은 중앙아시아에 있었다. 티벳고원에 있었다면 동진하기 위해서는 唐부터 치거나 唐의 영토를 가로질러야 한다. 또한 티벳도 漢나라처럼 흉노(匈奴)한테 시달렸어야만 했다.

채달목분지 : 한자로는 柴達木盆地라고 쓰는데 차이다무 분지(Tsaidam Basin)로 발음된다.

티벳이 티벳고원에 없었음에도 티벳고원이라 붙인 이유는 원래부터 티벳이 거기에 있었다고 우기기 위해서다. 그래야만 中國이 그 땅에 없었다는 증거도 함께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蒙古高原에는 蒙古가 없었다. 하지만 中國이 黃河 이남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우기기 위해서는 匈奴를 비롯한 蒙古가 蒙古高原 일대에 있어야 했다.

高句麗의 일식관측지가 蒙古高原 以西 및 以東이고, 710년��에서 792년까지의 日本 역사책의 일식관측지가 蒙古高原 이북 이라는 것은 蒙古高原도 우리나라 땅이라는 의미다. 黑龍江 상류에는 수초를 찾아 떠도는 生女眞이 있었다. 蒙古高原 없이는 生女眞을 전력화하지 않고 방치 하고서 시베리아를 유지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중국은 蒙古高原에 원래부터 蒙古가 있다고 하면서, 13세기에 들어 와서야 징기스칸이 蒙古高原을 통일했다고 했다. 蒙古高原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에서 蒙古部族을 통일한 것이다.

蒙古가 중국 대륙에 내내 있었다면, 이런 추측 기사는 절대 있을 수 없다. 4世�� 檀君 오사구(烏斯丘) 때의 기록 “甲申 원년(B.C. 2137) 천황의 동생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했다. 혹 말하기를 지금의 蒙古族이 바로 그의 후손 이라고 한다(甲申元年封皇弟烏斯達爲蒙古里汗或曰今蒙古族爲其後云 檀君世紀)." 檀君世紀 原本은 高麗 시대에 편찬했다. 그 당시 까지는 우리나라 역사책이 전부 존재했다.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역사만 기록한 것이 아니고, 중국 대륙의 수많은 나라와 종족에 대해서도 역사기록 하기를 잊지 않았다. 蒙古가 중앙아시아로 빠졌다가 다시 중국 대륙으로 진출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역사기록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고, 한때 九韓(桓)의 일원 이었는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과거 러시아(Russia)에게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었고, 잉글랜드(England)에게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지름길 이었던 캐시미르(Kashmir).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中土를 정복한 異民族도 Kashmir로 해서 침입했다는 사실이다. England만 中土로 침입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아니다. 靺鞨, 거란(契丹), 蒙汗이 England에 앞서 Kashmir를 통해 中土로 침입했던 것이다.

匈奴와 蒙古 등은 朝鮮 개국 당시에도 우리나라 영토인 타림분지 일대에서 흩어져 살았다. 北匈奴가 중앙아시아로 밀려난 것처럼, 蒙古도 중앙아시아로 방출됐다. 蒙古가 蒙古高原에 처음부터 지금까지 있었다고 날조했기 때문에 중앙 아시아로 이주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蒙古는 예전에 살았던 타림분지를 채달목분지(柴達木盆地)와 같이 얻었다. 타림분지(塔里木盆地,Tarim Basin)의 가치에 눈을 뜬 高句麗가 匈奴 등을 정복한 후 우리나라는 그 땅을 통해 이민족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수비했기 때문에 이후에 진출한 이민족은 Kashmir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蒙古族은 1270년�� 이전에는 蒙古高原에서 살지 않았다. 1356년��이 아니라, 1368년��에 雙城總管府가 격파되고 쫓겨난 蒙古族은 공민제(恭愍帝)의 허락 하에 蒙古高原에 

눌러앉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蒙古族은 蒙古草原과 카스피 해(Caspian Sea) 사이에서 유목활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카스피 해와 타림분지 (중가리아盆地) 사이에 있었다.

北아메리카 인디언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그들의 본래 고향이 시베리아 바이칼호 근처로 밝혀져, 인디언이 蒙古族의 한 분파라는 학설을 뒷받침한다? 蒙古族이 아니라, 우리민족이 바이칼 호 일대에 살았다. 기원전 7197년��에 개천한 한국(桓國)의 영토였고, 8세기에는 大震國의 천문관측지다.

蒙古族이 蒙古高原을 차지한 1270년�� 이후에도 그곳에 살던 우리민족은 계속 거주해왔다. 현재 蒙古高原에 사는 사람은 두 종족인 것이다. 우리민족은 여러 족속들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여러 종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1270년��부터 蒙古高原에 살기 시작한 사람들은 원래 蒙古高原 以西에서 살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몽골문자는 없다. 蒙古가 사용하고 있는 문자는 蒙古가 만들지 않았다. 우리민족이 만들었다. 蒙古族의 머리에서는 오직 초절정의 난잡한 性文化만을 개발한 華夏와 마찬가지로 그 어떤 창작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몽골이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이라고? 몽골의 자유화 전까지 몽고(蒙古)라고 불렸던 것은 ‘中華’와 상충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해 비하해 사용한 이름 이라면, 우리나라가 東아시아를 지배한 高麗時代까지는 몽골이라 불렀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蒙古族이 檀君이 다스리는 64 族의 하나였던 朝鮮時代에도 蒙古라는 이름을 썼다. 高麗時代도 蒙古라고 불렀다. 머언 고을 이라는 의미를 갖는 말이다.

23世�� 檀君 아홀(阿忽)때의 기록을 보면 “乙酉 2년��(B.C.1236) 남국(藍國)의 임금 금달(今達)이 청구(靑邱)의 임금, 구려(句麗)의 임금과 주개(周愷)에서 회합하고 몽고리('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殷)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했다(乙酉二年藍國君今達與靑邱君句麗軍會于周愷合蒙古里之兵所到破殷城柵深入奧地定淮岱之地 檀君世紀).” “甲申 원년(B.C .2137) 천황의 동생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였다(甲申元年封皇弟烏斯達爲蒙古里汗 檀君世紀)." 이 뒤에 따라오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혹은 지금의 ‘蒙古’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或曰今蒙古族爲其後云 檀君世紀)."

蒙古族은 烏斯達이 지배하던 蒙古里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檀君世紀는 高麗 末에 썼다. 高麗가 몽골이라고 불렀다면, “어떤 사람(或者)은 지금의 ‘몽골’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라고 썼을 것이다. 몽골은 蒙古의 자유화전 이후에 생긴 이름인 것이다. 蒙古가세계의 중심과 하등 관련이 없음은 蒙古의 옛 이름 몽고‘리’(蒙古‘里’)에서도 알 수 있다. 里는 ‘마을, 거리단위, 헤아리다, 근심하다, 거하다, 이미, 벌써’라는 별 시덥잖은 뜻만 있다. 蒙古 역시 별 볼 일 없는 뜻밖에 없다.

蒙古는 그저 그런 우리나라 피지배종족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북방계 아시아인을 총칭하여 蒙古族이라 부르는 것조차 부적절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蒙古는 북방계 아시아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몽고반점(蒙古斑點)은 ‘蒙古’斑點이 아니다. 北方系 아시아인 전부에게 나타나는 것이니까. 蒙古 여자가 高麗 皇帝에게 시집왔을 때조차도 蒙古가 아니라 高麗가세계의 중심이었다.

어째서 티벳은 원래부터 티벳고원에 있었다고 하고, 蒙古는 蒙古高原에 있었다고 하는가. 中國과 역사날조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합의한 이유는? 이미 중앙 아시아의 거주지도 상실 했는데, 날조사에 따르면, 티벳고원과 蒙古高原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강역(疆域)은 시베리아를 포함한 東아시아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를 베낀 中奴는 어째서 中土를 중국 대륙과 동북아로 한정 했을까. 李成桂가 朱元璋 등과 우리나라를 나눠가질 그 당시에는 시베리아가 우리나라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베리아까지 다 中土라고 우긴다면, 大帝國의 허상이 깨진 러시아가 中華思想의 허구성을 반박했을 것이다.

티벳, 蒙古, 러시아, 동남아, 중앙아시아1)가 中奴의 중국 대륙 지배라는 날조史에 동조하는 것은 자국에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티벳’고원과 ‘蒙古’高原을 만들어내고 지명을 밀어내 역사를 날조하자, 中國이 옛날부터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해 왔다고 받아들여진 것이다. 三國의 일식기록과 桓檀古記가 없었다면, 완벽한 역사날조가 될 뻔했다. 티벳은 明이 揚子江 이남을 차지한 다음 티벳고원으로 들어오고, 蒙古는 1270년��이 되어서야 蒙古高原을 차지했을 뿐이다.

티벳이 20세기 까지 현대문명이 전혀 들어오지 못한 척박한 나라라고? 옛날에는 문명이 있었던 줄 아는가. 지금도 그 땅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곳에 무슨 文明이 있었겠는가. 隋, 唐과 宋이 있던 그 시절이라고 달랐을 것인가. 우리나라가 遣韓使(遣漢使)를 받아주고, 저 오지의 땅 中土로 가서 우리나라 文化를 전수해 주었건만, 中奴는 宋나라 때 까지도 "신자(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고 있었다(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 三國志)." 그러니 揚子江 이남을 차지한 明 때 中奴의 서민 생활이 향상될 수밖에.

아무도 그 땅에 文明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처음부터 그 땅은 제쳐두고 中國의 영토를 논하는 것이다. 이는 中國史가 우리나라 역사를 베낀 날조요, 미개사라는 것을 말해준다. 中國이 인심 써서 종이 위에서나마 그 땅을 전부 티벳에게 준 까닭도 극한의 미개 땅이기 때문이다. 中國이 티벳고원 북부를 차지하고는 중국 대륙을 지배한 文明國이라고 우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高仙芝가 정복한 중앙아시아에 72 개 국이나 있었던 것으로 보아, 티벳은 티벳고원만한 땅조차 차지하지 못했다. 티벳(西土)은 中奴가 揚子江 이남으로 나오기 전까지 그들의 삶의 공간이었다.

 三國時代에 들어오면, 高句麗와 百濟가 번갈아 嘉陵江 이서를 차지한다. 樂浪 등이 있었던 그 땅은 高句麗의 영토가 되었다가 다시 百濟의 영토가 되었다. 百濟가 朝貢을 하지 않는 것을 기화로 高句麗가 遼西와 晉平 2郡을 빼앗고, 高句麗 멸망 이후에는 잠시 新羅가 차지했다가, 大震國이 건국했기 때문에, 遼汗 이전까지 中土는 현재 西藏族 自治區 보다 작았다.

그 옛날에 있던 지명은 전부 티벳고원 밖으로 밀어냈다. 티벳고원 남부의 지명을 남기면, 원 中土가 어디에 있었는지가 공개되고, 지명 밀어내기를 자인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티벳고원 전체의 지명을 밀어냈던 것이다. 티벳고원 내부의 지명을 밀어낸 만큼 우리나라 지명은 없애 버려야 했다. 中國이 정말로 천문관측 했다면, 티벳고원 북부가 최적 일식관측지로 나와야 한다.

“密記에 말하기를 복희(伏羲)는 神市에서 나와 우사(雨師)의 직책을 세습(世襲) 하였고 뒤에 靑邱와 樂浪을 거쳐 드디어 진(陳)으로 옮겨 수인(燧人), 유소(有巢)와 함께 서토(西土)에 호(號)를 세웠다.”(密記曰伏羲出自神市世襲雨師之職後經靑邱樂浪遂徙于陳並與燧人有巢立號於西土也 太白逸史 神市本紀) 伏羲가 이름을 빛낸 中土의 실체는 티벳고원이다. 티벳고원은 독립국이 아니라, 우리나라 영토였다. 그래서 封土로 받았다고 한 것이다.

설문(說文)에는 우리나라가 커서 사람까지도 커 보였다고 했다.

대개 땅에 있는 사람들이 자못 순리의 성품이 있다 하나, 오직 동이(東夷)는 큰 것을 따르니 대인(大人)이다. 이(夷)의 풍속이 인자하니, 인자한 자는 오래 살므로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이다. 그곳은 하늘도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크니, 크다는 것도 사람의 형상을 본 뜬 것이다(夷 東方之人也唯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故孔子曰 道不行 吾欲之君子不死之國 說文解字).

곳은 하늘도 크고 땅도 크다. 中國과 비교해서 우리나라 땅이 컸다는 말이다. 中國 대륙은 동북아시아에 비해 몇 배나 크다. 그런데도 說文은 大人國, 君子國의 땅이 크다고 했다. 중국이 티벳고원 북부에 갇혀 있었음을 알려준다.

“사람 또한 크다” 함은 사람의 마음이 넓다는 뜻이다. 順理를 따르고 인자한 君子 즉 성품이 너그러운 사람이라는 말이다.

위조된 낙랑봉니(樂浪封泥)들 : 해방 후 낙랑토성과 운성리토성, 소라리토성, 청해토성을 발굴 하였지만 단 한 개의 봉니도 나온 경우가 없었다. 원래 봉니의 특성으로 잘 남을 수 없는데 낙랑토성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 당시의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해방 전에 봉니를 위조하던 자들의 고백에 의하면 일제 골동상들과 봉니 위조자들이 많은 봉니를 위조해서 팔았다고 한다. 이제는 그 누구도 낙랑봉니를 인정하지 않는다.

三國史記에 百濟가 浿水와 帶水를 건너 漢水 유역에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百濟는 高句麗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다. 浿水는 전술한 것처럼 漢水고 帶水는 淮水다.

北夫餘가 黃河 하류와 渤海灣을 제외한 그 위쪽을 차지했을까. 다시 말해 黃河 하류와 渤海灣 지역이 北夫餘에서 독립 했던가. 黃河 하류와 渤海灣은 神市氏가 개천한 神市가 있던 동북아로 가는 길목이다. 그래서 朝鮮時代에도 辰韓(眞韓) 땅이다. 黃河 하류에는 白岳山 阿斯達도 있었다. 百濟는 高句麗 영토에서 건국한 나라였던 것이다. 나중에는 원수같이 싸웠지만, 硫璃明帝는 장남이라 해도 나중에 느닷없이 나타나 황위를 가로챈 격이라 溫祚가 高句麗 땅에다 나라를 세워도 뭐라 할 처지가 못 됐다.

역사를 축소하면서 우리나라 역사는 西鴨綠江 대신 東鴨綠江에서 일어났다고 날조됐다. 北夫餘 5世�� 檀帝 東明 高豆莫이 민강(岷江) 이서에 있던 위만조선(衛滿朝鮮)을 樂浪과 玄兎·眞番·臨屯으로 나누었으나, 끝내 樂浪만이 남아 大武神烈帝 때 정복 되었다. 날조 漢四郡의 실체는 朝鮮四郡 내지는 北夫餘 四郡이다.

대무신열제(大武神烈帝) 20년��에 帝는 낙랑국(樂浪國)을 습격하여 멸망 시켰으니, 동압록(東鴨綠) 이남이 우리에 속했는데 유독 해성(海城)의 남쪽, 바다 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함락되지 않았다(大武神烈帝二十年帝襲樂浪國滅之東鴨綠以南屬我獨海城以南近海諸城未下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太白逸史를 쓸 당시에는 이미 역사가 날조되어 樂浪은 漢四郡의 하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하나인 樂浪을 멸망 시켰는데, 그 땅이 우리에게 속했다고 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中土를 정복하면 中國이 黃河 이남을 차지할 수 없으니까, 역사를 축소 하면서 高句麗의 활동무대는 東鴨綠江으로 옮겨졌다. 西鴨綠江에서 이루어진 역사까지 東鴨綠江에서 일어났다고 날조 했으니, 黃山江은 韓半島 남부에다 집어넣고, 옥저(沃沮)가 있어야 할 살수(薩水)에는 遼西의 樂浪이 들어왔다.

三國史記에는 朴赫居世 때부터 樂浪이 新羅를 침입 했다(三十年 夏四月己亥晦 日有食之 樂浪人將兵來侵)고 나온다. 揚子江 하류에 위치한 新羅에 遼西의 樂浪이 침범할 수 있는가. 이 당시는 百濟가 건국하기 전이라 樂浪의 실체는 高句麗다. 그러나 百濟가 건국한 南解 次次雄 이후의 樂浪은 百濟를 의미한다. 高句麗가 新羅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百濟부터 공략해야 하기 때문이다. 樂浪 멸망으로 5 천명의 樂浪人이 투항해온 나라는 머나먼 新羅가 아니라, 지척의 百濟다.

“山上帝 원년 동생 계수(罽須)를 파견하여 공손탁(公孫度)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현토(玄菟)와 樂浪을 정벌하여 이를 멸하니 요동(遼東)이 모두 평정 되었다(山上帝元年遣弟罽須攻破公孫度伐玄菟樂浪滅之遼東悉平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는 날조 漢四郡을 말한다. 罽須는 遼西에 있는 百濟를 공격했다. 날조사에서는 멸망한 漢四郡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계속해서 멸망 시켰다고 하니, 해결책으로 樂浪郡과 樂浪國으로 나누고, 樂浪郡이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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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관심있게 보면서 첨으로 꼬리말을 남기네요 기존배운 식민사관과 너무나 다름에 놀라움도 많았지만 갈수록 자긍심이 높아지는건 사실입니다 . 첨부터 두세번 읽어보니 어느정도 눈에 들어옵니다.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서 후손들의 자긍심도 달라지는거 같습니다 어느정도 패배주의에 길들여진 우리들이기에 역사바로잡기또한 필요한일이고요. 글을 읽으면서 꼬리말들을 읽으면서 느낀점은 반대를 위한 반대글들이 많은거같아요. 발로뛰면서 애써 얻는 자료를 올리는데 기존 자신이 알고있던 사관과 다르다 하여 반대를 위한 반대는 성숙한 지성인으로선 낙제점수 같고요. 일주일정도....스크렙 하면서 두세번 어느대목은 네댓번 읽었습니다 그정도 탐독하니 조금은 눈에 들어옵니다 암튼 좋은 자료 접할수잇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 드려요. 끝으로 님의 열정을 사랑합니다. 건투를 빌고요 겨속 좋은 새로운 열림을 써주세요 감사 (소실대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