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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으로 보는 역사자료-2-우리 강역은 아시아대륙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7. 4. 7. 17:32

일식기록으로 찾은
우리나라 강역


2. 일식기록으로 찾은
우리나라 강역은 동아시아였다.

2005/03/17 17:01

1) 남의 나라 일식기록을 베낀 것은
중국과 일본이다.

三國의 일식관측지(日蝕觀測地)들은 지역적으로 서로 매우 떨어져 있다. 中國의 일식기록을 무작정 베꼈다면 관측지가 모두 같게 나와야 하지 않은가? 또 三國史記의 기록이 오히려 中國史書의 일식기록보다도 더 정확하다는 사실에도 의구심이 들었다(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日蝕처럼 지구상의 특정 위치에서만 관측 가능한 현상은 天文現像 관측기록의 독자성을 검증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三國의 최적 일식관측지는 高句麗가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 이북 및 타림盆地(Tarim Basin)에서 중가리아분지 일대, 百濟는 渤海灣, 新羅는 揚子江 下流이다.

三國 일식관측의 특징은 集中性을 보인다는 점이다. 實測이라는 의미다. 장마 현상 기록까지 최적 일식 관측지와 일치하는,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실측이다. 三國은 일식관측 보다 훨씬 어려운, 태백월범(太白月犯), 태백주현(太白晝見) 등의 관측도 독자적으로 수행했다. 朝鮮 역시 일식보다 훨씬 더 관측이 어려운 오행성결집(五行星結集) 현상도 관측했다. 이들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천문관측기록은 中國의 일식기록을 베꼈다는 주장에 정면 배치된다.

新羅本紀, 百濟本紀에 동시에 나오는 205년�� 7월��의 기록을 보면, 205년�� 9월�� 4 일 오후 4시경 달은 金星에 2.1도까지 가까워 졌다가 金星을 쉽게 볼 수 있게 되는 일몰 때는 2.5 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이때 金星은 평소 밝기 -3.9 등급보다 0.5등급 밝은 -4.4 등급이었다. 百濟와 新羅는 205년�� 金星이 밝아진데다가 달 가까이 접근한 현상을 보고 金星이 달을 범했다(太白月犯)고 기록한 것이다.

金星이 낮에 나타났다(太白晝見)의 394년�� 7월��, 555년�� 11월��의 독자기록도 계산상의 시기와 일치한다(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환한 낮에 金星을 관측하자면, 오랜 기간에 걸쳐 金星의 위치 변화를 추적해 두어야 한다. 그 축적된 지식에 따라 당일 낮에 金星이 하늘의 어디쯤에 자리할지 대략적으로 위치를 알고, 그 위치를 주의 깊게 관찰 해야만 金星을 찾을 수 있다. 太白晝見 관측이 가능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당시의 天文學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이미 이 시기에 고도의 관측 기술을 지닌 天文學者들이 있었으며, 장기간 관측 자료가 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우리나라는 太白月犯, 太白晝見을 독자관측한 나라이다. 日蝕現象은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다.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天文現象은 독자관측 하면서 누구나 관측할 수 있는 日蝕現象은 남의 나라 기록을 베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천문현상은 관측하면서 누구나 관측할 수 있는 일식기록을 장기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누군가 일식기록을 없앴다는 증거지, 일식관측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절대로 될 수 없다.

반면 中國이 천문관측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수두룩하다. 우선 中國文獻에 의해서도 우리나라 땅이라고 표시된 지역에서 천문관측하고 있다. 北魏(386∼534)의 하천지1)의 수경주(水經注)를 보면, 遼水가 상건하(桑乾河)이다. 더구나 遼西조차 우리나라 영토다. 宋書에는 “高句麗가 遼東을 다스렸고 百濟는 요서(遼西)를 다스렸는데, 이름하여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한다(高麗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晋平縣)”고 했다.

梁書와 南史2)에도 百濟가 遼西와 晉平 2郡을 차지하고 百濟郡을 설치했다(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고 했다. 주서(周書), 북사3)에도 高句麗의 영토가 “西로는 遼水를 건너 2천리에 이른다(西渡遼水二千里).”고 했다. 宋書에는 百濟 역시 遼西에 있는 진성(晉城)과 고평(高平) 2郡을 점거했다(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고 했으며, 三國史記에는 “太祖大王 3년(기원후 55년) 봄 2월, 遼西 지역에 10 城을 쌓아 漢나라 군사에 대비했다(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고 했는데, 高句麗는 漢나라가 아니라, 百濟에게 遼西를 빼앗겼다.

後漢의 일식관측지로 나온 지역은 中國 문헌에 의해도 모두 우리나라 땅이다.

太祖武烈帝4)는 遼西에 10城이나 쌓았다.

後漢의 天文官은 後漢 땅을 다 놔두고 적국이자 전쟁터에서 천문관측을 한 셈이다5). 그러나 遼西에서 싸운 나라는 百濟와 高句麗니까, 周蒙聖帝에게 정복된 後漢은 上國의 영토에서 천문관측을 한 셈이다.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에 중요한 암시를 준다는 古代人의 믿음 때문”에 천문관측을 했다면, 自國을 놔두고 他國에서 일식관측할 수는 없다.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에 주는 중요한 암시”를 캐도록 他國人이 自國에서 천문관측 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後漢을 포함, 그 어떤 나라도 우리나라가 遼西를 차지한 高麗 末까지 遼東은 물론이고, 遼西에서도 천문관측이 불가능했다. 이것만으로도 中國의 일식기록이 실측이 아님은 분명하다. 나머지 증거도 검토하자.

遼東에서 들었다(遼東以聞). 後漢書 오행지(五行志) 기사이다. 後漢의 일식 중 외부에서 들은 것을 적었다는 기록이 40%에 이른다(三國時代 천문현상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 40%라는 수치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같은 논문에 의하면, 後漢書에 기록된 일식은 75 개고, 소문 이라고 표시하지 않은 일식이 57 개다. 18 개를 所聞으로 들어서 기록 했으니까, 32 %에 해당한다. 날조사에 의하더라도 後漢은 947∼950 까지 겨우 3년��동안 존재했던 단명왕조이다. 왕조를 지키기에도 급급했던 나라에서 무슨 천문기록을 쓸 수 있는가? 中奴史 날조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기록이며 後漢書는 우리역사를 보고 베꼈다는 증거다.

天文官이 所聞으로 들은 것까지 다 기록 하는가. 오늘날의 천문학자들이 소문으로 들은 것까지 다 사실로 취급해서 연구 한다는 것과 똑같은 소리이다. 그 당시는 倫理的 기준이 오늘날만큼 엄격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현대인만의 착각이다.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에 중요한 암시를 준다는 고대인의 믿음 때문”에 천문관측 했다면, 소문으로 들은 다른 장소의 일식을 기록 했다가는 목숨까지 내놓아야 한다.

후한의 수도 낙양보다는 평균식분이 최대가 되는 지역이 약간 북쪽으로 나타나 있다. 실제로 소문을 들어 적었다는 일식까지 모두 포함하여 구한 최적관측지도 거의 차이가 없다(삼국시대 천문현상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

所聞으로 들은 것까지 포함해도 최적 관측지가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결국 한 장소에서 천문관측을 했고, 그 관측장소에서 관측되는 현상을 천문관이 관측하지 못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일반인도 관측하는 일식을 전문가인 천문관이 놓쳤다는 소리이다.

소문을 포함하든 않든 後漢의 최적관측지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소문으로 들은 일식이 관측된 장소가 진짜 일식 관측지라는 이야기이다. 드넓은 중국 대륙을 다 놔두고 現 北京에서 관측한 일식만 매번 所聞으로 들었다는 것도 우습다. 결국 현 北京에서 모조리 관측했지, 現 洛陽에서 천문관측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가 後漢 존속 당시 現 洛陽에서 천문관측하지

◀ 영변지에 실린 鹿圖文 : 한웅대성존(桓雄大聖尊)이 하늘에서 내려온 뒤에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하여 鹿圖文으로 기록 하였는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일찌기 神誌의 전서(篆書)로 쓴 옛 비석을 보고 다시 문서(帖)를 만들어세상에 전한 것이다(桓雄大聖尊天降後命神誌赫德以鹿圖文記之崔孤雲致遠亦嘗見神誌篆古碑更復作帖而傳於世者也 蘇塗經典本訓).

않았으니까. 後漢 당시 現 洛陽을 도읍으로 삼은 우리나라 왕조가 없었기 때문이다.

後漢書의 日蝕記錄은 百濟의 것이다. 新羅가 現 무한(武漢)을 중심으로, 百濟가 現 北京을 중심으로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현 洛陽은 필연적으로 高句麗 영토일 수밖에 없다. 高句麗가 현 洛陽에 없었다면, 삼국 전쟁은 불가능했다.

中國은 문자가 없던 시대의 日蝕까지 기록해 놓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일식기록은 기원전 2128년��의 일식으로 書經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기원전 2128년��에 中國에는 文字가 없었다. 漢字의 원형이라는 갑골문자마저 殷末 200년�� 동안(B.C. 1250~B.C. 1046?)에 사용 했다고 날조했다. 周나라 선왕(宣王, B.C. 827~ B.C. 782) 때 周文을 만들었고, 진(秦)나라 때 소전(小篆)을 만들어 문자를 통일 했다고 했다.

무엇보다 甲骨文字가 발견된 黃河 下流는 우리나라 영토이다. 일식기록으로 본 三國이 黃河 河流를 축으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三國은 수세기에 걸쳐 치열하게 싸운 나라들이다. 殷이 黃河 하류에 있었다면, 殷을 멸망시킨 周도, 秦도, 漢도 黃河 하류에 있어야 한다. 黃河 하류가 中土라면, 三國이 전쟁을 하기 전에 中國부터 멸망 시켜야 했다. 하지만 三國史記나 三國遺史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黃河 下流에는 中國이 없었던 것이다. 中國은 우리나라 文字를 빌려 쓴 것에 불과하다.

기원 직후 玉篇에는 漢字가 22,726 字였다. 1716년��에 만들었다는 강희자전(康熙字典)에는 47,035 字로 나와 있다. 그러면 기원전 11세기의 甲骨文字는 몇 字였을까. 고작 3 千字이다. 甲骨文字는 점치는 데 사용된 문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일상생활에서 3 천 단어쯤 있으면 의사소통이 가능 하다고 하지만, 그 옛날에도 3 千字로 절대 역사책을 쓸 수 없었다. 역사책 이라는 특성상, 온갖 분야의 전문용어가 등장한다. 관직만 해도 대체 몇 개인가.

孔丘(孔子)가 썼다는 書經(尙書)이 中國의 첫 역사책 이라고 했다. 孔丘 이전에 문자가 있었다면, 書經 이전에 역사책이 나왔어야 한다. 孔丘는 기원전 5~6세기 사람이다. 書經이 중국의 첫 역사책 이라면 한자는 周 宣王이 아니라, 기원전 6세기부터 중국에서 사용된 문자6)라는 소리다. 그런데 書經은 요순시대(堯舜時代 : 기원전 24세기)부터 기록한 책이다. 2천년 가까이 역사를 기억 했다가 기록할 수 있는가. 일본은 300년의 역사도 기억하지 못해 우리나라 역사책을 보고 고사기(古事記), 日本書紀를 썼다.

▲ 가림토 문자 : 3세檀君 가륵(嘉勒) 2년(庚子 B.C.2181)..이에 삼랑을보륵(三郞乙普勒)에게 명을 내려 정음(正音) 38 자를 만들게 하니 이것이 가림토(加臨土)이다...또한 3년(辛丑)에 神誌 고설(高契)에게 명을 내려 「倍達留記」를 편수하게 하였다 (庚子二年..是命三郞乙普勒譔正音三十八字是爲加臨土,,,,辛丑三年命神誌高契編修倍達留記 檀君世紀) 加臨土文字는 후대에 이르러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원전이 된다.

Ҧ××<SPAN STYLE='font-family:"새굴림,한컴돋움";font-size:12.600pt;color:"#660000";line-height:22.400px;letter-spacing:-0.933px;text-align:left;'>▲ 가림토 문자 : 3세檀君 가륵(嘉勒)

日本은 375년��에야 百濟에서 漢字가 들어 왔다면서 이전의 천문관측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三國史記의 천문관측은 中國의 기록을 베낀 것이라고 우겼다. 이러한 주장이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받아 三國 초기의 역사를 오늘날까지 부정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中國은 잃어버린 역사가 없다. 文字의 발명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그처럼 중요한 사건이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中國이 발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날조 하면서 빠뜨린 대목이다.

용산문화(龍山文化) 유적지에서 文字가 새겨진 도자기 조각이 출토돼 中國의 문자사용 연대가 현재까지 국제적으로 공인을 받아온 연대보다 최소한 9 백년 가까이 더 올라가는 기원전 2300년��경으로 판명될 수 있는가. 龍山文化 유적지가 있는 山東省을 포함, 黃河 하류는 三國의 영토가 만나는 곳이다. 黃河 하류가 우리 영토가 아니라면, 三國戰爭은 불가능하다. 中土가 아니라는 말이다. 창힐(倉頡)이 5000년�� 전에 漢字를 만들었다면, 시대를 불문하고 漢字가 발굴 되어야 하지 않는가.

漢字 이전의 문자발명 기록은 모조리 우리나라 역사책(桓檀古記)에 있고, 실제 발굴은 중국 대륙에서 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의 무대가 중국 대륙을 포함한 동아시아라는 의미이다. 시간이 촉박해서 우리나라 역사를 周나라 이전의 中國史에 할당하지 못한 것이다.

丙申년(B.C. 925)에 한수(漢水)는사람 왕문(王文)이 이두법(吏讀法)을 지어 바치니 天王께서 좋다고 하시며 삼한(三韓)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 하였다(丙申漢水人王文作吏讀法以獻天王嘉之命三韓如勅施行 番韓世家 下).

이 당시 벌써 漢字가 개발 되었기에 吏讀法을 만들었다. 漢字조차 우리나라가 개발한 문자였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만든 漢字까지 빌려 쓴 中國이 기원전 2128년��의 일식기록을 남길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기원전 5세기 중국의 첫 역사책 書經에 나오는 역사기록도 중국 스스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기원전 39세기에 문자를 발명한 이래 계속해서 새로운 문자를 발명한 우리나라의 역사책을 중국책으로 날조한 것이 書經이다.

呂氏春秋에는 기원전 1177년��에 발생한 地震부터 나온다. 周나라 宣王(B.C. 827~ B.C. 782) 때 周文을 만들었다는 중국의 지진기록은 呂氏春秋가 처음이다. 기원전 12세기에 발생한 지진을 기원전 3세기까지 어떻게 기억하고 쓴단 말인가. 呂氏春秋는 우리나라 책을 가지고 날조한 책이다.

周書가 周나라의 史官이 기록하여 모아놓은 史書라고 하는데, 周나라 때는 중국에 문자가 없었으니까, 史官도 있었을 리 없다. 인심 써서 한자를 周 宣王 때 만들었다고 해 주어도 西周(B.C. 1046?∼B.C. 771) 때는 문자가 없으니, 史官도, 史草도 있을 리 없고, 周 武王과 箕子朝鮮 등의 기록은 절대로 남길 수 없다. 明 때 朝鮮의 역사책에서 周나라에 대해 쓴 기록을 적당히 베낀 것이 周書다. 이것은 日本만 보아도 알 수 있다.

中國 文獻에 漢字 발명은 周나라 선왕(宣王, B.C. 827~ B.C. 782) 때의 周文이 시초이다. 그러나 한자는 이전부터 있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편찬에는 다수의 한국으로 부터의 도래자(渡來者)나 그 자손이 관여했고, 한국의 역사책을 그대로 베낀 기사도 있고, 편찬상 가장 중요한 연대 구성이, 6세기 이전에는 한국 역사책을 따르고 있다[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 요미우리신문, 1972. 3. 30.]

日本書紀는 한국 역사서를 기초로 만들어졌다[이노우에 미쓰시다(井上三下)].

日本은 5세기 초까지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역사책을 보고 古事記, 日本書紀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中國의 일식기록은 한 곳에 집중되지 않는다.

三國史記의 일식기록에는 주목할 만한 특징이 또 하나 있다. 三國의 각 나라가 기록한 일식들의 경우, 일식 때 지구상에 드리워지는 달그림자가 매번 비슷한 지역에 떨어지는 일식들 이라는 점이다. 즉 일식을 볼 수 있는 지역이 늘 같은 곳이라는 점이다(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中國의 일식관측의 특징은 한 마디로 “한 곳에 집중되지 못한다.” “일식 때 지구상에 드리워지는 달그림자가 매번 비슷한 지역에 떨어지는 일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같은 지점에서 볼 수 있는 일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꿔보면, 우리나라 일식기록을 합친 것이 바로 중국 일식기록이다.

컴퓨터를 이용해 중국사서의 일식기록을 임의로 뽑아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로 나누어 싣는 모의실험을 수천 번 해보면, 삼국의 최적 관측지에 이 정도의 위도차이가 발생할 가능성은 사실상 0 이다(하늘에 새긴 

역사).

우리나라는 중국 통일왕조의 역사책에서 천문기록을 발췌해서 三國의 강역에 맞게 따로따로 분류할 수가 없는데 반해, 중국은 三國의 각 역사책에서 간단하게 발췌, 각 연대에 맞게 이 나라, 저 나라에 할당할 수 있다. 일식관측 위치는 각각 高句麗, 百濟, 新羅 강역의 일부 이므로 차지하고 싶은 영토에 맞게 각 역사책을 베끼면 된다. 일례로 百濟 최적 관측지와 별 차이가 없는 後漢의 일식기록은 百濟 역사서에서 베낀 것이 대부분이다.

首都가 아닌 장소에서 천문관측한 나라 혹은 여러 장소에서 천문관측한 나라는 어떤 식으로 기록을 남길까. 여러 장소에서 천문관측 했다는 것은 관측 장소에 따라 관측할 수 있는 천문현상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측 장소에 따라 당연히 분류해 놓아야 한다.

그런데 中國은 이 기본적인 대원칙에 위배되고 있다. 天文志까지 따로 만들면서 정작 중요한 관측지에 따른 분류는 망각한 것이다. 中國은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베끼면서도 관측장소에 따라 관측할 수 있는 천문현상이 다르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天文官이 천문기록을 베끼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史官이 옮겨 썼다는 의미이다.

新羅 초기의 일식이 三國史記에 나오는 기간(서기전 54년~서기 201년)에 한서(漢書)에는 27개, 후한서(後漢書)에는 75개의 일식이 기록되어 있다. 後漢의 수도 낙양(洛陽) 보다는 평균식분이 최대가 되는 지역이 약간 북쪽으로 나타나 있다(삼국시대 천문현상 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가 삼국사기 일식기록을 분석한 결과 삼국의 일식 최적 관측지. 백제가 발해만 연안으로 나온다. 고구려(왼쪽 위), 백제(왼쪽 아래), 상대신라(오른쪽 위), 하대신라(오른쪽 아래)가 기록한 각국의 일식들을 볼 수 있는 최적 관측지(등고선의 중심), 上代新羅는 201년�� 이전, 下代新羅는 787년�� 이후의 기록에 대한 결과이다.

중국의 일식기록에 대해 평균식분을 구해야 했다는 사실은 관측장소가 표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측장소가 표시되어 있다면, 평균식분과 일치해야 한다. 수도에서 천문관측 하지도 않았으면서, 일식관측지가 여기저기 흩어지면서 관측장소를 표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실측하지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무엇보다 洛陽을 포함한 黃河 하류는 三國의 영토가 만나는 곳으로 後漢이 있을 수 없는 곳이다1).

朝鮮 역시 黃河 하류에서 일식관측했다. 결론적으로 後漢書에 나와 있는 모든 일식기록은 後漢의 실측이 아니다. 실상 後漢만이 아니라, 明 이전까지 中國의 모든 일식기록은 우리나라 일식기록을 베낀 것이다.

그렇다면 後漢의 일식기록은 누구의 것인가. 당연히 渤海灣에서 일식관측 한 또 다른 나라 百濟의 일식기록이다. 後漢書의 일식기록은 中國이 역사 왜곡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그런데 어째서 後漢의 일식기록이 百濟의 일식기록보다 훨씬 많은가. 三國史記는 明이 축소 날조했다. 그 과정에서 三國의 일식기록을 다 삭제해 버리자, 천문관측에 집착한 李氏朝鮮이 옛 문헌을 뒤져 다시 기록한 것이다. 이미 李成桂가 우리나라 역사책을 다 수거해 焚書한 뒤라서 다른 문헌에서 찾아내야 했다. 그래서 高句麗와 百濟의 일식기록은 몇 개 없다. 新羅의 일식을 기록한 문헌은 상대적으로 충실했던 것이다. 高麗史는 李氏朝鮮이 날조했다. 그래서 高麗의 일식기록은 三國보다 많이 남아 있다.

주원장(朱元璋)이 三國의 천문기록을 삭제하지 않았다면, 李成桂는 大興安嶺山脈 이북에서 관측한 高句麗(3세기까지)의 천문기록을, 韓半島에서 관측한 百濟, 新羅(5세기 이후)의 천문기록을 남겨 두었을 것이다.

三國時代 내내 중국은 遼東은 물론이고 遼西 지역에서도 일식관측이 불가능했다. 遼水가 난하(灤河)라는 明, 淸 때 지도에 의해서도 현 北京은 중국 땅이 절대로 될 수 없다. 현 遼水가 내내 遼水였다고 해도 渤海灣은 우리나라 영토가 되지, 중국 땅이 아니다.

19세기 전후로 제작한 여지전도(輿地全圖)에는 현 遼水가 鴨綠江(이 당시 韓半島 위에도 東鴨綠江이 있었다)으로 표시되어 있다. 현 遼水가 遼水가 된 것은 遼나라 때가 아니라, 1824년��(“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의 참고지도 제작 연도) 淸 때였다. 결론적으로 중국 역사책과 중국 고지도에 의해도 현 北京은 우리나라 땅이지, 後漢 땅이 아니다.

渤海灣에 있었던 나라는 後漢이 아니라, 百濟이다. 遼水가 桑乾河, 灤河, 현 遼水로 이동해 왔다는 사실만 보아도 지명이 계속해서 밀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後代에 역사를 왜곡하는 과정에서 중원에 있던 대부분의 지명이 동쪽으로 이동 했다는 사실이다. 요수(遼水)와 압록(鴨綠)이 그러하고 요양이라는 지명 역시 원래는 山西省의 遼라는 곳에 있다가 다시 난하의 동쪽으로 옮겨와서 지금은 현 요녕성의 요하 동쪽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실증 한단고기).

中國의 지명이 밀렸듯이 後漢의 강역(疆域)도 밀렸던 것이다.

百濟는 나중에 遼西를 高句麗에 빼앗겼다. 遼西는 高句麗에서 百濟로, 다시 高句麗(文咨好太烈帝 : 날조사에 의하면 21世 文咨明王)로 주권이 바뀌었다. 百濟가 발해만을 내내 차지(百濟는 전시기에 걸쳐 고루 일식현상이 기록되어 있다)한 이상, 상건하(桑乾河), 조백신하(潮白新河), 난하(灤河), 대능하(大凌河), 현 遼水 등은 遼水가 될 수 없다. 遼東은 高句麗 땅 이었으니까.

▲ 輿地全圖

遼西가 상건하(桑乾河)보다 훨씬 더 서쪽에 있을 때만이 百濟가 北京에서 내내 일식관측을 할 수 있다. 百濟는 遼西를 高句麗 무열제(武烈帝 : 날조사에 의하면 高句麗 6世 太祖王) 이후 획득해서 문자호태열제(文咨好太烈帝) 12년��(504)에 상실했다. 최소한 桑乾河 以西에 高句麗 영토인 遼東과 百濟가 한시적으로 차지했던 遼西가 있었다.

내내 일식관측한 渤海灣은 줄곧 百濟 땅이었다. 渤海灣은 百濟가 전쟁을 통해 확보한 땅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半島史에 따르면 百濟는 河南 위례성(慰禮城)을 쌓은 도시국가로 출발했다. 韓半島에서 건국 했다면, 상식적으로 도읍이 있는 韓半島 남부에서 영토를 확장 해야지, 渤海灣에 영토를 확보할 수는 없다. 黃海와 渤海灣 너머의 땅을 정복하는 것이 쉬운가, 도읍 주변을 정복하는 것이 쉬운가.

明이 中土(티벳고원 북부)에서 중국대륙으로 기어 나오면서 우리의 역사에 나오는 지명들은 점차적으로 대륙의 동쪽으로 밀려 났으며 淸 이후에는 韓半島로 더욱 축소되어 왔다.


三國이 도시국가에서 출발 했다고 날조당한 三國史記에도 高句麗가 朝鮮을 계승한 나라임을, 朝鮮이 大帝國 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남아 있다. 고추모(高鄒牟)가 나라를 세운지 2년�� 여름 6월��, “高句麗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多勿)''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三國史記).”

高鄒牟가 오이(烏伊)·마리(摩離)·협보(俠父)세 사람과 함께 도망치다 모둔곡(毛屯谷)에서세 사람이 합세해 나라를 세웠다면, 궁실조차 짓지 못해 물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면, 회복할 옛 땅이 있을 수 있는가. 高鄒牟는 多勿을 연호로 내걸 정도로 朝鮮의 영토 회복을 최우선 과업으로 삼았다.

‘三國時代 천문현상 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에서는 新羅가 해외 천문대를 세웠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는데, 전혀 가능성이 없는 얘기다. 新羅의 천문현상 기록은 건국 직후부터 나온다. 최초 천문현상 기록은 기원전 54년의 日蝕과 기원전 49년의 혜성 기록이다. 新羅는 소국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건국 당시에는 천문대가 한 곳에 불과했다. 3차 辰韓의 천문대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현 半島史에 의하면, 新羅의 母體 사로국(斯盧國)은 아주 작은 나라다. 4세기 중반까지(건국 후 5 백년이 된 시점)도 慶州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역의 나라에 불과했다. 斯盧國은 3세기 중반 무렵부터 辰韓2) 소국을 정복 하거나 복속시켜 辰韓 지역의 맹주가 되었다.

북위 38.4° 기토라 고분 벽화의 천문도에 의해서 우리나라는 한반도 북위 38.4°에서 기원전 65년�� 경부터 천문관측 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三國이 건국하기 전 부터다. 원래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중앙부의 관측자 위도는 북위 38°가 아니라 38.4°이다. 李氏朝鮮이 기존 천문도에 14세기 말의 하늘을 그려 넣으면서 오차가 발생한 것이다.

삼국시대의 일식기록에 38.4°에서 관측한 일식기록이 없다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나라의 천문기록이 누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韓半島의 開城이 38° 근처에 있지만, 高麗의 開城은 중국 대륙에 있었다. Asia 1808 (“Asia” from The General Gazetteer; or Compendious Geographical Dictionary by R. Brookes. Eighth Edition. Dublin, 1808.)에는 淮水 중류 이남에 Cayson(개성)이 표기되어 있다.

▲ 현 역사책에 나타난 삼국과 고려의 일식기록 및 일본이 베낀 우리나라 일식기록의 최적 관측지

그런 소국이 기원전부터 해외 천문대를 설치할 수 있는가. 겨우 280년��에 이르러 斯盧國왕이 辰韓세력을 대표하여 진(晋)에 조공 했다면서 도시국가 斯盧國이 건국 하자마자 中土에 해외 천문대를 어떻게 설치할 수 있는가.

韓半島 남부의 일부가 辰韓 이라면서 그런 辰韓 12 국 중 하나라는 斯盧國이 黃海를 건널 선박은 어떻게 보유3)할 수 있으며, 黃海를 건너 중국 대륙에 天文臺를세우겠다 한들, 朝貢도 하지 않는 小國에 ‘大國’ 中國이 허락 하겠는가 말이다.

더욱이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에 중요한 암시를 준다는 고대인의 믿음 때문”에 천문관측 했다면, 타국에서 절대 천문관측하지 않는다. 또한 타국이 천문관측 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우리나라가 自國을 버려두고 他國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를 관측하여 타국의 인간과 사회의 운명을 알고자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他國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우리나라 사람들과 우리나라의 운명에 중요한 암시를 주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건국 초기, 新羅는 中土의 운명 따위에 신경 쓸 여가가 전혀 없었다.

대제국 高句麗, 百濟의 침공 앞에 나라를 보존하는 것이 제1의 과제 였으니까.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영토에서 천문관측 했다. 新羅는 揚子江 유역에서 건국했던 것이다.

▲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新羅의 일식기록은 新羅가 중국 대륙에서 건국했지, 韓半島에서 건국해서 중국 대륙으로 건너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현 武漢이 新羅의 일식관측지이다. 新羅가 韓半島에서 건국해 黃海를 건너 중국 대륙을 차지했다면, 揚子江 하류에서 상륙작전을 실시해야 하고, 그렇다면 揚子江 하류에서 현 武漢까지 다 新羅 땅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新羅는 중심지마저 중국 대륙으로 옮겼을 것이고, 新羅는 이후로 중국과 싸워야지, 三國統一을 할 수 없다.

무엇보다 韓半島의 小國은 아무리 항해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건국 하자마자 중국 대륙에 넓은 땅을 차지할 만큼 병력과 무기를 한꺼번에 실어 나를 국력이 안된다. 현 半島史에 의하면 高句麗마저 滿州도 벗어나지 못했다.

날조사에서 植民母國 百濟가 멸망 하고도 倭가 지원군을 3년�� 후에야 간신히 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오히려 新羅는 중국 대륙에서 東中國海와 黃海를 건너 韓半島를 침공한 나라이다. 중국 대륙에서 건국한 상대적으로 큰 나라였기에 가능했다.

辰韓 12국의 하나가 斯盧國이라는 三國志 魏書 東夷傳은 “新羅國은 본래 弁韓의 후예이다(新羅國 本弁韓之苗裔也)”는 舊唐書의 기록과 정면 배치된다. 심지어 後漢書는 新羅가 秦나라의 후예라고 했다.

“秦韓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秦나라가 망해서 도망해온 사람으로 피난가는 것이 고역이다. 韓國의 馬韓 땅이 적당할 것 같아 馬韓이 동쪽의 땅을 나누어 같이 살게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 불러 모으니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秦나라 말과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秦韓 이라고 하였다(秦韓耆老自言秦之亡人來適韓國而馬韓割東界地以與之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三國遺史 秦韓條, 後漢書).”

중국 역사책에 등장하는 辰韓은세 개의 辰韓을 구분하지 않고 뒤섞은 것이다. 중국의 역사책 이면서도 서로 모순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斯盧國은 辰韓 12국의 하나도 아니고, 新羅는 弁韓의 후예도, 秦나라의 후예도 아니다. 3 차 辰韓 6 부의 나라이다. "이렇게 되어 辰韓의 6 部가 함께 높여 거세간(居世干)이라 하고 서라벌(徐羅伐)에 도읍을세우고 나라이름을 辰韓이라 하였으며 또한 사로(斯盧) 라고도 한다(於是辰韓六部共尊爲居世干立都徐羅伐稱國辰韓亦曰斯盧 太白逸史).

新羅가 천문관측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新羅는 朝鮮이 해체된 후 諸侯國의 땅에서 건국한 나라이다. 新羅가 건국 당시부터 천문관측 했다는 사실은 朝鮮의 제후국들도 천문관측을 했다는 증거이다. 番韓도 기원전 천여년��에 이미 監星을 두었다(丁卯子牟弗立乙亥置監星 太白逸史). 제후국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천문관측 했던 것이다.

高句麗는 2세기에 이미 蒙古高原 以西에서 일식을 관측했다. 韓半島 이북의 도시국가로 출발 했다면, 어떻게 2 백년 만에 타림盆地에서 중가리아 분지까지 진출할 수 있는가. 현 遼水 以西도 高句麗 땅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 땅의 사학자들의 주장이다. 韓半島 이북에서 渤海灣을 포기하고 중가리아분지(準噶爾盆地;Dzungaria)로 진출할 수 있는가. 蒙古高原도 高句麗 땅이 아니라면서, 오르도스 사막을 건너 차지할 가치가 있는 지역인가.

高句麗의 일식관측지가 蒙古高原 以東과 以西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육지에서 떨어진 두 지역을 영토로 가질 수 있는가. 자국의 두 영토 사이에 낀 나라가 군대 통행을 묵인 한다면, 당장 그 나라부터 정복하고 말 것이다. 몽고고원도 高句麗 영토였다.

百濟, 新羅와 끝없이 전투를 벌여야 하는 高句麗 역시 일식관측지가 보여주듯이 중국 대륙에 있었다. 高句麗가 揚子江 유역의 新羅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長城 이남에 영토를 가져야 했다. 百濟의 것을 베낀 後漢의 일식기록에서 보듯이 百濟의 중심지도 長城 이남 이었다. 百濟의 도읍을 공략하기 위해서도 高句麗는 반드시 長城 以南에 있어야 했다.

三國은 중국 대륙을 분할하고 있었다. 三國의 영토가 서로 만나는 黃河 下流는 수세기에 걸쳐 三國의 각축장이 되었다. 현 洛陽조차 三國의 땅이지, 後漢의 수도가 될 수 없다. 朝鮮의 일식기록에서 보듯 중국 대륙 또한 우리나라 영토였다.

三國의 천문기록은 기원전부터 남아 있다. 百濟의 일식관측지는 渤海灣이니까, 기원전 13년��의 일식기록도 발해만에서 관측한 것이다. 高句麗의 기원전 35년�� 오로라와 기원전 7년 火星 기록이나, 百濟의 34년 오로라4) 기록 등은 중국 대륙에서 관측 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두 나라의 영토는 동아시아에 걸쳐 있었고, 朝鮮時代 부터 다수의 천문대를 설치해 운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新羅는 현 武漢 일대에서 시작한 小國이다. 기원전 54년�� 일식과 기원전 49년�� 혜성 기록은 현 武漢에서 관측했다. 우리나라의 일식기록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한다.

첫째, 우리나라가 실측한 지역은 당연히 우리나라 영토이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실측한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 에서만 중국이 실측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三國은 중국 대륙에 있었으니까, 중국은 당연히 우리나라가 차지하지 않은 지역만을 차지할 수 있다.

둘째, 三國이 건국 초기부터 중국 대륙에서 천문관측 했다는 사실은 삼국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삼국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한 사실은 삼국 이전의 국가가 중국 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 대륙에서 관측한 朝鮮의 일식기록으로 뒷받침 된다.

셋째, 三國이 한반도에서 건국하고 삼국 이전의 왕조가 韓半島 이북에 있었다는, 일식기록에 反하는 韓國史와 中國史는 대대적으로 날조 되었다.

燕과 倭의 위치와 천문학

중국의 주장대로 燕이 渤海灣에 진출 했다면, 燕이 발해만에 長城을 쌓았다면, 百濟가 발해만에서 건국할 수는 없다. 百濟가 발해만에서 일식관측 할수도 없다. 또한 新羅도 揚子江 유역에서 건국할 수 없고, 高句麗도 중국 북부를 차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燕이 渤海灣에 있었다는 중국 고문헌은 거짓이다. 燕을 발해만에 위치시키는 것은 中土의 지명을 밀어내고 해대(海垈), 회대(淮垈)를 축소하면 가능하다.

春秋戰國 시대의 날조 강역도를 보면, 倭가 없다. 그러나 明은 “개국(蓋國)은 거연(鉅燕) 남쪽에 있고, 倭의 북쪽이며 왜(倭)는 연(燕)에 속한다(蓋國在鉅燕南倭北倭屬燕)”고 山海經을 날조했다. 倭가 燕에 속하기 위해서는 燕과 倭가 국경을 접하고 있어야 한다. 倭는 중국 남부에 있었다. 渤海灣에 長城을 쌓았다는 燕이 중국 남부의 倭와 접할 수 있는가. 燕이 渤海灣에서 揚子江 이남까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면 秦 대신 中土를 통일했을 것이다.

朱元璋이 날조한 역사 에서도 燕은 중국 남부에 있었다. 李成桂는 朱元璋에게 揚子江 이남을 주었고, 明은 揚子江 이남에서 亡한 나라이다. 朱元璋은 中土의 北京을 揚子江 이남으로 밀어냈다. 北京이 원래 中土의 長江 이남에 있었기 때문이다. 燕이 존속할 당시, 회대(淮垈)는 우리나라 영토였다. 淸이 회대(淮岱)로 고치자 燕은 종이 위에서 渤海灣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날조한 春秋疆域圖에서 越나라는 揚子江 이남의 항주만(杭州灣) 지역에 자리잡게 되었다. 伽倻가 있던 지역이다. 504년�� 이후 高句麗 영토에 편입 되었다가, 6세기 중반 이후 新羅 영토로 편입되고, 南北國(新羅, 大震國) 시대에도 新羅 영토였다. “한국어휘의 많은 부분이 古代 越나라 지역에서 쓰이던 말과 비슷”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영토였기 때문에 韓國語가 사용 되었던 것이다.

杭州灣 지역에만 유독 韓國語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지만 中土에서 빠져나온 華夏나 濊貊族, 거란(契丹)이 중국 대륙으로 퍼져 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의 저질문화를 전파 시켰다. 明은 華夏의 나라였고, 淸은 濊貊族의 나라였다. 지배자임을 내세워 韓族 文化에 未開文化를 강제로 접목 시켰다.

三國이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高句麗 古土를 차지한 大震國도 중국 대륙에 있었다. 下代 新羅의 영토에서 건국한 高麗 역시 중국 대륙이 활동 중심지였다. 우리나라가 땅을 차지하고 있는 동안은 지명을 밀어낼 수 없다. 중국이 아무리 지명을 밀어내봤자, 우리나라가 밀어낸 지명대로 불러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 淸이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를 만들었을 때는 종이 위에서만 지명을 밀어냈다. 그것은 李氏朝鮮의 땅을 반드시 차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 에서였다. 이미 몇 번이나 李氏朝鮮 땅을 가로챘는데, 그런 자신감이 없다면 더 이상한 것 아닌가.


日本의 역사책에 나오는 일식기록은 중국 남부(628년�� 부터 709년�� 까지), 蒙古高原 이북 및 스타노보이 山脈(Stanovoi Mts. 710년에서 792년까지)5), 黑龍江 중, 하류(794년�� 에서 1183년�� 까지), 滿州(1343년�� 에서 1599년�� 까지)에서 관측한 것이다.

중국 남부, 蒙古高原 이북, 黑龍江, 滿州가 그 당시 일본 땅 아니었냐고? 홋카이도(北海道)조차 19세기 말에야 간신히 정복한 일본이다. 倭奴 메이지(明治)가 쓸모없는 사무라이들6)을 美軍이 南北戰爭 당시 입고, 사용한 골동품 군복, 수통, 각반, 식기, 장총 등으로 무장시켜 아이누族과의 치열한 전쟁에 투입한 끝에 정복했던 것이다. 

있었기 때문이다. 燕이 존속할 당시, 회대(淮垈)는 우리나라 영토였다. 淸이 회대(淮岱)로 고치자 燕은 종이 위에서 渤海灣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날조한 春秋疆域圖에서 越나라는 揚子江 이남의 항주만(杭州灣) 지역에 자리잡게 되었다. 伽倻가 있던 지역이다. 504년�� 이후 高句麗 영토에 편입 되었다가, 6세기 중반 이후 新羅 영토로 편입되고, 南北國(新羅, 大震國) 시대에도 新羅 영토였다. “한국어휘의 많은 부분이 古代 越나라 지역에서 쓰이던 말과 비슷”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영토였기 때문에 韓國語가 사용 되었던 것이다.

杭州灣 지역에만 유독 韓國語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지만 中土에서 빠져나온 華夏나 濊貊族, 거란(契丹)이 중국 대륙으로 퍼져 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의 저질문화를 전파 시켰다. 明은 華夏의 나라였고, 淸은 濊貊族의 나라였다. 지배자임을 내세워 韓族 文化에 未開文化를 강제로 접목 시켰다.

三國이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高句麗 古土를 차지한 大震國도 중국 대륙에 있었다. 下代 新羅의 영토에서 건국한 高麗 역시 중국 대륙이 활동 중심지였다. 우리나라가 땅을 차지하고 있는 동안은 지명을 밀어낼 수 없다. 중국이 아무리 지명을 밀어내봤자, 우리나라가 밀어낸 지명대로 불러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 淸이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를 만들었을 때는 종이 위에서만 지명을 밀어냈다. 그것은 李氏朝鮮의 땅을 반드시 차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 에서였다. 이미 몇 번이나 李氏朝鮮 땅을 가로챘는데, 그런 자신감이 없다면 더 이상한 것 아닌가.


日本의 역사책에 나오는 일식기록은 중국 남부(628년�� 부터 709년�� 까지), 蒙古高原 이북 및 스타노보이 山脈(Stanovoi Mts. 710년에서 792년까지)1), 黑龍江 중, 하류(794년�� 에서 1183년�� 까지), 滿州(1343년�� 에서 1599년�� 까지)에서 관측한 것이다.

중국 남부, 蒙古高原 이북, 黑龍江, 滿州가 그 당시 일본 땅 아니었냐고? 홋카이도(北海道)조차 19세기 말에야 간신히 정복한 일본이다. 倭奴 메이지(明治)가 쓸모없는 사무라이들2)을 美軍이 南北戰爭 당시 입고, 사용한 골동품 군복, 수통, 각반, 식기, 장총 등으로 무장시켜 아이누族과의 치열한 전쟁에 투입한 끝에 정복했던 것이다.

海外 天文臺가 아니냐구? 9세기에 이르러 중국을 오갈 수 있는 선박을 간신히 만든 日本이다. 그것도 침몰하고 조난당하기 일쑤라 9세기 말, 스가와라노 미치사네(管原道眞)가 중국 대륙으로 가길 거부 했었다.

“공동의 문화와 미래를 함께 영유하면서 지리적으로 때로는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세계와 격리된 채 살아온 일본인”(라이프발간, 2차 대전)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 倭가 천문관측만은 격리를 극구 탈피하려 했단 말인가. 日本 역사책에 기록된 천문 관측 지는 러시아의 땅으로 알려진 곳이다. 어떻게 그 땅에서 천문 관측할 수 있었을까. 천 수백 년��간 러시아에 끊임없이 조공 해가며 그 땅에서 천문관측하기를 집착했단 말인가. 자국 땅에서는 천문관측을 외면하면서?

黑龍江 너머는 외항선도 못 만들었고, 홋가이도(北海道)조차 19세기 말에 정복한 일본의 땅이 될 수 없다.

高句麗의 일식관측지가 黑龍江 상류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高句麗 및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일식기록은 대부분 삭제되고 극히 일부만 남았다고 전술했다. 黑龍江 너머도 高句麗 영토였던 것이다. 高句麗 영토는 그대로 大震國의 영토가 되었다. 흑룡강 너머에서 관측한 일본 역사책의 일식기록은 바로 우리나라가 관측한 것이다.

日本은 西洋 天文學을 배울 때까지 천문관측할 줄 몰랐다. 일식관측조차 셋에 하나 꼴로 맞추는 천문학자는 없다. 百濟人 관륵(觀勒)이 천문관측을 가르쳐준 602년�� 에서 무려 26년�� 뒤인 628년��부터 일식기록이 나온다. 그때부터 동아시아 전역에 일식 관측지가 흩어져 있다, 시대에 따라 한 곳에 집중 되면서. 딱 두 번 列島가 일식관측지로 나오는데, 高麗와 李氏朝鮮에서 건너간 천문관이 관측해준 것이다.

◀ 고려시대의 군함

1189년�� 에서 1326년�� 까지 日本이 일식관측지로 나오는 기간이 高麗가 대포를 장착한 戰艦을 앞세워 일본을 정복한 1019년��3)과 왜구(倭寇)가 날뛰기 시작하는 14세기 사이라는 데 주목하자. 1189년��에서 1326년�� 까지의 日蝕을 日本이 제 스스로 관측 했다면, 이후로도 관측지가 日本으로 나와야 한다. 그러나 1343년�� 에서 1599년�� 까지의 일식관측지가 滿州다. 倭奴는 高麗 천문관에게서 천문학을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1601년�� 이후의 일식기록도 日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百濟時代에는 日本과의 교류가 활발하여 잦은 왕래가 있었고, 新羅 말기에 장보고(張保皐 ?~846))는 靑海鎭을 설치하여 남해안 일대에 출몰하는 倭寇를 섬멸하고, 세력을 형성한 후에 남해안 해상 제해권을 장악하고, 이웃 나라와의 해상무역을 독점 하였는데, 이것으로 당시의 배를 건조하는 주조기술이 얼마나 발달 하였는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박 건조기술의 축적을 되물림 받은 高麗에서는 과연 어떠한 배가 건조되었을까?

918년�� 왕건(王建 : 877~943 재위)에 의해 건국된 高麗는 지방 豪族 出身과 海上勢力의 영향으로 건국된 나라로, 이 나라의 가장 근본적인 土臺는 바로 海洋力 이었다. 사실상 王建의 조상과 그의 가문도 해상무역을 담당한 海上勢力이었다(이 당시 海는 바다만이 아니고 江도 海라고 표시했다).

이런 까닭에 그는 海軍을 지휘 했으며 직책도 백선장군(百船將軍) 해군대장(海軍大長)이었고 당시의 해군력 또한 막강 했는데, 909년�� 에는 海軍을 이끌고 羅州를 공격하여 火攻戰法으로 승리함으로써 서남해 일대에 확고한 기반을 다지면서 後三國時代의 혼란을 수습해 가는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羅州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호족의 딸이기도 한 장화황후4)는 王建이 해상활동 중에 맺어진 사랑이기도 하다.

舊 五大史의 기록을 보면 주목되는 인물로 '촉(蜀)' 임금 王建이 高麗太祖와 같은 시대 인물이라는 점이고, 그의 출생지가 주(周)의 경계인 서화(西華)가 있는 지역이고, 당(唐)과 統一新羅의 경계인 항성(項城) 출신이라는 점이다. 項城은 河南省의 동부에 있으며 대륙 新羅의 땅인데, 王建이 蜀나라 임금이 되었다. 어째서 蜀나라 임금인지 이해할 수 없지만, 현재 支那 정부는 大震國 유물을 唐나라 유물로 둔갑하고 사기치는 경우를 보아 의혹이 크다. 그가 죽은 해에 "王建이 高麗를 건국(918)"한 것으로 되어 있다(前蜀-王建陳州項城人也 衍建之幼子也 建卒衍襲僞位 舊五大史) (前蜀-王建字光圖許州舞陽人也 五大史) (前蜀 - 舞陽人 建奔蜀 中國人物史)

기록에 의하면 王建이 건조한 大船은 그 길이가 각 방 16보(36.6m)에 무게만도 250∼280톤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는 15∼16세기경 콜룸부스(Christopher Columbus)가 항해한 배의 규모인데 이미 5∼6 백 년 전에 高麗에서 건조된 것으로 이를 통해서 당시 高麗의 해상세력의 배의 건조기술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렇게 큰 규모이다 보니 배 위에서 말이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할 만하다(소우기).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의 영릉로(英陵路)에 있는 왕건묘(王建墓)의 정문(中奴들은 무엇이 께름칙한 것인지 王의 무덤을 陵이라고 해야 되는데 墓라고 표시하고 있다)

당시 高麗의 배에는 大船, 과선(戈船) 등의 군함 에서부터 순찰선인 巡船, 행정지도선인 관선(官船), 소나무로 만든 큰 배인 송방(松舫), 막선(幕船), 지방의 조세(租稅)를 서울로 옮기는 조운선(漕運船) 등 매우 다양하였다.5)

大船은 현재까지 밝혀진 高麗의 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함이며, 戈船은 高麗의 대표적인 軍艦이다.

日本의 《쇼유키(小右記)》 기록에 따르면 高麗의 배, 그 중에서도 戈船은 철로 뿔을 만들어 적을 부수게 만들었다고 한다(衝角). 이에 비추어 보면 거북선이 바로 高麗軍艦을 원형으로 하여 개발된 것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高麗 배에는 세계최초로 ''戈砲''라 하여 포를 설치하였다. ''1019년�� 高麗戰艦이 화약을 넣어 공격한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6). 이렇게 보면 중국이 4대 발명품으로 자랑하는 것 중에 이미 한국이 元祖이자 종주국으로 밝혀진 인쇄술7)과 더불어 ''火藥''도 한국이 최초로 발명 했다는 새로운 사실도 밝혀진 셈이다.

특히 高麗가 일본 원정시 화약성 폭발무기를 사용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객관적 정황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뿐만 아니라 日本의 《백련초》에는 997년�� 高麗가 日本이 계속적인 통상요구를 거절하자 3차 요구 이후에는 큐슈(九州)를 침공 했다고 하며, 5 백여 척을 앞세운 高麗軍의 침공 기록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1607년�� 부터 1811년�� 까지 朝鮮通信使가 건너가 일본의 문맹자들을 깨우쳐 주었다. 朝鮮通信使에는 온갖 방면의 학자와 예술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천문관까지 끼어 있었다는 것이 일식기록에서 드러난 것이다. 일본에 曆法을 가르쳐준 박안기8)는 단순히 李氏朝鮮의 선비가 아니라, 天文官이었다. 일본은 관륵(觀勒 : 百濟 武帝때 倭에 天文技術을 전했다고 함)을 일본 천문학의 비조(鼻祖)라 내세우지만, 西洋 天文學을 배울 때까지 천문관측할 줄 몰랐으니까, 정확히 말해서 西洋人이 일본 천문학의 비조(鼻祖)이다.

그런 일본의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710년�� 에서 792년�� 까지의 일식관측지가 蒙古高原 이북이다. 동양사(東洋史)의 역사날조를 주도한 中國은 蒙古가 원래부터 蒙古高原에 있었다고 했다.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에 중요한 암시를 준다는 고대인의 믿음 때문”에 천문관측 했다니까, 中國은 蒙古高原이나 그 이북에서 천문관측(?)하지 않았다. 日本이 러시아에 까지 조공하며, 역사책을 하사받아 일식기록을 베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러시아가 설령 일식관측을 했다고 해도 자국 역사책에서 일식기록을 삭제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일식기록 이었던 것이다.

滿州에 女眞族이 살았다고 날조 했으니까, 中國은 滿州나, 滿州 너머에서 일식관측을 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일본 역사책에 기록된, 710년�� 에서 792년�� 까지의 스타노보이 산맥(Stanovoi Mts)이나 794년�� 에서 1183년�� 까지의 黑龍江 중, 하류에서 관측한 日蝕은 우리나라 일식기록이다.

高麗가 黑水와 접해 있다고 高麗史는 물론 高麗圖經 등에도 나와 있다. 일식관측지로 보건데, 黑龍江 이남의 강들은 黑水가 될 수 없다. 국경에서 천문관측하는 나라는 없다. 일식기록상 흑룡강 중, 하류 너머도 高麗 영토니까, 黑水는 黑龍江 상류이다. 黑龍江이 우리나라 영토니까, 1343년�� 에서 1599년�� 까지 日本이 베낀 일식관측지 滿州9) 역시 당연히 우리나라 영토이다.

▲ 현 역사책에 나타난 삼국과 고려의 일식기록 및 일본이 베낀 우리나라 일식기록의 최적 관측지

中國은 잃어버린 역사가 없으니까, 天文志(?)에 실리지 않은 中國의 일식기록은 없다. 반면 우리나라 역사책은 대대로 焚書 됐다고 했으니까, 현 역사책에 실린 일식기록은 우리나라가 관측한 최소한의 일식이다. 日本이 중국의 일식기록(?)을 베꼈다면, 일본의 일식기록이 중국의 일식기록에 다 나와야 한다. 하지만 일본은 중국의 일식기록(?)과 일치하는 기록은 베끼지 않고, 三國이 중국 일식기록을 베꼈다고 우겼다.

무엇보다 천문관측 장소도 표시하지 않고, 한 곳에 集中 되지도 못하는 중국의 일식기록에서 시대에 따라 한 곳에 강하게 집중 되면서 東아시아 전역에 일식 관측지가 흩어져 있는 日本의 일식기록을 컴퓨터의 도움 없이 베껴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일식기록은 한 곳에 강하게 집중 되므로 간단히 베낄 수 있다.

일식기록은 모조리 우리나라 것을 베끼고, 나머지 역사기록은 중국 역사책 에서도 베꼈다? 중국 역사책도 베꼈다면, 중국(?)의 일식기록도 베껴야 했다. 결국 “니혼쇼키(日本書紀)가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서를 기초로 만들어 졌다”는 이노우에 미쓰시다(井上三下)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의 역사책은 오로지 우리나라 역사책만을 보고 썼다.

李成桂와 朱元璋이 우리나라 역사책을 대부분 중국의 역사책으로 할당한 결과, “日本書紀가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서를 기초로 만들어진” 셈이 되었던 것이다. 日本은 18세기 이후 역사날조 하면서 날조 역사책을 참고서로 삼았다. 중국사로 할당된 것에 맞추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친 것이다. 日本의 日蝕記錄은 東洋史가 완전히 날조 되었다는 증거이다.

일본의 천문기록은 모두 우리나라 역사책에서 직접 베꼈다. 날조 역사책과 우리나라 실사책을 대조해 가면서 빠진 일식을 챙겼던 것이다. 베꼈다는 사실을 은폐 하려고 가짜일식을 40~50 %씩 섞었다. 대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일시에 베꼈다는 의미이다. 日本이 베낀 1343년�� 에서 1599년�� 까지의 일식관측지가 滿州라는 사실은 李氏朝鮮이 滿州를 상실한 1824년�� 이후에 일본이 천문기록을 갖기로 날조 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째서 일본은 628년�� 부터 709년�� 까지 중국 남해안의 일식기록을 베끼는 모험을 감행 했을까. 이 시기, 中國倭는 중국 대륙에 있었다. 그러나 중국 남해안은 아니다. 中國倭는 천문관측할 줄 몰랐다. 이 당시, 중국 남부는 新羅 땅이었고, 中國倭(정확한 표현은 大陸倭)는 대만(臺灣 : 원래의 지명은 對馬島)으로 밀려나 있었다. 中國倭의 위치에 가장 근접 하면서도 역사 중심지에서 비켜난 지역의 일식기록을 베꼈던 것이다. 제 딴에는 역사에 충실하게 왜곡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뿐이다. 이후에는 오로지 변두리만을 찾아 일식기록을 베꼈다. 中國倭가 일본으로 이주한 후로 일본은 대륙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기 때문이다.10)

옛날에는 육안(肉眼)으로 천문관측 했다. 그런데도 檀君世紀와 太白逸史에는 監星을 두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乙丑 35년(B.C. 1916) 처음으로 監星을 두었다(乙丑三十五年始置監星 檀君世紀)." “乙亥년에 監星을 두다(乙亥置監星 太白逸史 番韓世家)." 이들 기사는 고정적인 위치에서 천문관측 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기원전 1916년�� 부터 우리나라는 고정적인 위치에서 천문관측 하기 시작했다.

천문대를 설치했으니까, 천문관측 장소는 점이다. 三國의 일식관측지도 점이었던 것이다. 三國의 일식 관측지점을 찾아보자. 우선 수도에서 관측했을 것이다. 하지만 三國은 여러 장소에다 천문대를 설치한 나라다. 그 옛날에는 천문관측을 방해할 휘황찬란한 불빛이 없었으니까, 천문대를 중요도시에 설치했다. 천문대를 설치한 도시는 최적 일식관측지 내에서 제일가는 高度로 남아 있을 것이다. 중요도시를 알 수 없는 경우에는 일식관측지 중앙에 있는 지명으로 추정했다. 韓國史와 대조해 우리나라 일식관측지를 분석해 보면, 관측지점은 대개 중앙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新羅의 일식관측지는 북위 28° 에서 35° 까지, 경도 110° 에서 116° 까지이다. 현 武漢(湖北省)이 그 중심에 있다. 新羅는 高句麗, 百濟와는 달리 소국으로 출발한 나라라 건국 당시 수도 한 곳에서 천문관측했다. 武漢이 新羅의 수도 金城이다.

일식기록이 많을수록 정확한 일식관측 지점을 찾을 수 있다.

後漢은 百濟의 일식기록을 베꼈다. 百濟는 일식기록이 더 많은 後漢의 일식 관측지를 기준으로 정했다. 北京(河北省)이 거의 중심에 해당한다. 그러나 北京은 河南 慰禮城이 아니다. 百濟는 河南 慰禮城을 상실했다. 百濟의 일식기록은 건국 초에서 멸망 때까지 고르게 분포한다. 이 말은 北京이 내내 百濟 땅이었다는 의미이다. 北京은 百濟의 마지막 首都 사비성(泗沘城)이었던 것이다.

高句麗의 우측 일식 관측지는 북위 49° 에서 57° 까지, 경도 114° 에서 124° 까지이다. 黑龍江 상류가 관측지점이다. 아무르강 유역의 모고치쯤. 高句麗의 좌측 일식관측지는 북위 34° 에서 51° 까지, 경도 90° 에서 102° 까지로 타림분지(塔里木盆地)에서 중가리아분지(準噶爾盆地) 너머까지 넓게 나타난다. 위도를 보면, 중간지점이 북위 44° 이다. 이령(伊寧)과 띠화(迪化)가 위치한다. 특히 天山北路의 오아시스 마을로 발전해 차가타이 汗國의 수도이기도 했던 伊寧이 유력하다.

下代新羅의 일식관측지는 韓半島 南端이다. 順天이 거의 중심에 해당한다. 일본이 베낀 628년��에서 709년��까지의 일식관측지는 중국 대륙 남단에서 해남도(海南島)와 대만(臺灣), 필리핀 사이에 걸쳐 있다. 해상이다. 일식관측을 배타고 바다에 나가서 하지는 않았다. 중국 대륙 쪽의 일식관측지 중심인 홍콩(香港)으로 보아야 한다. 日本이 베낀 1343년�� 에서 1599년�� 까지의 일식관측지의 중심에는 하르빈(哈爾濱)이 있다.

◀ 일본 나라(奈良)현 아스카무라(明日香村)의 기토라(キトラ) 고분 벽화 1983년�� 발견된 기토라 고분의 천장에 그려진 천문도가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별자리와 닮았다는 점과 고구려 벽화에 나타나는 사신도가 발견됐다는 점 때문에 국내 고고학자들의 주목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는 왕조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동일 장소에서 천문관측했다. 日本이 베낀, 794년�� 에서 1183년�� 까지의 黑龍江 중, 하류에서 

관측한 일식기록은 新羅에 이어 高麗가 관측했다. 1343년�� 에서 1599년�� 까지 滿州의 일식기록은 高麗 末에서 李氏朝鮮 中期까지 관측했다.

기토라(キトラ) 古墳 벽화의 天文圖(우측아래사진)1)에 의해서 우리나라는 한반도 북위 38.4° 에서 기원전 65년�� 경부터 천문관측 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三國이 건국하기 전이다. 남아 있는, 高麗의 99 회 일식에 대하여 동아시아 전 지역에서 관측되는 식분을 계산한 다음 평균을 구했을 때, 식분이 최대인 지역이 현 사학계가 高麗의 수도로 단정하고 있는 開城과 정확히 일치 한다고 하지 않고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삼국시대 천문현상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고 한 것은 현 開城이 아니라, 북위 38.4°에서 천문관측했기 때문이다.

원래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중앙부의 관측자 위도는 북위 38° 가 아니라 38.4° 이다. 李氏朝鮮이 기존 천문도에 14세기 말의 하늘을 그려 넣으면서 오차가 발생한 것이다.

10世�� 檀君 노을(魯乙 : 35 年 乙丑에 監星을 설치) 때부터 천문대를 설치했다. 檀君이 다스리던 강역은 辰韓이다. 그리고 韓半島는 辰韓에 속했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북위 38.4° 는 기원전 1916년�� 이나 그 직후부터 줄곧 천문관측 해온 지점이다.

Asia 1808에 표시된 것처럼, 開城은 현 淮水 이남에 있었다. 開城은 高麗의 수도가 아니다. 고려의 수도 開京은 중국 대륙에 있었다. 고구려의 수도 平壤城이자 大震國의 수도 홀한성(忽汗城)이다. 바로 天象列次分野之圖 주변부의 관측자 위도 34.3° 이다. 天象列次分野之圖 주변부가 1세기의 하늘 이라는 점(天象列次分野之圖의 별그림 분석)에서 平壤을 수도로 하지 않을 때에도 平壤에서 천문관측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平壤 역시 우리나라의 고정적인 천문관측 지점 이었던 것이다. 실은 乙丑 35 年(B.C. 1916) 처음으로 監星을 둔 곳이 바로 平壤이다. 그 당시에는 장당경(藏唐京)이라 불렀다. 平壤은 北夫餘를 제외하면, 그 땅을 차지한 우리나라 역대 왕조가 반드시 한 번은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그러기에 妙靑은 開京의 地德이 쇠하였음을 말하며 西京遷都를 주장했다).

高麗의 수도가 韓半島 開城이라는 것은 李成桂에 의해 창작 되었다. 수도가 아닌 곳에서 천문관측 하면서 관측장소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李氏朝鮮의 영토가 한반도로 줄어들자, 나머지 천문대에서 관측한 천문기록을 없애면서 한반도 천문대의 위치까지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기원전 18년��에 건국한 百濟는 기원전 13년��의 일식이 남아 있다. 高句麗에서 갈라진 百濟가 건국 직후부터 현 北京에서 천문관측할 수 있었던 것도 고정적인 천문관측 지점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여러 곳에서 천문관측한 것은 장소에 따라 천문관측의 결과가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들이 관측장소를 표기해 두지 않았을 리 없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나라마다 다수의 장소에서 천문관측 했는데, 중국과 일본이 韓半島 일대에서 관측한 천문기록은 베끼지 않았다는 점, 우리나라 기록을 베낀 일본 역사책의 일식기록이 시대마다 한 장소에 강하게 집중 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는 관측장소에 따라 천문기록을 분류해서 기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三國의 일식기록이 수십 개에 지나지 않고, 38.4° 에서 관측한 일식기록도 없다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나라의 천문기록이 대량으로 누락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원래 李氏朝鮮은 高麗의 일식을 韓半島에서 관측한 것만이 아니라, 黃河 이북 및 동북아에서 관측한 것도 남겨 두었다. 李成桂가 朱元璋 등과 합의할 당시의 李氏朝鮮 영토가 黃河 이북 및 동북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淸에 의해서 영토가 단계적으로 축소되자, 蒙古高原 以西 및 현 北京, 滿州, 黑龍江 등에서 관측한 천문기록을 차례로 삭제해 버렸다.

日本이 베낀 1343년�에서 1599년��까지의 우리나라 일식 관측지가 滿州이다. 李氏朝鮮 중기 까지는 최소한 滿州에서도 일식관측을 했다는 증거이다. 실제로는 李氏朝鮮의 영토가 東鴨綠江 이남으로 축소된 1824년�� 까지는 滿州에서 내내 천문관측했다. 丙子胡亂 때 까지는 桑乾河 以西에서, 丁卯胡亂 때 까지는 현 北京에서도 천문관측했다. 영토가 축소되자, 李氏朝鮮은 高麗만이 아니라, 自國의 천문기록까지 삭제해 버릴 정도로 역사축소에 혈안이었다.

◀元(?)나라의 수시력(授時曆)을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곽수경(郭守敬1231~ 1316)은 고려인이다

中國은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언제 베꼈을까. 中土에 세워진 모든 나라가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베끼기에 혈안 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천문기록을 갖고 싶다는 생각과 실행은 별개의 문제다. 베낀 사실이 발각될 경우의 보복도 생각해야 한다. 中國의 천문기록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한꺼번에 베꼈다는 것인데, 中國의 왕조(?)는 서로 다른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中土를 차지하려고 침입한 종족들이 과연 다른 나라의 일식기록까지 신경 써줄까. 唐은 鮮卑族이다. 그런 나라가 토착(?) 왕조를 위해 천문기록을 일일이 베껴 주었을까. 隋書에도 기록하지 않았다. 단일국가라는 日本조차 서양 천문학을 배운 자들의 소행이었다.

대대적인 역사날조에 나선 明이 천문기록까지 베꼈던 것이다. 明은 자신들을 억압하고 멸시 했다는 蒙古의 역사 까지도 날조해준 나라다. 이런 나라이니 만큼 中土에세워진 나머지 나라의 천문기록도 챙겨주었다.

明의 天文官은 高麗人이었다. 高麗는 여러 곳에서 천문관측한 나라다. 그것을 잘 아는 高麗의 천문관이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마구 베껴 여기저기 흩어놓고, 李氏朝鮮의 영토로 합의한 현 北京에서 관측한 百濟 일식기록 까지 베꼈을까. 아니다,

◀ 92년 12월 24일 낙산사 일출중의 부분일식

後漢의 일식기록은 淸 때 새로 베꼈다. 李氏朝鮮의 영토를 가로챈 淸이 원래부터 중국의 강역이 동북아 까지였다고 우길 심산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遼水도 桑乾河에서 난하로, 현 遼水로 밀어내고, 淮垈, 海垈를 글자까지 바꿔가며 면적을 줄여 明이 1 차로 밀어낸 燕을 揚子江 이남에서 渤海灣으로 또 다시 종이 위로 진출시킨 것은 淸이다.

다른 나라의 천문기록을, 일식기록 마저 베낀 중국이 과연 曆法을 만들 수 있었을까.

대통력(大統曆)은 明나라 때의 역법 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元나라 때 수시력법(授時曆法)의 역원(曆元)을 변경하고, 1년��의 길이에 변동이 없다고 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 내용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달리 말하면, 授時曆을 훔쳐 大統曆이라 한 것이다. 漢族國家를 자처하고 문명대국 이라던 明이 유목민족 몽고의 曆法을 베꼈다는 소리다. 이것이 中國史의 실체이다. 他國史를 훔쳐 自國史로 날조하는 것. 대대로 曆法을 만든 中國 이라더니, 明은 어째서 授時曆을 이름만 바꾸어 부를 수밖에 없었나?

中國이 曆法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明도 만들지 못한 曆法을 유목민족 蒙古가 만들 수 있는가. 曆法까지 스스로 제작할 정도로 고도 문명을 누린 蒙古가 어째서 오늘날 달랑 천막 하나 치고 사는 유목생활로 되돌아갔는가. 明이 曆法을 만들 줄 몰랐기 때문에 蒙古의 曆法을 中國人이 만들어 주었다는 주장조차 성립할 수 없다.

“혈거생활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살”던 女眞族이 세운 金이 과연 大明曆을 만들 수 있는가. ‘천하고 작은 생선’ 유목민족 선비족(鮮卑族) 唐이 曆法을 만들 수 있는가.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에 중요한 암시를 준다는 고대인의 믿음 때문”에 천문관측 한 것이라면, 남의 나라 日蝕記錄을 베끼고 曆法을 베낀 中國은 대체 어떤 나라인가. 당연히 역사책마저도 베낄 수 있는 비양심적인 나라임을 말해주지 않는가.

우리나라와 주변국들이 이 시기에 남긴 일식기록들 중 천체역학적 계산을 통해 실제로 그 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기록의 비율, 즉 실현율이 가장 높은 史書가 바로 三國史記이다. 삼국사기에는 일식기록이 총 66 개가 있는데, 그 중 53 개가 사실로 확인되어 80%의 높은 실현율을 보였다. 특히 200년�� 까지의 초기 기록은 그 실현율이 89 %에 이른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천문기록을 베꼈다던 중국사서의 일식기록은 오히려 이보다 실현율이 떨어진다. 중국 일식기록의 실현율은 한(漢)나라 때 78 %로 가장 높고 그 이후부터 당(唐)나라 말까지는 63~75% 의 수준을 보인다.

삼국사기는 둘쭉날쭉함이 없이 모든 시기에 걸쳐 고르게 실현율이 높다.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이 독자적인 실제 관측에 근거하여 기록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베꼈다면서 어째서 中國의 일식 실현율이 우리나라보다 낮은가. 中國이 왕조라고 우기는 각 나라마다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배당했다. 각 나라 존속기간에 해당하는 일식기록을 포함한 천문기록은 최소한 수백 개에 이를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책을 다 없앴다고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부 다 베끼면 탄로날 가능성을 생각한 中國은 다수의 천문대에서 관측한 기록에서 선택적으로 약간씩 베꼈다. 日本도 우리나라 역사책에 기록된 실제일식과 허구의 일식을 섞어서 실현율이 33~45 % 밖에 되지 않는다.

다수의 천문대에서 관측한-중국대륙을 제외하고 동아시아 전체에서 육안관측할 수 있는- 천문현상 전부를 기록 했으므로 우리나라는 각 王朝마다 역사책과는 따로 天文志를 엮어야 했던 것이 분명하다. 똑같은 내용의 천문현상이 가득한 天文志를 베끼면서, 실수가 없을 수 없다.

우리나라 戶籍을 전산화하는 과정에서 13.3 %의 주민등록번호가 잘못 기재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 번쯤 답안지를 밀어 쓴 경험을 가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선택적으로 베낄 경우는 실수가 더 많이 발생한다. 남의 나라 천문기록을 베끼는 사람이 한 단계 밀려올라 갔다고 다시 기록할까. 자신만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르는데? 이 당시 朱元璋은 우리나라 역사 전부를 中國史로 둔갑 시키고 있었다. 수만 권의 책을 바꾸어야 했던 것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식이 三國史記와 중국사서에 공동으로 나오는 이유” 역시 中國이 우리나라 일식기록을 베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일식관측 실현율이 높은 것으로 보아, 천문관측을 얼마나 중시 했는지 짐작 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과연 일어나지 않는 일식을 일어났다 보고하고 기록 했을까. 日蝕現狀은 일식이 일어나는 지역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다. 거짓보고를 하면 당장 탄로난다. 태백주현(太白晝見), 태백월범(太白犯月)도 관측한 나라가, 일식관측을 잘못할 수는 없다.

天文志를 포함한 역사책은 처음 한 권을 만들어 여러 부 필사(筆寫)한다. 현존하는 인쇄본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126 호)이 가장 오래 되었다. 인쇄술을 개발 했다고 해도 모든 책을 인쇄하는 것은 아니고, 최종 단계에 한해 인쇄했을 것이다. 필사를 거듭 할수록 誤字 발생율이 높아진다. 실상 天文官이 쓴 草稿 외에는 모두 誤字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이제 결론을 말하자. 三國의 일식기록은 明이 삭제하고 李氏朝鮮이 다시 찾아서 기록했다. 몽고고원 以西, 현 北京, 현 武漢에서 관측한 高句麗, 百濟, 新羅의 일식기록을 李氏朝鮮이 찾아서 기록한 것은 朱元璋이 차지한 땅이 揚子江 이남 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中土는 유목민족의 침입을 끝없이 받았다. 날조사에서 유목민족의 南方下限線이 揚子江이었다. 揚子江 이북을 北朝로 날조했다. 유목민족으로 날조된 高句麗, 百濟, 新羅도 揚子江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옛 長江 까지가 우리나라 영토였다.

李氏朝鮮은 高麗는 물론이고 李氏朝鮮의 천문기록까지 영토가 단계적으로 축소될 때마다 삭제해 왔다. 그럼에도 三國의 일식기록을 삭제하지 못한 것은 그것마저 삭제하면 천문관측 하지 못한 나라가 되기 때문이다.

일식기록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淸이 後漢의 일식기록을 다시 베꼈다는 사실이나 日本이 1824년�� 이후에 천문기록을 갖기로 날조 했다는 사실은 아직도 저들이 우리나라 역사책 및 고문헌을 보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특히 日本은 20세기에 들어 와서도 우리나라 한단사(桓檀史)를 토대로 남연서(南燕書) 등의 날조 일본 역사책을 만들어 왔다. 일식기록의 가치는 이를 근거로 日本과 中國에 우리나라 역사책과 기타 문헌의 반환을 요구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2) 5세 단군 구을(丘乙)은 10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삼았다.

百濟, 新羅의 일식기록은 건국 초부터 나온다. 百濟는 高句麗에서 분리된 나라이다. 

宋書에는 “高句麗가 遼東을 다스렸고 百濟는 遼西를 다스렸다(東夷高句驪國 今治漢之遼東郡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고 했다. 梁書와 南史에도 백제가 요서와 진평 2군을 차지하고 백제군을 설치했다(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晉世句驪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梁書)고 했다. 周書, 北史에도 고구려의 영토가 “서로는 요수를 건너 2 천리에 이른다(高麗者 … 東至新羅西渡遼水二千里 周書 券49).”고 했다.

新唐書 百濟傳에서 "百濟는 夫餘의 별종이다. 京師(수도)에서 동쪽으로 6 천리 영(嬴),빈(濱),해(海)의 남쪽(陽)에 위치하며 서쪽 경계는 越州이고 남쪽으로 倭가 있으며 北으로는 高句麗와 접한다" (百濟夫餘別種也直京師東六千里而嬴濱海之陽 西界越州南倭北高麗 新唐書 百濟傳)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嬴, 濱海의 위치를 집고 넘어가자.

◀ 영(嬴),빈(濱),해(海)의 위치도

영(瀛)- 영으로 발음하고 남을영, 풀다, 싸다, 넘치다, 지나치다로 해석이 되고 물수(水)를 변으로 하는 영은 절운이 같으니 같이 사용했는데 이를 의성 가차법이라 할 수 있으며 지도에 나오는 글자 밖에 없다.

빈(濱)- 발음은 빈인데 물가빈, 끝, 임박하다로 풀이하고 해(海)는 바다라고 풀이하고 넓다, 많다로 풀이 하므로 빈해(濱海)는 바다에 잇닿은 지대로 연해라고 풀이한다.

양(陽)- 볕, 밝을, 거짓, 봄양으로 풀이하고 『시경(詩經)』에 재남산지양(在南山之陽)이나 산남수북(山南水北)으로 사용된 예가 있는데 산으로 할 때는 따뜻한 햋빛이 드는 남쪽을 의미하고 물로 할 때는 햋빛이 드는 북쪽을 의미 한다는 뜻이다.

百濟는 발해만에서 내내 일식관측 했으므로 遼水는 고지도에 남아 있는 첫 遼水인 桑乾河 보다 훨씬 더 서쪽에 있었다. 상건하(桑乾河) 以西에 遼東도 있고, 遼西도 있었던 것이다.

“百濟는 본래 高句麗와 함께 遼東의 동쪽 천 여리에 있었다(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는 宋書의 날조기사는 百濟가 高句麗에서 분리되기 전에는 遼東의 동쪽 천 여리에 있었다가 분리된 후에는 요동의 동쪽 천 여리 밖 즉 발해만 일대에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요동의 동쪽 천 여리에 있던 것은 高句麗이지, 百濟가 아니다. 요동의 동쪽 천 여리도 중국 대륙에 있었던 것이다. 高句麗 역시 중국 대륙에서 건국했음을 말해준다. 三國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 했다는 사실은 三國 이전의 국가가 중국 대륙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高句麗는 北夫餘에서 국명만 바꾼 나라이다. 北夫餘의 건국자는 해모수(解慕漱)이고, 5 대 고두막한(高豆莫汗)은 北夫餘의 檀帝位를 찬탈 하면서 스스로를 東明이라 하고 北夫餘와 구분하여 국호를 卒本扶餘라 했다(至是卽位於卒本自號東明 北夫餘紀). 7世��에 해당하는 고추모(高鄒牟:朱蒙은 鄒牟의 별명)1)에 이르러, 高句麗로 개칭했다. 東夫餘에서 도망친 高鄒牟는 北夫餘 6世�� 檀君 고무서(高無胥)의 둘째공주(禮氏)와 혼인, 北夫餘를 물려받아 朱蒙聖帝로 高句麗의 건국자가 되었다.

高鄒牟를 東明으로 착각하는 원인은 물론 三國史記에 高句麗의 건국자를 東明聖王(秋九月王升遐時年四十歲葬龍山號東明聖王)이라 날조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百濟가 東明의 사당을 세웠다는 점이다. 百濟를 건국한 溫祚는 北夫餘 6世�� 檀君 고무서(高無胥)의 외손자 였지만, 부친 高鄒牟는 모친이 다른 장자 유리(瑠璃)에게 제위를 넘겨주었다. 그래서 高句麗처럼 高鄒牟를 신격화해서 받들지 않았다. 溫祚는 부친을 증오해 高句麗에서 갈라져 나왔고, 부친과 같은 姓氏인 것도 싫다고 해서 夫餘氏로 바꾸었다. 대신 자신을 있게 한 外曾祖父 北夫餘 5世�� 檀君 東明 高豆莫을 제사 지냈다. 東明이 北夫餘의 檀帝 位를 찬탈하지 않았다면 百濟는 없었을 테니까.

北夫餘의 시조 解慕漱는 大扶餘의 檀帝位를 가졌고, 大夫餘는 朝鮮에서 국호만 변경한 나라이다. 朝鮮은 배달을 계승한 나라이다. 朝鮮은 우리나라 강역을 확장 하지는 않았다. 檀君世紀에 보면, 中土로 영토를 넓혔지만, 中土 자체가 제후에게 준 封土로 원래부터 우리나라 강역이었다.

우리나라는 배달 開天 당시부터 중국 대륙에 영토가 있었다. 한웅(桓雄)이 白山과 黑水 사이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白山은 중국 대륙에 있었다. 神市는 동북아에 있었는데, 배달 14세 자오지 한웅(慈烏支桓雄:蚩尤天王)에 이르러 중국 대륙에 있는 靑邱로 중심지를 옮기고 정복활동을 벌였다. 그래서 三國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할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三國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한 것은 三國以前의 우리나라, 즉 배달(倍達) 및 朝鮮이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이다.

五行星結集도 朝鮮의 대륙존재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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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흘달(屹達 또는 代音達) 50년�� 무진(戊辰)에 다섯별(五星)이 누성(婁星)에 모였다(戊辰五十年五星聚婁 檀君世紀).

五行星結集은 기원전 1734년��에 일어났는데, 임승국 선생의 서력환산에 의하면, 13世�� 屹達 50년��은 기원전 1733년��이다. 한해의 변경, 윤달 등을 고려하지 않아 西曆換算에 오차가 생겼던 것이다.

古代에는 한해의 시작이 달랐다. “옛날에는 계해(癸亥)를 썼고 단군구을(檀君邱乙 BC. 2099년��에 즉위)이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써서 10월��로 상달(上月)을 삼아 이것을 세수(歲首 : 한 해의 첫달)로 하였다(舊用癸亥而檀君邱乙始用甲子以十月爲上月是謂歲首 太白逸史 神市本紀)." 한해의 시작을 변경하면, 변경 직전 해는 1년��보다 짧다. 朝鮮을 개국한 해가 기원전 2333년�� 이니까, 13世�� 屹達 50년��은 기원전 1734년�� 이었던 것이다.

기원전 765년�� 4월��의 日蝕記錄이 실제로 기원전 765년�� 2월�� 10 일에 일어난 것은 이 당시 10월��이 한해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한해를 시작하는 달은 언제나 1월��이다. 상달을 한해의 시작으로 하면서 오늘날의 10월��을 1월��로 고쳐 불렀다. 오늘날의 (음력) 10월��은 음력 正月을 한해의 시작 즉 1월��로 했을 때 비로소 10월��이 되었다.2)

“乙卯 원년 (B.C. 6) 봄 정월에 왕은 사신을 高句麗에 보내 국교를 청하고자 하였다(乙卯元年春正月王遣使高句麗請交 迦葉原夫餘紀)." 여기서의 正月은 물론 음력 정월이다. 중국 대륙은 계절의 변화가 韓半島 보다 앞서니까 음력 정월은 봄이다. 後周書와 隋書에는 百濟가 인월(寅月, 음력 정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한다(百濟 … 以建寅月爲歲首 隋書)고 했지만, 寅月을 한해의 시작으로 변경한 것은 百濟가 아니라 朝鮮이다.

朝鮮時代의 일식 가운데, 기원전 525년�� 8월��과 기원전 423년�� 2월��의 日蝕은 달까지 일치한다. 이 해의 일식을 기록했던 것이다. 이때 벌써 음력 정월이 한해의 시작 즉 1월��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년�� 7윤법3)도 시행하기 전이다. 태음력(太陰曆)의 1년��은 354일로 아직은 시차가 벌어지면, 그 때마다 필요할 만큼 閏日이나 윤달을 두어 조정하던 시기이다. 규칙적인 윤달이나 윤일을 삽입하기 전이라 太陽曆과 달이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다. 기원전 765년�� 2월�� 10일4) 이후 기원전 526년�� 사이에 음력 정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변경했던 것이다. 西曆이 일치하는 것은 마지막으로 바꾼 한해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7世 檀君 여을(余乙) 20년�� 여름, 29世�� 檀君 마휴(摩休) 9년��, 6世�� 箕子(?) 2년�� 7월��, 32世�� 檀君 추밀(鄒密) 13년�� 3월��의 일식기록은 기원전 1533년�� 여름, 기원전 935년��, 기원전 918년�� 7월��, 기원전 837년�� 3월��에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단기고사).

“B.C 765년��과 B.C 579년��의 일식은 관측 가능한 지역이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檀君朝鮮時代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일식 그림이 생략되어 있지만, 서쪽은 중국 대륙이 분명하다. 檀君朝鮮時代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은 ”한국, 만주, 중국, 몽고 등지에서 관측가능한 일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관심에서 벗어나 단지 ‘서쪽’이라 쓴 것은 “조선시대의 천문현상기록이 지금의 하르빈 근처에서 이루어졌다고 가정”하고, 기원전 765년��과 기원전 579년��의 일식을 “기록연대의 오차 또는 기록의 비사실성”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阿斯達(도읍)은 전부 중국 대륙에 위치했다. 이 당시는 白岳山 阿斯達(현 殷墟)이 朝鮮의 수도로 현 黃河 하류에 위치했다. 기원전 765년��의 일식은 藏唐京 阿斯達이나 白岳山 阿斯達에서 관측한 기록이다. 檀君世紀, 檀奇古史에 실린 朝鮮時代의 일식이 중국 대륙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朝鮮의 강역이 동아시아임을 말해준다.

▲ 용덕리 고인돌과 별자리 실측도.평안남도 증산군 용덕리에서 발견된 고인돌에서 북극성을 중심으로 11개의 별자리에 속하는 별들이 새겨져 있으며 별들의 운동을 감안한 연대는 기원전 2900년��이다.

“B.C 525년��(39世�� 檀君 豆忽 21년 8월)과 B.C 248년��(47世 檀君 高列加=古列加 48년 10월)의 일식은 한반도와 만주, 중국 북부에 달의 온그림자가 드리워져 인상적”이다(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일식 그림을 보지는 못했지만, 朝鮮의 도읍(藏唐京 阿斯達과 白岳山 阿斯達)은 중국 북부 가까운 곳에 위치했으므로 도읍에서 관측한 부분일식일 가능성이 크다. 기원전 248년��의 일식(檀君世紀)은 기록과 5 개월이나 차이난다. 절기의 어긋남을 정반대 계절이 될 때까지 방치하지는 않을 테니까, 윤달의 미삽입 때문이 아니라, 오기가 발생한 것으로 高列加 천황 48년��에 일어난 일식이 맞다. 癸丑四十八年 十月 朔日蝕 원문을 보면, 앞(연도)에 四와 十이 나오고 있다. 四월을 충분히 十월로 착각했을 수 있다.

한단고기에 실린 檀君世紀에는 기원전 2183년��과 기원전 837년��, 기원전 248년��의 일식만 나온다. 그러나 檀奇古史는 원본 檀君世紀를 토대로 날조한 책이다. 檀奇古史에 실린 일식도 원래는 檀君世紀에 다 수록된 일식이다.

檀奇古史는 역대 檀君의 재위년이 군데군데 엉터리다. 10세 단군 魯乙은 59년��간 제위에 있었는데 58년��으로, 11세 단군 道奚는 58년��간 제위에 있었는데 57년��으로, 23세 단군 阿忽은 76년��간 제위에 있었는데 75년��으로, 43세 단군 勿理는 36년��간 제위에 있었는데 25년��으로, 44세 단군 丘勿은 29년��간 제위에 있었는데 40년��으로 날조했다. 그런데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이 檀君 즉위년을 桓檀古記를 따르고 있어, 일식기록 역시 엉터리 檀奇古史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箕子를 기준으로 일식발생 연도를 기록한 대목은 사정이 다르다. 檀奇古史의 箕子朝鮮의 실체는 番韓 30세 서우여(徐于餘)부터 68세 수한(水韓)까지에다가 가공인물 물한(勿韓 : 12세)과 기부(奇否 : 41세), 마한(馬韓 : 42세)을 합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실제연도와 크게 어긋나게 되었다. 3세 기자(箕子)라는 솔귀(率歸)는-32세 번한(番韓)으로-47년간 제위에 있었으나 48년으로, 4세 箕子라는 임나(任那)는-33세 번한으로-32년��간 제위에 있었으나 31년��으로, 11세 箕子라는 해수(奚水)는-40세 番韓으로-17년��간 제위에 있었으나 10년��으로, 12세 箕子라는 물한(勿韓)은-가공인물로-21년��간 제위에 있었다고, 13세 箕子라는 오문루(奧門婁)는-41세 번한으로-12년��간 제위에 있었으나 48년��으로, 16세 箕子라는 아륵(阿勒)은-44세 番韓으로-64년��간 제위에 있었으나 28년��으로, 17세 箕子라는 마휴(麻休)는-45세 번한으로-51년��간 제위에 있었으나 27년��으로 …… 날조됐다.

결국 箕子朝鮮 36세 箕子로 날조한 人韓 35년은 檀奇古史에 의하면 기원전 241년��인 반면, 桓檀古記에 의하면 人韓은 64세 番韓으로 기원전 404년��이다. 桓檀古記에 따르면 마밀(馬密) 2년��은 기원전 918년��이 아니라 기원전 1091년��이고, 내이(奈伊) 1년��은 기원전 579년��이 아니라 기원전 752년��이다.

檀奇古史의 人韓 35년��(B.C. 241)을 기준으로 할 때, 衛滿이 番朝鮮을 훔친 해(檀奇古史에 의하면, 馬韓 25년��)는 기원전 146년��이 아니라, 기원전 17년��이 된다. 연대를 고려했다면, 39세 箕子로 날조한 山韓을 馬韓이라 했을 것이다. 중요 사건의 연도조차 일치 시키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일식이 발생한 해의 중요 사건을 모두 지웠다. 奈伊 “첫해에 맏아들 次音을 태자로 삼았다. 봄에 일식이 있었다.”가 예외. 그러니 朝鮮時代의 일식기록을 날조 箕子朝鮮에 배당하는 과정에서 실제연도와 일치시켜 쓰지는 않은 것이 분명하다. 기원전 579년��에 일식이 일어난 것은 우연으로 보아야 한다. 원래 기원전 579년��에 일어난 일식을 베끼려고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날조자는 연대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으니까.

기원전 918년��에 番韓은 동아시아 서쪽 끝에 있었다. 그러나 檀奇古史의 목적은 箕子朝鮮을 창작해 (檀君)朝鮮과 동등한 위치에 올리는 것 외에 우리나라를 동북아의 나라로 축소하기 위한 것이므로 조금만 생각이 있는 날조자라면, 동북아에서 발생한 일식을 우선적으로 활용하려 했을 것이다.

동북아에서 일어난 日蝕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아마 이런 식으로 고쳤을 것이다. 28세 단군 해모(奚牟) ‘7월’의 일식을 6세 箕子 2년�� ‘7월’의 일식으로, 17세 檀君 余乙 ‘1년�� 봄’의 일식을 19세 기자 奈伊 ‘1년�� 봄’의 일식으로……. 이 경우 동북아의 일식을 보고 기록한 셈이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식이나 동북아에서 관측할 수 없는 일식이 된다. 기원전 579년�� 일식의 관측 가능한 지역이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 역시 일식발생 연도를 무시하고 베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일식이 발생한 달이 틀리는 것이다.

일(日)만 고쳐도 일어나지 않은 일식이 된다. 이런 예를 우리는 日本의 일식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日本의 가짜 일식은 우리나라가 실제로 관측한 일식기록에서 연, 월��, 일 가운데 하나 내지 두 개를 고쳐서 만들어냈다. 남의 나라 천문기록을 베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다. 일식 실현율이 낮아도 천문관측한 문명국 행세를 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는 점을 노렸다.

三國의 일식기록은 中國의 것을 베꼈다? 日本이 그렇게 우긴 것도 日本이 우리나라 일식기록을 베꼈기 때문이다. 三國의 초기 역사는 없다? 日本이 그렇게 우긴 것도 日本史가 가짜 역사1)에 中國倭史2)를 합친 것이기 때문이다. 식민사로써의 日本史를 은폐하기 위해 주로 사용한 수법의 하나가 역사 반대로 쓰기(수정)다.

정말로 마밀(馬密) 2년��(B.C. 1091)의 番朝鮮 일식이라면, 고정된 위치에서 관측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番朝鮮은 천문대를 馬密 사후에 설치했기 때문이다. “馬密이 죽으니 丁卯年에 아들 모불(牟弗)이 즉위했다. 乙亥年에 監星을 두다(馬密立薨丁卯子牟弗立乙亥置監星 太白逸史 番韓世家)." 그러나 이 역시 동북아의 일식을 베꼈을 경우, 한 지점에서 관측한 것이다. 辰韓 지역은 기원전 1916년�� 이래로 천문대를 설치했으니까.

결론적으로 箕子朝鮮의 일식기록은 기원전 1091년��, 기원전 752년��, 기원전 404년��의 일식일 가능성이 높지만, 番韓(檀奇古史의 箕子朝鮮)과는 무관한 동북아에서 관측한 일식을 골랐다면, 연도를 무시하고 베꼈다. 이 경우, 날조자가 어느 해의 일식을 베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왜냐하면 朝鮮時代는 2096년��이나 되는 반면, 기록된 일식수는 10 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中國 대륙(朝鮮의 首都)에서 관측한 기원전 765년��, 기원전 525년�� 일식 및 기원전 248년�� 일식을 제외하면, 7 개로 줄어든다. 무엇보다 일식 발생 년��,월�� 혹은 日이 생략되어 있어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2096년�� 동안 동북아에서 일어난 일식 가운데, 月이 같은 일식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日本 역사책에 기록된 가짜 일식은 대부분 관측 년, 월��, 일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발생한 일식이 한정되어 있어, 기록과 일치하는 일식을 제외한 나머지 일식에서 쉽게 가려낼 수 있다. 일식기록을 고치면서 일식관측 순서까지 뒤바꾸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하나의 가짜 일식과 비교할 일식 수가 몇 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일식관측지를 알고 있다.

둘째, 일식관측기간이 짧다. 백년�� 미만에서 이백년�� 정도이다. 가장 긴 기간이 390년��(794년��에서 1183년��까지의 黑龍江 중류 일식)이다.

셋째, 日本이 베낀 일식기록이 많다. 일식 수가 시대에 따라 수십 개에서 백 개 이상이다.

넷째, 년, 월��, 일 가운데 하나 내지 두 개만 고쳤을 것이므로, 가짜 일식의 앞뒤로 진짜 일식이 오는 경우, 혹은 가짜 일식이 연달아 오는 경우에도 가짜 일식이 어느 일식을 고친 건지 분명해진다 (하나의 실제 일식에 대응하는 가짜 일식을 두 개 이상 만들어낼 수도 있다. 기록된 일식의 년, 월��, 일 가운데 두 개만 서로 다르게 고쳐도 같은 일식에서 두 개의 가짜 일식을 만들어 냈다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의 일식에서 가짜 일식 셋 이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년, 월��, 일 모두 바꿔야 하고, 연달아 오는 가짜 일식의 관측기간이 너무 좁혀진다는 점에서 하나의 실제 일식에 대응하는 가짜 일식을 여러 개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檀君朝鮮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은 한해 시작의 변경이나 윤달, 윤일 등에 대한 고려없이 쓴 글이므로 실제로는 실현된 일식이 더 많다. 또 檀奇古史에 등장하는 일식기록이 전부도 아니다. 朝鮮時代는 2096년��에 이른다. 한단고기(桓檀古記)의 檀君世紀도 요약본 이지만, 檀奇古史 역시 원본 檀君世紀를 통째로 날조 했다고 하기에는 극히 짧은 글이다. 역대 檀君別로 한 권의 분량도 할애하지 않고서 檀君世紀라 말할 수 있을까. 원본 檀君世紀는 방대한 분량으로 추정되고, 일식기록 또한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는 檀君世紀가 수없이 훼손 되었음을 의미한다.

별자리가 등장한 시기는, 지금으로 부터 최소한 5000년�� 전이다. 평남 증산군 용덕리 고인돌이나 평남 상원군 용곡리 고인돌군에서 기원전 30세기부터 별자리가 등장한다. 천 수백년��도 넘게 별자리만 있고, 이름은 없었다거나 이름을 확정하지 못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19회 연재물 사진 참조)

“기원전 18세기는 동양에서 28수(宿)의 이름이 확정되기 훨씬 전”이 아니었던 것이다. 中國이 우리나라 역사를 中國史로 둔갑시키는 과정에서 후대의 역사로 끌어내린 것 뿐이다. 中土의 나라는 그 수가 우리나라보다 많았기 때문에, 또 후대의 역사부터 날조하는 과정에서 오래된 역사를 바꿀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중요한 역사만 후대의 역사로 끌어당겨 썼다. 이런 예는 별자리에 한정되지 않는다.

원래 五行星은 婁星에 모였다. 婁星은 바다뱀자리(Hydra)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朱元璋이 韓國史와 中國史를 바꾸면서 별자리의 위치까지 뒤바꾼 탓에 130°나 떨어진 양자리(Aries)가 새로운 婁星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28宿는 중국의 용어가 아니다. 曆法조차 배달과 朝鮮에서 가져다 쓴 주제에, 明조차 曆法을 못 만들어 授時曆을 그대로 베낀 주제에 어떻게 천문용어를 만든단 말인가. 中國이 28수를 만들었다면, 제 조상이라 우기는 黃帝(軒轅)를 누락시킬 수가 없다. 우리나라 五帝인 白帝, 靑帝, 赤帝, 黑帝, 黃帝를 명명하기 전에 제 조상이라 우기는 炎帝(神農氏)부터 넣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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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는 자체 천문대를 갖추고 西域이나 中國과는 다른 독창적인 천문체계를 日本에 전할 만큼 천문지식이 뛰어났다고 한다(역사스페셜 1권)

日本(당시는 倭다)에 천문지식을 전한 것은 高句麗가 아니라, 百濟이다. 倭는 百濟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더 중요한데, 倭는 百濟學者가 아무리 가르쳐줘도 배우지를 못해 천문관측할 줄 몰랐다. 마지막으로 가르쳐준 602년��에서 무려 26년�� 뒤인 628년��부터 日蝕기록이 나온다. 709년�� 까지의 최적관측지가 中國 南部다. 日本이 관측한 것이 아니라 新羅의 일식기록이다. 이때부터 李氏朝鮮 중기까지 줄줄이 베꼈다. 李氏朝鮮 중기 이후에는? 朝鮮通信使가 천문관측했다. 제 것이라 우기기 위해 일률적으로 가짜 일식을 40~ 50 %씩 섞었다.


29세 단군 마휴(摩休) 9년��(B.C. 935) 南海의 조수가 3 척이나 물러갔다 (丙戌九年南海潮水退三尺 檀君世紀)

가장 강한 조석력(潮汐力)이 발생한 것은 기원전 931년��이다(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5세 檀君 丘乙(B.C. 2099년��에 즉위)이 10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삼(舊用癸亥而檀君邱乙始用甲子以十月爲上月是謂歲首 太白逸史 神市本紀)”은 걸 계산하면 摩休 9년��은 기원전 935년��이 아니라 기원전 936년��이 된다. 그러나 한해의 시작을 여러 번 변경 했다면, 西曆 변환이 간단치 않다.

한해의 시작을 변경하는 경우, 변경 직전 해가 언제나 1년��보다 짧은 것은 아니다. 변경 직전의 해에 변경 직후의 해를 합쳤다면, 그 해는 1년��이 넘는다. 게다가 檀君 丘乙 이후 음력 정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삼을 때까지 한해의 시작을 더 변경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10월��에서 다른 달로 변경 했다가, 다시 10월��로 변경한 후 1월��로 변경하면, 기록이 남지 않는 이상, 한해의 시작을 변경했는지 안했는지 알 길이 없다. 한해의 시작을 여러 번 바꾸면서 한해가 1년��보다 긴 적이 摩休 9년�� 이전에 몇 번 있다면, 摩休 9년은 기원전 931년에 근접한다. 摩休 9년�� 이후 한해가 1년��보다 짧은 적이 몇 번 있다면, 오늘날의 西曆과 일치한다.

어째서 한해의 시작을 빈번히 바꾸었을까. 우리나라 역사책을 뜯어고친 書經의 “日月星辰을 역상(曆象)하여 삼가 백성에게 때를 알린다(曆象日月星辰敬授人時)”는 기사처럼, 이 당시는 아직 정확한 曆法이 완성되기 전이었다. 太陰曆의 1년��은 354 일로 윤일, 윤달을 삽입하기 까지 해를 거듭할수록 節期가 어긋난다. 시차가 누적되면, 윤일, 윤달을 삽입하거나 한해의 시작을 바꾸어야 했다. 이 당시에는 年號를 사용하지 않았다. 高句麗 이래로 황제 즉위시에 새 年號를 정한 것처럼 檀君 즉위를 기념하여 한해의 시작을 바꾸는 쪽을 택한 것이 아닐까. 檀君 在位 중에는 윤일이나 윤달을 삽입하고.

어쩌면 기록의 오류 즉 摩休 9년��의 기록이 아닌지도 모른다. 潮汐力이 최대가 되었을 당시, 潮水가 4척, 5척 물러났을 가능성도 있다. 즉 “29世�� 檀君 摩休 9년�� 南海의 潮水가 3 尺이나 물러갔다.”는 潮汐力이 최대가 된 시점의 기록이 아닐 수도 있다. 방대한 분량 이었다면 여러 해의 변동사항을 상세히 기록 했겠지만, 공개된 檀君世紀는 원본도 아니고, 극히 간략한 요약본이다.


▲ 충북 청원 아득이 고인돌에서 나온 성혈도(星穴圖)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가호리 아득이 마을에서 발견된 고인돌에는 246 개의 성혈이 새겨져 있다. 각 성혈의 지름도 13∼17 cm에 달하는 큰 싸이즈에서부터 6∼7 cm의 중간 크기, 2 cm의 작은 크기 등 다양하다. 아득히 고인돌의 덮개돌에 새겨진 성혈은 피장자의 후손집단 크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 동안 이해되어 왔으나 별자리로 보는 새로운 시각이 제시되어 재검토되고 있다.

무엇보다 이곳 고인돌군에서 주목되는 것은 석실에서 발견된 돌판이다. 이 돌판에는 60 여개의 구멍이 뚫려져 있는데, 돌판의 가운데를 중심으로 원을 그려보면 몇 개의 원 안에 각각의 구멍이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혈은 가로와 세로 32.6 cm, 23.5 cm 크기의 돌판에 7 mm 지름의 구멍이 2 개, 5 mm 지름의 구멍이 14 개, 3.5 mm 지름의 구멍이 39 개, 아주 작은 2 mm의 구멍이 5 개가 뚫려 있는데 가까운 구멍끼리 선으로 연결 시켜 보면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득이 돌판 구멍들의 분포를 살펴보면 왼쪽 아래에서 북두칠성과 같은 배열을 이루는 7 개의 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배열은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북두칠성의 모습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다. 북두칠성은 칠성신앙과 관련되는 별인데 칠성은 사람의 탄생과 길흉화복을 주관 한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칠성판 위에 안치 하는데 생(生)과 사(死)를 인도하는 별자리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고대 별자리 찾기판과 현대 컴퓨터 재생작업을 통해 아득이 돌판에서 찾아낸 별자리로는 작은곰자리·용자리·세페우스 자리 등이 있다.

우리나라 천문 및 기상관측은 철기시대에 들어와 시작된 것이 아니다. 고인돌의 별자리 그림들, 발굴해낸 아득이 돌판 천문도(1978년�� 충북 청원군 문의면 가호리 아득이말의 고인돌 유적에서 조그마한 돌판이 별견 되었는데 60 여개의 별들이 그려진 천문도임이 밝혀졌다) 등은 청동기 시대부터 우리나라에 독자적인 천문학이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배달 開天 당시 曆法(육계;六癸)을 제정했다.

六癸는 神市氏로부터 신지(神誌)에 명하여 만든 것으로써 癸로 세수(歲首)를 삼았다(六癸自神市氏命神誌所製而以癸爲首 太白逸史 神市本紀) 이는 우리민족이 한국시대(桓國時代)부터 천문관측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맨 처음으로 천문 관측한 나라였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뛰어난 실현율을 자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우리 민족의 천문지식은 세계적 수준을 자랑한다. 첨성대(瞻星臺 : 편자는 경주에 있는 첨성대에 대해서는 그 효용을 의심하고 있다. 차후에 한 번 집고 넘어가 볼 심산이다)가세계 최고의 천문대다. 711 개에 달하는 수많은 오로라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갈릴레이 갈릴레오보다 1000 여년이나 앞선 태양 흑점 관찰 기록을 가진 민족이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함께 세계에서 유일하게 2000년�� 이상 꾸준히 천문현상을 체계적으로 관측하여 방대한 기록을 남긴 천문왕국이다. 서구의 천문관측의 역사는 고작 300년��에 불과하다. 기원전 5000년��경 부터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등을 새긴 고인돌이 북한 지역에 남아 있다(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711 개의 오로라(aurora) 기록은 우리나라가 관측한 오로라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보나마나 李氏朝鮮은 한반도에서 관측한 오로라만 남겨 두었다.

우리나라는 天孫民族이라는 높은 긍지로 天文觀測을 해왔다. 그래서 우리나라 천문기록은 실현율이 높다. 中國이 천문관측할 줄 몰랐음은 일식기록조차 남의 것을 베끼고 曆法조차 남의 역법을 이름만 바꿔 부른 데서도 

수 있다.

일식기록만으로도 우리나라의 강역이 최소한 朝鮮時代 이래로 동아시아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日本이 베낀 일식기록 만으로도 李氏朝鮮 이후 中國이 역사를 날조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3) 재위 90여년�� 동안, 천하는 공허롭게 넓기에 즐거움을 잊고 지냈다.

朝鮮時代의 일식기록은 朝鮮史가 공간적으로 동아시아를 무대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朝鮮은 우리나라 강역을 재통합했지, 우리나라 강역을 넓힌 것은 아니다. 朝鮮은 우리나라 疆域 일부에서 개국했다.

이때에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그 수가 많았다. 국경은 동쪽이 滄海, 서쪽은 遼西, 남쪽은 南海, 북쪽은 서비로(西毘盧)에 이르렀다(檀奇古史)

2世�� 檀君 부루(扶婁) 때의 우리나라 영토로 기술되어 있지만, 神人王儉 당시 이미 全 東아시아로 영토를 넓혔을 가능성이 높다. 檀奇古史는 檀君世紀를 토대로 날조 하면서 기사도 옮겼다. 예를 들어 神人王儉 때의 홍수 기사를 2世�� 檀君 扶婁 때의 기사로 고치는 것은 물론, 각기 다른 기사1)를 하나로 합쳤다.

甲戌 67년��(B.C. 2267) 단군(신인왕검)께서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공(虞司空)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五行治水法을 전하여 주었다(甲戌六十七年帝遣太子夫婁與虞司公會于塗山太子傳五行治水之法)

丁巳 50년��(B.C. 2284)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쉴 수가 없었다. 단제께서는 풍백(風伯)인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 강을 평정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으니 우수주(牛首州)에 그 비석이 있다(丁巳五十年洪水汎濫民不得息帝命風伯彭虞治水定高山大川以便民居牛首州有碑 檀君世紀)

그때에 홍수가 9년�� 동안 천하에 범람하여 中土는 禹가 치수하는데 곤란을 겪고, 朝鮮은 팽우(彭虞)에게 치수를 맡겨 치수가 완료되니, 우(禹)가 塗山會議를 각 나라에 요청하였다. 임금(夫婁)께서는 彭虞를 특명대사로 삼아 禹에게 보내어 치수하는 법을 설명하셨다(檀奇古史)

시간적으로도 檀君世紀, 檀奇古史에 나오는 천문기록의 천문역학적 계산을 통해 밝혀낸 朝鮮史는 유물 발견으로 증명된 朝鮮史와 일치한다. 우리나라 靑銅器 時代는 기원전 27세기 까지 밝혀져 있다. 朝鮮의 개국 연대는 문헌상에 나와 있는 대로 기원전 24세기였던 것이다. 고고학상으로 우리나라의 철기문명 진입시기는 기원전 15세기 까지 밝혀져 있고, 문헌상으로는 기원전 27세기로 기록되어 있다. 배달 慈烏支 桓雄 때 철을 주조하고 병기를 만든 기록이 三聖紀全 下篇, 太白逸史 등에 있다.

◀산동성 능양하 유적에서 출토된 조선 특유의 팽이형 토기 신용하 교수가 아사달 문양으로 추정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中國의 경우 서기전 9세기에서 서기전 11세기에 속하는 서주(西周) 초기의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장식단추를 전의(戰衣)에 달아 방어용 갑옷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중국학자들은 이를 중국 갑옷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朝鮮의 청동장식단추 생산연대는 중국보다 무려 16세기 정도나 앞선다. 따라서 중국의 청동장식단추는 朝鮮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철기시대 개시 역시 만주지역이 황하유역 보다 앞선다. 평양지역의 강동군 송산리 1 호묘에서 서기전 12세기 경의 강철로 만든 석경이 출토 되었는데 강철은 연철이나 선철의 생산공정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朝鮮의 철기 생산 개시 연대는 이보다 몇 백년�� 앞설 것이라고 박교수는 앞의 논문에서 지적했다.

中國은 서기전 6세기경까지 생철이 그대로 생산되어 제철제강 기술은 거의 발달하지 않았던 반면 朝鮮은 같은 시기에 거의 모든 지역에서 주철을 생산하기 시작 하였고, 주철로 부터 연철·신철·강철 등을 생산하여 투구와 공구 및 농기구 등에 널리 사용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朝鮮이 뼈갑옷이나 가죽갑옷, 철갑옷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독자적으로 생산 했으며, 이 우수한 갑옷기술과 철기문화가 그대로 열국시대로 계승 되었다고 밝혔다.

朝鮮은 청동기와 철기 시대를 먼저 열었고, 제련기술도 앞서 갔다. 이는 朝鮮이 선진문화·기술국가였을 뿐 아니라 그에 걸맞는 무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대조선(大朝鮮)이 가능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원출처 : 열국시대의 갑옷-고조선 갑옷의 발전에 관한 시론, 박선희)

위치상으로 우리나라와 中國이 아니라, 배달의 도읍 神市가 있던 동북아와 靑邱國이 있던 黃河 하류와의 유물 비교이다. 神人王儉이 三韓으로 나누고 나서부터는 辰韓지역 이었지만, 중심지에서는 비켜나 있었다.

무력과 기술에서 앞선 대제국 朝鮮이 고작 동북아만을 지배할 리는 없다. 무력과 기술에서 열등한 中國이 동아시아 대부분을 지배할 수는 없다. 철을 주조하고 병기를 만들어 정복에 나선 우리나라가 강대국인가, 정복자를 두고 “머리는 구리로 되고 이마는 쇠로 되었다(銅頭鐵額)”고 실성한 듯 헛소리 해댄 中國이 강대국인가.

이 당시는 영토 크기와 인구가 곧 그 나라의 국력이었다. 영토가 크면 당연히 인구도 많았다. 아무리 天孫民族이라 주장해도 영토가 턱없이 작다면, 비웃음이나 당할까, 上國으로 군림할 수가 없다. 거대 영토가 뒷받침 되었기에 天孫民族 으로서 上國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식관측지로 보듯, 高句麗를 비롯한 三國이 中國 대륙에서 건국한 것은, 三國의 영토가 동아시아에 걸쳐 있었던 것은 三國 이전의 국가가 동아시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中國 대륙에서 관측한 朝鮮의 일식기록이다. 朝鮮의 일식기록은 朝鮮의 강역 역시 동아시아였음을 알려준다. 우리나라는 배달시대 이래로 동아시아를 강역으로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와 中國(?)의 일식기록은 현재 알려진 역사가 전면적으로 왜곡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 신시 및 청구시대의 지명

黑水와 白水 사이에 있는 현 黃河 유역은 배달 개천 당시부터 우리나라 영토였다. 단 중심지 神市는 동북아에 있었다. 자오지한웅(慈烏支桓雄 : 蚩于天皇)이 중국 대륙으로 중심지를 옮기고 나서도 기원전 18년��까지 黃河 하류는 중심지가 아니었다2). 배달 및 朝鮮 시대에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평화로웠다. 더구나 우리의 적은 내륙의 중국 이었으므로 黃河 하류에서 무기나 갑옷을 만들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없었다. 기원전 18년 溫祚가 나라를 세우고 나서 黃河 하류는 우리나라 중심지의 하나로 부상했고, 바로 옆에 있는 高句麗와 기나긴 전쟁에 돌입했다.

결론적으로 고고학적 유물만 봐도 中國文化가 우리나라 문화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가 중국문화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文明은 배달과 朝鮮에서 동아시아 너머로 퍼져나간 것이다. 요컨대 우리나라 문화는 고유문화이고, 중국의 문화는 우리나라 문화 위에서 성립한 寄生文化이다.

▲ 조선 문화의 상징 중 하나인 비파형동검과 예술적 감각이 돋보이는 꺽창. 특히 길이가 80.3 cm에 이르는 꺽창은 중원문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이다. 능하문화 시기의 청동기인 잔줄무늬 거울.하가점 하층문화 시기의세발솥은세련된 솜씨를 보인다 (왼쪽부터).

영금하(英金河)와 음하(陰河) 같은 강 주변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70 여개의 성곽이 발견됐다.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 시대에 속하는 지역으로 이들 성곽이 자리잡고 있는 형태를 보면, 3 만평 정도 되는 큰 성을 중심으로 그보다 규모가 작은 성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다.

인류학에서는 권력의 발생 혹은 국가(state) 발생의 중요한 징표로 성곽을 꼽는다. 기원전 24세기에 개막해 기원전 15세기 까지 번성한 夏家店 하층문화 시대에 강력한 국가 체제를 형성했던 집단은 바로 조선이었다.(요서지역의 청동기 문화 연구)

‘遼西地域의 靑銅器 文化 硏究’는 수수께끼 같은 책이다. 현 遼西 지역이 기원전 2400년��경 까지 신석기 문화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神市에서 비교적 가까운 지역이라 배달이 開天한 기원전 40세기에는 청동기문화로 이행한 지역이다.

“기원전 24세기에 개막해 기원전 15세기 까지 번성한 문화”는 국가체계를 형성했던 집단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기원전 2400년��은 철기시대였다. 현 遼西 지역 청동기문화의 연대측정은 중국의 주장일 것이다. 이 땅은 기원전 3898년��에 국가가 성립한 지역이다. 동북공정. 국가주도로 역사날조 프로젝트를 추진, 천문학적 금액을 쏟아 부어 마지막 남은 韓文明史까지 훔치려 하는 中國이다. 기원전 40세기의 유적, 유물이 나온다고 해도 中國이 감추거나 파괴할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일식관측지가 말해주듯 朝鮮의 疆域은 동아시아다. 朝鮮의 중심지는 시종일관 中國 대륙이었다. 朝鮮은 국호만 바꾸고, 도읍지(중국 대륙에서 중국 대륙으로)만 옮겼을 뿐이다. 神人王儉의 부친은 배달의 마지막 통치자 檀雄(居弗檀桓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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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터전 韓大陸은 동아시아를 가리킨다.

재위 90 여년 동안, 천하는 공허롭게 넓기에 즐거움을 잊고 지냈다 (在位九十餘載天下呺呺然忘其樂焉)

거짓말의 향연 같은 규원사화(揆園史話)에도 몇 번인가 사실을 기술했다. 저 글도 그 중 하나다. 한반도와 그 이북만으로 “공허롭게 넓”은 천하라 할 수 있는가. 고작 韓半島와 그 이북을 다스리기에 바빠서 즐거움을 잊고 지냈던가. 神人王儉 당시의 천하는 동아시아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천문기록과 기상기록도 동아시아에 걸쳐 발생했던 것이다.

신라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29년��(A.D.108)에 “홍수로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10 道에 사신을 보내 창고를 열어 구제토록 했다(二十九年 夏五月 大水 民飢 發使十道 開倉賑給 三國史記)” 같은 해, 百濟3)에서는 “봄, 여름에 가뭄이 있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三十二年 春夏旱年饑民相食)”

이 기록은 한반도에서는 절대 발생할 수 없다. 북반구에서는 기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므로 대륙에서 습기가 많고 규모가 큰 저기압이 황해를 건너오면, 도중에 바다에서 수분을 공급받아 백제 영토에 우선 홍수를 뿌려야 한다.

6개월씩이나 지속적인 가뭄 현상을 일으키는 氣團(블로킹 기단)은 그 규모가 최소한 수백 km에서 수천 km의 반경을 유지하며 요지부동이거나 이동속도가 아주 느린 특성이 있다. 블로킹 기단(blocking 氣團)은 강수현상을 일으키는 공기 덩어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범위가 크고 넓다. 半島史 대로라면, 백제뿐 아니라, 홍수상황에 있는 신라와 고구려까지 가뭄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 백제 지역에서 대규모 홍수가 나고 신라지역에서 가뭄이 들었다고 한다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다(월간 신동아 97년�� 2월호)

弘益人間과 敬天愛人의 나라 배달과 朝鮮의 계승국에서 흉년이 들었다고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기록은 심히 의문이다. 반면 미개 華夏族 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게다가 中土는 기후조건상 매년 흉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원래 농사가 안 되는 땅이다. 아마도 中土의 미개민들의 행동을 슬쩍 우리역사에 집어넣은 것처럼 보인다.

전직 기상관 정용석 선생에 의하면, 三國史記에 나타난 기상관측 기록들도 中國 대륙에서나 가능하다고 한다.

“新羅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9년��(A.D. 192) 3월��에 서울에 눈이 내려 세 자나 쌓였다. 여름 5월��에 홍수가 나서 10 여 곳의 산이 무너졌다(三月 京都雪 深三尺 夏五月 大水 山崩十餘所 三國史記).”, “신라 내해 이사금(奈解尼師今) 34년��(A.D. 229), 겨울 10월��에 큰 눈이 내려 깊이가 5 자나 되었다(冬十月 大雪 深五尺 三國史記)” 음력 3월��은 양력으로 4월��, 5월��이다. 한반도 남부는 4월��, 5월��까지 눈이 내리는 곳이 없다. 지금의 경주는 따뜻한 해양성 기후라, 4, 5월��에 눈이 3 자나 내려 극심한 피해를 주는 기상이변은 발생할 수가 없다(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일식기록으로 나타난 新羅의 수도 金城은 현 武漢이다. 호북성(湖北省)의 여름은 고온다습한데, 3 자, 5 자나 눈이 내릴 수 있을까. 반면 中土는 눈이 엄청 내리는 기후다. 中國史를 슬쩍 집어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천문기록은 의미를 모른다고 해도 추울 때 눈이 내리는 것은 누구나 아니까.

半島史에서 新羅에 큰 눈이 내려 깊이가 5 자나 되었다면, 홍수 때의 공기이동처럼 百濟 땅에도 더 많은 눈이 내려야 한다. 湖南의 기상현상은 嶺南지방보다 대개 1 개월 이상 빨리 내리고 늦게까지 내린다. 그런데 같은 시기 百濟 구수제(仇首帝)는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百濟는 저위도 내륙에도 영토를 가진 나라로, 이 당시 百濟 皇帝는 현 黃河 하류나 발해만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저위도에서 사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주형 메뚜기 떼의 피해는 가뭄 뒤에 발생한다. 癸亥 2년��((B.C. 2093) 5월 황충(蝗蟲)의 떼가 크게 일어나 온통 밭과 들에 가득 찼다(癸亥二年五月蝗虫大作遍滿田野 檀君世紀). 甲戌 6년��(B.C. 767)에도 황충의 피해가 있었다(甲戌六年是歲有蝗蟲大水 檀君世紀). 普乙(46世�� 檀君) 15년��에 蝗蟲이 밭곡식을 다 먹어 버렸다(檀奇古史). 朝鮮만이 아니다. 三國도 이주형 메뚜기 떼의 공격을 자주 받았음이 三國史記에 나온다. 高麗史에는 24 회나 이주형 메뚜기 떼의 공격이 기록되어 있다.

◀ 메뚜기(蝗蟲) 떼들의 모습 (동아일보 사진)

대부분의 蝗蟲 피해는 高麗의 경기지방을 중심으로 서해도, 해주, 서북면, 북계 지방에서 발생한다는 한계가 있다. 주로 黃河지대 및 그 이북과 북서 지방에서 蝗蟲이 발생하는 것이다. 蝗蟲이 발생했다는 고려의 영역 중 대부분은 스텝 건조기후대와 건조기후대 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西海, 海州, 西北面이란 감숙성(甘肅省), 내몽고(內蒙古) 서쪽, 신강성(新疆省) 쪽을 말하는 것이며 대륙에서도 기후변동이 심하여 蝗蟲이 자주 발생하기로 유명했던 곳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구조는 3 면이 바다여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곳이라 언제나 강수량은 충분하고 바다 때문에 급격한 기후변동을 초래하지 않는 온난다습한 지역이다. 스텝건조기후대와 건조기후대에서 주로 발생하는 蝗蟲이 발생할 근본적인 조건과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두자.

가끔은 黃河 이남에서도 이주형 메뚜기의 피해가 발생했다. 高句麗와 百濟의 메뚜기 피해지역 가운데 나라 남쪽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시베리아에 이르는 영토를 가진 高句麗의 남쪽은 어딜까. 수도 이남(?) 장성 이북 지역으로 추정된다. 百濟의 경우는 504년��까지 수도가 남북에 두 군데 있었기 때문4)에 나라 남쪽은 남쪽 수도가 있는 지역이다. 내륙지방이라 일부를 제외하면 건조기후대에 속한다.

武漢을 중심으로 있던 新羅가 이주형 메뚜기의 피해를 입을 수 있을까. 揚子江과 漢水가 만나는 곳에는 수많은 호수가 널려 있다. 아열대 계절풍 기후대로 봄철엔 날씨 변화가 심하고, 여름은 고온다습하고, 가을은 쾌적하고, 겨울은 건조하고 춥다. 봄과 여름의 교차기에 장마가 있고, 연평균 강수량은 750~1500 mm이다. 그렇다면 건조한 겨울에만 황충의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데, 메뚜기도 곤충이라서 겨울에는 동면(알 상태로)을 한다. 게다가 三國史記에 보면, 新羅는 가을에만 그것도 거의 음력 7월��에 蝗蟲의 피해가 몰려 있다. (高句麗와 百濟는 주로 음력 8월��에 황충의 피해가 있었다) 三國史記에는 新羅가 이주형 메뚜기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것으로 나온다. 건국 초기부터 메뚜기의 피해가 기록되어 있다(南解次次雄 … 二十一年秋九月蝗 三國史記). 中國史 일부를 신라에 배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中土는 기후 조건상 이주형 메뚜기 떼의 피해가 거의 매년 발생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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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眞平王 31년��(509) 봄 3월에 모지악(毛只嶽)산의 땅이 탔다. 구덩이 너비가 4 보, 길이가 8 보, 깊이가 5 척이나 되었고, 10월�� 15 일 꺼졌다(毛只嶽下地燒 廣四步 長八步 深五尺 至十月十五日滅)”, “신라 武烈王 4년��(657) 가을 7월��에 동악 토함산의 땅이 타서 3년 만에 꺼졌다(東吐含山地燃 三年而滅).”

毛只嶽山의 비정(比定)은 이 땅의 사학자들조차 두 손 들었다(어디인지 위치를 모르고 설명도 못한다). 吐含山은 慶州에 있는 吐含山으로 본다. 경주에 화산활동의 흔적이 없는 탓에 이 땅의 사학자들은 천연가스의 폭발이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東海에 하이드레이트5)가 매장되어 있는 것이 전부다. 하이드레이트 아래에 천연가스와 원유층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긴 하다. 그런데 이 천연가스가 경주까지 매장돼 있을까. 이 천연가스가 지표로 분출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이드레이트 층을 뚫고, 거기서부터 해발 750 m의 토함산(吐含山)까지 뚫고 올라와야 한다.

그런데 근래 일본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속셈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그것은 독도에 미래의 에너지원으로 각광받을 메탄하이드레이트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메탄하이드레이트는 천연가스 주성분인 메탄을 함유하고 있는 얼음 상태의 물질로, 메탄 등의 가스 분자가 물분자 안으로 들어가서 만들어지는 기포 모양의 결정체이다. 간단하게 메탄가스가 얼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알래스카, 시베리아, 극지방 등의 영구 동토지역과 수심 500 m 이상의 해저 심층부에 매장되어 있다. 메탄하이드레이트는 매우 차갑지만 불에 타며 1ℓ 당 110ℓ의 메탄가스를 만들 수 있다.

메탄하이드레이트가 주목을 받는 것은 장래의 에너지원으로 개발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류의 주요 에너지 자원은 목재, 석탄, 석유로 변천 되었지만 앞으로는 천연가스가 주종을 이룰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사용되고 있는 천연가스는 석유나 석탄에 비하여 탄소를 포함하는 성분 비율이 작아서 연소했을 때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이 적고 유해 물질도 많이 배출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천연가스 역시 매장량에는 한정이 있어 2060년��경에는 고갈될 것으로 전문가들을 추측하고 있다.

반면에 전 세계에 매장되어 있는 메탄하이드레이트는 천연가스로 환산할 때 1000조에서 5 경 ㎥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현재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에너지의 200∼500년��에 해당하는 엄청난 량이다.

메탄하이드레이트가 알려진 것은 1930년��대 였지만 이 당시에는 원유나 천연가스가 풍부해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는데 요즈음 다시 각광을 받는 이유는 화석연료인 석탄, 원유 등 에너지 자원이 고갈되어 가는데다가 연소시 이산화탄소의 발생량이 석탄, 석유에 비해 절반에 불과한 청정에너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메탄하이드레이트는 석유자원이 매장되었는지를 알려주는 표시물이기도 하여 유전개발에 있어 매우 중요시되는 물질이다.

학자들은 시즈오카현(靜岡縣) 앞바다 에서만 6 조㎥의 메탄하이드레이트가 발견 되었으며6) 다른 지역보다 메탄 함유율이 20 %나 될 정도로 양질 인데다가 이를 추적하면 독도 주변 등 한반도 해역에 엄청난 양이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이 무리한 논리를 내세우면서 독도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 독도전경 : 일반적으로 일본이 독도에 집착하는 이유는 한국에 독도를 양보할 경우 ‘러시아가 차지한 북방 영토를 영원히 되찾지 못할 전례를 남길지 모른다’로 설명했다. 또한 중국과 분쟁이 있는 센가쿠 제도(尖閣諸島)에 대한 영유권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하여 자기네 땅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들 나름대로의 영토 확장 즉 ‘밑져야 본전’이란 식으로 생떼를 부린다는 것이다.

만약 慶州 吐含山에서 천연가스가 3년�� 동안이나 뿜었다고 한다면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 경주 토함산은 화강암석으로 이루어져 천연가스가 나올 수 있는 산이 아니다. 休火山도 아니다. 吐含山에서 천연가스가 분출했으면, 현재 우리나라는 석유와 천연가스를 수입할 필요가 없다.

전직 기상관 출신인 정용석 선생은 中國 안휘성(安徽省) 소호(巢湖)시 합비(合肥)라는 곳에 있는 含山이 三國史記에 기록된 吐含山일 가능성을 지적했다. 용암을 뿜어내는 活火山일 때는 吐含山이 되지만, 休火山일 때는 토(吐)하지 않기 때문에 함산(含山)으로 불렀을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含山은 화산활동을 한 적이 있는 휴화산이고, 그 인근의 合肥 지역은 화산활동의 여파로 토질이 좋아 작물이 잘 자란다. 天文記錄으로 찾은 韓國史 에서 合肥는 上代 新羅의 국경지대쯤으로 본다.

新羅는 지진 및 화산과 더불어 살아온 千年王國이다. 韓半島에서 화산활동이라곤 白頭山과 漢拏山이 전부다. 지금의 慶州 일대에 强震이나 화산이 발생한 적이 없는데도 이 땅의 사학자들은 현 慶州가 新羅의 수도라고 우긴다. 이제껏 우리나라 역사연구는 과학기록을 뺀 문헌의 억지해석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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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사학자들은 韓半島에 들어맞지 않은 三國史記 기록은 모조리 金富軾의 착각으로 돌린다. 金富軾이 한단사(桓檀史)를 생략했으니 三國史도 축소했다고 비난하지만, 金富軾이 쓴 것은 三國史記지, 桓檀史記가 아니다. 三國 건국에서 三國 멸망까지의 우리나라 역사다. 李氏朝鮮 초기까지도 桓檀史에 관한 책은 수십 종이었다. 日本이 빼돌린 桓檀 역사책은 51 종이나 된다. 金富軾은 한단사를 쓸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金富軾은 朝鮮史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평양(西京)은 본래 仙人王儉이 자리 잡은 곳이다(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三國史記).”고 말할 만큼.

더구나 金富軾이 三國史記에 桓檀史를 기술 했었다는 증거가 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多勿"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三國史記에 桓檀史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쓸 수 없는 대목이다.

현 三國史記는 李氏朝鮮의 시각에서 날조된 책이다. “주로 유교적 덕치주의, 군신의 행동, 事大的인 예절 등 유교적 명분과 春秋大義를 견지한 것이지만 반면에 한국 역사의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는 특징”을 가진 것은 明의 제후국을 자처한 李氏朝鮮이지, 동아시아에 군림한 皇帝國 高麗가 아니다. 三國史記가 날조되자, 李氏朝鮮의 시각도 고정되고 말았던 것이다. 三國史記는 明이 날조했다는 점에서 “주로 儒敎的 德治主義, 君臣의 행동, 事大的인 禮節 등 儒敎的 名分과 春秋大義를 견지한 것이지만 반면에 한국 역사의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는 특징”은 明이 제시한 李氏朝鮮의 통치지침 이었다. 삼국사기는 明과 李氏朝鮮에 의해 날조되고 왜곡되었다.

실상 三國史記에는 “한국 역사의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는 특징”도 없는데 李氏朝鮮은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라 자처했다. “지금에 있어서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스스로를 ‘소중화’라고 뽐내고 있다(而今 夫 人囂囂然以小華自耀 肯認 揆園史話)." “산의 조종을 곤륜산(崑崙山)이라 떠들어대며 기분 좋아하며, 소중화를 가지고 스스로 달래며 만족한다(唱山之祖宗崑崙欣欣然以小中華自甘宜 太白逸史)."

小中華에 대하여 이를 事大主義의 다른 표현 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우리 조상들의 역사를 정통으로 잇고 있다는 표현으로 이해한다면 즉, 중화의 땅을 지배해야 할 어떤 당위성의 시각으로 볼 수 있다면 그렇게 비난 받을 일은 아닌듯 싶습니다(편자주).

▲ 중국역사부도에 나와있는 고구려의 강역도

우리 上古史와 三國時代및 高麗史는 李氏朝鮮에 의해 무참하게 날조되고 폄하 되었습니다. 제가 李氏朝鮮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일제하 식민사관의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역사에 朝鮮은 하나입니다. 단지 후대에 三朝鮮

있었고, 李氏가 있었고, 지금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있을 뿐이지만, 우리역사 속에 朝鮮은 하나입니다. 李氏朝鮮이라는 나무로 인해 大 朝鮮의 숲을 못볼까 우려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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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어디에도 高句麗가 자부심의 나라라는 얘기는 없다. 오히려 수시로 中國에 ‘朝貢’하고 ‘君公’에 봉해졌다고 나온다. 高句麗가 대단한 자부심의 나라라는 얘기는 이 땅의 사학자라는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고는 우리나라 벽화에 표현돼 있다. 하지만 高句麗 벽화가 아니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朝貢이 대등한 외교활동이라 치부하나, 헛소리다. ‘君公’에 봉해지는 나라가 독립국이라 자부할 수 있는가. 君公에 봉해졌다는 것은 속국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땅의 사학자들은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인다. 형식적이었다니, 天子를 예우해서 였다니…….

그러나 中土의 나라들이 君公 및 王에 봉해졌던 내내 우리나라 속국이었다. 百濟 皇帝를 君公에 봉할 수가 없어서, 皇帝보다 더 높다는 뜻으로 廣開土境好‘太皇’1),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 문자호‘태열제’(文咨好太烈帝)라 했던 것이다.

新羅 皇帝는 신하를 君公도 아니고 君王에 봉했다. 원성제(元聖帝)는 황위쟁탈전에서 패한 金周元을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했다. 王이 王을 封할 수 있나? 통치자는 君公이고, 신하는 君王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新羅의 최고통치자가 皇帝였기 때문에 자신의 신하를 君王에 봉할 수 있었다. 新羅가 동아시아를 통일했을 당시 新羅는 天子國이었다. 그래서 日本이 植民母國 百濟를 멸망시킨 新羅에 서둘러 조공했다. 제1의 강대국이 天子國의 지위를 획득했던 것이다.

‘朝貢 받았다’가 ‘朝貢 했다’로 날조됐다. 그래서 廣開土境好太皇이 동아시아를 제패했음에도 그 아들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는 中國에 조공하느라 세월 다 보내야 했던 것이다. 長壽弘濟好太烈帝 재위 79년�� 동안에 47 회나 조공했다고 나온다. 실제의 우리나라 역사책은 방대한 문헌이기에 中國은 三國에 훨씬 더 많이 조공했다. 中國은 三國의 皇帝에게 돌아가며 朝貢하고 ‘君公’으로 封함을 받았다.

中國은 우리나라에 얼마나 朝貢을 했을까. 이에 대한 근거가 바로 日本이 李氏朝鮮에 朝貢한 햇수다. 李氏朝鮮 전기(임진왜란 이전 2 백년)에만 무려 4,800 여건의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 거추사(巨酋使), 규슈(九州)탐제사와 대마도주특송사(對馬島主特送使), 제추사 등 온갖 명칭의 倭奴使節을 보냈다.

역사기록의 무수한 모순. 날조됐다는 뜻이다. 역사날조는 절대 어렵게 하지 못한다. 기초 수학공식처럼 간단하지 못하면 불가능한 것이 역사날조다. 방대한 양과 기사 상호 간의 관련성을 참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순이 발생한다.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수천, 수만 번의 거짓말을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다.

우리나라 역사말살에 앞장선 나라는 바로 李氏朝鮮이었다. 李成桂가 우리나라 영토를 朱元璋 등에게 주고, 우리나라 역사를 중국사와 맞바꾸었다는 증거는 너무 많아서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 역사를
중국사와 맞바꾸었다는 증거

우선 日本이 베낀 일식기록부터 李氏朝鮮이 우리나라 일식기록을 삭제했음을 증명한다. 高麗나 三國 등이 16세기의 일식기록을 삭제할 수는 없다. 日本이 만주에서 관측한 일식기록을 베낀 것(1343년��부터 1599년��까지)은 李氏朝鮮이 이미 만주의 일식기록을 지웠기 때문이다.

과연 韓國史와 中國史를 뒤바꾸는 것이 가능한가. 물론이다. 단지 서로의 역사를 바꾸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수천 년��의 역사를 순수 창작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바꾸는 것은 간단하다(요즘은 회사의 M&A라는 것이 있다. 악의적 M&A도 있지만,, 국가 간의 역사 바꿔치기가 李成桂의 李氏朝鮮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민족사 죽이기와 역사서 탈취 및 焚書가 李氏朝鮮 전반기를 통하여 자행되었다).

지명도 간단히 바꿀 수 있다. 중국 대륙, 아니 東아시아는 아주 아주 이상한 지형이다. 큰 지형의 축소판이 숨어 있다. 中國은 그 축소판 지형에서 살았고, 살던 곳에서 벗어났을 때, 살던 곳의 지명을 중국 대륙 전체에, 동아시아 전체에 너무도 쉽사리 재배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랑케가 실증사학을 외치기 4 백년도 훨씬 전에 이미 華夏族과 예맥족(濊貊族)은 실증사학에 부합하도록 中國史와 우리나라 역사를 바꾸었다. 우리나라가 실증사학에 따라 5300년�� 전부터 충실하게 역사를 기록해왔기 때문이다.

明은 小國이었다. 李成桂가 우리나라 영토를 포기할 때까지 中國 대대로 살아온 中土(史記에는 “東夷는 대륙의 동쪽에, 華夏族은 대륙의 서쪽에 있다” 했지만, 中國은 中國 大陸 西部조차 다 차지하지 못했다)에 갇혀 있었다. 기어나온 땅도 고작해야 현 揚子江 이남이었다.

中土에다 여러 異民族들이 세운 나라를 中國의 왕조로 둔갑시키는 작업에 착수한 것은 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明 때부터 했다.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이민족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異民族의 나라를 中國에 포함 시키지 않으면 아무리 문명대국으로 날조해도 中國史는 단속적인 역사, 피지배 종족사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華夏를 漢族이라 날조한 것이다.

秦始王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 漢民族史의 일부인 中國 上古史를 말살함으로써 노예사로서의 中國史를 지우려 했다고? 唐太宗 李世民이 중화사상에 일치시키기 위해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소각하고 중국 역사책을 개찬했다고? 唐高王 이치(李治)가 멸망한 高句麗, 百濟의 역사서를 분서했다고? 거란(契丹)이 大震國 역사서를 분서했다고?

꿈도 꿀 수 없었다. 李成桂가 지어낸 말이다. 明이 우리나라 역사의 대부분을 빼내가자, 둘러댄 것이다. 未開 小國 唐이 高句麗, 百濟 역사를 빼내 自國史를 찬란하게 고칠 수는 없다. 高句麗, 百濟 역사서를 분서했다면, 新羅가 주도해야 한다. 그러나 高麗조차 “우리 천수(天授) 太祖(王建)께서 창업의 바탕으로 高句麗의 多勿이 나라를 세운 풍도(風道)를  계승 하였다(我天授太祖以創業之資承高句麗多勿立國之餘風).” 고 천명했다. 高麗 末까지 우리나라에는 三國의 역사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전역사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쿄 기요히코(吾鄕淸彦)는 일본 신대(神代)문자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司馬遷의 史記 25 권은 檀君朝鮮이 中國 대륙을 지배 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中國이 檀君朝鮮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 한나라의 漢이라는 국호 자체도 옛날 삼한 조선의 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간 것에 불과하다.

천문기록조차 모조리 베꼈다. 하지만 朝鮮史와 中國史를 뒤바꾼 것은 司馬遷이 아니고, 朱元璋이다. 朱元璋은 朝鮮史만 훔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 역사를 훔쳤다.


최근 百濟는 동방의 로마(얼마 전에 열린, 학술대회 주제)라는 위치까지 끌어 올려졌다. 그러나 그들은 百濟의 실체를 모른다. 로마가 서방의 百濟였던 것이다.

高句麗가 廣開土境好太皇 이전까지 中國 대륙에서 南進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은 허구의 漢四郡 때문이 아니라, 百濟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高句麗는 5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4세기 까지는 百濟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百濟의 전성기는 高句麗의 전성기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百濟는 4세기 까지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이었다.

百濟가 얼마나 강대했는지는 西鴨綠江(일명 遼水)의 위치를 찾아내면 드러난다. 국력이 뒷받침 되었기에 高句麗가 차지한 西鴨綠江 서쪽의 땅조차 획득했던 것이다. 廣開土境好太皇은 그런 강대한 百濟를 정복했다. 太皇. 百濟 皇帝보다 우위에 있다고 해서 붙인 호칭이다.

中國의 歷史歪曲을 걷어내면, 新羅가 三國을 통일했다는 사실만이 남는다. 百濟에 이어 高句麗는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이 되었지만, 이윽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新羅였다.

新羅는 분명히 국력의 우위로 三國을 통일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新羅가 강성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百濟와 高句麗의 정치가 혼란스러워도 三國을 통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新羅가 얼마나 강성 했는지는 西鴨綠江의 위치를 찾아내면 드러난다. 西鴨綠江을 차지한 것은 高句麗지만, 그 高句麗를 무너뜨린 것은 바로 新羅이니까.

단언하지만, 西鴨綠江은 三國의 실체만이 아니라, 中國의 실체도 파악할 수 있는,世��界史에서 가장 중요한 江이다.